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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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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26일 22시 15분 등록
a. 저자소개
Joseph Campbell
1904년 3월 26일 뉴욕 출생
1925년 콜럼비아 대학교 졸업
1927년 콜럼비아 대학교 영문학 석사과정 수료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교수로 재직
1949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발표
1959~1967년 <신의 가면> 1~4 권 집필
1987년 10월 31일 호놀룰루에서 사망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민담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맨하탄에 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즐겨 찾았다. 그 중 특히 박물관 한 켠에 있는 토템 기둥에 매료되었다고.

대학을 졸업하고 영문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는 동안 자신이 어렸을 적 즐겨 있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왕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캠벨은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 어를 공부하였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존 스타인벡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츠와 교류하였다. 1934년에는 캔터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이후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된 뒤 신화의 원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신화적 인물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영웅을 중심으로 한 그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다. 또한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큐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그는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전4권)을 펴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신화의 힘>,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네이버 오픈백과사전



b. 독후감
이미 대담에서 한 번 경험했다. 이런 류의 책은 억지로 읽어봤자 소용이 없다. 읽고 나면 전혀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흡을 가다듬고 읽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면 그냥 책을 덮고 쉬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다시 읽었다. 3주가 걸렸다. 책을 읽은 날보다 책을 읽지 않은 날이 더 많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내용은 명확하지 않다. 쉬엄쉬엄 읽고 나서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500페이지의 이 책이 포함한 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사전지식이 필요하다는 확인뿐.

책을 덮고 나니 5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친구랑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났다. 그리고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화면 가득 ‘2002년 12월’이라는 글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었다. 어떻게 일 년을 기다리냐며 볼 멘 소리로 투정을 하였다. 그리고 정확히 1년후 나는 그 영화의 2편을 보았다. 또다시 1년이 지났다. 드디어 영화의 종결편을 보았다. 상영 후 1시간만 지나면 뒤척거리기 일쑤인 내가, 시종일관 숨을 죽인 채 스크린만을 주시했던 영화. 그 장대한 스케일과 무한한 상상력으로 인해서 한 없이 가슴 설레었던 영화. 그 영화는 다름 아닌, ‘반지의 제왕’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너무나도 그럴듯한 이야기. 빠르게 전개되는 화면 속에서 그 어떤 반론도 펼칠 수 없었지만 책을 읽고 나니 이제 와서야 의아해지는 몇 가지 것들이 있다.

우선, 스미골, 아니 골룸.
이 골룸이 반지를 잃어버린 것은 우연일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을까?
골룸의 반지를 주운 빌보는 그 좋아하던 반지를 왜 순순히 간달프에게 내놓을까?
빌보에게 반지를 건네받은 (전능한)간달프는 왜 반지를 직접 운반하지 않을까?
반지운반의 임무는 왜 평범하다 못해 무능해 보이는 프로도에게 맡겨질까?
이 호빗은 무슨 이유로 꼭 결정적인 순간에 반지 끼는 실수를 저지를까?
거창한 시작과 달리 왜 반도 못가서 반지원정대는 뿔뿔히 흩어지게 되며,
운반과 관련된 무거운 책임은 프로도(와 그의 샘)에게만 남겨지는 것일까?

나는 삼천포에 빠져서 허우적댔다. 그리고 인터넷을 누볐다. 이것저것 키워드를 넣고 검색하기를 몇 십 분. 그러다가 읽고 싶은 책이 두 권 생겼다. ‘신화로 읽는 영화 영화로 읽는 신화(유재원지음/까치글방)’가 그 중 하나다. 보이는 것에 약한 비쥬얼 세대에 맞게 영화를 가지고 신화를 설명한단다. 솔깃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일단 관심영역에 포함이다. 그리고 또 읽고 싶은 책은 ‘뮈토스’다. 저자는 이 책을 번역하기도 한 이윤기씨인데, 뮈토스를 설명하는 저자의 말이 흥미로워 좀 옮긴다.

- 로고스(Logos)와 뮈토스(Mythos)
<뮈토스>는 말이라는 뜻이다.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리스어에는 <뮈토스> 말고도
<말>을 뜻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로고스'이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뮈토스는 로고스와 문법이 다르다.
로고스는 논증하는 <말>이다. 로고스에는 목적이 있다.
로고스는 따라서, 듣는 이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속성을 갖는다.
듣는 이는 논증하는 말이 논리의 아귀에 맞을 때는 <참>이라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거짓>이라고 한다.

자 여기에 사과 한 알이 있다.
로고스는 <불화의 사과>에서
<윌리엄 텔의 사과>에 이르기까지
사과의 역사를 논하고
사과의 본질을 따지고
사과가 의미하는 바를 논증한다.
뮈토스는 뮈토스 이외의 어떤 목적도 갖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진실한 것이 고여 있되,
이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진실한 것은
검증된 것이 아니고 믿어진 것이다.

