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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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변화경영연구소 5기 연구원 심신애님의 글입니다(2011/02/11).
내 작업실 한켠에 자리한 여섯 단 짜리 서랍장은 ‘보물 단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맨 아래 칸에는 커튼을 양쪽으로 묶어 둘 때 사용하는 싱글 타이백과 쿠션 모서리나 테이블 러너 양끝에 달아주면 포인트가 되는 작은 키 태슬, 뒷부분에 핀이 달려 있어 소파 팔걸이나 사탕 베게 볼스터 등 원하는 부분에 쉽게 꽂아 장식할 수 있는 로제트 태슬 등이 들어있고, 세 번째 서랍 손잡이를 당기면 색실이 밧줄 모양처럼 꼬여있어 쿠션과 침구류의 깔끔한 마무리 장식으로 애용하는 립 코드, 테이블클로스나 소파 하단에 달기도 하고 낡은 스툴의 다리를 감추는 역할을 하는 길고 가지런한 자태의 블리온, 아기자기하고 여성스런 느낌으로 전등갓과 패브릭 소파 마감선에 사용하는 김프, 로맨틱한 디자인의 블라인드와 테이블보에 응용할 수 있는 비즈나 크리스털 구슬이 달린 프린지, 커튼의 옆단이나 밸런스의 하단에 매치하면 우아하면서도 중후한 이미지로 완성할 수 있는 태슬 프린지, 아이방 커튼과 쿠션에 달아주면 깜찍한 방울 프린지 등등이 잔뜩 담겨있다. 두 번째 서랍 안에는 보드라운 공단 느낌의 리본 테이프, 우아한 벨벳 테이프, 색실로 수를 놓은 화려한 무늬의 자수 테이프, 오프 화이트 컬러의 면 레이스, 코바늘로 손뜨개 한 토숀 레이스, 비치는 소재로 짠 T/R 레이스 등 각종 테이프와 레이스가 폭이나 색깔별로 구비되어 있으며, 제일 위 칸에는 패브릭을 덧씌워 메이드한 느낌이 확 풍기는 앙증맞은 싸개 단추와 매듭으로 만든 중국식 단추, 구슬로 꿰어 만든 단추 등등등.. 개성있고 컬러풀한 각양각색의 단추들이 가득하다.
아, 이 잡동사니들(?)의 출처가 어디였더라. 모두 나의 장보기가 가져다 준 전리품들(?)이다. 돌아다니다가 내 눈에 들어오는 것,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 그 재료만의 특별함이 배어있는 것, 그러면서 값이 착한 재료들, 이게 마지막이라는 말에 걸려들어 충동적으로 데려온 것, 살까말까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돌아왔는데 시간이 지나도 계속 눈앞에 동동 떠다니는 바람에 다시 찾아가서 과감하게 질러버린 것, 너무 아까워 쓰지도 못하면서 그저 보기만 해도 뿌듯한 반짝이는 것들을 긁어모아 서랍장 안에 차곡차곡 챙겨 놓았다. 우선은 집을 꾸미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아이템들을 만드는데 쓰이고, 주기적으로 살피면서 어떻게 하면 얘들에게 세상 빛을 보게 해줄까를 고민하고, 때로는 패브릭과 근사하게 매치해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기도 하고, 가끔은 재료가 일을 부른다고 괜히 꺼내서는 재봉틀 앞에 앉아 무언가를 만드는 나의 ‘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런 나의 ‘보물단지’를 채울 ‘거리’를 찾는 데에는 뭐니뭐니해도 동대문 종합시장이 제격이다. 아주 고가의 수입품을 제외하고는 패브릭에 관한 것이라면 없는 게 없는, 모든 게 다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원단전문 도매시장이다. 각종 원단에서부터 부자재, 재봉 도구, 맞춤 가공소에 이르기까지 취급하는 상품의 종류와 양이 워낙 방대해서 홈 드레싱 재료를 구해야 할 때 가장 먼저 뒤져보게 되는 곳, 어떤 것을 고를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하는 곳, 여기 없으면 다른 어디에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가히 제대로 된 홈 드레싱을 위한 보물창고다.
동대문 종합시장을 드나든 지 벌써 10년하고도 5년이 더 되었지만 내게는 지금도 복잡하고, 여전히 넝쿨처럼 엉켜 있어서 한번 잘못 들어서면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 건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미로와 같은 곳이다.(방향감각이 부족한 게 아니라 그냥 없다고 하는 편이 맞고, 그저 길치인 내 탓이 제일 크지만..ㅎ) 처음 가는 분들은 마치 넓고도 깊은 숲속에 들어선 것처럼 막막할 수 있으니, 입구에서부터 시간을 지체하다 보면 해질 때까지 다 둘러볼 수 없을 정도로 물건의 양이 많기 때문에, 경험 있는 사람과 동행하거나, 장을 보기 전 미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리스트를 작성해 두고, 층마다 특성을 파악해 두는 것이 좋겠다.
