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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일 13시 18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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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한 귀퉁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야 있건 말건 알바 아닌 무심한 태양은 제 혼자 발랄함을 넘어 화사하기까지 한 자태로 주체할 수 없는 빛을 뻗쳐들며 침대머리맡까지 사정없이 들이쳤지만 늦은 잠과 술에 취한 그는 태평한 세월의 낮잠처럼 잠만 쿨쿨 잘도 자고 있었다.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삶을 다 산 여편네처럼 망연자실 머리에 손을 얹고 삶의 무게로 인한 두통을 눌러 다소나마 해소하려던 나는 객실의 전화벨이 울리자 그를 흔들어 깨웠다.

내가 지금 어디에 누구와 있으면서 인생을 포기해 버릴 것 같은 분노와 비참함을 애써 참아 가며 멍하니 있는지 그 호텔의 객실로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아무도 없거니와, 더군다나 새벽이 지나 거의 아침 일찍 들어온 그곳에 전화를 할 사람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그를 찾는 사람임에 분명하다고 생각되어서 자동적으로 그를 찾는 전화임을 짐작하였기 때문이다. 아마, 그 후배겠지 하면서.

전화를 받은 그는 상대방이 무슨 약속인가를 취소하자 같이 가자고 한 번 더 운을 띄우는 듯 했고 상대방은 이유를 달아가며 거절을 하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은 그가 호흡인지 한숨인지를 크게 내쉬더니 서울로 올라가자고 하였다. 내심 이혼 도장을 찍으러 가자는 소리였다.

모르겠다. 10년 전 정확히 11년 전, 그때는 내 몸의 실핏줄 한 가닥 그의 몸에 솜털 하나도 다 샅샅이 기억에 떠올랐었는데 지금은 아득해 졌다. 너무 잊어지지 않아서 수면제를 털어 넣고 잠을 청한 적도 있었고, 잊으려고 세월아 제발 빨리 흘러가 달라고 나 어서 빨리 늙어버려야 한다며 서른 중반의 활활 타오르는 육신의 불덩이를 말아감은 채 어서 쉰이 넘었으면 좋겠다고 애원하듯 가슴을 쥐어뜯으며 동동거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저 또다시 목이 메일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 아침 세수는 했는지, 얼마나 힘들고 피곤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별로 말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그의 말과 태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항상 있어왔던 그의 행동과 버릇처럼, 그날도 東으로 간다고 하다가 西로 갈지 모른다고 내심 콧방귀나 뀌듯 마음 한편으로는 그렇게 한껏 노려보고 있었을 법도 하다. 때로는 가장 밀착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품으며 천연덕스럽게 부둥켜안을 때의 얄궂음과 같이. 네가 속인 나와 너를 연기한 나처럼.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좋을 때는 솜사탕보다 달콤하고 싫어질 때는 역겨운 시궁창보다 보기 싫은 것을. 하루에도 열두 번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감쪽같이 속이고 연극하고 기어들고 뱉는 것이 때로의 사는 모습이 아니던가. 물론 아니지, 아니어야하고 말고. 그러나 가식의 인간들아, 네온사인 아래서 흔들리는 청춘들아, 당신들은 그러하지 않더냐. 정녕 너는 그렇지 않더냐. 내 앞에 그는 그랬다. 내 삶은 그렇게 속절없이 흩날리더라. 너희들도 모두 그랬다면 내가 덜 외로웠을까. 나라서 이 만큼이라도 견디며 사는 걸까 나는 의문스럽구나, 인생아.

게다가 지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너/당신들의 모습이 天福이라고 간단히 말하는 겁 없는 신학자야, 그대는 한갓 운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냐. 그렇지 않고서 어찌 지금의 모습이 천복이라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껄여댈 수 있는 것이더냐. 이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무덤 속으로나 사라져버린 신학자 조셉 캬라멜아.

그날 나는 무슨 대책을 세운 것도, 꾀를 부려보지도 않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디까지 어떻게 가고 내게 무얼 보여주고 싶은 건지 그를 통해 똑똑히 알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의 승용차로 부산 해운대의 P호텔에서 서울로 올라왔겠지. 어느 휴게소에 들렸더라? 생각나지 않는다. 무얼 먹었지? 올라오기 전에 호텔 근처에서 복국을 먹었던가? 그가 해장을 했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나는 먹성이 좋아 별로 가리는 것이 없기도 하지만 언제나 식단은 그를 위주로 한 것이었다. 그에게 먼저 선택권이 있는 것이다. 그게 항상 내 마음이었다. 그날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나도 복국을 좋아한다. 숙취에는 그만이다. 그 국물은 얼마나 시원한가.

그는 업무관계로 전국을 잘 누비고 다니기 때문에, 그리고 그곳은 그의 행동 반경안의 사전거리에 놓여 있는 구역이었기 때문에 의례 그가 잘 알고 그의 입맛에 맞는 것을 그가 정하곤 했다. 그날도 그 집에 처음 들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무슨 일로 어떻게 갔던지 간에.

남편의 밥상머리에 마주 앉은 여편네의 모습을 보면 그 여편네가 제 서방을 얼마나 섬기고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다. 밥을 푸는 모양, 숟가락 챙겨드는 순서, 반찬을 당겨놓는 것 등만 보아도 그녀의 심중에 그들 서방들이 어떤 심사로 어떤 존재로 박혀있는지 반드시 표가 난다.

