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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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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11일 20시 21분 등록
<1> 저자소개

도정일은 그야말로 몬스터이다. 도대체 한 인간이 왜 그토록 방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생물학자인 최재천보다도 더 자주 생물학적 사례를 제시하는 것을 보면 무서울 정도로 노력하는 학자인 것이 분명하다. 생물학보다 더 광범위하고 인접학문이 다양하며 說이 센 인문학에다, 사통오달하는 지식과 유머라는 날개를 달아 구라를 풀어대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책 속에도 나오거니와 문화계에 백구라<백기완>, 황구라<황석영>, 유구라<유홍준>가 유명하다는데 거기에 도정일의 이름을 포함시켜도 손색이 없으리라. 최재천보다 10년 정도 연장자인 이유도 있겠고, 스타일 자체가 열정적이며 달변에 능청맞아 보이니 스스로 붙인 ‘인간을 연구하는 동물’이라는 칭호가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그에 비하면 최재천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생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꿈꾸는 문학청년으로 보일 정도이다. 사실 최재천은 한때 시를 썼으며, 조각에도 재능을 인정받았다니 인문학과 생물학의 만남은 이미 그의 내부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인간과 환경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와,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개방적인 연구자세 등은 그가 다분히 로맨틱한 인간형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에게도 도정일이 붙여준 ‘동물을 연구하는 인간’이라는 칭호가 절묘하게 어울린다.

<2> 소감

이 책은 도정일과 최재천이라는 당대의 석학 두 명이 만 2년 4개월동안 가진 10여차례의 대담과 4차례의 인터뷰를 재구성한 책이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대담을 읽으면서, 우선 두 사람의 지식의 폭과 깊이, 표현력에 감탄했다. 그것은 곧바로 그렇지 못한 인간들에 대한 회한을 불러왔다. 자신과 이웃의 삶에 대해 한 번도 질문을 던지지 않고 평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소시민과 입에 담기 어려운 파렴치범들 - 어떻게 이렇게 인간들이 다를 수 있는걸까,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두 가지 접근법인 인문학과 생물학의 기나긴 설전을 듣고 나서도 명쾌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 그것이라면 이 두꺼운 책을 읽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단지 그 대답을 위해서 두 사람은 그토록 많은 지식을 섭렵했단 말인가.
두 사람처럼 유독 지식에 집착하는 인종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할 판이다.

13장의 결론을 보면서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두터운 세계를 꿈꾸는 호모 심비우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핵심적인 이론을 정리한 보급판 도서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나는 아무래도 현학적이거나 장황한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책이 확실히 생물학에 대한 기초적인 소개는 된 것같다. 인문학적인 說은 낯설지 않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인문학에 가까이 있었다면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생물학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이렇다할만한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생물학의 기본 동기가 호기심이라는 것 - 책을 읽으면서 생물학에 매료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잎꾼개미는 무려 6,000만년 전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만, 우리 인간은 불과 1만년 밖에 안되었다는 사실도 재미있었고, 잎꾼개미도 버섯을 길러 먹는다는데 '오카방고의 숲속학교'라는 책에 나오는 그 흰개미버섯과 같은 종류일까 궁금증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 궁금증이 지대하여 기어이 호기심을 풀어야 하는 사람은 생물학을 할 것이다. 또한 보노보 원숭이에 관한 이야기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정말로 ‘딱히 인간적이라 할만한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최재천이 그나마 인문적이고 개방적인 학자인데도, 모든 사회현상을 진화론의 잣대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문화’조차 ‘진화된 뇌’의 산물이니 생물학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식이다. 도킨슨처럼 문화를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 으로 본다면 그러지 말란 법도 없겠다. 그러나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랴. 문화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어떤 문화인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문화의 기원보다 문화의 콘텐츠에 더 관심이 간다는 얘기이다. 제인 구달이 침팬지가 도구를 사용한다는 연구를 발표한 것이 도구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최초로 일깨운 엄청난 사건이란다. 오늘날 인간이 사용하는 고도로 발달된 도구에 비해 침팬지의 막대기, 모루돌 하나가 무어 그리 엄청나단 말인가. 여기에서 순수학문의 관념성이나 비실용성, 조금 심하게 말하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수선떠는 영역고수의 메커니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생물학과의 만남을 더 이상 시도할 생각이 없다. 최재천은 매력적이지만 그가 그토록 신봉하는 다윈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

