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김귀자
  • 조회 수 2676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6년 3월 14일 00시 13분 등록
(쓰다보니 분량이 약간 많아져서 한글파일이 읽는 데 나을 것 같습니다.)



■책
대담(對談),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 도정일· 최재천 저 / 휴머니스트, 2005


■한줄평
“기가 질리도록 치열하게 진행된 인문과 자연과학의 고밀도 대담을 통해
인간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을 발견하다.”


■만족도
★★★★☆




■저자
‣도정일; 신화를 품은 인문학자.
1941 서울 출생, 시종일관 도를 넘어선 박학다식함으로 독자를 놀라게 인문학자.
그 많은 지식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의문이 들 정도. 문화평론가로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적인 일보다는 공적인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우리 시대 대표적 지식인. 대표 평론집 <시인을 숲으로 가지 못한다>

‣최재천; 개미를 사랑한 생물학자.
1954 강릉 출생, 생물학을 재밌게 풀어낼 줄 알고, 생물학의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타학문을 넘나들 줄 아는 생물학자. 과학을 과학자들의 커뮤니티 밖으로 끌고나온 귀한 학자 중 한 사람. 오래전부터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대화를 강조해온 지식인.
주요저서 <개미 제국의 발견>,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나의 생명이야기>, <열대예찬> 등등.






■의견과 감상
각자가 서 있는 시점이 우리의 관점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절대 접합할 수 없을 것처럼 생각되던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이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크나큰 시사점을 준다. 이 책은 2001년 12월부터 2004년 3월까지 10여 차례의 대담과 4차례의 인터뷰를 재구성한 것이다. 대담의 원고 량은 2,500매였고, 인터뷰는 800매였다고 한다. 내가 며칠 만에 읽을 책이 4여 년 동안 여러 차례의 대담을 통해 이뤄진 것이라는 데 경의를 표한다. 무슨 책이 쓰기에 쉽겠냐 만은 이렇게 귀중한 것을 내가 읽어볼 수 있었다는 것이 매우 행운으로 여겨진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고, 고개를 수차례 끄덕이며 본 부분도 많았다. 내가 다 소화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한 부분이라도 놓치는 것이 안타까워 한 구절이라도 붙잡기 위해 애썼다. 그러면서 책이 온통 알록달록한 포스트잇으로 뒤덮였다.

이 책은 나에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놀라운 이론들이 두 학자들 사이로 속사포처럼 이동했다. 나는 그저 가만히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눈부시게 왔다갔다하는 탁구공을 지켜보며,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관점’의 차이가 아닌가. 읽으면서 하나의 사실을 이렇게도 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초보자가 보는 진실은 하나이지만, 고수가 보는 진실은 하나이지만 모두가 될 수 있듯이, 같은 사실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두 학자의 대담을 지켜보면서, 새삼 인문학과 자연학의 간극이 넓고도 넓다는 것을 느꼈다. 이는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출발선에 서는 데다,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여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행히 이들처럼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이 있기에 이런 대담을 우리 같은 일반인도 끼어들 수가 있지만, 앞으로 이 사이를 좁히는 데에는 보다 두터운 노력과 인내, 양보가 필요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처음엔 명확히 구분되던 영역이 읽어가면서 점점 도정일 선생님과 최재천 선생님 사이의 간극이 좁혀져 나중에는 누구의 말인지 헷갈릴 정도가 되었다.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어 인문학자가 생물학을 논하고, 생물학자는 인문학으로 풀어내니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정신없이 보다가 아~이 말은 도정일 선생이 하셨겠구나 하고 보면 최재천 선생이다. 도선생은 생물학을 말하고 있고, 최선생은 인문학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걸 보면서 무척 재밌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좀더 다양해진 관점을 통해서 나는 멀리서 나를 보는 듯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인간에게 자신을 까발리는 것처럼 두렵고도 통쾌한 것이 있을까? 대담을 따라가면서 생각을 거듭하는 순간, 나는 불현듯 자유를 느꼈다. 무언가 족쇄를 채우고 있던 것이 ‘탕’하고 풀린 듯한 느낌. 아무것도 거부하지 말라. 인정할 건 인정해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부정하는 것이 죄다. 내가 지금껏 알고 있던 대가들과 그들의 이론을 들었다 놨다 하는 쾌감! 우리가 아는 진리역시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대담의 형식이 좋은 점 중 하나가 내가 의문을 그들 중 하나가 대신 질문해준 다는 점이다. 난잡한 것 같아도 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대담형식이 오히려 쉬웠다.

