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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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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21일 20시 59분 등록
저자 소개


먼저, 니체에 대한 네이버 백과사전을 훑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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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Nietzsche, Friedrich Wilhelm, 1844.10.15~1900.8.25]

독일의 시인·철학자.

국적 독일
활동분야 시, 철학
출생지 독일 레켄
주요저서 《반시대적 고찰》(1873~1876)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1883∼1885)

레켄 출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어머니·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 전임하는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 있을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또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18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odie》(1872)을 간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悲劇)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해명하고, 이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主知主義)에 의거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이미 그 몰락을 보았으며, 다시 그 재흥(再興)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기대 ·확인하는 이 저서는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것이다.

1873~1876년에 간행된 4개의 《반시대적 고찰 Unzeitgemasse Betrachtungen》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天才)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이상은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1878∼1880)에서 더욱 명확해져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偶像)이라 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의도하였다. 이미 고독에 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1879년 이래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주로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작에 전념하였다.

《여명(黎明) Morgenrote》(1881) 《환희의 지혜 Die frohiliche Wissenschaft》(1882)의 뒤를 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1883∼1885)로 그의 성숙기(成熟期)가 시작된다. 신의 죽음으로 지상(地上)의 의의를 설파하였고, 영겁회귀(永劫回歸)에 의해 삶의 긍정(肯定)의 최고 형식을 밝혔으며 초인(超人)의 이상을 가르쳤다. 《선악의 피안(彼岸) Jenseits von Gut und Bose》(1886)에서는 위의 사상에 부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생긍정(生肯定)의 새로운 가치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도덕의 계보학(系譜學) Zur Genealogie der Moral》(1887)에서는 약자(弱者)의 도덕에 대하여 삶의 통일을 부여하는 강자(强者)의 도덕 수립을 시도하였으며, 미완의 역작 《권력에의 의지(意志) Wille zur Macht》(1884∼1888)에서는 삶의 원리, 즉 존재의 근본적 본질을 해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하였다. 그 이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니체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극복이다. 그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 문명의 몰락과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득하였다.

사람들은 지고(至高)의 가치나 목표를 잃어 이미 세계의 통일을 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소화(矮小化)되고 노예화하여 대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근대의 극복을 위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彼岸的)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此岸的)·지상적인 것을, 즉 권력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니힐리즘의 철저화에 의해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 하였다. ‘초인·영겁회귀·군주도덕’ 등의 여러 사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 다른 저자, 고병권


서울대 화학과 졸업.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연구공간 '수유+너머'> 의 공동대표.
지은 책으로는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한 권으로 읽는 니체> 등이 있다.

"니체를 해석하는 일은 그를 재현하는 일이 아니다. 또한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 그 진정성을 찾아내는 일도 아니다. 니체를 해석하는 일은 니체를 창조하는 일이다."


이 책은 번역서가 아니다. ‘공학의 길을 잘 가다가 니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니 니체라는 구덩이에 빠져버린’ 고병권씨가 니체의 사상을 정리하고 해석한 책이다.

뼈대부터 구성하고 거기에 내용을 붙여 책을 만들어내는 것.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를 자기 식대로 배열하는 것.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다듬어야 가능한 작업일까. 나도 이 사람처럼, 무엇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고 공부한다면 다른 이의 사상의 뼈대에 나만의 해석을 붙여 능수능란 자유자재로 책을 써낼 수 있을까.

그가 대표로 있는 연구공간<수유+너머>는 지식공동체이며 생활공동체이다. 관심사에 따라 이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이 곳에 대한 자료를 10페이지 정도 모았으나 다 올리기엔 적절치 않은 것 같다. 관심 있으신 분은 홈페이지를 방문해보시길. (www.transs.pe.kr)




안녕, 니체씨.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오고 있다. 나는 회사 앞 PC방에 앉아 두 잔째 커피를 마시며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 카페인의 각성과 흥분효과를 기대하면서, 니체에 대해 쓰기 위해서.

유명한 자의 글을 평하는 것은 불편하다. 철학책이라 더 부담스럽다. 코프만의 말대로 니체가 ‘저속한 무리를 내쫓기 위해’-자신의 이야기를 포착할 수 있는 독자를 가려내기 위해-일부러 그만의 은유와 경구를 사용하여 교묘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포장하여 내놓는 것이라면, 과연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마음대로 글을 썼다가 바보취급 받는 것 아닐까. 불안하다.

