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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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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4일 22시 3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나는 저자를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연구원 선발을 위한 레이스 중 그룹 인터뷰라는 미션 수행을 위해 만났고 나머지 한 번은 최근 오프 수업 때 작가란 무엇인가란 주제의 특강에서였다. 그는 만나기 쉽지 않은 저자다. 그런 저자를 나는 두 번씩이나 만나 참으로 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 글에서는 저자에게서 들은 이야기 중 마음에 담겨있는 이야기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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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무엇인가?

 

오늘날, 이 궁핍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당연히 존재의 파수꾼인 시인이다. 존재의 진리가 말하는 고요한 울림에 귀 기울임으로써, 즉 신을 불러 그 은밀한 신호(눈짓)를 포착함으로써 존재의 개방성을 완수하고 그 말씀을 시의 언어로 보존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그 때마다 환경적,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지 곧 삶에 대한 자명하고도 생생한 지향을 마련해주는 사람 바로 성스러움을 열어-밝히는 사람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중심으로 작가가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현실에, 시대에, 역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여명의 목소리를 듣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가 그의 시 <>에서 시가 나를 찾아왔어, 난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라고 말했듯이 존재의 진리가 작품 속으로 스스로 들어오게 해서 신의 목소리를 듣고 쓰라는 것이다. , 시대가 그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대신 말하는 사람이 바로 작가라는 것이다.

 

수영장에 갔으면 물에 뛰어 들어라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수영장에서 준비운동만 하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수영장에는 준비 운동을 하러 간 것은 아닙니다. 수영장에 갔으면 물에 뛰어드세요. 준비가 다 되어 시작하는 시작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렇게 글쓰기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찾아갈 때 완벽한 안전 경로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표지판 보고 달리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지요. 수영장에서 준비운동만 하는 것은 쓸모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이 것은 비단 글쓰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완벽히 준비하고 시작하겠다는 생각으로 그 일을 차일피일 미루는 경우가 많다. 결혼이 그렇고, 부모가 되는 일이 그렇고,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할 때도 그렇다. 그의 말대로 준비가 다 되어 시작하는 시작은 없다. 시작해서 가다 보면 요령도 생기고 길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일이 자신의 천직이라면 조셉 캠벨의 말대로 천복의 길에서 천복의 문을 열어주는 사람들까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되고 싶으면 작가처럼 써라

 

글을 쓸 때 습작을 습작처럼 쓰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습작을 최종본처럼 써야 합니다. 작가 지망생이라도 작가처럼 쓰세요. ‘설사 ~이더라도 마치 ~인 것처럼이미 작가인 것처럼 쓰세요. 습작이라고 생각하고는 단 한 편도 쓰지 마세요. 신문사에 보내서 내일 실릴 원고처럼 쓰세요. 최선을 다해서 쓰세요. 작가처럼 쓰면 작가가 됩니다.

 

이 말은 글을 쓸 때 항상 최선을 다해서 쓰라는 당부인 듯싶다. 연습을 실전처럼 치열하게 하고 실전에서는 연습에서처럼 긴장하지 말고 해야 한다. 그래야 연습을 하면서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고 실전에서 본래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내일 신문에 실릴 원고라고 생각하면 수없이 확인하고 문장을 다듬고 정말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그렇게 작업한다면 작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삶이 곧 글이다

 

삶이 곧 글입니다. 피히테는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떤 사람이 어떤 학문을 하느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있다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어떤 글을 쓰느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있습니다. 살아가기가 곧 글쓰기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렇다. 삶이 곧 글이다. 글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실 글뿐만이 아니다. 붓글씨에도 그 사람의 성격이 보이고, 바느질 땀에도 그 사람의 성품이 묻어난다. 글에는 그의 생활과 철학, 그리소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이 보인다. 그러니 삶이 곧 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책은 저자의 최선이자 모든 것이다

 

책은 저자의 최선이자 모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최선과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좋은 책을 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삶이 바뀔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또 하면 됩니다. 삶을 기뻐하는 삶을 사세요. 삶은 연회와 같습니다. 단 한번뿐인 연회를 즐기세요. 갖가지 은그릇, 금그릇, 아름다운 여인과 근사한 청년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자신의 연회를 기뻐하며 즐기기 바랍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아주 좋은 책을 세상에 내놓고 싶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알게 된 것, 책을 통해 세계의 석학들에게 배운 것, 그리고 스승과 도반들과 공부하고 깨우친 것을 담고 싶다. 그리고 그 책이 나의 삶을 혁명해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삶이 바뀌지 않는다고 실망하지는 않으련다. 다시 또 하면 되니까. 세네카는 평소 친구들에게 인간의 삶을 연회에 비유해서 가르쳤다. 연회에 초대된 사람은 너무 일찍 자리를 떠나 주인을 섭섭하게 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늦게 떠나 주인에게 폐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삶은 연회다. 다른 사람 눈치보지 말고 나의 연회의 주인공으로 온전히 즐기며 기뻐해야 한다. 그래야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지은이의 말

 

P7 라바움이라 불리는 이 휘장이 새겨진 로마군의 깃발은 서양문명의 중심축이 헬레니즘에서 헤브라이즘으로 옮겨 가는 것을 알리는 징표이자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듬해 2월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300년 가까이 혹독하게 탄압해 오던 기독교를 공식 승인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제국을 지배하던 그리스와 로마의 수많은 신들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기독교의 신이 차지했지요. 그 이후 서양 사람들은 1700년 가까이 단 하나의 신을 압도적으로, 또한 지속적으로 숭배해 왔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새뮤얼 헌팅턴이 유행시킨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에도 나타나 있듯이, 서양 문명이 곧 기독교 문영이고 그 심층에는 기독교의 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P8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를, 그 세계가 오랫동안 숭배해 온 기독교의 신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비록 흔한 방법이 아닐지라도 썩 좋은 방법입니다. 이 방법이 서양문명을 심층적으로 파약하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바로 보고 그 해결책을 마련할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1부 신이란 무엇인가

 

P22 한참 후에야 정신이 든 이들은 인간의 육체가 가진 아름다움에 대한 이 화가의 찬미가 신에게 바치는 장엄한 미사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P27 신이 영이라는 말은 신이란 모든 것에 침투하는 바람, 때로는 조용한 숨결로 거센 폭풍으로 모든 것에 침투하여 지배하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독일의 현대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P31 신은 전혀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오해하거나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P35 르네상스는 신 중심의 중세 문화를 깨트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 따라 이 시대 예술가들은 신보다는 인간을, 신앙보다는 이성을, 종교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그들 작품 속에 재현했습니다.

 

P36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에게 신은 인간을 이상화하거나 그 능력을 극대화한 존재였습니다. 일종의 초인적 영웅이었던 셈이지요. 그들이 신에게 인간의 육체를 부여한 것은 신들을 폄하했다기보다 인간의 육체를 그만큼 신성시했다고 보아야 하지요.1)

 

P37 인간이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심성과 육체를 단련하여 신처럼 위대해질 수는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P39 고대나 중세 기독교에서 인간의 육체는 언제나 욕정과 죄의 온상이기 때문에 숨기고 가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P40 미켈란젤로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가진 중세 이탈리아의 예술가였습니다.

 

P41 그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언급한 이데아의 미’, 곧 우리의 정신에 선천적으로 아로새겨진 이상적 아름다움도 열렬히 추구했습니다. 이데아의 미란 가시적 자연이 아니라 가지적 인간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빙켈만의 뛰어난 표현을 빌리자면 오성에 새겨진 정신적 자연에서 나오는 미를 말합니다.

 

P43 회화는 정신의 노동이다.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손재주와 눈가늠에 기대어 그리는 화가는, 앞에 놓인 모든 물체를 고스란히 재현하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울과 같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P43 미켈란젤로는 그리스인들이 추구하던 이데아의 미가 작품에서 물질성을 소멸시키고 인간의 영혼을 초월적 세계로 이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P44 아름다움은 오직 우리가 감각적 대상을 통해 상기하게 되는 지고한 신적 형상의 아름다움, 이데아의 미에서 나옵니다.

 

에로스에게 달린 날개가 우리의 영혼이 단순히 감각적 대상에 머물지 않고 이데아의 미를 거쳐 궁극적으로 신에게로 상승하게 됩니다. 즉 에로스는 우리의 영혼을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향하게 하는 혼의 전향을 가져오고, 감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에서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을 향한 등정을 하게 하지요.

 

P45 에로스는 우리 영혼을 본향인 이데아 세계로 귀환시키기 위한 혼의 날갯짓이고 상승적 창조자입니다. 또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천상의 이데아 세계로 연결시키는 열정이자 신에게 인도하는 안내자예요.

 

P47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은 이같이 다원적이고 심층적인 이유에서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규칙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모방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탐구했고, 라파엘로는 제자들을 그리스로 보내 고대 미술품을 모사해 오게 했지요. 그 결과 성서 이야기를 다룬 이들의 작품에도 그리스 문화가 자연스레 혼합되었습니다.2)

 

[] 비토리아 콜론나는 로마의 부위한 귀족 베스파시아노 콜론나의 누이로, 역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천재이며 당시 자신의 책을 출간한 몇 안 되는 여성 시인 가운데 하나였다. 남편이 전사한 후 시에 몸을 바친 그녀에게는 열렬한 애찬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중심으로 바티칸을 내부에서 개혁해보려는 비밀결사 조직 영적인 사람들을 그녀가 조직하여 이끌기도 했다. 미켈란젤로와는 장문의 편지와 시를 주고 받는 사이였는데, 이들의 애정은 서로의 지적 영혼을 사랑한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플라토닉 러브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P48 그리스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와서야 신인동형설과 신인동감설에서 벗어났습니다.

 

P50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신을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라고 규정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을 축약해서 보통 부동의 운동자또는 원동자라고 하지요.

 

만일 당신이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신학자는 물론, 서양 근대철학자나 신학자의 글에서도 운동이라는 말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변화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P51 이러한 사변적 논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의 궁극적인 바탕으로서 자신은 탄생하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탄생과 변화의 원인이 되는 무형의 원리를 가정해 부동의 운동자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신이라고 했지요.

 

P54 외적 형태를 의미하던 히브리어 첼렘떼무트를 기독교 신학자들은 어떤 내적 본성을-지성과 이성이건, 선성이건 또는 순결성이건 뜻하는 신학적 용어로 해석했습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어 이데아나 에이도스가 본래는 어떤 사물이 눈에 보이는 모양형상이라는 단순한 뜻이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세상의 모든 사물 안에 깃들어 있어 그것이 그것으로 존재하게끔 하는 실체라는 매우 특별한 철학적 뜻을 갖게 된 것과 매우 흡사하지요.