개인이 개인으로 사는 것.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 생물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일임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개체 관점에서 개인의 독특함을 유지하는 것은 인류 전체의 종족 측면에서도 ‘다양성’을 지켜가는 데 아주 중요하다. 다양할수록 두터운 세상이 만들어지며, 위협에 더 탄탄할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전멸 혹은 공멸은 다양성이 죽을 때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다양성보다는 동질성이 높아지면 그만큼 문화적으로 궁핍해진다. 이성과 상상력이 함께하는 세상,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복합적인 세상이 좋다는 도선생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의 처음과 끝은 결국 같다. 혼합성, 모순과 대립물이 공존하는 두터운 세계. 제거해야할 악, 결여보다는 인정하는 것이다. 인문학과 자연학의 대담을 지켜보면서 처음부터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질문은, ‘우리가 왜 학문을 하느냐’였다. 자연과학, 인문과학으로 나눠져서 서로 왕래 없이 우리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야말로 앎을 위한 앎이 아니었을까? 하나의 해석을 두고 사분오열되는 학계에서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것은 무엇이 본질이냐는 것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매우 의미가 ‘두터운’ 책이랄 수 있다.



■글 맥
(*아래 ‘도’: 도정일, ‘최’:최재천 의 줄임)

•인문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은 또한 그렇게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학문이기 이전에 삶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책을 읽거나 개미를 관찰하기 이전에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살아간다. 인간에 대해 말하기 전에 ‘당신’에 대해 말해 달라. 당신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태어났고 성장했는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10쪽)



1.즐거운 몽상과 끔찍한 현실
•문학은 추락을 무의미한 낙하가 아니라 상승으로 바꾸어주는, 즉 하강이 동시에 상승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술이다. (도, 25쪽)

•괴물이라는 말의 원뜻이 ‘정의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에요. 신화는 그런 것투성입니다.
타인을 이해한다, 타자를 이해한다. 우리말로 하면 역지사지, 바꿔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건데, 기본적으로 타자를 긍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것은 내가 나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열어서 타인을 받아들이거나 내가 나를 버리고 타인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인문학적 삶의 방법 가운데 내가 첫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이 ‘가슴을 여는 사회’입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울타리를 걷어치울 줄도 알아야 하죠. 그래야 타자가 들어오거나 자기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아니에요? (도,30~32쪽)

•19세기 영국소설에 <에리환(Erewhon)>이란 것이 있어요. 풍자작가 새무얼 버틀러의 소설이죠. 그 나라에서는 부지런한 사람이 벌을 받습니다. 정직이나 근면, 건강 같은 것도 형벌감이죠. ‘에리환’이란 제목은 영어의 ‘노웨어(nowhere)'를 뒤집어 놓은 건데, 노웨어란 아무 데도 없는 곳, 곧 ’유토피아‘를 의미하죠. 에리환은 말하자면 뒤집어진 유토피아인 셈입니다. 기초학문ㅇ르 우습게 아는 것이 한국의 장기입니다. 문화산업에서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야기입니다. 인문학은 문화산업의 기초자원이죠. 인문학은 온통 이야기 창고 아닙니까. (도,65쪽)

•요즘의 행복이데올로기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데올로기 앞에서 우울, 고통, 분노, 슬픔 같은 것의 인간학적 중요성을 말한다는 건 소용없는 일 같아 보이죠.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명령이 사람들을 너무도 강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문제는 행복이란 게 저만치 어디에 있다. 그걸 내가 잡기만 하면 된다고 조바심치는데 있죠.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그때그때 우리가 하는 일에서, 매 순간의 우리의 판단과 선택과 행동에서 행복을 얻기보다는 행복을 붙잡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아주 위험해집니다. 행복해지기위해서라면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오케이가 되거든요. (도, 77쪽)

•사실 ‘고통 없는 세상’은 인간의 오랜 꿈입니다. 고통 그 자체는 결코 추구의 대상일 수 없지만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진실도 행복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문젭니다. 그게 ‘인간으로 살기 위한 조건’이 아닌가 싶어요. (도, 78쪽)
☞사람들은 왜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는 것인가? 고통은 무엇일까?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사는가? 이런 질문들이 떠오른다.