병신머저리 같이 되먹지 못한 인종들은 그것을 잘 모르고 당연한 일인 줄 알며 또 마땅히 그리해야 하는 것인 양 거들먹거리면서 지랄을 떨고 자빠졌지만은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소리이다. 그런 여인의 사랑과 헌신적 배려와 신뢰를 모르는 그런 족속의 일당들이 집밖으로 나가서 해대는 짓거리란, 고작 남의 등골이나 빼먹자고 달려드는 천하에 하잘 것 없는 쓰레기 같은 계집들과 마주 앉아서 쌍방 간에 침을 질질 흘려가며 해대는 허튼 수작이야말로 보지 않아 본 듯하게 빤하지 않더냐. 그런 팔푼이들은 제 구실을 감추기 위해 집구석에 들어가서는 온갖 똥 폼을 다 잡아가며 가장 운운 후까시를 잔뜩 잡고 발광을 하지만, 나가서는 싸가지도 없이 남의 서방 바짓가랑이나 흘깃거리는 꼴통들과 마주 앉아서는 머리통을 쥐어 박혀 가면서도 좋다고 실실 쪼개며 혀를 날름거리어 처먹고 자빠졌거나, 어떻게 하면 넓적다리라도 한 번 더듬어볼까를 애써 그럴 듯한 노가리를 풀어가며 마치 논리적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양 잘난 체를 해대는 것이다. 개뿔도 아닐수록 요리조리 목청껏 뺑기칠을 처발라가며 번드리하게 포장한 채 군침을 꼴깍 삼키면서, 그 다리가 그 다리인양 닭다리를 뜯어 발기고 끓어오르는 흥분과 황홀 속에 애를 바삭바삭 튀겨 오금이 졸아들듯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이겠다. 그런 종자들은 집에는 도통 흥미가 없다. 늦게 들어가야 도리어 마음이 편하고 제 집구석을 남의 집인 양 서성인다. 들어가서는 회사일이 골치가 아픈 것처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침을 딱 떼고 허풍을 떨어댄다. 양심이 있어 저도 속으로는 찔리는지 눈깔을 이리저리 희번덕거리거나 흘끔흘끔 상대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이다. 에라, 썩을 잡것들아.

그는 운전을 하다가 피곤하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도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잠시 눈을 부쳤다가 운전을 하곤 했다. 무리하게 운전을 지속하는 것보다야 좋은 습관이다. 술을 자주 마시는 관계로 지방간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더욱 피로감을 호소하면서도 알코올중독자처럼 술을 줄이지 않고 자주 많이 마셔댔다.

미친 사람이 제가 미쳤다고 하지 않듯이 알코올중독자들도 자신이 알코올중독자인 줄을 모른다. 다만 생각이 안 난다고 하거나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뗀다. 자고 나서 보니 내가 저 사람을 때렸다고 한다고 하는 식이고, 영문을 모른다는 듯이 도리어 당한 사람처럼 펄펄 뛰며 잘도 연기를 해댄다. 그리고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본인들도 생각하지만 중독처럼 술이 당긴다. 스스로의 다짐을 깜박 잊어버리는 것이다. 술을 마셔야 세상이 편히 돌아가서 안심을 하고, 그래야 마음이 넓어지는 사람마냥 너른 행동을 한다. 마치 실제로 넓어지는 것 같기도 한 착각을 서로에게 불러일으키면서. 술을 마셔야 좋은 분위기가 잡히기 때문에 집안에서도 자주 술 마시는 광경을 만든다. 그러면 옆에 있는 마누라도 따라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래야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을 해서다. 또 술이 취해야 덜 갑갑해하거나 짜증을 안 부리니까 말이다. 술이 취했으니 그러다가 이내 잠에 빠져든다. 무조건 임기응변臨機應變식으로 대충 넘어가고 만사를 잘 맞추어 주는 척 하지만 그것이 본심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 불씨는 남아서 터질 준비를 하며 잠드는 것이다. 그러니 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만 사실상은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한쪽은 대화를 시작하려고 술을 마시고 한쪽은 끝내려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화 없는 대화를 나누며 돕고 마시는 것이다. 빛 좋은 개살구들처럼.

대게의 순진한 여편네들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술을 마시는 것을 도와 서방이 마셔대는 양을 덜어주겠다는 심사로 마주 앉아 홀짝홀짝 따라 마신다. 그러다보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제법 술이 늘어가게 마련이다. 마시면 는다. 하면 되는 세상의 모든 일과 같이.

어느 날 무심코 갓길에 자동차를 세울 때와도 같이 그러다가 얼결에 달려드는 다른 차에 맥없이 치어버리기도 하는 불상사처럼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도로 중간에 아무렇게나 세워두고 깊은 낮잠에 빠져들면서 마치 성질 더러운 누군가가 우리를 치고 달아나버리도록 방치하기 위해 이판사판 공사판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고속도로 운전 중에 휴게소 등에 들러 자주 쉬고는 하였는데 그 즈음 노안이 오면서 중앙선이 두 줄로 보인다거나 눈이 침침하고 뿌옇다는 소리를 자주 했다. 그러기에 졸리거나 눈이 피로하면 바로 쉬고는 해서 어느 휴게소를 단골로 자주 들르거나 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움직였고 평소의 의사 처리도 대부분 그런 방식이었다. 이것은 나와 아주 반대적 성향이다. 나는 시작하면 끝을 내야하고 결정을 했으면 어지간해서는 변동 없이 그렇게 해야 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징징거림과 하는 것은 별개다. 징징거리면서도 하고 해보는 유형인 것이다. 안 되는 것은 할 수 없지만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미련 곰탱이인 것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맛을 아니까 말이다. 아마도 멘사클럽 출신들은 웃을 것이다. 아니 웃는 시간도 아까워 이 글을 읽지 않을 테니 신경 쓸 것 없겠다.

