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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8일 09시 09분 등록
지난 일요일 저녁 1년 넘게 집필했던 기술서를 탈고했습니다. 원고를 출판사로 보내고 나니 정말 홀가분하더군요. 일년 내내 회사생활과 기술서집필을 병행하느라 다른 개인적인 일들은 거의 돌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바깥활동이 줄지 않았다면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놀고 싸돌아다니는 시간이 줄어든 덕분입니다. 모든 일에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코로나가 사람들의 삶을 바꾼 것처럼 책을 쓰는 일 역시 제 삶을 바꾸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이번 기술서 집필은 또다른 측면에서 지난 1년간 제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일상이 좀 삭막해졌다고나  할까요? 기술서를 쓰다보니 관련서적 역시 기술서만 주구장창 읽었습니다. 원래 하는 일이 그런 계통인데, 집에 와서까지 재미없는 책을 붙잡고 있다보니 사는게 참 재미가 없더군요. 그러다가 짬을 내서 기술서가 아닌 책을 들춰도 내용이 눈에 잘 안들어오더라구요.  머리속이 온갖 산술부호들로 꽉 차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전공기술에 대한 지식과 논리가 풍부해지고 공고해지는만큼, 인문학적 사고는 사라지고 글은 점점 메말라져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술서나 전공서적은 유용함의 극치와 무용함에 대한 경멸을 추구하죠. 좌뇌에 찌는 살만큼, 우뇌가 말라가는 것을 느꼈던 한해였습니다. "정말 공돌이는 인문학과 친해질 수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폰과 디지털갬성의 아버지 스티브 잡스가 대단한 사람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과 기술을 같이 보는 것은 사실 쉽지 않거든요. 저희 업계에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마케팅 내지 상품기획에 있습니다.  기술을 수박겉핧기로 아는 사람들이 태반이죠. 사람과 기술 모두 꿰뚫고 있는 이들은 흔치 않습니다. 개발자나 엔지니어들은 기술에는 밝아도 사람은 잘 보지 못합니다. 사실 잡스 역시 엔지니어는 아니였습니다. 기획자에 가까웠죠. 하지만 기술에 대해 어떤 개발자보다 깊이 이해하고 활용했던 사람이였죠. 기술을 정말 깊이 이해하고 있다면 그 응용의 조예 또한 깊어집니다.  이는 물론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어렵습니다.

오늘은 제 졸저 <어떤 개발자가 살아남는가>에서 사잇글로 다루었던 스티브잡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스티브 잡스의 생애는 파란만장했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난 괴팍한 젊은이는 항상 삶의 의미와 지혜에 목말라했습니다. 잡스의 첫 직장은 당시 잘 나가던 비디오 게임 업체 아타리였죠. 아타리를 다닌지 1년 정도 되던 시점에 잡스는 해외 출장을 갔다가 복귀하지 않고 그냥 인도로 훌쩍 여행을 떠나버렸습니다. 깨달음을 찾아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직장에서 이런 사람들은 괴짜로 불리죠.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먹습니다. 그 괴짜들중 미래의 스티브잡스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훗날 잡스는 인도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이성보다는 직관을 사용합니다. 직관력은 매우 큰 힘을 발휘합니다. 지능이나 이성적인 사고보다도 훨씬 큰 힘입니다."

직관은 다른 말로 경험적 지혜입니다. 잡스는 인도여행을 통해 서구사회의 이성적 사고가 지닌 한계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직관을 깨우고 지혜를 얻기 위해 선과 불교에 심취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인도 여행과 그의 인생을 통해 추구한 깨달음은 애플의 광고모토이자 그의 철학이기도 했던 문장 "Think Different(다르게 생각하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은 기술이 아닌 기술 바깥에 있었던 거죠. 잡스는 미래지향적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오늘이나 과거가 아닌 내일의 가치를 중시했습니다. 내일의 가치는 고객의 생각으로부터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잡스의 지론이었죠.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열었던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포드는 "내가 만약 고객에게 요구하는 것을 물어보았다면, 고객은 더 빨리 달리는 마차를 달라고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잡스는 포드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장조사를 통해 제품을 기획하고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용자는 무엇인가를 직접 보기 전까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비틀스의 음악이 대중들이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비틀스가 나와서 대중들이 그 음악을 좋아하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다만 잡스에게는 이런 면이 너무 지나쳤기에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에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악평에 시달리기도 했죠. 결국 그런 독선적인 성격으로 인한 문제가 쌓이고 쌓여 잡스는 그가 세웠던 애플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아마 이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 인도 다음으로 떠나게 된 야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잡스는 인격적으로 조금 더 성숙해집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항상 선과 명상이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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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이 그의 영웅적인 삶을 부각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잡스가 더 영웅적이고 더 사람들에게 감명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매일 죽음이라는 것을 눈 앞에 두고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잡스가 거둔 외적인 성취가 아니라 그가 겪었던 내면의 여정입니다. 잡스는 항상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췌장암 진단을 받은 이후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죠~ 잡스에게 있어 선과 불교를 통해 추구한 깨달음은 죽음이라는 종결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서서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말이죠.

많은 이들이 잡스가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했던 연설을 가장 감명 깊은 장면으로 기억합니다.  잡스는 이 연설에서 자신이 걸어온 내면의 여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짧았던 대학시절 배웠던 서체 수업에서 창안하여 매킨토시에 적용했던 캘리그라피에 대해 언급하면서 잡스는 그가 글자와 글자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에 대해 터득했다고(I learned about the space between letter combination) 말했습니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검은 부분을 보았지만, 잡스가 본 것은 여백이었습니다.  무한한 상상의 공간입니다. 이어서 잡스는 자신이 점과 점을 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점과 점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여백의 공간이 있기 때문이죠. 내면의 여정에서 거쳤던 점과 점들이 훗날 만나서 또다른 의미와 또다른 가치를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인생에 있었던 수많은 점과 점들이 이어져서 지금의 자신과 애플, 그리고 그가 열정을 다해 만든 분신과도 같은 제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점과 점,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선은 직관과 가슴이 시키는 일을 따른 흔적이었습니다. 잡스는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주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당신의 가슴과 직관을 따르는 것입니다. 가슴과 직관은 이미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Stay foolish, 이성이 아닌 직관, 무엇보다 우리의 가슴이 외치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공돌이든 인문학도이든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잡스의 마지막 유언이 아닐까 싶네요. 이제 저도 기술서를 쓰면서 아는체하며 내뱉었던  지식들은 잠시 머리에서 비우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보는 훈련을 해야겠습니다. 삶을 가슴으로 보지 못했던 것은 여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우지 않고서는 채울 수 없다는 진리 또한 깨닫게 됩니다. 이번 주말은 철저히 무용함을 추구하며 제 가슴이 시키는 일이 무엇인지 탐구해볼까 합니다.  Stay tuned to your heart !

P.S. 주말에 게으름을 부릴거라는 이야기를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았네요...^^ 좋은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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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0 17:57:29 *.251.156.104

바쁜 와중에도 1년간 집필하시고 마침내 탈고하신 걸 매우 매우 축하드립니다!!!! 고생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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