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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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 (스티브 도나휴 지음, 고상숙 옮김, 김영사, 2005)
Shifting Sands.. by Steve Donahue
1977년, 유럽을 여행하던 20대의 어느 날, 스티브 도나휴는 파리의 매서운 추위에 질려 그 해 겨울을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서아프리카 해변에서 보내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어 남의 차를 빌려 타고 시작한 여행은 알제리에 이르러 세계 최대 사막인 사하라 사막 종단으로 이어진다. 따뜻한 남쪽 해변으로 간다는 목표 외에는 아무런 계획도 상세한 일정도 없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며 수십 일간 길을 찾아 헤매면서 불확실한 인생의 사막을 헤쳐 갈 지혜를 얻는다.
사하라 사막 여행은 이후 몇 차례 직업을 바꾸고 결혼과 이혼의 과정을 거쳐 자녀를 키워낸 그의 개인적인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한편, 세계적 컨설턴트로서 독창적인 변화 관리 모델을 만들어내는데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
나는 지도를 보면서 하룻밤을 꼬박 세웠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생 텍쥐페리 「사막의 죄수」 중에서 인용된 글을 시작으로 펼쳐진 작가의 사막 여행기 중에서 인생의 사막과 비유한 부분만 요약해 본다.
***
산과 사막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문화권과 대부분의 종교권에서 이 상징물을 이용하여 가치관과 가르침을 전파했다. 말 그대로 산과 사막은 서로 같을 수 없다. 은유적으로도 아주 다르다.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는 작은 식탁만하다. 이 좁은 곳에 오르기 위해 사람들은 준비를 하고 계획을 세운다. 사실 목표라는 것은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을 보여주는 정확한 지도만 있으면 달성할 수 있다. 문제점을 정의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실행하는 것을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여긴다. 이것이 산악인의 정신이다. 하지만 목표가 애매모호하거나 또는 최종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일종의 과정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바로 사막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불확실해 보이고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때, 계획과 경험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바로 사막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막의 가장 힘든 점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산을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산은 사막보다 덜 애매하니까. 인생에서 성취나 성공, 목표가 전부는 아니다. 인생이란 종종 길을 잃고, 스스로를 발견해 나가며, 때로는 사면초가에 처하기도 하고, 거기에서 빠져나오고, 신기루를 좇기도 하는 것이다. 한동안 잘 가는듯하다 다시 길을 잃는 과정의 연속이다. 인생의 대부분은 산이 아니라 사막을 닮았다.
직장을 옮기는 것은 산이지만, 직업을 완전히 바꾸는 것은 사막이다. 아이를 낳는 것은 산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은 사막이다. 꿈에 그리던 집을 짓는 것은 산이다. 이혼으로 그 꿈같은 집을 잃게 되는 것은 사막이다. 암을 이겨내는 것은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과 같다. 하지만 만성질환이나 불치병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 사막을 건널 때와 산을 탈 때는 걷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 딱딱한 등산화를 신고 끝없는 모래가 쌓이는 뜨거운 사막을 건너면 발에 물집만 생길 뿐이다. 사막을 여행하는데 필요한 규칙은 산을 타는 것과 같은 목표지향적인 삶의 접근방식과는 아주 다르다. 특별한 순서가 없으니 찾으려고 노력해봐야 허사다. 사막을 건너다보면 어느 날 또는 어떤 단계에서 어떤 특정한 규칙이 다른 규칙들보다 더 중요해진다.
규칙 1.. 끊임없이 모양이 변하는 모래사막에서는 지도가 아니라 내면의 나침반을 따라가라.
지도를 펴보자. 산봉우리에는 이름이 있지만, 모래언덕에는 이름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지도와 여행 안내서를 들고 우리 인생의 사막을 건너기 시작한다. 모래땅의 모양이 바뀌면 지도는 아무 소용이 없어지고 우리는 길을 잃는다. 길이 지도에 없다는 것 자체가 여행의 출발이 된다. 중년의 사막을 걸을 때 분명한 이정표가 보일까?