나는 그가 피로를 푸는 낮잠을 잠시 즐기는 동안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곤 했다. 잠이 잘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운전할 때면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그가 졸려할까 봐서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웬만해서는 더욱 잠이 오지 않았다. 더러 졸려도 참았다. 마치 그게 내 몫의 인생이기나 한 것처럼 또는 내 도리이기나 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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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울산의 한 귀퉁이에 살았다. 시내에서 들어가려고 하면 운행되는 차가 별로 없어서 거의 택시를 타곤 했는데 한 30분 정도 타고 더 가야하는 제법 들어가는 변두리여서 새 아파트임에도 집값이 아주 저렴하였다. 그래서 그곳까지 들어가서 살게 된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마치 꼭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내게 말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은 경주로 출퇴근을 하였다. 나는 그때에 그런 것조차도 전혀 의심할 줄 모르고 그의 말만 철썩 같이 믿고 사는 팔푼이였다. 아이 셋을 두고 어떻게 그리 자유롭게 이혼을 하려고 전국을 누비며 싸돌아 다녔다는 건지 의아해 하는 독자들이 혹시 있을지 모르겠다. 이때는 이미 시가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울산에 처박혀 있다가 작정을 하고 몇 달씩 이나 집구석에 들어오지 않는 그의 행방을 찾아 가슴에 칼날을 바싹 드리우고 반질반질 갈아가며 날뛰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알 수도 없었는데 천우신조天佑神助인지 천재일우千載一遇인지 신의 가호가 넘쳐 우연히 알게 되어 남편이 있는 그곳까지 초행길을 울산에서 부산까지 쳐들어갔던 것이다. 처음 그곳에서 남편을 보는 순간 -솔직히 내 심장이 더 떨려서 자세히 보지도 못했지만 - 첫 눈에 그 여자가 그 여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들끼리 생지랄 난리 부르스를 치면서 껍죽거리며 엉겨 붙어가며 놀아 재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더럽고 역겨워서 알 필요도 없지만은 그 여자가 그 여자가 아닌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야 그토록 시치미를 떼 왔으니 빼도 박도 못하고 피할 길도 없어 눈만 멀뚱멀뚱 함구하고 있었지만, 나도 눈이 있는지라 그 정도는 아무리 경험이 없다고 해도 대번에 알아차릴 만 했다. 인간아, 솔직히 실망했다. 너!!! 그것 밖에는 안 되냐? 병신머저리 같으니라구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말이다. 왜 아니 그런 생각이 들겠는가. 자신의 행동을 은폐하기 위해 도리어 어깃장을 놓아가며 내게 달려들어 나를 되잡으려 할 때면 아마 스스로도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표정에다 그에 걸 맞는 폭언들이 함께 튀어 나오게 마련이다. 분함이 오래 가고 사무침이 오래 가고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을 때 확증 때문에 속을 끓여본 사람들은 다 안다. 미치고 팔딱 뛰다가 팍 고꾸라져 죽을 노릇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의 유형은 똥 누러 갈 때와 똥 누고 와서 전혀 딴 판인 년넘들이다. 처먹을 때와 뱉을 때가 다른 것이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부모가 있고, 비싼 등록금을 내고 교육을 받았다는 것들이 하는 짓거리가 고작 남의 간에 쓸개만 빼먹는 인종들을 나는 다 경멸한다. 그리고 한평생 기생하여 피를 빨아 대며 빌붙어 살면서도 전혀 고마운 줄을 모르고 적반하장에 안하무인이며, 모르는 어디의 누군가에게 모두가 제덕에 먹고 사는 양 거짓부렁을 해대고 큰소리를 뻥뻥 쳐가며 씨부리고 자빠졌는 망종들은 쳐다보기도 싫다. 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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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바람을 피워대거나 그렇다고 그런 이중의 작태를 그대로 답습하여 살아가기는 더욱 싫다. 어떤 스님이 내게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년아, 네가 왜 그리 펄펄 뛰는 줄 아느냐? 네가 그렇게 하지 못해서 이니라.” 그럴 주제가 못되니 그리 펄펄 뛰는 거라는 말에 기가 막히면서도 코가 찬 웃음이 마구 터져 나왔다. 나는 내가 신성하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고이 간직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배웠고 그것이 옳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네가 그리 하지 못해서 그러는 거라는 스님의 말씀은 나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였다. 10년 동안 열녀상이라도 받고 싶은 과수댁처럼 아직도 앙심을 품고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꼴이던지 나는 그만 깔깔대고 박장대소하며 죽겠다고 웃고 말았다. 그래요, 그렇군요. 맞다, 맞아. 제기랄.

그러나 내가 컥컥 거리고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은 10년 동안 나를 버린 인간에 대해, 내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아빠를 오롯이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었기 때문에 나는 진정 스님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것은 그에 대한 평가가 아니고 나라는 사람에 대한 해답이었으니.

