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써니
  • 조회 수 4783
  • 댓글 수 4
  • 추천 수 0
2008년 2월 10일 19시 34분 등록

“네 인생의 목소리를 들어보아라 Let your life speak.” p12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p78

『훌륭한 리더십은 자기 내부의 어둠을 꿰뚫고 지나가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지점에까지 도달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들은 이미 어둠을 경험했고 길을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을 ‘완전함’ 으로 이끌 수 있다.』 p119

“두려워 말라.”
이 말이 가진 의미는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그 두려움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p136

『풍요는 공동의 행위이자 복잡한 생태계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의 창조이다. 그 생태계 안에서 각각의 부분이 전체를 위해 기능을 발휘하며 그 대가로 전체가 이들을 지탱해 준다. 공동체가 그냥 풍요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곧 풍요이다. 우리가 자연의 세계로부터 이 공식을 배울 수 있다면 인간 세상도 변화할 것이다.』 p160


1. 저자에 대하여

파커 J. 파머 Parker J. Palmer
퀘이커 교도로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작가이자 교육지도자이며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고등교육협회 회원이며 펫쳐 교사양성프로그램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교육, 공동체사회, 리더십, 영성과 관련해서 지구촌 곳곳을 다니며 워크숍, 강의, 수련 활동을 벌여 온 그를 두고 사람들은 “위대한 스승”이라 칭하기도 했다.

1997년 전미 교육관계자들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고등교육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성ㆍ감성ㆍ영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그의 교육철학은 신이 인간 저마다에게 부여한 선물인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특별한 내면의 활동을 이끌어내어 ‘참자아’를 만나고 계발하여 일상의 공동체(커뮤니티)와 더불어 충분히 활용해야 하고, 누구나가 고유성을 지닌 특별함으로 공동체와 함께 도움과 나눔의 리더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에 저자는 솔직한 자기고백과 통찰을 통해 특유의 부드러운 필치로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며, 진정한 자기의 길을 찾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 모색을 함께하고자 한다.

저자의 저서에는『모순이 가져다주는 선물 The Promise of Paradox』,『낯선 사람과 함께하기 The Company of Strangers』,『남들에게 비춰진 나의 모습 바로 알기 To Know As We Are Known』,『가르칠 수 있는 용기 The Courage to Teach』,『당신의 삶으로 말하게 하라 Let Your Life Speak』 등이 있으며, 10권의 시집을 펴냈고, 5개의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등교육계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립학교협회와 교육출판연합으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잡지 <커몬빌>과 <크리스천 센추리>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다음은 이 책의 본문 가운데 들어있는 저자의 고백형식에 입각한 자기 통찰의 부분들이다.

‘자기 예언’들은 오십을 훌쩍 넘은 지금에 와서 보니 완전히 엉터리였다. 지금의 나는 퀘이커 교도로 평화주의자를 지향하는 작가이자 교사이며 행동주의자가 되어 있지 않은가?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 우리가 인생에서 얼마나 일찍 자기 본연의 선로를 이탈하는지 알 수 있다.
한지만 역설의 렌즈를 끼고 보면, 항해사와 광고인이 되고 싶어 했던 내 소망에는 오랜 세월 뒤에 모습을 드러낼 참자아의 단서들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서란 말 그대로 암호화되어 있어 해독해야 알 수 있는 법이다.
광고인이 되겠다는 내 희망 속에 숨겨진 것은, 내가 말과 말이 지닌 설득력에 매혹당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나는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저술활동을 해온 게 아닌가?
해군항해사가 되겠다는 희망 속에 숨겨진 것은 더 복잡했다. 폭력을 싫어하는 개인적인 성향이 처음엔 군인에 대한 환상으로 발현되었다가,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오늘날 내가 열망하는 평화주의로 녹아든 것이다. 고교시절 그토록 꼭 움켜쥐고 있던 정체성이라는 이름의 동전을 뒤집어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모습을 드러낸 역설적인 ‘정반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p31

나는 다른 사람이 발견한 것을 발전시키는 재능은 부족하지만 나만의 어떤 것을 조물락거려 만드는 일은 잘한다. 어떤 주제에 서서히 빠져들기보다는 가장 깊은 곳에 뛰어들어 수영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일을 더 잘한다. 전체적인 개요를 잡기보다는 내가 직접 한쪽 구석부터 써내려가면서 출구를 찾아내는 것을 더 잘한다. 꽉 짜인 논리의 고리를 따라가기 보다는 하나의 은유에서 다음으로 도약하는 것을 더 잘한다. p47

나는 작은 교육기관이 대형 교육기관보다 더 도덕적이라는 생각으로 내 움직임을 합리화했다. 차지만 이건 내게나 교육기관들 양쪽 모두에 대해 명백한 거짓이었다. p49

교사로서 내가 가진 재능은 학생들과 함께 ‘춤출 수 있는’ 능력, 대화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학생들을 가르치며 또 함께 배우는 능력이다. p80

나는 나와 춤추기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 더 품위 있게 대응하는 법을 배우려한다. 내 한계를 그들 탓으로 돌리는 대신 나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이다. p80


2. 내 마음속에 들어온 글귀


1 인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라

한밤중에 깨어나
‘지금 내 삶이 정말 내가 원하던 것일까?’ 물으며
잠을 설쳐 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언젠가 저 강물이 얼어붙는 날
스스로에게 물어 보기를
내가 어떤 실수들을 저질렀는지
내가 한 일들이 곧 내 인생인지

사람들이 천천히 머릿속에 떠오르네
어떤 이는 도움을
어떤 이는 상처를 주려했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기를
그들의 지독한 사랑이나 미움이
어떻게 달랐었는지

나 그대의 말을 들으리
그대와 나 돌아서서
저 말없는 강물을 바라보며 기다릴 수 있으니

우리는 알고 있네
저 강물 속에, 흐르는 물살이 숨겨져 있음을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침묵을 안고 수 마일을 흘러왔고 흘러갈 것을
저 강물의 말이 곧 나의 말임을

- 윌리엄 스태포드 William Stafford의 <스스로에게 물어 보기를> 중에서 p10

“네 인생의 목소리를 들어보아라 Let your life speak.” p12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 기울여라.”
“당신이 어떤 진리와 가치관에 따라 살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당신이 어떤 진리를 구현하고 어떤 가치를 대표해야 할지 인생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들어 보아라.” p13

내가 믿고 있는 것처럼 진정한 우리의 자아가 추구하는 것이 완전함이라면, 마음에도 없는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아무리 숭고한 비전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내부에서 길러진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부여된 강제의 것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폭력이다.

우리안의 참자아는 침범을 당하면 우리에게 저항할 것이다. 진실을 인정할 때까지 때로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면서 우리 인생을 방해할 것이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듣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 참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참모습이 내가 원하는 인생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은 내 의도가 아무리 진지하다 할지라도 결코 참된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p15

소명의 참된 의미는 ‘vocation’ 이라는 단어 안에 숨겨져 있다. 소명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로 ‘목소리voice’ 이다. 소명은 내가 추구해야 할 목표를 의미하지 않는다. 소명은 내가 들어야할 내면의 부름의 소리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이루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말하기에 앞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 주는 내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일러 주는 진리와 가치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마지못해 따르는 삶의 기준이 아니라 진정한 내 인생을 살기 위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기준 말이다. p16

인생의 표면적인 경험 아래에 더 깊고 진실한 인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며 고생도 해 봐야 한다.

