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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21일 06시 52분 등록
  

쉽게 읽는 백범일지

김구 지음, 도진순 엮어 옮김, 돌베개



I. 저자에 대하여 : 김구 (金九 ; 1876.7.11~1949.6.26)


  김구선생과 잘 어울리는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생각해 낸 것은 ‘우직함’이다. 나는 평범한 이 단어가 그분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왜일까? 아마도 그건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 죽는 그날까지 자신이 뜻하는 곳으로 걷고 있는 모습 때문이리라. 그의 모습은 태산과 같았다.


  난세가 영웅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 조약 이후 우리 민족에게 일제 강점기는 난세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기가 쇠약해져 갔다. 나라를 잃은 슬픔이 어떤 것일까? 어찌하여 한 사나이의 세 가지 소원이 오직 ‘내 나라의 독립’ 하나뿐일 수 있는가? 다른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그의 세 가지 소원은 우주로 향했으리라.


  제 나라를 잃어버려 슬퍼하는 민족에 대쪽 같은 기계로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그의 행보는 치하포 사건에서 시작한다. 치하포에서 왜인을 죽이는 사건을 감행하기 전 그의 내면을 들여 다 본다.


***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문,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답, "그렇다."

문,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답,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


  이 사건으로 감옥에 갇혀 교수형까지 언도받고, 고종의 판결보류로 미결 상태에 있던 김구는 자신이 죄 값을 치르는 것은 결국 왜인만을 즐겁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 탈옥을 결심한다. 그가 탈옥을 결심하고 실제 탈옥에 성공하는 과정 또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실천가인지를 증명한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백범을 만든 사람들


  김구선생이 이 시대까지 회고되는 인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뒤에서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뒷바라지 해 준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구선생의 아버지 김순영은 "네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라고 말할 만큼 아들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다. 선생이 어린 시절 상놈의 출신으로 양반이 되겠다는 아들을 위하여 스승을 모셔다가 공부할 환경을 꾸며주기도 한다.

  그의 어머니는 또 어땠는가? 김구가 옥살이를 할 때는 옥바라지를 하면서도 아들이 한 일을 탓하기는 커녕, 경기 감사가 한 것보다 더 기쁘다는 말을 건네는 어머니였다. 또한 자신의 생일에 음식을 준비하려는 아들과 동료들에게 차라리 돈으로 달라하여, 그 돈으로 왜인을 죽이라고 권총을 사다주는 어머니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돈 한 푼 쓰기를 아까워했다. 자신의 아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이해하고 지지해주었던 어머니다. 그런 아들이 어찌 나라는 위하여 큰일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김구 자신은 이러한 부모님에게 효를 다하지 못한 것을 일생토록 한탄하였다.


연보


1893 ~ 동학 입교

1895 ~ 김의언 의병단 가입

1894 ~ 해주에서 동학혁명 지휘

1895 ~ 명성왕후 시해한 일본군 살해후 사형 선고

1910 ~ 신민회 참가

1911 ~ 105인 사건으로 체포 17년 형 선고

1914 ~ 농장 농감으로 농촌계몽 운동

1919 ~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1926 ~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 조직

1932 ~ 일본왕 사쿠라다몬 저격사건

1932 ~ 상하이 훙커우공원 폭탄투척사건

1932 ~ 이봉창, 윤봉길등의 의거를 지휘

1933 ~ 난징에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

1935 ~ 한국 국민당 조직

1940 ~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설치

1944 ~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1945 ~ 대한민국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

1948 ~ 신탁통치 반대운동

1948 ~ 유엔한국위원단 면담에서 단독선거 반대

1948 ~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 제창

1949. 06 ~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




II.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백범 출간사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3p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니,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일제시대 동경을 우리 서울로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4p