•당장 시장에 내다팔 기술, 도움이 될 기술만 대단히 여기는 것이 우리 사회죠. 기술에 대한 우리 사회의 매혹은 시장가치, 돈 신분상승, 입신양명, 실용성의 요구에 사로잡혀 있어요. 과학에 대한 사회태도는 물론이고, 고용구조 변화 같은 기본 정책이 달라지지 않는 한 젊은 세대의 이과 기피 현상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도, 108쪽)
☞현상과 본질. 현상 100가지를 고쳐봐야 바뀌어 지지 않는다. 문제는 근본, 그 본질(本質)이다.

•아는 게 중요하지요, ‘아름답다’는 말은 ‘안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해요. 그래서 아름답다는 말 속에는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죠.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고 해치는 겁니다.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해치는 것도 잘 모르기 때문에 범하는 일입니다. 알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최재천씨는 더욱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사회에 알려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 37쪽)

•생물학자들은 우울증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라고 믿습니다. 우울증은 공포에 적응하려는 본성이고, 나쁜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그래서 우울해질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능력’이기도 한 겁니다. 공포를 느끼는 능력, 우울함을 느끼는 능력도 중요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최, 72쪽)

•중세에는 지금 우리가 그어놓은 학문의 구획이 없었다. 지금도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이들을 가리켜 ‘르네상스인’이라고 하죠. 지식, 엄밀히 말하면 지식을 탐구하는 학문영역들이 쪼개진 것은 16세기 들어와서입니다. 이른바 환ㄴ원주의가 20세기를 거치면서 인류에 엄청난 양의 지식을 제공해주었지만 이제 그 신봉모드에서 헤어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부분들을 아무리 붙여봐도 결국 전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요. 이제는 ‘인터’ ‘멀티’라는 단순한 조합을 넘어서 ‘트랜스’를 해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최, 93쪽)
☞여기서 최 선생님은 학문의 국경을 넘을 때마다 여권을 검사하는 절차는 생략할 때가 되었다는 멋진 표현을 쓰셨다. 학문간 무비자 이동이라...이거 멋지다.

•자연은 매우 다양하고 자연에 적응하여 사는 방법 또한 무척이나 다양한데 우리는 단 한개의 잣대로 모든 걸 가늠하려 합니다. 인간이 만일 지금까지 존재하는 동안 하나의 잣대에 맞추려 했다면 벌써 오래전에멸종하고 말았을 겁니다. (최, 109쪽)
☞최 선생님은 개인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한국의 제도는 개인의 유전적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제도가 거의 없다. 이를 다양하게 드러낼 여러 잣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유전적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통로라... 무엇이 될 수 있을까?



2.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
•문화는 인간을 재생산 한다. (도, 162쪽)
☞문화 DNA 에 대해.
•지구의 생명은 지극히 낭비적이고 기계적이며 미래지향적이지도 못하고 다분히 비인간적이며 비도덕적인, 더 정확히 말하면 무도덕적인 과정인 자연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진화는 결코 우리 인간을 탄생시키기 위해 존재해준 과정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연선택은 지극히 단순하고 기계적인 과정이지만 우리 인간을 포함한 이 엄청난 생명의 다양성을 탄생시킨, ‘자연이 선택한’ 가장 강력한 매커니즘이라는 겁니다.
(최, 132쪽)
☞다윈혁명에 대해.

•어떤 유전자도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전학 개념에 ‘다면발현’과 ‘다인자발현’이라는 다분히 관련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전자는 한 유전자가 여러 형질 발현에 관여한다는 걸 말하고, 후자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여러 유전자들이 한 형질 발현에 관여한다는 걸 말합니다. 혼자서, 그것도 거대한 형질의 발현을 책임지는 ‘신과 같은 ’유전자는 없습니다. (최, 162쪽)
☞요새 불고 있는 ‘우생학적 유전자는 있는가’에 대한 최 선생님의 견해다. 어느 환경에서는 열성이지만, 다른 환경에서는 우성일 수 있는 게 유전자다. 그렇기 때문에 섣불리 유전자를 조작하거나 발현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다.