목표는 방향감각의 값싼 대체물이 될 수 있다. 인생이나 변화의 사막을 건너는데 길잡이가 되어줄 심오하고 의미 있는 방향을 찾는 것보다 목표를 세우는 것이 훨씬 쉽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만 달성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서 살아왔다.
인생의 사막에도 목표는 존재한다. 사막에도 산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방향감각이다. 먼저 자신을 안내해 줄 내부의 나침반부터 찾아야한다. 그렇게 하려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분명하게 보일 때까지는 목표나 도착지는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단 목적지를 접어두고 나면, 바로 눈앞에 있는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 나침반 바늘은 여행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규칙 2..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쉬어가라. 더 많이 쉴수록 더 멀리 갈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산을 오르는 사람처럼 생각하며 산다는 데 있다. 우리는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 안달하는 열병을 앓고 있다. 항상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젖먹던 힘까지 다해 정상을 가며, 정상에 오르면 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사하라를 건너는 여행자 중에 정상에 대한 열병을 앓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사막에는 정상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 전날과 똑같은 사막의 지평선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막 여행자는 그다음 오아시스밖에 보지 못한다.
인생을 산이 아니라 사막으로 보게 되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 뿐 아니라 중요한 관계까지도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유목민들은 우리들이 잊어버린 것을 기억하고 있다. 더 자주 멈출수록 인생의 사막에 더 깊숙이 들어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쉬지 않고 정상으로 치닫게 만드는 열병 때문에 주어진 일을 해 치우지만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쉬지 않으면 인생의 사막, 변화의 사막은 우리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한다.
사막에 숨어있는 비밀의 오아시스처럼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오아시스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고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발견된다. 우연히 오아시스를 마주쳤을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오아시스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규칙 3.. 정체상태에 빠지면 자신만만한 자아에서 공기를 조금 빼내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다.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에는 산소가 해수면의 ⅓밖에는 존재하지 않아서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압축공기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사하라 사막에서 부딪치는 문제는 공기부족이 아니라 공기과잉 현상이다. 네 바퀴가 달린 자동차조차 매가리없이 구덩이에 처박혀버린다. 이 상태에서 페달을 밟으면 더 깊이 박힐 뿐이다. 이때에는 타이어의 공기를 조금 빼내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성공으로 덮여있지 않다. 사막에 잡힌 발목을 풀기 위해서는 자아가 한번쯤은 패배를 겪도록 놓아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으며,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또는 약점을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공기를 빼고 나면 자아는 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가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겸허해지지 않으면 절대 답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너무 까다로와지는 순간, 화가 나거나 참을성이 없어지고 유치해지거나, 또는 역겨워지고 둔감해지거나 오만해지는 순간이 오면 자아에서 공기를 빼고 실질적이며 건전한 방향으로 전환할 기회로 보면 된다. 그것은 자존심을 무너뜨리거나, 스스로에게 엄해진다거나, 완전한 패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작은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약점까지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겸허함이며, 이를 통해 더 높이 일어설 수 있다. 우리가 사막에서 겪는 변화는 종종 우리 자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규칙 4.. 사막을 건너는 것은 고독과 외로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사이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산 위에서는 혼자 아니면 함께이다. 하지만 사막을 건널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등 뛰어넘기이다. 즉, 한 그룹의 일원으로 차량이 각자 움직이는 것이다. 완전히 혼자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짜 함께 여행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이 규칙은 변화의 사막에도 효력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혼자 여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대신 여행을 해줄 수 없다. 스스로 방향을 찾아야하고, 전진하고, 스스로를 돌보고, 자아와 싸워야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일 수는 없다. 정신적인 지원, 친구들, 길잡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균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식별의 문제이다. 여행을 하는 도중에 어느 순간이든 다른 사람의 어깨가 필요할 때가 있고, 혼자 헤쳐 나가야하는 순간도 있다. 또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할 수도 있다. 우리가 개발해야 할 기술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언제 필요한지를 뚜렷하게 인식하는 능력이다.
