- 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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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칼럼은 변화경영연구소 2기 연구원 정재엽 님의 글입니다.
얼마 전 친구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문학작품을 녹음하는데, 작품을 읽어줄 봉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뜻밖의 제안을 해 준 것에 감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제안을 저에게 해 준 것에 대해서 의아해했습니다. 왜 저를 선택했냐는 저의 질문에 친구는 의외의 답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뭘 읽어주어야 할지 몰라서야.”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답에 피식,하고 웃긴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제대로 된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복지시설과 봉사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작품을 선택할까, 하다가 기 드 모파상의 단편집에 있는 <손>이라는 작품을 읽기로 결정했습니다. 작품 속 살인사건과 벽에 걸려있는 엽기적인 손의 이미지가 듣는이의 상상을 자극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 레몽 장의 소설 <책 읽어주는 여자>라는 책의 주인공 마리 콩스탕스 G가 처음 읽었던 작품이 바로 모파상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책을 읽어주는 직업’을 지닌 마리라는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마리는 친구로부터 가정에 방문하여 책을 읽어주는 직접을 가져보는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고, 신문 광고를 냅니다. 처음에는 반응이 영 시큰둥합니다. 신문 광고 직원도 그런 직업을 내 줄수 없다고 할 정도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마리는 ‘책 읽어주는 직업’을 광고를 내는데 성공하고, 하나둘씩 고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 첫번째 고객은 하반신 불구자인 14세 소년입니다. 마리가 읽어주기로 선택한 첫번째 책이 바로 앞서 잠시 소개한 모파상의 <손>입니다. 그 첫번째 반응은 어땠을 까요? 휠체어에 앉아있던 소년은 발작 증세를 일으키고 맙니다. 그러나, 소년은 지속적으로 마리에게 방문과 책읽기를 기대하고, 사춘기 소년이 가지는 성적 호기심을 그녀에게 간접적으로 해소하기도 합니다. 그 후, 마리는 장군 부인, 독신 사업가, 8살 된 소녀와 같은 다양한 고객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 칼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클로드 시몽의 <사물들의 교환>, 그리고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등을 읽어줍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유괴범으로 몰리기도 하고,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도 하며, 심지어는 성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유머와 재치, 그리고 에로틱한 장면까지도 서슴없이 구사하는 이 작품은 책이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마치 한편의 희극을 보듯이 과장된 사건전개로 보여줍니다.
마리가 고객들에게 읽어준 책에는 각자의 상황이나 열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모파상을 통해 14살 소년은 판타지적 감성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고, 마르크스의 책은 병석이 누운 귀부인에게 혁명의 욕망을 불지르기도 합니다. 비즈니스를 하는 이에게 문학은 욕정의 불씨를 지폈으며, 초등학생 아이에게는 환상적인 동화의 나라를 꿈꾸게 합니다. 일회성의 발화로 책을 읽어주는, 어찌보면 구시대적인 독서 방법은, 그러나 책을 ‘읽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깊은 교감을 끌어냅니다.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낭독자의 감정이 듣는 이에게 전달되면서 ‘책 내용’은 둘 사이의 대화와 공감을 위한 여지를 제공하게 되고, 이는 직접적인 대화와는 또 다른 형태의 위로와 치유를 해줍니다.
롤랑 바르트가 지적했듯이, 독자로서 우리들은 책과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됩니다. 책은 단순히 저자의 생각이나 상상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닙니다. 독자는 단어나 문장에 고정된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권의 책이 사람의 일생을 바꾸기도 하고, 서로 다른 세대가 바로 이 ‘책’을 통해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요즘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MP3 파일로 오디오 북을 손쉽게 다운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있으면, 책이 물질로서 뿐 아니라 아직도 정신적인 가치를 지녔음을 새삼 느끼게 해 줍니다.
녹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녹음했던 파일을 들어보았습니다. 제가 읽었던 그 문학은 더 이상 모파상의 <손>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읽었던 그 텍스트는 이제 어떤 이의 귀에 흘러가 상상의 좋은 재료가 되겠지요. 그 상상이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고, 좋은 열매가 되어 무럭무럭 자라나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하게 되기를 가만히 빌어보았습니다.
- 글쓴이 : 정재엽 smilejay@hotmail.com, 변화경영연구소 2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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