그대신 인문학적 화두들은 여전히 가슴을 파고든다. 인간에 대한 인문학의 핵심적 질문 세 가지-나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를 다시 처음부터 곱씹어 보아야 하리라. 근본적인 질문일수록 정답이 없는 법이라고 도정일이 위로해준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담 형식으로 구성된 책을 처음 읽어 보았다. 저자와 낯선 학문에 대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논의가 반복되거나 명료하지 못하다는 단점도 느껴진다.
예를 들어 나를 포함해서 일반 독자라면 다윈과 프로이트의 원전을 읽어보지 않은 경우가 많을텐데, ‘대담’을 통해 핵심내용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또한 어지간히 합의를 보는 대목인데도 두 영역의 ‘대담’이라는 성격상, 표현만 달리해서 자기 학문의 입장을 고수하기도 했다. 똑같아지면 죽는다는데 우리 사회에 이만한 석학과 이만한 시도를 할만한 다양성이 있다는 건강한 신호로 받아들인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이 쓰여진 순서를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제일 처음 기본적인 화두를 정해놓고 우선 난상토론을 한 다음에 그것을 1차 원고삼아 지면으로 재구성했을 것이다. 책의 성격이 이렇다보니 두 분의 ‘대담’이 조금 반복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에게만 고유한 특성은 없다는 생물학의 기본 주장과 유전자의 역할 같은 것이 계속 반복된 것같다. 그러면서도 결론이 명백한 것도 아니다. 개인 최재천과 일반적인 생물학의 주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합리적이고 개방된 학자 최재천은 상당히 인문적인 주장에도 승복을 하지만, 생물학을 대표하는 입장을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박식하고 능란한 도정일의 언변에 이미 설득당했으면서도, 표현만 달리해서 ‘대담’을 유지하는 때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영역이 다른 학문간의 영역싸움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유전자 없이 인간의 문화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문화역시 ‘확장된 표현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차피 ‘과학적 검증’이 될 수 없는 ‘인문적 주장’이 아닌가.
유전적으로 동일한 복제인간을 만들어도 그 개체가 어디에서 성장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생물학 쪽에서 받아들이면서도, 유전자가 우리로 하여금 자유의지를 갖게끔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그릇 안에 담기지 않을 이론은 없다는 얘기이다. 도정일이 말했듯 유전자가 부처님 손바닥이라 인간의 어떤 행동도, 선택도, 그 손바닥을 못 벗어난다. 긴 논의가 각자의 학문적 도그마를 확인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다.
다행히도 두 석학은 보통 사람들은 아닌 것같다. 프로이트 부분에서 맹렬하게 부딪치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행복한 일치를 보는 것이다. 번식이 너무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면 사회가 붕괴한다는 생물학적 진리와, 다양성과 극단과 모순이 함께 존재하는 두터운 사회를 지향하는 인문학자의 결론은 같았다. 고수끼리는 통한다는 말이 이것인가, 따라서 나는 이 책에 인용된 그 많은 사례에 감탄하며 겨우 인문학과 생물학에 감을 잡았을 뿐, 조금 미흡한 점이 있다면 전적으로 ‘대담’이라는 형식에 대한 것뿐이다.

