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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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1999. 8)-부부가 여름밤을 재밌고 신나게 보내는 방법
밤은 좋다. 어두움은 외부 세계로부터의 정보 유입을 제한함으로써 우리를 편하게 한다. 마음이 쉴 수 있는 그늘을 준다. 마음은 밀실을 필요로 한다. 어두움은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깊이를 제공한다. 밤을 잘 보내면 다음날 맞는 햇빛의 의미가 달라 질 수 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따라 다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30년을 데리고 다니고 40년, 혹은 그 보다 더 데리고 다녀도 잘 모르는 것이 '자기 자신'이다. 어디를 가도 따라다닌다. 심지어 꿈 속에 까지 따라 온다. 밤은 자신과 많이 친해지는 시간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 본다'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모습이 가장 잘 비추어 보이는 거울은 아내나 남편이다. 함께 많이 지냈기 때문이다. 잘 때도 같이 잔다. 마치 자기 자신처럼. 그래서 부부는 '같은 마음 같은 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신과 잘 지낸다는 것은 아내와 잘 지내는 것을 말한다. 혹은 그대의 남편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꿈을 이야기하고, 욕망을 표현하고, 외로움을 하소연할 수 있다. 좋은 아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좋은 남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조금씩 닮아지고 조금 씩 만들어져간다. 서로 아름다운 모습들만 닮아지기를 바란다. 밤은 바로 고즈넉한 어둠으로 둘을 둘러쌈으로 서로 비슷한 명암을 가진 닮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준다.
살다 보면 서로 싸우기도 한다. 최악의 선택을 했다고 믿는 그 순간 초라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 등을 돌리는 순간 불행한 자신과 만나게 된다. 나와 처는 20년간을 살아왔다. 숫하게 싸웠다. 숫하게 화해했다. 이제 별로 싸우지 않는다. 서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구속이었다. 상대를 소유하고 내가 이해 받는 것이 중요했다. 이제는 친구와 같다. 친구와 자유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오랜 벗과 같은 아내, 친구와 같은 남편, 그것은 상대방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지지해 주는 것이다. 세속적인 판단을 넘어, 외로워할 때 그의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밤은 상대방 속에서 이런 자유를 찾는 시간이기도 하다.
밤은 또한 아이들로부터 벗어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도와 주어야할 숙제, 충고, 따끔한 교육, 좁은 공간 속에 비벼대는 동안 팽팽해진 두 개의 다른 세대와의 갈등으로부터 잠시 쉬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이들 역시 부모로부터 자유로운 밤을 가끔 가지고 싶어한다. 잠시 밤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 보자.
우선, 부부 모두에게 특별한 장소를 하나쯤 가지는 것이 좋다. 어디든지 좋다. 인사동의 좋은 찻집일 수도 있고, 괜찮은 카페일 수도 있다. 술집일 수도 있고, 어느 거리의 벤치일 수도 있다. 혹은 그때 떨리는 마음으로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엿듣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그 돌담을 찾아가 담을 이루고 있는 돌맹이 하나 하나를 다시 만나보아도 좋다.
첫 키스를 나누었던 어느 나무 밑, 처음 손을 잡았던 곳, 그리하여 약간의 흥분과 그리움이 묻어 있는 곳을 찾아가 보라. 아내가 가장 아름다워 보였던 곳, 이 남자와 일생을 같이하기로 결심했던 곳, 바로 그런 곳들을 찾아가 보라.
그런 곳들은 그저 과거로 남아있는 곳이 아니다. 지금을 버티게 해주고, 아까의 싸움을 잊게 해준다. 초라한 남편의 등에 또 하나의 돌을 던진 실언, 대학을 나와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면서 간혹 느끼는 아내의 허탈감에 더욱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빈정거림, 그런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비수들을 던져버릴 수 있는 무장해제의 장소로 둘이 함께 가보라.
그리고 조금 어두운 거리를 걸어 나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돌아와 보라.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들과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 보라. 꾸벅꾸벅 졸고 있는 월급장이, 아직 절대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젊은 연인들의 속삭임과 눈빛, 잎을 벌리고 자고 있는 아주머니, 그저 피곤하고 무감각한 얼굴들, 몇몇 유쾌한 젊은이들의 수다와 웃음...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며 살아가는 것임을 생각해 보라.