 

P55 기독교의 신 개념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만을 계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둘을 종합한 것인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건 신앙과 이성이라는 그 이상 간데없이 뻗은 양극을 휘어 하나로 결합하는 것 같은 극적 종합이었습니다.

 

P56 성서의 종교에는 존재론적 사상이 없다. 그러나 성서의 그 어떤 상징도 그 어떤 신학 개념도 존재론적 함축성을 갖지 않은 것이 없다.

 

P56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은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신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신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지요. ‘신은 창조주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가지요.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3)

 

P59 이렇듯 다분히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이기도 한 이유로 신은 인간이 도무지 벗어나거나 떠날 수 없는 대상이며, 그의 말씀은 순종하면 필히 복을 받지만 거역하면 부득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P65 ‘알면 믿는다는 입장도 있고 믿으면 안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당연히 후자를 견지합니다만, 이 문제는 차치해 두고 일단 알아봅시다.

è  나는 이른바 전도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자주 끌려가 이야기를 들었다. 시어머님이 다니는 교회 골방에서 회유를 당하기도 했고 영어로 설교를 한다는 교회 신자들에게 영어로 전도를 다하기도 했다. 나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교회에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들은 일단 믿어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답하곤 했다.

 

2부 신은 존재다

 

P74 이 그림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상단에 예수와 사도들을 배치하고 하단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베로에스 같은 철학자들을 배치함으로써, 철학이 신학의 시녀로 봉사했던 중세사상의 구조와 <신학대전>이 어떤 성격을 지닌 저술인지도 잘 드러내줍니다.

 

P75 1880년 교황 레오 13세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신앙과 이성의 권위를 각각 높이면면서 둘을 친밀하게 결합함으로써 신앙과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불화를 일거에 해소했다며 칭송하고 가톨릭학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인 명칭은 있는 자. 이 명칭,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4)

 

1장 존재란 무엇인가?

 

P80 이름이란 일반적으로 개념을 대표하고, 그 사물과 다른 사물을 구별하는 칭호로서 어떤 것이 무엇인지를 지시해 주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어떤 것이 무엇인지알아내기 위해 먼저 그것의 이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P81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은 사실상 일종의 또 다른 자기가 될 수 있었다.

 

P83 존재론 전통에 의하면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신에게는 이름이 없고 또 당연히 없어야 합니다.

 

P83 세상 만물을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입니다.

 

P83 그런데 신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자신의 속성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그 무엇으로도 한정할 수 없는 무한정자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될 수 없지요.

 

P85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빠져 바깥에 있다면 빠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P86 만일 신에게 본질이 있어야 한다면 따라서 신에게도 이름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존재뿐입니다.

 

P87 탈레스의 동료이자 최초의 지도 제작자이기도 했던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는 아페이론은 우선 시간적으로 변화를 통해 형성된 것도 아니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죽음도 쇠퇴도 모르고,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것이지요. 동시에 공간적으로는 너무나 광대무변하여 크기를 측정할 수 없으며, 만물을 자신 안에 포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페이론은 신적인 것으로서 만물을 포괄하고 횡단하며 보호하고 조종하지요.

 

P88 존재란 비물질적 무한자이자 유일자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개념을, 이후 자신의 존재론 체게 안에서 모든 이데아의 근거인 일자또는 선자체로 정립한 사람이 플라톤이었구요, 그 체계를 종교화한 사람이 플로티노스였습니다.5)

 

P92 그런데 뜻밖에도 신이 선뜻 자기 이름을 밝힌 겁니다. “에흐예 아세스 에흐예(나는 있는자다)”라고 말이지요.

è  신이 자신의 이름을 밝힌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참으로 신기하다.

 

P93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때 존재와 존재물이 혼동될 수 있는 존재가 실체라는 그리스 철학적 요소가 본의 아니게 스며들어 히브리어 표현의 근본적 의미를 변질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P94 신은 이 말을 통해 자신이 존재물이 아니라 존재임을 알린 것이지요.

 

P95 모세에게 나는 존재다라고 밝힌 직후 신은 야훼가 자신의 영원한 이름이며 칭호라고 선포했지요.

 

P98 우리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존재보다는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존재물을, 다시 말해서 신보다는 세상을 더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요.6)

 

P99 신을 존재로 그리고 인간을 존재물로 파악한 것, 바로 이것이 모세가 이룬 신 개념의 핵심이란 말입니다.7)

 

P100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일찍이 모세가 구분한 존재와 존재물 사이의 엄연한 차이를 신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 상이성또는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실존철학을 쌓아 올리는 초석으로 삼았지요.

 

P101 신은 세상의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존재하지도 않지요. 신은 무엇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저존재합니다.

 

P101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인 것처럼 긍정하는 것도 무신론이다. – 현대신학자 파울 틸리히

 

P104 기원전 5세기쯤 그리스인들은 세상 모든 존재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물음으로 철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궁극적 근거를 아르케라고 불렀지요. 탈레스는 물,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아르케라고 생각했습니다. 피라고라스는 수와 질서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내세웠어요.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인 엘레아 출신 파르메니데스는 만물의 궁극적 요소가 존재라고 주장했지요.

 

P106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존재물을 변한다. 그러므로 존재물들에 대한 모든 인식은 거짓이다.

 

P109 기독교인에게도 진실하고 참된 세상은 우리의 관점에서 현존하는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어떤 다른 세상이지요. 곧 플라톤에게 이데아의 세계였던 것이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며, 그렇기에 참되다는 것이지요. 반면 우리가 사는 이곳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렇기에 헛되다는 것입니다.

 

P110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계승한 플라톤은 불변하는 실체인 존재를 이데아라고 불렀고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확장했지요. 플라톤의 주장에 의하면 개개의 사물 안에는 이데아가 들어있습니다. 이 들어 있음을 통해 개개의 사물들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은 물론, 있음이라는 존재를 부여 받게 되지요.

 

P112 세상의 모든 빨간 사물들에는 빨강 이데아가 들어 있지만 그것이 부분적으로만 들어 있어서 그 빨강이 영원히 빨갛지는 않고 일시적으로 빨간색일 뿐이고 언젠가는 퇴색된다는 말입니다.

 

P113 존재(이데아)는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존재물(사물)들에게 본질존재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입니다. 그리고 존재를 부분적으로 나누어 받은 존재물들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이지요.

 

P114 신은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우주만물에 본질존재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다. 그리고 우주만물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자다. 따라서 신만이 진리의 근거이며, 우주만물에 대한 지식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일 뿐이다.

 

P116 플라톤 철학에서 어떤 사물이 더 많은 이데아를 분유해서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더 안 변한다는 것, 더 완전하다는 것, 더 단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플라톤이 선분의 각 부분을 나눌 때, 위 도식처럼 같은 비례(1:1)의 균등한 길이로 분할하지 않고,서로 다른 비례(예컨대 1:3)를 통해 같지 않은 두 부분으로 반복해서 분할했다는 것이에요.  

 

P117 이미지 à 사물 à 수학적 대상 à 이데아로 올라갈수록 질적인 면은 점점 좋아지지만 양적으로는 점점 적어진다는 것을 표시했습니다.

 

P117 플라톤이 순수하게 형이상학적으로 제공한 피라미드형 층계는 우리선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의 사다리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자연학으로 들어왔습니다. 즉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론>>에서 식물 à 동물 à 인간이라는 존재물의 계층 구조를 떠올리는데 기여했어요. 또한 플로티노스가 물질 à 영혼 à 정신 à 일자라는 존재의 계층 구조를 구성할 때도 근간이 되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P120 신이 계층적 질서를 통해 자연의 사다리를 만들어 놓고 그것에 맞춰 우리의 지식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단계적으로 설정했으니까 그것을 따르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P122 그는 일자()는 참됨, 선함, 아름다움, 생명, 예지, 능력 등 모든 가치에서 최정상이지만 거기서 유출되어 나온 존재들은 계층구조의 밑으로 갈수록 마치 빛에서 멀어질수록 어두워지듯이 점차 결핍된다고 교훈했습니다.

 

P123 그들은 신을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등등 어떠 어떠한 가치들의 정점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이 바로 이 같은 가치들에 의해 인간으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이 같은 가치들을 추구하며, 이 같은 가치들에 의해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인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라는 말의 시원이 바로 여기지요.

 

P124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예시한 존재론적 계층구조라는 모호한 개념은 그의 영특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자연의 사다리라는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생물학적 위계질서와 결합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로 유입되어 가장 미소한 존재물로부터, 모든 가능한 단계를 거쳐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에 이르는, 무한한 수의 고리로 연결된 존재의 대연쇄라는 신학적 개념으로 굳어졌지요.

 

P127 자연과 사회 안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존재의 계층적 질서가 신이 정한 진리라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마치 자연이 자연의 계층적 질서를 따라 조화를 이루듯이 인간이 사회의 계층적 질서를 따르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주장이지요.

 

소명의식이란 모든 인간은 신의 계획을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각각 특정한 부름을 받았으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이 무엇이든 설령 아무리 비천한 것일지라도 거기에 충실한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라는 인식이지요.

 

P130 존재가 영원불변하는 실재이자 진리의 근거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거쳐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파르메니테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에서 존재는 그것을 플라톤처럼 이데아로 부르든, 플로티노스처럼 정신으로 부르든,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말씀;으로 부르든 간에 불변성을 본성으로 갖고 있고, 우리가 따라야 할 모든 진리의 근거입니다.8)

 

P131 히브리인들의 존재 개념은 만물을 생성 소멸시키는 역동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진리 개념 역시 불변성을 근거로 하지 않고 오히려 생성 소멸하는 작용, 곧 변화시키는 본성을 근거로 하지요. 천지를 창조한 신의 말이 바로 그렇습니다. 신의 말은 만물을 생성 소멸시키고 의롭게 만드는 작용을 하므로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라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생각입니다.

 

P132 일자란, 모든 존재물의 궁극적 근거이자 그 모두를 포괄하는 자이지요. 그 어떤 것에도 한정되거나 규정되지 않는 무한자로서 모든 한정되고 규정된 것들의 궁극적 근거가 되지만, 그 자신은 어떤 것에도 포괄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초월자입니다.

 

P133 일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다. 그리고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고, 그 넘치는 풍요함이 또 다른 존재를 만든다.

 

P134 정신이 곧 세상 만물을 창조하는 데 모범이 되는 틀입니다.