하하. 하지만 그렇게 단념해버리면 도대체 내가 무슨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저런 글은 적당히 무시하는 센스가 필요하다고 자위하며, 정리되지 않는 내 생각을 아주 살짝 써보도록 하겠다.

어제 책장을 정리하다 세삼 발견했다. 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본 적이 있다. 아니 읽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이 책은 책장 한 구석에 약 20페이지의 모퉁이가 접힌 채로 고이 꽂혀 있었다.

당시 내 감상은 대충 이랬던 것 같다.
‘철학자라더니, 뭐야, 극작가야? 대사 난해한 희곡 아냐?’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그의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은, 꽤나 지저분하게 읽혔다.

읽은데 또 읽고, 줄친데 또 줄치고, 찾아봐야 하는 단어(혹은 이론) 메모하고, 마음에 들어서 또 줄치고.
어떤 부분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특히 근대 허무주의 비판-등의 2부는 눈으로만 읽었다. 반면 어떤 부분은 정신이 확 든다. 줄 쳐가며 열심히 읽는다.

단순히 나의 집중력의 차이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축 늘어져서 읽었던 부분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다가 마침 전화 걸어온 친구에게 니체 읽는다고 자랑 비슷하게 불평을 한다.


‘진짜 난해하다 야. 죽겠어 아주.’

‘... 너 그걸 왜 읽고 있냐?’

.....뭐, 과제이기도 하고, 재미가 아주 없는 건 아니거든. 누가 했던 말이랑 비슷한 말을 이 사람도 하네. 원전을 찾은 건지도 몰라. 데미안이랑도 비슷한 거 같고.

어쩌면 우린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이 사람이, 그 core 비슷한 것의 아주 가까운 곳까지 접근을 해서, 그만의 예술적인 재능으로 잘 살려서 써 낸 거 아닐까. 위대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 같은 거?

‘....그 사자는 어디로 갈 줄 몰라 하는 고독한 동물이다. ‘이곳에 사느니 죽어 버리겠다’ 는 단호한 유혹의 음성이 들린다.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떠나야 할 곳은 알지만 도달할 곳을 모르는’ 배를 타고 있다. ‘새로 쟁취한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낡은 것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배를 불태워 버렸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용감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p 244

'아주 희미하게라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자는 지상에서 스스로를 방랑자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느낄 수 없다. 여행자는 하나의 최종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목표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p 250


그는 아주 드라마틱하고, 예술적인 감성이 넘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강렬한 눈빛 속에는 광인의 열정이 춤추는 듯하다. 그의 글에서는 한참의 생각 후에 붓 끝에 날개를 달고 미친 듯이 써내려간 예술가의 운율이 느껴진다.
칼과 같은 그의 날카로움.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아보다도 큰 자기 자신이며, ‘제압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그것은 힘센 명령자이다.’ -p 179


나는 내 몸의 언어를 믿는다. 입을 통해 말을 내뱉기 전에는 두뇌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입을 통해 구체화 되고 손을 통해 글로 전환되었을 때, 내 육체의 행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을 때 그것이 내 생각임을 깨닫는다. 무엇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보다 그것을 향해 손을 뻗는 나를 발견할 때 비로소 내 욕망을 읽는다. 마음을 맴도는 생각은 알 수가 없다. 아니, 믿을 수 없다. 표현되지 않은 생각이- 마음이 너무나 연약함을 알고 있다. 그것이 이미 내뱉어진 말과 취해진 행동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도, 원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믿을지라도 그 의사에 반해 육체가 행한 행위에 영향 받아 스스로 그 생각을 바꾼다는 것도.

당신도 그렇게 생각한거야? 아니면 나는, 여전히 당신의 생각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저속한 무리인가?

앞선 시대를 살았기에 광인이 되었던 사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의 죽음을 말한 사람.
스스로 자신을 증식시켜줄 독자를 낚기 위한 요리사, 낚시꾼, 우주 비행사, 다이버라고 칭한 사람. 그의 말처럼, 아직도 니체에 관한 천 일 밤낮의 이야기가 남아있다.