또 이런 것은 어떨까. 그대가 좋아하는 가로수가 아름다운 서울의 거리나 공원 다섯 개를 생각하라. 그리고 남편에게도 다섯 개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 씩 말하게 하여 그대의 생각과 겹치는 거리로 나가라. 그 거리의 아름다움이 시작되는 곳 앞에 서라. 그리고 그 지점에서부터 그대들이 결혼한 햇수 번째에 있는 나무 앞에 서라. 손을 내밀어 그 나무의 둥치를 손바닥으로 만져 보라. 그리고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해 보라. 마음을 보내라. 크고 멋있으면
거기에 등을 기대보라. 다른 나무에 비해 작고 초라할 수도 있다. 그래도 버리지 말라. 똑같이 마음을 보내라. 도와주겠다는 강한 마음을 보내라.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버리고 산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에는 중요한 것들이 참으로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나무나 돌, 혹은 산과 바다, 작은 새 또는 꽃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듣는 마음을 상실했다.
어른이 되면서 동화의 세계를 잃어버림으로써 우리는 꿈을 상실하게 되었다. 산다는 것이 현실뿐이라고 생각해 가면서 우리는 매력을 잃게 되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현실밖에 가지지 못하는 남자는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아직 꿈을 꾸고 있는 남편을 보면 가슴속에서 한숨이 인다. 산다는 것은 꿈과 현실의 중간쯤 어디엔가에 균형점이 있는 것 같다.
나무는 우리처럼 감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
은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초감각적 인지'라고 부른다. 나무를 잘 키우는 방법은 나무를 예뻐해 주는 것이다. 나무를 키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예외 없이 이 말을 이해한다.
살면서 우리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지켜보는 나무 한 그루를 친구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피곤할 때 이 나무에 기댄다. 그러면 대지에 뿌리 밖은 그 웅장하고 거대한 나무는 아낌없이 자신의 에너지를 나누어 준다. 다시 활력에 차서 숲을 나온다.
북한산에는 아름답고 웅장한 나무들이 많다. 바위 틈 사이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아한 몸매로 몸을 틀어 올라온 매력적인 나무들이 여럿 있다. 나는 그들과 친구이다. 산에 가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그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 있는 가로수들이 바로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 속에서 잘 자라주어 좋은 거리를 만들어 준 그들 중 하나와 인연을 맺고 가끔 찾아와 그 매끈한 허리를 한번 끌어안아 준다는 것은 힘을 준다. 그들의 침묵, 그 속에 힘이 있다. 어둠 속에서 그 굵고 힘찬 허리에서 한 남자에 대한 믿음을 건져내면 좋다. 그 푸르고 시원한 잎 속에서 한 여자를 보면 좋은 일이다.
가끔 함께 술을 한잔하는 것도 좋다. 술은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2차, 3차쯤 되더라도 둘이 그렇게 한잔씩 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이상하게 술은 나와서 먹는 것이 맛있다. 나는 TV의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보는 것이 하나 있다. '전원일기' 가 그것이다. 가끔 첫째 며느리 고두심은 속 상할 때 짱 박아둔 소주 한잔을 부엌에서 들이킨다. 참 맛있어 보인다. 하소연 할 데가 없으니 혼자 마신다.
혼자 마시는 술도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술은 역시 대작이 있어야 맛이 난다. 저녁 먹고 나와서 처와 밖에서 가끔 술을 한다. 집 근처에서 마시기도 하고 원정을 가기도 한다. 원정은 또 가는 맛이 있다. 술집 가는 길 자
체가 또 술집이다. 마치 여행을 하는 재미의 반은 지도를 펴놓고 계획을 짜는 것에 있듯이.
일년에 몇 번은 화려해질 필요가 있다. 형편이 되면 한 달에 한번 정도 한껏 성장을 하고 멋을 내면 좋다. 귀걸이를 하고 반지를 끼고, 거울 앞에 서서 옷을 열번 쯤 갈아 입으며, 밖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기다리기 시작한 남편으로부터 독촉을 받는 즐거움을 가질 권리가 있다.