 

P135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에 의해 제한되고 규정된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P136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에서는 정신이 창조주이기는 해도 다만 창조의 틀로만 작용할 뿐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일은 영혼이 합니다. 영혼은 비물질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며, 그 둘의 연결고리로서 위로는 정신을, 아래로는 자연계를 바라보며 만물을 창조하지요.

 

P141 플로티노스의 세계구조에서 물질세계를 유출시킨 일자, 정신, 영혼은 영원불변하는 신적 존재입니다. 창조와 관련해서 본다면 일자는 창조의 바탕이고, 정신은 창조의 틀이며, 영혼은 창조의 우너리지요.

 

P145 그리스 언어가 정지적인 데 반해 히브리 언어는 역동적 성격을 갖고 있지요.

 

P146 히브리인들에게 존재는 영원불변한 것인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실재입니다.

 

P147 존재하는 것은 변화(생성, 작용)하지 않고 변화(생성, 작용)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P148 세상 만물은 그 무엇이든 끊임없는 자기동일적 생성과 작용을 통해서만 불변할 수 있습니다. 존재는 생성, 작용할 때에만 존재할 수 있고, 불변하는 것은 변화할 때에만 불변할 수 있다니!

 

P150 그리스인들은 존재든 존재물이든 모두 탈시간화함으로써 그 변치 않는 본질을 통해 개념적으로파악했고, 히브리인들은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시간 안에서 그 운동과 변화릍 통해 실존적으로파악했지요.

 

P152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논리학은 이처럼 철저하게 탈시간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변화도 전혀 다룰 수가 없어요. 바로 이것이 파르메니데스가 시작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화한 논리학의 전통이자 한계이며 그것을 통해 사유해 온 서양문명이 탈시간화된 이유이고, 우리가 히브리적 사고를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이며,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시간화된 새로운 논리학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P153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인 야훼의 속성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며, 나아가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데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지요.

 

P154 신은 시간 밖에서는영원히 안식하지만 시간 안에서는부단히 활동한다는 것이지요.9)

 

P155 그러한 개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또는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종교적 미덕이라고 여김으로써, 신에 관한 개념이 인간정신으로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더욱 탁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P157 히브리인들의 이러한 언어적 인식과 종교적 체험이 기독교인들에게로 이어져 기독교 신론인 삼위일체설의 종교적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P157 자신을 무한한 존재의 장으로 펼쳐 그 안에 피조물을 생성하고 또한 그들에게 부단히 작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는 존재, 바로 이것이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라고 계시한 신이자, 히브리인들이 하야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신이지요.

 

P159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장은 만물의 궁극적 근거로서 우주까지 포함한 모든 존재물이 여기서 생겨나고, 여기서 존재하며, 여기서 소멸하는 무한한 신적 근원을 뜻합니다.

 

현대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이야말로 발 그것에 의해 만물이 생성되고 존재하며 소멸하는 장이 아니던가?

 

P160 신학자 판넨베르크와 나눈 대화에서 뒤르는 스스로 물질이 되는 능력을 가져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이 비물적 장을 양자물리학자들은 퍼텐셜”’이라 부르고 신학자들은 신의 숨결이라 부른다고 말했습니다.

 

P161 프네우마는 어떤 정신과 의지가 아니라 온 우주를 꽉 채우고 있는 미세한 원시물질입니다.

 

P163 무와 물질의 중간에 있는 따라서 무는 아니지만 거의 무에 가까운 이 무형의 원물질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형상 없는 땅이고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이라고 할 수 있지요.

 

P166 신에 대한 모든 상상, 모든 형상화, 모든 규정과 언급은 사실상 부질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P171 신이 유일하다는 교리를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 선포가 아니라, 존재의 바다가 무한히 광대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포괄하며 그 바깥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P172 존재의 바다라는 이 비유는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이 나뉨 속에서도 연합해있고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구분되는 셋이라는 신의 삼위일체 속성을 어려움 없이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게 합니다.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P177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측면으로 접근해 봐야 하지요. 하나는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이지요.

 

P178 하이데거는 기획투사함으로써, 사르트르는 앙가주망함으로써 인간은 실존한다고 했지요. 기획투사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그 자신을 던진다는 의미이고, 앙가주망을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제 스스로를 잡아 매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써 인간은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10)

 

P182 비판의 핵심은 우리의 정신에 존재하는 관념이 무엇이든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P183 그러나 안셀무스가 그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표현한 신 개념은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무엇 하나도 결핍될 수 없는 절대적 완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즉 그러한 현존은 필연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신은 필연적으로 현존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P184 ‘가장 완전한 존재는 존재의 완전성인 현존을 필연적으로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P185 칸트가 볼 때 존재론적 증명에는 이처럼 개념의 필연성을 뜻하는 논리적 술어와 현실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실재적 술어에 대한 혼동이 들어 있습니다.

 

P186 철학이나 신학에서 얼핏 난해한 것처럼 들리는 말에는 뜻밖에 흥미롭고 유익한 사실들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지요.

 

P187 현실적 대상은 나의 개념 중에 분석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고, 나의 개념에 종합적으로 보태지기 때문이다.

 

P189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들이 모두 안셀무스의 증명들처럼 개념에서 시작하지 않고 감각적 경험에서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P191 비판의 핵심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감각적 경험에서 논증을 시작한 것은 옳지만 오직 사고만으로 우연적 존재의 현존에서 필연적 존재의 현존을 이끌어내는 추론 과정은 결정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무한소급은 논리적으로만 가능하지 존재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칸트가 제시한 원칙이지요.

 

P196 오존층의 두께가 생물 보호에 어쩌면 그리 적합한가? 이는 오직 신의 설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 지적 설계론

 

P198 흄은 우연에 의해서도 세계가 형성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단순히 추론에 의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부질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칸트 역시 목적론적 논증은 세계 내에 존재하는 의도와 질서에 대한 경험에 기초하지만, 그 경험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필연적 존재()의 현존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우주론적 논증을 비판할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무한소급은 논리적으로만 가능하지 존재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필연적이란 용어는 논리적 언어일 뿐 존재론적 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반복해서 지적하고는 이렇게 못 박았지요.

 

P199 페일리의 논증은 유비추론 형식을 취하는데, 유비추론은 전제들이 참인 경우에도 결론이 확률적 참또는 가능적 참일 뿐 필연적 참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었지요.

 

P202 진화론은 자연의 복잡성과 합목적성을 페일리가 제시한 신의 섭리에 의한 합목적적 창조라는 추상적 개념을 빌리지 않고 당시 서구의 지식인들이 선호했던 귀납법을 사용해서 경험적, 실증적으로 설명해 주었지요.

 

P203 진화론은 기독교를 향해 자연을 위한 신의 개입은 처음부터 아예 필요가 없었다는 결정적인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의 창조주는 자연선택이라는 기계적 메커니즘이고 그것에는 아무런 예정된 목적도 없기 때문이지요.

 

P204 당시 자연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섬기는 이신교, 인류를 숭배하는 인류교와 같이 기독교를 인간중심적이고 과학적인 종교로 개조하려는 이단들의 온상이었기 때문이지요.

 

P205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개혁신앙의 구호를 따르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 및 진리의 근거를 초이성적 계시에서 구하지 않고,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에서 구하려는 자연신학을 강력하게 거부하지요.

 

P208 안셀무스는 개념에서 출발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논증을 전개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감각적 경험에서 시작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논증을 펼쳤던 것 기억나지요?

 

안셀무스가 플라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진 존재론의 영향 아래 있었던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적극 수용했기 때문이에요. 근대로 들어서면 이들 두 사람의 방법론을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각각 계승하게 되는데요, 이 차이는 본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적 차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11)

 

P209 플라톤에게 진리는 우리가 정신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에이도스의 대한 지식입니다.

 

P210 플라톤은 철학 하는 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하는 과학자였던 것입니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같은 합리론자들은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정신에는 선천적인 인식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정신은 아무것도 뛰지 않은 빈 서판과 같아서 그 안에 선천적 인식 능력이란 전혀 없고 오직 경험만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요.12)

 

P212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화하는 일(개념에 대해 그 대상을 직관을 부여하는 것)은 직관을 오성화 하는 일(직관을 개념 아래 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13)

 

P213 “형이상학은 사상사를 통해 실재의 궁극적인 본성을 찾아내려는 시도였으나, 이제 사람들은 가장 존경할 만한 권위에 입각해서 실재는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실재는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 없는 가상체라는 것, 아무리 정밀한 인간지성이라도 결코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며, 마야의 베일을 찢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윌 듀랜트 <철학이야기>

 

인간의 이성은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지만 감성이라는 섬 안에 있어야만 안전합니다. 한마디로 감성의 한계가 곧 이성의 한계지요! 감성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사고는 가상이고 오류의 원천입니다.

 

P215 논증으로만 신의 현존을 증명하려는 일체의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고 주장한 것입니다.

 

P216 19세기 신학자들은 칸트가 이성의 한계를 분명히 밝히고 인간은 그 유한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무엇보다도 큰 무기가 된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습니다.

 

P217 기독교에는 세 가지 위대한 집단이 있고 그 각각에 영향을 끼친 세 사람의 위대한 철학자가 있다고 주장했지요. 동방정교에는 플라톤이, 가톨릭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프로테스탄트에는 칸트가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P217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말을 통해 칸트는 이성을 감성의 테두리에 가두었습니다. 그 이후 근대 학문에서는 중세에 비해 경험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강조되어 진리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었지요. 진리는 타당할 뿐 아니라 건전해야 한다는 것인 것 타당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건전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하다는 말입니다.

 

P220 기독교에서도 신에 대한 모든 지식은 인간이 철학과 같은 초등학문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고 오직 신과 인간 사이의 쌍방적 인격관계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강했지요.

 

P221 종교적 경험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진술이나 추론, 비판, 반성 같은 지적 활동의 산물인 철학적, 신학적 이론은 부수적 요소라는 말이지요.

 

P222 모든 사람이 종교적 경험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건 아닙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지요. 하나는 종교적 경험 자체를 일종의 심리적 환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 실재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사 그것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종교생활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으로 그것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지요.

 

P224 신비적 형태의 종교적 경험은 보통 어떤 종교적 내용이나 대상이 물질적 세상을 잠시 잊게 함으로써 인식 전체를 채워 주는 의식 상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을 말하지요.

 

P227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란 어떤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예배와 기도 같은 일상적 종교생활에서 종교적 깊이와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성스러운 경험을 말합니다. 인간이 삶의 모든 것을 신과 연관해서살펴보고, 삶의 모든 관계와 책임의 영역에서 신에게 대응하는태도를 말하는 겁니다.

