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단군의

/

1단계,

첫

  • 조영미
  • 조회 수 7022
  • 댓글 수 146
  • 추천 수 0
2010년 9월 5일 12시 39분 등록

1. 제목 : 행복한 100일의 새벽 데이트


2. 새벽기상 시간 및 새벽활동 시간 : 5시 ~ 7시
    새벽활동 : 새벽 공기를 들이 마신 후 하루 한권의 시집을 읽고 느낀 점을 적는다 

 

3.나의  전체적인 목표 : 100권의 시집을 읽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의 주제를 잡는다
 
4. 중간목표
- 매주 읽을 7권의 시집을 도서관대여와 구입을 통해 선정해서 일주일 단위로 목록을 만들어 둔다

- 단군 일지와 블로그를 통해 느낀 점을 기록한다

- 읽지 못한 시집은 휴일을 통해 그 주 안으로 읽는다


5. 목표달성을 위해 직면할 난관과 극복방법

- 남편의 취침시간이 새벽 1, 2시라 같이 깨어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중간에 깰 것을 대비하고 가능하면 10시경 취침해서 자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확보한다.

- 낮시간에 업무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질 것을 대비 점심시간에 30분 정도 잠을 잔다.

- 재미없는 시집도 일단 정한 것은 읽고 본다. 그리고 지루했다고 적는다. 왜 지루했는지 생각해본다

- 읽고 싶은 다른 책이 있으면 우선 시집을 읽고 나서 읽는다
  
6. 목표를 달성했을 때 나에게 일어날 긍정적 변화

- 새벽 시 읽기를 통해 많은 시인들의 시세계를 이해한다

- 순수한 새벽 시간, 시를 통한 만남을 통해 매일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열어 나간다

- 좋아하는 시인의 시세계를 파고 든다

- 쓰고 싶은 글의 주제가 확실해진다


7.목표를 달성했을 때 나에게 주는 보상 

- 가족들과 제주도 2박 3일 여행을 간다

IP *.41.16.144

댓글 146 건
프로필 이미지
조영미
2010.10.05 06:12:52 *.41.16.144
소라님, 감사해요. 소라님도 밝은 빛 밝혀서 우리 모두를 환하게 밝혀주시길 빌어요~^^
프로필 이미지
30일차
2010.10.05 06:55:13 *.41.16.144
신경림 시집 '쓰러진 자의 꿈' 1993년 창비 발간.

1956년 21세에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하고 갈대를 읊으며 신경림 시인은 등단했다. 그리고 낙향하여 시를 쓰지 않다가 10년만에 '농무' 첫시집을 1973년에 간행하였다. 이후 '새재'를 내며 민족문학의 선봉, 민중시, 농민시의 대표 시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대학 들어가서 처음 접한 신경림의 몇편 민중시들은 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념을 전달하는 구호와 선전 도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신경림 시인을 읽지 않았다.  스무살 내가 가진 시야로 읽은 신경림이 과연 구호와 선전 뿐이었을까라는 의문으로 '쓰러진 자의 꿈'을 읽었다. 

1993년, 우리나라가 이념의 옷을 벗고 서서히 개인화, 신자유주의 자본화를 가속시키던 때이다. 이 때 시인은 '쓰러진 자의 꿈'을 보았다. 어제 읽은 황지우 식의 미학 의식이 빛나는 반짝이는 비유, 기발한 표현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시대가 변하는 것을 바라보며 시 전체로 하나의 시상을 전달하는 메시지들이 가득했다. 여전히 시인은 시로 세상을 깨우치고 사람들을 강 너머로 건너게 하는 다리의 역할을 하고 싶어 했다. 세상은 여전히 변혁시켜야 할 병든 그 무엇으로 강물을 막고 있는 댐으로 나타났다. 

시인의 내면보다는 외부로 시선이 돌려져 있는 것은 시인이 시를 통해 지향하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시집 뒤에 시인은 얘기한다. 

'너무나 많은 것이 너무도 빨리 뒤바뀌고 쓰러진다. 그것들 가운데는 쓰러지고 뒤바뀌어 마땅한 것도 적지 않지만, 값지고 소중한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내가 왜 모르랴. 그렇더라도 거기 매달려 뒤바뀌고 쓰러지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을 만큼 나는 미련하지는 않다. 공연히 거센 체하는 허풍스러운 몸짓과 꾸민 목소리는 이제 정말 역겹다....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내면과 외면을 시 안에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 내 삶과 내 외부의 삶이 어떻게 섞여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녹아있는 시들이 있다. 안과 밖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 시에도 이것이 필요하다.

어지럽고 어수선한 꿈을 꾸다 선잠에서 일어난 새벽, 시집에서 나를 맞아준 첫 시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프로필 이미지
31일차
2010.10.06 06:46:23 *.154.29.110
황동규 시인의 '꽃의 고요' 문학과 지성 2006년 발간.

황동규 시인은 1938년생이다.  이 시집이 발간된 때가 2006년이었으니 얼추 69세 무렵이다.
서울대 영문학과와 동대학원, 영국 에딘버러 대학 유학 까지 마치고 25년간 몸담은 대학에서 은퇴한 무렵 전후로 쓴 시들이 여기에 담겨 있다.

친구의 빈소에 가서 본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하얀 밥풀을 가득 단 이팝나무, 감각들이 온몸에서 썰물처럼 빠질 때 마지막으로 느끼고 본 치미는 욕정 같은 것이다. 노년을 맞는 '참을 수 없는' 쓸쓸함, 외로움, 허무함 같은 것들이 시집의 전편에 나와 있었다. 

그러다 시인은 불연듯 붓다와 예수 사이에 대화를 만들어 낸다. 그 대화를 통해 시인 자신이 많은 것을 새로 배웠다고 고백한다. 나는 아래 시를 읽고 문득 황동규 시인이 좋아졌다.

미운 오리 새끼

'우리는 깨침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가,
봄이 오면 풀과 나무는 절로 꽃 피우는데?'
불타의 말에 예수는 못 들은 척
산사에 오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산이 꿈틀대더니
꽃의 파도가 되었다.
다시 보니 산이었다.
눈을 거두며 예수가 말했다.
'사람의 속모습은 거의 비슷하지.
겉으론 봄꽃 진 다음 여름꽃 피고
꽃인지 낟알인지 모를 걸 머리에 달고 가을 억새는
좋아서 물결치지만.'
'아예 하찮은 풀로 치부하고 살다가
어느 일순 환히 꽃 피우는 자는?'
불타의 말을 받아 예수가 속삭였다.
'겁나겠지!'


이 시 읽고 열린 마음이 아래의 '허물' 읽고 털썩 엎어져 버렸다.

허물

매미 허물 하나
터진 껍질처럼 나무에 붙어 있다.
여름 신록 싱그런 혀들 사방에서 날아와
몸 못 견디게 간질일 때
누군들 터지고 싶지 않았을까?
허물 벗는 꿈 꾸지 않았을까?
허물 벗기 직전 매미의 몸
어떤 혀, 어떤 살아 있다는 간절한 느낌이
못 견디게 간질였을까?
이윽고 몸 안과 밖 가르던 막 찢어지고
드디어 허공 속으로 탈각!
간지럼 제대로 탔는가는
집이나 직장 혹은 주점 옷걸이 어디엔가
걸려 있는 제 허물 있는가 살펴보면 알 수 있으리.
한 차례 온몸으로
대허하고 소통했다는 감각이.


온몸이 간질거리는 감각으로 허물을 벗어던지고 싶은 많은 미운 오리새끼들에게!
프로필 이미지
조영미
2010.10.06 19:32:46 *.154.29.110
이곳에 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마음이 아마도 이렇게 허물을 벗고 백조로 새로 태어나고 싶은 미운 오리새끼의 마음일 것 같아요. 시의 마지막 구절, 대허는 큰 허허로움인데 한자 타이핑이 안되어 못넣었네요..
프로필 이미지
조성희
2010.10.06 14:10:55 *.143.199.187
시를 읽고 잠시 멍~ 했어요.
저도 늘 허물을 벗어 던지고 새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어떤 사람이든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는 생각일테죠?
자신과 좀더 친해지다 보면..아마도 찾아지지 않을까..하고 생각해요.
내가 알지 못했던 내안의 멋지고 훌륭한 그 무엇!
허물 안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수만 있다면 참 좋을텐데..
저를 비롯한 모두가 자신이 미운 오리새끼였음을 깨닫게 되길 바래요.
주작의 비상처럼 훨훨~날아오를 그런 날을 꿈꾸며 행복하게 기다릴수 있을테니까요. ^^
프로필 이미지
32일차
2010.10.07 06:29:19 *.154.29.110
김승희의 '냄비는 둥둥' 창비 2006년. 서강대 국문학과 교수. 22세인 73년에 등단.

대학 다닐 때 선배 한분이 김승희를 무척 좋아했다. 참신한 상상력, 주술적 언어들... 뭐 이런 것들이 있다고 했다.

시집의 첫 시인 '별' - 별에서 ㄹ이 떨어져서 벼가 되고, 농부의 꺽인 무릎 ㄹ이 되어 벼를 모신다, 그럴 때 벼가 별이 된다는- 을 읽고 언어와 의미로는 아름다웠지만 버뜩 드는 생각이 이분이 언어유희를 즐기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많은 김승희의 시들이 이렇게 말의 유희를 한다.

시 속에는 9/11테러 등의 국제 정세가 나오고, 화가들이 나오고, 치열하게 살다간 많은 예술가들이 나오고, 이국적인 많은 지명들이 거론되어 시의 소재, 시가 그려내고 있는 세상은 그 누구보다 넓고 다양하다. 그런데, 그 안에 시인 개인의 삶은 얼마 보이지 않는다. 다만, 푸른 색 연작시 안에 줄기차게 거론되는 자살과 우울의 이야기들이 시인의 심리를 짐작케 한다.

'Flow, 몰입,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나다'를 어젯밤 읽다 잠들었었다. 어제 읽은 대목이 '말의 유희'에 관한 것이다. Flow, 몰입의 행복감을 느끼는 다양한 방법 중에 말의 유희가 있다. 상징 체계의 숙달, 지적 탐험으로서 미묘한 대화, 수수께끼 풀이, 언어의 가장 창의적 사용이라고 하는 '시' 읽기와 쓰기, 이런 것들이 말의 유희에 들어간다고 한다.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심각한 우울증 및 다른 정서 장애 증세를 느끼는 시인과 극작가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들의 의식이 엔트로피에 의해 과도하게 둘러싸여서, 글을 쓴다는 것이 감정의 혼란 속에서 어느 정도 질서를 잡아주는 치료 역할을 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언어의 세계를 창조해 내어 골치 아픈 현실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것만이 작가들이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플로우 활동과 마찬가지로 글쓰기도 중독이 되면 위험하다. 작가가 제한된 범위의 경험만을 하게 되고, 다른 경험들을 접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경험을 통제하기 위해 글을 쓰되 글쓰기 자체가 내 의식을 통제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한, 글쓰기는 무한한 오묘함을 느끼게 해주고 풍부한 보상을 받게 해주는 도구가 된다' 라고 했다.

내가 경험을 통제하기 위해 글을 쓰되 글쓰기 자체가 내 의식을 통제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말. 글보다 삶이 우선이라는 말이겠다.

사람마다 편차가 크니 김승희의 시를 읽고 전율과 해방을 느꼈던 우리 선배같은 분도 많을 것이다.

사랑은 ㅇ을 타고

사랑은 움직인다
사랑이 동그란 바퀴를 타고 있기 때문에,
당신밖에 할 수 없는 일,
사람에서 ㅁ을 깍아 ㅇ을 만들어서
....ㅇ....ㅇ.....ㅇ.....ㅇ.....ㅇ.....
동그란 바퀴는 구르고 움직이며 때로 미끄러지기도 한다,
ㅇ.....굴렁쇠.....사랑은 누군가의 목을 조이기도 하고
들판 밖으로 나가 굴러 널브러지기도 하고
정착을 모르고 여기저기 쓰러지기도 하지만
깊고 찬 우물, 광야에서 발견한 우물의 ㅇ

아리랑.........쓰리랑........이란 말도 그렇다.
그런 말이다,
마음에 바퀴를 달고 있다는 것이다,
시베리아 남부지역, 바이칼 호숫가에 살고 있는 에벤키족의 언어에서
아리랑(alirang)은 '맞이하다'는 뜻을,
쓰리랑(serereng)은 '느껴서 알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영혼을 맞이해봐라
이별의 슬픔을 참아봐라,
아리랑 쓰리랑 두 개의 바퀴를 타고 가서, 나아가서,
찬 새벽 사막에서 우물 ㅇ을 만나봐라

마음을
.....ㅇ......ㅇ.....ㅇ.....ㅇ....ㅇ.....에 올려두고
일평생 미끄러져봐라
앉아 있는 사람에서 ㅁ이 ㅇ이 될 때까지
둥글게 둥글게 모서리 뼈를 깍아봐라,
ㅁ이 ㅇ이 될 때까지 아리 아리게 쓰리 쓰리게
뼈를 깍는 그 고통이 지나야만
웃는 웃음 ㅇ이 바퀴를 굴려 나가리니
깊고 찬 우물, 광야에서 발견한 우물의 ㅇ


'사랑을 비를 타고' 흥겨운 노래와 춤이 들리는 듯하다.
프로필 이미지
33일차
2010.10.08 06:49:38 *.44.124.42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 1926년 발간. 고은 엮음.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 군말

고은 시인은 '만해의 시는 젊은이에게는 사랑의 노래로서, 종교인에게는 구원의 언어로서, 민족주의자에게는 민족 해방의 염원을 주고받는 암호로서 읽혀질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럼 내게는?

'고도의 시적 상징, 한없이 부드러운 애무의 대상, 가열한 투쟁의 근거, 우리 생활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경험되는 모든 것들, 동시에 그 모든 사물들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규정하는 진정한 실재' - '님'에 대한 고은 시인의 설명이다.

그럼 내 님은? 내가 그리워하는 것, 나를 그리워 하는 것, 내가 하나가 되려 하는 것, 그로 인한 주시는 고통도 이별도 사랑스럽고 날마다 날마다 기다리면서 나룻배처럼 낡아갈 수 있는 무엇.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그런 님이 계신가?

그 님이 있든 없든 그 존재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워하고 있는지 몰라도 그리워하고 있는 존재. 내가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이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 군말-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라면 님을 모르는 나를 뜻하는 말일게다.  이름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이란 도대체 무슨 말? 나의 그림자인 님? '님의 침묵'은 수수께끼구나. 알 수 없어요. 누구의 발자취, 누구의 얼굴, 누구의 입김, 누구의 노래, 누구의 시,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인지.