나는 이성에 관심이 없나? 왜, 나도 여자다. 나는 섹스를 싫어하는가? 그건 아니다. 함부로 아무 놈하고 붙어먹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그런데 왜 못하나? 재미나 보려는 쌍것들의 품에 안겨 하루살이 정을 나누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괜찮은 놈이 나타나면 고려해 볼 수는 있나? 그래도 아니다. 아이들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왜 아이들이 문제가 되나? 어미 노릇을 제대로 못해서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 아닌가? 처음엔 좋게 화해될 거라 믿은 점이 컸다. 기다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심사도 있었다. 힘들지 않았나? 힘들지 않았다. 그럼 무슨 일로 낙을 삼고 살았나? 돈을 벌며 일과 자격증 등의 공부를 한답시고 쫓아다니고 헤매면서 살았다. 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나? 사랑 때문이었고 어미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내 방식의 사랑일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내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는 의미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미 끝난 지 오래지만 인륜의 연을 완전히 끊을 생각을 하였다. 왜? 그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도 위한 길인가? 누군가는 행복해야 하고 이제는 기다림의 시간을 마감하고 싶다. 솔직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왜? 아이 아빠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졌다. 10년을 한결같이 기다려 왔으면서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나? 10년을 연습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나? 없다. 그를 놓아 준지 이미 오래 되었다. 나를 놓지 못한 것이다. 왜 그리 오래 동안 사무쳐야 했는가? 솔직히 사랑이라고 믿었다. 사랑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그러면서도 억울했다. 무엇이 억울한가? 내가 여자라는 것이 그때까지의 제도와 현실이 억울했다. 현실은 나의 이상 같은 것은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랬듯이 내 현실의 끝자락도 이상 같은 꿈에 덮여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상만 인정할 뿐 상대의 이상, 바로 내면의 함구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야박하다. 그러면서 가당치도 않는 잣대를 칼처럼 휘둘러 댄다. 지금의 나처럼. 그러나 나는 울분이 삭히지 않기 때문에 이 짓거리를 해야 한다. 후회하겠지만 그게 무에 대수인가. 오늘이 없는, 오늘 복장이 터져 죽은 내가 내일 화사한 웃음을 겉으로 웃는다고 해서 그게 뭐란 말인가. 나는 오늘을 시원하고 칼칼한 동치미 국물처럼 살아내고 싶다. 총각김치처럼 짭짤하게 살아내고 난 후에 봄동으로 무친 겉절이의 맛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 그는 너무나도 어깃장을 잘 놓았다. 그 순간에는 미치지 않을 수 없도록. 나도 마찬가지였다. 참을 수 없어서 대들거나 아닌 것을 끝까지 밝혀 잘잘 못을 가리고 이해하고 넘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일방통행이었다. 나가서는 인기가 좋은지 모르지만 집에서는 전혀 충실한 가장이 아니었다. 노력도 해보지도 않았다. 갑갑해 했고 이미 벌어진 상황만을 탓했다. 또 그에 의해 있지도 않거나 발생하지도 않은 덮어씀이 너무나 억울했다. 가령 나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내가 언젠가 바람이 날 수 있다는 가정 따위가 그것이다.

내 인생에 바람이 있다면 내가 그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 글쓰기도 일종의 바람이라면 바람인 것인데 점을 보려거든 제대로 잘 보기나 할 것이지 뭣 같은 사기꾼들에게나 가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감언이설에 말려들기나 하고, 아이고 머리야... . 내가 복장이 터지고 울렁증이 나오려고 해서 도무지 말을 다 옮길 수가 없다. 신혼 초부터 그는 나를 무척이나 염려하고 경계했다. 집안에서조차 반바지를 입고 짜장면 값을 지불할 수 없었다. 전화벨이 울리면 마치 그것만 대기 하고 있는 사람처럼 두 번 안에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말은 다 변명으로 치부했다. 자기 자신은 무한대의 자유를 원하면서 역으로 내게는 그만큼의 정숙만을 요구했다. 나는 그와 사는 단지 5년간 거의 문밖출입을 하지 않고 살았다. 객지 생활인데다가 연년생 세 아이를 낳아 기르느라고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늘 자기계발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이런 용어조차도 몰랐고 그렇게까지 생각한 것도 못되지만 하여간 내 자신에 대하여 나는 더 나은 삶의 방향을 계획하고 실천하며 성취를 누리며 살고 싶었다. 이것이 지적 탐심에 대한 허영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지극히 작은 것들이었다. 일테면 컴퓨터를 배우는 일이라든지 방송통신대를 통해 가장 저렴하게 관심분야를 지속적으로 공부해 나가는 것 등이었다. 나는 이것이 지극히 올바르고 양심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러하다. 살림하는 여자가 적은 비용으로 틈틈 짬짬 공부하겠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나쁘다는 말인가. 그것도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에게 이로운 공부를 하겠다는데 왜 그리도 온 식구들이 하나도 지원은커녕 그리도 못마땅하게 쌍심지를 켜고 뒷구멍에서 눈을 흘기기나 하는가 그 말이다. 누구 손을 빌려가며 애들 먹이는 것도 아니고 저 혼자서 알아서 하겠다는데 그러한 사소한 것들이 그렇게 문제가 되나? 수고라고는 하나도 하지 않고 양심을 팔아넘기듯 공짜로 먹고 살려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남의 노력을 비웃어 가면서 콤플렉스 운운하는 자들이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의 꼭 이런 경우에만 이중의 논리와 잣대를 들이대는 시선들이다. 이중적 시선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그럴 수 있으면 상대도 그럴 수 있고 균형감을 갖기 위한 시선이 긍정의 이중적 시선이 아닌가. 그런데 무턱대고 아무 대나 이중인격이라는 말들을 서슴없이 하고 찍어다 붙이는 것이다. 이중인격과 두 가지 양면의 생각은 다르다. 호시탐탐 제 이득만 취하는 이중인격자들과 이중적 시선의 역지사지는 그것이 같은 말의 어휘이지만 얼마나 천양지차天壤之差 인가.