연극이어도 좋다. 조수미의 방한 음악회이어도 좋고, 조동진의 리싸이틀이어도 좋다. 혹은 명성황후 같은 오페라여도 좋다. 예매를 하고 작은 기대 속에서 며칠을 보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여유로움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장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밖으로부터 외형적 아름다움을 스스로에게 더할 수 있다는 것은 허망하지만 인간적이다. 아름다움은 짧은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귀하다.
가까운 후배 하나와 노래방에 간 적이 있었다. 나는 음치에 가깝지만 그는 노래를 제법 한다. 얼핏 들은 영어가사의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던 것 같다.
둘이 함께 파티에 가기로 했다. 여자는 정성 들여서 치장을 한다. 맘에 안 들어서 이것저것 바꾸기도 한다. 남자에게 괜찮냐고 물어 본다. 남자는 오늘밤 당신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한다. 파티에 가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여자를 쳐다보는 것을 보며, 참 좋은 밤이라고 여긴다. 남자가 술에 취해, 여자에게 자동차 열쇠를 넘겨준다. 그리고 거듭 참 좋은 밤이었다고 생각한다. 원더풀 투나잇이었지 아마, 그 노래 제목이. 아내에게서 친구를 보 듯, 또 여자를 발견하는 밤들을 갖는다는 것은 괜찮은 일이다.
일년에 두어 번 쯤은 바람난 남자와 여자처럼 일상으로부터 도망쳐 보는 것도 좋다. 인생에는 약간의 연출과 드라마가 필요하다. 밤 늦게 떠나는 기차의 침대칸은 낭만적이다. 바퀴가 이음매를 지날 때 마다 오래된 과거와 연결되는 묘한 정신적 이완과 환각을 가져다준다. 마치 과거를 향해 달려가는 차 속에 몸을 싣고 있다는 멜랑코리를 준다.
살면서 때때로 감상적이 된다는 것은 비를 맞는 것 같다. 수분이 촉촉하게 옴 몸을 적셔준다. 침대칸은 다른 객석과 달리 어둡다. 불을 꺼 놓는다. 누어서 차창 밖을 바라보면 어둠 속에서 이미 잠들어 있는 마음과 강물과 산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깨어서 그들의 평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객전무의 눈을 피해 잠시 나란히 누어 귀에 소근대는 것도 스릴 있다.
사랑의 기술들은 대개 둘 외에는 반드시 비밀이어야하는 폐쇄성을 가지고 있다. 긴장이 없는 사랑은 재미가 없다. 마음대로해도 아무렇지도 않으면 다 된 반쓰 고무줄 같다. 결혼을 하고 빠빡한 긴장이 급격히 주는 것은 모두가 인정한 떳떳한 공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가끔 아내를데리고 안전하지 않은 공간 속에서 한 남자와 여자로 만나 보는 것이 필요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하나만 더 이상한 제의를 해보도록 하자. 특히 남편들에 권하고 싶다. 저녁 먹고 함께 설거지를 하는 것도 좋다. 설거지를 하며 이것을 끝내고 뭘 할까를 논의해 보라. 저녁 설거지 자리는 매우 특별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하루 중 먹는 일을 끝냈다는 것을 뜻한다. 먹고 사는 일로부터 자유스러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먹고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고 있는가. 먹고살기 위해 얼마나 바빴으며 가지고 있는 시간을 모두 다른 사람
이 바라는 일을 하는 데 쓰며 살아왔는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소중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시간을 쓸 수 있었는가? 아직 살 날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가지고 있는 시간 중정말 나와 가족을 위해 보내고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
독일의 민요에 이런 것이 있다.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 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죽는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가고 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러고도 우리는 태평하다.
참 놀라운 일이다.
나는 손톱에 아무 것도 칠하지 않은 여인들을 보면 좋다. 약간 거친 손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마음을 놓는다. 인간의 손은 인간을 동물과 차별화 시킨 아주 중요한 신체적 특징 중의 하나이다. 손으로 사랑하고 느끼고 만들어 낸다. 그리고 손으로 먹고, 음식을 치우고 씻어내고 다시 먹을 수 있도록 깨끗한 식기로 닦아낸다. 손은 곧 가사이며 노동이다.