규칙 5.. 안전하고 따뜻한 캠프파이어에서 나와 깜깜한 사막의 어둠 속으로 나아가라.
우리 인생에는 따뜻하고 친숙한 캠프파이어들이 있다. 가족, 친구, 집, 직장, 가치관, 일상, 인간관계, 의식, 나쁜 습관과 좋은 습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이 바로 캠프파이어다. 누구에게나 있다.
인생이 변화를 겪고 있고 자신이 사막에 있다고 느낄 때 캠프파이어를 더 크게 지피기 위해 나뭇가지를 찾아다닌다. 원하는 만큼의 연료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또한 우리는 확실하고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원하며 애매모호하고 위험한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우리의 캠프파이어가 비추어주는 것은 진짜 세상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때로 우리는 안락함과 안전을 뒤로 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막의 어둠속에서밖에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원하는 것이 별빛처럼 밤에만 보이는 것과 같다.
산에서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지만, 캠프파이어에서 멀어져야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준비하라’는 잘못된 신조다. 인생의 사막에서 완벽하게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결혼할 준비가 완벽하게 된 상태에서 결혼을 했던가? 아이를 낳아서 기를 준비가 된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던가? 해고당할 때 새로운 직장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 문자 그대로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캠프파이어에서 떠나는 것이 쉬워진다.
규칙 6.. 열정을 가로막는 두려움과 불안감의 국경에서 멈추지 말라.
인생에 있어서 경계선은 중요한 전환점이며 진실의 순간이고, 내적으로 엄청난 성장과 치유를 할 수 있는 기회이다. 국경선의 보초는 우리 안에 있는 정신세계의 일부이다. 허상의 권위에서 나오는 목소리다. 현재의 나와 앞으로 변화한 후의 내 모습을 가르는 경계선을 건너면 통제력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하는 우리 자아의 모습이다. 이는 잘못된 신념과 잘못된 두려움, 그리고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가정이 지배하고 있다.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비합법적이고 그 논리가 잘못된 것일지라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 오히려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떤다. 두려움 때문에 그것이 마치 생과 사를 결정하는 문제처럼 느껴진다. 앞으로 전진하지 못할 때,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할 때, 내 안의 일부가 죽는다. 마음 속 보초가 당신은 열정을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허상의 국경선에서 멈춰버리면 열정도 죽는다. 그에 저항할 용기나 통찰력이 없다면, 사막 한가운데에 가두어 버릴 수도 있다.
분명하게 정상이 보이는 산과 달리 사막의 경계선은 놓치기도 쉽고 그곳에 가보기 전까지는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눈을 크게 뜨고 봐야한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 변화, 또는 그 외 무엇이든 ‘이제 사막을 건넜다고 우리에게 속삭여주는’ 작은 사건을 놓치지 않도록 주시해야한다. 진정한 경계선을 건너고 나면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
***
나는 목표가 없다. 뭔가 있는 건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도대체 모르겠다. 모르는 이유도 모르겠고 왜 모르는지 뭘 모르는지 온통 모르겠는거 투성이다.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은 이 책의 첫 장에 인용된 생 텍쥐페리의 글이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지도를 봐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있는 곳을 모르는데에야.
