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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9일 04시 21분 등록
월급통장을 떠나서 나는 절대로 그렇게는 살 수 없고 그런 식의 삶을 싫어한다. 그 집안의 그러한 내력을 알기에 생판 얼굴도 모르시는 집안 어른들께서 아이아빠 이름을 불러가며 가문의 문제를 상의하고 시아버지에게 남겨진 약간의 산판과 땅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고 불러도 그는 상관하여 절대 가지 아니하며 누이에게 다 맡겨 행사했다. 하도들 보기에 딱해서 그런지 빌미시 전화를 주면서 꼭 다녀가라고 애원하듯 부탁을 하는 전갈을 몇 차례나 해와도 그는 제 몫을 포기하고 싶었던지 가지 않았다. 결국에 그것도 누이 앞으로 다 해주었다. 내게는 인감도장을 달라고 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얼버무리면서 말하기를 피하였다. 무슨 일로 인감도장이 필요한 거냐고 다시 묻자 답변이 궁색해진 그는 버럭 화를 내기에 어쩌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내어주고 말았다. 나는 이럴 때마다 지극히 소외감을 느꼈다. 다 내 맘대로 휘두르겠다는 것이 아니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참여와 알고 싶은 것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여한 부분이 없는 것에 대해서까지 몫을 탐하자고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한사람의 가족으로서 언제까지나 왕따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거든 우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나. 한 번도 뵙지 않은 집안 어른께서 긴이 할 말이 있으니 한 번 다녀갈 수 있게 꼭 이르라고 신신당부를 할 때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일 테고 남자라면 한번은 인사도 할 겸 정면으로 부딪혀가며 해결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언제까지나 누이가 전갈하는 말만 듣고 그렇게 해결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쌍방의 말을 들어봐야 원만한 해결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나. 게다가 그렇게 까지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이해해 주었으면 되지 않았나. 도대체 얼마를 더 못 먹어서 그리도 안달인가. 그 땅은 상징적인 의미와 요소가 다분히 많았다. 그리도 아들을 찾으면서 아들에 대하여 호주라는 의미에 대해서 어찌 그리 함부로 할 수 있나. 그러면서 첫아이를 딸 낳았다고 얼마나 역정을 내시었던가. 손자는 왜 탐하나. 못 낳으면 못 낳았다고 티 잡고, 낳으면 지들 좋은 일이라고 샘을 내니 그것이 부모 형제로서 도무지 할 일인가.
늘 가시방석처럼 애가 타고 발을 동동 구르며 살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 직후 그는 아버님 앞으로 되어있던 그가 벌어서 마련한 집까지도 누이 앞으로 넘겨주었었다. 그리고 우리가 헤어지기 직전 누이는 그 집을 팔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상속이 아닌 온전한 자기 명의로 집을 가졌다. 그 스스로 떳떳하지 않았음을 십분 이해하고 안다. 그래서 더욱 빨리 팔아 새 집을 자기 명의로 갖고 싶었을 것이다. 주변에서 상속으로 받은 재산에 대해 받을 때와는 달리 표시나기 않게 하고 싶어 하는 심리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거고 또 새로운 것을 더 원하는 심리를 반영하는 모습들도 지켜볼 수 있었다. 똥 누러 갈 때와 누고 나서가 확연히 다름이 인간이더라. 그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으로 몫을 떼어 주느라 자기 못을 기꺼이 희생한 사람이 있음도 간단히 치부하여 잊고 싶어 하더라. 그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던가?

그녀의 그러한 주장이 탐심은 아닐까. 아무리 베풀 것이 없어도 마음이라도 열고 살아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가 그리 앞날이 탄탄히 보장 되는 유능한 사원도 아니었고 그 회사가 굴지의 대표 기업도 아니었으며 한낱 월급쟁이에 불과한 중간관리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정 경제와 아이들에 대한 교육 대책을 단단히 세워 나가지 않으면 상당히 힘든 처지에 봉착할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전 시어머니의 큰 소리와 말씀은 한낱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았음을 신혼 초의 생활을 통해 뻔히 밝혀진 사실이 아닌가. 나는 아이를 하나 날 때마다 우리가 계속해서 결혼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을 지 정말로 남편인 그와 많이 이야기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대구조차 하지 않으며 그런 일은 자기 사전에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을 하기도 했었다.