자기 자신의 말을 적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는 자기 내부의 소리만 빼고 그 밖의 곳에서 들려오는 말에는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
나는 참가자들에게 노트를 서로 돌려보도록 한다. 우리가 하는 말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조언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입에 담아 말했다는 이유로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특히 이성理性이나 에고보다 더욱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때, 우리 내면의 스승이 진실을 말하고자 할 때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그런 종류의 말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럴 때는 우리의 인생이 해 주는 말을 잘 듣고 받아 적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진실을 잊지 않고, 그것을 들은 적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p17

사람에게도 식물처럼 어떤 특정한 경험의 방향으로 스스로를 끌어당기고 도움이 되지 않는 다른 것들을 멀리하려는 지향성이 있다. 만약 우리가 자기 경험에 대한 스스로의 반응을 읽어낼 수만 있다면(매일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써 내려가는 그 텍스트를), 더욱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생으로 하여금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 남들에게 기꺼이 해 주고 싶은 말을 하게 해야 한다면, 또한 내가 듣기 싫은 말, 남들에게 결코 하고 싶지 않은 말도 하게 해야만 한다!
내 인생에는 능력과 미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한계도 있으며, 실수와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 ‘완전함’을 추구하는 데서 종종 무시하게 되는 것이 있다. 자신 있고 자랑스러운 면뿐만 아니라 싫어하는 것, 또는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까지 포용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아라, 내가 저지른 실수들을.” p18

내가 잘못한 선택들, 내 실체에 대한 오해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 순간들 속에 숨겨진 진실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일을 찾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은 간디의 자서전 부제를 빌어 말하자면 ‘진실의 실험’이다. 실험에서는 나쁜 결과도 성공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나의 진실과 소명을 깨달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자기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영혼은 소환장이나 반대 심문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영혼은 고요하게 받아들이면서 신뢰할 만한 상황에서만 자신의 진실을 말한다.
영혼은 야생동물과 같아서 거칠고 활달하며 노련하고 자립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수줍음을 탄다. p20

우리 인생의 의미를 헤아리도록 도와주는 것은 언제나 침묵이다. 또한 말로는 결코 건드릴 수조차 없는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것도 역시 침묵이다. p21

2 이제 나 자신이 되다

타고난 재능을 발견하는 일

나 이제 내가 되었네
여러 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네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녹아 없어져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네
.......

- 메이 사튼 May Sarton의 <나 이제 내가 되었네> 중에서

사람이 본연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 얼마나 오래 시간이 걸리는가!
그 과정에서 자기 것이 아닌 남의 얼굴을 가면처럼 쓰는 일이 또 얼마나 많은가!
내면 깊은 곳의 정체성을 발견하기까지 우리의 에고는 얼마나 많이 녹아 내려야 하며 흔들림을 겪어야 하는가!
모든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참자아, 이것이 바로 진정한 소명의 씨앗이자 우리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다.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소명의 발견이란 얻기 힘든 상賞을 바라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참자아의 보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p25

소명은 본래 타고난 그 사람이 되어, 태어날 때 신이 주신 본연의 자아를 완성하라는 ‘여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온다.
그것은 기묘한 선물이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던 때의 바로 그 모습인 자아라는 선물이다. 이것을 선뜻 받아들이기란 다른 사람으로 변신을 꾀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나는 그 어려움 때문에 때로 그 선물을 외면하거나 감추어 두기도 했고,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거나 함부로 써 버리기도 했다.

“신은 내게 ‘왜 너는 모세 같은 사람이 되지 못했느냐?’ 라고 묻는 게 아니라, ‘왜 너는 주즈야답게 살지 못했느냐?’ 라고 물을 것이오.” p26

나의 손녀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런’존재로 이 땅에 온 것이었다. 아이는 장차 세상이 부여할 어떤 이미지로 만들어질 재료로 태어난 게 아니었다. 아이는 이미 자기만의 형상을 선물 받았으며 자기만의 숭고한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이것을 참자아라고 했고, 퀘이커 공동체에서는 내면의 빛, 또는 각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의 형상’ 이라고 부르며, 인문주의자들은 정체성이나 본성이라고 부른다.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너무나도 고귀하다. p27

사람은 누구나 천부의 재능을 타고 이 땅에 태어난다. 그래놓고는 인생의 절반을 그 재능을 내버리거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미혹되어 잊어버리고 산다. 젊은 시절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는 별 상관없는 기대들에 둘러싸인다. 우리의 자아를 알아주기보다는 어떤 틀 안에 끼워 맞추려는 사람들의 기대 말이다.
가정, 학교, 직장, 종교 단체에서 우리는 참자아를 버리고 사회적인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교육받는다.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와 같은 사회적 압력에 짓눌려 자기 본래의 형상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질 때도 있다. 또한 우리 자신 역시 두려움에 내몰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참자아를 배반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인생의 전반부를 살면서 본래 타고난 재능이 있었음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눈을 뜨고 깨달아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면, 나머지 후반의 인생을 바쳐 원래 갖고 있던 선물을 되찾기 위해 쓴다. p28

단서란 말 그대로 암호화되어 있어 해독해야 알 수 있는 법이다. p29

애초부터 우린 인생은 참자아와 소명에 대한 어떤 단서를 갖고 시작한다. 그 단서를 해독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을 풀어내는 일은 큰 의미가 있다. 특히 20대나 30대, 40대가 되어서도 갈 길을 몰라 방황하거나 이리저리 끌려 다니느라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까맣게 잊고 살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 실마리들은 ‘해야 할 일’에 매여 살아야 한다는 전통적인 소명의 개념에 맞서고자 할 때 유용하다. 추상적인 도덕률은 듣기에는 고상하지만 그것을 따라가는 한 본연의 소명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모세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기보다는 주즈야로 이 땅에 살고자 할 때 비로소 참된 소명을 발견할 수 있다. 소명에 대한 가장 깊은 질문은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가 아니다. 더욱 본질적이며 어려운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내가 타고난 본성은 무엇인가?’ 이다. p32

공학工學이란 그저 재료를 향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건축기사가 철, 나무, 돌 같은 재료의 본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단순히 보기 싫은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리나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간의 자아가 지닌 본성 역시 능력과 한계를 함께 지니고 있다. 자기가 가진 재료에 대한 이해 없이 소명을 구한다면 그 인생은 아름답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무언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에 몸 바치면서 ‘꾸며대기’를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소명과도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것은 자기 본성을 유린하는 무지하고 건방진 신조이며 결과는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우리의 가장 깊은 소명은 그것이 우리가 ‘되고자 하는’ 어떤 이미지에 맞든 안 맞든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향해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기쁨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진정 우리가 갈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소명은 자아self와 봉사service를 하나로 결합한다. 프레더릭 뷰크너Frederic Buechner는 소명을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뷰크너의 정의는 소명이란 자아에서 시작하여 세상의 요구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현명하게도 소명의 시작 지점을 제대로 본 것이다. 소명의 시작은 세상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인간 자아의 본성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자아에게 신이 창조한 선물로 이 땅에 태어났음을 깨닫는 크나큰 기쁨을 안겨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p33

우리는 반드시 ‘자아’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고 그 결과가 어떻든 최대한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인생의 진정한 공동체(커뮤니티community)를 만날 수 있다. p34

어둠으로의 여행
많은 여행과 고통을 통해 환상에서 벗어나는 날 우리는 문득 성지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음을 깨닫는다. 여행의 매순간, 이 세상 어느 곳에 있든,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성지를 향해 가는 여정이다. p35

어둠의 경험은 진정한 나의 자아로 돌아오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내가 빛 속에 머무르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사실을 밝히고 싶다. 늘 그래왔듯이 오늘날에도 어두운 부분을 꼭 감추어둔 채 그들을 모질게 대한다. 젊은 시절, 내게 자신의 어두운 경험을 얘기해 준 어른은 드물었고 대부분은 성공만 거듭해 온 것처럼 행동했다.

내 여행 이야기 역시 다른 사람들의 것과 별 다를 게 없다. 단지 나는 나의 여정과 고생스런 경험 몇 가지를 자세히 얘기함으로써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소명에 대한 통찰력을 이끌어 내고 싶다.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에게 정직이라는 선물을 주고 싶다. 또 한편으로는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조금씩 다른 개인적 경험이 자아와 소명에 대해 일러 주는 바가 많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싶어서이다. p36

나는 그 일을 하면서 세상에 대해 배운 것들을 묶어 책으로 내기도 했다. 그때 내가 배운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소명이야말로 한 사람이 전심을 다해 분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었다. p38

마음 깊은 곳의 소명은 ‘이건 내가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야. 남에게 그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고 나 자신도 이해가 잘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일이지.’ 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동기 유발에도 불구하고 내 의구심은 커져만 갔다. p44

일단 사실을 깨닫고 내 인생에서 두려움의 역할을 이해하고 난 뒤로는 더 이상 그것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p48

문제가 ‘저쪽 바깥’뿐만 아니라 ‘여기 내면’에 있음을 알고 나면 해결책은 분명하다.