  이 책에 나오는 동지들 중에는 생존해서 독립 사업에 헌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많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지만,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판을 삼아 우리 민족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 민족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앞서 세상을 떠난 동지들이 다 이러한 일을 하시고 간 것에 대해 나는 늘 감사한다. 나도 비록 늙었으나 앞으로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는 아니할 것이다. 5p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사람이지만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층민 백정과 평민인 범부를 의미하는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의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6p


상권


1. 황해도 벽촌에서의 어린 시절


  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의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21p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추태는 상놈의 행위라 하겠다. 그때 어머님은 “우리 집안의 많은 풍파가 모두 술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차라리 자살하고 그 꼴을 안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24p


2. 파란만장한 실패와 단련의 성장기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한다.

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와 같이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지지 않는다.


  나는 이용선의 머리를 껴안고 통곡하다, 어머님이 내가 동학접주를 한다고 처음으로 지어 보내신 명주저고리를 벗어 그의 머리를 감싸주고 동네사람들을 시켜 정성껏 묻어 주게 했다. 내가 눈 속에서 벌거벗고 목 놓아 우는 것을 보고 이웃사람들이 옷을 가져다주었다. 42p


  “선생님! 저는 불과 스무 살에 실패를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저의 자질과 품성을 밝히 보시고 좋은 점이 있으면 사랑해 주시고 교훈도 해 주십시오. 그리하지 못한다면, 저늬 발전은 고사하고 선생님의 높으신 덕에 누가 끼치고 말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도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46p


 모르는 결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고선생은 이러한 나를 위로해 주셨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아무쪼록 성현의 발자취를 밟아 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자리에 이른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으며, 중도에 자포자기하는 짐승만도 못한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이르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47p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마저 놓는다면 가히 대장부로다. 48p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지만, 백성과 신하가 모두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지금 왜놈의 힘이 대궐까지 파고들어 대신들을 마음대로 내치니, 우리 나라를 제2의 왜국으로 만든 것 아니겠는가? 그런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일만 남았네.“ 49p


  나는 황공하여 감당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또 네 생김새가 못나서 선생 집안에 욕이 될까 두렵다고도 했다. 그런데 고선생은 네 인중이 짧은 것이나 이마가 두툼한 것, 그리고 걸음걸이 등이 법의 모양을 타고났다고 하시며, 장차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 날이 있을 것이니 두고 보라고 하시더라. 62p


  나도 매우 걱정스러웠다. 모름지기 의리 있는 선비라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저승에서 머리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이승에서 머리 깎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던 때였다. 그러니 안진사가 단발할 의향까지 보였다는 것은 의리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안진사가 위리나라 동학을 토벌하면서 서양 오랑캐의 서학을 믿겠다는 것도 괴이하였다. 63p


3. 질풍노도의 복수 의거, 치하포 사건


  “그렇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게 될까 미리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 69p


  집으로 돌아와 아버님께 말씀드리니 부모님 역시 피신할 것을 권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번 일이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니라 나라의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버님도 다시 강권하지 않으시고 집안이야 흥하든 망하든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73p


  눈으로 비문을 보고 귀로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순검들이 알세라 어머님이 알세라, 피 섞인 눈물을 흘렸다. 부모 죽은 후까지 저렇듯 효도한 자취를 남겼으니, 부모 생전에는 어떠했을지 알 것 같았다. 이창매가 다시 살아나 나를 꾸짖는 듯싶었다. 허둥지둥 내 뒤를 따라다니시느라 넋이 다 빠져서 하염없이 한숨만 짓고 계시는 어머님을 차마 뵐 수 없었다. 일어나서 출발할 때, 이창매의 무덤을 다시 되돌아보며 마음속으로 수없이 절을 하였다. 76p


  옛사람들이 “슬프다,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느라 고생하셨었다”고 노래하였지만,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때도 많은 고생을 하셨고,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또 천배 만 배의 고생을 더 겪으셨다. 78p


  내 옆 의자에 와타나베라고 하는 왜놈 순사가 걸터앉아서 방청인지 감시인지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서 “이놈!” 하고 큰소리로 죽을힘을 다해 호통을 쳤다.