내가 믿었던 것은 그의 현재가 아니다. 그의 얼마나 되는 금전이나 부동산이 아니다. 그것은 내 눈에 성에도 차지 않는 그리 남과 비교되어 우수할 만한 것도 못되었거니와 그것이 우리 삶을 지탱할 수 없음을 나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내가 묻고자 하고 알고 싶은 것은 의지였다. 결혼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가정을 꾸려나갈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태도와 일상의 일관된 믿음직스런 모습이었다. 그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이를 셋 낳고 나니 오히려 배짱으로 나오면서 다른 사람들은 애도 키우고 돈도 번다고 우기는 말에는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을 해서 돈을 벌기 싫은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아직 상황이 그러하지 못한데 그것을 주장하는 그의 저의와 이치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그러한 맞대응은 기어이 월급통장을 빼앗아 가버리고 말겠다는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의지의 반영이라고 밖에는 해석되지 않았다. 그렇게 자기 식구들의 입장에서만 변호를 해대는 그에 대해 나는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큰 아이가 만 세 살이 되어 늦지 않게 막 유치원에 입학한 직후였고 그 아래가 14개월 차 막내는 13개월 차로 첫돌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러한 논리를 내세우며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었다. 그럴 때마다 정신이 돌은 사람과 같이 사는 것 같았고 갑갑함과 치욕에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께서는 늦은 결혼을 버티다 버티다가 끝까지 마다 못하고 손수 손을 내미시어 나와 허락하여 겨우 시켰으면 그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지셔야 한다고 본다. 긴 세월 동안 남들보다 오래 자식을 주리 끼고 사신 것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하고 그 세월동안 편하게 모녀가 아들의 월급통장을 전담하여 마음껏 요리하고 산 것에 대해서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한다. 새 신랑 아들이 마흔도 아니고 오십을 향해 가는 마당에 언제까지 그리도 호령하며 성질 다 부리시며 살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살든 제 알아 살아가도록 던져놓아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경제적으로 도왔으면 누이를 따로 독립시키고 들어오시든가 경제적인 부담을 더는 막무가내로 부담시키지 말고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도를 해결해 내야 하는 것이었다. 집도 땅도 상가도 콘도까지 다 들고 있으면서 지속적으로 생활비에 대한 부담까지 주는 것은 너무나도 심한 처사다. 그런 가운데에도 시시때때로 제사다 명절이다 생신이다 거르지 않고 찾아뵈며 행하기도 한 달이 멀다하고 찾아오는 날들인데 거르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목돈으로 드렸고 그는 그대로 늘 자기 최선을 다해서 따로 드린 것을 안다.

우리는 그래서 정말이지 너무나 힘들었다. 나는 너무나 투명하게 하는 대신 그는 늘 나를 속이고 또 속이고 감추고 또 감추는 일 외에는 당당하게 사는 것이 하나도 없게 만들었다. 그가 나를 볼 면목이 없지 않은가. 나는 친정에 그리 하지 않았다. 두 분 모녀의 모함 때문에 그 아들로부터 심한 의심도 받았고 심지어 만삭에 밥상이 날아가며 채근하며 돈을 내놓으라는 악다구니도 다 받으며 살았다. 그렇게 억울하고 분하면서도 아이를 셋을 낳고는 더는 헤어지겠다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제는 별 수 없이 살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참이었다. 내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내 아이들이 장차 어떻게 공부하며 살아갈 수나 있을까 염려가 될 뿐이었다. 정말이지 월급봉투를 통째로 맡기며 타서 쓰고 살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절대 내 아이들의 교육을 맡기고 싶지도 않았다.