3.생명복제, 이제인간만남은 것인가
•자유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를 구속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순간, 우리가 죽지 않는 방법을 발견하면, 그게 모두가 죽는 순간입니다. 누군가가 죽어주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는 거죠. 죽음이 삶을 허락하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가 죽지 않게 되는 날이 모두가 함께 죽기 시작하는 날이 되는 겁니다.
(최, 176-177쪽)
☞죽음에 대한 인식에 대해. 죽음과 탄생은 같은 것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죽어야 산다. 이 얼마나 역설적이면서도 멋진 말인가?

•히브리 서사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와 지식의 나무는 금지령이 내려진 나무입니다. 즉, 인간이 아무리 영원한 삶과 무한한 지식에 대한 욕망을 품어도 그것은 충족시킬 수 없는 금지된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박탈된 것, 그래서 그것을 추구할 때 부딪힐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를 보여주고, 그 한계 너머의 영토를 기웃거리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 히브리 서사의 지혜이죠. (도, 183쪽)
☞너 자신을 알라. 메멘토 모리. 이 모든 말은 네가 인간임을 알라는 신의 말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연구하고 공부할지 문제를 제 힘으로 찾아내고 그 연구의 의의와 중요성을 스스로 정당화할 줄 아는 능력을 기르는 것부터가 훈련입니다. (최,194쪽)
☞대학교육의 문제에 대해. 기술복제시대의 반교육적 폐해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4.인간 기원을 둘러싼 신화와 과학의 격돌
•생명의 제일 보편적인 특성은 한계성입니다. 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유한성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종교가 불멸성을 추구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히 사느냐, 꼭 이승에서 사는 게 아니라도. 철학과 마찬가지로 생물학도 본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생겨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 213쪽)


5.DNA는 영혼을 복제할 수 있는가
•자연은 인간이 아직 모르는 문제, 문제가 되는지 아닌지도 미처 모르는 문제들에 대한 숨은 해답들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유전상의 어떤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 결함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인간적 위대성이죠. 완벽한 유전자 덕분에 특출한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건 인간적 위대성과는 이미 품질이 달라요. 약 먹고 잘 뛰는 단거리 선수 같은 경우죠. (도, 258-259쪽)


6.인간, 거짓말과 기만의 천재
•문학이나 인문학 구라에는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죠. 나는 거짓말을 통해서만 진실을 말한다는 소리기도 한데, 이는 인간사 전반을 꿰뚫는 대단한 진실 같아요 (도, 289쪽)
☞예술과 진실성에 대해. 피카소 왈, “예술이란 우리에게 진실을 일깨워주는 거짓말”이란 말을 했다.

•인간의 정신진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세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분명한 의식체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틀린 그림’을 그려놓고 그 그림을 정확한 그림이라고 생각하도록 자기를 속이는 능력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대단한 통찰이다. 속임수가 성공하려면 자기가 속임수를 쓴다는 사실을 스스로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도, 297쪽)

•거짓말, 기만, 위장은 이미 수십억 년의 진화가 만들어 놓은 결과다. 단세포 생명체에서 고등 동물에 이르기까지 자연선택이 갈고 닦은 적응, 번식, 생존술의 일부라고이다. 인간이 자기기만을 보는 것이야말로 자기 본성을 이해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절차다. (도, 304쪽)

•도덕적 존재란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행동 및 행위 동기들을 비교할 줄 아는 자, 어떤 행동과 그 동기에 대해서 찬성하거나 반대할 줄 아는 자’고 다윈은 정의한다. 이에 로버트 라이트는 ‘인간이 도덕적 존재가 되는 첫걸음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비도덕적 동물인가를 깨닫는데서 시작한다.’고 토를 달았다. (도, 306쪽)


9.판도라 속의 암컷, 이데올로기 속의 수컷
•모든 가부장제의 신화에는 남자의 잉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 (도, 417쪽)


10.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히브리 신화에서 아담과 이브는 같은 날 창조되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여자는 시간적으로 남자보다 훨씬 나중에 등장합니다. 이는 ‘여성성’이라는 사회문화적 젠더의 탄생에 대해 신화의 처리라고 봐야 해요. 질서 만들기 면에서 젠더구분처럼 유용한 것도 없거든요. 각자의 역할 분담을 하면서 두 성을 사회적으로 철저히 불리한 것이죠. 젠더의 정치학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최, 447쪽)


