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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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말 이야기>
식견 있는 말 조련사들이 흔히 내놓는 조언 가운데 이런 금언이 있다.
"당신이 탄 말이 죽으면 거기서 내려라."
지극히 단순한 조언 같지만 우리로서는 언제나 이것을 따를 형편이 못 된다.
우리는 종종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안들을 선택한다.
1. 더욱 강력한 채찍을 구매한다.
2. 새 재갈이나 고삐를 써본다.
3. 기수를 교체한다.
4. 말을 새로운 곳으로 옮긴다.
5. 그 말을 더 오랫동안 타본다.
6. "우린 항상 이 말을 이렇게 타왔어."라고 말한다.
7. 말 연구 위원회를 소집한다.
8. 죽은 말을 효율적으로 타고 있는 다른 현장을 견학하는 일정을 잡는다.
9. 죽은 말을 타기 위한 규칙들을 늘린다.
10. 우리의 승마 능력을 평가하는 테스트를 고집한다.
11. 현재의 말타기 방식과 10~20년 전의 말타기 방식을 비교한다.
12. 요즘 말들의 상태에 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13. 새로운 말타기 스타일을 찾는다.
14. 말의 조상을 탓한다. 종종 혈통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15. 안장 띠를 꽉 조인다.
-조엘 베스트, <That's a Fad> (약간 수정함)
**
결혼이라는 죽은 말에서 내려오느라 최선을 다했다.
달려온 속도가 시간에 비례했다. 덕분에 멈추느라 애를 먹었다.
스스로 규정한 틀에서 벗어나는 게 일이다.
일상은 늘 무한도전이다.
다른 언어로 살고 싶어서 페미니즘 공부를 한다.
호기심만으로는 부족한 낯선 시선이다.
답은 늘 하나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다.
자유와 독립을 꿈꾸지만 길을 몰라서 헤맨다.
오늘, 지금의 나는 찌질한 마흔아홉이다.
최선을 다해서 멈춰버린, 두 딸의 엄마다.
어디로 어떻게 누구와 가야 할지 모르는 길치다.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모르는 나이치다.
식탁에 앉아서 노트북을 켜고, 노트를 뒤적이며 나를 기억한다.
매일 기록했던 나를 돌아보고 나의 언어로 재배치하고 재해석한다.
과거의 나를 만나는 수밖에 없다.
그곳에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살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잘 살고 싶었을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물으며 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혼자 가는 길이어야 했다.
고개를 들면 너무도 아득해서 두 발만 쳐다보며 뚜벅뚜벅 걸어가야 했다.
멈춰야 한다고 결정했고,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걸 알았고, 그래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실천했을 것이다.
그러느라 정신이 나갔고, 뭐가 뭔지 모르겠는 상황이 닥쳤고, 정신을 차리느라 정신이 없는 악순환이었을 것이다.
디톡스 프로그램을 하면서 다시 살고 싶던 나를 기억한다.
일주일이 지났다. 늦되고 더뎌서 시간이 걸린다. 할 수 없다.
몸에 쌓였던 찌꺼기를 비워내면 정신이 차려질까?
어떻게 잘 살고 싶었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제발.
*
12:30 바나나, 오렌지, 토마토, 오이, 가지, 피망, 아몬드, 호두, 두유.
채소와 과일과 친해졌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화도 나눈다. 어머, 너는 어쩜 그렇게 노랗니, 파랗니, 빨갛니, 어쩌니, 저쩌니, 예쁘다 얘 하면, 원래 쫌 그랬다고 잘난 척이다. 안 먹던 물도 카카오 분말 덕분에 많이 마신다. 그새 친해졌나 보다. 다행이다. 먹으면서도 화장실을 간다. 소변이 장난이다.
7:30 토마토, 현미밥, 나또, 상추, 된장국. (버섯, 콩나물, 마늘, 양파, 감자, 호박, 다시마)
나또를 처음 먹었다. 일본 영화에서 봤다. 실처럼 늘어나는 게 무슨 맛일까 궁금했는데, 언제 끝나는지 모를 입술에 덕지덕지 묻는 맛이었다. 맑은 간장소스와 겨자소스는 다음 기회에 맛보기로 하고 콩만 먹었다. 음...그냥 먹었다. 그동안 왜 안 먹었는지 알았다. 몰라도 되는 맛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알았으니까 살짝 친해질까 한다. 왕창 사 왔으니까 말이다.
작은딸도 놀러 나갔다.
우리 딸들은 아주 그냥 잘나간다.
눈부신 20대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이 침침해서 다행이다.
누굴 닮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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