“만국공법 어디에 통상화친조약을 맺은 나라의 국모를 시해하라는 구절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내가 살면 몸으로,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으리라!” 79-80p


  잠시 후 감리사 이재정이 들어와 윗자리에 앉았다. 나는 법정 맨 윗자리에 앉은 이재정에게 물었다.

  “본인은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백성의 의리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왕을 죽여 복수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국모상이라고 힌 갓을 쓰고 있는데,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흰 갓도 쓰지 아니한다는 구절을 읽어 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구록을 도적질하는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 81p


  나 역시 척왜척양이 당연한 도리라 생각하고 이에 반대하는 자를 짐승처럼 여겼다. 그런데 서양의 역사를 기록한 신서적 『태서신사』 한 권만 보더라도, 저 눈이 푸르고 코가 우뚝한 서양 오랑캐들이 오히려 더 선진적인 법규로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갓을 쓰고 넓은 요대를 두른 우리나라의 탐관오리들에게는 오히려 오랑캐라는 이름조차 아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87p


  눈서리가 내리다가 갑자기 봄바람이 부는 듯하였다. 밤에 옥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벌벌 떨던 죄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좋아서 죽을 지격인 모양이었다. 방망이로 차꼬 등을 두들기며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푸른 바지저고리 죄수복 차림으로 춤도 추면서 하룻밤을 지내는 것이 마치 배우들의 연극장 같았다. 91p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요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 물고기가 아니리.

나라에 대한 충도 보모에 대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님을 생각하소서. 94p


4. 5년간의 방랑과 모색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이 그처럼 교만하니 어찌 아동들을 잘 가르칠 수 있겠소? 내가 일시 운수가 나빠 길에서 도적을 만나는 바람에 이 모양이 되었으나, 결코 선생께 하대를 받을 사람은 아니오.” 102p


  하룻밤 사이, 청정법계에서 속세의 만 가지 생각이 다 없어진 듯하여 중이 되기로 승난하였다. 얼마 뒤 사제 호덕삼이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살발진언을 쏭알거리더니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111p


  인사 후 다소간 문답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길고 아름다운 수염에 위풍당당한 전효순이라는 노인이 있었다. 최재학은 전효순 노인에게 “이 대사는 도리를 아는 스님이지, 대보산  영천암의 방주 자리를 내어주시면 아들들과 외손자들 공부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영감 의견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전씨는 무척 기뻐하였다. 115p


  “강화 김씨 댁에 있으면서 선생이 나를 위해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 사실을 알았고, 오늘 비로소 뵙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작은 일도 크게 부풀려 전해지는 경우가 많으니, 소문은 용의 머리이나 실물은 뱀의 꼬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졸렬하기 짝이 없으니 실망 많이 하실 것입니다.”

유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123p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먼저 그 나라 사람들과 제도에 오랑캐의 행실이 있으면 오랑캐로, 사람의 행실이 있으면 사람으로 대우함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탐관오리들이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나 짐승의 행실이 많으니, 이것은 참으로 오랑캐의 소행입니다. 또 지금은 임금이 스스로 벼슬 값을 매겨 팔고 있으니, 그것은 오랑캐 임금의 소행입니다.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저 대양 건너 각 나라에는 제법 국가 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고 문명도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공자, 맹자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발달된 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계속 오랑캐라고 배척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소견에는 오히려 오랑캐에게서 배울 것이 많고, 공맹에게서는 버릴 것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126p


