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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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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0일 06시 0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1 페이지)

역사는 과거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으로 변하지 않는다. 미래는 변화 가능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지만, 지나간 역사는 그렇지 않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누군가 그것을 바꾸지 않는 한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달라질 수 없는 과거인 역사가 그것을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의 역사의식, 시대상황, 기술방식, 성향 등에 따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서의 역사는 항상 그 자리에 그렇게 있는 데, 그것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게 역사라고 보면, 역사란 끊임없이 새로운 옷을 입는 그 무엇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일연은 우리 역사에 새 옷을 입힌 사람이다.


일연은 중국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틀을 벗어나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선각자이다. 이러한 일연의 역사의식은 13세기 중반 몽고와의 전쟁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고려왕조에는 말기적 증상이 나타나는 등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고려사회 지도자로서의 각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삼국유사에 단군신화를 수록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뿌리에 대해서 알게 하고 민족적 주체성을 갖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또한 많은 신화와 설화 및 향가 14수를 기록하여 남기는 등 삼국유사를 우리나라 고대 문학의 보고로 만들었다.

삼국유사의 「기이」편 서문 첫 대목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대체로 옛 성인들이, 예악(禮樂)을 가지고 나라를 일으키거나 인의(仁義)를 가지고 가르침을 베풀고자 할 때면, 괴이한 힘이나 자자분한 귀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나려 할 때에, 부명(符命)을 맞는다든지 도록(圖籙)을 받는다든지, 반드시 남과는 다른 것이 나타난 다음 큰 변화를 타고 큰 틀을 잡아 나라를 일으킨다.”

이 문장은 중국에서 비롯된 삼국사기의 기술 태도를 이야기 하면서, 그 같은 생각을 가진 중국도 새로운 나라가 서는 등 중차대한 사건 앞에서는 기이한 현상을 내세워 새로운 질서를 합리화 하는데 활용한다는 내용을 말함으로써 우리나라 시조의 출발이 중국과 다르지 않음을 주장한다.


일연은 1206년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성은 김씨, 본명은 견명, 불교 이름은 회연이었으나 만년에 일연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의 손에서 키워졌으며, 열네 살 되던 해 설악산 진전사에서 삭발하고 스님이 된다. 스물두 살에 승과에 합격하였고, 마흔네 살에 정림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왕명을 받들어 불교 행사를 주관하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남아 유일하게 전하는 불교관계 저서 『중편조동오위』를 찬술하기도 한다. 1281년 78세에 국사로 책봉되어 명실상부한 고려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다. 1289년 8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편안함이나 위험이 어떤 날에는 서로 기대는 친구가 되고, 즐거움이나 고통이 닥치거든 두루 맛보아야 하는 것. << 손문 >>[1]

혁명가는, 그 스스로 안위와 감고의 거친 세월 속에서, 도리어 피와 살이 되는 어떤 기제(機制)를 찾아 뒷사람에게 남겨 주었던 것 같다. 나는 그 틀에 기대어 ‘삼국유사 읽기’의 한 방법을 여기 내놓는 것인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조심스레 묻는다.[2]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논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의 분명한 차이가 사(史)와 사(事)에 있다는 점.[3]

세계관의 변화는 곧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역사 기술은 이쯤 와서 힘을 잃게 된다.[4]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5]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12]

상징으로 그리는 역사를 옳게 읽자면 독자는 상상력을 써야 한다.[14]

2,000년 전쯤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웠다.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는데, 요 임금과 같은 때이다.[14]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23]

무당의 탄생 내력을 담은 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와 사촌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에서 연유한다. 삼국의 건국 신화 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신화(巫祖神話)나, 민간 전승의 신모 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곧 거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68]

신라 불교가 토착적인 신앙과 만나는 장면은 앞으로 자주 소개되겠지만, 그것이 곧 왕실과 국가의 안정에 기여한다는 호국불교로까지 발전하는 모습을 눈여겨볼 만하다.[68]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78]

탈해가 일본과 우호조약을 맺는 것은 그들로부터 침략의 위험을 해소하고 자신의 후원자를 얻는 이중의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83]

즐거운 상상력에 민족적 쇼비니즘이 끼어들면 곤란하다. 이런 주장들이 대체적으로 처음에는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찾는다는 그럴듯하면서 거창한 명제 아래 시작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 있는 역사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92]