사회로 나와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화장을 하고 약간의 치장을 하지만, 그들의 손에 여전히 남아 있는 혼자 있을 때의 흔적에서 오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비로소 우리가 현실 속에 함께 있고 그 곳으로부터 오는 중압과 의미를 같은 조건으로 느끼고 해석하는 동일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안심한다. 손은 얼굴만큼 다양한 정보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손이 주는 정보는 매우 정확하다. 속이기 어렵다.
마지막 설거지를 함께 끝내고 나서 오늘 저녁 이후의 시간은 살기 위해서 남에게 팔아야하는 시간이 아님을 깨닫고 즐겨보자. 남에게 제공한 모든 시간을 끝내고, 이제 오직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남아있음을 감사하자. 두사람의 마음의 공명이 이루어지면 무엇을 해도 즐겁다. 함께 있음으로 하여 세상은 살만한 것이 된다.
밤에 함께 미사리로 와 젊은 시절 주위를 맴돌던 송창식 노래를 몇 곡 들을 수도 있다. 그저 그 곳을 지나쳐 팔당대교를 지나 다산 묘소 있는 능내에서 두물머리로 부터 합쳐진 남한강과 북한강이 댐 위에서 가장 크게 호수와 같이 퍼져 흐르는 모습을 별빛 속에 보아도 좋다.
고수부지로 나와 함께 배를 타도 좋다. 아니면 불빛을 휘황하게 밝힌 유람선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강안에 서로 잠시 앉아 있어도 좋다. 삶이 강물 같다고 느껴도 좋고, 어둠 같다고 목이 메어도 좋다.
배가 지나며 불빛을 떨어뜨린 곳의 반짝이는 물살처럼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몇 순간을 가진 것이 인생이라고 느껴도 좋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인지 물어 보아도 좋다. 우리가 서로에게 하나의 떨림이고, 그 진동이 어느 순간 합해져 하나의 흥으로 상승하면 그날은 무엇을 해도 즐겁다.
IP *.208.140.138
밤은 좋다. 어두움은 외부 세계로부터의 정보 유입을 제한함으로써 우리를 편하게 한다. 마음이 쉴 수 있는 그늘을 준다. 마음은 밀실을 필요로 한다. 어두움은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깊이를 제공한다. 밤을 잘 보내면 다음날 맞는 햇빛의 의미가 달라 질 수 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따라 다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30년을 데리고 다니고 40년, 혹은 그 보다 더 데리고 다녀도 잘 모르는 것이 '자기 자신'이다. 어디를 가도 따라다닌다. 심지어 꿈 속에 까지 따라 온다. 밤은 자신과 많이 친해지는 시간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 본다'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모습이 가장 잘 비추어 보이는 거울은 아내나 남편이다. 함께 많이 지냈기 때문이다. 잘 때도 같이 잔다. 마치 자기 자신처럼. 그래서 부부는 '같은 마음 같은 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신과 잘 지낸다는 것은 아내와 잘 지내는 것을 말한다. 혹은 그대의 남편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꿈을 이야기하고, 욕망을 표현하고, 외로움을 하소연할 수 있다. 좋은 아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좋은 남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조금씩 닮아지고 조금 씩 만들어져간다. 서로 아름다운 모습들만 닮아지기를 바란다. 밤은 바로 고즈넉한 어둠으로 둘을 둘러쌈으로 서로 비슷한 명암을 가진 닮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준다.
살다 보면 서로 싸우기도 한다. 최악의 선택을 했다고 믿는 그 순간 초라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 등을 돌리는 순간 불행한 자신과 만나게 된다. 나와 처는 20년간을 살아왔다. 숫하게 싸웠다. 숫하게 화해했다. 이제 별로 싸우지 않는다. 서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구속이었다. 상대를 소유하고 내가 이해 받는 것이 중요했다. 이제는 친구와 같다. 친구와 자유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오랜 벗과 같은 아내, 친구와 같은 남편, 그것은 상대방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지지해 주는 것이다. 세속적인 판단을 넘어, 외로워할 때 그의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밤은 상대방 속에서 이런 자유를 찾는 시간이기도 하다.