책 속에서


책머리에-옮긴이의 글 중

p 6 한 인간이 병들고 우울했을 때 생각해 낸 모든 진리들이 그 질병의 표현이듯이, 병든 시대가 자랑하는 진리들 역시 그 시대가 지닌 질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은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 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 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리를 보면 알 수 있다. ’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 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p 8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도 실천이 필요하다. 니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대로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사이엔스’라는 말의 어원 그대로 ‘맛을 보는 사람’ 에게는 ‘진리가 얼마나 맛없는 음식인지’를 별도로 강의할 필요가 없다. 진리란 머리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반박될 수 있다. 불쾌한 음악은 발걸음만으로도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색맹이 되고 마는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

서장-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p 18
2. 천 개의 길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4. 천 개의 젖가슴
과학적 인식이라고? 가치 중립이라고?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고, 양성 공유자도 아니고, 다만 중성일 뿐인 인간들, 성적 불능자들,’ 대낮같이 밝은 인식을 떠들면서도 밤만 되면 열린 창을 훔쳐보기 위해 지붕 위를 싸돌아다니는 수고양이들. 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는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오르는지’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p 20
7 천 개의 가면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한다‘ 가면 뒤의 얼굴?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호기심 많으신 분이시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주시려거든 부디.....또 하나의 가면! 제 2의 가면을 주시오.‘ 허락하신다면 제3의 가면도.....진정한 니체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요? 여기 니체의 가면이나 하나 받으시오.
8. 천개의 이야기
아직도 천 개의 이야기가 남았다. 요리사 니체가 소개하는 우연을 냄비에 끓이는 법-나는 어떤 우연이든 나의 냄비로 끓인다, 낚시꾼 니체의 독자 낚는 법- 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바늘이다, 우주 비행사 니체의 타임머신 타지 않고 시간 넘나드는 법-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다이버 니체가 말하는 인가닝 가보지 못한 심연으로 잠수하는 법-기렉 숨을 쉬고 나서 잠수하라, 그래야만 깊은 바닥까지 볼 수 있으리라, ......아직도 니체에 관한 천 일 밤낮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1부

1.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p 25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
p 28 그는 철학적 의사이며, 철학에 대한 의사이다. 철학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말을 내뱉은 철학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진단이 끝나가 니체는 이렇게 처방한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힘, 생명 같은 것을...’
p 31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을 반박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반박되어야 할 존재라기 보다는 치료받아야 할 존재다. 죽음의 설교, ‘몰락에의 의지’ , 삶을 경멸하고 영원한 부정의 무게 아래 두는 것은 ‘삶에 있어 가장 깊이 든 질병일 뿐이다. ’
p 33 신과 진리는 어떻게 위대해졌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을 통해서,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이다. 이 세계와 자기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p 37 그리스인들은 고통이 극대화되는 순간에도, 가장 무서운 파괴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삶은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인물인 오이디푸스 역시 죄를 짓지는 않았다. 소포클레스가 그리고 있는 오이디푸스는 지혜롭고도 고상한 인물이다. 그가 만약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운명에 의한 것이다. 바로 수동적 득죄. 아버지의 살해자 오이디푸스, 어머니의 남편 오이디푸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자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감싸고도는 공포의 삼면상은 비자연적 행위가 모든 법률과 자연 질서, 도덕 세계까지 무너뜨린다고 해도 그 행위로 인해 새로운 세계가 세워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결코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줄 뿐이다.
p 45 플라톤의 동굴은 극장의 전형이다. 관객은 쇠사슬에 묶여 스크린만을 보도록 강제된다. 벽은 어둡고 사람들은 뒤에서 날아온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들의 운동을 보게 된다. 플라콘은 참된 세계가 동굴밖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극장을 끌어들였지만, 그가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자신의 극장 속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p 49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p 52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 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광인으로 불리는 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정신은 일반적인 구속성과 대결한다. ‘
p 57 니체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우려하는 까닭은 그가 가진 폭군적 본능 때문이다. 그는 ‘아곤’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에 칼을 들고 나타난 검술 선생‘ 이었다. 그는 철학에 토너먼트식 칼싸움을 도입했다. 진리를 가리기 위한 칼싸움.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다. 아테네에서 그의 변증법이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죄다 까발리는 점잖지 못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변증법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품성을 잃어버린 자가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움켜쥐는 마지막 필사의 무기다.‘
p 58 '삶‘을 ’사랑‘ 한다는 것. 운명애.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p 59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니 신앙이 아니다, ’