  "선생님이 머리 풀고 다니는 오랑캐를 말씀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머리털은 곧 피가 만든 것이요, 피는 음식이 소화되어 만들어진 진수이니, 음식을 먹지 않으면 머리털도 자랄 수 없습니다. 설사 머리를 천 길이나 길러서 크고 훌륭한 상투를 얹는다 치더라도 왜 놈이나 양놈이 그 상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지금 이 나라의 상류층은 백성을 학대하는 약탈자에 불과합니다. 백성들은 일자무식이라 탐관오리와 토호의 학대를 당연하게 알고 있습니다. 만약 탐관오리와 토호들이 자기 백성을 학대함같이 왜와 서양을 학대한다면, 왜와 서양은 멸종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드은 백성의 피를 빨아 왜놈과 양놈에게 바치고 아첨하고 있으니, 우리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문명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 학교를 세우고 자녀들을 교육하여 건전한 2세로 길러야 합니다. 또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이 어떤 것인지 알도록 해야 합니다.“ 127p


5. 새로운 사상, 새로운 교육


  구식 양반은 임금에 대한 충성만으로 자자손손 혜택을 입었지만, 신식 양반은 삼천리 강토 이천만 민중에 대한 충성으로 자기 자손과 이천만 민중의 자손에게 만세토록 복음을 남길지라, 그 얼마나 훌륭한 양반이냐?

  환등기를 가지고 고향에 갔을 때, 나는 인근 양반 상놈을 다 모아 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절규하였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6. 일제의 모진 감옥에서 백범이 되다


  1910년 합병 당시 인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원로대신과 내외 관리 중 자살하는 자도 많았고 교육계의 배일 사상도 극도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일반 농민들 중에는 합병이 무엇인지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도 많았다. 나는 망국의 치욕 속에서도 국민이 한마음으로 분발하기만 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앙양하는 길 밖에 없으므로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소, 중학부의 학생을 늘려 모집하는 등, 교장으로 임무를 다했다. 154p


  세 놈이 나를 들어다가 유치장에 눕혔을 때는 이미 동창이 밝아 있었다. 신문실에 끌려간 것은 전날 해가 진 후였다. 처음에 신문을 시작한 놈이 불을 밝히며 밤을 새운 것과 그놈들이 온 힘을 다해 자기 일에 충성하던 것을 생각하니 자괴감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 성심껏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구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삼키려는 저 왜구들처럼 밤새워 일한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 고통스런 와중에도, 혹시 내게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는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158p


"나를 논밭의 몽우리 돌로 알고 파내려는 그대들의 노고보다 파헤쳐지는 나의 고통이 더욱 심하다. 차라리 내가 자결하는 것을 보라!“ 161p


  그러고 보면, 나의 변화는 경무총감부에서 신문받을 때 와타나베 놈이, 다시 마주 앉은 오늘 김구가 16년 전 김창수인 것도 모르고, 자기 가슴에는 X광선을 붙이고 있어 나의 일체 행동을 투시하고 있으니 터럭만큼이라도 숨기면 당장 쳐죽이겠다고 협박하던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게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169p


  그러므로 내가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해 걱정이 적지 않았다. 만일 나 역시 석회질을 품은 뭉우리돌이면 차라리 만기 이전에 깨끗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했다. 그리하여 굳은 의지를 다지는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라고 하고, 호를 ‘백범’이라 고쳐 동지들에게 알렸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호적부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우리나라가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조선의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 중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을 때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로 하여금 그 집의 뜰도 쓸고 창도 닦는 일을 해 보고 죽게 해 달라’고. 184p


  무거운 짐을 지고 사다리로 올라가면서 여러 번 떨어져 죽을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같이 쇠사슬을 맨 자가 인천항에서 구두 켤레나 담뱃갑을 도적질한 죄로 두세 달 징역 사는 가벼운 죄수라 그자까지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생각다 못해 아무 잔꾀도 부리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일했다. 188p


7. 전격적인 망명과 상해 임시정부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극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다던 네 딸 화정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 친구들이 네게 알릴 것 없다고 권하기로 기별도 하지 않았다. 일곱 살도 안 된 어린 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감옥에 계신 아버님께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님이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 상하시겠소’ 하더라.” 190p