여기에 사과 한 알이 있다.
뮈토스는 그 사과를 달게 먹는다.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적인 말들은 로고스의 자식들이다.
뮈토스는 논리적이지 못해서,
이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으리 만치 낡아 보인다.
그러나 뮈토스는 로고스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
뮈토스는 로고스에게 로고스의 임상적 증거를 빌리지 않아야 하고,
실제로 빌리지 않는다.
.............(생략)................
뮈토스는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르키메데스가 욕실에서 아르키메데스의 법칙을 발견하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발가벗은 채로 욕장을 나와
<에우레카, 에우레카!(알았다, 알았어!)> 하고 소리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홀연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발가벗고 뛰었다는 일화가 논파 당한다고 하더라도
아르키메데스의 법칙이 함께 논파 당하지는 않는다.
뉴턴의 집 뜰에 사과나무가 없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어도
만유인력의 법칙 또한 무효가 되지 않는다.
아르키메데스가 발가벗고 뛰었다는 이야기,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이야기,
이것이 뮈토스다. 뮈토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윤기 뮈토스 서문>

여전히 신화는 내게 쉽지 않다. 쉽게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자 후기를 보니 좀 용기가 생긴다. 이윤기씨는 말한다. “이 책을 우리 글로 옮긴 듯은 그러므로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면 듣도 보도 않고 흰 눈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로운 종교 정신을 곧추세우는 데 밑바탕 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종교)도 좀 기웃거려 보는 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는 뜻에서다.”라고. 나는 말한다. “신화라면 듣도 보도 않고 지레 겁부터 먹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신화에 대한 바른 이해가 나를 이해하고 키우는데 밑바탕 삼을 수 있다면 신화도 좀 기웃거려 보는 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고. 신화, 어렵지만 알면 참 재미있을 듯.



c. 내가 저자라면
역시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다. 중간중간 나오는 신화나 동화 줄거리에 퐁당 빠져 버렸다. 종교와 관련한 이야기들도 참 주의를 끈다. 그런데 프로이드와 융은 소화가 버겁다. 게다가 신화와 함께 생각하며 보라며 소개해 주는 몇몇 꿈들의 예시는 더더욱 이해가 안 간다. 부연설명이 없는 꿈사례들에서 전혀 연결점을 찾지 못할 때면 떨어지는 집중력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친절한 조셉씨가 아쉬운 순간이다.

몇 안 되는 도판이 나와 있다. 책을 쓰여진 시기를 생각하면 이나마도 첨부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지만, 좀 더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바람이 남는다. 더불어 이러한 도판이 내용과 연결되는 것들도 있지만 연결되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배경지식 없는 나를 탓해야겠지. 하지만 전문서적이 아닌 이상에야 이렇게 스케일 큰 책을 쉽게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완당평전≫처럼 도판 밑에 간단하게 설명을 달아놓았다면 이해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되었겠다 싶다. ≪완당평전≫을 읽을 때에는 그러한 설명이 나의 생각과 다를 때면 샐쭉해지기가 일쑤였는데 아예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도판에 이르자 그나마도 없는 것이 아쉽다니 참으로 간사하다.

저자가 아닌 편집의 실수이겠지만, 많지 않은 책을 읽으면서 목차 틀린 책은 처음 봤다. 1부와 2부 모두 ‘영웅의 모험’ 이라고 하길래 ‘뭐가 이래’ 라고 생각했는데 2부는 ‘우주 발생적 순환’을 다루고 있었다. 읽다보니 문맥상 조사가 부자연스러운 것들도 있었고 오탈자도 좀 보였다. 개역판이라는데 편집자도 이 책이 그리 쉽지는 않았었나?

책을 소화 못해서 내용에 대해 뭐라 평하기가 그렇다. 다만 저자가 책 밖에서 남긴 말들을 주워들었는데 이 할아버지 자신이 하는 일을 꽤 즐기신 분 같다.

- 당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따르라. 만일 내면의 기쁨을 좇는다면, 당신은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그 길을 걷게 되면 당신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습 자체가 바로 당신이 살아야 할 인생이다. 우리가 내면의 기쁨을 쫓아가기로 마음먹을 때 아무런 문도 없던 그 곳에, 그리고 사람에게는 열리지 않았던 그 문이 당신을 향해 활짝 열리기 시작한다.
-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흥미를 느껴 시작한 일에 평생을 바쳤고 또 일가가 된 분. 멋지다.



d. 책 속에서
머리말 ... 5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의 꿈 ... 13
2. 비극과 희극 ... 39
3. 영웅과 신 ... 44
4. 세계의 배꼽 ... 55

제1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출발
1. 영웅에의 소명 ... 69
2. 소명의 거부 ... 81
3. 초자연적인 조력 ... 93
4. 첫관문의 통과 ... 105
5. 고래의 배 ... 120

