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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20일 10시 12분 등록

<작가 고병권에 대하여>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수유연구소+연구공간 '너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니체 - 혁명의 변이 혹은 변이의 혁명」「들뢰즈의 니체 - 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노동거부의 정치학 - 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한 권으로 읽는 니체」「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등이 있다.

<작가 고병권의 기고글>

오늘, 인권에 대해 생각한다

인권이란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원초적 권리이다. 다른 모든 ‘권리(right)’들은 그 ‘올바름(right)’을 보증해주는 별도의 법적 근거를 갖지만 인권은 법에 규정되어 있을 때조차 그 법적 근거 때문에 보장받는 권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차라리 ‘하늘에서 받았다’고 말한다.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인간이라는 ‘사실’뿐이다. 이 ‘사실’이 곧바로 ‘권리’이다. 그래서 ‘내게는 인권이 있다’는 말은 ‘나는 인간이다’란 선언과 같고, ‘내 인권을 보장하라’는 말은 ‘나를 인간으로 대접하라’는 요구와 같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부쩍 ‘인권’ 문제가 부각됨을 느낀다. 고문, 납치, 살인 등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던 야만의 과거사를 정리하는 문제도 있고, 지난 시절 자각하지 못했거나 제기할 수 없었던 각종 차별들이 새롭게 인식된 탓도 있다. 하지만 몇몇 사안들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다룬다는 점에서 과거사 정리와 다르며, 아주 전통적인 주제라는 점에서 새로운 인권의식과도 거리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동과 관련된 경제적 권리들이다.

지난 1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국회에 계류 중인 비정규직 관련 정부 법안에 수정을 권고했다. 인권위는 해당 법안이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는 데 미흡하다고 지적하고, 비정규직이 고용의 일반 원칙으로 발전해가는 현실에 우려를 표명했다. 정부와 재계는 크게 당혹해하는 것 같다. 고용문제를 인권위가 직접 다루는 걸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눈치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노동자들의 권리투쟁은 최소한 두 가지 측면에서 인권 투쟁으로 변모했다. 첫째, 이들의 요구는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닌 생존 자체에 대한 요구가 되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내 몫을 달라’라기보다는 ‘나를 살게 해달라’는 쪽에 가까워졌다. 이것은 법적 권리다툼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외침이 울려나오는 장소, 틀림없는 인권의 영역이다. 둘째,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해 줄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자원이 괴멸되었다. 시장경쟁력과 효율성이 모든 권리 요구들을 제압한 상황에서 인권은 사실상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상품으로 대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인권을 박탈하는 체제다. 경제적 인권에 대한 요구들 중 상당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지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요구를 부당한 억지 내지 경쟁력 저해 비용으로만 간주한다면, 사회가 자본주의보다 먼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인권이 자주 발동된다는 것은 법적, 논리적 시비 이전에 어떤 근본적 물음이 던져지고 있다는 뜻이다. 인권위는 점잖게 “양극화된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지만, 실제로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심각한 회의가 싹트고 있는 게 아닐까.

정확히 1년 전에도 이 지면에 같은 이야기를 썼던 것 같다. “우리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면 우리도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겠다.” 4월20일 ‘장애인의 날’을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로 바꿔 부르며 인간의 권리를 전면에 내세웠던 ‘420 공동투쟁단’. 나는 이들의 요구가 우리 사회의 기본 방향에 대한 중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으며 우리 모두의 권리와 해방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올해도 이들은 장애인들의 기초생활권, 이동권, 교육권, 문화권, 정보접근권 등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나를 인간으로 대하라!’ 나는 그것을 권리보다는 투쟁의 외침으로 듣는다. 천부인권. 하늘이 그 권리를 내리셨다고들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하늘이 내리신 것은 권리가 아니라, 권리를 위해 투쟁할 의지와 능력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인간은 인간이기 위해서 투쟁해야 하며,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는 사회 너머에는 모든 법적 이데올로기적 시비를 넘어서는 투쟁이 존재한다는.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책을 읽고>
니체, 그 낯익은 이름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나는 모른다. 하지만 고병권이라분의 책을 통해 나는 니체가 누구인지? 니체의 이름이 광범위하게 우리에게 퍼져있는 이유를 비로소 이제야 비로소 세상의 눈을 뜬 아이처럼 보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일어난 나의 내면적 지도는 다음과 같다.