우리가 아득한 옛 역사를 말하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너무 긴장한다면 결론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기 쉽다. 프로레슬링을 진짜 격투기라고 생각한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은 재미요 남은 것은 공허감이지 않았던가? 역사 또한 그래서는 안 된다.[92]

승려 생활을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행각(雲水行脚)이라고 한다.[96]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과 별 곧 일원성신(日月星辰)이다. 고대 삶의 모습을 지금까지 충실히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고대인이 지녔을 사유방식의 틀을 읽는다.[97]

일관이 이르기를 ‘일월지정(日月之精)’이라 했다. ‘정’ 을 편의상 ‘정령’이라 번역했는데, 이 의미에 주목해 보자. 해와 달은 빛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 없듯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면 쓸모없는 물건이 된다. 그러나 빛이 있다고 다 보는가? ‘눈 뜬 소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본다는 것은 그 정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을 해와 달로 볼 수 있는 그 정령이었다. 연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령이었다.[98]

사람이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 바뀐 이 같은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곰이 사람으로 바뀌는 단군 신화에서 시작하여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바뀌는 김현(金現)의 전설까지 다양하게 퍼져 있지만,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을 사람으로 설정한 데서 아름다움은 극치를 달린다.[101]

문득 그 정령은 먼 다른 나라로 갔다. 그런데 정령의 존재를 알고 서둘러 따라온 신라 사람들을 우리의 아리따운 정령들은 맨손 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런 것이 우리 설화의 기본적인 구조다. 그리고 그것은 누천 년을 이 땅에 자리잡고 살아온 우리네 사람들의 심성이기도 하다.[102]

우리는 앞서 연오랑이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 된 기사를 읽었다. 일연은 거기에 주석을 달아 변방의 작은 나라의 왕일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 일본열도에 단일 국가로서 고대 왕조가 성립된 때를 대개 4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그 이전은 각 지역마다 작은 부족으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삼국사기』와 같은 우리 쪽 역사서는 이들을 통칭하여 왜라고 불렀던 것 같다. 신라를 괴롭혔던 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왜는 친교를 하고, 어떤 왜는 침공을 했다.[107]

실성왕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일연의 기술에서 그것은 더 명료해진다. 참는 데도 한도가 있는, 그래서 쌓이고 쌓인 감정의 폭발이라고나 할까,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110]

“저는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보고,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쉽고 어려움을 따진 다음에 행한다면 충성을 다한다 하지 못할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을 가린 다음에 움직인다면 용맹스럽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저는 비록 불초한 몸이오나 명령을 받들면 행하겠습니다.” << 박제상 >>[111]

“차라리 신라 땅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차라리 신라 땅에서 갖은 매를 맞을지언정 왜나라의 벼슬은 받지 않겠노라.” << 박제상 >>[115]

전쟁은 적개심을 필요로 한다. (중략)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 적절한 감이었을 것이다.[119]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된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 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120]

아무리 귀신인들 그들이 곧 사람을 이롭게 하는 존재로 그려진 이상 그다지 두려울 일은 없다. 신라 사람들에게 귀신은 그렇게 다가왔다.[131]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134]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140]

한 사상, 더욱이 종교가 한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필요한 절대 시간을 계산하기 어렵지만, 민간에 퍼져 있는 초보적 종교 형태의 전통과 힘이 강했던 것이 신라이기에, 다른 두 나라에 비하면 어려움은 이중으로 겹쳐 있었다.[141]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 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本地垂迹) 또는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바탕이었다.[144]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64억 7,000만 년 뒤에 오신다는 부처님이 미륵이다.[147]

첫째,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할 것이요, 둘째, 부모를 섬기되 효성스럽게 할 것이요, 셋째, 친구와 사귀되 믿음으로 할 것이요,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는 일이 없을 것이요, 다섯째, 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할 것이다.[152]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거기 향기가 나지 않음을 알지요. 이는 곧 당나라 황제께서 내가 배우자 없이 지냄을 놀린 것입니다.”[158]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삼키자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하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 땅을 지켜 낸 사람이다.[179]