제2장 입문
1. 시련의 길 ... 128
2. 여신과의 만남 ... 144
3. 유혹자로서의 여성 ... 159
4. 아버지와의 화해 ... 166
5. 신격화 ... 195
6. 홍익(弘益) ... 225

제3장 귀환
1. 귀환의 거부 ... 253
2. 불가사의한 탈출 ... 257
3. 외부로부터의 구조 ... 269
4. 귀환관문의 통과 ... 281
5. 두 세계의 스승 ... 297
6. 삶의 자유 ... 307

제4장 열쇠 ...315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
제1장 유출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 325
2. 우주의 순환 ... 333
3. 허공에서-공간 ... 342
4. 공간의 내부에서-생명 ... 348
5. 하나에서 여럿으로 ... 347
6. 창조의 민화 ... 366

제2장 처녀의 잉태
1. 어머니 우주 ... 374
2. 운명적 모태 ... 380
3. 구세주를 낳은 자궁 ... 389
4. 미혼모의 민화 ... 393

제3장 영웅의 변모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 396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 400
3. 전사로서의 영웅 ... 419
4. 애인으로서의 영웅 ... 428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 432
6. 구서주로서의 영웅 ... 437
7. 성자로서의 영웅 ... 443
8. 영웅의 죽음 ... 445

제4장 소멸
1. 소우주의 끝 ... 458
2. 대우주의 끝 ... 468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1. 변신 자재자 ... 477
2.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 479
3. 오늘날의 영웅 ... 483

역자후기 ... 489
찾아보기 ... 497

p.13 변화 무쌍한 듯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p.14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효과가 아이들 놀이방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동화책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p.16 인간이 가진 심성 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보호가 필요한 유아와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대격변을 치르고도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몇 개월간이라는 이원일체(二元一體) 상황 dual unit을 형성한다.

p.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p.24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저작에서 인간이 사는 삶의 순환 주기 중 전반부의 통과와 그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의 태양이 천정점(天頂點)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기인 유아기와 사춘기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C.G.융은 후반부의 위기를 강조했다. 즉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빛나는 태양이 마침내 그 고도를 떨어뜨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밤의 자궁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기를 꺾어야 하는 시기를 말한다.

p.27 수소의 재등장은, 맡은 역할의 기능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상징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이를 자기 소유로 하는 행위는 이기적인 자기 강화(自己强化)의 충동을 나타낸다.

p.28 권력망자(勸力亡者, tyrant-monster, 세습에 의하지 않고 힘으로 정권을 잡은 참주)는 세계의 신화, 민간 전승, 전설, 심지어는 악몽에도 익히 등장하는데 그 특징은 어디서건 동일하다. 그는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다. 그는 <내 것>이라는 탐욕스러운 권리에 걸신들린 괴물이다. 그가 저지른 황폐의 참상은 그의 세력권 안에 두루 널려 있는 것으로 신화와 동화는 한결같이 그리고 있다.

p.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길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ㅣ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 palingenesia)(우리가 이 땅에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p.30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 데 <해탈 detachment>과 <변용 transfigu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p.31 융 박사 자신이 지적하고 있듯이 원형 이론은 그의 독창적인 개념이 아니다. 니체의 다음 글과 비교해 보자. <잠잘 때나 꿈속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사고를 꿰뚫어 체험한다. 내 말은, 수천 년 전에 인간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체험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꿈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 꿈은 우리를 인류문화의 이런 상태로 데려가고, 그때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

p.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따라서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p.35 의미심장한 위험과 장애와 도정에서 겪는 행운의 모티프는 갖가지 양태로 굴절하게 되는데, 바로 이 책에서 우리는 수백 가지로 굴절되 모티프와 만나게 된다.

p.37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p.38 사소한 것일수록 손쉬운 법이다.......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p.39 해피엔딩은 허위 진술로 경멸을 당하는데,

p.42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앤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성(超絶性)으로 읽혀야 한다...........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rjj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Katharsis, Purgatorio)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인 것이다.

p.43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인 승리는 아니다...........꿈같은 형상을 모사하는 것이지 실물의 형상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p.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原質神話, monomyth)의 핵심nuclear unit이라고 할 수 있다.

p.47 마라는 세 딸, 즉 욕망과 괴로움과 욕정을, 관능적인 시녀와 함께 풀었으나 존자의 마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p.48 정각은 말로써는 전할 수 없고(不立文字) 오직 정각에의 방법way만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과 형태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진리의 불립문자교리는, 플라톤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양 전통의 근간을 이룬다. 과학의 진리는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세워진 논증할 수 있는 가설이기 때문에 전달이 가능하지만, 제의, 신화, 그리고 형이상학은 초월적인 조명 가까이가지 인도받는 것은 가능하나 거기에 접근하는 마지막 단계는 개인의 조용한 체험으로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에서는 현자를 Muni, 즉 <조용한 자>라고 한다........부처가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종교를 세웠지만 그 가르침의 궁극적인 요체는 침묵 속에서만 전수된다.