  임시정부가 수립된 원년(1919)에는 나라 안팎이 일치단결하여 민족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세계 정세가 복잡해지면서 민족운동계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사상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임시정부의 국무원과 대통령, 각 부 총장들까지 사상에 따라 주장이 갈라졌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사상 논쟁이 일어나 국시가 바로 서지 못하는 상황이 거듭되었다. 205p


  "독립운동이 우리 민족의 독자성을 떠나 제3자의 지도자나 명령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자주성을 상실한 의존적 운동일 뿐입니다. 임시 정부의 헌장에 위배되는 말씀은 크게 옳지 못하니, 아우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고, 도리어 자중하실 것을 권고합니다.“ 206p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긴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격언이다. 209p


  애초에 나는 임시정부의 문지기 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는 경무국장, 내무총장, 노동총판, 국무령, 구무의원, 주석으로 중임을 거의 다 역임하였다. 이것은 나 개인의 발전 때문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인재난과 경재난 때문이었다. 명성이 쟁쟁하던 집안이 몰락하면, 그 고대광실이 걸인의 소굴이 되는 것과 비슷한 형편이었다. 212p


  하와이의 안창호, 임성우 등이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이 임시정부를 지키고 있는 것에 감사한다. 그런데 당신은 앞으로 무슨 사업을 하고 싶은가? 우리 민족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돈을 보내주겠다.”

  나는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무슨 사업을 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조용히 돈을 모아 두었다가 보내라는 통지가 있을 때 보내라.”

  그러자 “그리하겠다”는 회신이 왔다. 그때부터 민족운동의 큰일이 무엇이며,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213p


  내 육십 평생을 돌이켜 보면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고 궁하면 귀함이 없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직위가 올라가 귀해져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나라가 독립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것이 될지 모르겠으나, 하늘 아래 넓고 큰 지구에 한 치의 땅도,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옛날 중국의 한유는 가난 귀신을 쫓아 버리려고 「송궁문」을 지었다지만, 나는 차라리 가난을 벗하여 사는 「우궁문」을 짓고 싶다. 그러나 문장가가 아니므로 그 역시 할 수 없다. 217p



하권


  그러나 하권을 쓰는 지금까지 비천한 나의 목숨은 아직 살아 있고 자식들도 이미 성장하였으니, 상권처럼 자식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힘써 싸운 자취를 남겨, 이를 보고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같은 잘못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23p


  칠십 평생을 돌이켜 보니,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26p


8. 대륙을 진동시킨 이봉창과 윤봉길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해도 늙은 생활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영원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그의 인생관을 들으니 감동으로 눈물이 벅차올랐다. 이봉창은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질 수 있게 지도해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고, 나는 쾌히 승낙하였다. 228p


  내 얼굴에 슬픈 기색이 있었던지 이씨가 오히려 나를 위로하였다.

  “저는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떠나는 것이니,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이에 억지로 미소를 띠고서 사진을 찍었다. 231p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을 계기로 상해의 동포 청년들도 비밀리에 나를 찾아와 나라에 몸을 던질 일감을 달라고 간청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윤봉길군이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그는 우리 동포의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고, 홍구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고 있었다.

  “제가 날마다 채소바구니를 등에 메고 홍구 쪽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동경 사건과 같은 계획이 또 있을 줄 믿습니다. 저를 지도하여 주시면 죽어도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234p


  "그것이 무슨 말이오? 포수가 꿩을 쏠 때에도 날린 다음 쏘아 떨어뜨리고, 사슴을 잡을 때도 달리게 한 다음 쏘는 것이 사냥의 진정한 맛이요. 군이 지금 그러는 것은 내일 성공할 자신감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오?“

