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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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행동의 변화를 수반한 개인적인 인식의 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그저 사회의 통념이나 유행에 맞추거나 구애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새로 태어나는 순간은 진리를 깨달은 듯 평소와 차원이 다른 희열을 느끼며,
그 깨달은 바를 실천하려는 굳건한 용기가 생기고 절로 겸손하게 되는 일도 경험한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관찰하지만 남에 대한 생각도 깊어지게 된다.
공감능력과 이해력이 풍부해져서 삶이 충만해지고 삶의 아름다움을 매일 경험한다.
이 새로 태어남은 순간적이고도 극적인 깨달음에 의해서 오지만 역설적으로 그 깨달음이 갑자기 오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의 방황이나 공부, 시련 속에서의 탐구가 쌓이고 쌓이다가 각자만의 어떤 계기로 새로 태어남을
경험하게 된다. 마치 컵에 물을 끝까지 부어야 넘치는 것과 똑같다.
이 새로 태어남은 타인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개별적인 경험이므로 아쉽게도, 슬프게도
모든 사람이 쉽게 새로 태어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미적거리며 인생을 따분하게 생각하고 지루함이나
고통을 이길 힘을 갖지 못하며 심지어 자살까지 감행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예를 들어보라면 베드로와 바울을 들 수 있다.
베드로는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지척에서 따라 다녔으면서도 예수님 말씀의 뜻을 몰랐고,
나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하고 달아났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서 완전히 사람이 바뀌었다.
변신한 것이다.
용기 있게 대중 앞에서 설교를 하고, 무식하다며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어부였던 그는 베드로 전, 후서를 남겼다.
마지막엔 감히 예수님처럼 죽을 수 없다며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던 무시무시한 사람이었으나 강렬한 빛과 함께 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로
(이 책에 의하면 내면의 목소리) 그의 가치관은 완전히 바뀌었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바울이 썼다.
그들은 감옥에 갇히고, 무시와 조롱을 받고, 위협과 매 맞음과 모든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 말씀을 실천해 나갔다.
그들이 새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새로 태어난 기쁨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죽음도 불사하게 된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새로 태어남은 언제였을까? 나는 평교사로 고난이나 시련도 거의 없이 모든 면에서 평범하고
게으르게 적당히 대충 살아왔다.
평범함이야말로 아무나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게으름을 위장해 왔었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꽤 몇 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파란색 비단 바탕에 한문을 수 놓으신 6폭 병풍을 그리운 엄마를 보듯 쳐다보다가
갑자기 강렬한 마음의 통증과 더불어 큰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굳이 설명해 보자면
마음의 통증은 부모님 살아계실 때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고통과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제대로 살아보자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늘 엄마 옆에,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내 옆에 있었던 그 병풍은 내게 상징이 되었다.
아버지가 책을 읽고 공부를 하시면서 하셨을 생각, 엄마가 수를 놓으시면서 하셨을 생각을
부모님의 언행으로 유추해보고 그 길을 따라 나도 걸어가겠다는 각성이 왔다.
중학생들에게 늘 입으로만 나불나불했던 내용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 나를 때렸다.
덕분에 나는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라는 상태에서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로 매일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변경연에 신청한 것 같다.
어쩌면 살 날이 점점 짧아진다는 아니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각성을 제대로 했는지 모른다.
신자로서 하나님께서 그런 각성을 선물로 주셨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 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런 각성을 했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에 대한 확고한 계획은 없다.
단지 아는 것은 아버지가 늘 책을 읽으셨던 삶을 따라, 엄마가 가고자 했던 그 길을 찾아
죽기 전까지 걸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럼 동시성의 신비가 내게도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또 습관처럼 막연한 기대를 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