모르면 아는 만큼 읽으면 그만이지. 알듯 말듯, 보여줄 듯 말듯, 가릴 듯 말듯 쓰신 그 분의 의도대로.
84년이 흘러 님의 침묵을 읽은 나도 한 용운의 '기룬 님'이다, 뭐! 
내 님은 어디 있나요? 저기 잠들어 있나요?

나의 꿈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우리가 새벽에 깨어 산보하고, 달리기하고, 글을 읽고, 명상할 때 님이 다녀 가셨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34일차
2010.10.09 07:15:05 *.154.29.110
미당 서정주 '국화 옆에서' 민음사 세계 시선집.  한글날, 아름다운 우리말을 구사한 시인을 만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 자화상에서-

언어는 자신을 규정하고 미래를 형상화시키는 힘이 있다. 스물세살 때 쓴 미당의 자화상에 그의 인생이 들어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이 자화상에 그려진 시적 자아가 미당의 삶 그대로가 맞다면 그는 종의 아들로 여전히 사회에 만연했을 신분적 비천함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시를 썼을 것이다. 실제 미당의 아버지는 신교육을 받고 당시 민족주의 대자본가이던 인촌 김성수의 농토와 소작인을 관리하던 분이었고 미당의 어린 시절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분적으로 종의 아들이라는 자괴감이 있었을 것 같다. 후에 힘과 권력 있는 곳에서 결코 떠나려 하지 않고 힘과 영광의 빛 안에서 살려고 한 그의 삶이 이러한 미당의 원형적 갈구 때문이었을까? 

2000년 미당의 사후, 그의 해바라기 친일, 친권력 성향에 대해 얼마나 많은 비판이 있었던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눈과 입에서 죄인과 천치를 읽었고, 실제 그의 생전, 그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솔직하고도 당당했다.

첫시집 '화사집'이 나온 것이 그가 27세이던 1941년이다. 그 이후 가미가제를 칭송하고 학도군 징병을 칭송하는 시들을 1942년부터 썼다고 한다. 그는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가도 몇 백년은 갈 줄 알았다'고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하늘의 뜻을 좇은 친일이라는 종천친일파라는 이름을 붙이며 그 당시 여느 사람들 모두 그러했다고 말했다.

68세가 되던 1983년 '안잊히는 일들'이라는 시집에서 '울산바위 이야기'를 했다. 모든 기암괴석들이 하느님의 명으로 금강산으로 날아갈제 제일 큰 울산바위도 날아가다 '세상에 제 잘난 체만 하는 온갖 기암괴석들이 하늘이 새카맣게 앞을 다투어 모두 날고 있는지라, '내 체모로서 어찌 저 잡것들 속에 한 몫 낀단 말인가?'만 싶어, 도중에 설악산 한 귀퉁이에 펑퍼짐히 주저앉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막내아들과 함께 울산바위에 놀러갔던 그는 시 안에서 밝힌다.  '그애한테 '이렇게 하라'고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 바위의 전설을 그대로 알려준 까닭은 물론 '너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라도 해서 살아야 한다'는 내 오랜 경험 끝의 교훈을 암시해 두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경험끝의 교훈이라는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라도 해서 살아야 한다' 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서정주 시인이 권력이 있는 곳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해바라기하고 산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후학들에게 이런 비판을 받는 눈먼 아름다움으로 매도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안에서의 관계성이라는 인식이 부족할 때 미당처럼 너무도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한 시인도 이렇게 비판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내 마음에 들어온 시들은 '자화상', '학', '국화 옆에서', '내리는 눈밭속에서는', '동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침향', '서리오는 달밤 길' 등이었다. 미당의 아름다운 시들은 계속 사랑받을 것이다. 그의 삶에 대한 비판과 함께. 
'병든 수캐',  '아름다운 배암' , 주저 앉은 울산 바위', 자신을 향한 언어들이 어떻게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는지 미당의 시에서 봤다고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국화 옆에서'와 '목화'에 나온 누님의 원형이 되었을 듯한 '만십세' 시에 나오는 세상에서 젤 좋은 17살 뒷집 곽 참봉 따님 남숙에 대한 기억,  사는데 한 중요한 표준이 되었다는 '서리 오는 달밤 길'에서 본 아주 좋다는 느낌을 주는 '구성'에 대한 기억 등 1983년 나온 '안잊히는 일들'이라는 시집을 보면 미당 시의 원류를 추적할 수 있을 것 같다.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북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라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괜찬다,.....괜찬다, .......괜찬다,.......
포그은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 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그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들이 모두 다 안 끼어 드는 소리, .......

큰놈에겐 큰 눈물 자국, 작은 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들이 오보록이 도란거리며 안 끼어 오는
소리,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산도 산도 청산도 안 끼어 드는 소리. ..........


시인이 남기는 수백편의 시중에 한, 두편이 기억된다. 삶이 아니라 시로 말하는 시인. 날리는 눈발에서 네 번의 괜찬타, ....를 읽고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시인.... 괜찬타,.......
과연 괜찮은가?


프로필 이미지
35일차
2010.10.10 06:58:00 *.154.29.110
이백의 '술잔들고 달에게' . 혜원세계시인선 08.

青天有月來幾時    하늘에 저달 언제부터 있었던가
我今停杯一問之    잠시 잔 멈추고 묻노라
人攀明月不可得    뉘라서 저달을 따올수 있으랴만
月行卻與人相隨    달은 사람을 언제나 따라온다네
皎如飛鏡臨丹闕    날던 거울이 하늘대궐에 걸렸는가
綠煙滅盡清輝發    프르스름 안개 걷히니 더욱 밝구나
但見宵從海上來    동해에서 떠오를때 바라보던 달
寧知曉向雲間沒    새벽녁 구름속에 잠기는걸 아는가
白兔擣藥秋復春    옥토끼 봄 가을 없이 약방아 찧고
嫦娥孤棲與誰鄰    이웃없는 항아선녀 외로워 어쩌나
今人不見古時月    우리는 지금 옛달을 볼수없으나
今月曾經照古人    저달은 일찍이 옛사람을 비췄으리
古人今人若流水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수같은 세월
共看明月皆如此    저달 바라보며 같은 생각 했으리라
唯願當歌對酒時    바라노니 잔들고 노래 부를때마다
月光常照金樽裡    교교한 달빛 잔 가득 비춰주시라.

- 번역은 孤芳, 李勝九의 블로그에서 따옴

예전 스쳐 지나가듯 읽은 이 백의 시구에서 마음에 남은 것이 '우리는 지금 옛달을 볼 수 없으나 저달은 일찍이 옛사람을 비췄으리'하는 구절이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는 노래와 물에 빠진 달을 건지려 하다 이태백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게된 것이 바로 위에 소개된 시 때문이 아닐지..

한시의 번역은 손대는 사람마다 틀리게 나온다. 아마 모든 시의 번역이 그럴 것이다. 고은 시인이 올해도 노벨상 수상을 못한 것에 대해 번역의 한계, 시 자체의 보편성의 부족 등 이래 저래 짚는 얘기들이 많다. 한 언어와 역사를 공유하는 사람들간의 정서를 온전히 옮기지 못하는 번역의 한계도 맞는 말이겠고 세계를 아우르는 보편성의 부족도 맞는 말일게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위의 번역과 달리 허세욱 교수는 이 시를 이렇게 해석하여 번역한다.

술잔 들고 달에게

저 하늘에 저 달의
내력을 말해 주오.
내 잔 멈추고
묻노니,

사람은 저 달에
오를 수 없지만
저 달은 떠돌며
사람 따라 다니거늘.

하늘을 나는 거울이
단청 대궐에 걸린 듯
푸른 연기 사라지면
다시 휘영청 밝네.

누구나 밤이
바다로 뜨는 걸 알지만
누가 새벽녘 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걸 아는가?

흰 토끼 불로약을 찧어
가을, 그리고 봄
항아는 혼자 살며
뉘라 이웃하는가?

지금 사람은
옛 달을 보지 못하지만
지금 달은
옛 사람을 비추었기로.

옛 사람, 지금 사람
모두가 흐르는 물
저 밝은 달
바라보기는 마찬가지어거늘.

지금 내 노래와
내 술잔을 보곤
달님이여! 길이
이 금빛 술통을 비춰 주소서.


해석의 차이가 천지 차이다. 한 분은 따온다고 하고 한 분은 오른다고 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한시의 특성 때문일까? 다른 언어권의 번역시들을 읽을 때 감흥이 덜오는건 이런 번역상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이백이 혼혈일 수도 있다는 것, 평생을 방랑했고 네번 결혼 했으며 2년간의 짧은 관직생활을 했고 안록사의 난에 연루되어 귀양가기도 했었다는 것, 두보보다 12살 위라는 것을 책에서 일러 주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백은 만성늑막염에 해당되는 부액증으로 죽었을 것이라고.




프로필 이미지
36일차
2010.10.11 06:52:42 *.44.124.42
이 성선 시인의 마지막 시집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1941년 강원도 고성 생. 2001년 5월 작고. 이 시가 나온지 7개월만에 60세로 작고하셨다.

참여자가 아닌 달관자, 고뇌 없이 달관한 사물, 길찾기의 도정이 아닌 이미 찾은 자가 쓴 듯한 시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길을 찾는 도정에서 갈등하고 있기에 이미 벗어버린 듯한 달관의 시들은 하늘에 걸린 달 만큼이나 멀고 아득해 보인다.

시가 달관과 구도의 색채를 띄고 있을 때 지나친 탈속은 시로서의 매력을 떨어지게 할 수도 있다고 느꼈다. 물론 자기 수준만큼 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시 속에 갈등이 있다가 그 갈등이 극적으로 승화되는 무언가가 느껴질 때 시가 가슴을 탁 치고 올라온다. 시 속에 달관만 그려져 있으면 이렇게 탁 치고 올라오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 그러면, 달관과 깨달음의 시는 쓰지 말란 말인가? 

이런 고요함, 나뭇잎 한 장이 어깨에 앉아서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라고 느낄 수 있는 고요함이 내 가슴에 깃들면 이 시들을 다시 읽어봐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성선의 시들은 '새는 세상을 날며 그 날개가 세상에 닿지 않는다. ', '나의 시는 지금 너무 비현실적이어서/너에게 닿을 수 없다/내 가슴은 이미 불꽃이 식어버려/너의 몸을 덥힐 수 없다'라고 읊었듯 새와 달과 나비처럼 내게는 너무 높고 신성하고 외롭기만 하다.

해설을 쓴 정효구 문학평론가는 그를 일러 '세속의 집을 버리고 우주 속으로 떠난 출가한 시인', '세속사의 문법과 거리를 두고 자연과 우주의 문법'을 배운 시인이라 칭한다. 시로써 도를 꿈꾸는 시인들이 이 성선 시인 홀로만은 아니다. 다만 시 속에 갈등을 느끼는 세속의 사람이 없었기에 시로서는 좀 아쉬운 그런 느낌이 있었다.

도 반  

벽에 걸어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 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 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지금


조도

작은 날개로
길을 다 지우고 가 버려서

그가 떠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가지 위에 떨림 하나
그것도 잠깐만에 사라졌다

그의 삶
不立文字

황홀한 鳥道

시인은 흔적 없는 조도를 꿈꾸는데 시는 흔적의 길이라는 것이 모순이다.
프로필 이미지
37일차
2010.10.12 06:55:07 *.41.16.144
채호기 '지독한 사랑', 문학과 지성사. 1992년 초판 발행. 1957년 대구출생, 서울예전 문창과와 대전대 국문학과 졸업.

이분은 1988년 창작과 비판사를 통해 등단하여18년간 문학과 지성사에서 근무하다가 대표이사직을 끝으로 회사를 그만 두고 현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고 하신다. 문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문단의 한 가운데서 부럽게 살아가신 분이실 듯도 하다. 첫 시집인 '지독한 사랑' 이후 슬픈 게이, 밤의 공중전화, 수련, 손가락이 뜨겁다 등 꾸준히 시집을 내고 계시다.

삼십대에 등단한 시인들이 많지 않다. 뛰어난 많은 시인들이 십대에 시인의 꿈을 키우고 이십대에 등단한다. '지독한 사랑'이 나온 때가 시인이 36세가 되던 무렵이다. 등단은 32세쯤에 하신 듯 하고. 30대가 쓴 '지독한 사랑'은 갇힌 사랑, 몸의 언어, 일상의 불안 속에서 탈출하고 싶은 갈망의 언어로 내게 읽혀진다. 

'그대의 상처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세우는 못이여' - 못 중에서

'유리창에 맺히는 빗방울처럼/캄캄한 어둠의 표면에 새벽이 매달려/매달려 동그랗게 뭉쳐지려는 물방울/한세상 아픔이 그 속에 여울지네' - 작고 짧은 속삭임 중에서

'살아서 그렇게도 당신을 가두었던/당신의 몸이 완벽하게 열려 있어/지금은 아무것도 가두지 않습니다'-주검 중에서

'무서운 것은 사랑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데 있지 않고 애초에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네가 내 손을 잡아줄 수 없듯이, 내가 네 손을 잡아줄 수 없다'- 엽서 중에서

'인간이 만든 글자 하나/빛없는 우주 공간에 떨어져 고립되고'- 글자 중에서

'언제까지나 내겐 쓸쓸한 자리일 너' - 엽서 중에서 

'네 몸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새벽, 희부윰한 정적 속에서, 통증도 없이 맑은 꽃들을 뱉아내듯, 나를 낳아! 너의 살, 너의 피와 체온을 가진 나를 낳아다오!'- 맑은 꽃들을 뱉아내듯, 나를 낳아! 중에서

욕구는 있지만 사랑의 대상은 없고, 상대의 몸을 통해 새로운 나의 생성을 바라는 열망을 토로하는 싯구들. 30대 독신 남자의 사랑이 이런 모습을 띄고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갇힌 내가 행위 속에서 새로운 나로 태어나고 싶은 갈망의 표현이 '지독한 사랑'이라고 이름붙여진 듯하다. 집요한 주제와, 외부적 사건이 아닌 내부의 상상력으로 솟아나오는 싯귀 등, 스쳐지나가는 일상에서 우연히 건져낸 시들이 아니라 연작시들처럼 집요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시를 썼다.

'적절한 훈련도 없이 편견을 가지고 지식에 뛰어드는 아마추어는 가장 타락한 학자보다도 더 무자비하고, 진리와는 동떨어진 터무니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몰입,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 중에서

시를 읽으며 내 식으로 해석하는 내 모습을 경책하는 말이다. 모든 시는 수만 갈래로 가닥 가닥 갈라지는 지상의 모든 색과 향기의 한가락을 표현하는 것이니 아무것도 내치거나 무작정 다 끌어안지 마라, 이것이 오늘의 내 감상평이다. 몸이 아닌 사랑하는 '네'가 그려진 시.