철학의 근원적 가치의 재발견이다. 개개인의 철학은 삶을 만들어내고 삶을 이끌어가는데 큰 방향타다. 자신의 신념과 자신의 삶의 철학은 이제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그런 면에서 철학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철학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의 신념에 대해 그다지 시간을 할애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바쁜 경제적 활동가 사회적 활동이 시간조차 할애 못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빼앗아 가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면에서 자기계발 프로그램은 잠시나마 우리들에게 그런 자신의 삶의 철학과 만나게 하는 시간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두번째로 니체라는 인물의 재발견이다. 이 책은 니체라는 인물에 대한 내가 가진 나름의 지도를 확 바꾸어 주었다. 이건 국토에 새만금사업이나 간척사업으로 인한 지도변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지도의 모양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뀜을 경험했다. 물론 그것은 내가 그를 단지 피상적인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로, 안개같은 이미지로 내 두뇌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 그는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 되었다. 그는 염세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이상주의자도 아니였다. 현실주의자이면서도 냉철한 분석을 가진 미래학자라고 하는 것이 좋은 듯 하다. 그는 사유의 미래학자였던 것이다. 그에게는 취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많다. 왜 이제서야 그를 알았는가 라는 자조도 있지만 준비된 제자에게 선생이 나타나듯이 이제 내가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제가가 되었다는 긍정적인 면을 찾는다.

세째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의 메타포다. 수학적으로 풀이하면 N 개의 눈, N개의 길일 것이다. 그는 가면이 진실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큰 역설인가? 심리학 어느 학파는 인간이 다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주장은 현재 대다수에게 인정되고 있다. 그것이 가면일 것이다. 나에게 천 개의 눈이 있다면, 천 개의 길이 있다는 것을 내가 미리 깨달았다면 나의 삶의 여정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선택의 길이 많을 수록 생존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어쩌면 그것은 생존하기 위한 필연적인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창조자가 되고 싶거든 파괴자가 먼저 되어라는 말은 변화를 찾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교훈인간? 낙타처럼 무조건 순응하는 사람은 결국 사막에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깨우침인가?

이 책은 정말 토씨하나 내 무의식에 담고 싶은 구절이 많은 명저다.

<내가 저자라면>

저자는 어렵다는 니체의 철학을 일반 대중에게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내리고 싶다. 니체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만든 그의 재주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하다. 그는 니체의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걸까? 그래서 그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여러가지 질문이 내 뇌리에서 맴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진지한 호기심이다. 다만 이책은 니체의 사상인지 저자의 생각인지에 대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아 읽는 나에게 혼란을 가져다 주는 면이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고병권의 생각인지 니체의 생각인지가 구분이 되지 않음으로서 나의 경우 이 책을 니체가 썼다는 생각으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저자가 주가 아닌 니체가 내게 하는 말로 들렸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할말은 없다. 작가는 그것을 아주 완벽하게 해냈으니깐 말이다.




<주요 글 모음>
머리말
<3>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애한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4>
위대한 철학자는 하나의 비명 속에서도 여러 개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이다.

<5>
우리는 잘못 간주 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7>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서장
<19>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제1부
1장: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25>
니체는 철할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

<27>
모험가들처럼 철학자들도 하나의 질서, 하나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이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28>
니체가 보기에 잘못된 사상만큼 건강에 해로운 것도 없다. … 니체는 철학자로 살기보다는 철학을 진단하는 의사로 살고 싶어한다. 그는 철학적 의사이며, 철학에 대한 의사이다.

<39>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40>
개별적인 것들은 자신들의 한계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상위의 통일로 나아가면서 그것을 해소한다. 이 운동을 이끄는 대립적 항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다.

<40>
일상의 한계와 구속을 넘어서는 혼수상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과도함을 막고 절제를 요구한 것이 아폴론적인 것이다.

<41>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42>
디오니소스의 갈기갈기 찣겨진 죽음에는 어떤 죄도 수반되지 않으며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47>
극장은 사람들의 감각을 평등화하고 보편화하는 마력을 지녔다.

