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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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수록 봄이 좋아진다. 죽은 대지 위에 생명은 다시 푸르게 밀려오고, 꽃은 앞 다투어 피어난다. 짝짓기를 시작하는 새들의 소리가 시끄러워 지고, 마음은 산과 계곡과 하늘을 구름처럼 떠다닌다. 그 러나 역시 봄은 대지로부터 온다. 풀이 나기 시작한다. 풀이 생명을 시작한다.
식물이 동물과 다른 것은 스스로 먹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비하면 동물은 의존적이다. 스스로 먹이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다른 생명을 먹음으로써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 동물이다. 사람도 그렇다. 다른 살아있는 것을 잡아먹어야 생명이 유지되는 비극이 바로 인간의 삶의 조건이다. 그러나 동물과 인간이 같은 것이 아니다. 장금이 - 우리 집 개이름이다 - 는 긴 털이 달린 가죽 하나로 긴 겨울을 난다. 이놈은 개집 안에서 자지도 않는다. 그저 떨어진 낙엽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코를 제 뒷다리 사이에 파묻은 다음 쿨쿨 잔다. 우리가 나오지 않는 기름을 펑펑 떼며 겨울을 나는 동안, 우리집 장금이는 그렇게 소박하게 제 누런색 가죽코트 하나로 거뜬히 겨울을 난다. 동물은 인간과 달리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장금이 보다 더 복잡한 의존적 삶을 살고 있듯이 인간 역시 동물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삶의 방식을 취한다. 우리를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들은 무척 많지만 금융과 관계하여 되짚어 보아야 할 인간의 특성 세 가지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알아보자. 만일 이 세 가지 본성을 현명하게 다룰 수 있다면 금융은 매우 훌륭한 사회적 경제적 역할을 계속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다.
금융은 탐욕을 다루는 산업이다. 탐욕은 인간의 본성이다. 많이 갖고 싶어 하고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한다. 법정 스님이 무소유를 주장한 것은 그것이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주장할 필요도 없다. 이미 지켜지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금융 산업의 주요 롤 플레이어들은 미다스의 황금 손이 되고 싶어 한다. 프리기아의 왕이었던 미다스는 신에게 소원하여 만지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하였으나 한 덩어리의 빵도 한 모금의 물도 마실 수 없게 되자 다시 신에게 간청하여 겨우 정상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미다스의 신화는 성공의 신화가 아니라 비극의 신화라는 것을 재인식해야한다. 세계적인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안과 의혹은 이 탐욕의 결과이다. 월가에서의 시위는 '99%를 위한 금융'을 원하고 있다. 1%의 탐욕이 지나친 부를 독점하는 것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월가에서만의 저항이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공조되고 있는 기존 금융 관행과 시스템에 대한 경고이며, 개선에 대한 촉구인 것이다. 좋은 금융인은 탐욕에 대한 적절한 절제의 계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조선의 거상 임상옥은 계영배(戒盈杯)의 철학을 가진 인물이었다. '가득참을 경계한다' 는 신조에 따르기 위해 이익을 볼 때 마다 그가 얼마나 자제하기 위해 애썼을까를 생각해 보라. 계영배를 앞에 둔 그의 자제는 곧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멋이다.
또한 금융은 미래의 두려움을 다루는 산업이다. 인간의 가장 큰 걱정은 미래다. 인간에게 미래란 기회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이다. 동물은 미래를 위해 먹이를 비축하지 않지만 인간은 비오는 날을 위하여 필요한 양을 비축해 둔다. 가끔 다람쥐가 도토리를 어디다 묻어 둔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 바보는 종종 자기가 어디에 그 도토리를 숨겨두었는 지 까맣게 잊고 만다고 하니 그것은 아마 영악한 의미의 비축이 아닐 것이다. 두려운 미래를 위해서 비축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그러나 1%의 부자들의 탐욕이 현재적 만족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무한 팽창되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은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비축도 해 두기 어렵게 되어갈 전망이다. 더욱이 부의 양극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대중의 현재적 삶이 더욱 빈곤해 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금융이 식물들의 삶, 즉 스스로 자신의 먹거리를 벌어먹을 수 있도록 무수한 99%의 자립을 지원해 줄 수 있을 때 제대로 방향을 잡게 된다고 생각한다.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은 가난한 자를 위한 은행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자립을 위해 대출이 일어나지만 상환율은 선진국의 어느 상업은행보다 높다. 물리적 담보의 힘이 아니라 인간의 자존감과 약속을 담보로 한 금융이 비즈니스로도 더 성공적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또 다른 선진국의 사례도 있다. 2008년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고 수많은 금융 기업들이 몰락하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 노스다코타 주립 은행은 27억 달러를 대출하여 5800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렸다. 이 은행은 농민, 학생, 주정부의 대형 사업에 일반 상업 은행보다 저리로 대출해 주고 있다. 지난 10년 간 약 3억 달러의 수익을 주정부에 안겨 주어 주정부가 흑자를 기록하게 했다. 이 은행의 최고 경영자인 에릭 하드마이어는 '굳이 경제를 어렵게 하는 비우량 대출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의 경제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저리 대출만으로도 충분히 수익이 나온다'라고 말한다. 나는 훌륭한 금융인은 99%의 보통 사람들이 현재의 자립의 삶을 조금이라도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금융은 거짓말과 싸워야하는 산업이다. 거짓말 역시 인간의 삶이 시작될 때 부터 인간을 쫒아 온 인간적 특성이다. 그리스의 눈먼 시인 호메로스는 '죄악에는 허다한 도구들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죄악은 거짓말'이라는 말한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거짓은 여자의 본능'이라고 몰아 부친다. 그는 자연은 사자에게 발톱과 이빨을 주고, 소에게는 뿔을 주고, 오징어에게는 먹물을 준 것처럼, 여자에게는 자기 방어를 위해 거짓말하는 힘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여자들이 미워할 말을 골라했다. 그는 거짓으로 이골이 난 교활한 남자들을 보지 못했던 모양인가 보다. 아마 거짓은 여자의 본능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집착하는 교활한 인간의 본능이리라 생각한다. 거짓말의 반대는 정직함이고 진정성이다. 매일 탐욕의 정수인 돈을 만져야하는 금융인들은 스스로의 정직함과 깨끗함을 매일 수련해야할 것이다. 거짓과 정직에 대하여 가장 훌륭한 말을 한 사람은 아마 톨스토이가 아닌가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에게 한 거짓말은 자신에게 한 거짓말 보다 중대하지 않다. 남에게 한 거짓말은 즉흥적일 수도 있고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한 거짓말은 진리에 대한 배반이며, 인생의 요구에 대한 배신이다." 나는 금융인들은 정직함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스스로 경계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그동안 민주주의의 손을 잡고 번영의 길을 걸어왔다. 둘 사이에 불화가 없었던 적은 없으나 지금처럼 극도로 불안한 동행을 하고 있는 때도 없었다. 부의 극단화가 가속화되고, 99%의 다수가 열심히 일하는데도 현재의 삶이 점점 고달퍼 지고,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안정장치를 확보하는 대목에서 실패한다면 이 둘의 동행은 보장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처럼 금융인의 자기 성찰과 혁명이 절실할 때는 없어보인다.
( 신한을 위한 기고 - 금융인으로 산다는 것 2012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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