11.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소설인가 과학인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확실하게 아는 일’입니다. 이 생각은 근대가 되면서 확실성의 추구가 더 치열해지죠. 인간이 자기를 알자면, 유한한 경험세계뿐 아니라 변하지 않는 객관적 존재인 ‘진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인간이 그 진리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플라톤은 호언했죠. 그런데 이걸 프로이트가 뒤집어 놨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알 수 없으므로 확실한 자기 지식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무의식이 인간을 이끌고 욕망이 인간을 인도한다면 어쩔 것인가? 무의식은 알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프로이트 식의 사유는 한 문명이 늙고 지쳤을 때 보이는 말기 증상의 일부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도, 483쪽)
☞종종 이런 의문을 품는다. 우리는 자신을 알아야 하는데 과연 다 알 수 있는가? 자기라고 믿는 것을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그것이 믿음을 가장한 기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이부분에 대해 아직 자신이 없다.


12.다양한 생명체와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
•나는 학생들에게 사람들의 행동방식을 이해하려거든 그들을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찾아보라고 말합니다. 가슴 들여다보기죠. 그러자면 과학과 이성이 서로 거들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근대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도, 496쪽)
☞생떽쥐베리도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제대로 갈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인은 변화에 상당히 민감한 것이 사실입니다. 뭐든 잘 바꾸고 잘 바뀌죠.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바뀌지 않는 거대한 관습적 심리 구조와 구시대 이데올로기, 그리고 관행이 똬리르 틀고 있습니다. (도, 500쪽)

•전통사회의 굴레를 벗어나 자기 운명을 제 손으로 만들고 수정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의 기원 지점, 거기에 ‘개인주의’가 있습니다. ‘내가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미래라는 것이 인간의 삶에 들어온 역사는 300년이 채 안되었어요. (도, 502쪽)
☞새로운 사실과 관점을 도 선생님은 내내, 쉬지도 않고 제공해주고 있었다. 정말 배운 바가 많았다.

•외딴 지역에서는 그 지역 특유의 흥미로운 행동방식, 개성, 인격 같은 것이 공유의 특성으로 발견됩니다. 고립지역에서는 지역 특유의 문화가 발전할 수밖에 없어요. 세계화 시대에는 이런 다양한 특성들이 사라집니다. 다양성이라는 자원이 고갈되는 것이죠. (도, 508쪽)
☞세계화가 다양성을 해친다는 지적은 전에도 많았고, 많이 접했다. 그런데 도 선생님이 지적하는 ‘자원’으로서의 ‘다양성’은 새삼 새롭게 다가오는 측면이 있었다.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것도 분명 적응력이긴 하지만 그게 정말 종족보존이나 개체 생존에 유리한 적응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도조절이 중요하죠. 문명자체가 방향을 그르치고 있는데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는 곤경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 모습은 눈감고 누가 빨리 뛰는가 내기 경주하는 것 같아요.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데 말이죠. (도, 510쪽)

•무엇이 인간의 탁월성인가?
중요한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정답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이 살아오면서 이루어보려고 했던 어떤 집단적 목표, 역사적·환경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꿈꾸어온 어떤 이상적 수준에 비추어 탁월성을 생각해보는 일일 겁니다. 첫째는 인간이 이기적 동물이면서 그 이기적 성향을 거스를 줄 아는 존재라는 것, 두 번째는 지금 여기의 ‘너머’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도, 515-516쪽)

