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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일 04시 00분 등록
“여보세요.”
“혹시, 언니? 나야.. *숙이..”
“누구... 세요? 전 소라인데요..”
“어머, 소라니? 이모야.. 둘째 이모.”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멍하니 수화기를 들고 있다.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하는 침묵의 소리가 요란하게 내 몸을 흔들어 댄다. 요란한 침묵을 잠재우 듯, 눈물이 양 볼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둘째 이모..’

마치 간난 쟁이의 옹아리 처럼, 9년 전의 언어가 몸 밖으로 겨우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9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언어, ‘둘째이모’. 그녀가.. 돌아왔다.

9년 전 오월, 이모는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안고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꼭 성공해서 돌아 올께.” 상처 속에서도 웃음을 찾아내는 이모의 얼굴은 너무 맑게 찰랑였다. 그래 오월이었지, 아카시아, 흰색 투피스를 곱게 차려입고 찾아왔던 이모는 오월의 집단으로 피어나는 아카시아 같았다. 그 향기의 덩어리만 덩그라니 남기고 떠난 이모, 몇 개월이 지나 이모에게 더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언니로서 애타게 연락을 기다리던 엄마는 몇 년이 지난 뒤에, 수화기 너머로 작은 이모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이제, *숙이는 죽었다고 생각하자.”

우리는 오월의 아카시아가 필 무렵이면 언제나 이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냥 끊기는 전화에, 하얀 아카시아 꽃 향기 속에 숨어 있는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이따금 봄이 찾아와 아지랑이 처럼 흘러나오는 그리운 말들이, 이모에게로 흘러가지 못하고 허공에 흩뿌려 졌다.

“소라야, 지금 이모 부산이야, 추석 때 꼭 올라 갈께.”

버스정류장 앞, 이모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밤바람이 서늘하게 다가왔다. 희미한 상점 불빛 아래로, 밤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신문지를 바라봤다. 문득, 무수한 자신의 이야기를 몸에 싣고, 회오리를 타고 무섭게 휩쓸려 다니는 이모의 인생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한 남자를 사랑했고, 미래를 약속 했다. 하지만 그가 약속한 미래는 폭력과 외도였다. 이모는 가정폭력 안에서도 너무나 사랑하는 딸을 위하여 하루 하루를 참았다고 한다. 하지만 적반하장으로 시댁 식구들에 의해 이혼을 당하고, 아이까지 빼앗기고 쫓겨났다.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술로 하루 하루를 견디던 이모를, 골목 어귀에 몰래 숨어 딸을 바라보다 돌아오던 이모를,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저만치 버스 한 대가 선다. 연분홍 남방에 흰 모자를 쓴 한 여인이 나에게 다가온다. 오월의 아카시아 같던 그녀가 가을의 코스모스로 돌아왔구나. 한해를 마무리하고 1월의 문턱에 나서는 마음처럼, 가슴이 떨려오고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모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나는 무작정 이모의 손을 잡았다. 오월의 몸 앓이가 되살아나 나는 활짝 웃지 못했다. 투명한 침묵의 문을 지나 나는 첫 말문을 열어본다.

“이모, 꼭 코스모스 같네..” 한껏 무게를 잡고 이야기를 했다.
“웃기고 있네, 이렇게 주름이 지글지글한 코스모스 봤니? 소라는 여전히 감상적이구나. 나는 감상을 어디다 갖다 버렸나 몰라.”
“하하하~~”

나는 이모의 악동 같은 반응에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어 젖혔다. 가슴 깊이 막혀있던 몸앓이의 씨앗이 웃음을 통해 한순간에 쏟아져 나왔다. 상처 속에서도 웃음을 찾아내는 이모, 이모 또한 여전히 집단의 향으로 짙게 피어나던 아카시아 그대로구나.

“이모, 요즘 뭐하며 지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모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내가 **없게 일본에서 불법체류자로 감옥에 갔었잖니. 잘나가던 가게도 정리 못하고 그대로 쫓겨났어 소라야. 근데 신기한게 말이야. 감옥에 몇 개월간 있으면서 인생의 스승을 만난거야. 정말, 정말 힘들었거든. 그건 넌 상상도 못할꺼야. 목사님이었는데, 꼭 작은삼촌 같았어. 그분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이 자리에 내가 없을꺼야. 그러면서 다시 예배를 드리고 기도란 걸 하게 된 거야. 나를 위해서 기도해본게 언제였던지.. 어느날, 목사님이 그림이 실린 성경이야기 책을 갖다 주었어. 그 책을 펼치는데.....”