<4> 책에서 인용하기

1. 즐거운 몽상과 끔찍한 현실

"시는 상실의 예술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상실을 관리하는 예술’이죠.
인문쟁이 대선배 소크라테스가 진작 그런 말을 했어요. “‘고통과 쾌락은 하나의 머리를 가진 두 몸뚱어리”라고 말이죠. 하나를 제거하면 다른 하나도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행복약은 ‘삼불’을 제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행복’을 제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p. 72
행복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아주 위험한 사태가 벌어집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오케이, 고약한 자들과 손잡고 악과 동맹을 맺는 것도 오케이라는 게 되거든요. 이게 행복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이데올로기 앞에서 인문학은 사실상 속수무책이죠. p.77
글쎄 어찌된 셈인지 고통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이 진실도 행복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문젭니다. 그게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조건이 아닌가 싶어요. p. 78
종교, 예술, 과학, 기술은 문명의 토대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인간적 활동의 최고급 알맹이들입니다. p. 86
종교는 철학, 역사와 함께 성찰적 행위의 영역에, 예술 과학 기술은 창조적 행위의 영역에 속합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활동들은 ‘성찰과 창조’라는 두 개의 축 위에 전개됩니다. 문명이란 인간이 이룩한 업적의 총체인데, 그 업적은 쉽게 말하면 성찰과 창조라는 축 위에 서 있죠. p.88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우리 사회에는 서구의 자연과학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자연과학을 번역하고 소개한 사람들이 거의 문인들이거든요. 제도적으로 분과학문의 시스템은 일본적으로 재편되지만, 실제로 당대의 학자들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구분해서 공부하진 않았던 것같습니다. 이광수 장응진 최남선은 물론이고 시인이자 비평가인 김기림은 J.A. Tompson의 <과학개론>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상은 건축가이면서도 수학과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자연과학 및 인문학의 지식에 해박한 시인이었죠. 해방이전까지만 해도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는 거의 없었는데, 언제부터 이러한 간격이 생겼는지 궁금하네요.
p. 89
몇년 전 미국 샌디에이고 대학을 방문했던 한 한국인 교수가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인지과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대학원생들하고 하이데거를 읽고 있더라는 거죠. 요즘 미국 경제학계를 보면 심리학의 통찰을 빌려 인간의 경제 행위를 설명하려는 경향이 대두하고 있습니다. p.94
한국의 제도 안에서는 개인의 유전적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습니다.
생존의 게임 자체가 시험처럼 획일화된 기준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신분 상승 욕망은 그렇게 왜곡된 형태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자연은 매우 다양하고 그 자연에 적응하여 사는 방법 또한 무척이나 다양한데 우리는 단 한 개의 잣대로 모든 걸 가늠하려 합니다.
인간이 만일 지금까지 존재하는 동안 하나의 잣대에 맞추려 했다면 벌서 오래전에 멸종하고 말았을 겁니다. p.109

2.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

결국 과학과 인문학이 다시 만난다면 그 연결고리에 서 있을 수 있는 학문이 진화론이 아닌가 싶어요.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이 그렇게 기대하죠. 인문학적인 상상력에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자의 상당수도 진화생물학자죠.
진화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싶어했던 인문사회학자를 두 사람 뽑으라면 대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꼽잖아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다윈에게 바치고 싶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p.113
신화는 과학이 아니라 상징이고 은유입니다. 과학이 없었던 시대에 신화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기능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연현상을 이야기로 푸는 신화가 ‘자연신화’입니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신화가 비합리적이고 황당하다고 해서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그 비논리성과 비합리성이 아주 중요합니다. 과학이 합리적으로 해명하려는 것과 신화가 상징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이죠. p.114-115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라고 말할 때, 그 ‘하느님’을 너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그 때의 ‘하느님’은 인간이 아직도 해답을 얻지 못한 많은 질문들의 집합일 수 있으니까요.
신화도 그렇습니다. 신화는 답이 아니라 질문일 때가 많습니다. 신화는 상징과 은유의 언어이기 때문에 과학의 사실적 언어로 읽으면 안됩니다. 신화의 상징적 의미는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하고, 신화의 근본적 질문들은 여전히 해답 없이 열려있죠. p.118-119
진화론 때문에 창세기가 휴지조각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생물학적 설명보다도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지혜가 거기 담겨 있습니다. p.120
진화론이 인간을 설명할 때 동원하는 두 개의 핵심 개념은 ‘생존’과 ‘번식’입니다.p. 121
나는 인간에 대한 인문학의 핵심적 질문으로 세 가지를 꼽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p. 124
윌슨 교수가 ‘사회생물학’을 썼을 때, 법학은 인간의 법률적 행위를 연구하는 인간생물학이고,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적 행위를 연구하는 인간생물학이라고 선언했었죠. p.125
남자 하나에 다수의 여자, 여자 하나에 다수의 남자, 이것이 아마 초기 원시 인류사회의 훨씬 자연스런 사정이었을 겁니다. 동물계에서처럼 힘센 수컷이 다수의 암컷을 거느렸을 수도 있고요. 요즘 용어로 말하면 단혼제가 아니라 중혼제가 원시 가족 형태였을 거예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남자 하나, 여자 하나가 마치 자연질서인 것처럼 굳어진 거죠. 그러나 이건 자연질서이기 보다는 사회적 질서입니다. p.135