 

P227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이란 본디 그 자체가 신념과 가치 체계이자 동시에 문제 해결 방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패러다임과 이를 통해 얻은 경험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둘은 사실상 서로 뒤엉켜 있는 하나의 혼합물이지요.

 

P228 보기에 따라서는 오리로도, 토끼로도 보이는 이 그림은 우리가 무엇을 보는(또는 경험하는) 이 아니라 무엇을 무엇으로 본다(또는 경험한다)는 것을 말해주지요. 결국 우리의 인식은 일종의 해석인 것입니다.

 

P229 신실한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주만물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개개의 사건들 모두가 역사를 움직이는 신의 참여와 인도를 표상하는 증거들인 동시에 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는 논거들인 것입니다.

 

P230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잇습니다.

 

P230 신의 현존을 확인하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신의 현존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신도들의 이성을 설득하려는 의도로 행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14)

 

P232 우리는 아주 인상적이고 기억되는 사건들을 통해 신비적 형태의 종교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이 삶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는 의미의 중심점 이자 삶의 전환점이 되어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쿤의 용어로 말하자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15)

 

P233 바울은 자신의 신비적 경험을 통해 인간과 세계와 역사를 보는 새로운 안목을 터득했고, 삶 전체가 바뀐 것이지요. 그에게는 메타노미아, 곧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고, 이로써 신은 그를 통해 역사하며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겁니다.

 

P235 신이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도록 /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 그렇다고 진심으로 그를 찾는 사람들까지 /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 그는 그를 찾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 명확히 나타나길 원하시는 반면, / 전심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길 원하기 때문이다. /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는 표시를 주었다. /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 파스칼의 <팡세>

 

3부 신은 창조주다

 

P241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모든 진리의 원천으로 생각하고 우리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이 난해한 그 계시들을 풀어내는 일에 과감히 도전했지요. (중략)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가 마치 암호와도 같은 텍스트들 안에서 신에 대한 매우 중요한 기독교 교리들을 이끌어 냈다는 점이지요.

 

P246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칭찬을 받지 못할 글을 단 한 줄도 쓰지 않는인물이었다고 합니다.

 

P248 마니교의 중심 사상은 영혼과 물질, 선과 악, 빛의 왕국과 어둠의 왕국이 대등한 원리이자 존재론적 실재로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는 철저한 이원론입니다.

 

P249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 모니카가 권하는 기독교는 모든 것이 선한 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선만이 존재할 뿐 악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원론을 바탕으로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어요.

 

P252 암브로시우스는 다른 설교자들과 달리 복음을 권위에 기대서가 아니라 이론적으로 풀어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플라톤주의 이론을 빌려 이성적으로 가르쳤지요. 그럼으로써 신도들이 복음을 신앙만으로가 아니라 이성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왔습니다. (중략)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라고 믿는 것을 바랄 뿐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려고 안달이 난 그런 분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P260 오늘날에도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적 신플라톤주의자인지 아니면 신플라톤주의적 기독교인인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겁니다. (중략)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앙을 위해 이성을, 신학을 위해 철학을 부단히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P261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 번째 시기에는 마니교를 논박하며 주로 인식론과 신론을 정리했고, 두 번째 시기에는 도나투스 분파 문제에 골몰하여 교회론과 성례전을 정리했으며, 세 번째 시기에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싸우며 은총론과 예정론을 확립했다는 것이지요.

 

P261 화이트헤드 교수의 말처럼 서양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듯 서구의 기독교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각주라고 말할 수 있다.

 

P265 인간의 삶이란 자신의 삶이 그랬듯이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 주기 위해서였지요.16)

 

P265 신율은 자율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키지요. 요컨대 신율은 섭리에 의해 모든 상황과 여건이 성숙되어 초월적으로 실현되는 자율을 말합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자신의 신적 근거를 알고 있는 자율이 곧 신율이라고 규정하지요.

 

P266 <고백록>은 비록 회고록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눈물로 쓴 기나긴 신앙 간증이자 탁월한 신학자가 쓴 성서 해석서가 되었습니다.

 

P268 아우구스티누스는 히포의 감독이라는 막중한 직위를 맡고 죄 많았던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하려 한 게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이라는 기독교적 진리를 증언하려고 <고백록>, 아니 <증언>을 저술했다는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이 증명하듯이,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우주의 역사 또한 어떤 우연이나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에 의해 창조되고 보존되며 인도된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했던 것이지요.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P276 신은 시간 밖에서는 안식하고 시간 안에서는 활동한다는 말입니다.

 

P277 창조론과 빅뱅이론 사이에 존재하는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에 먼저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종교와 과학이 설사 같은 용어로 같은 내용을 말할지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역시 적잖은 놀라움 속에서 발견하게 될 겁니다. 이 같은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의 종교와 과학이 한편으로는 날카롭게 대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주도권은 거의 과학으로 넘어갔지만 말입니다.17)

 

P277 이를 통해 우리는 대립하는 두 이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물론, 한발 더 나아가 히브리적 요소와 그리스적 요소, 유신론적 성격과 유물론적 성격, 종교적 믿음과 이성적 사고가 여전히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서양문명의 이중적 성격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P279 어떤 발광체가 당신을 향해 다가올 때는 스펙트럼선이 파장이 짧은 청색 쪽으로 이동하고, 당신에게서 점점 멀어질 때에는 파장이 긴 적색 쪽으로 편향됩니다. (중략) 따라서 성운들의 적색편이 현상은 그 성운들이 관찰자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의미지요. 그리고 그건 곧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P286 우리는 가상입자를 존재하게 하는 요동처럼, 빅뱅을 진공 속의 요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요동이 자발적이라면 진공으로부터의 우주 창출도 자발적이다. - <빅뱅과 우주론적 논증>의 저자 더글러스 래키

 

P287 단순히 논리적으로만 생각해보면, 우주가 탄생할 때 어떤 식으로든 무에서 유가 생겨나는 일이 적어도 한 번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지금 존재하는 이 우주의 존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P290 빅뱅이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빅뱅의 모든 과정이 우리에게 깜짝 놀란 만큼유리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지요.

 

P292 그런데 그 시간 안에 어떻게 이 기막힌 일이 우연히 일어날 수 있겠는가? 도저히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우주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며, 그의 계획에 의해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과학적 증거가 아니겠는가?

 

P293 그 시공 거품들 가운데 초기 상태가 우연히우리가 사는 데 적합하게 발생하도록 조율된 하나가 팽창해서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P296 무한한 다중우주가 존재하고 각각의 우주는 나름대로 고유한 특성과 구조를 갖고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우리의 우주는 우연히 여섯 개의 최적의 숫자에 의해 우리가 실기에 적합하게 구성되었을 뿐이라고 믿고 있지요.

 

P299 요점은 현대과학자들도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우주의 탄생과 함께 시간과 공간이 어느 한 순간에 생겼다고 주장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시점이 곧 우주의 태초입니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계시에 대한 고대신학자의 해석이 실험과 관찰에 의한 현대과학자들의 이론과 맞아떨어진다는 점이 참으로 놀랍습니다.18)

 

기독교 신학에서 신이 세계 이전, 곧 시간과 공간의 밖에서창조했다는 말은 일단 신이 시간이나 공간 그 어느 것의 제약도 받지 않고 절대적 독립성을 가진 세계초월적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신의 세계초월성을 신의 전지전능성과 연결 지어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P302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모든 언어놀이에는 그 언어놀이를 구성하는 풍습, 제도, 역사, 문화를 비롯한 인간의 총체적인 삶의 양식이 반영됩니다. 따라서 언어란 그 언어가 사용된 언어놀이 안에서만 일정한 의미를 갖지요. 그러므로 언어놀이가 변하면 그때는 개념상의 변화가 생기고 개념과 더불어 단어들의 의미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P303 그래서 언어놀이를 바꾸는 것은 하나의 사고 차원에서 다른 사고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자, ‘하나의 삶의 형식에서 다른 삶의 형식으로 옮겨 가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 양식, 곧 문법은 한 세계에 대한 단순한 정보만이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삶의 통찰을 제공하지요.

 

P305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이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P311 과학과 종교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19)

 

P313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여, 단지 하나로 통합하거나 융합하는 게 아니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진리에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지식이 제 스스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P314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세계로부터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절대적 독립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초월성과 세계에 부단히 참여하며 자신의 뜻대로 인도해가는 인격적 속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내재성을 동시에 지는 유신론적 신입니다.

 

P317 태초는 시간 안이 아니라 시간 밖을 뜻합니다. 그런 만큼 이 말은 신이 시간 밖에서우주를 창조했고 창조와 동시에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이해해야 하지요.

 

P319 ‘시간 밖의 시간이라는 말은 우리가 시간이라고 규정한, 시간이 가진 성질이 아닌 어떤 다른 성질을 가진 시간을 의미합니다. 즉 무한하게 분산되며 미래에서 다가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부단히 흘러가는 성질이 아닌, 그와는 다른 성질을 가진 어떤 시간을 뜻하지요.

 

P320 신은 시간 밖의 존재, 곧 세계초월적 존재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신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P321 미래란 장차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어떤 시간적 과정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점차 자라나듯이 영원한 신의 의지가 인간의 시간인 역사로 순차적으로 침입해 들어옴일 뿐이지요.

 

P323 플로티노스는 그런 것이기에 영원은 장엄하고 이를 통해 신을 이해하게끔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원은 일종의 신이다라고 말하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다라고 영원을 찬양했습니다.

 

P325 이데아와 영원은 모두 원형이고 개개의 사물들과 시간들은 각각의 모상이지요.

 

P326 공간이 연장을 재는 척도이듯 시간이란 지속을 재는 척도이며, 그러한 시간을 파악하는 주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없다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다는 것이지요. 시간은 마음 밖에서 파악할 수 없고 오직 마음 안에서 드러나며 마음과 하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삶이 변하면 시간도 변하지요.20)

 

P327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가 보통 영혼이라고 부른 것이라는걸? 따라서 바꿔 말하면 시간은 영혼이 잽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신의 영원성이 들어 있기에,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영혼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시간도 변하므로 시간은 곧 영혼의 삶입니다. (중략) 영원은 신에 속하는 동시에 값어치 있는 것이고 시간은 인간에게 속하는 동시에 세속적이고 부질없는 것이지요.