그러나 일연은 다르다. 절이며 피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는 떳떳이 쓰고 있다. 일연도 정말로 믿지 못할 구석이 없기야 했겠는가? 다만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다.[187]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일연은 마지막에 이렇게 첨가한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189]

『삼국유사』에서 토사구팽의 첫 비극적 주인공은 뜻밖에도 김유신이다.[196]

김유신의 경우처럼 사후약방문에 불과할 뿐이다. 이미 사회에 흐르는 분위기는 저만치 먼저 가고 있고, 조정의 권력자 또한 그것을 암암리에 조장하면서, 슬슬 여론의 눈치나 보려는 계산된 엄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212]

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212]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신문왕에서 출발한 출궁 사건은 중간에 일찍 죽은 효소왕과 효성왕을 제외하고 3대에 걸쳐 내리 일어났다.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 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219]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226]

너무 아름다운 여자와 살아도 억울하다. 아름다운 이의 자태는 언제나 ‘눈 도둑’들에게 노출되어 있어서, 훔쳐가도 잃은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감춰 놓고 있겠는가? 훔쳐간들 닳지 않는 것이라면 적선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228]

「구지가」로부터 「해가」가지 사이에는 이미 700여 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듯 긴 세월을 두고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불리는 노래가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구지가」의 시대에 이 노래는 신이 중심인 신화에 속한 신가(神歌)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삶 속에 노래가 자리한다. 전체적인 틀을 유지하면서도 700년의 세월이 가져다 준 주목할 만한 변화다.[229]

경주에서 출발한 순정공과 수로부인 일행은 분명 이 길을 따라 강릉으로 가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 철쭉꽃 핀 병풍 같은 벼랑은 어디였을까? 용에게 잡혀 갔다 태연히 나와 용궁 자랑을 늘어놓던 데는 어디였을까? 정동진에서 강릉으로 들어오는 바닷가 마을 어디쯤일까? 수로부인은 한 번 산 쪽으로 눈을 돌려 꽃을 보았고, 한 번 바다쪽으로 눈을 돌려 용궁을 보았다.[233]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경문왕>[267]

일연은 사건의 기록보다는 ‘이른 눈’이라는 이상 징후를 통해 한 사회의 종언을 증언하고 있다.[272]

서울의 밝은 달밤 /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 둘은 누구인가
본디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아 감을 어찌하리 < 처용가 > [281]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그것이 『삼국유사』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를 무슨 신나는 일이라고 장황히 적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기미(機微)를 보아 사리(事理)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286]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도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287]

부처님을 바라보고 절을 하면 저절로 바위가 따뜻해진다는 이야기는 읽는 이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 우리가 온돌 문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나올 법한 원형이 숨어있다. 물론 바위를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는 민간의 풍속과도 연결된다.[314]

일본 특히 왕실의 뿌리가 한반도라고 해서,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한다거나, 한국이 종주국이라고 하는 따위의 생각은 참으로 난센스다. 한반도니 일본열도니 하는 말은 모두 후세가 만들어 낸 관념이다. 그들은 먹고살기 좋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던 당대의 생활인일 뿐이다. 그 무렵 사람이 지금 살아온다면 그는 한반도라는 말도 일본열도라는 말도 모를 것이다.[315]

200명도 채 안 되는 집권층이라며, 탁월한 문화를 지닌 소수가 가서 단번에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소수가 바로 백제계였다.[324]

수도를 교토로 옮기면서 헤이안(平安)문화를 열었던 환무왕도 백제계였다고 한다. 첫 막부(幕府) 카마쿠라를 만들고 쇼군(將軍)이 된 이도 백제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을 이제 모두 일본인이라 말하지 백제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326]

우리는, 일연이 백제의 이야기 몇 편을 인색하게 배정하면서 하필 서동을 택하고 그가 곧 무왕이 되었다고 말하는, 이야기 속의 서동보다 더 맹랑한 행동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도대체 역사적 사실과 하나도 맞지 않는 이야기를 짐짓 진지하게 마치 진짜처럼 올려놓은 그의 의도를 알아 맞추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기야 엉뚱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진짜처럼 들러댄 게 어디 이 하나 뿐인가? 정말이지 서동만큼 맹랑한 사람은 일연 당신이다. 그러기에 그 눈으로 서동 같은 인물이 보였을 것이다.[328]