•현재 선진국들은 막 달려가면서도 늘 더듬이를 높이 치켜들고 세상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 알려줄 만한 징후들을 찾아내려고 무척 노력합니다. 일단 그 징후들을 찾아내면 그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 사람들을 줄 세워가며 준비하죠. 그런데 우리는 몇 초 늦게 그 사실을 체감하고는 ‘우리도 그방향으로 가야지!’하고 눈을 돌리면 마차를 끌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상황이 이러니 비전문가를 앞세워 갈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넘어지고 깨지고 하는 것이죠. (최, 519쪽)
☞미래에 대한 예측 없이 무분별 교육지원과 투자를 하는 우리나라 현실에 대한 재치있는 비유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다양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둘째, 자연계라는 거대한 생태 창고 안엔 인간이 아직 모르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다. 그 미지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저장해놓고 있는 것이 생태계이다. 그런데 그 생태계의 다양성을 파괴해버리면 인간을 제 손으로 미래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잃어버리고 만다. (도, 521쪽)
☞읽을수록 그의 해박함과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유전자의 발현 가능성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발휘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환경과 만나느냐에 따라서 발현의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면 바로 여기, 여기가 자유의 영역이 아니겠습니까? (도, 541쪽)
☞유전자의 스위치를 온, 오프 하라는 내용의 책이 있었다. 누구나 다 비슷한 내용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데 어떤 유전자를 일깨우냐에 따라 완전히 삶이 달라진다는 주장이었다. 어떤 이는 암유전자를 일깨우고, 어떤이는 봉사유전자를, 어떤 이는 천재유전자를, 어떤 이는 음악가 유전자를 일깨운다. 한 형질에는 엄청나게 많은 유전자가 관여한다는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이것이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유전자를 일깨우는 가, 이것은 개인에게 달린 것이라는 주장이 위 도정일 선생님이 말한 ‘자유의지’와 맞물려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 왔다.

•가장 강한 문화는 왕성하게 다양성을 유지하는 문화일 겁니다. 별 생각 다 하고, 별 소리 다해보는 다양성이 유지되어야 문화가 창조성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도, 543쪽)

•신의 유전자에는 탁월한 것과 열등한 것, 고귀한 것과 비속한 것,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이 함께 들어있다. 히브리 신은 모순투성이입니다.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심해서 오히려 속이 아주 두텁고 깊은 신이죠.
(도, 546-547쪽)


13.21세기형 인간, 호모 심비우스의 번식을 위하여
•유네스코가 다양성을 ‘인류의 공통유산’이라고 말하는 데 그 속에 “다양성의 추구는 인간의 q편적인 성향”이라는 의미가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부시정부처럼 선악의 일차원적인 세계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모두 투명해지면 참 좋겠는데, 그렇게 투명성을 요구하다보니 전부 위선자가 됐지요. 그래서 청교도주의의 사회적 실험은 대실패로 끝납니다. 아무리 투명을 강조해도 인간의 가슴은 투명해지지 않습니다. 한자도 안 되는 가슴이 사실은 깊은 골짜기거든요. 인간에게는 그런 두터움이 필요합니다. (도, 557-559쪽)

☞이거야 말로 ‘정직’에 대해 기존의 상식을 엎는 발언이 아닌가 한다. 인간의 가슴은 절대 투명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심연이 필요하다는 것.
모든 동식물이 서로 조금씩 달라진 이유는 상대방하고 똑같으면 둘 중 하나가 명종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공존하기 위해 서로 다른 니치를 갖도록 변화한 겁니다. (최, 559쪽)

•“비겁함이 우릴 평화롭게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언제나 공격받을 수 있다거나, 내가 언젠가 무너질 수 있다는 긴장이 사회전체를 유지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누가 감히 내가 달려들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종말의 시작입니다. (도+최, 560-561쪽)

•두터운 세계는 다양성· 다수성· 다원성의 세계입니다. 이를 유지하는 데는 무엇보다 타자, 차이에 대해 존중하는 ‘관용’이 필요합니다. 나라는 주체는 타자에 대한 책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필요해요. ‘나/너를 절대적으로 구분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책임 윤리학이 나오게 되죠.(도, 565쪽)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인 자연과 공생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 569쪽)

•발전 이데올로기에 중독된 사회는 삶에 대한 많은 기대를 갖게 하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일수록 기대와 성취사이의 불균형을 관리하고 넘어설 방법을 찾아내 사람들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불균형 관리 기술’이죠. 이것도 위기관리의 일종이고, 안전망 확충의 하나입니다. 이럴 땐 문화가 아주 유용합니다. 경제가 주지 못하는 성취감을 문화적 활동이 줍니다. 문화정책은 이 차원에서는 동시에 사회 정책이죠. 성취와 만족의 방법들을 적극적으로 다양화해야 합니다. (도, 584쪽)
☞이 말이 특히나 가슴에 와 닿았다. 내가 중독된 상태는 아닌가?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성공하려 노력하지만 뭔가가 허전하다. 그 근원에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 나는 또한 ‘대단한 발견’을 해냈다. 문화라는 관점. 현대에 들어서면서 계속 문화가 요구되고 각광받는 이유. 내가 앞으로 종사하게 될 분야에 대한 또 다른 발견이다.