 

P330 플로티노스에게 영원은 신의 마음이 사는 삶이고,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사는 삶입니다. 하나는 한결같이 머무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둘 다 마음의 삶이라는 점에서 같지요.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부단히 신을 닮으려 하고, 시간 역시 꾸준한 집념으로 영원을 닮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도록 하는데요,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의 마음이 신에게 이르면 그때는 시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끝에는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있는 것이지요.21)

 

P331 일자, 곧 신에게로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함! 바로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발견한 영원한 삶을 얻는 구원의 방법이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종교적 언어로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한 의도이며, 우리 삶이 주어진 시간의 궁극적 의미이고 가치지요!

 

플라톤, 플로티노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시간론 전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구원 방법은 기독교 신학에는 물론이거니와, 철학과 문학을 비롯해 서양문명에 끼친 영향이 매우 넓고 큽니다.

 

P334 아우구스티누스는 먼저 우리의 몸은 어쩔 수 없이 물리적 시간을 살지만, 우리의 마음은 신적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P334 과거는 현재의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P334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여 마치 눈앞에 보이듯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가진 이런 능력을 상기의 힘이라고 불렀지요.

 

P335 상기의 힘은 개인적 차원에서든 역사적 차원에서든 모든 허무주의를 극복하게 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에 깔린 심오한 사유입니다.

 

P337 우리 마음(영혼)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P342 인간에게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무의지적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것은 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처럼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가지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일을 합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지요. 또한 미래를 기대하게도 만듭니다.

 

P345 시간은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가는 것으로 보이고 신에게는 시작과 종말이 고정된 영원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P346 물리적 시간으로 자신의 삶과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에서 심리적 시간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신의 관점으로 바꾸는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지요.

 

P349 그는 시공조차 아직 열리지 않은 태초에, 신이 창조한 그 천지를 각각 지혜의 하늘과 형상없는 땅으로 해석했습니다.

 

P352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형상 없는 땅은 우주 공간을 포함한 모든 세계를 형성해내는 원물질을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P356 신은 특정한 유전자적 변이의 기초가 되는 양자역학적 과정에 개입하여 작용함으로써 자신의 특별섭리를 개진합니다.

 

P357 아우구스티누스의 천지에 대한 해석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 안에 창조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교리가 담겼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는 관건입니다. 즉 우리는 그가 주장한 무로부터의 창조에 관심이 있지요.

 

P359 성서에 기록된 야훼의 창조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데미우르고스의 창조 사이에는 아주 많은 유사성이 있어서 둘을 비교해 보면 깜짝 놀랄 정도지요. 첫째 완전한 신이 여러 번 우주의 창조자아버지로 불린다는 겁니다. 둘째 창조 이전에 어떤 혼돈의 상태가 있었다는 점이에요. 셋째 세계와 인간들은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되었다는 것과 신이 그것을 기뻐했다는 겁니다.

 

P363 기독교인들은 오직 그들의 삶에서 체험하는, 막막한 절망과 간절한 소망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 손을 뻗어 해결해 주는 신의 무한한 능력과 연결 지어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해했을 뿐입니다.

 

P370 ‘불온전하게 됨’, 이것이 타락의 기독교적(또는 존재론적) 의미고, ‘다시 온전하게 만듦’, 이것이 구원의 기독교적(또는 존재론적) 함의지요.

 

P371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과 세계가 불온전하게 될 가능성, 곧 타락할 가능성을 가진 이유는 그것들이 신에 의해서창조되었으나 신으로부터가 아니라 무로부터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P372 그럼에도, 신이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무로부터 창조된 인간과 세계 역시 비록 불온전하지만 선하고 아름다우며, 그 어떤 악마적 세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는 예나 지금이나 귀하고 복됩니다. 인간은 기근, 전쟁, 질병 외에도 운명, 불안, 죽음, 허무, 무의미성, 죄책 같은 악마적인 것들에 속절없이 노출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엾은 인간적 상황에서 신과 세계의 선함은 언제나 커다란 위로와 희망을 던져주지요.

 

P373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루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하루와는 전혀 다릅니다.

 

P384 기독교는 성육신과 함께 시작했고 성육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점에서 기독교는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또 다른 종교인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완전히 갈라서지요.

 

P386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는 다바르는 비물질적성격을 지닌 데 반해,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로고스는 물질적성격을 가졌다.

 

P387 불변하는 진리인 로고스와 역동적인 다바르의 종합을 통해 신약성서에 기록된 말씀이 단순한 진리뿐 아니라 행위와도 연관된다는 사실 역시 더욱 두드러졌다는 겁니다.

 

P388 요컨데 진리를 아는 자나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가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모르면 신앙심만 아니라 실천까지 요구하는 기독교는 물론, 이념 못지않게 행동도 중요시하는 서양문명을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로고스와 다바르의 이러한 종합은 우리가 <신은 존재다>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정지적인 그리스의 존재 개념과 역동적인 히브리의 존재 개념이 종합을 이루어 영원불변하는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기독교적 신 개념이 형성된 것과 궤를 같이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불변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신의 본질과, ‘불변하는 진리인 동시에 창조하는 신의 말씀이 가진 아름다운 통일성을 찾아볼 수 있지요.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P393 신약시대에 와서도 사도 바울에 의해, 창조가 태초에 이루어진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보존하고 인도하는 신의 사역으로 재차 강조되었지요.

 

P400 일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충족적이기에 풍요성을 갖게 되었고, 그 풍요성이 급기야는 자기 바깥으로 넘쳐흘러 자연스레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22)

 

P402 루터 신학과 프로테스탄트 일반에서는 창조가 피조물과의 친교를 위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칼빈 신학과 개혁파 교회 전통에서는 창조의 목적을 신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P405 하나는 자연을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다윈이 발견한 자연 선택이라는 기계적 매커니즘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선택이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인 과정에 따라 진행될 뿐이므로 그것에는 아무런 목적도 예정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도킨스는 곧바로 무신론을 이끌어 내는데, 한마디로 세계를 창조하고 자신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이끌어 가는 신은 니체의 말처럼 죽은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지요.

 

P413 <종의 기원>은 대중적 성공을 거둘 만한 장점이 적어도 두 가지는 있어요. 하나는 내용인데 <종의 기원>이 내포하는 유물론적, 실증주의적 경향이 당시 지식인들의 취향과 맞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다윈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무신론적 경향도 한몫을 했지요. 다른 하나는 서술 방식과 관련되는데, 풍부한 사례와 뛰어난 수사학적 기법을 동원한 다윈의 표현 기법이 대중을 매혹시키는 데 충분했다는 점입니다.

 

P418 상상력이 달라지면 관념이 변하고, 관념이 변하면 세계가 달라지는 법이지요.23)

 

P421 요컨대 19세기 서양 사람들의 믿음은 자연적인 것은 사회적이기도 하다 또는 사회적이어야만 한다 - 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사회다윈주의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근원적 이유였습니다.

 

P422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의 매커니즘을 사회진보와 역사발전의 원리로 삼은 사회다윈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평등이란 실현될 수도 없고 또한 실현되어서도 안 되는 불순한개념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걸러진 우수한 개인, 계층, 계급, 국가, 인종만이 살아남는다는 자신들의 신념을 사회 전반에 강력하게 퍼뜨렸어요.

 

P424 자연 상태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치열한 생존경쟁 관계가 존재하고 그 결과 적자생존이라는 비정한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과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한 조건과 환경을 시정해 갈 수 있으며 또 부단히 그래야만 하는데, 어떤 것이 일단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나는 그것을 시정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지요.

 

P426 러시아에서 망명한 무정부주의 혁명가 포트르 크로포트킨은 나중에 <상호부조 진화론>으로 출간될 일련의 논문을 통해서 경쟁이나 이기주의가 아닌 상호부조와 이타주의를 다윈의 진화설로부터 끌어내기도 했습니다.

 

P427 “경쟁이란 동물세계에서나 인간세계에서나 진화의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동물들 사이에도 번식기 같은 극히 예외적 시기로 국한되며.. 진화의 더 나은 조건은 협동에 의한 경쟁 소멸에 의해 만들어진다.

 

일찍이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교훈했듯이 나쁜 선택에는 나쁜 결과가 따르는 법이지요.24)

 

P431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은 비록 자신의 노력에 의해 얻은 것은 아니지만 유기체 중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껴도 괜찮다.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올라갔다는 사실은 먼 미래에 더 높은 운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이 작업을 실제로 시행한 것은 다윈의 진화론을 자신의 사상 근저에 받아들여 다윈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프리드리히 니체였지요. 니체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진화한 그 새로운 인간이 바로 초인이지요. 이 일을 수행하면서 니체는 인간에 대해 다윈보다 훨씬 낮은 평가를 함으로써, 자신이 주장하는 도덕적 진화의 필수불가결성을 극대화했습니다.

 

P433 신의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오랜 교리입니다.

 

P435 19세기 유럽인들도 나날이 발전하는 산업과 과학을 통해 현세에는 물질적 삶을 충분히 즐기고,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종교생활을 통해 내세에서는 영원한 삶을 얻으면 그만이라는 세속적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è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 낙관주의에 빠져 있지 않나 싶다.

 

P436 다윈 자신은 물론이고 헉슬리 같은 당시 다윈주의들이 진화론이 반드시 무신론과 연결된다고는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현명하게도 이른바 불가지론을 내세웠습니다.

 

P439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에 대적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진화론 외에도 이신론, 인류교, 자유주의 신학, 실증주의, 유물사관 등의 부단한 도전에 지쳐 있던 19세기 후반의 교회가 약삭빠르게 진화론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지요.

 

P440 19세기 말 서양의 성직자와 신학자들은 각각 나름의 성서적 또는 신학적 근거를 들이대며 지역과 교과를 초월하여 대부분 진화론을 적극 수용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서는 그들이 다윈의 진화론과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중략) 그들의 속내는 해외선교에 있었습니다.25)

 

P443 사실상 오늘날 사려 깊은 많은 유신론자는 진화가 다윈주의 이전의 세계관이 제공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여긴다.

 

P444 호트에 의하면, 진화가 창조의 메커니즘 가운데 일부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주는 생명체가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복잡성이 증가하는 쪽으로 자기조직을 하는 본유적 경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오늘날 유행하는 복잡성 과학이 밝혀 낸 결과인데, 바로 이것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신의 속성에 합당하다는 것이지요. 진화는 이렇게 생명 없는 물질에까지 이미 널리 퍼진 자기조직이라는 신의 창조적 경향 가운데 극히 작고 거친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제세한 또 다른 근거는 가톨릭 신자 칼 라너가 주장했듯이 무한자인 신의 사랑을 유한자인 우주가 받아들이려면 진화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신이 진화가 맹목적으로, 즉 미결정적 방식으로 이뤄지도록 창조한 것도 바로 이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세계에 일정한 자유와 우연성을 허락하는 것이, 강제하는 것보다는 설득하기를 원하는 신의 사랑에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P449 신은 세계를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세계영혼(또는 성령)에게 세계를 현실화하는 질서와 과정을 부여해 그에 의해 창조가 차례로 일어나게 했다는 말이지요.