넘쳐나는 자기계발서에 지쳐서 아니, 읽다가 실망하는 내 자신이 지겨워서 언젠가부터는 손이 가질 않았는데 이 책은 용케도 나와 만났다. 그리고는 저자가 경험한 사하라 사막 종단 얘기에 빠져서 지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데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같이 모호한 것이 바로 사막과 닮았다고 규정해주니 스티브 도나휴가 앞에 있다면 꾸뻑 인사라도 올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는걸. 다 읽은 후엔 이 책을 고른 내 머릴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에게 한 가지 미안한 점은 213page 내내 강조한 산과 사막의 차이점이 결과적으로 크게 와 닿지 않았다는 점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강해서 내내 불편했기 때문이다. 산이나 사막이나 목적지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우리의 인생도 끝이 있다. 산은 있고 사막은 없다? 아니다. 산도 있고 사막도 있고 우리 인생도 있다. 다만, 정상정복을 위해서만 산을 오르지 않고, 해변에 가기 위해서만 사막을 건너지 않고, 죽기 위해 살지 않을 뿐이다. 산을 오르든 사막을 건너든 삶을 살아가든 그 어떤 행위를 선택한 이들에게는 절박한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고, 지도만 있으면 갈 수 있다는 산을 오르는 일도 단체로 사막을 건너는 일도 스스로 자신을 찾아가는 길도 그 당사자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간절한 일이란 얘기다. 그 간절함은 서로 비교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저자의 경험을 토대로 펼쳐진 여섯 가지 이야기는 흥미롭다. 사막에도 길이 있단다. 그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종족이 있단다. 호기심 충만한 내겐 신기하고 궁금했지만 꼭 확인해보고 싶지는 않다. 나에겐 나를 찾는 일이 더 간절하니까. 그러나 여유를 갖고 가능성을 둘 수는 있다. 언젠가 아프리카 여행을 가게 되면 잠시 들러보마고. 어디냐면 사하라 사막 근처 오아시스쯤?
아! 오아시스 찾는 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에 나와 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나에겐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라고...
IP *.250.34.123
Shifting Sands.. by Steve Donahue
1977년, 유럽을 여행하던 20대의 어느 날, 스티브 도나휴는 파리의 매서운 추위에 질려 그 해 겨울을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서아프리카 해변에서 보내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어 남의 차를 빌려 타고 시작한 여행은 알제리에 이르러 세계 최대 사막인 사하라 사막 종단으로 이어진다. 따뜻한 남쪽 해변으로 간다는 목표 외에는 아무런 계획도 상세한 일정도 없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며 수십 일간 길을 찾아 헤매면서 불확실한 인생의 사막을 헤쳐 갈 지혜를 얻는다.
사하라 사막 여행은 이후 몇 차례 직업을 바꾸고 결혼과 이혼의 과정을 거쳐 자녀를 키워낸 그의 개인적인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한편, 세계적 컨설턴트로서 독창적인 변화 관리 모델을 만들어내는데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
나는 지도를 보면서 하룻밤을 꼬박 세웠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생 텍쥐페리 「사막의 죄수」 중에서 인용된 글을 시작으로 펼쳐진 작가의 사막 여행기 중에서 인생의 사막과 비유한 부분만 요약해 본다.
***
산과 사막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문화권과 대부분의 종교권에서 이 상징물을 이용하여 가치관과 가르침을 전파했다. 말 그대로 산과 사막은 서로 같을 수 없다. 은유적으로도 아주 다르다.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는 작은 식탁만하다. 이 좁은 곳에 오르기 위해 사람들은 준비를 하고 계획을 세운다. 사실 목표라는 것은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을 보여주는 정확한 지도만 있으면 달성할 수 있다. 문제점을 정의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실행하는 것을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여긴다. 이것이 산악인의 정신이다. 하지만 목표가 애매모호하거나 또는 최종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일종의 과정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바로 사막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불확실해 보이고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때, 계획과 경험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바로 사막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막의 가장 힘든 점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산을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산은 사막보다 덜 애매하니까. 인생에서 성취나 성공, 목표가 전부는 아니다. 인생이란 종종 길을 잃고, 스스로를 발견해 나가며, 때로는 사면초가에 처하기도 하고, 거기에서 빠져나오고, 신기루를 좇기도 하는 것이다. 한동안 잘 가는듯하다 다시 길을 잃는 과정의 연속이다. 인생의 대부분은 산이 아니라 사막을 닮았다.