사랑하는 네 속에

혈관 속에
네가 있어 사랑하는
네가 있어
나는 춤춘다

어느 새벽
새파란 가시들 새 발가벗은 탱자 딸 때
수줍은 소리치며 달아나는 너

내 닫혀진 몸을 열고 피는 꽃
기억하니? 너는 내 심장이었다는 것을
내 혈관을 뛰어다니던 피였다는 것을

재가 되어 아득한 뿌리에 다가갈 때까지
붉은 꽃, 사랑하는 네 속에
타오르는 불빛으로 살아

혈관 속에
내가 있어 춤추는
내가 있어
너는 밝다









프로필 이미지
38일차
2010.10.13 06:38:42 *.41.16.144
조 태일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창비시선 187. 1999년 7월 발간.

서슬 푸른 '식칼론',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던 '국토', '자유가 시인더러' 등 시집 제목만 봐도 이분이 현실의식이 강한 민중시, 참여시를 써왔던 분임을 알 수가 있다. 김남주, 전태일 등과 함께 기억되는 대표적 투사의 이미지를 가진 분이시다.

시인이 59세가 되던 1999년에 발간된 시. 이 무렵 시인은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다. 
변해버린 시대와 함께 더이상 서슬푸른 칼날이나 들끓는 외침이 시집 안에는 없었다. 이 정록 시인이 말한 '삶이 얇아야 시가 나온다'는 말은 삶의 갈등과 파르르 떨리는 감수성의 위태로운 끝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안간힘쓰는 날선 감성이 있어야 마음을 울리는 좋은 시가 나온다는 말로 이해했다. 

이 시집에는 잔잔한 눈으로 땅바닥과 하늘의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을 세밀하게 바라보는 정제된 감수성과 여린 따스함이 있었다. 마음을 격동시키거나 낯설게 하는 것들이 아니라 마음을 고향으로, 근원으로 돌리게 하는 싯구들이다. 작고 여린 것들을 향한 정제된 시어는 평이한 정서 속에서 나온 듯하나 시인의 감성은 오래 깍인 차돌처럼 반짝인다.

어머니를 찾아서

이승의 
진달레꽃 
한 묶음 꺽어서
저승 앞에 놓았다

어머님
편안하시죠?
오냐, 오냐,
편안타, 편안타

'내 작은 눈길에도 가볍게 떨고 마는/작고 작은 들꽃들에게도/바람들은 매달려서 보채며 잡아끌며/한시도 가만 있질 못한다' - 바람과 들꽃 중에서

'대낮이다./동리산 태안사 대웅전/부처님 손바닥./ 빛과 그림자/한숨결로 낮거리 한창이다/문 틈새로 날아든/산바람은 고요와/뒤엉켜 낮거리 한창이다.' -  부처님 손바닥에서 중에서

안간힘을 쓰며/찌푸린 하늘을/요동치는 우주를/떠받치고 있는/저 쬐그만 것들
작아서, 작아서/늘 아름다운 것들,
밑에서 밑에서 늘 서러운 것들. - 이슬 곁에서

민족과 역사를 읊던 시인이 점점 나이가 들고 사회적인 안정을 찾으면서 자연으로, 작은 것의 서정으로 회귀하는 것이 낯설지는 않다. 많은 민중시인들의 90년대 이후 행보가 그러했으므로. 

시심은 선별적으로 대상을 선택한다. 눈에 담고자 마음 먹은 것들만 보이고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대신에 작고 여린 이슬, 꽃잎, 제 몸 파먹히는 지렁이, 정적, 계절의 지나감, 돌아가신 어머니, 달빛, 가을 잠자리, 메뚜기를 벗삼기로 한 시인. 삶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그릴 것인가는 모든 예술가들의 숙제이다.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필터링하는 주체인 의식, 삶에 대한 관점, 지향점,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케 되는 아침이다.

물을 노래함

더우면 소나기가 되고
추우면 눈이 되고 고드름이 된다

화나면 폭포가 되고
심심하면 보슬비가 되고
한가하면 가랑비가 된다

여린 풀잎 끝에 매달리면 이슬보석이 되고
슬픈 눈동자에 머물면 눈물이 된다

머문 곳이 답답하면
천만리 길 휘돌아 바다가 된다

처음도 끝도 없는 사랑
물, 물, 물, 물물물물물물물.......

이 글 쓰고 나서 인터넷 검색한 후 이 시집이 나온 후 두달만인 9월에 조태일 시인은 작고하셨음을 알았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싯귀들로 느껴졌는데 그랬구나, 그러셨구나.. 
프로필 이미지
39일차
2010.10.14 06:53:38 *.41.16.144
천양희 '너무 많은 입' 2005년 발간.

천양희 시인에 대해 전혀 모른다. 얼추 시 속에 나타난 얘기로 보아 수락산 근처 마들에 살거나 살았던, 50이 넘은 시인이겠거니 한다. 

시인으로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되뇌이며 시를 쓰는 시인에게서 맑고 치열한 정신을 보았다. 
'구르는 둥근 돌은 무섭다'하고 콱 와박히는 구절이나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나는 살아서도 구른다/구르면서도 산다' 등 시 몇편을 읽어가면서 잠언처럼 와 박히는 구절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속으로 우는 것들은 울음도 힘이 된다는 것 안다 울어라 새여,/
시 하나로 세상을 휘어잡는 시인들은 타고난 소리꾼이다 몸보다 먼저 혼을 깨우고
한순간을 영원으로 밀어올린다' - 소리꾼 중에서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하라' - 노을시편 중에서

'흙을 빚을 때는/마음 자리 부터 살피고/맑은 혼을 당겼다/숨은 흙을 찾아 떠나고/숨은 흙 찾아 돌아왔다/하루에 천년을 살아버린 어느 도공' - 도공 시 중에서

'나는 하루에 몇번이나
내 몸을 쳐서 시를 쓰나' - 벌새가 사는 법 중에서

몸보다 혼을 먼저 깨우는 소리꾼과 피흘리는 노을과 하루에 천년을 빚는 도공과 몸을 쳐서 나는 벌새처럼 '시'를 쓰는 시인의 시는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읊어줄까?

'뒷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 뒷편 중에서

'간절한 것들은 다 바람이 되었단다' - 바람편지 중에서

'짐만 지고 높이 올라가는 걸 좋아하는 벌레/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일생' - 어떤 일생 중에서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소리 골짜기 만큼 깊어집니다. 제 속에다 간절함을 품은 까닭입니다. 묵묵한 바위들은 비에 젖은 생을 모를 것입니다.'-오래 젖는 집 중에서

'왜 산들은 볼 때마다 무진장 감동을 주며/왜 새끼들은 품을 때마다 가슴 저리는지'- 산에 대한 생각 중에서

'썩은 흙에서 풀이 돋고/썩은 풀이 반딧불을 키운다/썩은 것이 저렇게 살다니/썩은 풀의 공양/
나에게 썩은 것이 있다면/썩지 않아도/살 수 있다는 것이다'-썩은 풀 중에서

'비오는 저물녘/헐한 저녁이 내 허공을 꽉 채운다/저 빗소리 저 어둠도 오래 내릴 들판이 있던가/있다가도 없는게 생이다, 마들이여' - 마들은 없다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모든 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가다보면 길이 되는 것, 그것이 오래 기다린 뒷길일 것입니다'-뒷길 중에서

'하늘 속에 꿈을 밀어넣은 적 있다/꿈의 의미들 세계들, 이상은 또 얼마나 높게 퉁겨 올랐던가'- 스카이 아파트 중에서

'그래, 세상일은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떨어질 일이 많을거야 그래도 삶을 수락해야지/가끔 뒤도 돌아보렴/뒤가 있으니 앞이 있다는 말 참, 말이라는 걸/새삼 알게 될거야/자기를 낮춘다는 것 쉽지 않거든/내려가는 것 더 어렵거든/말해주마/수락에 가려면/먼저 마들을 지나야 한다' - 수락시편 중에서

'입문하는 길이 이렇게 멀다' - 마들에서 광화문까지 중에서

'나는 파도로 젖은 문장 앞에서 주저 앉습니다/쓰지 못한 것은 정작 간절곶입니다' - 간절곶 중에서

'가시가 없으면 가슴이 없는 것이다'-가시나무 중에서

'내가 마치 외다리로 서서/몇시간 꼼짝 않는 목이 긴 새 같다/혼자서 감당하는 자의 엄격함이 저런 것일까/발자국, 발의 자국을 지우며 난다' - 목이 긴 새 중에서

'수심에 잠겨 눈감고도 잠 못드는 사람들/생은 왜 눈물로 단련되나' - 마음의 경계 중에서

'그때야 일어날 마음의 지진' 마음의 지진 중에서

'말만 들어도/다문 입에 웃음 고이는/다문이를 만나/말만 많던 입 다물고 싶다' - 다문이 중에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하지 말라/우리가 언제/꽃처럼 피었느냐' - 이상 난동 중에서

제 삶을 닦으며 의미를 건져올리는 시인, 무엇이 보이는 가는 눈을 어떻게 맑게 닦아 왔느냐에 달려 있다. 구도(求道)가 별거인가. 삶을 닦고 눈을 닦으면 그게 구도이고 시인의 삶인 것이지. 

'한마음의 움직임과/한마음을 움직이게 한/한 마음의 움직임이/겹쳐 떨린다' - 교감 중에서

'자신이 가장 쓸쓸하고 가난하고 높고 외로울 때/시인이 되는 것이다' - 시인이 되려면 중에서

'산이 거기 있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내가 있기에 산에 드는 것이다'- 등산과 입산 중에서

'누구에게나 무서워 울면서도 가야할 산 길이 있는 것이다' - 최고봉 중에서

누군가가 잠언은 시가 아니라고 했다. 잠언을 위한 잠언이 아니라 삶이 시가 되고 시가 잠언이 되는 진정성이 있다면 이런 시쓰기, 천년을 하루에 사는 도공의 마음으로 쓰는 시쓰기 이상의 삶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삶은 시가 된다. 삶을 시처럼, 시를 삶처럼.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원고료도 주지 않는 잡지에 시를 주면서
정신이 밥 먹여주는 세상을 꿈꾸면서
아직도 빛나는 건 별과 시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제 숟가락으로 제 생을 파먹으면서
발 빠른 세상에서 게으름과 느림을 찬양하면서
냉정한 시에게 순정을 바치면서 운명을 걸면서
아무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면서
새소리를 듣다가도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고 책상을 치면서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시적인 삶에 대해 쓰고 있는 동안
어느 시인처럼 나도 무지하게 땀이 났다

* 연암 박지원의 글 '답경지'에서

어떤 일생

부판이라는 벌레가 있는데 이 벌레는 짐 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무엇이든 등에 지려고 한다는데 무거운
짐 때문에 더이상 걸을 수 없을 때 짐을 내려주면 다시 일어나
또다른 짐을 진다는데 짐 지고 높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평생 짐만 지고 올라간다는데 올라가다 떨어져 죽는다는데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라는데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더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곡괭이를 팽개치고 지평선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다는데 걸어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춘다는데 걸음을 멈춘 순간 밭고랑에 쓰러져 죽는다는데

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일생




프로필 이미지
40일차
2010.10.15 06:31:41 *.41.16.144
임길택 글, 조동광 그림 '똥누고 가는 새' 1998년 발간.

임길택 시인은 1952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강원도 산마을과 탄광마을에서 15년 동안 교사로 재직하며 어린이들을 가르치다 1997년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시집에는 그림이 있었다. '홍익대학교 판화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노는 것이 좋아 놀고 있는 중입니다. 좁은 곳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현재는 넓은 장소를 찾아 놀기를 계획중에 있습니다'라고 밝히는 조동광님.

투명한 것을 잘 그리는 화가와 투명한 것을 잘 자아내는 시인이 만나 시집 한 권 내었다. 투명한 물빛 다기와 투명한 잠자리 날개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그림이 열어 놓은 마음에 시가 살포시 들어 앉았다. 

부엌

쓰다 남은 판자 조각에
비뚜름히 새겨놓은 글귀

- 없는 대로
- 불편한 대로

아궁이 앞
불쏘시개 솔잎 한 줌만이
날마다 이 글귀 읽고 있다

모든 시 속의 주인공은 스님이다. 교사로 세속에 사셨지만 이 분은 이미 마음으로 심출가를 하신 분이다. 동시처럼 선시처럼 읽히는 시들이 깊고 맑고 투명해서 흐르는 시냇물처럼 마음을 편안하고 잔잔하게 만들었다. 

꽃나무

밟혀 꺽이면
그만이려니 했는데

가지가 꺽이자
얼른 새 가지 내놓고

다른 꽃들 필 무렵에 맞춰
저도 얼른 꽃을 피워댔어요.

꽃나무는 
제 이름처럼 살고 있었어요.

지피값

가시에 손 찔려가며
몇 날 걸려 지피를 땄다.
열닷 되 모으는 동안
잎 가리느라 시간을 더 많이 썼다.

칠팔만 원은 받을 수 있으려니
속셈을 하고 또 하며
장날 기다려 읍으로 나가니
한 되에 삼천 원.

'돈이 적구나' 생각하다가는
누가 읽었을까 부끄러워
얼른 그 마음 숨겨버렸다.

그저 흘러가도 좋을 것들이 있다. 흘러가는 사이로 영원으로 붙잡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그냥 흘러가야 할 것들과 영원으로 남기고 싶은 것들을 잘 구별하는 맑은 눈으로 깨어있고 싶다.

말을 줄이고 투명한 물빛 마음으로 살다간 시인. 

떠나가는 곳 미처 물을 틈도 없이
지나가는 자리마저 지워버리고 가버린 새
금 그을 줄 모르고 사는 
그 새.
- 똥 누고 가는 새 중에서


프로필 이미지
41일차
2010.10.16 06:33:45 *.41.16.144
구광본 시집 '강' 1987년 제 11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시인이 65년 대구 생이니 이 시집이 나왔을 때가 23세 무렵이다. 
4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었으니 아마도 20대 초반부터 23세 무렵까지의 기록이었을 것이다.

시에 공감할 수 있는 주파수는 사람마다 나이와 처지에 따라 틀리다. 내게 감흥이 없던 시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을 울리는, 나를 대변해주는 시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다만 시를 안읽어서 모를 뿐이지. 

당시 20대 중반이던 선배가 대학교 2학년이던 나에게 이 시집을 선물했다. 첫장을 넘기니 선배가 쓴 글이 보인다. 구광본의 시어들을 엮어 선배가 쓴 글이라고 볼 수 있다.

꿈꾸는 동물처럼
오래 흔들렸으므로 너는 아름답다.
그해 여름
집도 절도 없는 지하생활자는
궁싯거리며 하루를 감당해내고 있었다.
버티고 있었다.
마음은 새벽별처럼 청아했지만
아픔 몸 헐벗은 들길을 지나야하는 나는 정녕
서울, 그곳에서 죽을 수 없었던 것이다. 