내면의 기쁨과 세상의 요구가 만나는 곳
소명을 향한 여행 중 겪게 되는 회의와 우울증을 극복함으로써 나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즉 자기를 돌보는 것이 결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나의 유일한 재능,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재능을 잘 관리하는 책무일 뿐이다. 아무 때라도 우리는 참자아에 귀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보살핌을 줄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많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 끔찍한 해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p51

사회제도는 종종 사람들에게 진실하지 못한 삶의 방식을 강요하려 든다.
하지만 그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것 때문에, 사회운동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결심한다. 더 이상 내면에 깊이 간직한 진실과 상반되는 외면의 방식을 가장하며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진정한 자아를 주장하며 그것을 표출하며 살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들의 결정은 사회 변혁의 파문을 일으킨다. 수백만 명의 자아를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p52

나는 이것을 ‘로자 파크스 결정Rosa Parks decision’ 이라고 부른다. 이 유명한 여성은 분리되지 않는 인생의 의미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십대 초반의 흑인 여성으로 삯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이 중년의 여인이 내린 결단의 일화는 유명하다.
1955년 12월 1일, 엘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는 그만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 버스 앞쪽의 백인 전용 좌석에 앉은 것이다. 그것은 엄연히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위험하고 대담하며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12월의 그 날 버스 앞자리에 앉던 그 순간에는 비폭력운동 이론이 효과가 있을지, 단체가 자기를 지원해 줄지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었다. 그것은 실존하는 진실의 순간, 진정한 자아를 주장하는 순간이며 타고난 선물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행동으로 그것을 옮기는 그 순간 이 땅의 지형과 법칙이 바뀌었다. p54

침자아를 주장하다가 받는 처벌이 아무리 호되다 해도, 참자아를 주장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내리는 처벌보다는 견디기 쉽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남이 주는 그 어떤 보상도 자기 스스로의 빛을 밝히며 살아가는 데서 얻어지는 보상만은 못하다. p55

3 길이 닫힐 때

길이 열린다
나는 일자리 이상을 원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나의 내면적 삶과 외면적 삶의 일치였다. p60
길이 닫힐 때 나머지 세상이 열린다
미국인의 신화는 한계에 대한 끝없는 도전에 대한 것이다. 서부 개척시대를 열고, 빛의 속도를 넘어서며,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고, 현실 공간이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쓸모없는 것들로 가득하게 된 순간, 또 ‘사이버 공간’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불가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희망이라는 미국의 유산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불가능은 없다는 생각만을 고집한다면, 길이 닫힐 때 일어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자꾸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p67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
미국적 신화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도 없었고, 할 수도 없었다. 분명 자명한 이치인데도 우리는 종종 그것을 거부한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본성은 우리를 생태계에 존재하는 유기체처럼 만들어 놓았다. 역할이 정해져 있으며, 어떤 관계에서는 번성하지만 다른 관계에서는 시들어 말라죽는다. p69

“빈민들에게 선행을 베풀면서 그들에게 감사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랬다간 당신이 베푼 것은 얄팍하고 일시적인 것이 되고 말 겁니다. 빈민들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건 그들을 더 가난하게 할 뿐입니다. 베풀어야 할 게 있을 때만 베푸세요. 주는 것 자체가 보답이라고 여기는 사람만 베푸세요.” p75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 내 본성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선물이 나의 참다운 본성, 유기적인 실체 속에서 생성된 것이라면 내가 그것을 주어 버린다 해도 스스로 다시 생겨날 것이다. 또한 그러한 베풂의 결과는 탈진이 아니라 비옥함과 풍요로움이며 나를 새롭게 할 것이다.
오직 내 안에서 자라지 않는 어떤 것을 주려할 때, 그 행위는 나를 고갈시키며 다른 사람에게도 해가 된다. 강요되고, 기계적이며, 실체가 없는 선물은 해악만 불러온다. p76

바로 지금 여기에
내가 알고 있는 신은 우리가 이상적인 자아에 도달하도록 어떤 추상적 기준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단지 우리가 창조된 본성, 즉 우리의 능력과 한계를 그대로 존중하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그렇지 않은 삶을 살려 할 때 현실의 힘이 우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신이 우리를 인도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바로 우리 등 뒤에서 길이 닫히는 것이다.
내가 교회에서 배웠던 신, 그리고 지금도 가끔 이야기를 통해 듣는 신은 도덕적 잣대를 들고 사람들의 행동을 평가하는 교장선생님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신은 도덕보다는 현실의 근원, 즉 ‘되어야 하는’ 어떤 모습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근원이다.
그렇다고 신이 도덕과 관계가 없는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다. 도덕과 그 결과물은 신이 만든 현실의 구조에 이미 녹아 들어가 있다. 도덕 기준은 우리가 손 내밀어 잡아야 할 무엇이 아니며, 도덕적 결과는 우리가 기다려야 할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자아와 타인, 세상의 본성을 따르는지 거역하는지를 지켜보면서. p77

능력과 한계를 지닌 우리 본성의 실체에 맞추어 살려는 노력이야말로 매우 도덕적인 삶의 방식이다. 존 미들턴 머리John Middleton Murry는 이 진리를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전통적인 선善의 개념에 도전하고 있다.
“선한 사람이 선해지는 것보다 완전해지는 것이 더 나음을 깨닫는 것은, 그가 이전에 지녔던 올바름이 화려한 면허증이었던 데 비하면 험하고 좁은 길로 들어서는 것과 같다.”
내가 아는 신은 만물의 본질인 근원 시스템root system에 고요히 거하신다. 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애굽기 :14)” 모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신은 도덕규범이 아닌 본질적인 ‘존재isness’와 자아에 가까운 분이었던 것이다. 내가 믿는 바대로 우리가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면 우리가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 역시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p78

세상 뒤집어 보기
열리지 않음에 대한 내 걱정, 그 걱정 때문에 나는 계속 닫힌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 걱정에 가려 숨겨진 비밀을 보지 못할 뻔했다. 나는 이미 내 새로운 인생의 땅을 딛고 서 있었고 내 여행의 다음 행보를 내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저 몸을 돌려 내 앞에 놓인 풍경을 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인생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반대의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하며, 한계와 능력 사이의 창조적 긴장 속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본성을 왜곡시키지 않도록 한계를 인정해야 하며 타고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재능을 믿어야 한다.
길이 닫힐 때면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것이 주는 가르침을 발견해야 한다.
길이 열릴 때면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우리 인생의 가능성에 화답해야 한다. p83

4 모든 길은 아래로 향한다

상처 입은 치료자
우울증은 얼음 아래 숨겨진 인생의 강물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p86

우울증이 가르쳐 준 것들
내가 얘기하는 지식은 지적이고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완전하게 하는 것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완전함으로 이끄는 그 선택은 실용적이거나 계산되는 것이 아니며 어떤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개인적 진실을 간단하면서도 심오하게 표현해 주는 것이다. p92

영혼의 고통에 다가서기
우울증은 관계 단절의 극단적인 상태이다. 우울증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선인 관계성을 끊어버린다. p93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사람의 신비와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다. 그렇게 서 있다 보면 자신이 쓸모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이런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다. p95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하기를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방어하다가 서로를 접하고 인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빌이 내게 준 사랑이 이런 것이었다. 그는 결코 나의 내면을 거짓 위로나 충고로 침범하지 않았다. 그는 내면의 경계선에 가만히 서서 나와 내 여행을, 그리고 모든 상황을 그냥 그대로 놔둘 수 있는 용기를 존중해 주었다.
릴케는 영혼의 고통을 회피하지도 침범하지도 않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고통받는 사랑을 향한 신의 사랑은 우리를 ‘고치는’ 게 아니라 함께 고통받음으로써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독의 가장자리에서 존경과 믿음을 갖고 서 있음으로써 우리는 신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다. p97

아래로, 아래로
나는 내가 기반이 없는 땅, 안전하지 않은 높은 곳에다 발을 딛고 살고 있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높은 고도에서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문제는 간단하다. 미끄러지면 길고 긴 추락의 시간을 거쳐 바닥에 떨어지며 간혹은 목숨을 잃기도 한다는 것이다. 땅으로 내려서는 것이 축복인 것도 간단하다. 미끄러져 넘어져도 그것은 대게 치명적인 것이 아니며 곧 회복할 수 있다. p99