가엾은 완산 아이가 / 아비를 잃고 눈물 흘리네.
이 노래에서 ‘가엾은 완산 아이’가 뜻하는 바는 참으로 여로가지다. 앞서 견훤을 가운데 둔 3대의 불화를 서술했지만, 완산 아이는 받아들이기에 따라 견훤일 수도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나 아들 신검 아니면 죽은 아들 금강일 수도 있다. 부자간에 벌어진 반역의 마당에 거기 가엽지 않을 이 누구이겠는가?[360]

『삼국사기』에서의 가야 누락은 엉뚱한 문제를 일으켰다. 이른바 일본의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다.
물론 왜인들이 들락날락 했을 가능성 또한 충분히 있다. 완충지의 치안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으로 식민지 운운은 난센스다. 제 땅에 아직 제대로 된 나라도 갖추지 못하던 때에 무슨 식민지 경영이란 말이냐? 사료가 부족한 쪽만 억울할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김부식이 원망스러운 것이고, 일연에게 감사하는 것이다.[384]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 경이로운 사건을 두고, 정작 승려인 일연 자신은 『삼국사기』의 기록만 옮겨 놓기가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여기서 찬을 생각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삼국사기』가 전해 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실 이상의 것이란 물론 상상이다. 그러기에 시의 형식을 택했다. 그러나 상상은 시간이라든가 구조라든가 어떤 기제(機制)에 실릴 경우 사실 이상의 사실이 된다. 한 덩어리의 이야기는 사실 이상의 사실이 넘어간 그 어디쯤에서 완성된다. 이런 생각을 『삼국유사』 전체로 확대시켜도 좋다.[392]

하루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곤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어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417]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出家)의 보살이라 한다.[440]

무릇 의자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모모가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런데서 오는 게 아닐까?[454]

“마음이 찾아갈 정처(定處)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化身), 누구도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헌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458]

일연은 이 말 끝에다 “해가 질 때 오나라를 떠났는데, 이 곳에 이른 것이 겨우 밤 일곱 시쯤이었다”고 덧붙였다. 믿거나 말거나 하자면 황당한 이야기일지언정, 그 속에 숨은 절절함마저 앗아가지 못한다.[462]

불성(佛性)은 대체로 마음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법이다. 그 불성은 어떤 지식보다 나으며, 때로 기적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니...[469]

일연에게서 평생의 화두를 하나 들자면 어머니다.[469]

굴정현의 관청 북쪽에 있는 우물가에 이르자, 매가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안에 있는데 온통 핏빛이었다. 꿩은 두 날개를 펼쳐 두 마리 새끼를 감싸안고 있었다. 매도 불쌍히 여기는지 잡지 않는 모양이다.[470]

나는 이 대목이 모두 놀라웠다. 한낱 짐승으로도 자비를 아는 짐승이며, 욕심을 내자면 한없을 인간으로도 깨우침의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 어우러진 장면 장면들이다. 꿩이나 그 새끼 몇 마리를 살렸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살린 어떤 매커니즘이 중요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그런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다.[470]

20세기가 저물어 가는 2000년 가을, 중동 예루살렘에서는 피비린내 나느 싸움이 다시 벌어졌다. 그 현장을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에 눈길이 머물렀던 사람들은 날아오는 총탄에 두려워 떨고 있는 한 소년과 소년을 지키려고 온몸으로 막고 있는 아버지, 그러나 사격을 중지해 달라는 아버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결국 배에 총을 맞고 아버지의 품에서 숨져가는 소년을 보았을 것이다.
그 두려운 눈빛을 보고도 총을 쏜 자들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정작 누가 총을 쏘았는지 서로가 책임을 전가했지만, 양쪽 모두 열렬히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토록 매몰찬 짓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471]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이다. 나는 이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 명칭하였다.[497]

처녀가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이야기는 『신약성서』 만의 독점물이 아니다.[499]

한단지몽(邯鄲之夢), 중국의 한단이라는 동네에서 나온 이야기다. 밥이 끓는 솥단지 앞에서 따뜻한 불을 쬐다 잠깐 잠이 든 사이, 온갖 영화와 패배를 맛보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밥이 되어 있었다는데, 한 세상 사는 영고성쇠(榮枯盛衰)가 한솥밥 끓는 사이에 불과하더라는 이 절묘한 비유.[505]