  “아닙니다. 그놈이 곁에 선 것을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나는 이번 거사가 성공할 것을 벌써 알고 있소. 군이 일전에 번민이 그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는데, 그 말이 확실한 증거라고 믿소. 내가 치하포에서 쓰치다를 죽이려 할 때도, 처음에는 가슴이 몹시 울렁거렸지만 고능선 선생이 가르쳐 주신 구절, ‘벼랑에서 잡은 손마저 놓은 것이야말로 대장부’라는 구절을 떠올리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소. 군과 내가 거사하는 심정이 서로 같은 것 아니겠소?” 237p


9. 피신과 유랑 속의 민족운동


  예전부터 우리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하였건만, 우리 선조들은 눈먼 사람이었던가. 이렇게 유익한 것을 소개하지 않았으니, 어찌 통탄스런 일이 아니리오. 문익점은 면화 씨를, 그 아들 문래는 물레를, 손자 문영은 면포 짜는 법을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그러나 그 후로는 말마다 중국을 오랑캐라 일컬으며 그들의 문물을 돌아보지 않았다. 또한 명나라 때 불편하고고통스런 망건이나 갓 등 망할 놈의 의관문물만 중국에서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리다. 254p


  청년들은 중국 정자와 주자의 방귀조차 향기롭다는 옛사람들을 비웃지만, 같은 입과 혀로 러시아 레닌의 방귀는 ‘달다’ 하니, 정신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자, 주자 학설의 신봉자도 아니고 마르크스, 레진주의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 나라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위해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있으랴. 255p


  “특무공작으로 천황을 죽인다 해도 천황은 또 나올 것이고, 대장을 죽인다 해도 대장이 또 나올 것이오. 그러니 앞으로 독립을 하려면 군인을 키워야 하지 않겠소?”

  “감히 부탁할 수 없었으나 그것이 내가 진실로 바라는 바요. 문제는 장소와 재력이오.” 259p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허나 참으로 유감스럽네. 정탐꾼 이운환도 한인이니,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는 것보다 못하네.” 268p


10. 전시수도 중경의 임시정부와 광복군


  살아 계실 때 어머님은 모든 일을 손수 처리하셨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전에 종을 부렸고, 나라를 강제로 빼앗긴 뒤에는 돈으로 사람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어머님은 일찍부터 당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으셨으니, ‘종’은 물론이고 ‘고용’ 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팔십 평생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지으셨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 내 나이 이미 육십이 지났다. 『백범일지』 상편을 기록할 때 지나간 사건들이 몇 년 몇 칠에 일어났는지는 전부 본국에 계신 어머니께 편지 올려 답장을 받아 써 넣은 것이다. 지금 하편을 쓰면서도 어머님이 살아 계시다면 도움을 많이 받았을 터이건만, 아 슬프다! 273p


11. 조국의 산천과 동지를 찾아서


  가는 길에 효자 이창매의 묘를 배알하러 갔다. 시골 늙은이에게 길을 물어보니 전과 변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묘 앞에 도착하여 이창매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참배하고, 50년 전 인천감옥으로 이감되던 길에 이 묘비 앞에서 쉬었던 일을 깊이 되새겨 보았다. 그런 다음 눈짐작으로 당시 어머님이 앉으셨던 자리를 차아 보았다. 묘와 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이고, 좌우에 따르는 경관들도 그때 나를 호송해 가던 경관들과 비슷했지만, 그 옛날 나를 따라오시던 어머님 얼굴만은 뵈올 길이 없었다. 앞이 캄캄하여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길 없었다. 302p


나의 소원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 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306p


  나는 우리나라의 청춘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기꺼이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를 바란다. 젊은이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쓴다면 30년이 못되어, 남들이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볼 정도로 우리 민족은 대대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309p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일흔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 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지만,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318p



III. 내가 저자라면


『쉽게 읽는 백범일지』는 백범 김구선생이 지었고, 엮어 옮긴이는 도진순이다. 엮은이는 『백범일지』 원문과 다소 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다고 밝혔다. 그 차이는 한글세대에 맞게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문맥과 구성을 다소 수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책의 구성은 엮은이의 몫도 상당하리라 짐작할 수 있다.