20년이 지나 시집을 다 읽고 이 글을 읽으니 20대의 불안과 방황으로 흔들리던 선배가 느낀 공감대의 영역이 새삼스럽다. 지하생활자의 수기, 서울, 나는 그 곳에서 죽을 수 없었다, 기린, 아픈 몸, 헐벗은 들길, 오래 흔들렸으므로.. . 20년전 선배의 눈에 이 시들이 눈에 깊이 들어왔었나 보다.

오래 흔들렸으므로

오래 흔들렸으므로 너는 아름답다
오래 서러웠으므로 너는 아름답다

알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새
얼키고 설킨 뿌리를 몰라도
오래 목말랐으므로 너는 아름답다

20대 초반에 이미 소설가로, '오늘의 작가상' 시인으로 등단한 시인 구광본의 다음 행보는 어떠할까? 
첫 시집 이후 시집을 내지 않고 대신 그는 2000년 이후 소설을 내고 있다. 그래서 위키백과에 소개된 그는 소설가 구광본이다. 독자들은 여전히 몇 편의 구광본 시들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은 전반적으로 몰입이 되지 않았는데 시에는 시인의 정신대가 위치하는 발신 주파수가 있나보다. 그 음역대에 독자가 위치해 있어야 온전한 수신이 되는가 보다. 

기린

내가 그리고 있는 기린은
네가 그리고 있는 기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엉터리 기린 그림이라고
너는 말하지만 그래 나는 기린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린을 그렸다
너의 기린이 점점 형체를 갖추면서
나무의 잎사귀와 열매를 따먹으며
너의 붓끝에 사로잡히는 동안에도
나의 기린은 점점 자라 화폭을 뚫고
이젤을 넘어뜨리곤 시멘트 바닥에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간다

쉽게 말해질 수 있으나 쉽게 살아질 수 없는 경지.


프로필 이미지
42일차
2010.10.17 06:53:06 *.41.16.144
동녘이 어스름히 터온다. 오늘 날씨는 흐리려나? 아직 희부옅다.
김 소월의 시, 실천문학사 발간, 도종환 해설.

먼 후일, 못 잊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님의 노래, 부모, 가는 길,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진달래꽃, 산유화, 초혼,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교과서에 실리고, 노래로 불려져 너무도 익숙한 소월의 시들이다. 애틋한 그리움의 시들이 너무 많아 혹시 소월이 상사병을 앓았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소월은 14세에 결혼하여 18세에 첫 딸을 얻고 33세로 죽기까지 5명의 자식을 본 가장이었다. 실제 사랑하던 다른 여인이 있어 많은 번민을 하였다고 한다.

소월이 세살 때 부친이 일본인에게 맞아 정신이상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후 오산중학시절을 거쳐 동경 유학에서 본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귀국 후 조부의 간섭, 부친의 정신이상, 사업 실패 등으로 좌절하여 지내다 1925년 '진달래꽃' 첫 시집 발간 후 점점 창작에서 손을 떼다 1934년 음독 자살하였다. 

앞에 꼽은 주옥같은 소월의 시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 쓴 시들이다. 시를 읽고 나서 미처 몰랐던 소월의 삶을 알고 나니 마음이 아프다. 

널리 잘 알려진 소월의 시 이외에 아름다운 운율과 가락으로 마음을 울리는 시 두편.


생각하는 머리에
누워 보는 글줄에
가깝게도 너는 늘
숨어드네 떠도네.

일곱 별의 밤하늘
번쩍이는 깁그물
내 나래을 얽으며
달이 든다 가람물.

노래한다 갈잎새
꽃이 핀다 물모래
다복할 사 내 베개
네게 맡길 그 한때.

하지마는 새로이
내 눈썹에 눈물이
젖는 줄을 알고는
그만 너는 가겠지.

두루 나는 찾는다
가신 네가 행여나
다시 올까 올까고
하지마는 얼없다.

봄철이면 동틀녘
겨울이면 초저녁
그리운 이 너 하나
외로와서 슬플 적.


첫 치마

봄은 가나니 저문 날에,
꽃은 지나니 저문 봄에,
속없이 우나니, 지는 꽃을,
속없이 느끼나니 가는 봄을.
꽃지고 잎 진 가지를 잡고
미친 듯 우나니, 집 난 이는
해 다 지고 저문 봄에
허리에도 감은 첫 치마를
눈물로 함빡히 쥐어짜며
속없이 우노나 지는 꽃을,
속없이 느끼노나, 가는 봄을. 

프로필 이미지
43일차
2010.10.18 06:41:30 *.41.16.144
조 은 시집 '따뜻한 흙'. 문학과 지성. 2003년.
시인은 1960년 안동생.

오늘은 잠을 깨우기가 유난히 힘들어 시집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지난 한 주간 쌓인 피로의 여파를 온전히 풀지 못한 주말을 보낸 때문일게다.

시집을 읽으며 조 은 시인의 시풍에 대해서 떠오른 생각은 '내 속에 뿌리를 둔 타인의 고통, 그리고 그러한 고통, 슬픔에 유난히 발달된 촉수' 이런 것들이었다. 시인은 고통을 따스하게 보듬고 있고, 자각시키고 있으나 자신과 독자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출구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아,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해인 수녀님의 밝고 온화로운 시들을 좋아하는 구나. 고통을 그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구나 싶은 생각. 

어쩌면 좀체 깨지 않는 잠과 온전히 해소되지 않은 정신적 피곤함으로 인해 내게 호기심과 시인을 온전히 읽으려는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렇게 읽고 말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일상에 갇혀 삶의 고통에 갇혀 그 너머의 것을 보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 시인이 함께 있어 그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정의 산책

캄캄한 곳에서 누가
라이터를 켜고 있다

하늘에는 제 생각에 질식한
달이 흐른다

허공에
몰려
生과 死를 왕복하는 추로 사는 몸이

잠자리를 빠져나와
되새김질을 하며
인간의 마을을 걸어다닌다

허공에 매달린 추처럼 생과 사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의 자신의 삶에 대한 인식도 아마 시를 통한 의미찾기가 있어 그다지 허허롭지 않을 것이다.

믿음이 나를 썩지 않게 한다

씨앗 속에 드는 세상의 이치처럼
오늘도 나는 삶을 믿으며 잠자리에 든다
꽃들이 고봉으로 차오르기도 하는
잠 속으로 찾아오는 것들은
내 몸을 돌며 울부짖기도 하지만

믿음이 나를 썩지 않게 한다
내가 보는 세상은
아직도 싱싱하다

새로운 한 주, 싱싱하게 열리는 세상을 썩지 않은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프로필 이미지
44일차
2010.10.19 06:59:02 *.41.16.144
최승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 문학과 지성사. 1985년 발간.
시인이 32세된 무렵에 발간된 두번째 시집이다.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속에서도 곰에게 쫒길 것이다 - 마을 중에서

뾰죽 뾰죽 가시를 세우며 사는 우리는 고슴도치의 마을에 사는 평화로운 쫒기는 사람이다. 시인의 현실 인식은 또한 삶을 '피동사'로 보기도 한다. 

기우뚱거리는 피동사,
혹은 수난의 견딤의 초능력자들
- 피동사 중에서-

이 밖에도 시인의 세상 인식을 보여주는 싯구들이 많다. 나 또한 이에 공감한다. 

내가 나무말 열두마리를 끌고가는 것이 삶이라면
나무말 열두마리가 나를 끌고가는 것은 죽음이다
- 낮과 밤의 발걸음

보이는 것이 
한 그릇 안에 꽃핀 양파와 같다
벗겨도 벗겨도 알 수 없는 양파
늘 안개가 가리고 있는
밑빠진
하늘의 그릇
- 부엌창 중에서-

우리들은 네모 속에 던져지는 주사위였지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 네모를 향하여 중에서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이다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인식의 힘 중에서

하염없는 무지 속에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가는 사람
-떠내려가는 사람 중에서

꺽쇠와 같이 긴장한 채
꺽쇠처럼 부서지는 생은, 시계는
- 나사가 나사에게 중에서

시간의 바퀴
내가 떼어버릴 수 없는 바퀴라면
내가 먼저 굴러가겠다
그것이 형刑이고
자유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굴리는 생이
비록 굴러지는 생이라 할지라도
-휠체어 중에서

바늘은 영에서 시작되어
흔들리다가
다시 영으로 돌아간다
-저울 중에서

오징어를 먹기 전에
오징어의 바다를 뒤돌아보라
오징어가 죽든살든 무심한 바다
출렁이는 거대하고 푸른 물북인 바다를
-오징어 5 중에서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등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다
- 오징어 3 

비켜서 사는 비애로 얼룩진
여린 마음씨들
- 터벅 터벅 걸어갔던 길 중에서

그러나, 시인의 현실 인식은 갇혀있지 않다. 시간은 자신의 생과 죽음 이전의 시간으로 열려있고, 공간은 여러가지 상상력으로 꽃피워지는 열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순간에서 영원을 바라보는 인식의 눈이 있고, 무디고 낯선 세상에 저항하는 벗어나려는 의지가 있는 한 시인의 눈이 현재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무서운 굴비

나는 왜 굴비를 두려운 존재라고 말해야 하나
석쇠 위에 구워 먹거나 찌개 끓여도
얌전히 있는
저 무력하기 짝이 없는 굴비를

굴비는
소금에 절여 통째로 말린 조기라 한다
혹은 건석어(乾石魚)

굴비, 나의 적(適), 나의 반역(反逆), 나의 비굴
비굴한 삶은 통째로
굴비를 닮아간다
그물을 뒤집어쓰고 퍼덕이다가
결국 장님에 벙어리
귀머거리가 된 굴비를
나는 왜 두려운 존재라고 말해야 하나

다음은 시집의 맨 뒤에 나와 있는 시인의 말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개혁함으로써 보다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 부정의 문학은 이 믿음위에서 출발하여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세계를 세울 때까지 현실을 개조하려는 노력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보다 크고 참다운 나에 이르려는 노력 역시 문학에 필요하다고 나는 느끼고 있다. 나의 변모는 곧 세계의 변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세계는 나를 내포하고 나는 세계를 내포하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관점에서 나는 자아와 현실을 부정하면서 시의 길을 가고자 한다. 이 길이 나에게는 이상적인 중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언젠가 '내 영혼의 북가시 나무'라는 시에서 읊은 대로 '잎사귀 달린 시를, 과일을 나눠주는 시를/언젠가 나는 쓸 수도 있으리라 초록과 금빛의 향기를 뿌리는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시간적, 공간적 상상력,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인식을 아주 많이 보여주는 시 두편. 

공터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나무말

잔등에 아이들을 태우고
나무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래----
그래----
머리 저으며 시큰둥하게 살아온 내 앞에서
공중에서 뛰노는 나무말들은
그래----
그래----
그래----
무턱대고 끄덕이는 말대가리들은 베어버리겠다!
그래도 나무말들은
그래----
그래----
그래----

시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시로 이미 시인이 말하고 있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프로필 이미지
45일차
2010.10.20 06:06:16 *.41.16.144
이원,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2007년 문학과 지성사.

난해했다. 해체란 이런 것이구나를 제대로 보여 주었다. 68년생이면 마흔이 넘은 (이 시집을 냈을 때는 30대 후반의) 아줌마인데 세상이 이런 식으로 보일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낯설었다. 내게 있어서 문제는 이 낯섬 너머의 뭔가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상의 오감도를 읽고 시적 감흥을 느끼고 멋진 해석을 쏟아내는 사람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 심정으로 시집을 읽었다. 

이 원 시인을 읽어보려 한 것은 이 시집에 실린 '영웅'이란 시 때문이다. '시가 내게로 왔다'에 실린 이 시를 읽고 경쾌한 랩 풍의 시어에 매력을 느끼고 이 시에다가 캠벨의 언어를 대입한 적이 있다. 오늘 시집을 읽고 느낀 것은 '영웅' 이외에 내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던 시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해체..살이 무너지고, 경계가 모호해지고, 낯설어지고, 분해되는 사물과 현실들. 그 세계가 엄청 낯설다.

'영웅'을 읽고 쓴 글로 오늘의 단군일지는 대체한다. 

이 원의 '영웅'을 캠벨을 통해 읽다.


영웅

이 원

 

오늘도 나는 낡은 오토바이에 철가방을 싣고

무서운 속도로 짜장면을 배달하지

왼쪽으로 기운 것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나의 생이야

기운 것이 아니라 내 생이 왼쪽을 딛고 가는 거야

몸이 기운 쪽이 내 중심이야

기울지 않으면 중심도 없어

나는 오토바이를 허공 속으로 몰고 들어가기도 해

길을 구부렸다 폈다

길을 풀어줬다 끌어당겼다 하기도 해

오토바이는 내 길의 자궁이야

길은 자궁에 연결되어 있는 탯줄이야

그러니 탯줄을 놓치는 순간은 절대 없어

 

내 배후인 철가방은 안팎이 똑같은 은색이야

나는 삼류도 못 되는 정치판 같은 트릭은 쓰지 않아

겉과 속이 같은 단무지와 양파와 춘장을

철가방에 넣고 나는 달려

불에 오그라든 자국이 그대로 보이는

플라스틱 그릇에 담은 짜장면을

랩으로 밀봉하고 달려

검은 짜장이 덮고 있는 흰 면발이

불어터지지 않을 시간 안에 달려

오토바이가 기울어도 짜장면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내 생의 중력이야

아니 중력을 이탈한 내 생이야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은 모두 이곳이 아니야

이곳 너머야 이 시간 이후야

나는 표지판은 믿지 않아

달리는 속도의 시간은 지금 여기가 전부야

기우는 오토바이를 따라

길도 기울고 시간도 기울고 세상도 기울고

내 몸도 기울어

기울어진 내 몸만 믿는 나는

그래 절름발이야

삐딱한 내게 생이란 말은 너무 진지하지

내 한쪽 다리는 너무 길거나 너무 짧지

그래서 재미있지

삐딱해서 생이지 절름발이여서 간절하지

길이 없어 질주하지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나는 가끔은 뒤를 돌아봐

착각은 하지마 지나온 길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야

나도 이유 없이 비장해지고 싶을 때가 있어

생이 비장해 보이지 않는다면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온몸이 데는 생의 열망으로 타오르겠어

그러나 내가 비장해지는 그 순간

두 개의 닳고 닳은 오토바이 바퀴는 길에게

파도를 만들어주지

길의 뼈들은 일제히 솟구쳐오르지

길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

파도를 타고 삐딱한 내 생을 관통하지

 

--------------------------------------------------

 

랩같다. 가락을 타고 노래처럼 흘러간다.

제목이 왜 '영웅'일까?

 

'오토바이는 내 길의 자궁이야

길은 자궁에 연결되어 있는 탯줄이야

그러니 탯줄을 놓치는 순간은 절대 없어'

 

캠벨의 '신화의 힘'에서 이 시와 맞닿는 이미지 몇개를 읽는다. 