지하철 1호선과 4호선 동대문역에 내려 9번 출구로 나가면 동대문 종합시장 건물이 보인다. 지하 1층에는 커튼 전문점과 커튼 시공에 필요한 소품, 트리밍 전문 숍, 수예용품 숍, 맞춤 바느질집들이 모여 있다. 지상 1층에는 바느질에 필요한 기본 도구들과 지퍼나 단추 등의 부자재, 이불, 커튼, 타월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고, 2층에는 인테리어용 직물을 중심으로 각종 면직물에서부터 린넨, 자카드 직물, 누비 등의 원단과 레이스와 한복 천을 취급하는 매장들까지.. 집 꾸미는 일과 관련된 이들, 손수 집을 꾸미고자하는 사람들을 위한 온갖 재료들이 마치 ‘나는 빈 공간을 가만히 두지 않아요’ 라고 말하듯 빽빽하고 풍성하게 갖추어져 있다. 3층과 4층은 주로 의류에 사용하는 원단을 위주로, 데님, 인조 가죽과 스웨이드, 특수 원단, 신소재 등을 취급하며, 5층은 비즈 재료를 파는 숍과 퀼트천이나 각종 액세서리 재료를 소매로 상대하는 매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 각 층은 취급하는 원단이나 부자재 종류에 따라 A동, B동, C동, D동으로 나눠 놓았는데 예를 들면 A, C동 2층과 3층에는 원단이, D동 지하와 지상 1층에는 부자재와 가공소가.. 각 동이나 층마다 품목이 비슷한 매장끼리 군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간다면 장보기가 한결 수월해질 거다.
위층을 돌면서 구입한 원단과 심사숙고해서 고른 부자재를 가지고서 주로 D동 지하에 몰려있는 바느질집에 맡기면 작은 쿠션에서부터 침장, 커튼, 소파 슬립커버까지.. 원하는 디자인으로 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동대문 종합시장은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라서 초보자들이 꾸미고자하는 공간의 분위기와 자신의 취향을 말하면 그 곳의 전문가가 좋은 아이디어를 제안해 주기도 하고, 공간 사이즈를 얘기하면 필요한 소요량을 뽑아 주신다. 이렇게 몇 번 다니다 보면 자연히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길 거다.
“음식 맛을 내는 것은 첫 번째가 재료” 라며 좋은 식재료를 공수하느라 애쓰시는 엄마의 사랑에 감동하고, “나는 디자인을 소재에서 끝낸다” 는 독일의 패션 디자이너 질 샌더 선생님의 말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나 역시 집에 옷을 입히는 일도 ‘재료가 결정한다’ 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된 홈 드레싱 재료를 데려오기 위해 감각과 안목을 키우고, 품을 파는 노력, 오랜 단골들과의 거래에 공을 들인다.
신입일 때 나는 맨날 동대문 종합시장을 출근하다시피 하며 온 시장을 헤집고 다녔다. 재료든, 길이든, 뭐든, 워낙 아는 것이 없었던 탓에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생기면 무엇이든 물어보고 다녔고, 매일 한 두 보따리씩 원단이든 부자재든 뭐든 사가지고 와서 샘플을 만들곤 했다. 초짜티라는 티는 다 내고 다니던 내가 경험이 더해지고, 자연스레 재료 구입에 대한 노하우가 쌓이면서, 이제 나의 장보기는 계획적이 되었다. 지금은 내게 꼭 필요한 것을 순서대로 정리해서 소요량을 뽑고, 어느 곳에 가면 어떤 재료가 있는지, 가격 대비 어떤 재료가 좋은지 정도는 알고 있기에 꼼꼼히 따져보고, 여러 번 생각해서 장을 본다. 필요한 물건을 사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이기도 하다.
또 각각의 재료에 어울리는 궁합이 있고 내가 활용하기에 따라 재료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조건 최고급이라고 해서 좋은 재료라고 할 수는 없다. 때문에 스쳐 지나가는 원단 중에서 최상의 품질을 골라내기 위해 나의 눈은 집중해서 재료를 살피고, 손으로 마음껏 만져보고, 관찰하다 떠오르는 게 있으면 무조건 적거나 그려 놓고, 필요한 스와치를 챙겨두고. 이렇게 모아 온 샘플들을 집에서 정리하면서 이 원단으로 무엇을 만들 것인지, 어떤 부자재를 써서 하나의 완성품으로 구성해 갈 것인지, 부지런히 머리품(?)을 판다.