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p 63 '아무렇게나 임의로 추출해서 제멋대로 정리한 도덕적 사실들‘로부터 추론한 결론들은 도덕의 굳건한 기초가 되기보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 도덕에는 소심함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 그래서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 이라고 불렀다.
p 90 스피노자가 말하는 악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선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p 98 가다머는 과거나 전통이 결코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과거나 전통은 우리가 사고하기 위한 전제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만큼, 그 위에 서 있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사고방법을 전통에 적용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p 103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
p 107 진리라고 불리는 것은 본래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이렇다고 나는 믿는다.’ 즉 진리란 하나의 신앙이며 가치 평가이다.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식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한 일종의 시각 체제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p 108 논리학처럼 동등화가 선행된다면 그 조건에서 논리학이 요구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범주가 조건으로 돌변할 때 진리가 나온다. 니체는 대표적인 예로 ‘유클리드 공간’을 든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사실이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유클리드적 공간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만 가능하다.(리만 공간에서는 그러한 공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항변할 수 없다는 식의 주관적 강요’라고 할 수 있다.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면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이 때문에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을 인식하라는 명법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p 112 개인은 무언가 전혀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이다......개개인은 전통적 용어도 역시 개인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식을 개인이 창조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이다. 즉 해석자로서 개인은 한결같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p 114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해석의 비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성된다....니체가 가장 자유로운 작가라고 칭찬해마지 않았던 로렌스 스턴의 작품이 그렇다. ‘그가 정말로 칭찬 받아야 할 점은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게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데 있다. 결정된 형식은 쉼 없이 깨지고 밀려나며 미결정적인 형식의 의미를 갖는다...그의 주제이탈은 동시에 그 이야기의 연속이고 전개이다. ’
p 115 '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 위를 내리 쪼이자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 질서도 천천히 녹아 내린다.‘ 고 말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p 116 니체는 자신을 증식시켜줄 독자들을 낚기 위해 다양한 미끼를 던진다. 특히 그의 스타일은 아주 다양하다. 군데군데 시가 등장하기도 하고, 드라마의 형식의 작품도 있으며, 서평이나 에세이, 심지어 논문을 흉내낸 작품들도 있다. 그리고 많은 작품들이 아포리즘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코프만의 니체의 스타일에 대한 해석) 그녀는 니체의 스타일, 특히 경구나 은유가 ‘저속한 무리를 내쫓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보면 니체는 자신의 이야기를 포착할 수 있는 독자를 선택하기 위해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 된다. 경구나 은유는 단일하고 결정적인 해석을 쉽게 무너뜨린다. 해석은 항상 무한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p 118 니체의 텍스트들을 파시스트적인 것, 부르주아적인 것, 혁명적인 것으로 규정짓기보다 그런 힘이 만나는 하나의 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내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드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다.

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p 126 공동의 가치, 공동의 선을 찾아 나서는 근대 정치는 형이상학적인 물음의 방식, 즉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위에서 말한 보편적 가치들이다.(최대 다수의 행복, 사유 재산, 공공선, 진보, 자유와 평등 등)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다른 방식으로 묻는다. ‘어떤 것인가?’ 혹은 ‘누구의 것인가?’ 이처럼 추구하는 가치들의 질과 유형을 묻고, 그것의 소유자나 지지자를 묻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물음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가치의 창조와 평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에 대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p 139 정치에 연관된 말 중에서 신체에 대한 비유가 많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터너에 따르면 특히 ‘다이어트’라는 단어만큼 좋은 예가 없다. 우리는 다이어트를 체중감량을 위한 식이요법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나, 원래 이 말은 그리스어 ‘diaita'에서 온 것으로 그 의미는 ’삶의 총체적인 양식 (total mode of life)이었다.
p 142 노동이 칭찬 받고 노동의 축복에 관하여 지치는 일도 없이 이야기되는 경우...나는 저의를 본다....노동을 바라볼 때, 현재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것, 노동은 각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방해할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사회는 노동을 통해 보다 안전해질 것이다.
p 144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재갈 물린 이들을 매개로 하여 그 나라의 모든 청년층은 국가에 유익한 것을 교육받는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의해 승인되고 인정된 생활 진로만이 사회적 영예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그러한 성향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전염된다.
p 144 이제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자기를 검열하고 통제한다. 베버는 이것을 ‘능동적 자제’라고 불렀으며, ‘일기’를 능동적 자기 검열의 대표적인 기제로 보았다.