내가 그렇게 높은 곳에서 살게 된 데에는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나는 지성인으로서 생각하는 것- 이것은 내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활동이다- 뿐만 아니라 주로 신체 중 땅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 머릿속에서 살도록 훈련받아 왔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신을 체험하기보다는 신에 대한 추상적 개념에 더 열중했다. 지금은 그것 때문에 좌절감을 느낀다. ‘말씀이 살이 된다’ 는 가르침을 핵심으로 하는 데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육체 없는 개념들에 매달려 왔단 말인가?
셋째는 높아진 나의 에고 때문이다. 우쭐해진 에고는 실제보다 나를 더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나의 왜곡된 도덕률이다. 그것이 진실하고 현실에서 가능하며 내게 참된 생명을 주는 나의 진짜 모습을 살펴보기보다는, 내가 되어야 하는 사람, 내가 되어야 하는 어떤 것의 이미지에 따라 살도록 이끌었다.
오랫동안 그런 ‘해야 하는 것들’이 내 인생의 추진력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상에 나를 맞추지 못하자 나는 스스로를 나약하고 믿지 못할 사람으로 보게 된 것이다. p100

우리는 함께 살되 영혼의 고독을 존중해야 한다.
남을 도울 때 흔히 범하는 무의식적인 폭력을 피하고, 그 신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돕는 법을 배워야 한다. p101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를 부르던 모습이 바로 토마스 머튼이 얘기한 ‘참자아’이다. 이것은 우리를 우쭐거리게 부풀리고 싶어 하거나, 또 다른 형태인 자기 왜곡으로 우리를 위축시키고 싶어 하는 에고가 아니다.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허공을 떠돌고 싶어 하는 지성도 아니며, 추상적인 규범에 따라 살기를 바라는 도덕적 자아도 아니다.
그것은 신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할 때 우리 안에 심어 놓은 바로 그 자아이다. 그 자아는 우리에게 더도 덜도 원하는 것이 없다. 우리가 타고난 그대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참차아는 참된 친구이다. 그 우정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일 뿐이다. p103

빛과 어둠
신에게 이르는 길이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것임을 이해하기 전까지 나는 땅 아래, 지하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p104

땅 밑 세계는 위험하지만 우울증이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고 가 잠재적인 생명을 준다. 그곳에서 우리는 자아란 분리되거나 특별하거나 우월한 것이 아니라 선과 악, 어둠과 빛의 혼합체라는 걸 이해하게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인간다운 정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영적 여행은 역설로 가득하다. 겸손은 우리를 낮은 곳으로 이끈다. 그곳은 서 있어도 안전하고 넘어져도 괜찮은 땅이다. 결국 겸손은 그 안에서 더 확고하고 충만한 자아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우울증에서 빠져 나온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내 대답은 하나뿐이다.
“처음으로 내 모습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편안한 느낌을 누리고 있습니다.” p105

플로리다 스코트 맥스웰 Florida Scott Maxwell은 나보다 더 훌륭한 말로 표현했다.
“자신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사건들을 주장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동안의 자기 모습, 자기 행동을 진정으로 소유하게 되면... . 당신은 현실에 치를 떨게 될 겁니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약함과 강함, 약점과 재능, 어둠과 빛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란 걸 안다. 이제 나는 완전해진다는 것이 그 중 어느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임을 안다.

내가 나의 진실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을 때 진실 이상의 것들이 나의 일과 관계에서 유용한 것으로 다가왔다. 이제 나는 사람이 자기의 참자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결국은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점과 치부, 어둠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그런 것 때문에 내가 흔들리는 일이 줄어든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원하는 것은 내 자아의 일부로 알아 달라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동시에 전제를 받아들이는 인생은 살아가기에 더 힘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인생 전체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p107

5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다

안으로의 여행
“내적 여행을 계속하라, 에고를 지나쳐 참자아에 이르라, 그러면 자아도취에 빠져 헤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따르는 책임감을 좀 더 늠름하게 간직한 채 세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p110

자신을 리더로 생각하는 것은 주제넘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지나친 자기 확대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맞다면 리더십은 모든 사람의 소명이다.

우리가 공동체라는 이름의 밀접하게 짜여진 생태계에 살고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인도를 받아야 하고 또 모든 사람이 인도해야 한다. p111

1990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이 무너진 지 두세 달이 지난 후 바클라프 하벨Vaclav Havel(그는 체코의 반체제 극작가이자 인권운동가였으며 한때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체코 공화국 대통령인 그가 들려주는 말은 우리에게 리더십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준다. p112)은 미국에 초청되어 미의회 양원 합동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 의식이 존재에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이 인간 세상의 구원은 다름 아닌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인간이 반성하는 능력에, 인간의 겸손과 인간의 책임감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 의식의 전면적인 개혁 없이 진보란 있을 수 없습니다. ...

하벨이 얘기하는 진정한 리더십의 힘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정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어떤 환경에서나 진정한 리더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데에 목표를 둔다. 그러면 그 마음의 힘이 세상을 해방시킬 수 있다.
“의식이 존재에 우선한다.”
“인간 세상의 구원은 다름 아닌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나로서는 지금 우리가 처한 시대적 현실 속에서 이보다 더 강력하게 내적 생활의 중요성을 단언하는 말을 상상할 수 없다. 하벨의 주장은 인간 역사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요소를 물질적 현실이 아니라 의식이며 인식, 생각과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허황된 소리가 아니다. 우리 내면에는 의식의 ‘아르키메데스’의 지점이 있다. 내적인 어떤 부분을 누르면 우리를 짓누르던 거대한 돌덩이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지렛대가 생겨난다. 그리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게 된다. p113

자본주의자들은 내적 생활의 중요성보다 외적 현실의 힘을 훨씬 더 깊이 신봉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의식의 힘이 우리를 이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이야기이나 가혹한 현실은...” 하는 식의 얘기를 얼마나 많이 들어 왔고 말해 왔는가? 측량하고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중요한 변화로 여기지 않는 체계에서 일해 본적이 얼마나 많은가? 전통적인 수단과 방법을 우리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구속으로 이용하면서 창의성을 죽이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봤는가?
이것은 어느 하나의 이념을 신봉하는 자들만이 문제가 아니라 전인류적인 문제이다. 우리의 정신적인 전통을 잘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회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모자이다. p114

우리의 교육기관이 변화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기관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어리석은 경쟁을 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승리에 큰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진정한 인간적 행복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인가 역시 그 부분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이 세상에 투사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세상의 성장을 도울 수 있다. 의식은 존재에 우선한다.
당신의 의식과 나의 의식은 세상을 창조할 수도, 해체할 수도, 개혁할 수도 있다. 우리가 바로 세상을 끔찍하고 때로는 괴로운 책임의 근원지, 그리고 변화에 대한 절실한 희망의 근원지로 만드는데 공모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리더십이 요구되는 이유이며 우리 모두를 리더로 만드는 진실이다. p115

그늘과 영성
리더는 세상의 어떤 부분에, 그리고 그것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그늘과 빛을 드리울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이다. 리더는 사회의 의식을 형성하며 사람들을 그 안에서 살아가도록 한다. 천국처럼 빛이 가득한 의식일 수도 있고 지옥처럼 어두운 의식일 수도 있다. 훌륭한 리더는 리더십의 행위가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내면의 그늘과 빛의 상호작용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다. p116

달라드는 영적 여행의 중요한 특성 두 가지를 지적한다. 그 중의 하나가 어둠으로의 여행이다. 어둠의 여행은 우리를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향해 안으로, 이끌고 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적이고 긍정적인 세계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여행이다. 왜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만 하는 걸까?
왜냐하면 그 여행을 통해 우리는 자기 내부에 있는 어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둠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드리우는 그늘의 궁극적인 근원이기도 하다. 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누군가 ‘저 바깥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 방법을 수천 가지나 찾아낸다. 그래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보다는 억압하는 리더가 되고 만다. p118