  책은 크게 「상권」과 「하권」 그리고 우리가 교과서에서 접한 「나의 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은 1928년 백범선생 53세 때 집필했고 하권은 1942년 67세에 중경 임시정부 청사에서 하권이 써졌다. 

  시대적 상황과 쓰여 진 시기의 차이 때문인지 「상권」과 「하권」은 글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하권의 시작은 이봉창, 윤봉길의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마지막의 상당 부분은 하권을 집필한 1942년을 지난 해방이후의 시대도 포함하고 있다. 이 부분은 같은 시기에 집필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해방 이후의 글도 하권으로 편입한 것 같다. 책의 구성상 좀 아쉽게 느껴진 것은 1942년 이후의 내용을 다른 편으로 엮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한달음에 읽었다. 밤 10시가 되어 잠을 청하며 읽었는데 책을 놓은 시각은 새벽이었다. 그만큼 책에 빨려들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을 때처럼 술술 읽혔다. 전기문에서 느껴지는 딱딱함은 보이지 않았다. 재미있고 훌륭한 소설에서 느껴지는 스토리의 전개가 돋보인다.


  책은 김구선생님의 어린 시절부터 청, 장년에 이르기 까지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된 내용들이 매끄럽게 전개되었다. 특히 상권은 이러한 면에서 단연 돋보인다. 장과 장의 연결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그러나 하권의 스토리 전개는 다소 끊긴다.


  상권은 1년여에 걸쳐 쓰였다. 그러나 하권은 시대적 상황으로 짐작하면 5년 이상의 세월에 걸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하권의 상권 보다 긴 세월의 시간은 필름의 끊김 현상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낸 듯하다. 또한 하권은 상권 보다 스토리 전개가 치밀하지 않다. 물론 소설이 아닌 자서전에서 각 장마다의 스토리가 이어질 것 까지는 없겠지만 상권과 상대적이 차이가 나는 것을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 「8장 대륙을 진동시킨 이봉창과 윤봉길」은 상권과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저자라면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왜냐하면 9장부터는 스토리의 색채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11장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같이 금위환양하는 김구선생의 모습을 필름에 담아 놓은 듯하다. 김구선생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어색해 하는 듯 보였다.


  나는 언제가 연구원 수업시간에 세계사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과 한 개인의 도약이 된 사건을 묘사하는 숙제를 받았었다. 이 책에서 그러한 상황을 보았다. 「3장 질풍노도의 복수 의거, 치하포 사건」은 김구선생이 민족의 영웅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고 그것은 우리 민족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간직될 것이다.


  신화학자 조셉 켐벨이 말하는 영웅 신화의 스토리가 『백범일지』에서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영웅의 성장기는 혹독한 시련의 시기이다. 그런 과정에서 영웅은 죽음 직전까지 몰려간다. 이러한 구조는 비슷함을 넘어 신화의 영웅이야기보다 더 실감나게 조명되었다. 영웅 스토리의 백미인 영웅의 귀환 또한 사실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백범일지』는 켐벨의 영웅 신화를 닮았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것이 다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도록 한 것은 김구선생님에 대한 우리 민족의 믿음이리라.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울컥하는 마음에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선생이 목 놓아 울 때 내 눈에서 눈물이 고였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잠시 눈을 감고 쉬었다 다시 책장을 펴 들었다. 한동안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우리민족의 비극적인 시대의 한 복판을 뚫고 가야 하는 책읽기는 내 손가락을 떨게 했다.

  이 책은 김구선생 한분의 전기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만들어간 우리 민족 모두에게 바치는 대서사시다. 우리 민족 모두가 꼭 읽어야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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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8.10.21 06:57:23 *.37.24.93
저자에 대하여는 최지환 연구원의 글을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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