•공생 덕택에 우리가 자연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자연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유일한 무기는 ‘공생’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합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무차별적 전투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들과 동맹을 맺은 생물들이 더 잘 살아남았죠. 우리 인간이 이번 세기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다시금 공생인간, 즉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경쟁이 최고라고 믿지만, 이 단계를 넘어서서 끼리끼리 돕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우리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최, 595-597쪽)
☞이를 도 선생님은 ‘경쟁을 넘어 협동의 단계’라고 구호 붙였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易地思之: 내가 저자라면
가장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구성’부분이다.
일단 쟁점이 분명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다보면 각 섹션이 확연하게 구분되기보다 약간씩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진다. 이는 대담의 특성일 수도 있고, 그럼에도 진행이 물 흐르듯 대화를 이끌어 가기 위해 사회자의 역할이 거의 배제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종종 사회자의 발언이 대담을 이해하는 데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내가 만약 이 대담을 이끌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직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또 다른 아쉬운 점은 책의 구성이 썩 체계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가끔 대담이 중심을 벗어나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전개되기도 했다. 이것이 ‘대담’ 형식을 빌려왔기 때문에 일부러 가감하지 않은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대담 같은 느낌을 주기위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았을까?
대담은 마주대하고 말하는 것이다. 독자는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과도 같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이 전개되는 부분에 있어 ‘독자’를 약간 무시하고 들어간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왜 이것을 주요논쟁으로 삼았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간다. 기왕이면 더 많은 독자들을 대담으로 녹이기 위해서 사회자의 친절한 설명이 각 장이 전개되기 전에 좀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나 같은 독자는 소화불량에 걸리겠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기타 참조
<네이버 백과사전 추출>
•환원주의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상(事象)이나 개념을 단일 레벨의 더 기본적인 요소로부터 설명하려는 입장.
특히 과학철학에서는 관찰이 불가능한 이론적 개념이나 법칙을 직접적으로 관찰이 가능한 경험명제(經驗命題)의 집합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실증주의적(實證主義的) 경향을 가리킨다. 쉽게 말해 환원이란 설명이다.
어떤 것에 대해 '이러저러하다'고 설명하던 것을 '그러그러하다'고 설명하는 것을 환원이라 한다. 환원주의란 어떤 것에 대해 이러저러하다고 설명하던 방식을 몽땅 그러그러하다고 설명할 수 있다는 존재론적 믿음이다.

•도그마
독단(獨斷)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인간의 구제를 위해서 신(神)이 계시한 진리를 말하며, 교회가 신적 권위를 부여한 신앙신조(信仰信條)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인문과학 vs 자연과학
•인문과학은 정치, 경제, 역사, 학예 등 인간과 인간 문화에 관해 관심을 갖는 학문분야이다.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갖거나 인간의 가치와 인간만이 지닌 자기표현 능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인 연구 방법에 관심을 갖는 학문분야이다. 인문과학이라는 개념은 라틴어의 ‘후마니티스(humanitas)'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인간다움‘이다. 인문과학이 정체성을 확보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으며 이때부터 인문학은 신의 영역과 선을 긋기보다는 발달하고 있는 자연과학과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자연과학은 자연현상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과학이다. 과거에는 자연현상이 재현가능하다는 특징에 따라 실험이 가능하고, 정밀한 수리적 방법으로 현상들 사이에 함수관계를 확정할 수 있는 방법적 특성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심리학, 인류학 지리학 등에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자연과학의 고유한 분야로는 크게 물리학, 화학, 생물학, 천문학, 지학이 있다. 최근ㄴ에는 연구대상에 따른 분류보다는 연구 방법 또는 방법론의 차이에 따라 그 과학을 특징짓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

•추천도서 (최재천 교수)
제레드 다이아 몬드 「총, 균, 쇠」


BOOK REVIEW
2006. 3. 13

IP *.229.28.221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