p.50 대양을 방불케 하는 동양의 광대한 이미지로 표현되든, 그리스의 웅장한 서사시로 표현되든, 아니면 장엄한 성서의 이야기로 표현되든,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p.52 홍수설화의 영웅은, 대재앙과 죄악이 창궐하는 가운데서도 살아 남는 인간의 근원적 생명력의 상징이다.

p.53 보잘것없는 영웅이든, 탁월한 영웅이든, 그리스 영웅이든, 야만족의 영웅이든, 이방인의 영웅이든, 유태족의 영웅이든, 영웅의 행장(行狀)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잣거리에 나도는 이야기는 영웅의 행위를 주로 물리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고급 종교에서는 영웅의 행적이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험의 형태, 등장인물의 역할, 마침내 얻은 승리의 내용물에는 놀라울 정도로 별 차이가 없다.

p.54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神的)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p.58 분류(奔流)는 보이지 않는 원천, 우주라는 상징적 원의 중심인 입구, 불교에서 말하는 부동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데, 세계는 이곳을 중심으로 순환한다고 일컬어진다..........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존의 신비인 것이다.
p.62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세계의 사원에서 섬김을 받는 대상은 늘 아름다운 것도, 늘 자비로운 것도 아니며, 덕이 높을 필요도 없다. ‘욥기’에 나오는 신처럼, 그들은 인간의 가치 척도를 저만큼 앞지른다. 마찬가지로 신화도 위대한 영웅을 위대한 도덕가로는 다루고 있지 않다. 미덕 역시 최고의 직관 앞에서는 케케묵은 훈장의 읊조림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직관은 짝짝으로 된 상대적 반대 개념을 초월한다. 미덕은 자기 중심적인 자아를 완화시켜 범개인적(汎個人的)중심성을 지향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가능했다면 고통이나 쾌락, 미덕이나 악덕, 우리의 자아 혹은 남들의 자아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초월적인 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사는 자, 모든 것 안에서 훌륭한 자,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섬김이 타당한 자에게 감득되는 것이다.

p.63 에드슈는 중심, 즉 세계의 축 Axis Mundi, 혹은 세계의 배꼽의 화신이었다.

p.64 둘은 싸울 수밖에 없었지.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남들을 싸우게 하는 것이니라.

p.65 신화의 제신(諸臣)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 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 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p.71 이 동화는 모험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다...........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p.72 전령관의 등장은, <자아의 각성 the awakening or the self>이라고 불리는 단계를 암시하고 있다.

p.72 ... 세계의 배꼽에 대한 상징.....

p.73 동화에 나오는 징그럽고 욕지기나는 개구리나 용은, 태양을 입에 물고 솟아오른다. 이 징그러운 뱀이나 개구리, 즉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을 상징한다. 여기엔 징그럽고,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미지의 혹은 지진한 요소, 원리, 그리고 생존의 본질이 우글거리고 있다.............따라서 모험에의 소명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기자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p.76 변형의 때가 무르익은 정신은 끊임없이 이런 전령관을 산출하는데

p.79 사방 오 리 안에다 호위대를 풀었다...........사방 십 리에다 분 것이었다...........사방 이십 리에 걸쳐 푼 것이었다.....

p.82 신성(神性)이 그 자신의 적이 된 것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p.95 우주 태모(宇宙太母, cosmic Mother)의 보호를 받는 영웅은, 어떤 가해도 받지 않는다.


p.96 대자연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p.97 러시아 원정 즈음해서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p.98 보호자인 동시에 위험한 적이며 모성적이기도 하고 부성ㅈ적이기도 한 이후견과 방향제시의 초자연적 원리는 그 내부에서 무의식의 모든 다의성을 통합한다. 따라서 의식적인 개성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체계 및 우리가 따르는 안내자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한 후원은 우리의 이성이 헤아리지 못하는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p.111 슈테켈 박사의 지적에 따르면 경비병은, <의식 혹은 도덕의 총화와 의식 내에 존재하는 제약>을 상징한다. 슈테켈 박사의 글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프로이트 같으면 경비병을 '초자아superego'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내적 자아inter-ego'일 뿐이다. 의식은 위험한 소망이나 비도덕적 행위의 틈입을 미리 막는 구실을 한다. 꿈에 나타나는 경비병, 경찰관, 관리는 대체로 이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p.118 다섯 가지 무기를가진 왕자의 비유는 이러한 주제를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자신의 경험적, 육체적 성격에 의존하거나 이를 과신하는 자는 실패한다는 교훈도 더불어 주고 있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감각적인 경험, 즉 다섯 가지 감각인 다섯 가지 무기의 와중에 휘말릴 수 있으면서도, 고유의 도덕적 힘으로 이를 제압하고는 자기 자신과 남을 해방시키는 영웅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p.120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 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p.120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곧 재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관념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래의 배라는 자궁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웅은, 그 관문을 지키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그 세력과 화해하는 대신, 그 미지의 힘에 빨려들어, 겉보기엔 죽은 것으로 나타나고는 한다.