 

P451 창조가 신이 직접 그리고 일시에 실행한 사건이 아니라, 신이 창조해서 위임한 어떤 원리나 법칙을 통해 점차 이뤄졌다는 이론은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더욱 분명하고 확고한 이론으로 정립되었습니다.

 

P453 신이 직접 창조했다면 모든 것이 필연적이겠지만 신은 제2원인에 위임해서 창조하기도 했기 때문에 신의 섭리가 효력을 지속시키더라도 많은 것이 우연적이다라는 겁니다.

 

P454 자연은 신의 직접적인 통치가 아니라, 신이 창조할 때 함께 부여한 어떤 통치의 법칙, 곧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법칙들에 의해 자발적으로운영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26)

 

P456 199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마치 1893년에 교황 레오 13세가 <섭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회칙으로 갈릴레오의 지동성을 수용했듯이 진화론을 인정했습니다. 1859 11 24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후 약 140년 만의 일입니다.27)

 

신은 진화라는 매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기독교가 이미 오래전부터 확보했다는 것과, 약간의 장애물만 제거하면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P460 신학은 특정 교리를 영구불변하는 진리로 주장하는 체계라기보다는, 그것은 시대적 해석이 적절한지 또는 수용 가능한지를 늘 질문하면서 성서와 전통적 사상들을 통해 부단히 재고해 나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P466 우리가 행할 바를 하나님이 예지하시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자유의지로 무엇을 원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P467 하나님은 모든 미래사를 예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원하는 것이다.

 

P469 설령 우리가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의 행동이 자유롭다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P470 신은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전제가 아니던가요!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예지는 같은 범주,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지도 않는다는 것이지요.

 

P472 이미 주어진 저차원의 질서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고차원의 새로운 질서가 어느 순간 제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을 복잡성 과학 또는 창발이라고 부르지요.

 

P479 신의 필연성이 자연의 우연성을 창조하고 지배하며 이끌어 간다는 의미일 뿐이지요. 한마디로 필연과 우연은 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니, 신의 뜻이 곧 운명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설령 인간이 진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지요!

 

P482 불완전한 피조물이 신의 온전성에 도달하는 것, 신의 선성을 닮는 것, 구원이 창조의 목적이라는 생각은 문인들에게도 전해졌지요.

 

P482 칼 바르트도 창조를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이뤄지는 구원의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시발점으로 보았어요. 창조가 없었으면 구원 사역도 불필요했다는 게 바르트의 논리로, 그에게도 창조는 구원의 시작이요 구원은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28)

 

P483 기독교가 탄생했을 때 초기 교부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차이점을 극복하는 것이었어요. 내용으로 보자면 창조의 신과 구속의 신,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사랑과 은총이 넘치는 보편적인 하나님 사이에 놓인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본질적 간격을 해소해야 했습니다.

 

P484 우리가 창조의 나쁜 신과 구속의 좋은 신을 갖지 않기 위해, 그리하여 구약과 신약을 분리하지 않기 위해 창조의 신과 구속의 신은 하나여야 하고 창조의 목적이 곧 구속이어야 했던 것이지요.

 

4부 신은 인격적이다

 

P497 평소 세네카는 친구들에게 인간의 삶을 연회에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연회에 초대된 사람은 너무 일찍 자리를 떠나 주인을 섭섭하게 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늦게 떠나 주인에게 폐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29)

è  천상병 시인은 삶을 잠시 와 놀고 가는 소풍으로 비유했는데 삶을 연회에 비유한 것도 참으로 절묘하다. 두 가지 다 잠깐 즐기다 가는 것이니.

 

P500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로고스가 바로 항상 살아 있어서 왕의 법령이라도감히 어길 수 없는 하늘의 법, 곧 자연법입니다.

 

P503 세네카는 이렇듯 섭리를 필연적인 것, 즉 운명으로 생각했는데요, 이는 스토아 학파의 전통이기도 했습니다. 섭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분개하고 불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하는 신의 뜻이지요. 독일의 문화철학자 오슈발트 슈펭글러가 <서구의 몰락> 마지막 부분에서 인용한, 네가 동의하면 운명은 너를 인도하고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운명은 너를 강제한다”30)라는 세네카의 말도 그래서 나온 겁니다.

                                         

P503 고대철학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도사린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P504 가난을 무시해라. / 태어날 때만큼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 고통을 무시해라. / 고통은 사라지거나 너희와 함께 끝날 것이다. / 죽음을 무시해라. / 죽음은 너희의 고통을 끝내 주거나 다른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운명에 복종할 것을 권할 때, 그들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운명을 제 스스로 따름으로써 우주의 섭리인 로고스와 합일하면 존재론적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결국에는 신들보다 더 위대해진다는 것입니다.

 

P505 스토아 철학자들은 스스로 고통을 극복했기 때문에 고통을 아예 모르는 신보다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세네카는 참된 스토아 철학자는 신들 위의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죽음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을 해방시켜 신이 되게 해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지요.

 

P507 ‘인간의 이성(또는 도덕)에 의한 인간구원신의 은총에 의한 인간 구원다시 말해 스토아 철학이 기독교를 적어도 19세기까지 부단히 위협했다는 뜻입니다.

 

P512 스토아철학의 로고스 이론이 초기 기독교 교의학과 윤리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바울을 기독교에 그리스 철학을 끌어들인 원흉이자 시조로 규정하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P514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는 예수가 전한 복음에서 시작하여 그것에서 끝나는 종교지만 예수의 복음만으로 만들어진 종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P515 바울이 전한 신앙의 열매들이 비록 그리스 철학적 용어와 표현 형식이라는 그릇에 담겼다 해도, 예수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었다는 뜻이에요.

 

P516 세네카가 말하는 섭리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마치 자연법칙처럼 우리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법칙일 뿐 우리의 희망과 절망 그리고 소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와 달리 바울이 말하는 섭리의 근원은 당연히 구약성서의 계시입니다.

 

P518 요한 칼빈은 바울을 따라 섭리와 은총을 자신의 신학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P521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너나없이 신플라톤주의가 아니라 스토아 철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P522 그가 스토아 철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세상과 인간을 지배하는 초자연적 섭리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확신했다는 점이지요.

 

P524 자신의 회심이 바울처럼 극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점진적으로 일어났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P527 칼빈에서 중요한 일들은 평생동안 정작 자신의 의지와는 별 관계없이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중략)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칼빈이 자신이 그 모든 일을 수치스럽거나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저항하지 않고 신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31)

 

P528 우리는 지금까지 세네카와 바울 그리고 칼빈을 통해 인간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인간의 삶에 참여하고, 그 출생부터 죽음까지 끊임없이인도하는 신의 어떤 속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신의 그 속성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선으로 이끈다는 것도 살펴보았지요. 그들이 운명이라 했든 이라 했든 아니면 섭리라 했든,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러한 신의 속성을 신의 세게 내재성또는 인격성이라고 부릅니다.

 

신의 인격성은 종교로서 기독교를 이루는 근간이자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우리의 신의 인격적 속성을 통해서만 신을 실제로 만날 수 있는데 신에 관한 직접적인 경험 없이는, 비록 신을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종교적으로 신앙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32)

 

P529 그리스인들은 철학의 천재들이었지 종교의 천재들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최고의 존재로 파악하고 그로부터 세계와 인간 삶에 관한 모든 지혜를 계시로 받고 있을 때,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사변적 세계 안에서 신들에게 어떤 위치를 부여할 것인가를 이성으로 사고하고 있었습니다.

 

P532 자연신론에서 신은 야훼처럼 창조주이며 세계를 초월하지요. 그러나 그는 야훼와는 달리 자신이 창조한 세계와 인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세계는 오직 그가 만든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에 의해 자동으로 운행될 뿐이지요.

 

P534 세네카가 인간은 신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 때 거기에는 신의 보살핌을 믿거나 그에게 의지한다는 뜻이 전혀 담겨있지 않아요. 인간은 오직 자기 정신 안에 들어와 있는 로고스인 이성을 믿고 도덕법칙에 의지해야 하지요.

 

P537 존재 유비 신과 그 피조물이 분여에 의해 양적으로만 다를 뿐 질적으로는 같다는 전제에서 나온 매우 흥미로운 생각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존재 유비 교리에 따르면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은총에 전적으로맡겨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인간 이성에 달린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P540 세계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창조주의 영은 피조물의 세계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창조도 일종의 계시이며, 또한 이 세계는 신과 의사소통을 나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 에밀 브룬너 <자연과 은총>

 

P543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마디로 선언했듯이 신앙을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지요.33)

 

P544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다는 이야기지요.

 

P545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연이란 무엇인가?’ 혹은 세계는 어떤 근원 물질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철학적 물음에 열중할 때, 히브리 선지자들은 신이란 무엇인가?’ 또는 우리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배되는가?’하는 종교적 물음에 골몰했습니다.

 

P547 히브리인들은 야훼(YHWH)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던 이 단어는, 6세기경부터 자음 YHWH에 아도나이의 히브리어 모음인 e,o,a를 혼합한 YeHoWaH(예호와흐)로 모습을 바꿔 조심스레 사용되었지요. 그런데 1518년 교황 레오 10세의 고해신부이던 갈라티누스가 이 철자의 라틴어식 발음 표기를 Jehovah(예호바)로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Jehovah의 영어식 발음이 지호버이고 한글식 발음이 여호화인것이지요.

 

이렇듯 히브리인들은 신을 나와 너라는 인격적 입장에서 파악했지만 동시에 한없이 두렵고 어려운 상대로 인식했습니다.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P556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란 단순히 신이 피조물들에게 참여와 인도라는 원리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P559 신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입니다.

 

P560 신은 자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에만 응답하고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답이지요.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구속 받지 않는 신의 절대적 독립성이 보존되기 때문입니다.34)

 

P561 신의 섭리에 의한 강제는 선한 목적과 의도에 따른 것이어서 신의 인격성을 더 잘 드러낸다는 말이지요.

 

P562 신이 모든 일의 결과를 미리 정해 놓았다는 예정과 신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고 간다는 섭리의 구별이 쉽지 않은데요, 사실상 모든 섭리는 예정적이고 모든 예정은 섭리적입니다.