하지만 애니 달라드의 말대로 자기 내무데 있는 어둠의 괴물들을 타고 아래로 계속 내려가면 중요한 한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 지점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된 장이며 자기 자신과 서로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경험하는 상태이다. 또한 조각난 인간 삶의 표면 아래 공유되는 의식의 공동체이다. 훌륭한 리더십은 자기 내부의 어둠을 꿰뚫고 지나가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지점에까지 도달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들은 이미 어둠을 경험했고 길을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을 ‘완전함’ 으로 이끌 수 있다. p119

대부분의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만델라나 하벨, 그리고 아래로 향한 길을 여행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자기 내면에 있는 어둠의 세계를 지나가게 된다. 그리고 다시 떠오른다! 다른 사람들을 공동체로,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근원적인 사랑으로 이끌고 갈 능력을 가지고 말이다.
자기 영혼을 다루는 것보다는 물질과 제도를 다루고, 타인을 조정하는 외부 세계의 일이 훨씬 더 쉽다. 우리는 외부 세계가 마치 무한히 복잡하고 힘든 것처럼 얘기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내적 여행의 미로에 비하면 가벼운 스텝 댄스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째서 그 많은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런 류의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p120
왜 사람들은 위압적이고 험난한 안으로의 여행을 떠나려 하느냐고? 왜냐하면 자기가 처한 내적인 상황에서 빠져 나올 방법이 그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일한 탈출구는 안으로, 아래로 향하는 영적 여행길의 과정 속에 있다. p124

리더가 갖기 쉬운 다섯 가지 그늘
지도자로서 그늘보다 빛을 더 많이 드리우고 싶다면 내면의 어떤 괴물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것들이 만들어낸 그늘을 탐험하고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생활에 뛰어들 때 찾아오는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p125

그늘을 두리우는 첫 번째 괴물은 자기 정체성과 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이다. p126
두 번째 그늘은 세상은 전쟁터이며 사람에게 적대적인 곳이라는 믿음이다.
불행이도 인생은 ‘자기 예언’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들로 가득하다. 패배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이 마치 전쟁터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살아가게 한다. 세상은 경쟁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대개는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p127
내적 여행의 과정에서 우리가 받는 선물은 세상은 영원히 함께 작용함을 깨닫는 통찰력이다.

세 번째 그늘은 모든 일에 대한 최후의 책임이 우리 인간의 몫이라는 믿음이다.
이 그늘은 삶의 모든 단계에서 병을 일으킨다. 그것은 우리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도록 하며, 관계를 지나치게 압박해서 때로는 단절에까지 이르게 한다. 종종 세상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 사실에 화가 난 나머지 탈진이나 우울증, 절망으로 끝나기도 한다. p128
내적 여행에서 우리가 받는 선물은 세상에는 우리만 활동하고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다른 활동이 있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중 어떤 것은 우리보다 더 낫다.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힘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짐을 우리가 져야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때로는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함을 누릴 수도 있다. 우리를 이끄는 거대한 공동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맡기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다. p130

네 번째 그늘은 두려움, 특히 인생의 혼돈에 대한 두려움이다.
내적 여행에서 우리는 혼돈이 창조성의 전조라는 통찰력을 얻게 된다. 모든 창조 신화에 있듯이 인생도 무無에서 나온 것이다. 이미 창조된 것도 때때로 혼돈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더욱 생기 있는 형태로 다시 살아난다. 리더가 혼돈을 진정으로 두려워해서 그것을 없애려 든다면 그 리더가 접근하는 모든 것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다. 인생의 혼란에 대한 최후의 해답은 죽음이니까 말이다.

마지막 예는, 역설적이지만 죽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죽음을 부정하는 심리 내면에는 또 다른 두려움이 숨어 있다. 바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흥미롭게도 우리 문화에서 그토록 존경받는 과학은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초월한 것처럼 보인다. 훌륭한 과학자는 가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실패’ 는 진리에 이르는데 필요한 길을 더 분명하게 입증해 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성공한 하나의 가설보다도 더 많은 사실을 알려 주기도 한다.p131
모든 환경에서 최고의 리더는 실패가 뻔한 일이라 해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에게 포상을 한다. 이런 리더들은 죽음이 언제나 새로운 배움의 원천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내적 여행에서 우리가 얻는 선물은 결국 모든 것에는 죽음이 다가옴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끝은 아니다. 생명이 다한 어떤 것을 죽게 함으로써 새로운 삶이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p132

공동체에서의 내면 활동
먼저 ‘내면 활동inner work’의 가치를 끌어올려야 한다. ‘내면 활동이라는 말이 가정이나 학교, 종교 단체에서 평범한 말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내면 활동이 외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있다는 것부터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에는 일기쓰기, 책읽기, 명상과 기도처럼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p133

두 번째로, 우리는 내면 활동이라는 말을 널리 퍼뜨려야 한다. 내면 활동은 매우 개인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반드시 비밀스런 일일 필요는 없다. 정말이지 내면 활동을 함께 하는 것은 혼자 하는 것과는 결정적인 대조를 이룬다. p134

우리는 함께 살되, 그 방식은 영혼의 고독을 존중해야 한다.
또 우리가 남을 구하려 들 때 흔히 범하는 무의식적인 폭력을 피해야 한다. 그 신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지탱하도록 돕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채워 달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나에게 보여 준 행동은 나를 ‘고치거나’ 서로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그러기에 나에게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게 하는 생명의 끈이 되어 줄 수 있었다. 그 생명선은 가장 심오한 형태의 리더십을 만들어 냈다. 고통받는 사람을 죽음 같은 삶에서 다시 삶으로 인도한 것이다. p135

세 번째로, 우리는 서로에게 두려움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지배적인 역할을 상기시켜 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능력을 가로막는 두려움이 어떤 방법을 즐겨 사용하는지도 모두에게 인식시켜 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전통적인 지혜의 말씀이 두려움을 언급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모든 지혜의 말씀이 인간이 이 오래된 적을 이겨내기 위한 싸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지혜의 전통은 엄청난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말씀으로 통합된다.
“두려워 말라.”
두려움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자칫 그 뜻이 왜곡되어 ‘완벽’이라는 기운 빠지는 충고를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 그 말씀들을 주의 깊게 읽었다. 두려워 말라는 말은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리고 내면에서 리더십을 발견한 사람들은 종종 더 많은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이 말이 가진 의미는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그 두려움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두려움의 공간으로부터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그 때문에 두려움이 증폭되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p136

6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끝없는 순환
우리가 농경사회에서 자연과 친밀하게 산다면 비유이자 현실로서의 계절이 계속해서 우리 삶의 틀을 만들어 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비유는 농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업에서 나온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는 우리 인생을 ‘기른다grow’가 아니라 ‘만든다make’고 믿는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모든 것을 만든다는 문화의 오만한 자신감에 젖어 있다. 세상은 단순한 ‘원료’이고 거기에 우리가 디자인과 노동을 가하기 전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격하시켜 버리는 것이다. p143

인생의 살아 있는 생태적 환경을 존중하는 데에 뿌리를 둔 생각과 행동, 그리고 존재 방식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변화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p144

가을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도 그때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보인다. 실직이 내게 필요한 일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음을, ‘길 막혔음’이라는 표지 덕분에 내가 방향을 돌려 가야 할 길로 들어서게 되었음을, 회복 불능이라고 느꼈던 손실 덕분에 내가 진짜 알아야 할 의미를 깨닫게 되었음을, 표면상으로는 인생이 작아지는 듯 보였지만, 언제나 소리 없이 그리고 풍부하게 새 생명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다.
삶이 죽음 안에 숨겨져 있다는 이 희망찬 개념은 가을의 멋진 풍광 덕분에 더욱 그 힘을 얻는다. 자연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대개 어떤 화가가 죽음의 계절을 그토록 아름다운 빛깔로 색칠했겠는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추하고 불결한 것으로 여기는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 아름다움이 죽음에 있는 것인가? 죽음과 우아함이 손을 맞잡고 있음을 보여 주는 가을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들에 가장 적절한 대답을 토마스 머튼의 “보이는 모든 것에 온전함이 숨어 있다.”는 말에서 구했다.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세계에서 위대한 진실은 흔히 볼 수 있는 곳에 숨어 있다. 쇠락과 아름다움, 어둠과 빛, 죽음과 삶은 상반되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숨겨진 온전함’의 역설 속에 함께 존재한다.
역설 속에서 상반되는 둘은 각각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 둘은 현실의 심장부에서 신비스러운 결합체로 하나가 된다. 나아가, 그 둘은 같이 있어야 건강하다. 우리 몸에 들숨과 날숨이 모두 있어야 하듯 말이다. 하지만 역설의 복잡함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손쉬운 사고방식을 선호하는 문화에서 상반되는 둘을 동시에 간직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어둠 없는 빛을 원하며 가을과 겨울의 고난 없이 봄, 여름의 영광을 원한다. 그런 파우스트적인 거래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지 못한다.

