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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6일 08시 21분 등록
술잔 들고 달에게 묻노라

내 지금 술잔을 멈추고 달에게 묻노니
저 푸른 하늘에 언제부터 있었던가
사람은 달에 오를 수 없건만
달은 사람을 오히려 따르는구나
휘엉청 밝은 것이 선녀궁의 거울인 듯
푸른 안개 걷히니 맑은 빛을 말한다.
밤이 오면 바다 위로 솟는 것만 보았더니
어찌 알았으랴 구름 속에 지는 새벽달을

달의 흰토끼는 갈봄 없이 약을 찧는데
항아는 홀로 누구와 벗하리
지금 우리는 옛달을 못 보건만
저기 저 달은 옛사람을 비추었으리
옛사람도 오늘 우리도 다 유수와 같은 것을
저 달을 보는 마음 모두 이와 같았으리
오직 원하노니 술잔 들고 노래할 ??
달빛이여 이 술잔을 길이 비추어다오.

李 白

파주문월 (把酒問月)

이 시는 730년 (30세) 장안 종남산에 머물며
하지장, 최종지, 옥진공주 등을 알게 되고
주중팔선(酒中八仙)과 노닐 때 쓴 작품이다.

항아(姮娥) : 회남자(淮南子)의 기록에 의하면 달의 요정이라 한다.
달나라의 선녀.



李 白 (701-762)의
자는 太白이며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 했으며
취선옹(醉仙翁)이라 자칭했다.

그의 조상들은 본래 감숙성(甘肅省)에 살았으나
죄를 지어 중앙아시아 쇄엽(碎葉)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백은 그곳에서 출생하였으나 5세 때 아버지를 따라
사천성 금양(錦陽)으로 이사 가서 살았다.

이백은 젊어서 유가의 경전과 백가의 학설을 배웠고
한때 도가에 심취하여 검술을 닦았으며 신선을 찾아다녔다.
심지어 그는 세인들의 불평과 원한을 풀어준다고
칼로 여러 사람을 찔러 죽이기도 했다.

20세 때부터 촉(蜀)의 명승고적을 유람하며 시를 짓기 시작했다.
25세 때 홀로 蜀을 나와 전국을 유람하며 도술을 닦으면서
"인민을 건지고" (濟蒼生) "인민을 편안하게 한다"(安黎元)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조정에 등용되기를 갈망했다.
이백은 27세 때에 재상이었던 허(許)씨의 손녀딸과 결혼했다.

730년에 장안에 와서 하지장(賀知章), 최종지(崔宗之),
옥진공주(玉眞公主)등을 알게 되는데, 그때 태자빈객(太子賓客)이던
하지장은 이백을 보고 적선인(謫仙人)이라 감탄하고 현종에게 추천했으나
등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42세 되던 742년에 도사 오균(吳筠)의
추천으로 이백은 비로소 한림대조(翰林待詔) 벼슬을 얻어
궁정시인(宮庭詩人)이 되었다.

그러나 궁정에 있다고 해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백은 간신 이림보(李林甫)를 바다거북을 잡는
미끼로 쓰겠노라 풍자하기도 하고, 취중에 황제를 알현하여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권세가를 능멸하곤 했다. 급기야 간신들의 참소로
이백은 사금환산(賜金還山), 즉 도사에게 돈을 주어 산으로 돌려보내는
형식으로 궁중에서 쫓겨났다.

벼슬살이를 3년 동안 하면서 봉건 상류층의 부패와 악덕을 체험한
후로부터 이백은 사회를 비판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44세이던 744년에 장안을 떠나 전국 각지를 방랑하기 시작했다.
그해 송(宋)씨 부인을 만나 재혼하였으며, 고적(高適)과 두보(杜甫)를
만나 양.송(梁 . 宋) 지역을 같이 여행하기도 했다.

이백은 10여 년의 방랑생활에서 두보처럼 민중의 생활에 접근한 것이 아니라
고고하게 만취하여 도술을 담론하면서 산수에 정을 쏟았다.
이에 두보는 이백에게 준 시에서 "한껏 마시고 미친 듯이 노래하고 부질없이
세월을 보내며 제멋대로 날뛰니 누구를 위한 영웅인가"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에게 민중을 구제하겠다는 열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백의 나의 55세이던 755년에 안록산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여산(廬山)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이백은 산남절도사에 임명되어
양자강 유역의 방어를 맡은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군영에 막료로
참가했으나, 영왕의 쿠데타가 실패하고 이린이 처단되자 이에 연루되어
757년 2월 심양(尋陽)에 투옥되었다. 그해 11월 송약사(宋若思),
곽자의(郭子儀)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처형을 면하고 야랑(夜郞)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4년 만인 759년에 사면을 받고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후에도 악양(岳陽), 강하(江夏) 등지를 계속 방랑했다.
761년 61세가 된 이백은 태위(太尉) 이광필(李光弼)이 대군을 거느리고
'안사의 난'의 잔당 사조의(思朝義)를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 참전을
결심하여 금릉(金陵)까지 갔으나 병이 나서 돌아왔다.

다음해 봄 62세의 아픈 몸으로 자기를 추천했던 도사 오균을 마지막으로
만나 고별하고, 11월 당도(當塗)의 현령으로 있던 족숙 이양빙(李陽氷)의
집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쓸쓸하게 죽었다.

이백은 협객, 자객, 은사, 도사, 모사, 주정뱅이였으며 시인이었다.
그는 천하에 고루 은혜를 베풀고 (兼善天下) 창생을 구제하고(濟蒼生)
나라를 안정시키고 (安社魏)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安黎民)는
유가사상으로 '시대를 구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저 혼자 착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苟無濟代心 獨善赤何益)'라는 결심으로 자신을 세상에 바치려고 했다.

반면에 그는 만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 밖에 우뚝 서서 절대자유를
추구하려는 도교사상에 젖어 세상의 모든 것을 멸시하고
신선을 그리워하며 민중의 속세에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한 모순된 사상 속에서도 그에게는 협객의 기질이 있어
제 몸을 던져 무력으로 법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봉건질서를 무시하고
봉건적인 관념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는 감히 요순을 경시하고
공자를 비웃으며, 귀족.권세가들을 대등하게 대하면서 신분차별의 예절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러한 태도가 협객의 성격을 넘어
계급적인 사상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민중에 가깝게 다가서지 못하고
신선 세계에서 놀았다.

그의 시는 웅위호매한 의기와 정사(情思)가 표일(飄逸)하여,
하늘 신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그의 초인적인 낭만주의는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백과 두보는 시성으로 추앙되지만
둘 다 봉건성을 뛰어넘지는 못하였다. 다만 민중의 소망과 민중의 삶을
그들의 시 속에 풍부히 담아내고 있는 민중시인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백은 하늘에서 노니는 도사였기에
낭만적이었고, 두보는 땅에서 노니는 유가였기에 사실적이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매우 대조적이다.

그의 시는 990여 수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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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대시가선집 2]중에서
편역 : 기세춘, 신영복
감수 : 이구영, 김규동
IP *.142.145.9

프로필 이미지
예닮
2006.12.06 08:48:42 *.100.135.206
일본 달 속에도 흰토끼가 있더군요. 어제가 올해의 마지막 보름달 이었는데, 다들 보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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