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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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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님께서 20115210505분에 등록한 글에 댓글을 답니다.

033일차 (5월 20일)

연수원에서 새벽을 맞이했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곳이다. 이곳에 오면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나무와 흙의 향기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오늘 새벽은 조금 고단했다. 2번째 읽는 책을 다 읽고 자야겠다는 욕심에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다. 딱 좋은 날씨다. 샤워를 하고 나니 개운하고, 까슬까슬한 이불을 덮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따라 새벽에 왜 이렇게 일어나기 싫던지.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지에 가서 마음껏 하루를 보내고 싶어하는 여행자의 마음과 같았다. 주섬주섬 넷 북을 챙겨서 교육장으로 갔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휘갈겨 쓰기. 아무도 보여주지 않고, 보지도 않을 것이며, 내 마음 속에 피어 오르는 것을 마구잡이고 적는 것. 소름이 끼치도록 즐거운 활동 중 하나며, 새벽에 나를 깨우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활동이 끝나고 표류했다. 많지는 않지만 필사를 해야 할지, 리뷰를 해야 할지, 칼럼 초고를 써야 할지 고민했다. 세 가지 모두 당기지 않았다. 오늘따라 왜 그런지 의무감에 뭔가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대로만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내 가슴이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만과 답답함, 불안감과 일종의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과감하게 노트북과 책을 덮었다. 몸을 뒤로 젖히고 발을 턱 하고 책상 위에 올려 놓고,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마음이 하자는 데로 내버려 두었다. 오늘은 그렇게 내 멋대로 새벽 시간을 흘려 보냈다.

샤워와 식사를 하고 다시 교육장에 돌아와 장영희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읽었다. 한 꼭지도 제대로 읽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다. 이내 책을 듣고, 수업을 들었다. 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수업에 몰입했다. 커뮤니케이션 수업이었는데, 강사가 강의를 잘 해서 휴대폰 녹음기로 녹음을 해두었다. 처음에 시작한 내용이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너무 흡사해서 나를 위한 강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가 의사소통의 문제뿐만 아니라 의식소통의 부재 때문에 생긴 문제이기도 하구나. 이 강사는 강의 경력 16년의 베테랑 강사였다. 자신의 저서는 없지만 16년이면 이미 1만 시간 법칙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또랑또랑한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에 숙련된 솜씨로 교육생을 사로 잡는다. 어떤 지점에서 교육생 들이 지루함을 느끼고 고개를 숙이고 딴 짓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어떤 수준의 능동적 활동이 교육생의 반발을 사지 않고 적극적 참여를 이끌 수 있는지 알고 있는 듯 했다. 의도적이지 않아 보이게 아주 노련하게 그것을 교육생들에게 적용했다. 내용의 깊이를 떠나 그런 강연 스킬에 대해서는 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강의를 들으며, 나의 미래 모습을 계속해서 투사해 보았다. 내가 저 강의를 진행한다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다. 내용의 깊이는 기본이고, 어려운 내용의 컨텐츠를 교육생의 수준에 맞게 먹음직스럽게 가공하여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강의를 해야 하는 컨텐츠는 전문성을 위함일까, 아니면 들으면 좋은, 나중에 언젠가 써먹을 수 있는 교양 강좌일까? 아니면 사부님처럼 가슴에 불을 지르고 심란하게 만들 수 있는 강연을 할 것인가? 궁극적으로 내가 지향하는 것은 사부님과 같은 강연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

지난 경주 여행 때 희석이 형에게 배운 점 하나. 좋은 강사의 핵심역량은 전달력이라는 것이다. 전달력은 내용의 깊이와 상관없다. 듣는 사람을 사로잡는 전달력은 팬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예인의 퍼포먼스와 같은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말의 요지였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콘텐츠의 질적 측면과 깊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콘텐츠 전문가의 역량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사실 어떠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물론 콘텐츠도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말이다.

속 빈 강정 같은 인기강사. 우후죽순처럼 한 순간 일어섰다. 한 순간 스러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우선을 일가를 이루어야겠다. 강연은 그 다음이다. 나만의 전문분야에 뜻을 세우고, 그 분야에서 1인자가 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할 것이다. 그 분야가 곧 탄생 혹은 조합될 것 같다는 예감이다. 강연은 그 가운데서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수련할 것이다. 역시나 중요한 것은 분야를 정하고 깊이 있게 그것을 파 내려 가는 것이다. 그 분야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자신의 마음과 마주하게 하는 것, 더불어 사람들과 더불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내가 걸어온 길이 담겨져 있는 것 등등 아직은 그저 가능성의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곧 창조적이고 차별적 조합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서울에 도착하니 5시쯤 되었다.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양평에 내려가기 위해 차를 주차해 놓은 종합운동장으로 곧바로 향했다. 탄천 부근을 산책하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차 안에 머물렀다. 아침에 읽다 만 에세이를 읽었다. 가슴에 사무치는 구절들이 있어 밑줄을 긋고, 아래 여백에 내 생각들을 적었다. 연구원 활동을 하면서 생긴 좋은 습관 들이다. 예전 같았다면 한 권을 먹어 치우기 위해 한 꼭지를 읽고 곧 바로 다음 꼭지로 넘어가는데 급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한 꼭지를 읽고 눈을 감고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지켜보다 살포시 떠오르는 생각들을 옮겨 적었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지는 것을 느낀다. 늘 이렇게 맑고 가벼운 독서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독서는 참 매력적이다. Secret Garden의 The Promise를 들으니 비 오는 바깥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퇴근했다는 아내의 메시지가 왔다.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하나가 내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지루하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하루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는 삶의 여백을 안겨준 소중한 에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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