<48>
극장이 관객들을 바보로 만든다면 법정은 그들을 죄수로 만든다.

<50>
인간은 시대의 목적을 향해 훈련받아야 한다.

<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니체 역시 자신의 시간을 미래에 두었다. …. 그 자신이 이해되고 있지 않다고 느낀 니체는 자신의 독자를 미래의 시간에 둔다. 그리고 스스로를 미래의 철학자로 부르고 싶어한다.

<54>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한다…. 그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긍정한다.

<55>
니체에게 심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세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

<57>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59>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한 하는 그런 것이다.

<59>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니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65>
계보학은 무엇보다도 보편화에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

<67>
중요한 것은 심층은 표면이 됨으로써만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68>
화폐란 도덕적 판단처럼 가치의 표시이다. 그것은 모든 차이들을 소통하는 공통의 매개자이며 기준이고 척도다.

<74>
삶이 강화되는가, 빈혈을 겪는가, 부정되는가 등에 따라 그 통양에서 자라는 도덕적 식물의 종류는 완전히 달라진다.

<77>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77>
선한 자들은 모두 약하다. 악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 자들인 것이다.

<78>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80>
약자는 자신의 약함을 공적이자 소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83>
자비야말로 법을 넘어서는 강자의 특권이다.

<83>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84>
강자는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강자의 운동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능동적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운동은 부정에서 시작하며 반동적이다.

<84>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89> 덕을 하나의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니체의 도덕학에 대한 비판이 자연학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 이 점에서 악은 해로운 만남에 불과하며, 일종의 소화불량 같은 것이라고 본 스피노자야말로 탁월한 사상가였다.

<90>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90>
신은 아담의 능력에 맞추어 그 과인을 다른 짐승에게는 좋은(선한) 과일일 수 있지만 지금 아담의 몸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나쁜(악한) 것이라고 말한 셈이다. 그러나 아담은 어린애처럼 이것을 도덕적 금지로 이해했던 것이다.

<91>
니체의 철학이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가치 평가를 포기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106>
어떤 신앙이 삶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이 그 신앙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없애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107>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09.
세계는 무한히 해석 가능하다.

<111>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114>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115>
해석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

<116> 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27>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 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153>
나는 이 통찰을 길 위에서 얻었다. 그것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황급히 손을 뻗어 서투른 말(언어)을 사용해서 잡았다. 그러자 통찰력은 말라비틀어져 말에 매달리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응시하면서 내가 이 새를 잡았을 때, 왜 행복한 느낌이 들었는지를 이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154>
그리스인들은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159>
힘은 니체의 철학적 태도를 대변하고 있다.

<161>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이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의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 이다.

<163>
에피쿠로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세계를 하나의 진리나 체계 속에 집어넣으려는 시도야말로 관념론적이다. 세르도 지적하듯이 에피쿠로스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사실은 “원자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반대로 영혼조차 원자들로 조정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자연을 하나의 체계로 묶자마자 자연은 다시 클리나멘을 통해 그것을 빠져나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영혼이라는 관념론적 용어를 도입했을 뿐이다.

<165>
힘에 들어 있는 내적의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힘의 질이다. 힘의 양이 얼마나 되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던 질을 가지고 행사되고 있는가는 물리학자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다. 양적인 차이에서도 우리는 힘의 내적 의지를 확인할 수 있지만, 니체가 힘을 분석함에 있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질적인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의지이다. 니체에게 강약의 문제는 양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167>
모든 방향(가치)은 능동적인 힘이 결정한다 ….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이 작동했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 방향은 능동적 힘의 작동을 상쇄시키는 방향이다.

<173>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의 원인인가? 과잉의 원인인가?

<173>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175>
권력의지는 질적인 차이가 힘의 질적인 차이를 가져온다.

<176>
부정의 권력의지가 히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다.

<177>
한 힘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힘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사실상 해석은 무엇인가를 지배하여 주인이 되기 위한 수단이다. …. 권력의지는 하나의 해석이고 평가이다.

<178>
우리는 육체가 느끼는 능력을 수동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왔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경명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말로 육체이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아보다도 큰 자기 자신이며 제압하고 정복학 파괴한다… 그것은 힘센 명령자다.