p.124 아닌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자아에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과 회귀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이 창조되지 않은 불멸의 존재임을 드러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p.129 여기에서는 모든 기본적 역할이 역전된다. 즉 신랑이 신부를 찾으려고 애쓰는 대신 신부가 신랑의 사랑을 얻으려고 목을 늘이며, 엄부(嚴父)가 청년으로부터 딸을 지키려고 애쓰는 대신, 시기심 많은 어머니인 베누스(아프로디테)가 신부로부터 자기 아들 쿠피도를 가무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p.132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理想)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p.133 이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용될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libidinal tie를 강화하고 있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주술사는 그 사회 성인들의 심성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환상 체계를 출몰시키는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주술사>란, 이러한 유아적 놀이를 주도하고, 공통의 근심거리를 밝혀내는 지도자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방에서 성공하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잡귀와 대리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p.143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p.145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이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豫兆)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 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 어머니(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우리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그녀는 영원한 잠에 빠져든 미녀처럼, 아직 우리의 속 영원의 바다 밑바닥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p.152 이 여신은 다름아닌, 절대절멸의 공포와, 비인격적이지만 모성적인 평화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우적인 권능, 우주의 전체성, 대립물의 조화였다. 시간의 강이 사람의 흐름으로 바뀌면 여신은 순식간에 창조하고, 보존하고 파괴한다. 이 여신의 이름은 <검은 존재 the Black One>, 즉 칼리Kali다. 별명은, <존재의 바다를 건네주는 나룻배>이다.

p.153 고도의 이해력을 갖춘 천재만이 이 숭고한 여신의 계시를 읽을 수 있다. 이해의 정도가 낮은 사람을 위해 여신은 그 신통력의 정도를 낮추어, 그들의 지진한 능력에 알맞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나.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여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수사슴이 된 악타이온의 예에서 우리는 이미 이런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악타이온은 성자가 아니었다. 정상적인(유치한) 욕망이나, 놀라움이나, 공포에 반응하는 인간으로서 엿보아서는 안 될 계시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일개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다.

p.156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p.160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p.173 갖가지 시련을 다 치른 자를 집안으로 용납하는 아버지 입장이 얼마나 어려우며, 얼마나 주의가 요하는가는, 그리스의 유명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에톤의 불행한 행적이 잘 그려내 보이고 있다.

p.177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p.197 세상에는 도처에 보살(존재와 본질이 대각에 이른 자)이 있고, 보살의 광명을 받고 있지만, 세상이 보살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살이 세상, 즉 연화를 들고 있다.

p.199 여성을 다른 형태로 후퇴시켰다는 사실은 완전성에서 이원성으로의 타락을 상징한다.

p.207 우리가 인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교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의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p.208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

p.210 그들이 보살이고 보살이 그들이다.

p.211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양성적인 신의 요체가 바로 이것이다. 양성적인 신은, 입문 의식이라는 주체의 궁극적 요체다.

p.213 보살에 대한 첫 번째 경이로움은 바로 이것, 즉 보살이라는 존재의 양성구유적 성격이다.........보살신화에서 주목해야 할 두 번째 경이로움은, 보살이 삶과, 삶으로부터 해탈의 차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p.214 프로이트 학파의 용어에 따르면 삶의 욕망(불교의 <카마> 즉 <욕망>과 일치하는 <에로스> 혹은 <리비도>)과 죽음의 욕망(불교의 <마라>, 즉 <적의와 죽음>과 일치하는 <타나토스Thanatos> 혹은 <데스트루도Destrudo>는 내부에서 인간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주위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는 두 개의 추진력이다...........정신분석학은, 무의식적으로 빗나간 욕망과 적의 때문에 비현실적인 공포와 애증의 이중 감정에 시달리는 환자를 치료해 주는 기술이다. 이러한 증상에서 놓여난 환자는 보다 현실적인 공포나 적의, 육욕적 종교적 관행, 전쟁, 유희, 가사 등 그가 속한 문화가 베푸는 일을 비교적 만족스럽게 대처해 나갈 수 있다.

p.215 종교적 가르침의 목적은 개인을 일반적인 미망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그 미망의 상태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종교는 욕망, <에로스Eros>와 적의, 즉 <죽음Thanatos>를 바로잡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이렇게 도면 새로운 미망의 상태가 만들어질 뿐이다) 저 유명한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에 따라 충동을 뿌리째 <꺼버리는> 방법을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하나..............마지막 <미망과 욕망과 적의의 적멸(寂滅)>(즉 열반)과 더불어 마음은,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참된 경지에 들어간 마음은 안식을 얻는다. 상태는 육체가 사윌 때까지 계속된다.