어둠이나 빛 모두 따로 떨어져서는 인간과 함께 살기에 적당하지 않다. 하지만 어둠과 빛의 역설을 받아들이면 그 둘은 함께 힘을 모아 모든 살아 있는 것에 완전함과 건강을 선사한다. p147

겨울
우리 내면의 겨울은 실패, 배신, 우울증, 죽음 등 여러 가지 형태를 보인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들 모두가 주는 충고는 똑같다. p150

“겨울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으면 겨울 때문에 미쳐버릴 겁니다.”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두려움 속으로 대담하게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 두려움이 우리 인생을 지배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 안으로 똑바로 걸어 들어가면 우정이나 내적 훈련, 또는 영적 인도라는 따뜻한 보호장구를 껴입고 동상에 걸리지 않은 채 그들이 전해주는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계절의 순환이 믿을 만한 것이며 생명을 주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발견한다. 심지어 가장 힘든 계절에도 그렇다. p151


봄은 서서히 망설이듯 시작되지만 꾸준히 성장하여 끝내 나를 감동에 빠뜨린다. 제일 작고 연약한 새싹들도 꾸준히 제 길을 따라 땅을 뚫고 올라온다.

내 인생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나는 진흙탕을 지나는 것만 힘들었던 게 아니다. 더 큰 생명이 다가올 거라는 작은 조짐도 믿기 힘들었으며 그 결과가 확실할 때까지는 희망을 품기도 힘들었다.
봄은 내게 가능성을 지닌 초록 줄기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가르친다. 직관적인 육감은 폭넓은 통찰력으로 변한다. 눈빛과 손짓이 얼어붙은 관계를 녹일 수도 있으며, 낯선 이의 친절한 행동이 세상을 다시금 살만한 곳으로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p153

인생은 언제나 겨울이 강요하는 바대로 자로 재듯 측정하며 사는 게 아니라 가끔은 다채로운 색채와 성장에 탐닉해 흥청망청하게 될 때도 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순수한 기쁨 그 하나의 이유만을 위해 겨울에는 모두 거두어 가버린 것처럼 보였던 생명의 선물을 다시 선사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것을 몰래 감추어 두지 않고 모두 아낌없이 준다. 여기에는 모든 전통적인 지혜의 말씀에서 알려져 있는 또 하나의 역설이 있다. 선물을 받았을 때 그것을 계속 살아 있게 하는 방법은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p154

써니 : 우리의 고난과 내면 활동에서 피어나는 글/재능은 신의 선물이다. 내 삶의 좌절과 실패, 그 지난함도 자연에 비유하면 가을과 겨울의 준비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인생의 봄을 잉태하여 여름날의 활짝 핀 한 송이 꽃으로 찬란히 솟아나기 위해 필요에 불가결한 한바탕의 통과의례通過儀禮적 요소/시절에 불과할 뿐이다.

가을의 풍족한 씨 뿌리기에서부터 엄청난 봄의 선물공세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한결같은 교훈을 일러 준다. 즉, 우리 생명을 구하고 싶다면 그것을 움켜쥐고 있지 말고 아낌없이 써 버리라는 것이다. 지나친 손익 계산과 생산성, 시간과 활동의 능률성, 수단과 목적의 합리적인 관계, 적당한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이르는 ‘최단코스beeline’를 만들어내는 것에 집착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결실을 맺기도 힘들고, 우리 인생에서 봄의 충만함을 누리기란 힘들 것이다.
언제부터 ‘꿀벌이 다니는 길beeline’을 최단코스라는 잘못된 뜻으로 쓰기 시작했을까? 봄에 꿀벌들이 일하는 모습을 잘 보라. 벌들은 꽃과 자신의 운명을 희롱하며 이곳저곳을 날아다닌다. 분명, 벌들은 실리적이며 생산적이다. 하지만 그 일을 동시에 스스로 즐기고 있을 거라는 내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과학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p156

여름
인간 세상에서 풍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풍요는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려는 의식을 가지고, 공동으로 저장한 것들을 자축하고 함께 나눌 때 찾아온다. 돈, 사랑, 권력, 어휘, 부족한 자원이 무엇이든 그것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고 서로 돌려쓰면 그 자원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이 진짜 인생의 법칙이다. 진정한 풍요는 든든하게 쌓아놓은 음식이나 현금, 권력, 애정에 있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공동체 안에 속해 있을 때 찾아온다.

“물론 우리는 공동체(커뮤니티) 안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결국, 그게 단 하나의 훌륭한 생물학이죠.”
이전의 생물학은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 같은 불안한 비유로 사람들을 몰아댔지만 이제는 새로운 비유가 있다. 바로 ‘커뮤니티’이다. 물론 지금도 죽음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죽음이란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커뮤니티에 전해지는 유산으로 이해된다. p159
여기 여름철의 진리가 있다. 풍요는 공동의 행위이자 복잡한 생태계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의 창조이다. 그 생태계 안에서 각각의 부분이 전체를 위해 기능을 발휘하며 그 대가로 전체가 이들을 지탱해 준다. 공동체가 그냥 풍요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곧 풍요이다. 우리가 자연의 세계로부터 이 공식을 배울 수 있다면 인간 세상도 변화할 것이다.

여름은 가을과 겨울, 봄이 약속했던 약속어음 지불일이 다가오는 계절로, 해마다 그 빚을 복리 이자를 쳐서 갚는다. 여름에는 이전에 우리가 자연의 과정을 의심했던 것도, 마지막 단어인 죽음이란 말을 꺼냈던 것도, 새로운 생명력에 대한 믿음을 잃었던 것도 모두 잊어버리기 쉽다. 여름은 우리가 가진 믿음이라는 게 그리 굳건하지 않음을 상기시켜 주는 계절이다. 여름은 우리의 불안한 음모를 접어두고 일상생활에서 지속되는 풍요로운 은혜를 맘껏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다. p160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을 통틀어 저자가 주장하는 한 마디 말의 귀결은 결국 이렇게 함축해서 이해 할 수 있다.
우리는『인생의 살아 있는 생태적 환경에 뿌리를 둔 생각과 행동, 그리고 존재 방식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p144 라고.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풍요는 공동의 행위이자 복잡한 생태계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의 창조 안에 그대로 배어져 있기 때문이다.『그 생태계 안에서 각각의 부분이 전체를 위해 기능을 발휘하며 그 대가로 전체가 이들을 지탱해 준다. 공동체가 그냥 풍요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곧 풍요이다. 우리가 자연의 세계로부터 이 공식을 배울 수 있다면 인간 세상도 변화할 것이다.』p160

이 책은 인생의 매 순간이 얼마나 진지하고 감동으로 넘쳐나는 것인지를 속삭이듯 전해주며 슬픔과 실패, 좌절과 패배, 사무친 배신까지도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이해시키며 용서와 화해를 거쳐 슬기와 용기를 북돋운다. 이 책을 만난 것은 이제부터 내가 내 인생의 항해를 위해 거침없이 나아가도 좋으리라는 신의 선물과도 같다. 나 비로소 내 인생의 진실을 향해 목 놓아 울던 그 열정을 고스란히 담아 앞으로 또 앞으로 한 발작씩 전진 또 전진해 나아가리.

만약 이 책이 더 두꺼웠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책 전체에 밑줄을 긋고 외워야 할 판이니 말이다. 더 두꺼웠다면 내 머리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이내 쥐가 났을 것이다. 한 줄 한줄 읽어내려 갈 때마다 감동이다. 입가에 미소와 탄성이 절로 흘러넘친다. 저자가 몹시 마음에 든다. 그의 넓고 시원한 이마와 큰 눈과 복스럽게 꽉 짜여 우뚝 선 코와 넉넉한 턱은 보기만 해도 신뢰감과 풍요가 깃든다. 늦가을의 끝도 없이 펼쳐지는 누런 황금 평야를 넉넉한 마음으로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함께 둘러보는 느낌이다. 아, 좋~다.