직장을 옮기는 것은 산이지만, 직업을 완전히 바꾸는 것은 사막이다. 아이를 낳는 것은 산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은 사막이다. 꿈에 그리던 집을 짓는 것은 산이다. 이혼으로 그 꿈같은 집을 잃게 되는 것은 사막이다. 암을 이겨내는 것은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과 같다. 하지만 만성질환이나 불치병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 사막을 건널 때와 산을 탈 때는 걷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 딱딱한 등산화를 신고 끝없는 모래가 쌓이는 뜨거운 사막을 건너면 발에 물집만 생길 뿐이다. 사막을 여행하는데 필요한 규칙은 산을 타는 것과 같은 목표지향적인 삶의 접근방식과는 아주 다르다. 특별한 순서가 없으니 찾으려고 노력해봐야 허사다. 사막을 건너다보면 어느 날 또는 어떤 단계에서 어떤 특정한 규칙이 다른 규칙들보다 더 중요해진다.
규칙 1.. 끊임없이 모양이 변하는 모래사막에서는 지도가 아니라 내면의 나침반을 따라가라.
지도를 펴보자. 산봉우리에는 이름이 있지만, 모래언덕에는 이름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지도와 여행 안내서를 들고 우리 인생의 사막을 건너기 시작한다. 모래땅의 모양이 바뀌면 지도는 아무 소용이 없어지고 우리는 길을 잃는다. 길이 지도에 없다는 것 자체가 여행의 출발이 된다. 중년의 사막을 걸을 때 분명한 이정표가 보일까?
목표는 방향감각의 값싼 대체물이 될 수 있다. 인생이나 변화의 사막을 건너는데 길잡이가 되어줄 심오하고 의미 있는 방향을 찾는 것보다 목표를 세우는 것이 훨씬 쉽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만 달성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서 살아왔다.
인생의 사막에도 목표는 존재한다. 사막에도 산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방향감각이다. 먼저 자신을 안내해 줄 내부의 나침반부터 찾아야한다. 그렇게 하려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분명하게 보일 때까지는 목표나 도착지는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단 목적지를 접어두고 나면, 바로 눈앞에 있는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 나침반 바늘은 여행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규칙 2..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쉬어가라. 더 많이 쉴수록 더 멀리 갈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산을 오르는 사람처럼 생각하며 산다는 데 있다. 우리는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 안달하는 열병을 앓고 있다. 항상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젖먹던 힘까지 다해 정상을 가며, 정상에 오르면 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사하라를 건너는 여행자 중에 정상에 대한 열병을 앓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사막에는 정상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 전날과 똑같은 사막의 지평선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막 여행자는 그다음 오아시스밖에 보지 못한다.
인생을 산이 아니라 사막으로 보게 되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 뿐 아니라 중요한 관계까지도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유목민들은 우리들이 잊어버린 것을 기억하고 있다. 더 자주 멈출수록 인생의 사막에 더 깊숙이 들어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쉬지 않고 정상으로 치닫게 만드는 열병 때문에 주어진 일을 해 치우지만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쉬지 않으면 인생의 사막, 변화의 사막은 우리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한다.