p.222 보살신화의 세 번째 경이로움은, 첫 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상)이 두 번째 경이로움(찰나와 영원의 동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p.231 육체와 영혼의 양식, 마음의 평화는 다름 아닌 만병 통치약, 즉 마르지 않는 젖꼭지가 내리는 은혜다.

p.232 우리 모두가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는 유아기적 환상은, 불멸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

p.236 그들이 연출하는 유쾌한 신화는 그들 수준의 마음과 정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나 그 배후의 무(無에) 이르게 된다.

p.237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영웅이 얻으려는 것도 그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영광, 말하자면 그들의 불로 불사적 존재를 가능케 하는 권능이다.

p.244 영웅은, 물길을 되짚어 나올 때도 물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으나 이 시점에서는 금기에 구애받지 않고 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는 영원한 섬의 주인 내외를 방문하고 얻은 권능 덕분이다. 홍수 영웅인 우트나피쉬팀-노아는, 원형적인 아버지 상(像)이다. 세계의 배꼽인 이 섬은 그리스-로마의 <축복받은 섬>의 전신(前信)이다.

p.248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 아니다. <천상적인 것이 도(道)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 할 바 아니다.>

p.250 생명의 원천은 개인의 핵이며,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p.251 대륙, 하늘, 전통 종교 신앙의 지옥같은 자연적 경험 세계는 그 신들과 마귀의 개념과 함께 일거에 폭발했다. 그러나 기적 중의 기적은 폭발한 뒤에도 재생되고 부활하여 참 존재의 광휘로 영광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실재로 부활한 하늘의 신들은 그들을 꿰뚫고 그들의 생명이자 근원인 무(無)에 이르렀던 영웅 인간을 목청을 드높여 찬양했다.

p.253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천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 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p.257 무추쿤다는 회귀하는 대신 이 세상으로부터 한 차원 더 떨어진 곳으로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p.261 영웅의 도망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은 뒤에 남은 다른 사물들이 영웅 대신 대답하여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법이다.

p.262 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에서 또 하나 자주 등장하는 방법은, 도망치는 영웅이 끊임없이 장애물을 던져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법이다.

p.263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수련자의 상상력은 데바타(devata:수련자의 수준에 알맞은 신성)에 의해 각급 단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정신을 수련한 다음에야 수련자에게는 홀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온다.

p.269 영웅에게 실패의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무서운 관문 건너쪽에서 애인가 함께 귀환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두 세계의 상호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도망에 실패하는 신화는 우리에게 있어서 비극이지만, 성공하는 신화는 신용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세상을 버린 자가 이 땅에 다시 돌아오려 하겠는가? ‘거기’에 남아 있으려 하지 않겠느냐?

p.277 시메나와는 귀환의 문턱에 있는 세계의 원기 회복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십자가가 죽음의 심연을 향한 신화적 통로를 뜻하는 웅변적인 상징이라면 <시메나와>는 부활의 소박한 상징이다. 십자가와 <시메나와>는 두 세계, 즉 존재와 비존재 세계를 구획하는 경계의 신비를 상징하는 것이다.

p.280 이제 우리는 이 여행의 마지막 고비에 이르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모험은 서곡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신화 영영에서 일상 현실로 귀환하는 영웅의, 역설적이고 험난한 관문 통과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뿐만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p.281 정상 상태로 깨어 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에서 득실 계산이 파생하고, 그 결과 인간의 존재는 타락한다.

p.288 천국에서의 1년이 지상에서의 백 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백년이라는 주기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360도라는 원의 중심각도 전체성을 뜻한다. 힌두교의 푸라나Purana에 따르면, 신들의 1년은 인간의 360년에 해당한다. 올림포스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의 역사는 순환 주기의 조화로운 형상을 드러내 보이면서 영겁토록 흘러갈 뿐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 뿐이다.

p.289 영웅과 땅의 직접적인 접촉을 단절시키면서도 그 세상 사람들 사이로 돌아다닐 때 탈수 있는 절연 수단으로서의 백마는, 초자연적인 권능을 가진 자가 설정하는 금기의 생생한 실례라고 할 수 있다.

p.291 자기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p.294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우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p.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p.306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즉 <자기화해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Law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p.307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p.313 탈리에신은 마귀를 두려워했지만, 바로 그 마귀에 의해 삼켜졌고, 그래서 재생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鬪士)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p.317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와 손상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신화나 옛 이야기의 윤곽은 원래 애매한 법이다.

p.319 많은 신화의 후반부에서 중심적 이미지는 건초 더미에 바늘이 떨어지듯 부수적 삽화와 윤색된 부분에 숨겨진다. 따라서 문화가 신화 시대의 시점에서 현실적 시점으로 옮겨옴에 따라 낡은 이미지는 감지되거나 증명되기 어려워진다.