이모는 순간, 메이는 목을 누르며 말을 멈추었다. 오른손을 가슴으로 가져가, 다시 한번 깊은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어갔다.

“나는 태어나서 그만큼 강렬한 전율을 체험한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그림이라니. 그때부터 나의 마음속에 다시 꿈이 생긴거야. 소라야 기억해?”

그럼, 기억하고말고. 이모는 그림을 정말 잘 그렸다. 어린 조카들을 위해 끊임없이 종이인형 옷을 그려 주었다. 제임스 딘이 좋다면 뚝딱, 제임스 딘을 그려주었고, 조정현이 좋다면 뚝딱, 조정현을 그려 선물로 주었다. 이모는 우리에게 마술사 같은 존재였다. 마술사 이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엄마의 지원을 받아 디자인 공부를 했다. 따스하고 예쁜 앙고라 스웨터를 만드는 의상디자인 회사를 다니던 이모의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어린 시절, 이모의 디자인 노트를 몰래 훔쳐보고 나도 의상디자이너가 되기로 한 거 알아? 나 이모 따라서 노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이구.. 지지배,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장난스래 코를 실룩거리며, 입을 오므려 조물 조물 말하는 모습에, 나는 두 손으로 배꼽을 쥐고 웃었다.

“소라야, 이모는 기독교 전문 벽화나 그림을 그려볼까 해. 그 목사님과도 약속했어. 꼭, 다시 돌아가서 그림을 그려주겠노라고. 정말 멋지게 신을 그려보고 싶어..”

이모 앞으로 성큼 걸어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이모를 바라봤다. 이모의 발끝에서부터 실뿌리가 돋아나기 시작한다. 가을 하늘의 색채를 먹어 이모의 몸이 나무의 몸통처럼 우뚝 선다. 손끝에서 목화솜 같은 하얀 빛깔의 아카시아 꽃이 피어난다. 몸짓 그대로가 한 구루의 싱싱한 아카시아 나무다.

나는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들이 켰다. 가을의 바람결과 함께 아카시아 향이 코끝을 스쳤다. 아, 이모의 향. 쿨한 아카시아 향이 온 몸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아카시아의 짙은 향해 취해 나는 생각했다. 뿌리가 있는 것은 결코 완전히 흔들리지 않는구나. 그것이 자연이고, 나무이고, 사람이고, 둘째 이모구나. 고운 얼굴과 다르게 까슬하고 가냘픈 이모의 손끝을 다시 한번 매만졌다. 이 손끝에서 신을 그리는 아카시아의 신비로운 마술이 시작될 것이다. 모든 한 구루의 나무가 그러하듯이.

IP *.7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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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0.01 10:12:27 *.249.162.56
가을이 오나보다. 마음이 예쁘기도 하고, 어딘가 가슴 한 구석이 아리기도 하고... 꽃피는 봄이 오면 아카시아 꽃도 활짝 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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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2007.10.02 00:01:00 *.73.2.35
가슴 한구석이 아려도.. 그녀가 돌아와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것도 꿈을 품고 돌아왔잖아~~~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는 오월에
다시 이모의 소식을 전해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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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0.05 09:47:26 *.132.71.7
소라 신나겠네. 이모 돌아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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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10.08 08:58:36 *.55.55.76
마음이 아프다. 미소가 번진다. 이 두가지는 반대가 아니구나.
9년간의 가슴앓이와 새로운 꿈 사이에 희망이 피었구나. 나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희미하게나마 알고있다. 따뜻하고 빛나는 것, 허나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까 노심초사하는 것.
소라누나라면 이모의 희망을 잘 지켜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 누나의 공감과 감상이라면 아카시아의 마술을 멀리 퍼뜨려줄 수 있을꺼야.
둘째이모에게서 써니누나의 모습이 보이는걸. 누나도 힘내요. 너무 잘하고 있어서 눈부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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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2007.10.08 12:09:03 *.231.50.64
옹박, 어리버리 든든한 놈.^^ 너두 힘내라우~~~
내가 써니언니에게 품었던 마음이 이런 마음이었지.

나는 모든것이 함께 갈 수 있을거란 믿음이 있나봐.
아프면서도 웃을 수 있고, 슬프면서도 따뜻할 수 있고...
그런 모습을 보게 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참 행복하고 좋아.

옹박이는 좀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끔드네.
힘내지 않아도 괜찮을때도 있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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