 

'우리는 성당으로 들어감으로써 사실은 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로 들어갑니다. 성당은 우리 영적인 삶의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교회인 것이지요. 주위의 모든 형상은 모두 영적인 삶의 의미를 지닙니다.' - 신화의 힘 p159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 초원의 사냥꾼에게는 세계 전체가 성소였어요. 그러나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天福)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 신화의 힘 p179~180

 

오늘 만난 친구는 지난 10년간 끊임없이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살다보니 이제 몸이 한계에 이른 듯하다고 했다. 심장이 통제할 수 없이 두근거려 거리에서 쓰러질 것 같아 119 앰블런스를 타고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고 지나친 정신적 부담감으로 인해 안정제를 매일 먹을 것을 처방받았다고 한다.   

늘 요구된 일만 하다가 진정한 자신을 낳을 수 있는 '여백의 성소'를 잃어버린 우리에게는 진짜 나를 창조해갈 '자궁'이 필요하고 자궁에 연결되어 있는 '탯줄'이 필요하다.

 

'길도 기울고 시간도 기울고 세상도 기울고

내 몸도 기울어

기울어진 내 몸만 믿는 나는

그래 절름발이야

삐딱한 내게 생이란 말은 너무 진지하지'

 

캠벨은 얘기한다.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세 마리를 만납니다. 그런데, 시적 통찰력의 화신(化身)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지옥의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지옥의 미궁은 자만과 욕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영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 신화의 힘 p217

 

심리적 위기에 이른 우리의 길도 기울고 시간도 기울고 세상도 기울고 내 몸도 기울고 삐딱한 내게 생이란 말은 너무 진지하다.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은 우리는 제각기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세마리와 싸운다. 그런데, 이 지옥의 미궁에서 나를 빠져나가게 해줄 영웅은 어디 있지?

 

나도 이유 없이 비장해지고 싶을 때가 있어

생이 비장해 보이지 않는다면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온몸이 데는 생의 열망으로 타오르겠어

그러나 내가 비장해지는 그 순간

두 개의 닳고 닳은 오토바이 바퀴는 길에게

파도를 만들어주지

길의 뼈들은 일제히 솟구쳐오르지

길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

파도를 타고 삐딱한 내 생을 관통하지

 

온 몸이 데는 생의 열망으로 타올라 비장해진 내게 길의 뼈들이 솟구쳐 오른다. 길이 사라진 곳에서 삐딱한 내 생이 관통당한다.

아니, 무슨 영웅이 이래? 영웅이면 날 구원해줘야할 거 아냐? 왜 혼자 고꾸라져?

그러나, 캠벨은 말한다. 영웅은 원래 자신의 몸을 던져 희생하는 자라고.

 

'수많은 문화권에는, 동정녀가 영웅을 낳고, 영웅은 죽음을 당했다가 부활하는 전설이 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뭘 말하고 있는 겁니까?

구세주 성격을 지닌 주인공의 죽음과 부활은 이런 전설의 공통적인 모티프로 등장하지요. 가령 옥수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만 해도 그래요. 소년의 꿈속에 나타나는 잘생긴 젊은이는, 죽어서 소년이 속한 민족에게 옥수수를 주지요? 옥수수는 그의 주검에서 자라나니까요.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 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신화의 힘 p201

 

캠벨에 따르면 영웅은 또한 자신의 희생으로 '진리를 인식하게 하는 자'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런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 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신화의 힘 p211

 

불어터지지 않은 흰 면발을 안팎이 똑같은 은색 철가방에 넣고 중력을 이탈해 배달하는 나는 '먹고 먹히는 것이 삶의 본질'라고 캠벨아저씨가 말하는 이 세상에서 '겉과 속이 다른' 우리의 자만과 욕망과 공포와 싸워나가는 우리의 영웅이다. 어쨌든 시인은 그렇게 봤다. 철가방 오토바이맨이 왼쪽으로 기울어진 세상을 질주하는 모습이 아슬아슬, 위태 위태해 보인다. 때로 이들 오토바이맨들은 솟구치는 길과 부딛혀 자신의 삶을 내던지기도 한다.

 

자신으로 살지 않는 기울어진 내 세상을 인식하게 하는 자, 겉과 속이 다른 그 세상을 파도쳐 전복하게 하는 자, 그는 영웅임에 틀림이 없다.

프로필 이미지
46일차
2010.10.21 06:23:32 *.41.16.144
정끝별 '와락' 창작과 비평 2008.

이름만 봐도 막내 같은 시인.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 시에서 그리는 시간과 사람과, 사건과 사물의 폭도 넓다. 반복이 많고 대치되거나, 비슷한 것들이 나열되는 시구들을 즐겨 사용한다. 시의 대상을 보는 시선은 신선하나 내 마음에 쏙 들어오는 시구는 많지 않았다. 각각의 시는 80억 갈래로 갈라져 달려나가는 온갖 색과, 음과, 향의 다만 한자락 일뿐이니 다 괜찮다. 

마음에 와 닿은 아래 시를 보면 나는 의미 지향의 시를 좋아하는 게 확실하다. 

막고 품다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때
코가 석자나 빠져 있을 때
일갈했던 엄마의 입말, 막고 품어라!
서정춘 시인의 마부 아버지 그러니까
미당이 알아봤다는 진짜배기 시인의 말을 듣는
오늘에서야 그 말을 풀어내네
낚시질 못하는 놈, 둠벙 막고 푸라네
빠져나갈 길 막고 갇힌 물 다 푸라네
길이 막히면 길에 주저앉아 길을 파라네
열 마지기 논둑 밖 넘어
만주로 일본으로 이북으로 튀고 싶으셨던 아버지도
니들만 아니었으면, 을 입에 다신 채
밤보따리를 싸고 또 싸셨던 엄마도
막고 품어 일가를 이루셨다
얼마나 주저앉아 막고 품으셨을까
물 없는 바닥에서 잡게 될
길 막힌 외길에서 품게 될
그 고기가 설령
미꾸라지 몇마리라 할지라도
그 물이 바다로 할지라도

있는 자리에서 주저 앉아 막고 품어야 할 요즘이다. 
프로필 이미지
조영미
2010.10.24 07:18:16 *.41.16.144
그렇군요^^. 전 승호님이 쓰신 것인줄 알고 아니, 이런 시인이 숨어있었다니 했답니다. ㅎㅎ 
프로필 이미지
이승호
2010.10.23 05:59:37 *.117.112.33
시를 쓰시는 분들을 보변 개인적으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사물에서 저렇게 날줄과 씨줄의 정수를 잘 뽑아내실까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죠.

인용한 시는 김춘수님의 시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조영미
2010.10.22 07:43:19 *.154.29.110
혹시 직접 쓰신 시인가요? @@ 그렇다면 정말 승호님은 훌륭한 시인이시네요.
좋은 시 감사드리고 따스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휴가라 느긋하게 하루 열고 있습니다. 지난 한주 바쁘게 달려온 후에 휴일이라 아주 좋네요^^
프로필 이미지
이승호
2010.10.22 05:13:11 *.117.112.33
석양

에게해의 수평선을 금실로 꼰 금줄이다.
그 금줄 위에서 하루를 태우다
지친 해가
바다에 누워 쉬면
하늘은 금방 까만 바다가 된다

이제, 로도스섬도 지워지고
포세이돈도 지워지고
나도 지워져 가고 있다

오종일 바다는 거품 한 점 없이
갓 난 비너스는 보이질 않았다

시뇨레 시뇨레

새벽 일어나  댓글로 달아주신 따뜻한 글을 보았습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것,
누군가에게 작은 배려를 해준다는것
사람에게 세상에게 작은 나눔의 불씨를 폴폴 날리는 조영미님의 모습이 연상되네요.
고맙습니다.

올해 8월 그리스에서 에게해를 보았습니다.
그 에개해의 느낌을 여운을 저도 전해 드립니다. 
프로필 이미지
47일차
2010.10.22 08:16:47 *.154.29.110
정지용 '중학생이 보는 향수'.

도서관에서 빌린 이 시집을 보더니 중학교 1학년인 딸이 말한다.
'엄마, 이거 나 보라고 빌렸어? 나는 중학생이 보는, 고등학생이 읽어야할... 뭐 이런 책들은 읽기 싫어. 교과서랑 참고서 같잖아.'

'중학생 독후감 필독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긴 하지만 그 안에 실린 정지용의 시가 중학생용으로 각색된 건 아닐테기에 그냥 웃었다.

어젯밤 잠도 푹 잤건만 오늘은 시들이 왜 이리 자장가처럼 보이는지..
왜 일까 생각해보니 감정이 절제된 회화풍의 시들이 시와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인 듯 했다.
초기시들도 그러했지만 후기로 갈 수록 더욱 절제되고 이에 따라 시어들도 극도로 상징적이고 축약적이 되어갔다.  이미 지용이 시를 쓴지 60~70년이 흐른 지금, 일부 단어들이 낯설기에 시적 공감과 이해의 정도는 더욱 낮아진지도 모른다.

애창되는 향수  '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 이야기 지줄되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를 읽을 때엔 노래가 절로 나왔다. 

지용 시의 시적 화자들이 시인 본인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오빠를 떠나 보낸 어린 소녀, 내 맘에 맞는 이를 그리는 어여쁜 새악시, 산 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를 되뇌이는 소녀의 마음,

시를 읽을 때는 졸면서 읽었는데 이렇게 다시 뒤적 뒤적 시집을 보니 말이 참 아름답고 시 한편이 하나의 소품 정물화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읽을 때 틀리고, 두번, 세번 읽을 때 틀려지는 느낌이다.

발열

처마끝에 서린 연기 따라
포도순이 기어 나가는 밤, 소리없이,
가물음 땅에 스며든 더운 김이
등에 서리나니, 훈훈히,
아아, 이 애 몸이 또 달어오르노나.
가쁜 숨결을 드내시노니, 박나비처럼,
가녀린 머리, 주사 찍은 자리에, 입술을 붙이고
나는 중얼거리다, 나는 중얼거리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신교도와도 같이.
아아, 이 애가 애자지게 보채노나!
불도 약도 달도 없는 밤,
아득 하늘에는
별들이 참벌 날으 듯하여라.

유리창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득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거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중학생을 위한 독서 해설에서 일러준 바에 의하면 지용이 아들을 잃고 쓴 시라고 한다.
다시 읽어보자. 이 절제에 가슴을 찢는 무엇인가가 있다.

프로필 이미지
48일차
2010.10.23 08:39:36 *.41.16.144
미국시인 게리 스나이더의 시선집 '이 현재의 순간'. 서 강목 옮김.

벌목꾼, 산불감시원, 선원 등의 잡역에 종사하고 인류학 및 동양어 문학 전공, 일본에서 12년간 선수행. 네바다 산속에서 운둔과 명상의 생활을 했다는 시인.

오늘도 번역의 한계를 실감했다. 오래전부터 읽어야지 하고 벼렸던 시집임에도 번번히 서너장을 넘어가지 못했는데 오늘도 역시 시는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잠만 쏟아졌다. 어쨋든 마지막 장을 넘기며 정서와 경험의 문제인지, 언어적 한계의 문제인지 생각해본다. 

마지막에 실린 시이다.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고.

이 현재의 순간

이 현재의 순간
오래 살아,
먼 옛날 
된다

원문은

This Present Moment

This present moment
That lives on,
To become
Long ago

T로 시작하는 운율이 사라지고 마지막에 극적으로 등장하는 long ago의 느낌이 번역에서는 평이한 단언이 되어버려 시적인 긴장이 상당부분 없어졌다.

To become을 어떻게 배치하여 번역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이 현재의 순간
살아 남아,
오랜 후엔
먼 옛날

너무 의역인가?

프로필 이미지
49일차
2010.10.24 07:04:14 *.41.16.144
고은 시인의 '허공'. 2008년, 창작과 비평 292.
이때 시인의 연세가 75세, 그리고 등단한지 50년.

고은 시인이 올해도 유력한 후보 운운되다가 노벨문학상을 놓쳤을 때 인터넷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주한 스웨덴대사가 고은 시에 대해 '서양인은 절대 쓸 수 없는 시'라고 평한 것을 읽었다. 만인보라는 연작 시집 이외에 어떤 대표시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고은 시인을 한번 읽어봐야지 했었다.

승려에서 시인으로, 시인에서 민주투사로, 어느덧 매년 빠짐없이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시인으로 거듭나신 분.

시집 초반의 몇몇 시들이 마음을 울려 왔다. 아, 다행이다. '나' 혹은 '주어'로 표현되는 주관성에 진저리치는 시인, 주어없이 술어로 시쓰려는 시인, 눈과 가슴에 천년의 세월을 담으려는 시인. 

50년 동안 워낙에 많은 변화를 거듭하며 방대한 시세계를 펼쳐온 분인만큼 이 시집에 나와 있는 시들은 장님이 코끼리 발가락 만지는 격이 될 수도 있겠다. 고은 시인은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등단하고 그분을 시의 정부((政府)라고까지 하다가, 80년대 전두환에게 찬양시를 바치는 미당을 보고 이후 미당의 사후, 미당의 삶과 시를 정면으로 공격하였다고 한다. 

문단의 봉우리로 명예의 끝자락에 서있는 어른이 읊은 허공. 하기사 시인에게 남는 것은 시 뿐인데 노벨상이니, 문단의 봉우리니 이런 칭송이 다 무슨 소용이람. 그걸 누구보다 절절이 알기에 '주어'없는 '나'없은 시에 그토록 목말라 하시는 것이겠지.

허공

누구 때려죽이고 싶거든 때려죽여 살점 뜯어먹고 싶거든
그 징그러운 미움 다하여
한자락 구름이다가
자취없어진
거기
허공 하나 둘
보게
어느날 죽은 아기로 호젓하거든
또 어느날 
남의 잔치에서 돌아오는 길
괜히 서럽거든
보게
뒤란에 가 소리 죽여 울던 어린 시절의 누나
내내 그립거든
보게
저 지긋지긋한 시대의 거리 지나왔거든
보게
찬물 한모금 마시고 나서
보게
그대 오늘 막장떨이 장사 엔간히 손해보았거든
보게
백년 미만 도(道) 따위 통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게

거기 그 허공만한 데 어디 있을까보냐


프로필 이미지
50일차
2010.10.25 06:23:32 *.41.16.144
강은교 '어느 별에서의 하루' 창비시선 154. 1996년 발간.
시인이 53세 무렵 발간된 열번째 시집. '풀잎'이 간행될 무렵 뇌수술을 받고 죽음을 극복한 시인은 이후 많은 시집을 내고 동아대 국문과 교수가 되어 있었다. 

