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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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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8일 18시 19분 등록
얼마전 <하이재킹>이란 영화를 봤습니다. 1971년 실제 있었던 대한항공 여객기 납치 미수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인데요. 당시는 남북 대립이 극한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반공이 국가이념이었죠. 월북한 가족이 있으면 빨갱이로 취급받고 삐라 한장만 집에 있어도 바로 잡혀가는 시대였습니다. 다른 생각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용공분자가 되어 처벌을 받고 죽을 때까지 그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습니다. 가족들까지 고통을 받아야 하는 암울한 시대가 불과 50년전의 현실이었습니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다른 이념, 다른 사상을 탄압하던 시대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런 국가와 단체들이 존재합니다. 그런 나라들을 보면 죄다 히틀러같은 독재자가 존재하죠. 국가가 개인이 우선하고요. 지도자가 아닌 다른 것 때문에 획일화되는 경우도 있죠. 종교가 대표적입니다. 중세 유럽이 그랬죠. 신이 지배하는 시대, 교회가 절대선인 시대가 있었습니다. 인간계에 절대선은 없습니다. 고이면 썪기 마련입니다. 타락해가는 바티칸과 교회에 맞서 들불처럼 일어난게 종교개혁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단지 구교를 신교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단으로 여겨지는 대상만 달라졌을 뿐이었죠. 주류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마녀사냥은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추앙받았던 이가 제네바의 칼뱅이었습니다. 칼뱅은 아주 엄격한 원칙론자였고, 자신과 다른 사상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그가 제네바를 장악하는 동안 도시에서 생기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죠. 사상과 방법이 어찌되었든 독재였고 공포정치였습니다. 칼뱅은 자신의 사상을 비판한 미카엘 세르베투스라는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결국 화형에 처합니다. 화형을 처해야 하는 온갖 이유를 다 가져다 붙혔지만, 기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주장했다는 이유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칼뱅은 따끔한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단 한 방울의 대립된 생각도 나올 수 없도록 제네바를 장악했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밀고하며 자신들이 옳다는 믿음의 굴레에 자신들을 가두게 됩니다. 칼뱅의 의도한대로죠.

하지만 카스텔리오라는 지식인은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칼뱅의 광기에 맞서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는 <이단자에 관하여>, <칼뱅의 글에 반대함>이라는 글들을 목숨을 걸고 출판했습니다.  하지만 이 글들은 칼뱅의 주도면밀한 검열에 막혀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80년대 언론통제당하던 우리나라보다 훨씬 심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위해 카스텔리오는 끝까지 싸웠습니다.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뜻할 뿐이다. 제네바 사람들이 세르베투스를 죽였을 때, 그들은 교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희생시킨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불태워서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다. 단지 신앙을 위해 불에 타 죽음으로써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슈테판 츠바이크

전기작가로 유명한 독일의 츠바이크가 카스텔리오를 다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라는 책을 쓴 시기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세계 대전이 일어나려는 때였습니다. 다툼과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한 무고한 희생은 결국 다른 의견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그는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다른 의견을 인정하는 것 - 관용이죠. 똘레랑스(tolerance) 입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tolerance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관용성이 높은 소프트웨어가 문제를 덜 일으킵니다. 소프트웨어가 관용성이 높다는 건 결국 robustness 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영어로 견고함이라는 단어인데, 맷집이 좋다는 의미로 보면 됩니다. 어떤 직접적인 문제조건과 잠재적인 위협에도 잘 대응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사회 역시  robustness가 높은 것이 좋은 사회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관용이 필요합니다. 획일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시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령 획일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방법은 경계해야 합니다. 문명이 진일보하고 꽃 피웠던 시기에는 다양성과 관용이 존재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가 그랬죠. 춘추전국시대 역시 지배층들의 횡포와 피 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얼룩진 시기였지만 학문분야에서는 다양성이 꽃피웠던 백화제방의 시기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나중에 어떻게 평가를 받을지 궁금합니다. 얼마전 동네 도서관을 가니 어린이 서가에 <공산당 선언>이 꽃혀 있었습니다. 50년전에는 차마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겠죠. 그 위로 문득 영화 <하이재킹>에서 여진구님이 열연한 극중 인물 용대의 슬픈 눈빛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이제 더위도 한 풀 꺾이는 것 같습니다. 건강한 하루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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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8 21:54:41 *.133.149.229

다른 것이 곧 틀린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  저는 하도 몰매를 많이 맞은지라 ...    

가슴이 섬뜩하네요 ! 상처는 아물었지만 흔적은 남아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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