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1)
p 153
'나는 이 통찰을 길 위에서 얻었다. 그것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황급히 손을 뻗어 서투른 말(언어)를 사용해서 잡았다. 그러자 통찰력은 말라비틀어져 말에 매달리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응시하면서 내가 이 새를 잡았을 때 왜 행복한 느낌이 들었는지를 이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p 166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r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p170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먼저 ‘권력(Macht)’이라는 말은 물리적 힘이나 정치적 권력에 한정되는 말이 아니다....아렌트는 'Macht'가 그리스 정치의 공공 영역을 가능하게 했던 힘인 ‘디나미스’와 같은 뜻이며, 근대의 다양한 파생어를 가지고 있는 라틴어 ‘포텐샤’와 통하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아렌트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것은 ‘능력’이나 ‘가능성’이다.
p 171 'Macht'가 능력을 의미하고, ‘Wille'가 명령을 의미한다면, 권력의지(Wille zur Macht)는 사실상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자, 능력을 실현하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권력의지‘가 개념들의 조합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권력의지‘는 ’권력‘과 ’의지‘가 결합한 개념이 아니다. 니체는 힘의 내면의지를 권력의지라는 말로 바꾸었는데, 그때 의지란 사실상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영어의 ‘will to power'나 우리말의 ’권력에의 의지‘라는 말은 ’권력을 향한 의지‘로 읽히게한다. 이러한 오해는 의지를 ’무엇에 대한 의지‘로 해석하고, 그 의지를 대상의 결핍에서 오는 것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확인된다.
p 173 권력의지가 아닌 존재라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 다시 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p 174 허무주의는 ‘무의 의미’ 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허무주의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할 때, 그때의 권력의지는 모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힘들의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시킨다.
p 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p 178 ‘선(좋음)이란 무엇인가? 권력 느낌, 권력의지, 권력 자체를 인간 안에서 강화시키는 모든 것. 악(나쁨)이란 무엇인가? 허약함에서 비롯하는 모든 것. 행복이란 무엇인가? 권력이 증가하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 ’
‘권력 느낌’이라는 개념은 권력의지보다도 먼저 자리를 차지한다. 권력의지가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던 시기의 저서인 ‘서광’에는 권력 느낌에 대한 많은 주장들이 나온다. ‘행복의 최초 효과는 권력 느낌이다. 이 권력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든, 다른 인간에 대해서든 표항에 의해서든, 상상에 의해서든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
‘권력 느낌’이 권력의지에 우선한다는 것은, 그것이 권력의지에 대한 단순한 수동적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육체가 권력의지를 경험하는 방식은 스스로의 권력의지를 행사함을 통해서이다.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육체. 육체는 자신의 감수성, 민감성을 드러내고 행사한다.
우리는 육체가 느끼는 능력을 수동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왔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아보다도 큰 자기 자신이며, ‘제압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그것은 힘센 명령자이다.’ 같은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육체에 대해 느끼는 육체가 뛰어나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는 능력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 능력으로 지배한다.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p 180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방식-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의 생성방식-이다. 우리는 권력의지가 힘들을 감각하고 평가하는 권력 느낌(감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따라서 생성과 소멸이 반복하는 세계에 대해서 긍정과 부정이라는 두 개의 권력의지가 갖는 느낌과 평가도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새로움과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고귀한 운동으로 느낀다. 하지만 부정의 권력의지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유한자들에게 부여된 고통이나 불완전한 감각 기관에 비친 가상쯤으로 생각한다. 전자에게는 반복이 기쁨일 테지만 후자에게는 큰 고통일 것이다. 전자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에 대해 ‘한 번 더!’라고 말하겠지만, 후자는 ‘이제 그만!’이라고 말할 것이다.
p 188 '무한히 반복되는 그 놀이라는 ‘순환 운동’을 즐기고 있는 세계‘로서의 영원회귀를 묘사했다. 헤라이클레토스에 대한 언급에서 보았던 것처럼 니체는 아주 일찍부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시계‘를 하나의 ’놀이‘로서 이해해 왔다......