 

P563 바울은 신의 섭리가 때로는 우리를 기쁘게 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았지요. 하지만 그는 고통의 배후에는 언제나 신의 선한 목적과 뜻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P567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가르침을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지요. 그래야만 기도는 우리가 신을 조종하는 도구가 아니라 신이 우리를 조종하는 도구가 됩니다.35)

 

P571 예수가 말한 신이 더해 줄 모든 것이란 신이 보기에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이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모든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신은 오직 그의 섭리에 따라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좋은 모든 것을 더해 준다는 뜻이지요.

 

P574 결론적으로, 신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우리 삶에 항상 참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는, 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들어주지 않지요. 때때로 신은 인간의 기도 때문에 마음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마저 모든 것이 신의 섭리 안에서만 이뤄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소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기도가 힘을 발휘하는 것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내리는 것도 신이 예지한대로 된다라고 교훈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섭리가 모든 것을 다스린다라고 가르쳤으며, 또한 칼빈은 모든 사건은 신의 감추어진 뜻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라고 잘라 말했지요.

 

P575 신의 강제적 섭리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유익하다는 것이지요. 왜냐고요?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 원하던 응답을 받으면 받은 대로, 또 받지 못하면 받지 못한 대로 그 결과를 자신을 향한 신의 섭리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36)

è  정말 기독교의 교리는 참으로 용의주도하게 짜인 것 같다. 기도가 응답 받든 그렇지 않든 유익하다니 기도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인 중 아들이 큰 사고를 당해 위험한 지경까지 갔던 경우가 있었는데 그는 그때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자 섭리라고 말해 놀란 적이 있었다.

 

기도가 이루어졌든 이뤄지지 않았든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의 섭리로 확인하는 일은 기독교인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P576 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신의 섭리를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37)

 

P577 자신을 버려라. 내가 말하노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버려라. 당신이 자신을 막아라.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세운다면 당신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당신 자신으로부터 도망쳐라. 그리고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께로 가라

 

부단한 자기 체념과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신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누구든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동시에 신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38)

 

P578 구원은 오직 믿음과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성적 체념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을지 몰라도 기독교인들이 얻는 구원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자,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P582 네로의 스승이자 신하로서 그를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세네카도 키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쾌락과 불안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세네카는 네로 같은 향락주의자들은 살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죽을 줄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평했지요. 그래서 이들은 항상 삶에 대한 불안과 절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다고도 주장했습니다.  

 

P585 힘과 건강과 부와 사랑 등 욕망 속에서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비록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만으로는 필경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혹시 당신은 알고 있나요? 절망의 끝자락에서야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법임을!39)

è  박노해 길이 끝나면이란 시의 맨 뒷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최선의 끝이 찯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나 역시 바랄 수 있는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절망했다. 하지만 절망한 후에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P585 그러면 그대 속에 깃들인 경솔한 마음이 그대로 하여금, 요동치는 정신처럼 그리고 망령처럼, 그대에게는 이미 상실된 세계의 폐허 속에서 헤매는 일이 다시는 없게 할 것이다. 절망하라. 그러면 그대 정신은 결코 더 이상은 우울 속에서 신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비로 그대는 그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볼 것이지만, 다시금 그대에게는 아름다워질 것이고, 즐거운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그대의 해방된 정신은 자유의 날개로 날개 치며 솟아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P586 (심미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가 심미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생활은 더욱더 많은 것이 필요하게 되고, 그런 것들 중 가장 하찮은 것이라도 채워지지 않을 경우에 그는 죽는다. (이에 반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타개책을 갖고 있다. 일체가 그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짓누르는 폭풍우가 어둡게 그를 감싸고 있어서 그의 이웃들마저 그를 볼 수 없을 때라도 그는 파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꽉 붙들 수 있는 한 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은 그의 자기인 것이다.40)

 

 

P591 윤리적 단계에서 일어나는 뉘우침은 내면에서 울리는 이성의 소리에 따르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뉘우침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 탓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죄의식으로 이어지며, 여기서 오는 절망은 <심미적 단계>에서 겪는 절망보다 더 처절하고 깊을 수밖에 없지요.

 

P593 인간은 오직 뉘우침과 죄의식이라는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게 되며, 그제야 비로소 신을 발견하게 되고,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헌신하는 <종교적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41)

è  나의 오만함과 세속적 욕망에 대해 뉘우침과 나니 그제야 신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 생각하니 마음의 평화가 나를 찾아왔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 단계>인가 보다.

 

P596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부조리는 세계와 그 안에서의 살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을 뜻하지요. 그런데 바로 이 이해할 수 없음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불안이 들어 있습니다.

 

P608 크르케고르에게 종교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는 겉치레로 살지 말라!”라고 외쳤지요.

 

아브라함에서 보듯이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속에서만 무한한 자기 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바로 이것!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이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42)

 

P609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격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세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그 모든 것에 부단히 참여하고 부단히 인도한다는 뜻에서 인격적이지요. 그렇지만 신은 오직 자신의 섭리대로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궁극적 선을 이루지요. 여기에는 어떤 타협이나 침해도 없습니다. 이것이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의 기독교적 의미지요.

 

5부 신은 유일자다

 

P618 플로티노스의 생각에는, 시간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태양의 회전 운동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시간을 만들어 내지요. 마음이 없으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습ㄴ디ㅏ. 시간은 마음 안에 있고 마음과 하나지요. 그러므로 항상 흘러가는 것 같지만 전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시간입니다.

 

P621 기독교인이 신은 유일하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뜻을 단순히 독선적 종교의 오만한 선포나 배타적 종교관에서 나온 말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è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의 유일성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을까 싶다.

 

P622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해악이 유일신 신앙에서 나온 배타성이며, 바로 그 때문에 전 세계에서 참혹한 분쟁과 테러가 그치질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여전히 많으니까요.

 

P623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곧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원이라는 전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지요.

 

 

8장 일자란 무엇인가

 

P630 일자란 그 정의상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규정하면 더는 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만일 누구든 일자가 선이다라고 정의하면 일자는 곧바로 선이 아닌 것으로 나뉘어 둘 중 하나로 머물기 때문에 더는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가 아니게 되지요.

 

P631 플라톤은 선자체의 속성을 일자의 속성과 동일하게 정의함으로써 선자체를 일자와 동일하게 만든 것입니다.

 

P633 플라톤은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신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 본질은 선이라고 주장했지요.

 

P634 한마디로 신은 악한 게 아니라 선하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마음 편히 살다가 죽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P635 플라톤 사상을 기반으로 세계와 인간의 삶에 본래적으로 선한 신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스토아 철학의 자연법 사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이후 로마에 들어가 로마법의 기초가 되었고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깊이 침투해 기독교 윤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요.

 

P636 플라톤 철학의 진짜 목적은 천상세계로의 초월이 아니라 지상세계에서의 승화였던 것이지요.

 

P637 플라톤은 자신의 사유를 일자라는 더없이 높고 신비스러운 영역으로 끌어올렸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자를 선자체라고 정의함으로써 곧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의 영역으로 발길을 되돌린 것입니다.

 

P639 플라톤이 깊은 종교적 통찰력을 지닌 철학자였다면 플로티노스는 깊은 철학적 통찰력을 지닌 종교인이었습니다.

 

P641 일자에 대한 이런 사유가 기독교 사상 안에서 삼위일체 신의 제일위인 성부로 발전했다는 사실입니다. 플로티노스가 신적 존재로 구분한 일자, 정신, 영혼이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령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P643 플로티노스의 일자에는 정신과 영혼이 순차적으로 유출되었고 이것이 각각 분리된 채 하나의 자립체로 존재하기는 해도 어쨌튼 일자에 종속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에서 나타난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은 태초부터 동시에 하나로 존재하며 분리되지도 않고 서로 동등하지요.

 

P649 신은 하나인데 마치 한 배우가 여러 역할을 하듯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가지 역할을 한다는 향상적 군주신론이 바로 그랬지요.

 

P655 알렉산드리와 카르타고 같은 북아프리카 도시들이 초기 서방 기독교 사상의 온상이 된 이유이자, “라틴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테르툴리아누스나 기독교 신학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인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인이 아닌 북아프리카인인 까닭입니다.

 

P656 안디옥파를 중심으로 한 초기 동방 기독교 사상가들이 대부분 회심한 사변적 철학자인데 반해, 아프리카 학파 사상가들은 대개 법률가나 수사학자인 건 그 때문입니다.

 

P659 삼위 일체,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말은 신이 바깥으로 나타난 위격으로는 셋(성부, 성자, 성령)이지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권능(사고, 의지, 행동)에서는 하나라는 뜻이지요.43)

 

P663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므로 육체가 파괴될 때 비로소 영혼도 해방된다는 당시 교부들의 신플라톤주의적 가르침을 굳게 믿었던 것이지요.

 

P666 우리를 그들을 미워하기보다 동정해야 한다. 그들을 저주하기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미움이나 저주가 아닌 복을 끼치기 위해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 오리게네스

 

P669 플라톤주의 사상들의 공통 특징은 플라톤 사상을 바탕으로 하되, 당대 사람들의 종교적 관심과 요구들을 대폭 수용한 탓에 신비주의 경향을 띤다는 것이지요.

 

P672 오리게네스에게 성부는 플라톤의 선자체, 알비누스의 제일신, 플로티노스의 일자와 동일하고, 성자인 말씀은 플라톤의 창조주,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정신에 해당하며, 성령은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영혼과 같은 것이지요.

 

P673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는 일반 신자들은 물론이고 신학자들까지 성부삼위일체 신의 제일위로 인식하기 보다는 만유의 창조주인 야훼로 인식했다는 점이지요.

 

P675 기독교 교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구분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동등해야 하는데 플라톤주의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차등적이며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677 칼빈은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모사요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을 관장하시는 분이다.”라고 교훈했습니다.

 

P682 아들이 구세주고,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곧 신이다.

 

P684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의 종교 문제 자문관이기도 한 코르도바의 감독 호시우스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본질이라는 뜻인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신조에 안에 넣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P686 니케아 신조의 핵심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 곧 일자 = 창조주라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동등성 등식이었습니다. (중략)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예수의 신성성을 명백히 인정하는 것이었고, 사상사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신학이 그리스 철학을 비로소 극복한 계기가 되었지요.

 

P687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완전히 등을 돌리며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갈라선 것은 1054년이었지요. (중략) 이렇듯 유례없는 혼란 가운데 동방교회에서는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가이사랴 감독 바실리우스, 니세누스 감독 그레고리우스, 콘스탄티노플 대주고 나지안제누스의 그레고리우스), 서방교회에서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아우구스티누스가 나왔습니다.