3. 생명복제, 이제 인간만 남은 것인가

제대로 된 과학자라면 모름지기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인문학적 분석을 할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자유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구속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날 구속하기 전에 내가 스스로 나를 구속하고 그걸 남이 인정하면 가장 이상적이라는 말입니다
p.176
얼마 전 제가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 >라는 책을 써냈습니다. 앞으로 머지 않은 장래에 거의 확실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100세를 넘기는 시대가 올 것인데, 그렇게 되면 은퇴하고 살아야 하는 기간이 너무 길어지죠. 그래서 저는 그 책에서 아예 우리 인생을 번식기 50년과 번식후기 50년으로 나눠 인생 이모작을 하자고 주장해봤습니다. 번식후기를 미리미리 잘 준비하면 오히려 자식 양육의 부담을 안고 있는 번식기보다 훨씬 신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p.181
“홀로 서는 연구자 키워내기, 그것이 대학원 과정의 목표죠.
p. 191
‘인간은 어째서 인간인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이 인문학의 핵심 질문이죠. 문학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이 사람을 형성하는, 말하자면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데 무슨 중요성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고, 영문학 교육이라는 것이 서구 문명과 문화, 그리고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p.195
‘달마게이트’라는 말이 있죠? 학생들이 어떤 것의 중요성에 눈뜨는 일종의 ‘깨침문’ 말입니다. 요즘 대학에서는 인문학 강의가 인기없다고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인문학 강의 몇 개를 듣는 사이에 학생들은 제 힘으로 인문 문화의 가치를 깨치는 인문학적 ‘달마문’을 통과합니다. p.196

4. 인간 기원을 둘러싼 신화와 과학의 격돌

“생물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혁신과 모든 창조의 유일한 기원은 우연이다. 순수한 우연,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맹목적인 그 우연만이 진화라 불리는 거대한 건축물의 뿌리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여러가능한 가설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현대 생물학의 중심 개념이다. 오늘날 우연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가설이며, 그동안의 관찰과 실험에서 ‘사실’로 확인된 것들과 일치하는 유일한 개념이다. p. 207
사실 생물학은 죽음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왜냐하면 죽는다는 게 결국 생명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제일 보편적인 특성은 한계성입니다. p. 212
아담과 이브가 진정 하느님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이라면 어머니의 존재를 상징하는 배꼽이 없었어야 한다는 거죠,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아담을 그릴 때도 이게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p.217
홀데인이 귀찮다는 듯이 한마디로 “그 양반, 딱정벌레를 병적으로 좋아하는 괴벽이 있었던 모양이야”라고 대답했다는군요. 지구에서 제일 많은 존재가 곤충이고 곤충의 거의 3분의 1이 딱정벌레거든요. p.218
창작이든 비평이든 간에 문학사상 가장 강력한 문학이론을 창시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 입니다. 그런데 이 2,400년된 영감님의 플롯 이론은 우연성을 거부하는 철저한 인과론이자 목적론이에요. p. 234
20세기에 들어오면 창작이론이 굉장히 다양해집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인과론적 플롯 이론을 거부하거나 거기서 이탈하는 것들입니다. 훨씬 자유로운 창작방법을 제시하는거죠.
p. 235
마야문명, 이스터 섬의 문명, 아나사지 문명 등은 그 옛날 대단히 화려했던 문명들인데 이제는 그 영화의 흔적만을 남겨둔 채 허무하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다이아몬드 교수의 분석에 다르면 그 모든 문명을 무너뜨린 유일한 원인이 환경 파괴는 아니었지만 어김없이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p. 242

5. DNA는 영혼을 복제할 수 있는가

유전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한다는 거죠. 과학의 길은 아직 멀었는데 기술이 덤벼들어 선무당 짓을 하니, 이게 큰 문제입니다. p.249
아들의 입대를 며칠 앞두고서도 서둘러 장가보내는 일이 있었어요. 만일에 대비한 일종의 복제전술이죠. p. 251
유전적으로 볼 때 개인은 월등해지는데 비해 집단은 완전히 열등해지는 길로 들어서는거죠. 나쁜 유전자를 버리고 좋은 유전자로 갈아 끼운 사람은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분명 나아진 것이겠죠. 그러나 모두가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지극히 취약한 집단을 만들고 마는 겁니다. p.256
10여만 개의 인간 유전자 가운데 그 기능이 밝혀진 것은 겨우 몇백 개에 불과합니다. 그밖의 대다수 유전자들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해 거기 있는지 인간이 아직 모르는, 말하자면 휴면 유전자들이겠죠. 그 많은 휴면 유전자들 가운데 어떤 것은 진화의 긴 역사에서 한때는 뛰어난 기능을 발휘하다가 지금은 그 기능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그냥 쉬고 있는 놈도 있을 거예요. 다시 말해서 현재의 지식으로 유전자들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라는 거죠. 이렇게 보면 어떤 잡초도 ‘잡초’가 아닙니다. 잡초라고 해서 뽑아버리고 다 죽여 없애면 우리가 모르는 문제에 대한 비장의 해답들을 없애는 일이죠. p.258