‘세계란 시작도 없고 끝어 없는 거대한 힘이며,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고, 전체로서는 그 크기를 바꾸는 일이 없는 청동처럼 확고한 양이면서도 계속해서 변화한다...(그러나) 그것은 공허한 게 아니라 힘으로서 편재하고, 힘과 힘의 파랑이 벌이는 유희로서 하나이면서도 다수이고, 여기서 모이면 저기서 감소하고, 광포하게 밀려들고 넘쳐드는 힘의 대앙이다. 영원히 방황하면서 영원히 달음질쳐 돌아오는 회귀의 세월을 거듭하여,.....영원히 회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어떤 포만이나 권태, 피로도 모르는 생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p 191 영원회귀는 동일한 반복을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성을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니체의 저서 속에 등장하는 영원회귀가 항상 의지를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정의 권력의지는 ‘의지를 갖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의지나 삶은 형벌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아낙시란드로스의 슬픈 탄식처럼 부정의 권력의지는 반복이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니 그것을 멈추라고 말한다. 그러나 긍정의 권력의지는 회복기의 차라투스투라처럼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한 번 더!’ 라고 말한다. 그것은 반복하기를 원한다. 생성의 반복은 죄지은 자들의 운명이기는커녕 삶의 경이로움이며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생성을 긍정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최고의 표현이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권력의지다. 존재하는 것은 생성뿐이다. 그리고 생성만이 존재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생성의 반복을 의지하는 것이다.
p 197 미래를 찾기 위해 과거로 향하는 계보학자들이 이해하듯이 미래란 지나가 버린 순간들 속에도 들어있다. 들뢰즈는 사유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유는 스스로의 역사를 생각하지만(과거), 그것은 사유가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현재), 마침내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기 위해서(미래)이다.’ 계보학자들이 과거의 지층에 숨겨져 있던 복수의 힘들을 찾아내는 이유는 그 힘들이 미래를 건설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축복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과거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미래를, 그리고 미래의 건축물로 변형된 과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이 시작한다. 많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니체는 반시대적인 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때에 맞지 않는’ 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살았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시간과는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잇기 때문이다. ‘너무도 멀리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그리하여 내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다.’
p 199 영원회귀는 두 개의 권력의지를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긍정의 권력의지와 부정의 권력의지. 더 할 것인가, 그만할 것인가?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이해해 가는 속도와 긍정의 권력의지에 다가가는 속도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원회귀를 이해한 뒤의 차라투스트라는 완전히 긍정적으로 돌변했다. ‘나는 어떤 심연으로라도 축복하는 예(ja)라는 말을 가져갈 것이다. 나는 ·축복하는 자, 예라고 말하는 자가 되었고, 그러기 위하여 오랫동안 씨름을 했고, 씨름꾼이 되었다.’
‘ 나는 나의 늙은 악마이며 불구대천의 원수인 중력의 영도, 그리고 그가 창조한 것들, 즉 강제와 규정, 필요과 귀결, 목적과 의지, 선과 악을 재발견했다. 왜냐하면 춤춰 넘어야 할, 춤춰 건너야 할 대상이 존재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가벼운 자, 가장 가벼운 자를 위해서 두더지와 무거운 난쟁이들이 존재해야 되지 않겠는가?
p 20 해석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동안 차라투스트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세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실천이다.
p 201 심연의 사상은 차라투스트라의 긍정의 정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고통조차 긍정될 수 있는가? 그러나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한다.
p 204 '부정은 긍정에 대립되지만 긍정은 부정과는 다르다. 우리는 긍정을 부정이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긍정 그 자체 내에 부정을 위치시키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은 긍정을 부정하지만 긍정은 부정을 긍정하므로, 부정에는 긍정이 포함되지 않고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된다. 긍정은 부정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새로운 사원을 지으려는 자는 기존의 사원을 부수고자 한다. 새로운 가치표를 써넣으려는 자는 낡은 가치표를 지워야 한다. 하지만 긍정의 수단으로 사용된 부정은 더 이상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긍정이다......막연한 파괴와 긍정 안에 들어있는 파괴를 구분하면서 우리는 단 하나의 긍정이 정립되기 위해서라도 긍정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이 첫 번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망치가 파괴의 도구인지 창조의 도구인지는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결정된다. 하나의긍정은 자신을 긍정해 줄 다음의 긍정을 기다린다.
이로써 긍정에 들어 있는 영원회귀의 원리가 나타난다. 긍정은 적극적으로 다음의 긍정을 의지한다. 긍정이 멈추는 순간에 부정은 승리한다.
p 208 다수성과 운명애, 우발성은 긍정의 권력의지의 특징이며 영원회귀의 방식이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부정의 권력의지보다 위계가 높다. 세계는 자신을 다수성으로, 운명애로, 우발성으로 드러낸다. 영원회귀는 긍정의 권력의지만을 돌아오게 하고, 긍정의 권력의지만이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이제 모두에게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바로 선택의 문제, 실천의 문제다. 너는 ‘너 자신을 영원회귀의 원인들의 일부로 만들 수 있는가?’ 너 자신은 영원회귀를 의욕하는가?‘ 너 자신은 영원회귀의 원인이고 싶어하는가? 긍정의 권력의지는 항상 회귀하지만 너 자신이 회귀할지는 ’선택의 문제‘다.