제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두 가지 반복과 두 번의 긍정

<184>
니체는 생성의 세계를 도덕적 해석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한다. 생성의 세계는 무구(innocence) 하다. 생성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헤라클레이토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어떤 철학자들의 무리와도 뒤섞을 수 없는 고귀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185>
헤라클레이토스는 무규정자이든 이데아든 별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생성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니체는 헤겔조차 보지 못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놀라운 생각을 소개한다. 그것은 세계를 놀이로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물리적으로 표현하자면 불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유희이다.”

<192>
존재한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197>
니체는 시간가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다.

<200>
해석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동안 차라투르트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이다.

<202>
긍정을 ‘고통을 인내하는 정신’으로 착각하는 낙타의 긍정을 들 수 있다. 낙타는 “아니오”를 모르기 때문에 “예”라고만 답한다. 주인이 어떤 짐을 싣더라도 낙타는 “예”라고 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은 사막이 되고 만다.

<203>
최후의 인간도 새로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스스로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 모든 익지 못한 과일들이 그렇듯이 살기를 원해서 줄기에 강하게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206>
나는 우연적인 것의 한 가운데서도 능동적인 힘을, 창조작용을 영위하는 것을 인식하였다.

제7장 인간-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211>
자신을 세계 모든 존재들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개미나 모기와 다를 바 없다.
<212>
인간은 세계를 인식한다고 말하지만, 그때의 인식이란 사실상 사물들의 등을 더듬는 놀이에 불과하다.

<217>
니체가 보기에 인간의 역사는 약자들의 승리한 역사이며, 따라서 진화라고 말한 게 아니라 퇴화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219>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제1부를 이 변용에 대한 가르침으로 시작한다. “내가 너희에게 세 가지 변용을 들겠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 변용을

낙타는 잘 견디는 정신의 표상이다. .. 주어진 가티을 묵묵히 수행하기만 하는 낙타는 선악에 있어 창조가가 도기 싶은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에 비해 사자는 거대한 부정의 정신이다.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자신의 터전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거대한 용이 나타나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모든 가치는 내 몸에서 빛난다. …. 너는 해야만 한다만 존재한다고 말할 때,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나는 하고 싶다를 외친다. 그러나 사자역시 긍정을 알지 못했다. 사자는 부정조차 긍정하는 정신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나는 하고 싶다’ 보다 위에 있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이다. …..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

<23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차라투스트라의 신은 디오니소스다. 초인을 의욕하는 자 차라투스트라가 영웅의 모델이라면, 초인으로 존재하는 자 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233>
웃음은 다수성과 다수성의 단일성에 대한 긍정이며, 주사위 놀이는 우연과 우연의 필연에 대한 긍정이다.

<234>
디오니소스는 긍정의 신이며 영원회귀하는 신이다.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238>
니체는 우산을 잃어버리듯 쉽게 이름을 잃어버렸다.

<238>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239>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독자는 즐거운 소화 작용이 필요하다.

<240>
완벽한 독자를 상상해 보면 그 완벽한 독자란 항상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로 변하곤 한다. 게다가 그는 순종적이면서도 교활하고 조심스럽다. 그는 또한 하나의 타고난 모험가요 발견자이다.

<240>
저서를 시간적으로 배열해서 읽어보는 것이 하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한 힘의 발전과 변신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1>
변증법은 헤겔의 것이고 의지는 쇼팬하우어의 것이며, 물자체는 칸트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모아놓은 것이 바그너의 음악이다.

<243>
인간을 역사의 기능이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헤겔적 역사관에 맞서 그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 기대었다. 헤겔을 버리면서 니체가 집어든 가면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였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교육자이며 형성자”라고 불렀다. 헤겔이 당대의 독일에 만족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 했다면 쇼펜하우어는 당대의 흉측한 측면을 이해했고, 따라서 “현존에 지독한 부정을 가했던 것” 이다.

<247>
긍정이 무엇인지르 알게 되자 부정 역시 새롭게 이해되었다.

<250>
여행자는 하나의 최종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목표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자신을 찾은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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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6.25 01:09:41 *.145.124.204
이 책에 관해 저와 생각이 비슷하시네요.
저도 그렇게 읽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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