 

P697 철학은 언어가 우리의 지성을 사로잡는 것에 맞서는 투쟁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P703 우시아는 플라톤적 의미에서 본질, 히포스타시스는 플로티노스적 의미에서 실체’, 본체로 확정하여 신은 세 본체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고 명백히 선포했지요.

 

P710 기독교 사상사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진리를 언제나 좌로도 치우치지 않고 우로도 기울지 않는 황금의 중간길에서 찾곤 했습니다.

 

P712 그 둘은 마치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아버지에 대해 아들로, 아들에 대해 아버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뜻입니ㅏㄷ.

 

P713 이미 존재하고 있는 존재는 또 다시 낳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고 할 바로 그때까지는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옳다.

 

P715 모든 존재물이 그 안에서 생성, 소멸하는 무한한 바다가 곧 성부(일자)이고, 그 바다에서 무수한 존재물들을 생성, 소멸하게 하는 법칙이 곧 성자(정신)이며,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되게 작용하는 그 바다의 의지가 바로 성령(영혼)이다.

 

 

P718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의 삼위일체적 본성에서 사랑(성령)에 의한 동등한 사귐과 교제로서의 인간 공동체 원형을 발견하고 주장했다는 사실이지요.44)

 

P719 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이 곧 신의 본질인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본받으라는 계명을 받았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P720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을 사랑, 선물, 친교로 파악했고, 우리도 성령에 의해 서로 간의 친교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신과도 친교를 이룰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이 얼마나 보배로운 사유인가요! 우리는 이 같은 사유의 가치를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진리가 단지 교훈으로 선포된 종교가 아니라 성육신을 통해 행위로 실천된 종교이기 때문이지요.

 

진리는 말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 기독교를 통해 서양문명 안에 잠재되어 부단히 내려오는 바로 이 고귀한 사유를 감안할 때, 우리가 삼위일체의 내용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지침이 되느냐 하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일을 한 겁니다.

 

P725 몰트만에 의하면, 삼위가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 안에서완전한 통일성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삼위를 하나로 묶는 이 사람은 단순히 자신과 동일한 것만 받아들이는 동종사랑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서 이질적이고 다양한 것까지 받아들이고 포괄하는 이종사랑이라는 겁니다.

 

에로스란 대상이 가진 무엇(예컨데 참됨, 선함, 아름다움, 부귀, 권력 등)때문에 그 대상과 합일하여 동일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구지요. 따라서 보통 때문에 하는 사랑 또는 인간적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동일한 하나가 되기 위한 강제가 크든 적든 들어있게 마련인데 몰트만이 말하는 동종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요. 하지만 아가페는 서로 이질적인데도 불구하고 통일적 하나 됨을 이루려는 욕구입니다. 따라서 흔히 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 또는 신적 사랑이라고 하지요. 여기에는 서로 다른 것이 어울려 통일을 이루는 조화만 있을 뿐 합일을 위한 강제는 그 어떤 것도 없는데요, 몰트만이 말하는 이종사랑이 바로 이런 겁니다.  

 

P731 한마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라는 말인데요.

 

P732 따라서 누구든 신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 말이 신의 이름으로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45)

è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밥퍼 공동체의 최일도 목사님 같은 경우 더불어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시고 계시지만.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P737 애초 마르시온은 구약의 신을 악의 신이라 부르고 신약의 신을 선의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영지주의자 케르도의 영향을 받아 공의의 신사랑의 신으로 고쳐 불렸지만, 여전히 구약의 신을 율법의 신이라며 거부한 채 신약의 신만을 복음의 신으로서 받아들였지요.

 

P739 기독교가 구약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일신 사상을 계승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안에 있는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폭력적인 요소는 모두 걷어 냈지요. 이 일은 누가 했을까요? 놀랍게도 그건 예수와 사도 바울이 직접 나서서 그 당시에 이미 한 일이지요.

 

P741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이고요,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46) 그것이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지요.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하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발생하여,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신앙적인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P742 최선인 것의 부패는 최악이다.

 

P748 이스라엘의 역사 흐름에 따라 야훼가 감정이 격한 절대적 폭군에서, 스스로 세운 계약에 충실한 입헌군주를 거쳐, 사랑이 넘치는 민주적 지도자의 모습으로 변모해 갔던 것은 신이 그렇게 변해서가 아니라 히브리인들이 신을 그런 식으로 경험했다는 말일 뿐이지요.

 

P753 존재이자 창조주인 신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신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47)

è  신의 모습, 태도, 의미, 역할 등이 인간정신과 문화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있는 것 같다. 

 

P769 선재적 그리스도론을 통해 예수와 복음을 몰랐던 유대교인들이나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구원이 허락된다는 포용성을 보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유일신의 종교인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과 폭력성을 실천적으로 극복한 고대적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P769 이 같은 주장을 바탕으로 가톨릭교회는 1965년에 개최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할지라도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선포했지요.48)

è  처음 듣는 말이다. 그렇다면 교회에 가지 않아도 착하게 살면 구원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P781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이끌고,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낳으며,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세계 평화를 이룬다는 말이지요. 이는 신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며,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다라는 내가 이 책에서 기본 강령으로 삼은 것과 깊숙이 연관된 문제의식입니다.

 

P799 이 같은 자기 성찰을 문명의 자기 파괴적 잠재력이 상존하는 위험사회에서 피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유동하는 공포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우리가 이 같은 자기 성찰을 얼마나 철저하게 또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을 겁니다.

 

P782 기독교도 이제 세계 평화와 인류 공존을 위해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그 방안을 실천하는데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P783 신의 유일성에 대하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이해와 교회의 전향적 선포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P790 신을 거역하는 독선적이고 탐욕적이며 배타적인 성직자와 교인들아! 너희는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신의 가혹한 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에게 밝혔듯이 신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아끼기 때문이다.

 

P799 스스로 만든 악마적 이데올로기에 빠져 이 같은 기만을 일삼는 사람들은 한 번쯤 시스티나 성당에 가 보는 게 좋습니다. 위대하고 장엄한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을 바라보고 미켈란젤로가 그 곳에 남긴 메시지들을 곰곰히 생각하며 스스로를 반성해 보아야겠지요. (중략) 우리가 이 같은 자기 성찰을 얼마나 철저하게 또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을 겁니다.

 

P800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본질공동체적, 영원동등적이고, 몰트만의 표현을 따르자면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사랑이 그 본질이지요. 여기에는 서로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적 하나-을 이루는 이종사랑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배타성이나 폭력성도 침투할 수 없습니다.

 

P802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49) - 세네카

 

P803 근대 이후 서양문명은 애석하게도 신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역사를 맞고 있습니다. 이제 신은 사회제도에서도, 관습에서도, 생활규범에서도, 학문에서도, 또한 문학, 미술, 조각, 건축, 음악, 공연 같은 예술로부터도 점차 분리되어 잊혀 가고 있지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서양문명을 위기도 몰아가는 주된 원인입니다.

 

P803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최고의 가치의 탈가치화는 동시에 세속적 가치들의 탈가치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불 보듯 뻔하게 드러내 보였지요.

 

P805 문제는 우리가 큰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 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부와 혁명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것이라며 입을 닫고 있지요. 그리고 오직 탈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과 세계의 역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 주며, 우리를 위협하는 다양한 공포로부터 방어막이 되어 주던 모든 것이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è  위키백과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이 약 1300만명(개신교 810, 천주교 510만명)이 넘는다. 우리나라 인구 4명 중 1명이 기독교인인데 우리가 신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P806 세계는 이제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적, 사회적 재난들이 삽시에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위험사회로 진입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지요. 그곳에서 이제 당신과 나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로서 모든 당혹스러운 일을 해결해야 할 책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자고로 모든 위험한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지요.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신념입니다.50)

è  일본 지진 사태를 보면서 정말 지구가 위험사회임을 실감했다. 남편은 미국회사에 다니는데 본사의 임원이 일본의 원전 폭발로 한국 출장의 유보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바람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불 경우 한국에 있으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구촌 전체가 하나의 위험사회니 모두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P808 내 생각에 이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요컨대 작은 이야기들도 하되, 큰 이야기도 함께 하자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큰 이야기가 동반되는 폭력성도 차단되고, 작은 이야기가 가진 맹목성도 제거되지요. 칸트의 유명한 경구를 흉내 내어 표현하자면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기 때문입니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게 하자는 거지요.

 

P809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기독교 교회가 첫째 신사랑과 셋째 이웃 사랑만을 교훈하는 이유는 우리가 둘째인 자기사랑과 넷째인 물질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두 가지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입니다. 이 네가지 사랑이 모두 합해져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가 말하는 온전한 사랑안에서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이 신 사랑과 이웃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하고, 신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의 맹목성을 바로잡아 줍니다.

 

P809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함께함으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온전한 담론이 되게 하자는 것이지요.

 

P810 이제 우리도 새 길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의 인문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3.    내가 저자라면

 

저자를 두 번이나 만났고 그에 대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이 책을 다시 읽고 있으니 그가 내 옆에서 조곤조곤 설명을 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글도 술술 읽힌다. 중간중간 보이는 시와 그림들이 산 등성이에서의 잠깐의 휴식처럼 청량하다. ‘궁금하지요? 그 이유를 알아볼까요?’하는 그의 말투도 정겹다. 논리의 전개 방식이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나 보다. ‘기독교의 신을 주제로 이렇게 방대한 량의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니다. 러셀의 저작을 읽고 나니 저자가 얼마나 쉬운 말로 철학을 논하고 있는지 알겠다. 듀랜트의 문장도 위트와 촌철살인의 묘미가 있긴 하지만 그처럼 평이하지는 않다.

 

이 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최상이다. 다른 책에서 수없이 찾아낸 오탈자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오자를 단 한 개 찾았다.) 주석이 각 페이지 하단에 정리되어 있어 찾아보기 편하다. 뒤 편에 참고문헌과 찾아보기도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기독교에 대한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신의 존재도 알겠고,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유일신의 개념을 처음으로 알았고 과학과 종교에서 우주의 창조에 대해서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왜 교회에 다녀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가톨릭 교회에서도 성실하고 양심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에게 끊임없이 전도의 손길을 뻗는 그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다.

 

내가 저자라면 그처럼 하나의 주제로 각 시대의 철학자들이 어떤 주장을 펼쳤는지를 알아보고 싶다. ‘경쟁인정이라는 주제로 철학자들의 사상을 찾아보고 있는데 생각보다 잘 보이지 않는다. 더욱 후벼 파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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