내용으로 들어가면 사정은 더 확연히 드러난다. 참고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죄다 동원했다는 느낌, 인용과 자기 기술간의 매끄러운 연결 등은 다른 편에서 볼 수 없는 점이다. 『삼국유사』가 문장이 난삽한데다 바르지도 않다는 비판은 「의해」편에서만큼 일단 유보되어야 할 일이다.[513]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은 사람’이라고.[530]

속과 성의 경계를 마음대로 드나들고자 했던 원효도 요석공주와의 사랑이며 설총을 낳은 일에 초연할 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否定)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극복되는 처월의 단계다.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537]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537]

솥 안의 국 맛은 한 점 고기로도 충분한 것이다.[564]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동이라 했다.[604]

크건 작건 실천의 문제다. 이론으로 받아들인 철학을 넘어 생활 속에서 움직이는 실천 원리로 불교가 신라 사회에 자리 잡혔음을, 우리는 이 같은 짤막한 삽화에서 읽을 수 있다.[623]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633]

산속에서 세 오빠 악한 짓 견딜 수 없어
꽃다운 잎에선 대신 죽겠노라 한마디
의리의 소중함 몇가지로 들어 죽음도 가벼이
수풀 아래서 몸을 내놓았네, 떨어지는 꽃처럼. <처녀 호랑이와 김현 이야기> [644]

정작 큰 스승들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순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까. 유독 진신과의 만남을 중요시여기는 불교에서 그 만남은 곧 진리의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겠는데,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656]

문제가 생길 때는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듯이, 성인의 가르침도 소용없는 절망의 순간이 온다. 지금 우리 시대의 풍속은 거기서 얼마나 멀까? 성인조차 나타나지 않는,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으로 경계 삼을 사표를 세울까?[670]

공자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드러나고, 없으면 숨는다”고 말했다.[672]

시는 현세의 문제 속에 있으면서, 현세에 안주하지 않는 초월성을 가진다.[710]

열어제치자
벗어나는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간 자리에
백사장 펼진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 겹쳐져라
일오천 자갈벌
낭이 지니시오던
마음의 끝을 쫓노라
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못 덮을 화랑이여 충담사 <찬기파랑가> [711]

우리가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것은 무신 정권기와 몽고 전란기를 헤쳐가면서 그가 보여준 삶의 궤적 때문이다. 비록 작은 나라로 힘없는 자의 설움을 당하면서도, 그는 민족의 자존을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다. 그것을 그는 불교적 인식 세계에서 불국토(佛國土) 사상으로 이었으며, 만년에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에 거처하면서 정리한 『삼국유사』에 여실히 표현해 놓았다.[728]

내외적으로 불어닥쳤던 거대한 변화의 조류는 필연적으로 전통적 사고방식의 해체를 가져왔는데, 『삼국유사』는 그같이 변화된 모습을 담는 그릇이었다.[734]

대체로 옛 성인들이, 예악(禮樂)을 가지고 나라를 일으키거나 인의(仁義)를 가지고 가르침을 베풀고자 할 때면, 괴이한 힘이나 자자분한 귀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나려 할 때에, 부명(符命)을 맞는다든지 도록(圖籙)을 받는다든지, 반드시 남과는 다른 것이 나타난 다음 큰 변화를 타고 큰 틀을 잡아 나라를 일으킨다.[736]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데 직접적인 촉발은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마련한 것이었다. 『삼국유사』보다 한 세기 앞서 중국 중심의 고대 왕권 국가의 전형을 보여 주는 『삼국사기』는 그 체제나 기술 내용이 중국의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는 고대 우리나라의 지성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했지만, 과도한 중국 중심의 사고방식이 벌써 13세기 사람들의 눈에도 무리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736]

중국에서 처음 나라가 설 때부터 한나라를 일으킨 유방에게까지 신이한 일로 점철된 건국의 역사를 낱낱이 대는 것은 우리도 이면의 전범을 하나쯤 마련하겠다는 일연의 논리적 전거 대기다. 그러기에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삼국의 시조가 신이한 데서 출발했음은 무엇이 괴이한 일이랴” 고 반문하다. 자존의 극치다.[738]