그는 어느 것도 허용하려 들지 않았다. 한 가지라도 물꼬를 터줘야 하는 것 아닌가? 평생학습이념인 방송통신대를 계속 눈치봐가면서 하다가 아주 그냥 어찌나 모두들 눈치를 주는지 내가 식구들만 보면 장이 다 뒤틀려서 꼬이고 재채기가 나와서 안 그래도 미움 사는데 더 미움을 사고 밥만 먹으면 체했다. 그것도 실컷 맛나게 먹고 나서. 그때 그놈의 알레르기는 왜 하필이면 제사상 차리는 날 그리도 나오던지. 눈치를 보고 있던 그가 재수 없게 왜 그러느냐고 했지만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좀 미안하지만 옛말에도 있다. 재채기를 숨길 수 없다고. 아마도 조상의 묘 자리에 동티가 난 것은 아니었을까? 하여간 막말로 내 돈으로 해도 얼마든지 하는 거고 무슨 여자가 공부하면 남자를 꺾는다고 생각하나, 어쩌면 그리도 사내대장부가 좀스럽고 편벽되고 옹색하단 말인가. 주색잡기에만 능하지 도대체 고상한 취미란 게 뭐가 있으면서 다스려야 먹힐 것이 아닌가. 세상의 남자가 자기 혼자 돈을 버나? 처자식 있으면 당연히 돈 벌고 그 만큼 살림 못하는 여편네가 아니면 기를 살려주지는 못할망정 초는 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어찌도 그렇게 한 쪽 귓구멍은 꽉 막히고 한 쪽 귓구멍은 일사천리로 통해서 뒤엎어지는가. 남자야, 속절없는 남자야. 그러나 오랜 세월 그대를 그렇게 만든 가족들의 세월이 있었으니 그 노릇을 저 혼자 어찌할꼬. 그래서 당신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밖에는 살 수 없다. 그게 도대체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다만. 나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대뽀가 제일 겁나고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나보다 더 무서운 무대뽀. 나를 기어이 내쫓고야 마는 무대뽀 정신의 가문에 그대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나. 그를 씨앗 삼고 날 밭을 삼은 그 열매들 때문에 오매불망 이년의 애간장이 타고 녹누나.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전혀 힘들지가 않았다. 나는 하루에 세탁기를 세 번 정도 돌렸고, 걸레를 30번은 족히 빨아댔다. 마음 놓고 먹고 놀게 하고 가라 입혔으며 깨끗이 쓸고 닦았다. 나는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었고 살아있는 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증인을 대라고 해도 댈 수 있다. 아니 그쪽 집안에서도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빨빨거리고 어디를 잘 가는 성격도 아니고 갈 데도 없었다. 가장 큰 외로움은 아무 말할 상대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결혼으로 인해 난생처음으로 부모형제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었고, 그때까지 나는 막내로서 늦도록 가족들의 보호와 가족 사랑과 정을 많이 나누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결혼 후 잦은 객지 생활에다가 정 붙일 대라고는 아무대도 없었다. 맨 나중에 그나마 가장 오래 산 울산의 그곳에서 단지 옆집 새댁 한 사람과만 터놓고 지냈다. 나의 행동반경 때문이 아니라 그를 위해서 조신해야 했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의 직위도 있고 해서 그때는 그것이 그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무슨 일이 없을까를 늘 고민했고 그렇게 살아가기를 찾았고 그런 일을 원했다.

나는 내가 유년에 가져보지 못한 공부하는 집안 분위기와 환경을 만들어주면서 아이들과 함께 평생 동안 흥얼흥얼 유유자적 안빈낙도 우아하게 공부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진정 하고 싶고 할 수 있을 때 공부하려고 마음먹었던 사람이다. 어린 아이 연년생 졸로리 셋에 돈을 벌수도 따로 무엇을 할 경황도 안 되니 아이들 클 동안에 자연스레 공부하는 분위기 만들어 주고 그동안에 어느 정도 몸에 배여 저희들끼리 의지삼아 선의의 경쟁을 통해 학습 분위기가 제대로 조성되면 나도 아이들 기르고 가르치는 일에 내가 나서야 한다거나 하면 혹시 모르니 생업전선에 뛰어들 각오도 나름 세워두고 있었다. 그 잘난 누이가 제 앞으로 온갖 것을 긁어모으는데 혈안이 되었어도 혼자 살아 그렇거니 측은지심으로 이해하는 부분도 남 못잖게 많았다. 그러나 정도가 있는 것이고 그녀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었다. 오직 권리만 있지 부담은 전혀 지지 않으려는 날로 먹으려는 처사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 독신을 주장했던 것도 아니요, 그동안에 어디에 가서 직장 생활을 해서 밑천을 만들어서 놀고먹는 프리랜서도 아니었다. 무슨 전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 가서 다만 얼마간이라도 참고 견디며 돈을 벌어본 사람도 아니었다. 평생을 입 하나로 사는 강자다. 아무도 그렇게 쉽고 간단히 살지 못하지만은 그에게는 힘을 실어주는 어머니가 있고 철썩 같은 지아비나 아버지보다 더한 남동생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괴강성으로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야 마는 것이다. 결혼 할 때야 그도 인간인지라 제 어미의 성정도 알았고 그 집안의 누이들에 대한 성품도 알아서 내게 주의를 주었었다. 일체의 모든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전혀 나서지도 말며 끼어들지도 말며 자기하고만 상의하라고. 누가 그토록 이나 엉망진창의 콩가루 인 것을 알았던가. 그리고 그 역시도 그 나물 그 밥에 그 물에 커서 도저히 어쩔 수 없어했고 그런 그가 측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는 나도 도저히 살 수 없었다.