사막에 숨어있는 비밀의 오아시스처럼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오아시스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고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발견된다. 우연히 오아시스를 마주쳤을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오아시스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규칙 3.. 정체상태에 빠지면 자신만만한 자아에서 공기를 조금 빼내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다.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에는 산소가 해수면의 ⅓밖에는 존재하지 않아서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압축공기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사하라 사막에서 부딪치는 문제는 공기부족이 아니라 공기과잉 현상이다. 네 바퀴가 달린 자동차조차 매가리없이 구덩이에 처박혀버린다. 이 상태에서 페달을 밟으면 더 깊이 박힐 뿐이다. 이때에는 타이어의 공기를 조금 빼내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성공으로 덮여있지 않다. 사막에 잡힌 발목을 풀기 위해서는 자아가 한번쯤은 패배를 겪도록 놓아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으며,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또는 약점을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공기를 빼고 나면 자아는 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가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겸허해지지 않으면 절대 답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너무 까다로와지는 순간, 화가 나거나 참을성이 없어지고 유치해지거나, 또는 역겨워지고 둔감해지거나 오만해지는 순간이 오면 자아에서 공기를 빼고 실질적이며 건전한 방향으로 전환할 기회로 보면 된다. 그것은 자존심을 무너뜨리거나, 스스로에게 엄해진다거나, 완전한 패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작은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약점까지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겸허함이며, 이를 통해 더 높이 일어설 수 있다. 우리가 사막에서 겪는 변화는 종종 우리 자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규칙 4.. 사막을 건너는 것은 고독과 외로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사이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산 위에서는 혼자 아니면 함께이다. 하지만 사막을 건널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등 뛰어넘기이다. 즉, 한 그룹의 일원으로 차량이 각자 움직이는 것이다. 완전히 혼자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짜 함께 여행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이 규칙은 변화의 사막에도 효력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혼자 여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대신 여행을 해줄 수 없다. 스스로 방향을 찾아야하고, 전진하고, 스스로를 돌보고, 자아와 싸워야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일 수는 없다. 정신적인 지원, 친구들, 길잡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균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식별의 문제이다. 여행을 하는 도중에 어느 순간이든 다른 사람의 어깨가 필요할 때가 있고, 혼자 헤쳐 나가야하는 순간도 있다. 또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할 수도 있다. 우리가 개발해야 할 기술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언제 필요한지를 뚜렷하게 인식하는 능력이다.
규칙 5.. 안전하고 따뜻한 캠프파이어에서 나와 깜깜한 사막의 어둠 속으로 나아가라.
우리 인생에는 따뜻하고 친숙한 캠프파이어들이 있다. 가족, 친구, 집, 직장, 가치관, 일상, 인간관계, 의식, 나쁜 습관과 좋은 습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이 바로 캠프파이어다. 누구에게나 있다.
인생이 변화를 겪고 있고 자신이 사막에 있다고 느낄 때 캠프파이어를 더 크게 지피기 위해 나뭇가지를 찾아다닌다. 원하는 만큼의 연료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또한 우리는 확실하고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원하며 애매모호하고 위험한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우리의 캠프파이어가 비추어주는 것은 진짜 세상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때로 우리는 안락함과 안전을 뒤로 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막의 어둠속에서밖에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원하는 것이 별빛처럼 밤에만 보이는 것과 같다.
산에서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지만, 캠프파이어에서 멀어져야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준비하라’는 잘못된 신조다. 인생의 사막에서 완벽하게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결혼할 준비가 완벽하게 된 상태에서 결혼을 했던가? 아이를 낳아서 기를 준비가 된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던가? 해고당할 때 새로운 직장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 문자 그대로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캠프파이어에서 떠나는 것이 쉬워진다.
규칙 6.. 열정을 가로막는 두려움과 불안감의 국경에서 멈추지 말라.
인생에 있어서 경계선은 중요한 전환점이며 진실의 순간이고, 내적으로 엄청난 성장과 치유를 할 수 있는 기회이다. 국경선의 보초는 우리 안에 있는 정신세계의 일부이다. 허상의 권위에서 나오는 목소리다. 현재의 나와 앞으로 변화한 후의 내 모습을 가르는 경계선을 건너면 통제력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하는 우리 자아의 모습이다. 이는 잘못된 신념과 잘못된 두려움, 그리고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가정이 지배하고 있다.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비합법적이고 그 논리가 잘못된 것일지라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 오히려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떤다. 두려움 때문에 그것이 마치 생과 사를 결정하는 문제처럼 느껴진다. 앞으로 전진하지 못할 때,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할 때, 내 안의 일부가 죽는다. 마음 속 보초가 당신은 열정을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허상의 국경선에서 멈춰버리면 열정도 죽는다. 그에 저항할 용기나 통찰력이 없다면, 사막 한가운데에 가두어 버릴 수도 있다.