밤은 또한 아이들로부터 벗어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도와 주어야할 숙제, 충고, 따끔한 교육, 좁은 공간 속에 비벼대는 동안 팽팽해진 두 개의 다른 세대와의 갈등으로부터 잠시 쉬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이들 역시 부모로부터 자유로운 밤을 가끔 가지고 싶어한다. 잠시 밤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 보자.
우선, 부부 모두에게 특별한 장소를 하나쯤 가지는 것이 좋다. 어디든지 좋다. 인사동의 좋은 찻집일 수도 있고, 괜찮은 카페일 수도 있다. 술집일 수도 있고, 어느 거리의 벤치일 수도 있다. 혹은 그때 떨리는 마음으로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엿듣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그 돌담을 찾아가 담을 이루고 있는 돌맹이 하나 하나를 다시 만나보아도 좋다.
첫 키스를 나누었던 어느 나무 밑, 처음 손을 잡았던 곳, 그리하여 약간의 흥분과 그리움이 묻어 있는 곳을 찾아가 보라. 아내가 가장 아름다워 보였던 곳, 이 남자와 일생을 같이하기로 결심했던 곳, 바로 그런 곳들을 찾아가 보라.
그런 곳들은 그저 과거로 남아있는 곳이 아니다. 지금을 버티게 해주고, 아까의 싸움을 잊게 해준다. 초라한 남편의 등에 또 하나의 돌을 던진 실언, 대학을 나와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면서 간혹 느끼는 아내의 허탈감에 더욱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빈정거림, 그런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비수들을 던져버릴 수 있는 무장해제의 장소로 둘이 함께 가보라.
그리고 조금 어두운 거리를 걸어 나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돌아와 보라.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들과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 보라. 꾸벅꾸벅 졸고 있는 월급장이, 아직 절대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젊은 연인들의 속삭임과 눈빛, 잎을 벌리고 자고 있는 아주머니, 그저 피곤하고 무감각한 얼굴들, 몇몇 유쾌한 젊은이들의 수다와 웃음...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며 살아가는 것임을 생각해 보라.
또 이런 것은 어떨까. 그대가 좋아하는 가로수가 아름다운 서울의 거리나 공원 다섯 개를 생각하라. 그리고 남편에게도 다섯 개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 씩 말하게 하여 그대의 생각과 겹치는 거리로 나가라. 그 거리의 아름다움이 시작되는 곳 앞에 서라. 그리고 그 지점에서부터 그대들이 결혼한 햇수 번째에 있는 나무 앞에 서라. 손을 내밀어 그 나무의 둥치를 손바닥으로 만져 보라. 그리고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해 보라. 마음을 보내라. 크고 멋있으면
거기에 등을 기대보라. 다른 나무에 비해 작고 초라할 수도 있다. 그래도 버리지 말라. 똑같이 마음을 보내라. 도와주겠다는 강한 마음을 보내라.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버리고 산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에는 중요한 것들이 참으로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나무나 돌, 혹은 산과 바다, 작은 새 또는 꽃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듣는 마음을 상실했다.
어른이 되면서 동화의 세계를 잃어버림으로써 우리는 꿈을 상실하게 되었다. 산다는 것이 현실뿐이라고 생각해 가면서 우리는 매력을 잃게 되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현실밖에 가지지 못하는 남자는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아직 꿈을 꾸고 있는 남편을 보면 가슴속에서 한숨이 인다. 산다는 것은 꿈과 현실의 중간쯤 어디엔가에 균형점이 있는 것 같다.
나무는 우리처럼 감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
은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초감각적 인지'라고 부른다. 나무를 잘 키우는 방법은 나무를 예뻐해 주는 것이다. 나무를 키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예외 없이 이 말을 이해한다.
살면서 우리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지켜보는 나무 한 그루를 친구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피곤할 때 이 나무에 기댄다. 그러면 대지에 뿌리 밖은 그 웅장하고 거대한 나무는 아낌없이 자신의 에너지를 나누어 준다. 다시 활력에 차서 숲을 나온다.