그가 밑 빠진 독에 한도 끝도 없는 물을 부어대다가 나중에 이르러 급기야는 가족들에게 지치고 만 것도 안다. 사방팔방으로 돈이 된다고 하면 여름날 윙윙대는 파리처럼 여기저기 온대를 쑤시고 돌아다니며 살아보려 안간힘을 쓴 것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리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애틋하고 살갑게 살아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무리 정이 없고 부족하기로서니 어찌 사람이 진심까지 다 외면하고 모르기만 할 수야 있겠는가. 그는 그리도 내 심정을 몰라줘서 나는 애가 달았다만 나는 그가 많이 보이고 너무나 많이 보여서 수많은 날들 살아온 나날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아팠다. 오죽했으면 그 잘난 월급봉투 다 안겨주면서 아이들 키우라고 맡겨버렸겠나.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 저도 좋기만 하고 내 기를 꺾으려는 심사에서만 그리 했겠나. 누구보다 이 시대 이 사회에서 일을 하고 녹을 먹는 정직한 사회인이요 튼실한 가장이기를 노력해 보려던 사람이기도 했다. 일찍이 사우디에 가서 모래바람 흙먼지 날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제 육신을 까맣게 그을려가며 부모형제의 안위를 위해 사막의 하이에나처럼 썩은 고깃덩어리를 움켜쥐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세월을 이겨낸 의지의 한국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삶의 기반을 다져 이제는 부모형제를 한가로이 떨쳐두고 저도 한 번 살아보자 열병의 병실 한 구석에서 인생의 외로움을 알고난 후 결혼이라는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여인들을 모조리 싫다고 퇴짜만 놓아대는 두 여인네 앞에서 간신히 좋다고 승낙을 받은 아니, 부모형제가 찬성하고 앞장서 서둘러 일을 성사시킨 것이 나와의 인연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더는 가질 것이 없다고 더는 탐나는 것이 없다고 더는 가지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고 자신들의 양심과 선언에 대하여 철회를 거두는 것이었다. 그 스스로 그렇게 자기의 인생을 어거지 논리로 치닫게 할 사람만은 아니었다. 그도 나처럼 세상에 보란 듯이 잘살아 보겠다는 당연한 야심을 가지고 이 세상 누구에게도 뒤지거나 손색이 없이 살아낼 만한 사람이었다. 제가 어디로 치닫고 있는 것인지 모르기만 하는 바보천치 등신머저리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로써도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괴력이 있었고 나도 더는 말릴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부족함이 있었다. 이성적인 판단하에 제가 제 입으로 주의준 현실이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이성보다는 감정적으로 치우쳤고 사리분별보다는 귀찮음이 싫었으며 가족들의 억지에 항거하듯 자포자기 상태로 움직이고 말았다.

그 잘난 그는 자상하지도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자기 명령대로만 움직이라고 했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원하는지 물어보지도 관심도 듣지도 해결해주지도 않으면서 구속만하고 트집 잡고 나무라기 일쑤였다. 한 번도 적응해 보지 않은 생활들이었다. 밤새의 알량꼴량한 베갯머리송사도 아랑곳없이 그러면서 그의 결정은 늘 통보였다. 또한 그것이 자기의 진심도 아니었다. 그 역시 어머니나 누이들의 통보를 받으면 설득이나 재론의 여지없이 거두절미하고 즉각 움직여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해서 베갯머리송사에 안 넘어가는 남자가 없다는 말은 내 경우에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근처도 못 갖고 듣는 귀도 전혀 없었다. 시도하다가 맨 날 쿠사리에 본전도 못 찾고 찍만 쌌다. 차라리 안 하는 게 나답고 백번 낫다. 그리고 사실 내게도 문제가 있다고 하면 나는 남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한다. 나는 체질적으로 치사한 것을 가장 못견뎌하는 것 같다. 곧이곧대로 움직이는 성품이지 둘러치고 매치고 살살거리지를 못한다. 껄껄 호탕한 기질이 별로 없이 완고한 편이다. 그런 나를 더 완고한 사람이 억세게 누르니 알아서 하는 처세마저 사사건건 억눌림을 당했다. 하지만 나는 경우가 밝은 편에 속하고 분명하며 남의 신세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함부로 남의 덕을 공짜로 보려 하지 않는다. 내 깜냥 것 살아보고 도움을 청하든지 말든지 하는 사람이고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양심적이고 소심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또 정이 많고 상대가 나를 이용하거나 해치지 않는 한 내가 먼저 상대를 가벼이 하는 경우는 취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며 산다. 그러므로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도 원치 않기 때문에 잊지 않고 벼른다. 특히 자기들이 특별히 대단한 사람인양 함부로 사람을 얕잡아 보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살림을 잘했다. 남편과 성격이 맞지 않은-우리가 정말 맞지 않는 것인지 이 부분도 약간 의심스럽다.- 단지 그 한 가지를 제외하면 똥도 버릴 것이 없었다. 그러니 남편의 명령에 무턱대고 복종하지는 않는 다고해야 옳을 것이다. 밤새도록 결정해 놓고 아니 몇 날 며칠 에 걸쳐서 계획하고 불도저로 확 뭉개버리듯 하니 그것을 어찌 납득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집안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설령 성격이 맞지 않아도 나는 약속은 약속대로 지키는 사람이다. 웃기겠지만 사실이다. 파토가 나기 전까지는 계속 판을 돌리는 것이다. 투덜거릴망정.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더라. 뭘. 안 그런가? 살다보니 해결이 난 것이지 매사가 현명해서 잘 살아낸 것만은 아니면서 아니꼽게 구는 것을 보면 배알이 꼴릴 때가 있다. 그러나 어쩌랴. 과락 시험지와 같이 내 인생 과락이 되고야 말았으니. 나는 이대로 F인생이 되어버리고 마는가?