분명하게 정상이 보이는 산과 달리 사막의 경계선은 놓치기도 쉽고 그곳에 가보기 전까지는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눈을 크게 뜨고 봐야한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 변화, 또는 그 외 무엇이든 ‘이제 사막을 건넜다고 우리에게 속삭여주는’ 작은 사건을 놓치지 않도록 주시해야한다. 진정한 경계선을 건너고 나면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
***
나는 목표가 없다. 뭔가 있는 건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도대체 모르겠다. 모르는 이유도 모르겠고 왜 모르는지 뭘 모르는지 온통 모르겠는거 투성이다.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은 이 책의 첫 장에 인용된 생 텍쥐페리의 글이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지도를 봐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있는 곳을 모르는데에야.
넘쳐나는 자기계발서에 지쳐서 아니, 읽다가 실망하는 내 자신이 지겨워서 언젠가부터는 손이 가질 않았는데 이 책은 용케도 나와 만났다. 그리고는 저자가 경험한 사하라 사막 종단 얘기에 빠져서 지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데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같이 모호한 것이 바로 사막과 닮았다고 규정해주니 스티브 도나휴가 앞에 있다면 꾸뻑 인사라도 올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는걸. 다 읽은 후엔 이 책을 고른 내 머릴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에게 한 가지 미안한 점은 213page 내내 강조한 산과 사막의 차이점이 결과적으로 크게 와 닿지 않았다는 점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강해서 내내 불편했기 때문이다. 산이나 사막이나 목적지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우리의 인생도 끝이 있다. 산은 있고 사막은 없다? 아니다. 산도 있고 사막도 있고 우리 인생도 있다. 다만, 정상정복을 위해서만 산을 오르지 않고, 해변에 가기 위해서만 사막을 건너지 않고, 죽기 위해 살지 않을 뿐이다. 산을 오르든 사막을 건너든 삶을 살아가든 그 어떤 행위를 선택한 이들에게는 절박한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고, 지도만 있으면 갈 수 있다는 산을 오르는 일도 단체로 사막을 건너는 일도 스스로 자신을 찾아가는 길도 그 당사자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간절한 일이란 얘기다. 그 간절함은 서로 비교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저자의 경험을 토대로 펼쳐진 여섯 가지 이야기는 흥미롭다. 사막에도 길이 있단다. 그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종족이 있단다. 호기심 충만한 내겐 신기하고 궁금했지만 꼭 확인해보고 싶지는 않다. 나에겐 나를 찾는 일이 더 간절하니까. 그러나 여유를 갖고 가능성을 둘 수는 있다. 언젠가 아프리카 여행을 가게 되면 잠시 들러보마고. 어디냐면 사하라 사막 근처 오아시스쯤?
아! 오아시스 찾는 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에 나와 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나에겐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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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소리
후기를 읽고 요즘의 나와 비교해 보면, 넓은 사막위에 여러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는것 같네요. 높은 산이 있고 그곳에 올라야 되는데 그곳은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까 좀 낮은 산을 올라서 발판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낮은 산을 내려 오면 다시 바닥인거 있죠.
그래도 높은 산을 올라야 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고......
바닥이 아닌 산줄기를 타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하고 또 노력 하려 합니다.
"안전하고 따뜻한 캠프파이어에서 나와 깜깜한 사막의 어둠 속으로 나아가라." 이말이 마음에 와 닿네요.
나아가는것은 좋은데 캠프파이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좋은 글 고맙습니다. 책을 사서 읽어 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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