북한산에는 아름답고 웅장한 나무들이 많다. 바위 틈 사이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아한 몸매로 몸을 틀어 올라온 매력적인 나무들이 여럿 있다. 나는 그들과 친구이다. 산에 가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그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 있는 가로수들이 바로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 속에서 잘 자라주어 좋은 거리를 만들어 준 그들 중 하나와 인연을 맺고 가끔 찾아와 그 매끈한 허리를 한번 끌어안아 준다는 것은 힘을 준다. 그들의 침묵, 그 속에 힘이 있다. 어둠 속에서 그 굵고 힘찬 허리에서 한 남자에 대한 믿음을 건져내면 좋다. 그 푸르고 시원한 잎 속에서 한 여자를 보면 좋은 일이다.
가끔 함께 술을 한잔하는 것도 좋다. 술은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2차, 3차쯤 되더라도 둘이 그렇게 한잔씩 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이상하게 술은 나와서 먹는 것이 맛있다. 나는 TV의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보는 것이 하나 있다. '전원일기' 가 그것이다. 가끔 첫째 며느리 고두심은 속 상할 때 짱 박아둔 소주 한잔을 부엌에서 들이킨다. 참 맛있어 보인다. 하소연 할 데가 없으니 혼자 마신다.
혼자 마시는 술도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술은 역시 대작이 있어야 맛이 난다. 저녁 먹고 나와서 처와 밖에서 가끔 술을 한다. 집 근처에서 마시기도 하고 원정을 가기도 한다. 원정은 또 가는 맛이 있다. 술집 가는 길 자
체가 또 술집이다. 마치 여행을 하는 재미의 반은 지도를 펴놓고 계획을 짜는 것에 있듯이.
일년에 몇 번은 화려해질 필요가 있다. 형편이 되면 한 달에 한번 정도 한껏 성장을 하고 멋을 내면 좋다. 귀걸이를 하고 반지를 끼고, 거울 앞에 서서 옷을 열번 쯤 갈아 입으며, 밖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기다리기 시작한 남편으로부터 독촉을 받는 즐거움을 가질 권리가 있다.
연극이어도 좋다. 조수미의 방한 음악회이어도 좋고, 조동진의 리싸이틀이어도 좋다. 혹은 명성황후 같은 오페라여도 좋다. 예매를 하고 작은 기대 속에서 며칠을 보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여유로움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장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밖으로부터 외형적 아름다움을 스스로에게 더할 수 있다는 것은 허망하지만 인간적이다. 아름다움은 짧은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귀하다.
가까운 후배 하나와 노래방에 간 적이 있었다. 나는 음치에 가깝지만 그는 노래를 제법 한다. 얼핏 들은 영어가사의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던 것 같다.
둘이 함께 파티에 가기로 했다. 여자는 정성 들여서 치장을 한다. 맘에 안 들어서 이것저것 바꾸기도 한다. 남자에게 괜찮냐고 물어 본다. 남자는 오늘밤 당신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한다. 파티에 가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여자를 쳐다보는 것을 보며, 참 좋은 밤이라고 여긴다. 남자가 술에 취해, 여자에게 자동차 열쇠를 넘겨준다. 그리고 거듭 참 좋은 밤이었다고 생각한다. 원더풀 투나잇이었지 아마, 그 노래 제목이. 아내에게서 친구를 보 듯, 또 여자를 발견하는 밤들을 갖는다는 것은 괜찮은 일이다.
일년에 두어 번 쯤은 바람난 남자와 여자처럼 일상으로부터 도망쳐 보는 것도 좋다. 인생에는 약간의 연출과 드라마가 필요하다. 밤 늦게 떠나는 기차의 침대칸은 낭만적이다. 바퀴가 이음매를 지날 때 마다 오래된 과거와 연결되는 묘한 정신적 이완과 환각을 가져다준다. 마치 과거를 향해 달려가는 차 속에 몸을 싣고 있다는 멜랑코리를 준다.