p.325 신화가 꿈의 내용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꿈이란 정신 역동의 증후라는 사실에는 별 의혹의 여지가 남지 않았다..........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턴 및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

p.326 그러나 이러한 자료의 가치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화가 꿈과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p.333 신화의 메타포에서도 우주는 시간을 초월한 배후에서 떠오르고, 원기를 회복하다 다시 소멸된다................신화에서도 우주질서의 연속성은 근원으로부터의 통제된 힘의 흐름이 있어야 가능하다. 신이란, 이 흐름을 통제하는 법칙의 상징적 구현체(具現體)다.

p.328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두 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세 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p.339 신화는 이 순환 속에 머문다. 그러나 신화는 이 순환을 침묵에 둘러싸인 형태, 순환과 침묵이 서로 삼투하는 형태로 드러낸다. 신화는 존재하는 원자 안팎에 충만해 있는 침묵의 계시록이다. 신화는, 고도로 세련된 형상화 작업을 통하여 마음과 가슴을, 모든 존재를 채우고 둘러싸고 있는 궁극적 신비로 향하게 하는 풍향계다.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보여도 신화 체계는 마음을, 기시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비현현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p.342 <우주의 끝을 헤아리고, 그 끝이 곧 시작임을 아는 자라야 현자라고 불릴 만하다>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p.357 우주 발생 순환의 다음 단계는 하나가 여럿으로 분화하는 단계다. 이 단계와 더불어 창조된 세계에는 분명히 상호 모순적인 존재의 두 양상으로 갈라지는 위기가 온다.

p.358 부동하는 원동력 Unmoved Mover

p.368 세계의 정돈, 인간의 창조, 운명의 결정은 모든 원시 창조자 이야기의 전형적인 주제들이다.

p.370 호의적인 창조자와는 사사건건 반대입장에 서는 광대도 신화와 민담에는 자주 등장한다. 긍정적 측면에서 존재의 어려움을 대변하고 나서는 것이다.

p.372 인간이 감독하고 통제한다고 하더라도 우주는 그 감독과 통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넓고 무자비한 우주가 사실은, 우주가 관여하는 무서운 사건과 함께 정연하게 계획되고 직접적으로 관리되는 여로라는, 순진한 무지가 당연시되고 있는 찬송가나, 설교나, 기도를 들을 때면 나는 이보다 훨씬 이성적인 남아프리카 종족의 가정을 떠올린다. 어느 관측자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그들은, 신은 선하고 만인은 행복을 바라지만 불행히도 그에겐 멍청한 아우가 있어서 언제나 신의 일에 훼방을 놓는다고 말한다> 그들의 이러한 가정은, 어느정도 진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신의 멍청한 아우는, 만일에 대해 무한한 선의를 가진 전지 전능자가 설명하지 않는 삶의 어려움 및 터무니 없는 비극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p.374 그녀는 세계의 경계를 이루는 틀, 즉 우주적 알의 껍질인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다. 조금 더 추상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자가번식(自家繁殖)하는 절대자를 움직여 창조의 행위를 유발하는 유혹자인 것이다.

p.380 생명의 어머니는 동시에 죽음의 어머니이다.

p.389 구세주를 낳는 자궁

p.392 그분은 당신과 같은 인간의 마음 저쪽에 있습니다. 가난뱅이인지는 모르나 그분은 부(富)의 원천입니다. 무서운 분인 동시에 자비의 근원이십니다. 뱀으로 만든 옷이든 보석으로 수놓은 옷이든, 입는다면 마음대로 벗기도 할 것입니다. 비실재의 창조자이신데 근본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시바는 내 사랑이십니다.

p.396 우주 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의 숙명은 바로 이 영웅들을 통해 실현된다.

p.400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지워진다..............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神性)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p.402 영웅의 첫 번째 과업은 우주 발생적 순환의 그 전단계를 의식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개인적 주기의 제2단계에 나타나는 영웅의 행적은, 제1단계인 하강 주기 행적의 심도에 비례한다.

p.405 아브라함의 탄생에 관한 히브리의 유명한 전설은, 초자연적인 유아기의 도피 및 도망의 한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p.409 요약건대 이렇다. 문제의 숙명적인 아기는 기나긴 암흑의 기간을 견디어야 했다. 이 기간은 극히 위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며,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다. 그는 자기 내부로 깊이, 혹은 미지의 세계인 외부로 던져졌다. 어느 경우든 그를 당혹케 하는 것은 미지의 암흑이다.

p.413 유아기 이야기는 영웅의 귀환 혹은 그의 정체가 드러남으로 그 결론에 이른다. 즉 오랫동안 묻혀 지내던 영웅의 암흑기가 끝나고 그의 진정한 성격이 노출되는 것이다.