공염불에 매달려가며 집안을 등한시해도 나무라지는 못할망정 무조건 돈 벌려고 그런다고 하면 껌벅 죽어가며 기어이 부모형제가 아이들 부모역할을 맡아서 하겠다고 나서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만 하겠는가. 우선에 월급봉투를 건사하고 아니 하고보다 앞으로 그러한 무지막지한 굴레 속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크고 서러운 낙담에 가까운 절망이었다. 월급봉투에 대한 집착과 회계모니 장악은 그보다 더한 모든 권리에 대한 박탈을 의미하는 것과도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해야 옳다. 나는 그런 효부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럴 만한 그릇도 못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 행위로 인해 계속 이어져 나올 위기감과 총체적인 억압을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어 기막히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설령 그런 것 없어도 목숨을 부지하고 살기야 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살아보고 싶고 원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른이라고 해서 위에서 처신을 그렇게 막무가내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세상에 어느 집안이 그렇게 사는가. 그리했으면 무슨 더 할 말이 있는가. 빌어먹던 시절 밥이나 얻어먹어야 사는 존재처럼 나는 마치 그 집안에 식모를 살러 간 사람밖에는 취급 받지 못했다. 하다못해 씨받이도 그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신판 씨받이를 들인 경우인가 뭐인가.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응분의 대가를 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았겠나. 그러나 아무 공로를 인정하지 않아도 좋았고 도와주지 않더라도 그와 내가 마음만 맞추어 살 수 있다면 정말로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누이는 사사건건 참견하고 진두지휘하고 들면서 계집에 빠져서 부모형제를 돌보지 않는다는 죄의식에 빠지게 하고 입만 벌렸다 하면 서럽다고 한탄하며 난리치니 어떻게 살 수가 있겠나. 자기들 때문에 시달려 부부싸움 한다는 구실로 옳다 잘됐구나 하고 월급봉투까지 빼앗아 쥐도 새도 모르게 한밤중에 줄행랑치듯 이사해서 살면 그뿐인 것인가. 사람의 탈을 쓰고는 그리 살지 못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생활을 하고 살아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어려서부터 몇 번을 읽으며 자랐다는 삼국지의 전략에 대해서도 처음 내가 그를 이해했던 것과는 달리 무척이나 이기적으로 받아들인 독서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내가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그토록 누이나 어머니를 이해하는 효심 지극한 아들이기를 자처하고 주장하면서 왜 내 아이들에 대한 나의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못하느냐는 항변이었다. 그럴 때 그는 그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나의 의미가 부여 되어도 늦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곧이곧대로 말을 하자면 내 의지대로 살자면 날마다 돌아가시기나 바라며 살아야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해답이라고 생각되지 않겠나.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어머니는 은행 하나도 직접 가서 처리 하시지 못하는 분이셨다. 모든 것은 누이의 주관 하에 처리 되었다. 어머니도 그 누이가 하는 말만 믿는 것이지 아무 것도 쫓아다니며 직접 확인하고 사는 분이 못 되었고 아니었다. 둘은 너무나도 깊게 결속이 되어서 아들조차 휘청거리는 것일 뿐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철저히 연대하였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가족 간에는 경쟁의 상대가 아닌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고 배웠다. 끊임없이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식의 그 억압을 언제까지 써먹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어머니도 인륜으로 맺어져 천륜을 생산한 것이었다. 인간사는 그렇게 연결되어 가게 되어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입으로는 자기들이 어머니를 부양하는 척 온 천지사방에 떠들어도 어느 딸 하나 제대로 부모를 도와 살게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 잘 사는 딸이라 해도 고작 몇 만원 쥐어주는 것에 툴툴거리시며 입을 삐죽 내미시고는 하셨다. 우리보다 몇 배로 잘사는 잠실에서 사는 딸도 달랑 아이 하나 가르치는데 교육비로 우리 월급 전체의 액수보다 더 많이 쓰고 있었다. 곁에 살던 시누이도 용돈을 드리고 있었지만 몇 만원에 바카스나 한 박스 사오곤 했다. 우리는 정말이지 최선에 최선을 다했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그래도 늘 툴툴 거리셨다. 딱 부러지게 말씀도 못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니 늘 아들하고만 대화를 하신다. 며느리와는 건성으로만 나누는 것이다. 시누이도 마찬가지다. 입에 발린 소리나 할뿐 전혀 딴 판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아이를 다 키워주는 양 볼모로 잡아가듯 애를 데리고 가거나 애들 아빠가 떼어주고 오는 것이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내 힘들고 고단한 삶에 큰 아이가 방해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꼭 그 아이를 시누이가 자신과 궁합이 잘 맞는다며 주리 끼고 내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이를 키워주는 양 하면서 관심과 지속적인 돈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태도가 싫었다. 나를 정작 도와주려면 그 아이를 데려갈 것이 아니라 정말 힘든 아이를 돌봐줘야 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마다하면서 공연히 아이를 데려가 내어 놓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 아빠 역시 그러한 그들의 요구에 합세하는 것이 더 문제였다. 무어라고 꼬득여서 그런지는 좀체 알 수가 없지만 이사를 하거나 하면 슬그머니 끌고 나가 그 아이를 맡겨놓고 와버리는 것이었다. 아닌 말로 그 아이가 아빠와 함께 있으면 좋지 않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그렇게 곧이들을 사람이니까. 하여튼 유독 큰 딸아이를 시누이는 특히나 궁합이 잘 맞는다며 예뻐하며 데리고 가고는 했다. 마치 그 아이와 함께 있어야 돈이 들어오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아들 하나 그리 잘나지도 유능한 사람도 못되었다. 내보기에는 체구만 크지 삶아놓은 물고구마 같은 사람이었다. 늘 피곤하다고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 물 한 번도 제 손으로 떠 마시는 법이 없는 절대지존의 위인이었다. 그와 사는 동안에는 나는 절대적 시녀 역할에 충실했다. 시녀는 그를 읽고 애달팠지만 절대지존의 그는 시녀 따위에게는 아랑곳 하지 않았을 런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그의 아내라는 자부심을 전해 받을 수가 없었다. 한순간도.

결혼을 하고서 얼마간 있다가 누이는 내가 남편에게 투덜대자 무지 못마땅해 하며 던지듯 급여 통장을 내놓았었다. 그리고 나중에 찾아보니 통장에는 돈이 제법 들어있는 것 같더니 카드로 빼서 쓴 것이 있어서 얼마 들어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치 다 들어있는 양 아무 소리 없이 넘겨준 것이었다. 무슨 계산법이 그러한지 기가 막혔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가며 살림을 할 수 있어 나는 개의치 않고 그때부터 열심히 생활했다. 그는 완전히 반 가름을 하듯이 큰 액수의 현금을 어머니와 누이의 생활 몫으로 목돈으로 떼어 주고 나는 통장을 받아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먹고 살면 된다고 어머니와 누이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하려고 조취를 확실히 취해놓았으니 이제부터 급여를 가지고 생활해 나가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서는 분리를 하듯 완전히 밀어주고 잊고 지내고 싶은 심사였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 큰돈은 무슨 일인지 1년이 안 가서 거덜이 나고야 말았다. 그때부터는 계속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가 사방팔방으로 돈이 될 무엇을 찾아야 하는 것이 당연함이 돼 버렸고 가정생활은 늘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통장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타서 썼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노인에게는 돈이 힘이라며. 실상은 누이에게 맡기자는 소리였다. 기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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