살면서 때때로 감상적이 된다는 것은 비를 맞는 것 같다. 수분이 촉촉하게 옴 몸을 적셔준다. 침대칸은 다른 객석과 달리 어둡다. 불을 꺼 놓는다. 누어서 차창 밖을 바라보면 어둠 속에서 이미 잠들어 있는 마음과 강물과 산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깨어서 그들의 평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객전무의 눈을 피해 잠시 나란히 누어 귀에 소근대는 것도 스릴 있다.
사랑의 기술들은 대개 둘 외에는 반드시 비밀이어야하는 폐쇄성을 가지고 있다. 긴장이 없는 사랑은 재미가 없다. 마음대로해도 아무렇지도 않으면 다 된 반쓰 고무줄 같다. 결혼을 하고 빠빡한 긴장이 급격히 주는 것은 모두가 인정한 떳떳한 공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가끔 아내를데리고 안전하지 않은 공간 속에서 한 남자와 여자로 만나 보는 것이 필요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하나만 더 이상한 제의를 해보도록 하자. 특히 남편들에 권하고 싶다. 저녁 먹고 함께 설거지를 하는 것도 좋다. 설거지를 하며 이것을 끝내고 뭘 할까를 논의해 보라. 저녁 설거지 자리는 매우 특별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하루 중 먹는 일을 끝냈다는 것을 뜻한다. 먹고 사는 일로부터 자유스러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먹고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고 있는가. 먹고살기 위해 얼마나 바빴으며 가지고 있는 시간을 모두 다른 사람
이 바라는 일을 하는 데 쓰며 살아왔는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소중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시간을 쓸 수 있었는가? 아직 살 날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가지고 있는 시간 중정말 나와 가족을 위해 보내고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
독일의 민요에 이런 것이 있다.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 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죽는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가고 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러고도 우리는 태평하다.
참 놀라운 일이다.
나는 손톱에 아무 것도 칠하지 않은 여인들을 보면 좋다. 약간 거친 손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마음을 놓는다. 인간의 손은 인간을 동물과 차별화 시킨 아주 중요한 신체적 특징 중의 하나이다. 손으로 사랑하고 느끼고 만들어 낸다. 그리고 손으로 먹고, 음식을 치우고 씻어내고 다시 먹을 수 있도록 깨끗한 식기로 닦아낸다. 손은 곧 가사이며 노동이다.
사회로 나와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화장을 하고 약간의 치장을 하지만, 그들의 손에 여전히 남아 있는 혼자 있을 때의 흔적에서 오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비로소 우리가 현실 속에 함께 있고 그 곳으로부터 오는 중압과 의미를 같은 조건으로 느끼고 해석하는 동일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안심한다. 손은 얼굴만큼 다양한 정보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손이 주는 정보는 매우 정확하다. 속이기 어렵다.
마지막 설거지를 함께 끝내고 나서 오늘 저녁 이후의 시간은 살기 위해서 남에게 팔아야하는 시간이 아님을 깨닫고 즐겨보자. 남에게 제공한 모든 시간을 끝내고, 이제 오직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남아있음을 감사하자. 두사람의 마음의 공명이 이루어지면 무엇을 해도 즐겁다. 함께 있음으로 하여 세상은 살만한 것이 된다.
밤에 함께 미사리로 와 젊은 시절 주위를 맴돌던 송창식 노래를 몇 곡 들을 수도 있다. 그저 그 곳을 지나쳐 팔당대교를 지나 다산 묘소 있는 능내에서 두물머리로 부터 합쳐진 남한강과 북한강이 댐 위에서 가장 크게 호수와 같이 퍼져 흐르는 모습을 별빛 속에 보아도 좋다.
고수부지로 나와 함께 배를 타도 좋다. 아니면 불빛을 휘황하게 밝힌 유람선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강안에 서로 잠시 앉아 있어도 좋다. 삶이 강물 같다고 느껴도 좋고, 어둠 같다고 목이 메어도 좋다.
배가 지나며 불빛을 떨어뜨린 곳의 반짝이는 물살처럼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몇 순간을 가진 것이 인생이라고 느껴도 좋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인지 물어 보아도 좋다. 우리가 서로에게 하나의 떨림이고, 그 진동이 어느 순간 합해져 하나의 흥으로 상승하면 그날은 무엇을 해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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