신라 사회는 고대 삼국시대에서도 중국의 문물을 가장 늦게 받아 들였지만 가장 훌륭히 소화해 내었다. 재래 신앙이 강하게 형성되어있던 사회 중심부에 외래의 불교가 파고 들어오는데 신라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았다.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의 조화 아래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 분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741]



3. ‘내가 저자라면’ -

『삼국유사』는 5권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은 왕력(王歷) 제1과 기이(紀異) 제1, 권2는 권1 기이의 후속편, 권3은 흥법(興法) 제3과 탑상(塔像) 제4, 권4는 의해(義解) 제5, 권5는 신주(神呪) 제6, 감통(感通) 제7, 피은(避隱) 제8, 효선(孝善) 제9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유사』를 해제한 고운기는 이 책의 전체의 틀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140여개의 조목 수를 40개의 제목으로 성격별로 재분류하여 기술하였다. 앞의 20개는 「기이」편을 중심으로, 뒤의 20개는 「흥볍」편 이하를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같은 성질의 것 끼리 묶어서 기술함으로써 독자들이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책의 ‘들어가기’에서부터 삼국유사의 전체 구성, 역사적 배경 및 해제자가 저술시 유념한 점 등을 상세히 밝히는 등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또한 고운기는 본인이 삼국유사를 썼다면 이런 식으로 했을 것이라는 기분으로 본문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실었고, 삼국사기와 꼼꼼하게 비교하면서 삼국유사를 기술한 점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고운기의 상세하고 친절한 해설이 없었다면, 이 책을 읽기에 무척 어려웠을 것이란 생각이 들고 저자의 노고에 감사한다.

이 책에서 단연 돋보이는 점은 사진과 사진 하단의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짤막한 설명이다. 이 사진 들이 고대와 현대를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하는 듯하다. 천년 전 이야기를 읽으면서 현재의 사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천년의 역사를 눈과 마음으로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 보완할 점은 >

역사서라면 연대기(표)를 첨부해 놓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숫자(연도)가 나오는데 선 후 관계를 헤아리는 어려움이 있다. 삼국뿐만 아니고 중국과의 역사적, 시대적 관계까지 곳곳에서 비교하곤 하는데 연대기가 있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책의 곳곳에서 삼국유사 원본의 출처를 밝히는데, 이 점 또한 동굴 속을 헤메는 기분이 들게 한다. 삼국유사의 전체 목차를 보여주고 전체의 틀 속에서 비교가 이루어지게 하면 좋을 듯하다. 이 점은 삼국사기도 마찬가지이다.

지도가 눈에 띄지 않는 것도 또한 좀 아쉬운 부분이다. 학교 다닐 때 역사책에서는 지도를 많이 보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도가 없다 보니 와 닿는 느낌이 덜하다. 사진을 실은 것 같이 지도를 통해서 역사의 변천을 보는 것도 좋은 공부 재료가 될 것 같다.

정리하면, 말로 표현하는 것과 도표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차이가 많다. 말로 표현하면 복잡하고 이해가 어려운데, 도표나 그림으로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주면 이해의 신속함가 되는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

그러나 일연은 다르다. 절이며 피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는 떳떳이 쓰고 있다. 일연도 정말로 믿지 못할 구석이 없기야 했겠는가? 다만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다.[187]

경주에서 출발한 순정공과 수로부인 일행은 분명 이 길을 따라 강릉으로 가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 철쭉꽃 핀 병풍 같은 벼랑은 어디였을까? 용에게 잡혀 갔다 태연히 나와 용궁 자랑을 늘어놓던 데는 어디였을까? 정동진에서 강릉으로 들어오는 바닷가 마을 어디쯤일까? 수로부인은 한 번 산 쪽으로 눈을 돌려 꽃을 보았고, 한 번 바다쪽으로 눈을 돌려 용궁을 보았다.[233]

하루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곤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어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417]

솥 안의 국 맛은 한 점 고기로도 충분한 것이다.[564]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동이라 했다.[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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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10 15:11:37 *.70.72.121
사색하며 가슴에 몇 구절 간직하는 모습도 좋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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