6. 인간, 거짓말과 기만의 천재

과학적 방법이란게 확립된 이후에 과학은 여전히 ‘구라’가 될 수 있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요. p.286
“나는 거짓말을 통해서만 진실을 말한다.”는 소리기도 한데, 이건 문학만이 아니라 인간사 전반을 꿰뚫는 대단한 진실 같아요.
피카소도 이렇게 말했잖아요. “예술이란 우리에게 진실을 일깨워주는 거짓말”이라고.
p.289
미국이 남태평양 작은 섬에서 핵실험을 했을 때 나무 한 그루 남지 않았던 그 섬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동물이 쥐였잖아요?.
귄터 그라스도 그의 소설 ‘암쥐’에서 핵전쟁과 자원 낭비로 인해 자멸하는 인간을 향해 마지막 한 마디를 일갈하는 동물로 쥐를 택한 것이겠죠. p.295
1990년대를 풍미한 미국 TV드라마 Friends를 아시죠? 그 해 1년 내내 그 드라마에는 나무가 단 한 그루도 등장하지 않더군요. 그 친구들이 사는 뉴욕의 아파트 두 방과 동네 카페가 그들의 환경 전부더라구요. p.312
생태론적으로 지금 자연환경과 문화환경을 구별하는 일은 무의미해요. 그래서 인문학에서는 한동안 문화를 ‘제2의 자연’이라고 불렀어요. 이제 사이버환경도 생물학적인, 또는 생태론적인 환경이 되는 거겠죠? 그 사이버 환경이 지금보다 더 발전해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거의 전면적인 환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p.313
생명은 어떻게든 길을 찾는다. Life will find a way. p.315
우리가 만든 인공적 환경도 뇌 활동의 결과물이잖아요. 뇌가 진화의 산물이라면 뇌가 만들어낸 기술이나 문화도 그저 한 단계 확장된 진화의 산물일 뿐이죠. 그렇다면 거의 모든 인공적 환경이 생물학적인 문제가 되지 말아야 할 법은 없는 겁니다. p.316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관습, 가족제도, 이데올로기 등 이른바 문화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나요? 인간의 유전자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낸 작품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화 역시 유전자가 뻗친 긴 팔 끝에 있는 겁니다. p.318
유전자는 사실 별 게 아닙니다. 특정 단백질의 합성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화학물질에 지나지 않죠. 어떤 유전자에서 어떤 단백질이 합성되느냐 하는 과정에는 거의 오류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단백질들을 끼워 맞춰도 언제나 동일한 구조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늘 약간의 오차가 생긴다는 거죠.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걸 우리는 ‘발생학적 잡음’ 또는‘반응양태’라고 합니다. p.319