당연히 집안 풍속도 우리 집과 너무나 달랐다.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들 때도 있고 그럴 경우에 처하면 그도 자식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앉혀놓고 전후 사정을 분별하여 따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돌림방을 해버린다. 이것이 아마 나에게 가장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들 자신들이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절차를 거치지 못하는 것이면서 그 핑계를 되잡아 버린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겠나. 나는 정말 하루 에도 열두 번 미쳐나자빠질 지경이었다. 나는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싸움을 잘 못한다. 유년에 나는 친구들과도 싸워보지 않고 지냈다. 내가 겨우 달려든 것은 막내오빠가 나를 찝쩍거릴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막내 오빠는 큰 오빠가 명령하면 작은오빠에게 명령이 떨어지고 작은 오빠는 막내오빠에 명령을 내리면 자기가 심부름을 해야 하니 그게 싫어서 화풀이로 나를 볶아 대서 맨 날 자기만 더 혼나곤 하면서도 나를 찝쩍거리는 것이었다. 나도 사실은 못되기는 했다. 자기가 억울하다고 나를 괴롭히는 것에 대해 나도 따지고 들었다. 막내오빠는 덩치도 작아서 내가 더 얕보았을까? 그래서 형들이 없을 때 나는 막내오빠로부터 생트집과 보복을 당하기도 했다. 골탕을 먹거나 뒈지게 맞은 것이다. 그것도 억울해서 어려서는 그게 나의 최대의 고민이었을 만큼 속상했다. 나는 동네에서도 착한 아이로 칭찬 받았고 소문이 자자했다. 친척들도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시며 용돈을 잘 챙겨주시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크게 부자는 아니었어도 부족함 없이 밝고 명랑하게 자랐다. 나로 말하자면 밝고 명랑함이 트레이드 마크였고 커서는 활기찼다고들 했다. 나는 매사에 거의 긍정적이었다. 자신감은 좀 부족했지만 그것을 겸양이라고 알고 배우고 자랐다. 거의라고 여유를 좀 두는 이유는 안 될 일은 아예 내 선에서 정해서 선을 그어버리는 그러니까 일단 허락이 떨어졌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아니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을 해놓고 본다. 추진력이라기보다는 책임감일 게다. 부모님께도 어머니에게나 조금 혼나기는 했어도 매 한 번 안 맞고 컸다. 학교생활도 늘 선생님들께 칭찬 받으며 자랐다. 심지어 대학에 가서도 칭찬을 받았고 입사를 해서도 칭찬을 받다가 결혼을 한 것이었다. 여태껏 선생님들께서 나를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 크하하.

솔직히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착하고 선행도 잘한다고 그 예쁜 카드는 우리 반에서 내가 제일 많이 받았다가 우리 동네 미정이에게 홀라당 도둑맞았고(내가 정말 알면서도 참았지만 지금까지도 억울하다. 나쁜 년. 생기기는 멀쩡히 이쁘장하게 생겨가지고 왜 그리 시침을 떼고 남의 가방을 뒤져서 훔쳐가누, 지랄하고. 그래도 잘만 됐다더라. 욕심만 많아가지고선. 그래도 뭐 동창인데 못사는 것보다는 낫지만. 나을 것도 없지 뭐. 서로 보고 사는 것도 아니고 지들 잘살면 깐보기나 하고 거들먹거리기나 하지. 행여나 도움될 게 있다더냐. 하지만 솔직히 못나게 살아서 미안하다.)
야, 인간들아. 학창시절 선생님들이 말이야. 나한테 일 시키시면 확인도 안하셨었어. 나, 그런 보증수표였다고. 고등학교 때에도 반장 부반장 나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교무실로 불러서 따로 부탁하시면서 특별히 책임감 심어주시고 그런 약속에 대해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사람이야. 농땡이도 좀 치면서 공부나 잘할 걸 그랬지만. 그 놈의 이과를 가는 바람에 망했어. 수∏ 가 어려워지면서 그리고 생물은 좋은데 물상을 왜 그리 싫은지. 그래도 졸업식 때 착하고 성실하게 애썼다고 전교에서 딱 하나 내게 봉사상도 주었단다. 살다보니까 이렇게 충성심이 강한 나를 이용이나 해먹으려는 사람들도 가끔은 만나기도 하지. 귀찮은 일은 다 나한테 맡기려고 들기도 하지만. 이제는 나도 그리 안 살거다. 이만 각설하고.