나는 정말 이런 책이 좋다. 가볍게 핸드백 속에 언제나 쏙 집어넣고 다니면서 한가한 시간이 주어지거나 조용히 차를 마실 수 있게 되면 한 쪽씩 부담 없이 읽어내려 가며 감동을 온 몸으로 껴안아 일상에 스미게 하고 싶다.

또한 이 책이 던진 한 가지 화두를 골똘히 새겨 명심하여야 함이 나의 과제다. 바로 내가 가진 ‘나만의 재료에 대한 이해와 소명 구하기’라 할 수 있다. 인생은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걸까?

하나, 삶은 내게 어떻게 말을 걸어왔는가?

쓰다 보니 길어져서 연구원 칼럼으로 올렸습니다.^^

두울,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자크 아탈리의 <인간적인 길>의 '양질의 시간'과 이 책에서 말하는 '의식이 존재에 우선한다'는 리더십

이 책의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프랑스의 자크아탈리가 그의 저서 <인간적인 길>에서 주장한 새로운 유토피아로 향한 인간적인 길, 즉 온 인류가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방안과 모색들이 참 대단히 아름다운 제안을 가진 혁명적인 논지라고 생각되어 다시 이 책과 연결되어 떠오르고, 또한 자주 그의 사상이 괜찮은 논리로서 그가 주장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대안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물론 전폭적인 지지는 아니다. 그가 주장한 논리의 일정부분이 매우 설득력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 책과 연결하여 맥락을 같이 하는 부분들을 살펴보자.

『민주주의에 대한 시장의 지배로 말미암아 생태학적 문제가 악화될 것이다. 이는 환경문제와 관련된 정보가 불투명해지며, 각종 자연원료 소비가 늘어나고, 다가올 세대가 직면할 문제를 내다보고 미리 조처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면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문제이다.』 p66 <자크 아탈리/ 인간적인 길>

『우리가 세운 문명들이 해체를 피할 수 있을지를 묻는 일이며, 또한 자유ㆍ도덕 그리고 진보ㆍ번영과 균형, 창조와 전이, 책임과 존엄, 정의와 경제적 효과 같은 것들이 서로 조화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는 문제이기도 하다.』 p77 <자크 아탈리/ 인간적인 길>

『정치의 주된 사명은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저마다 지상에서 허용된 시간을 최대한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돕는 것이다. 각자로 하여금 말의 고유한 의미에서 ‘양질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이는 곧 주도적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오랫동안 그리고 젊게(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그저 ‘늙도록 사는’게 아니라) 사는 것이고, 다가올 세대도 그들의 시대에 양질의 시간을 보내고, 창조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의 매분(每分)을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p137 <자크 아탈리/ 인간적인 길>

『유토피아란 저마다 ‘양질의 시간’, 진정으로 ‘충만한 시간’, ‘주도적으로 성취해 가는 삶’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바로 그곳에 있다. 나는 이를 ‘인간적인 길’이라고 부른다. 저마다 삶의 잠재성을 부단히 극대화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자기 시간을 사용하는 데 절대적 자유를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해도, 각자가 성공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선택하고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재능을 포함한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가능성을 보유할 수는 있다. 누구든 자신이 주도적으로 성취해 가는 ‘삶’,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p145 <자크 아탈리/ 인간적인 길>

또한 이 책에서는 우리 인간의 타고난 존엄성에 대해 수없이 강조한다. 그것의 일례가 리더십부분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우리 모두는 각기 저마다 달리 고유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부족하거나 다름의 차이를 서로의 상대에게 보충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각자 저마다가 모두 자신만의 재능으로 리더십을 발휘해 나갈 수 있다는 취지에서이다.

“의식이 존재에 우선한다.”
“인간 세상의 구원은 다름 아닌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p113

당신의 의식과 나의 의식은 세상을 창조할 수도, 해체할 수도, 개혁할 수도 있다. 우리가 바로 세상을 끔찍하고 때로는 괴로운 책임의 근원지, 그리고 변화에 대한 절실한 희망의 근원지로 만드는데 공모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리더십이 요구되는 이유이며 우리 모두를 리더로 만드는 진실이다. p115

세엣, 저자의 영성에 대한 자세와 앞으로의 사회의 영성에 대하여

나 자신을 알지 못하고 처음부터 신을 향해 내달리다보면 내면의 자신의 존재성에 대하여 생각해 볼 겨를이 없는 것 같다. 모태신앙 운운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함께 성찰하지 않고 신의 피조물로서의 한 부분에 영속하는 한 인간은 언제나 죄의 구렁텅이에 놓인 탕자의 모습일 수밖에는 없고, 우리의 삶은 순전히 신 앞에 작고 하잘것없는 그저 멍에를 지니고 등 뒤에서 애모나 보냄이 고작일 수밖에 없는 삶이 되지나 않을까?

내 중학교 동창은 늘 나를 위해 기도해 왔다고 주장한다. 말만 들어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한 번도 그에게서나 그의 영성생활에 대해 어떤 감화를 느껴본 적이 없다. 그렇게 차일피일 자신에게 동화되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는 언제나 너무도 공정한 죄의 심판관이 되어 나의 무지와 교만함을 설교하면서 자신들이 모두 천국에서 편안히 살 때, 나만 홀로 떨어져 죄의 사막에서 악마들의 무리에 들볶이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서슴없이 경고장을 남발해댄다. 그가 보는 한 언제나 제일 나쁜 죄질의 부류에 속해 있는 나는 구제불능이다. 반면에 자신은 십일조를 꼬박꼬박 받쳐서 그 누적된 천국행 티켓의 가격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프리미엄까지 붙어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당당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나일론인 나는 지옥행을 따 놓은 당상이 되어버렸다.

우리에게 영성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이고 왜 영성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신은 내게는 그와 같은 신앙을 보내지 않음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이 그들이 주장하듯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의지의 몫이라서?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질투의 신이기 때문이라는 그들의 논리와 아버지 말을 따르지 않은 탕자에 대한 벌이라는 잣대가 왠지 추워 보인다. 누군가는 신을 보았고 그 음성을 들었다고 하여 그 체험에 신빙성을 입증하며 다른 반론들을 일시에 잠재운다. 신과 영성 앞에 그들이 주장하는 외의 논리는 무가치하며 도저히 다른 생각과 차이를 들어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그 옹색함이 나는 아주 불편하다. 이렇게 나를 세상에 내놓은 신은 말이 없고 주위의 판단만이 난무하니 말이다. 저절로 죄에 갇혀 살지 않으면 안 되고 믿기만 하면 그 아무리 사악한 모든 죄는 사해지노니... .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렇지 않았다. 강요된 설득으로 사람들에게 사기詐欺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견지에서 솔직하게 영성과 인간을 논하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 털어 놓으며, 그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와 경험을 열어 진실을 찾아 나서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육자로서 또한 종교인으로서도 그들만의 집단 무희가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의 입장과 삶에서 저마다의 삶의 의미를 깨우쳐 통찰해 나가고,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전 세계적인 공동체적 논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모색에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나도 후련히 살다가 홀연히 사라지게 되는 어느 날엔가는 알게 될 일이다. 그때까지는 저자의 말대로 침묵하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일까?

앞으로의 세기는 영성생활에 더욱 의미가 있어 보인다. 노마드적 생활이 그러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동성이 대두되는 방랑과 유랑의 생활에 삶의 질서와 정신적 토대를 찾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적 교류를 스스로 노력해서 얻고 지향해야 하는 패러다임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다가오는 세기는 점점 이전의 정착농민적인 생활을 고집할 수가 없다. 그 옛날 수렵 농민들처럼 이제 우리는 휴대폰 하나 달랑 들고 가방 하나를 전부로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에서건 가벼운 짐 보따리를 풀어 머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더욱 그러할 것이다. 사방으로 통하는 길에 가방 하나 달랑 든 신유목민이 있고, 그 구심점을 매개할 무엇은 영성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영성철학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지금과 같은 그리고 한국의 샤머니즘과 전통과 서구의 개척 시대적 종교관과 동양의 유교관이 뒤죽박죽 한데 엉겨서 아귀다툼을 벌이듯 하는 영성이 아닌, 인간 고유의 보다 인간적인 원래의 신에 대한 갈구가 정말 나로서도 절실하기는 매 한가지다. 어느 한쪽에서 편을 갈라 내치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보면 영성성은 없고 주변의 얄궂은 무리들의 자기편의주의적 심판의 잣대와 설침의 이상기류만 난무하는 것 같아 그것이 어쩐지 나는 불편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주는 모색과 공감대는 나로서는 사뭇 고무적이라 하겠다.