어젯밤에 본 개그콘서트가 과도하게 재미있었다. 그만 봐야지 하면서도 기어이 끝까지 보고 잤다.
그래서인가? 아님, 강은교 시인과 맞지 않았던 인연대로 다시 한번 어긋났을 뿐인가?
일전 시집 '풀잎'을 읽고 단절을 느꼈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집은 도대체 몰입이 안되었다. 읽다보면 잠을 바짝 깨우는 시들이 있는데 강은교의 이 시집은
내 정신을 깨워주지 못했다. 시를 읽는 자의 책임 절반, 시를 쓴 자의 책임 절반일까? 내가 그냥 강은교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뿐인 것일까?

이 만교의 '글쓰기 공작소'를 읽으며 내가 시를 읽는 방식을 조금 반성했었다. 시 하나가 만들어낸 풍경에 잠겨 감상하려 하는 여유가 부족하고 그저 내게 공명을 주는 귀절에만 매달린다. 내가 처한 환경에서 만나는 가장 진실한 구절들일 뿐이야라고 변명도 해본다. 

50일차를 맞으며 내게 맞는 30, 40대의 긴장감으로 쓴 시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시인에 따라 시인의 타이틀을 획득하고 난 후 첫 시집의 절절함, 독특함,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하고 시집 발간이 거듭될 수록 시선이 한껏 풀어진 시들도 많다 . 

어쨌든 오늘 강은교 시인과 나는 공명하지 못했다. 

천개의 혀를 위하여

눈부신 아침
FM 가정음악실의 여자 아나운서가 속삭였다.

그는 평생 동안 5296개의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동안 9777m의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동안 5010개의 밥그릇을 비웠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동안 322개의 단추를 달았으며
그는 평생 동안 10010번의 세수를 하였으며
그는 평생 동안 2090번의 전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동안 2411kg의 쇠고기를 씹었으며
그는 평생 동안 8515mg의 아황산가스와
그는 평생 동안 15632mg의 먼지와
그는 평생 동안 1210mg의 산소와....
그런데
그는 평생 동안
7791번 골목을 잘못 들어갔으며
그는 평생 동안 4521번 낭떠러지에 섰었으며
그는 평생 동안 39333번 넘어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발디가 흘러나왔다. 비발디의 천개의 혀를 위하여.

 
프로필 이미지
조영미
2010.10.26 05:03:03 *.41.16.144
전력으로 '의식'과 '무의식'이 함께 꿈꾸면 꿈은 이미 이루어진것이라네요.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
각기 홀로 마라톤 경기하는 것과 같은 새벽길에 은하님의 꿈을 향한 전력질주에도 박수를 보냅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0.10.25 20:36:46 *.151.166.64
50일차까지 가장 꾸준한 모습으로,  또 가장 일관된 모습으로 
 '시'를 향한 열정을 단군일지를 통해 보여주고 계신 영미님께 진심으로 존경과 박수를 보냅니다.^^
정말 멋지십니다.
멋진 영미님과 함께 한 50일동안 감사했고, 또 함께 할 50일에 미리 감사드립니다.^^
화이팅!!
프로필 이미지
51일차
2010.10.26 06:36:24 *.41.16.144
김 춘수 '쉰 한편의 비가' 2002년. 
2004년 83세로 타계하신 시인의 마지막 시집이다.

석양에 비친 에게해의 수평선을 금실로 꼰 금줄로 표현한 시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내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고 하는 의미의 시인.

처음에는 시 한편에 불명확한 수많은 이미지들이 불쑥, 불쑥 드러나 현대 추상화를 보는 듯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파악이 쉽지 않았다. 점점 읽다보니 시인이 부인과 사별하였다는 것, 그래서 '비가'의 형식을 빌러 노년의 비애를 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인의 일상이 그런 식으로 드러나고 의미가 읽히는 것에 대해 시인이 몹시 기분 상해 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집의 뒷 편에 실린 시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시에 비의(秘意)적 신비를 담고 싶어 했고, 그의 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내 머리 속의 어줍잖은 생각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해졌고 이념이 어떤 절박한 현실을 감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나이 스물에 겪은 고문의 체험에서 비롯된 비극의 발견에 기초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시는 신선놀음이요, 무상의 행위인 놀이'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이런 시인의 말들을 읽으니 그가 시를 썼던 방식이 이해가 된다. 극단적인 언어 유희, 시를 하나의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리는 비의(秘意)적 시작법.

그런 그의 '실질적 정직'이 고스란히 드러나 버린 시가 있었다. 실은 비가 몇 편에서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을 드러내 놓았다. 비의도 없고 언어유희도 없었다.

제 25번 비가(悲歌)

꿈에 갈매빛 하늘을 보고
꿈에 샛노란 제비붓꽃을 본다. 나는
얼굴이 환해진다.
나에게는 길몽(吉夢)이다.
그것은 내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내 혼자만의 생각은 나에게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끼고 싶다.
설흔 여덟 평이나 되는 아파트 거실 이인용(二人用) 소파에 
나는 혼자 앉아 있다. 멍하니
한나절을 그렇게 보낸다.
아주 드물게 소리도 없이 누가 몰래 곁에 와서 앉아 준다.
누가 초인종만 누르고 그냥 가버리기도 한다.
나는 혼자서 생각한다. 그들이 누구일까.
생각하다 생각하다 하루해가 저문다.
어쩌나,
나는 개도 아니고 하느님도 아니다.
나는 이승의 하루를
내 혼자만의 생각을 품에 안고
다만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때로는 왜 나를 슬프게 할까.

릴케의 두이노 비가를 빗대어 오십 한편의 비가를 써가던 시인. 
아무리 의미를 부여해도 이렇게 비집고 나오는 노년의 고독과 슬픔, 적막함은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의를 걷어내고 이렇게 적나라한 얼굴을 드러낸 시인을 보니, 얼마전 타계한 앙드레 김이 생각난다.
'왜 화장하세요?'하고 묻는 어린이에게 '얼굴에 결점이 많아 있는 그대로 드러나면 추해서 보여줄 수 없다'고 대답한 그분. 우스꽝스럽게만 보이던 말투와 피에로 화장의 꿈꾸는 눈으로 꽃사슴, 천사가 뛰어 노는 백색의 때묻지 않은 설원을 꿈꾸던 그 분.

오늘 시집을 읽고 나니,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했던 대표적 두분으로 앙드레 김과 김춘수 시인이 겹쳐진다. 내 머리 속 생각과 이념이 절박한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는 지독한 자기 모멸이 일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실과 분리시켜 시를 '순수'에 머물도록 했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이런 도피안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시인의 길을 동경하는 이들이 많다. 
김 춘수 시인이 드러낸 '실질적 정직'의 또다른 시. 영화 시에 나온 중풍 노인이 연상된다.

제 28번 비가(悲歌)

내 살이 네 살에 닿고 싶어 한다.
나는 시방 그런 수렁에 빠져 있다.
수렁은 밑도 없고 끝도 없다.
가도 가도 나는 네가 그립기만 하다.
나는 네가 얼마만큼 그리운가.
이를테면 내 살이 네 살을 비집고 들어가
네 살을 비비고 문지르고 후벼파고 싶은
꼭 한 번 그러고 싶을
그만큼.

김수영의 시를 읽고서도 진저리쳤던 그 적나라한 욕망과 맨얼굴의 추악한 얼굴이 드러나는 시와 순수를 표방해 자신을 감추며 은유와 비밀로 표현한 추상화적 시세계. 독자들은 시에서 무엇을 읽고 싶어하나?

프로필 이미지
52일차
2010.10.27 06:25:27 *.41.16.144
김초혜 시집. 사랑굿.

며칠전 인터넷에서 조정래 작가가 '태어나 제일 잘 한 것은 내 아내와 결혼한 것이다'라고 인터뷰한 내용을 읽었다. 물론 태어나 제일 잘 한 것은 작가가 되어 태백산맥과 같은 대작을 남긴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매력이 덜 했을 것이다.

조정래 작가의 부인은 시인 김초혜이다. 67년에 스물 다섯살의 동갑내기 동국대 국문과 캠퍼스 커플이 결혼했다. 김초혜 시인이 64년 먼저 등단하였고 조정래 작가는 70년에 등단하였다. 이후 김초혜 시인이 84년 '사랑굿' 연작을 발간하며 백만부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조 정래 작가는 83년경 태백산맥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연보를 쓰고 보니 아내의 성공으로 조정래 작가가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 같다. 

85년, 태백산맥을 집필하기 위해 15일간 산에서 칩거하며 김초혜 시인에게 보낸 편지 속엔 '세월이 쌓일 수록 당신을 아내로 얻었음을 하늘에 감사하게 되오', '김초혜는 나에게 날로 새롭게 피어나는 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남편에게 이런 글을 받는 부인들이 얼마나 될까? 

태백산맥 집필 이후 십수년간 계속 된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 재판, 극우단체의 살해위협, 정부의 탄압 등을 함께 견뎌낸 이후의 세월이 김초혜 시인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더욱 깊게 했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조정래 시인의 극진한 부인 사랑을 여러번 확인할 수 있었다. 

스물 한살 대학 3학년 때 만나 이제 이십년을 함께 살아온 내 동갑내기 남편은 나에 대한 불만이 많다. 불쑥 불쑥 부족한 사랑과 배려에 대한 섭섭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김초혜 시인의 '사랑굿'을 읽었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였기에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되돌려 받는 것일까 하고. 사랑굿 연작은 특이하다.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으로만 시를 썼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이라는 주제 하나에 매달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집요함으로 183편의 사랑굿 시들이 쓰여졌다. 십수년 태백산맥을 집필한 조정래 작가의 뚝심이나 사랑굿 하나만으로 183편의 시들을 완성한 김초혜 작가나 정말 우직한 작가 정신의 대표들인 듯 하다. 한쌍의 잉꼬부부이기도 하지만 작가와 시인으로 이렇게 서로의 작품세계에 든든한 토대로서 함께 해온 것이 보여진다. 

사랑굿 40

물이어라

이룬 것 없는 듯
이루는

너를 잠기게 할 수 있고
네 속에 들 수 있는

죽어도 딴 마음
가질 줄 모르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머물게 하는

나를 잃지 않으면
너를 붙잡아둘 수 있는

물이어라

조정래 작가를 키운(^^) 김초혜 시인의 삶과 대비해서 읽으니 극진한 사랑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데, 김초혜 시인은 뭐라 할까? '태어나 제일 잘 한 것은 남편과 결혼한 것이다'라고 말해줄까? 다시 태어나면 지금 배우자와 다시 결혼하고 싶다고 답하는 것은 아내 보다 남편이 많다는 것이 통설이다. 아마 위에 실린 '물'의 사랑 자세를 여자들이 갖추고 남자를 품어주기를 바라는 사회적 요구가 은연중 여자의 봉사, 희생정신을 많이 강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필 이미지
53일차
2010.10.28 06:38:44 *.41.16.144
황인숙 '자명한 산책' 문학과 지성. 2003년 발간. 시인의 나이 45세.
시가 쓰여진 시점과 시상이 분명히 드러나는 시들이었다.

스쳐지나가는 감각의 한 모서리를 낚아채어 쓰는 시들이었다. 그런 방식은 탐미로 흐르기 쉽다.
일전 일러주신 한명석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스치는 일상에서 포착한 '근경' 뒤에 길고 질긴 인생사, 혹은 인생을 곱씹어본 '후경'이 깔렸을 때 좋은 글이 나온다고 한다. 소설기법이라고 하지만 시도 마찬가지이다.

스치는 일상에서 시인의 감각을 좇아 쓴 발랄하고 감각적인 시들은 일견 근경의 묘사와 감각적 표현에 집중하느라 후경을 놓쳐버리기도 한다. 실은 더 풀어낼 후경 자체가 부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황인숙 시인을 읽으며 감각적으로 잡아낸 시상에 반짝 마음이 끌리다가 반딧물처럼 희미하게 사그러들어버리는 걸 느꼈다. 마음을 감각적으로 콕 건드리는 싯귀는 있는데, 깊숙이 한발 더 무찔러 들어오는 싯귀가 없다고나 할까. 

내가 이렇게 비판적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내 습작도 그 이상을 못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 때문이다. 누군가는 글쓰기를 통해 자유를 꿈꾸고, 누군가는 자신이 선택한 낯선 삶의 방식에 대한 확인을, 누군가는 실질적 명예를, 그리고 누군가는 삶의 여유를, 누군가는 인정과 사랑을 바란다. 사람마다 글쓰기가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다 주기를 꿈꾼다. 은밀한 내적 욕망에 따라 무엇을 쓸지, 어떻게 쓸지, 어디만치 쓰고 나아갈지가 결정된다. 그 내적 욕망의 수레 바퀴가 문뜩 멈추어버리면 우리의 낡은 글수레가 멈추어버린다. 왜 써야하는지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글쓰기에 대한 나의 내적 욕망은 사실 여러 갈래의 뿌리로 이루어져 있고 단지 한가지라고 말할 수가 없다. 글은 문장력이나 감각만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정신과 세상을 보는 시선, 문제의식이 쓰는 것이다라는 말을 지인이 하셨다. 그 말에 동의한다. 삶이 여러 갈래의 변주곡이듯 글 또한 여러 개의 중첩된 욕망과 중첩된 의식의 층이 함께 쓰는 것이어서 무어라 한가지 동기만을 집어낼 수 가 없다.

황인숙 시인의 시 보다는 왜 글을 쓰고 싶은가에 대한 내 얘기에 치중했다. 고종석 시인이 해설에서 이 시집에 대해 꼽은 일곱개의 키워드가 있다.  나이듬, 추억, 탐미, 연민, 권태, 유희, 리듬이다.

내가 선택한 아래의 두 시는 '탐미'의 키워드 아래 읽혀진다. 

거미의 달

거미의 달이 기어간다
숨소리를 죽이고
조금도 망을 출렁이게 하지 않고
조금 바랜 빛깔의 실을 뽑으면서
살금살금 기어간다
누구도 몰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휘감겨 붙게 꼼꼼히
망을 손보면서

저 잿빛 얼룩진
거미의 달의 궁둥이
진득거리고 메마른
수은의 실을 뿜는 궁둥이

지붕들이 침식된다
누가 그리도 깊이 자니?
섬뜩하지도 않느냐?

달이 바랜 수은의 실을 뿜는 거미의 궁둥이라는 비유가 재미 있다. 

악착같이

문득 내가
악착같이 김치를 씹어먹고 있는 걸
깨달을 때가 있다
식은 떡과 시든 계획과

'그는 우아했고
허구의 세계에 어울렸지'*
나도 그랬더랬지
그런 줄 알았더랬지.