7. 예술과 과학, 진화인가 창조인가

인간은 왜 자살하느가, 그리고 왜 인간은 동성애를 하는가. 이런 문제는 여전히 생물학이 속시원히 풀어내지 못한 숙제입니다. 유전적으로나 진화론적으로는 전혀 효용이 없는 행동들이니까요. p.323
자폐아들 중에 음악이나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는 아이들이 발견된다는 보고들이 있어요 이걸 보면 언어능력과 음악적 재능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말하기 어려워지죠.
p.324
동기를 알 수 없을 때를 ‘상징문법의 상실’이라고 말합니다. 벽화가 무슨 동물들을 그린 건지 파악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왜 하필 특정의 동물들을 거기 집합시켜놓았는가, 그걸 알 수 없다는 거죠. 그림은 있는데 그걸 그린 동기와 목적, 의미는 현대인이 알 수 없는 겁니다. 문법의 상실이죠. 그 문법이 복구되지 않는 한 그림은 읽히지 않는 거죠. 현대인의 코드로는 구석기의 코드를 읽어내지 못하니까요. p.328
구석기인간이 유혹하고 싶었던 게 꼭 번식을 가능하게 해 주는 성적 대상뿐이었을까? 그건 아니라 생각입니다. 최소한 세 가지 다른 대상들을 생각해볼 수 있어요. 신, 조상, 죽음같은 거 말입니다. p.331
근본적 질문일수록 정답이 없어요. 근복적 질문은 단 하나의 정답 찾기보다는 이런저런 생각을 촉발하게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소리도 했고요. 근본적 질문은 說을 풀게 하는 질문입니다. p.334
음악이 제사용 목적으로만 시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사 이상으로 목적이 분명해 보이는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전투, 모방, 통합입니다. 부족 간 싸움이 벌어질 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세요? 비트 beat예요. 한판 싸움을 준비하자면 심장과 팔다리에 힘을 넣어줘야 하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 비트입니다. 북이 나오기 전에는 돌멩이, 막대기, 창으로 땅을 두들기거나 발로 땅을 차서 규칙적인 박자를 만들고 소리 지르고 템포를 조정했겠죠.
비트와 템포는 흥분제같은 효과를 내요. 빠른 템포의 격렬한 외침이 사람 심장을 뛰게 한다는 건 구석기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고 봐요. p.338
그런데 놀이에는 참 이상한 성질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실용적 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놀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실용성을 떠나는거죠. 예술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되는 거죠.
예술도 결국 스토리텔링인가 보죠?, 예술의 기원도 구라의 기원과 거의 동일한 것 같네요.
p.341
한국남자들이 이쑤시개형을 선호하는 것은 자연선택도 성선택도 아니고 미적 기준의 변이현상도 아닌, 사회 경제적 ‘부자이데올로기’의 보이지 않는 명령이라 말할 수 있죠. p.348
인간이 거짓말 할 수 있는 능력은 진화의 산물일 겁니다. 그 능력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사기꾼이 되고 어떤 사람은 소설가가 되죠. p.356
구달 박사님이 침팬지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즘말로 하면 대박을 터뜨린 연구가 바로 침팬지도 도구를 사용한다는 걸 발견한 사건이었죠. 침팬지들이 나뭇가지를 흰개미 굴 속에 집어넣어 흰개미들이 그걸 물면 꺼내어 잡아먹는 행동을 관찰 한 겁니다. 도구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최초로 일깨운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서아프리카의 침팬지들은 흰개미 사냥에는 큰 관심도 재주도 없고, 대신 돌로 견과를 깨먹는 일을 잘합니다. 상당히 복합적인 도구를 제작해서 사용하는 셈입니다. 두 집단 모두 어떤 문제에 대해 상당히 지능적인 해답을 찾아 그걸 문화적으로 전수하고 있다는 겁니다. p.359

8. 동물의 교미와 인간의 섹스

피그미 침팬지 즉 보노보의 경우를 보면 아주 흥미로운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처럼 성이 번식과 완전히 별개로 되어 있는 형태가 보노보에게서 굉장히 많이 관찰됐어요. 암컷들이 거의 성을 생활처럼 뭔가를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죠. p.369
사회생물학의 입장에서 보면 특별히 인간적이랄 행동은 없다는 이야기죠? p.375
사랑이란 걸 빼고 나면 예술의 절반은 날아갈텐데, 사회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이란 건 일종의 환상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이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속에 인간 행위의 독특한 국면들이 있는 것 같아요. 수천 가지 별난 이유로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유전자의 명령을 벗어나는 이유가 수천 가지라는 이야기죠. 이 ‘벗어나기’가 자유의 영역 같아 보이는 겁니다. p.376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데 이해하기 힘든 문제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도 결국 나와 유전자를 섞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상대를 고른답시고 고른 것이라는 겁니다. 사회생물학에서는 유전자가 부처님 손바닥입니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그 선택도, 그 손바닥을 못 벗어나죠. p.379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의 성향을 타고난 동물입니다. 배란시기를 모르는 상황에서 남성이 찾아낸 가장 좋은 전략은 한 여성이라도 잡아놓고 매일 밤 그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이었죠. 가족과 결혼이 탄생한 겁니다. p.395