p.422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事象)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現狀, status quo)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p.423 초기의 준동물적인 거인-영ㅇ우(도시의 창건자, 문화의 시혜자)과 후기의 인간인 영웅의 차이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겠다. 후자의 업적에는, 과거에는 흔혜를 베풀었던 파이톤 Python이나 미노타우루스 같은 전자의 영웅을 살해하는 일이 포함되는 경우가 흔하다.

p.431 이 다채로운 쿠훌린의 모험에서, 가장 웅변적이고 가장 극적인 것은, 바퀴와 사과가 구르면서 영웅에게 내어주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길이다. 이것은 운명적인 기적의 상징이며 교훈으로 해독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p.432 첫번째 영웅의 특징적인 모험이 신부(신부는 곧 삶이다)를 얻는 것이라면, 두 번째 영웅의 특징적 모험은 아버지를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곧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다.

p.434 영웅의 목표가 미지의 아버지를 찾는 것일 때, 여기에 등장하는 기본적인 상징 체계는 시험 및 정체 고백의 상징 체계다.

p.440 존재의 뿌리되는 지혜로 그들을 위로했다.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p.443 삶의 마지막 장(章)으로 넘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영웅의 유형이 있다. 즉 성자, 고행자, 출가자(出家者)로서의 영웅이다.

p.444 옆얼굴이 드러나면, 신화는 부차적인 언어이며, 침묵이 궁극적인 언어가 된다. 정신이 신비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남는 것은 오직 침묵뿐이다.

p.445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p.459 놀랄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 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서다. 크리슈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조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p.479 삶의 양태에서, 개인은 인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밖에 없다........개인은 이 모두일 수가 없다. 다라서 개인의 전체성은 개별적인 구성 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개인은 한 구성요소일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은 이 집단으로부터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삶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출생, 세례, 결혼, 장례, 취임 등의 종족적인 제의는, 개인의 삶의 위기 및 행위를 표준적이고 비개인적 형식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이러한 제의를 통하여 개인이 속하는 사회는 원형적 무대에서 옛 현인의 가르침을 시연(試演)할 수 있다.

p.480 진정으로 종교적인(순전한 주술의 반대 개념으로서의)제의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필할 길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p.481 사회에서 추방된 자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추방은 탐색 모헙의 첫 단계일 수 있다.

p.483 신화라고 하는 꿈의 집은 이제 무너지고 없다. 마음은 깨어 있는 의식 쪽으로만 열려 있다.

p.484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신화 체계(이제는 거짓으로 알려진)가 위대한 조정 수단으로 통용되던 비교적 안정되어 있던 시대 사람들이 안고 있던 문제와는 정반대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 당시엔, 모든 의미는 집단적인 것에, 위대한 익명의 형식에 귀착되었으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개인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오늘날 집단 속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도 그렇다. 모든 것은 개인에 귀착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란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동인(動因)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의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교류 통로는 단절되고 우리는 둘로 찢기고 말았다.

p.485 세속적인 국가의 보편적인 승리는 모든 종교 조직을 부수적인, 필경은 무익한 위치로 끌어내려, 오늘날에는 종교적 무언극이 일요일 아침에 벌이는, 경건한 체하는 종교 놀음에서 더도 덜도 아니게 되고 말았다.

p.486 인간이 되려면,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인간의 얼굴로 바뀌어 있는 신의 얼굴을 알아보아야 한다.

p.488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 <너>로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은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p.489 <명저>란 독자에게 베푸는 관점의 안경이 부정적 색안경이 아닌 경우에 붙여지는 이름이긴 하다.

p.491 그의 신화에 따르면 모든 신화는 꿈과 동일한 문법을 갖는다.

p.492 이 책을 우리 글로 옮긴 듯은 그러므로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면 듣도 보도 않고 흰 눈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로운 종교 정신을 곧추세우는 데 밑바탕 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종교)도 좀 기웃거려 보는 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는 뜻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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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간디
2006.06.27 17:56:15 *.200.97.235
또 한권의 글이군요. 세밀한 생각과 노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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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아이드잭
2006.06.29 02:02:26 *.108.160.177
이미경님.. 존경스럽슴돠.. 그 어떤 글보다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이
좋습니다.. 오죽하면 이 글로 인해 제 블로그에 두개의 귀여운 글들이
탄생되었으니까요.. 한번 와서 봐주셈.. (여기에도 올릴 예정이나 가능
하면 제 블로그에 와주삼..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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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렬
2006.06.30 00:46:37 *.75.166.77
현실이 될 수 없는 꿈이 상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속에서
발견되어질 때 전설과 신화는 창조된 다고 봅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신화에 공감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읽고나니 기억저편에서 솟아나는 글귀가 있군요

'신이 인간에게 베푼 최고의 배려는
인간안에 자신에 이르는 길을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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