*영화 '벨벳 골드마인'에서

악착같이 밥먹는 내 모습에 소스라쳐 본 적이 있기에 이 시에 공감한다.
프로필 이미지
54일차
2010.10.29 06:39:17 *.41.16.144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1903년 전남 강진읍 출생, 1950년 9월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복부에 포탄 파편을 맞고 47세로 운명.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의 어딘 듯 이라고 제목이 붙은 시이다. 영랑의 시는 이렇게 운율과 가락이 넘친다.
읽다 보니 저절로 소리내어 읽고 싶었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언덕에 바로 누워, 오-매 단풍 들것네 같은 맑고 가볍게 읽히는 잘 알려진 시 이외에 여러 시들을 읽어 나가니 영랑의 시풍이 가볍고 밝지만은 않았다.

쓸쓸한 산길의 무덤, 이슬에 젖으며 밤을 새는 마음, 한숨과 눈물 고이는 마음 등 애잔한 정서가 많이 그려졌다. 잘 정제된 수묵화의 정갈한 밤 풍경을 보는 듯한 '제야'라는 시가 좋았다.

제야 (際夜)

제운밤 촛불이 찌르르 녹아버린다
못 견디게 무거운 어느 별이 떨어지는가

어둑한 골목 골목에 수심은 떳다 갈앉았다
제운밤 이 한밤이 모질기도 하온가

희부연 종이등불 수줍은 걸음걸이
샘물 정히 떠붓는 안쓰러운 마음결

한 해라 그리운 정을 몯고 쌓아 흰 그릇에
그대는 이 밤이라 맑으라 비사이다
 
시집의 후반부로 가면 대부분의 시인들이 남기진 못한 한국전쟁 직전의 혼란한 사회상이 그려진 시들이 몇 편 있다. 오월 한恨, 새벽의 처형장, 절망 같은 시들은 당시 사회상을 어느 소설보다 적나라하게 축약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동족상잔 전쟁의 비극을 시인은 피흘리는 마음으로 적고 있었다. 시인이 올곧은 시인 정신으로 살다 갔음을 보여주는 시들이다.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절망스런 상황을 그렸다.

영랑이 아름답고 투명한 시들 이외에 이런 시들을 남겼다는 것에 놀랐다. 시인도 가엽고 당시 서럽게 쓰려져간, 그리고 살아남아 50년대, 60년대 힘겨운 세월을 살아온 우리의 조부모님, 부모님 세대들의 삶도 가엽다. 

중년을 맞는 영랑의 심사가 드러나는 시 한편으로 마무리한다. 

어느 날 어느 때고

어느 날 어느 때고
잘가기 위하여
평안히 가기 위하여

몸이 비록
아프고 지칠지라도
마음 평안히
가기 위하여

이만정성
모두어 보리.

멋없이 봄은 살같이 떠나고
중년은 하 외로워도
이 허무에선 떠나야 될 것을

살이 삭삭
여미고 썰릴지라도
마음 평안히
가기 위하여
아! 이것
평생을 닦는 좁은 길


 
프로필 이미지
55일차
2010.10.30 06:25:09 *.41.16.144
원 재훈 '그리운 102', 문학과 지성사. 1996년. 시인의 나이 35세 무렵.

102란 무엇이고 왜 그립다는 것일까? 시를 읽어봐도 속시원히 모르겠다. 그리운 102는 시인이 사랑한 여인일 수도 있고, 시인이 추구하는 경지일수도 있고, 선덕여왕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버린 지귀 처럼 그리움 자체로 소멸해버릴 수 있는 지극한 그리움일 수도 있겠다. 분명하지 않게 드러나는 시상들과 중첩되어 있는 듯한 시의 주제가 '내 시를 읽는 당신이 날 이해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라고 얘기하는 듯 했다. 

시집을 덮고 원재훈 시인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2009년에 쓴 작가의 칼럼이 하나 뜬다. 연립4층에 아버지를 엎고 올라간 심정을 얘기하며 이제 더이상 시를 못쓰겠다고 하다가 중3인 딸을 엎고 가니 훨씬 무거우면서 가볍더라. 그리고 많이 팔리는 시집은 시인으로서는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정현종 선생에 따르면 예술가가 유명해진다는 건 일종의 장애이다, 과일 속의 벌레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꾸준히 팔리는 좋은 시집은 이유가 있다. 여러 쇄가 오랜 세월을 두고 팔린 시집을 보면 아무래도 감성이 남다르고, 표현이 남다르고, 또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다. 

시인으로서 '내 시집이 팔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내 시에 울림이 부족하지 않는지, 시 하나에 마음을 깨우는 정신이 실려 있는지, 내 삶의 가락을 얼마나 명료하게 읊었는지, 시 속에 드러난 이미지가 선명했는지 물어봤으면 좋겠다. 시인이 시인으로 평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은 평생 시인정신을 간직하고 산다는 것일게다. 시집이 팔리고 안 팔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인이 시인정신을 간직한 삶을 살면서 그 정신으로 시를 적어갔으면 좋겠다.  

생활이 시가 되고, 예술이 되는 시점을 보여주는 시들이 있다.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그런 시가 아닐까. 남루한 생활 속에서도 빛나는 마음을 품게하는 시가 좋다.

아래 시는 시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내 안의 그대가 작아지고, 내가 물방울로 작아지는 시상의 전개에 아쉬움이 든다.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 그리운 102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들
저것 좀 봐, 꼭 시간이 떨어지는 것 같아
기다린다 저 빗방울이 흐르고 흘러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저 우주의 끝까지 흘러가
다시 은행나무 아래의 빗방울로 돌아올 때까지
그 풍경에 나도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될 때까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리다보면
내 삶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대
그대 안의 더 작은 그대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내 어깨에 기대는 따뜻한 습기
내 가슴을 적시는 그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자꾸자꾸 작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따라
나도 작아져 저 나뭇가지의 끝 매달린 한 장의 나뭇잎이 된다
거기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넌 누굴 기다리니 넌 누굴 기다리니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이건 빗방울들의 소리인 줄도 몰라하면서
빗방울보다 아니 그 속의 더 작은 물방울보다 작아지는
내가, 내 삶에 그대가 오는 이렇게 아름다운 한 순간을
기다려온 것인 줄 몰라한다

프로필 이미지
56일차
2010.10.31 22:37:11 *.154.29.110

사평역 시인 곽재구 '받들어꽃' 1991년 발간 미래사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사평역 시인 곽재구는 내 스무살 무렵 '시는 이렇게 쓰는거야'를 보여준 시인이었다. 가슴 울리는 서정이 있었고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민족과 역사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내 마음속 풍경과 주변 일상에만 맴도는 습작의 한계를 느끼며 시의 폭을 깊고 넓게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민족과 역사와 민중의 삶을 애정어린 눈으로 그리는 시인의 관심과 사랑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54년 전남 광주 출신에 전남대 국문과를 나왔다. 80년대 광주가 시인에게 그런 각성을 주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울린 시는 시인의 뛰어난 서정시들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시를 읽는 요즘, 내 가슴을 특별히 뜨겁게 만드는 시이다.

새벽 편지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프로필 이미지
57일차
2010.11.01 06:48:22 *.41.16.144
심호택 '하늘밥 도둑' 창작과 비평. 1992년. 시인의 나이 46세.

심호택 시인의 첫 시집이다. 46세에 첫 시집이 나왔고 정식 등단도 창비를 통해 91년에 이루어졌다고 하니 45세에 늦깍이 시인으로 등단한 것이다. 마흔 넘어 등단한 시인은 처음이다.

원광대 불문과 교수였는데 '하늘밥 도둑'에는 전북 옥구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아, 이런 식으로도 시를 쓸 수 있구나 싶었다. 산문 대신 시를 통해 어린 시절의 추억 한 토막 한 토막 씩을 풀어내고 시 하나 하나에 어린 시절의 사람들과 사연들이 스쳐간다. 그런데, 시 하나 하나가 상당한 언어적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잠이 와서 꾸벅이면서도 시집을 덮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 세대의 어린 시절과 그 시절 정서를 원숙하게 시 하나 하나로 풀어낸 시인. 불문과 교수인 이분이 순전히 토속적인 정서로 풀어낸 이 시집 이후에 시인으로서 무엇을 적었을지 궁금하다.

낯선 아이

뜨거운 대낮입니다
식구들 일하는 논둑에서
물방개나 벗삼아 놀다가
점심 먹으러 들어가는 길입니다

걸어가기 싫어서
업어달라고 조르니
식구들은 못 들은 척
가던 길 그대로 가버립니다

주저앉아 버티다
맨땅에 동그라져보아도 헛일
깔따구 같은 조무래기들만
모여들어 염생이 소리로 놀려댑니다

울다 그쳤다 침 한번
삼키고 다시 울어보자니
이상합니다 내가 나에게
왠 낯선 아이로 생각됩니다
프로필 이미지
58일차
2010.11.02 06:11:06 *.41.16.144
성원근 유고시집, '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 1996년 창비시선 146.

일반적이고 익숙한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아 아이의 눈에 띈 세상처럼 신선한 시상들이 많았다. 얼마전 글쓰기 모임에서 '실질적 정직', '타자적 욕망' 등 글쓰기 공작소에 나온 말들에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쓰고자 타자적 욕망으로 글을 쓰는 자들이 자기 마음 속의 실질적 정직을 포기 혹은 회피할 때 나오는 글이 얼마나 재미없고 김빠진 것이 되어버리는가에 대한 얘기였다. 그래서 일정 나이가 되면 (삶이 두꺼워지면) 세상 기준에 맞추느라 시쓰기가 힘들어진다고 하는 가보다.

적어도 시인은 세상이 원하는 바에 맞추어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9년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5년만에 대학원을 졸업한 후 강의를 준비하던 시인이 암진단을 받고 2년만에 35세로 죽음을 맞았다. 유치원 다니는 아들 하나를 남긴 채.

뒤에 나온 글을 보니 연세대 영문과를 다니며 성석제와 기형도와 함께 문학공부를 한 듯한 그는 문제아로 많은 기행과 방황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시집 한 권, 아들 하나 남기고 남들보다 절반은 일찍 세상을 떠난 이가 바라보던 참 허무하고도 맑은 세상 몇 개. 

이슬

밤에 
눈물이 많았던 누군가
목선을 타고
바다로 간 것일까?
풀잎마다 가득
바람을 먹고 있는
돛자락들.
``````````````
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

마음껏 짓쳐 달리거라.
흰 갈기 백마 야생마 되어
넓푸른 풀밭을 달리거라.

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
더 넓게 풀어주리라. 가득.
붙잡아두지 않고
기다리리라.
이 가슴
너의 고향이 되도록
언제까지 넓어지리라.

가거라.
```````````````
머무르기