p 209 가장 큰 위안, 가장 큰 격려, 그것은 영원회귀라는 윤리적 선택이 도덕적 명령처럼 힘든 노동이나 고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원회귀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왜 그렇게 영원회귀를 멈추지 않는가? 그것은 즐겁기 때문이다. ‘모든 쾌락 안에서는 원환의 의지가 꿈틀거린다. 모든 즐거움들은 ’계속‘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7장 인간
p 212 인간은 세계를 인식한다고 말하지만, 그때의 인식이란 사실상 ‘사물들의 등을 더듬는 놀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를 측량하기 위해 자신의 잣대를 들이미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참으로 인간은 측량하는 동물이다! ‘인간이라는 말은....측량자를 뜻한다.’ 그러나인간이 자연을 측량하면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이 발견하고 싶었던 것을 발견할 뿐이다.
p 217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한 결과라면, 초인은 인간의 철저한 몰락으로부터만 출현한다.
p 222 그런데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쳔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더 이상 이 세계를 검열하는 심판이 사라졌으며, 저 세계에서 죄를 묻는 일은 없다는 것. 천국이란 믿음의 문제이기는커녕 새로운 삶의 방식이로 실천이라는 것. 니체는 구세주라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그렇게 요약했다. 신들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창조할 초인이 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니체는 신이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신은 시체로서도 살 수 있다! 신앙의 대상이 죽으면 신앙이 소멸할 것이라는 기대는 완전한 오판이었다. 왜냐하면 신앙으로 존재하는 자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신의 죽음이 신앙으로 존재하는 자, 즉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면 신의 죽음은 없는 것과 같다...
‘부처가 죽은 후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수세기 동안 한 동굴 속에 그의 그림자를 안치시켰다. 거대하고 섬뜩한 그림자를.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의 종이 존재하기에 수천 년에 걸쳐 신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동굴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p 224 신이 시체로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도 새로운 삶의 생성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니체는 이런 유의 인간을 ‘최후의 인간’이라고 불렀다. 최후의 인간은 신앙이 사라진 시대에 ‘무신앙’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배하는 것도 복종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둘 다 너무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안락한 죽음만을 기다린다. 차라투스트라는 최후의 인간들을 벼룩처럼 작아져서 아무리 근절시키려 해도 근절되지 않는 족속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번거로워 하며 느릿한 죽음을 원하는 자가 어떻게 그토록 강렬했던 유일신의 ‘무던을 파는 자’나 ‘살해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차라투스트라가 ‘보다 높은 인간들’ 중 하나인 ‘가장 추악한 인간’을 만나면서 밝혀진다. ‘가장 추악한 인간’은 ‘죽음의 나라’라고 불리는 계곡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그 모습이 너무나 추해서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동정심에 쓰러지고 만다. 심지어 차라투스트라조차 그를 목격한 뒤 곧바로 쓰러진다. 신 역시 자신이 창조한 인간의 추악함에 대한 연민으로 죽어 버렸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인간의 가련함에 눈물을 흘리다 죽었다고 말한다.
지상에는 아무런 생성 능력도 없이 느리게 자살하는 추악한 인간이 있고, 하늘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죽은 신의 시체가 놓여 있다.
p 225 '한 신이 나타나 신에 대해 가장 무식한 말을 했을 때 신들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은 하나다. 너는 나말도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된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신들은 웃었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그들은 웃다가 죽은 것이다.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신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존재가 웃음거리인 것을...
p 228 가장 추악한 인간은 이렇게 말한다. ‘신은 죽어야만 했다. 그는 ’모든 것을 보는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인간의 깊이와 밑바닥을 보았고, 인간의 숨여진 치욕과 추악함을 보았다; 그의 눈은 나의 가장 더러운 구석까지 기어들어 왔다...모든 것을 본 신, 심지어 인간까지도 본 신. 이 신은 죽어야 했다! 인간은 그러한 목격자가 살아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다.’
p 231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한 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p 234 우리는 차라투스트라가 변신하는 장에서 긍정의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초인의 삼위 일체를 보게 된다. 차라투스츠라에게는 영원회귀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긍정의 권력의지를 획득하는 과정이었으며, 또한 그것을 느끼는 새로운 신체를 생성시키는 과정이었다. 긍정의 권력의지는 영원회귀를 요청한다. 영원회귀 하지 못하는 긍정은 그 질을 박탈당한다. 그러나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만이 영원회귀한다. 영원회귀하는 긍정의 권력의지는 변화된 신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초인은 신체의 변신이며 ‘새로운 느낌 방식’ 이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 번 더‘ 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