9. 판도라 속의 암컷, 이데올로기 속의 수컷

생물학이 과학이라고 하지만 과학사 자체가 오류투성이입니다. 문제는 그 오류들이 학문적 오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 거의 범죄에 가까운 ‘만행’이 될 때입니다. p.409
한계성, 유한성을 가지고 온 것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인데 신화에서는 그것을 완전히 여자한테 덮어씌워버리는군요. p.416
로버트 트리버즈의 세미나를 들으로 갔는데, 그 양반이 다짜고짜 쑥 들어와서는 칠판에 ‘다윈이 본 세계 질서’라고 적어놓고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새끼 여자 남자’라고 쓰더군요.
개구리 알은 침으로 찔러주기만 해도 발생을 시작해서 올챙이로 태어나거든요. 최근 호주와 영국의 연구 팀들이 비슷한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정자 없이 난자에다 전기 충격을 주면 난자가 발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실험을 성공시킨 겁니다. 이건 사실 굉장히 무시무시한 사건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정말 남자는 필요없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되면 남자가 공헌할 수 있는 유전적 다양성도 사라진다는 거죠. p.419

10.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사회생물학자들은 그동안 동성애의 진화를 설명하려고 애를 많이 써왔습니다. 분명히 진화적인 이득이 있었기 대문에 그들이 현재 존재하고 있으리라는 논리죠. p.433
남성 역할을 하던 남성 동성애자가 자기보다 더 남성적인 남성 동성애자를 만나면 여성의 역할을 하게 되죠. 이런 점들을 포괄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게 반드시 유전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행동이라기보다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행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p.442
‘도둑일기’의 작가 장 주네는 그 자신이 도둑, 동성애자, 사회이탈자였는데, 사르트르가 그 친구한테 반해서 ‘성 주네’라는 책을 썼어요. ‘그의 동성애는 선택이다.’라고 썼죠. p.444
히브리 신화에서 아담과 이브는 같은 날 창조되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여자는 시간적으로 남자보다 훨씬 나중에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판도라가 신화 서사대로 최초의 여자라면, 남자들은 여자 없이 한참을 살았다는 애기가 되죠. 이건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우스꽈스런 얘깁니다. 그건 여성의 탄생이 아닌 ‘여성성’이라는 사회문화적 젠더의 탄생에 관한 신화적 처리라고 봐야 해요. 이 방식으로 읽어내면 판도라 이야기는 젠더의 탄생에 대한 아주 빼어난 서술로 다가오게 됩니다. p.445
동물계를 보면 사실 근친상간을 피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아주 철저하게 발달되어 있어요. 그래서 새들의 경우에는 암컷들이 성장하면 자기 동네를 떠나는 게 철칙입니다. 포유류는 수컷들이 다른 지역으로 나가요. 혹 잡아두어도 그 안에서는 짝짓기를 거의 안 해요. p.451

11.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소설인가 과학인가

문학은 이처럼 기록에 매이기보다는 기록의 ‘너머’를 봅니다. 구술사로서는 할머니들 이야기의 어떤 부분이 ‘비진실’이겠지만 그 비진실 속에 또 다른 진실, 가려진 더 깊은 진실이 있을 수 있죠. 역사가 말하지 않는 진실을 말하려는 것이 문학입니다. 정신분석도 역사 너머를 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문학과 아주 닮았죠. p.461
프로이트의 이론은 진화생물학자의 입장에서는 문학적상상력에서 나온 일종의 신화에 불과해요. p.463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세 줄로 요약될 수 있어요 “내게는 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의 주인은 나의 무의식이다.” p.465
새 것이 낡은 것을 밀어내고 세상을 차지하는 것이 자연의 질서이고 봄의 문법입니다.
이 몰아내기가 아비 ‘거세’이고 ‘아비 살해’예요. 죽이는 것도 거세이고 권력 찬탈도 거세입니다. 동양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낸다’고 말입니다.
p.466
사회적 권력관계에서 보면 거세의 대상이 반드시 유전적 아비일 필요는 없죠.
라캉은 ‘아비’를 월씬 추상적인 ‘아비의 이름’으로 확장합니다. ‘아비의 이름’에는 이데올로기도 포함될 수 있어요. 프로이드가 내밀히 겨냥한 최대의 아비도 문화적 아비, 곧 ‘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p.468
식물의 경우에는 애당초 아비 살해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진화된 거죠.
프로이트에게 눈과 성기는 상징적으로 동일해요. 대상을 장악하고 침투, 소유, 지배를 수행하는거죠. 그래서 근대를 눈의 시대, 시각 권력의 시대라는 논의들이 나와요. 미술의 원근법도 이 권력 형식의 하나이며, 원근법 해체가 근대적 권력을 거세하는 일이라는 주장들도 있어요. p.469
동물세계를 보면 모든 동물이 다 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은 동물들은 뇌없이 다분히 흐트러진 신경계만 갖추고 있어요. 뇌가 모든 일을 다 하는 게 아니라, 저 바깥 신경계 말단이 하는 일이 따로 있을 거라는 거죠. 그런 연구 경향 쪽에 있는 외국 학자들이 이상하게도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 동양의 기에 대한 연구예요. 동양에서의 기는 뇌 혼자서 주물럭거리는 것을 분할해서 몸이 좀 가지고 있는 거라고 믿어요. p.485-6