의문에서 떠나지 않고
의문 속에 머무르기.
어둠을 빛으로써 비춰보지 말며
어둠으로써 어둠속에 안식하는
빛나는 한순간의 어둠.
(어둠도 그때는 환히 빛난다)
바로 말하면
나를 불신한다는
물풀처럼 흔들리고 떠도는 뿌리를 잘라버리는 것.
````````````````````````
겨울을 빠져나올 때

올해의 새싹에는
우윳빛 즙이 괴었을까.
모두들
나무 아래로 돌아와
마른버짐을 떨친다.


프로필 이미지
59일차
2010.11.03 06:43:10 *.41.16.144
장정일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1988년 발간. 시인의 나이 27세 때 발간.

장정일은 틀에서 벗어난 시인이자 작가이다. 마광수처럼 음란물을 썼다는 죄목으로 강금실의 변론을 받은 필화사건을 겪은 그는 일반적 범주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작품을 선보였다. 어머니가 여호와의 증인이었기에 교련과목을 받지 않기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그는 이후 소년원 수감을 겪기도 했고 22살에 시로 등단하여 시, 희곡, 소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파격적인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그러던 그가 최근에는 대학교수로 임용되었다고 한다.

장정일의 시를 읽으니 '왕십리', '독하게 각을 세우다'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남들 안가는 길을 십리 더 갔고, 남과 다른 길을 갔기에 더 독하게 각을 세웠고, 자신의 내면에 지극히 충실했다. 시인이라기보다는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80년대 초, 사회가 온통 이념 대립으로 경직되어 있을 때 자신의 독한 내면을 파고 들어가, 가리려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시원하게 까발겨, 딱딱하게 굳어있던 사람들의 숨구멍을 틔여준 역할을 했다. 그 극단에서 필화사건을 겪었다. 

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내면의 진짜 욕망을 가리고 틀에 맞추려 급급했던 소시민적 눈에 장정일은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까발긴 용기있는 작가로 비쳐진다.

체포

그 일은 우연한 것이었다
우연한 체포 -----
그러나 우연만큼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이미 내가 잡혀 버렸다는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사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곁에는
이름도 또렷한 여인
뼈가 환히 비치는 말라깽이 여인이
마침표처럼 생생히 찍혀 있었어
아아 이 여자가 언젯적 여자인가.

냉수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고
살며시 이불깃 열고 일어나자
웬걸, 그녀는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어
먹여, 살려요. 먹여, 살리라니까.
먹여, 살리란 말이야!

내가 어디에 숨든
째각째각 시계소리를 내며
텍탁텍탁 목발을 짚으며
그녀는 추적해 왔다.
그리고 척추 끝에 달랑거리는
내 목덜미를 움켜잡고 소리치는 거야
이 놈팽아 같이 가, 같이 가자구!

체포는 간단했다.
그러기 전에 나는 깨달아야 했어
그러나 깨닫지 못했어
완전범죄를 맹신한 점
우연을 고려치 않은 점
그게 실수였어
(당신도 조심하라구
나를 체포한 아내는 생활이었어!)

독하게 내면을 드러낸 작가가 독한 것으로 자신을 인정받기 시작하다가 걸리게 되는 덫 또한 생활이구나. 
프로필 이미지
조성희
2010.11.03 16:23:31 *.143.199.187
영미님 지난번 모임때 못뵈어 서운했어요.
그런데 윤맹순님이 남자분인걸 어찌 아셨는지..정말 신기해요..
글을 많이 읽으셔서 그런가요?
글속에서 남자의 향기를??  내공이 대단하신듯~
다음모임엔 꼭 뵐수있기를 ^^
"체포" 잘읽고 갑니다.
프로필 이미지
조영미
2010.11.04 04:59:18 *.41.16.144
남자의 향기^^- 굳이 꼽자면 남자분도 사용가능한 이름에 자유분방한 기운, 할리가 결정적인 힌트였어요^^ . 그냥 반반의 확률인데 내공까지 거론하시니 쬐깨 부끄럽사와요~~ 네, 100일 모임땐 꼭 갈수 있었으면 해요.~ 
프로필 이미지
60일차
2010.11.04 06:51:35 *.41.16.144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 1982년 발간. 창비33.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러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이런 타는 목마름이 있어 민주주의도 오고 새벽 날도 밝은 것일까. 아니면 올 때가 되어 올 것이 오고, 갈 때가 되어 갈 것이 간것인지.

지금은 이런 타는 목마름으로 각자가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민주주의의 특징이야말로 다양성의 인정이니까.
타는 목마름 자체를 애닯게 부르는 이들도 있다. 무엇이 내 목을 타게 만들까 하고.

타는 목마름으로 내가 부르고 있는 건 무엇인지, 무언가 목타게 과연 부르고나 있는지, 새벽 빛이 환하게 밝아와 초승달이 빛을 잃고 있는 것이 가엽다. 
프로필 이미지
61일차
2010.11.05 06:22:57 *.41.16.144
김기택 '태아의 잠' 1991년. 시인이 35세 무렵.

6시가 한참 넘었는데 아직도 하늘은 어둡다. 잠은 쏟아지고 오늘은 정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쥐, 호랑이, 개, 도축장, 닭, 소, 모기 등 동물들을 모티브로 시를 쓴 것이 특이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때 사람들의 머리가 빼곡한 계단을 보며 떠올리곤 하던 느낌을 일으키는  시 한편 소개한다.

8시

7시는 8시를 위하여 언제나 불안하다. 7시가 되기 전까지 6시는 수백 번이나 아직은 7시가 아니라고 외친다. 7시는 6시 59분 59초까지 이불 속에 누워 편안한 척하는 나의 잠을 당당하게 짓밟으며 나타난다.

7시는 나를 거칠게 일으켜세워 예리한 분침과 초침으로 내 몸을 알맞게 등분한다. 먼저 익숙하게 엉덩이를 베어내어 변소에 던져버린다. 다음은 얼굴을 잘라 거울과 면도기와 함께 세숫대야에 처박아놓는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팔다리들은 허겁지겁 이불을 개고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는다.

8시가 오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나는 8시를 향해 달려간다. 어제 지나갔던 발자국을 정확하게 밟으면서, 표정 없는 사람들이 초침처럼 조급하게 지나가는 7시와 8시 사이를 지나.

아무런 생각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7시의 거리에 쏟아져나온다.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에는 8시의 입구가 너무도 좁다. 7시의 곳곳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8시의 좁은 입구로 몰려든다. 나도 그들과 함께 초침이 가리키는 눈금과 눈금 사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너무도 좁고 답답한 눈금에 가려서, 그 눈금 사이에 낀 사람들의 욕설과 아우성에 가려서 8시의 시계에는 언제나 9시가 보이지 않는다.





프로필 이미지
62일차
2010.11.07 05:04:21 *.41.16.144
회사 워크샵으로 강원도 횡성 둔내면에서 맞은 아침.
출석만 부탁드리곤 다시 잠들어버렸다. 시를 읽지 않고 시작한 아침, 뭔가 많이 허전했다.
불꺼진 아궁이 같은 오후/저기 가을이 거미에게 한 짓을 보라/지문없는 손가락으로 거미를 누르는 저...
프로필 이미지
63일차
2010.11.07 07:41:02 *.41.16.144
김 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2006년.
19년만에 나온 두번째 시집이라고 한다.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계시다.
시집을 읽으니 그만큼 아끼고 다듬어 시를 쓴 것이라 생각된다.
시인의 이름과 시집 이름 어감이 좋다. 시집을 펼치기전 설레는 기대가 좋은 시로 보상받은 듯해 기쁘다.
따라 쓰고 싶은 좋은 시들이 많았다.

이성선 시인의 시라고 하는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의 구절.. 그 시를 천천히 음미하게 하고 싶은 시인의 바램.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우리들 희망의 절망적인 상징' - 새끼 발가락과 마주치다 중에서

'나는 먼 곳에 마음을 벗어두고 온 사내' - 예래 바다에 묻다 중에서

'남겨진 글씨들이 고아처럼 쓸쓸하다/못 박힌 중지 마디로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놓고/어느 우주로 스스로를 흩었단 말인가/겨울밤/우물 깊이 떨어지는 두레박 소리' - 유필

'묻건대/이러고도 생은 과연 싸가지가 있는 것이냐!' - 치욕의 기억 중에서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철이른 낙엽하나/슬며시 곁에 내린다/그냥 있어볼 길 밖에 없는 내 곁에/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고맙다/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조용한 일

'먹어 치우기 위해 밥은 있고 쉬어 치우기 위해 숨은 있을 뿐' - 부시, 바쁜 중에서

'뒤축 무너진 헌 구두나 끌고/나는 또 쓸데없이/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늙어가겠지' - 때늦은 사랑 중에서

'그 앞에 고요히/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 나비 중에서

'비장의 이 허장성세' - 소리장도 중에서

'나는 눕네 아슬한 가지 끝에/늙은 까마귀 같이/무서운 날들이 오고 있네'- 빈 방 중에서

'이미 저질러진 일들이여/완성된 실수여' - 길이 아니다 중에서

'사람들 가슴에/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있다/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 깊이 묻다 중에서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우리는 숫기없이 꿈 덜깬 두 산짐승/손도 한번 못잡아 본 걸요' - 옛일 중에서

'살 닳는 안타까움' - 네거리 중 에서

'쫓겨온 저 사내와/아니라고 외치며 떠밀려온 내가/세상 끝 벼랑에서 마주보네' - 거울 중에서

'누구에게 말하나 비통에 대해/별은 빛나 적적한데 그대에게?'- 서귀 중에서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고/저물녘 봄날 골목을 빈손만 부비벼 돌아옵니다' - 춘곤 중에서

시 전체가 아닌 이렇게 한 귀퉁이 만을 적고 보니 몸의 어느 한 귀퉁이만 부각시킨 것처럼 느낌이 살아나지 않는구나. 시인이 50대 초반에 이를 때까지 적은 싯귀들을 보니 이런 정서의 시를 좋아할 정도로 내가 나이 든 것이 실감났다.

시인이 경쾌하게 읊은 경쾌하고 즐거운 정서의 시 두편도 마음에 쏙 들었다. '자전거를 끌고 여름 저녁 천변 길을 슬슬 걷는 것은 다소 상쾌한 일'로 시작되는 전주와, 우리 아버지와 친구분들이 어울려 떠들썩하게 놀며 화투를 치는 광경을 떠오르게 만드는 시 '친구들'

친구들
마굿간 시절

신용카드 한 장 변변찮은 헌털뱅이들이다
헌털뱅이 파카나 걸치고
이번엔 누구를 약올려줄까
눈에 개구가 반짝반짝 올라서들 온다
개구진 헌털뱅이들은 화투도 반은 입으로 친다
판에 오천원 내기 바둑이 하도나 꼬수워
낄낄낄 어쩔 줄을 모른다
구경하는 치들도 낄낄낄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쇠죽 쑤는 아랫목인 듯
그 낄낄낄 위로 뒹굴며 모두 같이 등을 지진다
푹 삶은 누룽지처럼 서로를 한 대접씩 마시고
속을 데우는 것이다

오늘도 수세미수염에 부스스한 머리들을 해가지고 나타날 것이다
담배냄새를 구수하게 풍기며 이 어둑한 구석으로
옛날 아버지들처럼 모여들 것이다
프로필 이미지
64일차
2010.11.08 05:42:38 *.41.16.144
권혁웅 '황금나무 아래서' 2001년

낯선 경험,새로운 충격 제 3의 시라는 표제를 단 문학세계사 시집.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을 나온 시인은 '시적 언어의 기하학'이라는 논문을 썼다. 과연 '시적 언어의 기하학' 스럽게 시는 암호로 가득차 있었다.

글에서 누설하는 것은 결국 글쓴이 자신이다. 문장과 단어는 이해하기 쉽고 간결해야 한다. 글쓴이의 생각이 명료해야 읽는 사람도 명료하다. - 어제 저녁 읽은 글쓰기 생각쓰기의 요지이다.

시에도 적용 가능한 것일까? 시에서 전달하려고 하는 시상과 정서의 통일은 있어야 하고 시인 자신에게 명료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시쓰기는 길을 잃고 만다.

2001년 무렵 34세의 젊은 독신 작가. 그와 나와의 거리가 지구와 안드로메다만큼 멀다.... ㅠㅠ
프로필 이미지
65일차
2010.11.09 06:51:26 *.41.16.144
이 재무 시인 '저녁 6시' 창비시선 282. 2007년 발간.

정신을 제대로 깨워주고 시구절들을 따라쓰게 만드는 시집이었다.
도종환 시인이 '이재무 시는 실팍하다. 속이 꽉 찬 뿌리식물처럼 단단하다..이재무 시에 내재된 야생의 정신이 나는 부럽다. 그는 고통없는 가축의 삶을 향해 길들여져가기를 거부한다'라고 시집 뒷편에 적어두었다. 도종환 시인이 이렇게 자기 이름을 걸고 추천해준 시인이니만큼 책임을 지시겠지 싶은 마음으로 읽었다.

이재무 시인은 마음 속에 청동 몸피를 가진 야생의 푸른 늑대를 버리지 못하는 개다.^^  본인이 시를 통해 그렇게 밝혔다. 자본과, 생활과, 생존에 매여있는 그 누군들 개 아니랴.  개가 아니라 늑대로 살고 싶은 시인이 묶인 몸으로 삶에 대해 치열한 복수를 하는 것이 이재무 시인의 시이다.

비루한 생활에서 시를 발견하고 있다는 시인의 시쓰기가 안쓰럽고도 대단하다. 가시관을 쓰고 언덕을 올라가는 분처럼 비루한 우리 삶을 대변하고 있다. 모든 시에서 따라쓰고 싶은 구절을 발견했다. 내가 앞으로 우리 시를 번역한다면 이 분의 시집 또한 번역해보고 싶다.

감자알

바구니 속 미끈하게 잘 생긴 감자알보다
작고 못생긴 감자알에 먼저 눈 가고 손 간다
자주 목 막혀 냉수사발 벌컥벌컥 들이켜며
한입 크게 베어물면
까닭도 없이 삶이 문득 서럽고 경건해진다
경사 심한 비탈밭 속 지하의 시간 캄캄, 더듬거리며
스스로 길 내 가까스로 완성한 동글납작한 몸
섭섭, 서운하게 생긴 감자알들은
울퉁불퉁 요철의 시간 더 가혹하게 견뎌온 것들이리라
프로필 이미지
66일차
2010.11.10 06:01:26 *.41.16.144
신석정 유고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 2007년 창비 발간.

1974년 작고하신 신석정시인이 1971년부터 3년간 발표한 시들을 모은 유고시집이다. 모든 시들이 청탁 혹은 기고에 의해 각종 기관지, 문예지, 일간지, 월간지 등에 실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매체의 특성에 따라 언어를 조정한 듯한 시들을 읽으며 노시인의 육성이 간간히 드러나긴 했지만 상당히 아쉬웠다. 신적정 시인은 전원 목가적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현실 참여적 시도 많이 썼다고 한다.

아래 시를 읽고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종 (弔鍾)

少年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 黃錫璘

설령
어둡고 흐린 마음이사
한 쪼각 하늘로
덮을 수도 있고
한 자락 산으로
가릴 수도 있고
한 줄기 강물에
띄울 수도 있지만,

목이 타도록 가난한
겨레를 외면하고
갈라진 조국의
하늘을 외면하고
한 송이 꽃 같은 헛된 꿈으로 달래려는
너희 그 썩어 문드러진
순수한 노래의 탈의 임종을 위하여
나는 弔鍾을 울려주리라.

차라리
열매 없는 꽃을 찾아
꿀을 빨아먹는
벌레라면 몰라도
하늘이 한 알의 보리알로 보이는
저 가엾은 우리들의 소년을 위하여
너희 순수한 노래의 탈의 마지막을
弔鍾을 울려 장송하리라.

창조 1972. 2.







프로필 이미지
강영미
2010.11.11 05:27:35 *.64.148.134
안녕하세요^^
한명석선생님께서 얘기 해 주셨던 분이네요...
그런데 이렇게 단군을 같이 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같은시간대에 이렇게 같이 깨어 있고 더우기 같은이름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하니
낯설지 않은 오랜 친구같은 느낌입니다...

토욜날 괴산에서 만나요~~~~~~~~



프로필 이미지
조영미
2010.11.11 05:00:31 *.41.16.144
이 시와 곽재구님의 새벽편지, 새벽을 맞는 단군활동을 하면서 더욱 의미가 깊어진 시들입니다. 천복을 찾는 여정에 위안이 되는 시들입니다~ 좋은 인연 반갑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4 [단군 2기 출사표_현무부족] 신나게 손놀리기 100일 ... file [135] [3] 김소연 2010.09.05 10425
83 [단군2기 출사표_청룡부족] 100덩이의 진흙을 선물 받... [42] 정세희 2010.09.05 3524
82 [단군2기-현무부족-출사표] 변환된 삶을 꿈꾸며 떠나는... [127] 강영미 2010.09.05 3661
81 [단군2기 출사표_현무부족] 아침 두 시간을 통해 스... [25] 이하늬 2010.09.05 3509
80 [단군 2기 출사표_주작부족] "Play, Happy-Go-Lucky ... [119] 박소라 2010.09.05 3764
79 [단군 2기 출사표_청룡부족] 다시 새벽을 깨우다. 또... [119] 최점숙 2010.09.05 3626
78 [단군2기 출사표 - 청룡부족] 나만을 위한 시간 [31] 최용훈 2010.09.05 3821
77 [단군 2기 출사표_주작 부족] 나는 내가 한다는 ... [9] 박지연 2010.09.05 3687
76 단군2기 출사표 - 현무부족 양지정 : 20년 나의 필살... [14] 양지정 2010.09.05 3521
75 [단군2기 출사표 - 주작 부족] 새벽 거인 [125] 이승호 2010.09.05 3740
74 [단군2기_출사표_주작부족] 가슴뛰는 삶의 시작, 첫 ... [41] 유덕수 2010.09.05 3504
73 [단군2기_출사표_현무부족] 반복을 통한 습관화 [127] 김경희 2010.09.05 3904
» [단군 2기_출사표_주작부족] 행복한 100일의 새벽 ... [146] 조영미 2010.09.05 7022
71 [단군2기-출사표- 주작부족] 매일 새벽 나 자신과 마... [113] 조성희 2010.09.05 4226
70 [단군2기_출사표_현무부족] 나는 나를 혁명할 수 있... [14] 박승오 2010.09.05 3537
69 단군2기 출사표-청룡부족.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 [86] 김선화 2010.09.05 3683
68 [단군2기-출사표-청룡부족] 2막을 향한 출발 [111] 이국향 2010.09.05 4035
67 [단군 2기_주작부족_출사표] 또랑또랑한 Bookmaker _ ... [25] 차정민 2010.09.05 3572
66 단군2기 청룡부족 출사표 윤인희 [41] 윤인희 2010.09.04 3525
65 [ 단군2기- 주작부족 윤맹순 ] 출사표 - 첫 백... [45] 늦을뻔한 수니 2010.09.04 3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