네엣, 책은 오감이다

저자의 글이 간결하면서도 부담 없는 수필처럼 편안하고 부드럽고 자유로운 사상으로 녹아든다. 마치 날씨 청명하고 기분 좋은 아침 공원의 숲길을 산책하며, 새소리와 나비의 날갯짓에 몸을 맡기어 한가롭고 충만하게 지지배배 나폴나폴 속삭이듯 정겹다.
불과 160여 페이지 밖에는 되지 않는 무겁지 않은 분량으로 저자의 이야기를 깔끔하게 담아낸 것도 상쾌하다. 종이의 재질은 미끄러질 듯 매끄러워 방금 목욕을 마친 여인의 실크가운 같은 느낌으로 다가와 아가를 목욕시키고 난 후의 뽀송뽀송한 투명한 살갗처럼 말갛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이 유쾌하게 맘에 드는 것은 솔직히 이 책에 실린 사진이다. 사진이 너무 좋다. 컬러플하게 실리지 않았음에도 그 광경이 눈에 확 퍼지는 듯 또렷하고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노출만으로서 흑백사진의 우아함을 한껏 들어냈으며, 그 섬세하고 치밀하게 공을 깃들인 컷의 애정 하나하나가 정말 비온 뒤의 정원을 산책하듯 상큼하고 맑은 투명함으로 벅차게 싱그럽다.

그리하여 저자만큼이나 호소력 있게 본문에 실린 사진이 내용을 설득하고 보충하며 한껏 안정되게 이끌어간다. 이렇게 천생연분으로 어울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출판사를 보고 또 보고 사진을 찍은 이를 찾고 또 찾으며 이 책을 읽었다. 정말 대단한 상생의 어울림이다. 섬세함, 부드러움, 그리고 무엇보다 밝음이 좋다. 표현하지 못한 음침함이 보이지 않아 좋다. 있는 그대로가 깨끗하게 살아 움직임이 좋다. 진중함이 우아하게 배어남이 좋다.

책을 읽다보면 종이 재질이 마치 책장이 부러질 듯 딱딱하거나 거칠고 활자도 피곤하면 눈도 피로하고 촉감도 거칠어서 읽는 이가 집중이 잘 안 되는 듯해서 짜증스러울 때가 있다.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재질이 매끄러우면 저자와 독자를 섬기는 출판사라는 느낌이 팍 들어온다. 게다가 같은 책임에도 활자와 그 간격, 약간의 책의 크기 등이 전체적인 실루엣을 이루며 한 가지 톤으로 어우러질 때는 절로 편안한 기분이 들면서 독서가 달콤한 휴식이 된다. 이 책은 출판사 가족들이 저마다 충실하게 온 정성을 다한 느낌이 들어 참 성의 있는 곳이란 생각이 절로 들어 기분이 좋았다.
IP *.70.72.121

프로필 이미지
맑은
2008.02.14 04:06:50 *.207.136.252
써니님 서평 보고,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다음 글이 맘에 들었습니다.

'당신은 우울증을 당신을 망가뜨리려는 적의 손아귀로 보는 것 같군요. 그러지 말고 당신을 안전한 땅으로 내려서게 하려는 친구의 손길로 생각할 수 있겠어요?'120

언젠가 암전문 의사 선생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5명중 1명은 암에 걸려 죽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암과 친구 해야 한다는 획기적인 발언을 하셨습니다. 암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치욕과 상처도 나의 일부이고 받아들이고자 노력해야 겠다는 반성했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2.14 09:11:23 *.70.72.121
책, 많이 빨리 잘 읽으시는 분이군요. 내가 무지 부러워 하는 부분이죠.

위의 내용은 p100 에 나오는 구절이네요.^^

"우울증은 나를 안전한 땅, 한계와 재능, 약점과 강점, 어둠과 빛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나의 진실, 나의 본성의 땅 위로 내려서게 하는 친구의 손이었다." p102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가진 삶의 역사가 바로 나'라는 것, 빼고 싶든 더 하고 싶든 그 모든 것이 다 나라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은 그 안에 존재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래서 소설가 안정효님께서는 나이가 들수룩 자서전의 두께가 얇아진다고 하나봐요.^^

졸업 작품으로 저서전을 집필하려고 하는데 잠깐 안정효님의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으려다 순간 멈추게 된 것이 내가 과연 이렇게 너절한 그리고 별 영향력없는 삶을 가지고 끝까지 쓰고,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발이 안 떨어지더라구요.

어쩌면 자서전이라는 것은 완성된 삶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온전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 될 테지만요. 다 이해하게 되면 말이 줄어들고 단순해지고 쓸 것도 없겠죠? 제 삶도 아직은 우울증이 자산인 것 같거든요. ㅋ

나 하나를 위한 글쓰기도 정말 쉽지가 않네요. ㅠ.ㅠ
님의 글도 앞으로도 주욱~자주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참, 이 참에 저도 연구원 아우 옹박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겠어요. 그 친구가 오래 전에 강추한 책이 걸랑요.
프로필 이미지
바람처럼
2008.02.15 09:47:23 *.104.23.137

"네 인생의 목소리를 들어보아라"

참 멋진 표현입니다.

'내 인생의 항해를 위해 거침없이 나아가도 좋으리라는 신의 선물'을 저도 꼭 읽어 보겠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

선배의 졸업 작품도 곧 만날 수 있겠지요?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2.15 22:06:04 *.70.72.121
어쩐지 숨고 싶지요. 시내에 나가면 연락 한 번 해야겠군요. 조언 들으러.

고마워요. 10기가 꿈 벗 모임 준비할 때 전야제부터 참석해 주세용. ㅋ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92 [44] 생각의 탄생 교정 한정화 2008.02.26 2222
1291 신화의 힘, 조셉 캠벨 [3] 홍현웅 2008.02.26 2320
1290 [47] 불꽃/ 춤꾼 최승희 자서전 [2] 써니 2008.02.25 2875
1289 [독서45]정석 목민심서/정약용. 다산연구회 편역 [1] 素田 최영훈 2008.02.24 3850
1288 2. 한국의 고집쟁이들_박종인 file [2] 맑은 2008.02.18 2301
1287 1. 끊임없이 사장을 꿈꿔라_양찬일 맑은 2008.02.16 2377
1286 [독서44]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박현모 [2] 素田 최영훈 2008.02.15 2277
1285 질문이요. [5] 맑은 2008.02.14 2131
» [46]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파커J. 파머 [4] [1] 써니 2008.02.10 4783
1283 춤추듯 변화하라 : 캐럴 에이드리언 소현 2008.02.10 2964
1282 부유한 노예 [3] 바람처럼 2008.02.09 3019
1281 [45] 내 인생의 자서전 쓰는 법/ 린다 스펜스 [2] 써니 2008.02.08 9829
1280 어린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가는가-프랑수아즈 돌토 우제 2008.02.04 3587
1279 [44] 낯선 곳에서의 아침/ 구본형 써니 2008.02.03 2246
1278 [43] 이미지와 환상 - 다니엘 부어스틴 [2] [1] 校瀞 한정화 2008.02.01 6112
1277 헤르만 헤세 <정원 일의 즐거움> [3] 소은(蘇隱) 2008.02.01 3444
1276 [독서43]뼛속까지내려가서써라/나탈리골드버그 素田최영훈 2008.01.31 1997
1275 [번역008] 12장 내면의 신념에 따른 삶(Living with Inner Conviction) 香山 신종윤 2008.01.31 3244
1274 [43] 마크 트웨인 자서전/ 마크 트웨인 [1] 써니 2008.01.29 3332
1273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1] 우제 2008.01.28 3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