12. 다양한 생명체와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

서구문명이 계몽의 신화와 진보의 신화를 거쳐 개발 신화에 빠져들었고, 오늘날에는 세계화신화에 빠져있다고 말씀하셨어요. p.495
이성의 질주 끝에 인간이 도달한 것은 ‘광기’입니다. p.496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사회는 수직 서열 사회, 이 수직성의 사회를 수평성의 사회로 바꾸고 합리성을 확장하는 일, 이것이 ‘사회적 근대’의 알맹이입니다. p.499
연줄주의에는 두 가지가 있죠. 하나는 친족등용주의이고 또 하나는 친구나 친지 등 잘 아는 사람들만 골라 자리에 앉히는 패거리주의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나는 ‘끼리끼리즘’이라 불러요. p.500
유전자의 발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발휘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환경과 만나느냐에 따라서 발현의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면 바로 여기, 여기가 자유의 영역 아니겠습니까? p.541
지상의 종 다양성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절감하게 됩니다. ‘똑같아지면 죽는다’는 거잖아요? p.543
영국 비평가인 존 웨인이 오래 전에 꽤 그럴듯한 소리를 한 적이 있어요. “신의 언어와 짐승의 언어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 그것이 시다.”라고 말이죠. p.546

13. 21세기형 인간, 호모 심비우스의 번식을 위하여

세계화의 그늘에서 말라죽는 대표적인 문화의 꽃이 바로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도선생님께서도 지적했듯이 현재 전세계 인구의 90%는 그저 100개 남짓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머지 10%의 사람들이 무려 6,000개 가량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뜻이죠. 우리 한글은 사용인구로 볼 때 세계 12위의 위용을 지닌다고 해요. 언어학자들은 이번 세기가 끝나기 전에 현존하는 언어의 절반이 또 사라질 것이랍니다. p.552
한 자도 안 되는 가슴이 사실은 깊은 골짜기거든요. 그 가슴의 골짜기는 신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두터움, 심연이 필요합니다. p.559
번식이 너무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면 사회가 붕괴한다는 거죠. p.560
잎꾼개미는 무려 6,000년 전 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만, 우리가 농사를 시작한 때는 불과 1만년 전입니다. 우리 현생인류가 이 세상에 등장한 것이 20-25만년 전이라면,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랍시고 거들먹거린 것은 전체 기간 중에서 최근 5% 정도밖에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 전의 95% 동안에는 우리도 별볼일없는 털북숭이 원숭이에 지나지 않았던 거죠.
p.569
지구에서 무게로 볼 때 가장 성공한 생물이 현화 식물이고, 숫자로 가장 성공한 생물이 곤충입니다, 두 생물이 서로 꽃가루받이를 통해 공생하고 협동하여 함께 큰 성공을 거둔 겁니다. 그러니까 ‘경쟁을 넘어 협동으로’라는 단계군요. 제가 말한 두터운 세계와 최 선생님께서 말한 호모 심비우스의 세계가 같은 지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p.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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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2006.03.11 10:03:55 *.116.34.222
잘 읽었어요.

한가지... '책 속에서'에 인용된 페이지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홈페이지를 다녀간 분들이 책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해 메모 형식이 아닌 full sentence로 인용해 주시면 좋겠어요. 인간이 '친절한 동물'이었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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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6.03.11 10:43:18 *.85.151.175


안녕하세요, 구선생님. 제 개인적인 메모노트라고만 생각했는데, 설령 그렇다고 해도 페이지가 있는 것이 나중에 인용을 한 번 하더라도 더 편리하겠네요. 곧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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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6.03.11 20:26:41 *.199.135.162


수정했습니다. 몇 번을 시도해도 페이지가 입력이 안 되어 당황했는데, 페이지를 둘러싼 괄호를 지우니 입력이 되네요. 본문 중의 괄호는 입력이 되었는데.... ?
편안한 일요일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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