나는 아주 바쁠 때를 제외하고는 좀 느긋하게 장을 보려고 애쓰는 편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후다닥 달려가서 정신없이 쓸어담아 택배로 보내놓고는, 자주 가는 가게에 들러서 새로 나온 재료들을 하나하나 꺼내 놓고, 모르는 것은 직접 물어보며 궁금증을 해결하다 보면 그냥 지나치려던 원단도 새롭게 보이고, 갖은 재료들로 만든 물건들이 눈앞에 펼쳐지기도 한다. 알고 보면 정 많은 사장님들이 당신 가게에 없는 것들도 수소문하고 공수해서 알아서 보내주시기도 하고, 한번은 외부에서 급히 주문을 한 후 깜박 잊은 틈을 타 입금도 하기 전에 원단이 도착해서 너무 놀라 전화를 드렸더니 ‘그래야 빨리 작업을 하지’하는 사장님의 훈훈한 배려에 무쟈게 감동을 받은 적도 있다. 또 당신들의 사는 이야기도 해 주시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떤 관계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신뢰를 쌓는 것 만한 게 없고, 진짜 시장인심이 어떤 것인지도 차차 알게 되고, 사람 냄새나는 시장에서 배우고 느끼는 게 참 많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공부를 하고 있다.
아참, 간혹 스와치 만드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간다, 소매상에게는 안 준다며 매정하게 대하는 분들도 있지만 불친절한 상인들보다 정감 있는 분들이 훨씬 더 많이 계시니 샘플, 공짜라고 무조건 챙기려하기보다는 꼭 필요한 스와치만 받아올 것을 권한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미리 가상으로 만들어 놓은 상호를 대거나 디스플레이 업체라고 말하라는 나름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전문가들도 계신데.. 음.. 흠.. 굳이 나의 간을 조려가면서까지 도매업체처럼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정(?)을 해도 안 통하는 경우엔 명함을 받아서(스와치는 그렇다 쳐도 명함에 인색한 시장 분들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방문한 날짜, 소재 종류나 모델넘버, 원단 폭과 마당(=야드 당, 1마=약 90cm)가격 등을 기록해 두거나 사진을 찍어두는 것만으로도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최근에는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서도 장보기를 하는 분들이 많은데 인터넷으로 사다보면 화면에서 본 것과 전혀 다른 원단이나 부자재가 도착하는 일이 자주 있다. 나도 온라인을 통해 구입한 재료들 중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데 주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화면으로 본 사진과 실제 물건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특유의 질감이나 색감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것 같다. 이 밖에도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사진을 올리면서 색상이 변했거나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한 가지 원단을 놓고도 여러 사람에게 만져보고 그 촉감을 얘기해보라고 하면 다양한 표현들이 나오기 마련인데.. 그만큼 인터넷으로 원단을 구매하는 일은 모험이 따른다. 어려운 용어나 원단 이름과 성격에 대해 어느 정도(?) 아니면 충분히 이해한 후 구입하는 것이 좋겠다. 일본 직수입 퀼트 원단을 제외하면 온라인에서 판매하는 제품들 대부분이 동대문 종합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니 가능하면 직접 장보기를 권한다.
동대문 종합시장에는 재미난 장면도 많다. 회사를 다닐 때, 시장을 쏘다니다 보면 밥 때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제대로 갖춰 먹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허기는 지고 그래서 먹자골목 한켠 노점, 불판 앞에 주저앉아 아저씨가 지글지글 부쳐주시는 그 당시 한 장에 천원인가? 했던 정구지 찌짐을 선배들과 함께 호호 불어가며 먹곤 했다. 요즘도 멋지게 차려입은 디자이너들이 가오를 무릅쓰고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시절 그 추억이 생각난다. 고심 끝에 원단을 고르고, 조심스레 선택한 다음에도 이 디자인이 더 예쁠까, 저 원단이 더 참해 보일까, 어떻게 매치하면 더 멋져 보일까를 고민하는 전문가와 초보자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이고, 만남의 장소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디자이너들의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패션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그리고 동대문 종합시장을 가면 내가 어떤 시기에 어떤 것들을 좋아했는지 흐름이 보인다. 내 취향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내 경험이 어떻게 진화하고, 내 관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도 어렴풋이 그려지는 게 있다.
나는 작업이 잘 풀리지 않는 날이면, 머리가 좀 무겁거나, 딱히 살 게 없더라도, 시장 조사를 자주 나가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동대문 종합시장에 들르곤 한다. 굳이 무엇을 사지 않아도 넘쳐나는 재료들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구석구석 다니다 보면 무심히 놓여 있던 더미 속에서 나만의 보물을 발견하는 행운을 누릴 때도 있다. ‘저렇게 다양하게 변할 수 있구나’ ‘발품을 팔아가며 공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구나’ 하는 사실도 새삼, 매번 깨닫게 된다. 아마 아직도 모르는 곳이 많을 것 같아 나는 여전히 눈과 마음을 열어두고 미로와 같은 동대문 시장 곳곳을 순례(?)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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