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p 238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p 239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들어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화 불량증을 가져서도 안
되므로 강한 위장도 있어야 한다. 즐거운 소화 작용이 필요하다. 복수심이나 원한은 금물이다. 이러한 독자라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의 괴물일 것이다. 추론하기보다는 제 방식대로 소화시키는 괴물!
‘완벽한 독자를 상상해보면 그 완벽한 독자란 항상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로 변하곤 한다. 게다가 그는 순종적이면서도 교활하고 조심스럽다. 그는 또한 하나의 타고난 모험가요 발견자이다.’
p 244 니체의 저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대해서
‘자유 정신을 위한 책’이라는 부제로 79년에 출간된 이 저서는 거대한 사자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사자는 어디로 갈 줄 몰라하는 고독한 동물이다. ‘이곳에 사느니 죽어 버리겠다’ 는 단호한 유혹의 음성이 들린다.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떠나야 할 곳은 알지만 도달할 곳을 모르는’ 배를 타고 있다. ‘새로 쟁취한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낡은 것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배를 불태워 버렸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용감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p 247 '치료하는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위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p 250
‘아주 희미하게라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자는 지상에서 스스로를 방랑자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느낄 수 없다. 여행자는 하나의 최종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목표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프리드리히 니체’
p 253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Nitimur in vetitum!'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내가 저자라면


고병권 씨께.


2부의 논문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철학자들의 사상을 받아쓰는 ‘철학적 노동자’가 되지 말고 그 철학자를 화살로 삼아 진리를 향해 쏘는 ‘미래의 철학자’가 되라는 답변 멋지십니다.

저도 언젠가는 당신처럼 ‘제대로 소화해서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존경스럽습니다.

당신이 속한 (연구 공간 수유+너머)가 오랫동안 존속하길 바랍니다.



정말 니체와 결별하고 마르크스를 찾아 떠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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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Nitimur in vetitum! : 우리는 금지된 것을 얻으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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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6.25 01:21:28 *.145.124.204
소정님 글은
언제나 커피와 함께 하네요~ㅋ
덕분에 읽는 사람도
카페에 와 있는 기분이 들어요.
글에 글쓴이가 바로 앞에 앉아있는듯한 느낌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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