서방도 자식도 빼앗긴 나는, 믿는 도끼에 발등 콱 찍히듯 속은 나는 내가 당했다고 해서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겨우 그렇게 살기 싫다. 그래서 내 인생이 고달프다. 그러나 고달프다고 해서 주저앉아 그 모양 그대로 살고 싶지 않아 또 고달프다. 신세 한탄을 하고 힘들어서 울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똑같은 모양으로 되돌아 갈 수 없어서, 적당히 타협하며 포기하는 것을 인내랍시고 사기 칠 수 없어서 내 인생 엄청 피곤하고 고달프다. 으하하 우습다. 울다보면 웃음이 난다. 웃다가도 눈물이 난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내 인생이 안타까워서 그리고 뛰어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서러워서....... .

그러나 덧없는 세월이 휙휙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듯 내 울음도 짧아져간다. 그와 같이 한탄할 어느 놈하고 엉겨 붙어 좋은 세월이라고 희희낙락 깔깔거려서가 아니고 휑하니 술에 취해 널브러져서도 아니다.

살다보니 어느 덧 그가 나이고 내가 그 임을 알아가게 되었다. 미워한 그가 내 얼굴이고 격멸한 그 또한 내 모습이며 역겨운 그 역시도 나와 다를 바가 없다는 미치고 팔딱 뛸 깨우침이다. 술에 취해 널브러진 적 없고, 노름이나 채팅하다가 살림살이 내다가 말아먹은 적 없고, 부모형제 일가친척으로 인해 서방이 뼈 빠지게 벌어온 돈 단 한 푼도 허투루 쓴 적도 없으며, 멀쩡히 산 서방 놔두고 어느 놈 붙어 팔자 고치려고 아니면 정분이라도 나보려고 생각조차 해본 일 없었다만 나 지금 이 꼴이 뭔지 모르겠다. 내가 너를 만나지 않았어도 내 인생이 이랬을까? 내 팔자가 이러려고 너를 만났다지? 하며 애달아한다, 인간아.

그러나 또 네 팔자가 이러려고 나를 만났구나. 그러니 어쩌랴. 천복이로구나. 조셉 캬라멜 말이 맞나봐. 신화가 내 안에 존재 하네. 오늘 내 삶에서 말이지. 가르쳐 주려거든 진작에나 운명처럼 아니 우연이라도 나타나서 그 많고 많은 책들 중에 고꾸라지듯 내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이지 어찌하여 이제야 나타나누. 이놈의 조셉 캬라멜 할아방아. 그것도 죽어서리, 아무 책임도 못질 거면서.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경험해보고 아니면 눈 뺄 내기라도 해야 할 거 아녀? 꼴깍 죽고서는 책이 다 뭐라더냐. 신화가 고작 뒈져블믄 무슨 신화당가. 살아 설쳐야 신화지. 그래서 당신은 웃으면서 죽었소? 죽으니까 좋디요? 도대체 시방 무얼 믿으라는 거요? 이게 다 천복이면 다들 놀고 자빠졌는디 왜 우리가 밤을 꼴딱 센답디요?

우리는 똑같이 인간이고 저마다의 운명과 인생의 짐을 지고 태어났으며 알지 못하는 저와 싸워 투쟁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 뿐, 원래의 그와 내가 틀리기만 하거나 미운 사람인 것만은 아님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인생에는 잘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이 인연이라는 것일 게다. 내가 바라고 원한 삶은 연리지連理枝같이 너무도 애틋한 부부애로서 하나가 되는 올곧은 나무였으나 아니 너와 함께라면 미쳐죽을 수 있는 썩어도 좋은 나무였으나, 모든 나무가 연리지는 아니듯이 내 인생과 운명과 팔자 또한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야 그것들을 존중할 마음이 생겼다. 내가 비록 연리지로 살수는 없는 외떨어진 외로운 나무였으나 홀로라도 그 꿈과 생명혼을 온전히 지켜 살아갈 수 있는 한 그루 써니라는 이름의 변함없는 초록나무라는 것을 나는 내 인생의 변화를 시작하면서 배워가고 있다.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를 되돌아보며 나를 위해 타인들을 이해하여야 함을 절실히 느끼는 가운데 조금씩 노력해 가기를 애써 본다.

또한 아직 내 수양이 부족해서일 테지만 미움은 미움이고 야속함은 야속함으로 가셔지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껏 그를 미워하기로 했다. 그래봤자 내 얼굴에 침 뱉기로 창피한 일이라기보다, 그 얼굴이 나고 내 얼굴이 내 얼굴임을 알기에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고 나를 향해 실컷 퍼부을 란다. 욕이 나오면 욕하고 울고 싶으면 울고 소리치고 싶으면 고함지르면서 내가 나에게 몸부림쳐대며 할 말을 실컷 쏟아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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