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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일 16시 45분 등록
Ⅰ. 저자에 대하여

‘천복을 좇으라. 자신의 기쁨을 따르라.’ 저자 조셉 캠벨은 말은 가슴을 친다. 가슴을 치는 조셉 캠벨의 말은 어떤 사유를 거쳐 나왔을까.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인 캠벨은 인류의 삶 이전에, 그리고 인류의 삶과 함께 이어져 온 신화를 긴 시간 파헤치고 다닌 끝에 그러한 결론을 얻은 것일까.

신화가 무엇이기에 캠벨은 신화 속에서 그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을까. 신화란 백과사전의 풀이에 따르면 ‘어떤 신격(神格)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전승적(傳承的) 설화를 말한다’. 어렵다. 더 풀어보자. ‘신화를 뜻하는 myth는 그리스어의 mythos에서 유래하는데, 논리적인 사고 내지 그 결과의 언어적 표현인 로고스(logos)의 상대어로서, 사실 그 자체에 관계하면서 그 뒤에 숨은 깊은 뜻을 포함하는 ‘신성한 서술(敍述)’이라 할 수 있다.‘ 역시 어렵다. 더 들어도 어렵다.
신화하면 흔히 떠올리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폼 나고 럭셔리한 신화다. 그러나 캠벨이 말하는 신화들은 거칠다. 색조화장한 얼굴이 아니라 상처투성이의 맨 얼굴을 그대로 들이미는 격이다. 인류의 기원과 인간의식의 원류를 파고든다. 단순히 이야기거리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신화들이 아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라 불리는 대중들에게 익숙하지도 않고, 익숙해지지도 않는 것들이다.

조셉 캠벨은 어떻게, 어떤 까닭으로 자신의 삶을 그러한 신화 속으로 밀어 넣었을까.
캠벨은 1904년 미국 뉴욕의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저자 자신의 말에 의하면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고, 신화 모티프와 유사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릴 적 공연을 보고 인디언에 대해 강한 흥미를 품었고,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인디언 문화와 제의에 대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신화학자의 토대는 이미 그 시기에 싹을 틔었다. 자신의 기쁨을 따르는 일도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에야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했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이어간 삶의 자취가 자신이 신화 속에서 찾아낸 사유의 결과물과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대학시절에는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는데 인문학에 흥미를 느껴 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유럽 유학시절 파리와 뮌헨에서 산스크리스트와 인도 유럽어족의 언어들을 공부했고 괴테, 토마스 만, 프로이트, 융의 사상을 섭취한다. 또한 유럽 각지의 신화를 두루 섭렵한다.
미국에 돌아왔지만 대학에는 그의 전공인 신화연구 강의 자체가 없었다. 또 대공황까지 겹쳐 불러주는 곳이 없자 우드스톡의 오두막에서 책읽기로 5년을 보낸다. 책에서 그는 이 시절에 자신의 공부를 완성했다고 말한다. 사라 로렌스 대학의 초청으로 강의를 시작한 그는 20세기 최고의 신화해설자로 불리는 명성을 얻는다.
‘우파니샤트’를 번역했고 지은 책으로는 대표작으로 ‘신의 가면 4부작’이 있다. 수준 높은 인문학 도서로 명성이 높은 ‘볼링겐 시리즈’의 편집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그 외에 ‘천의 얼굴을 한 영웅’ ‘신화와 함께 하는 삶’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의 이미지’ 등의 저작을 남겼다. 1987년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누가 신화에 관심을 가질까 생각해보자. 지식인이라 해도, 인문학에 조예가 깊다 해도, 나름대로 많은 교양의 틀을 튼튼하게 갖추고 있다 해도, 신화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일반 대중들에게 신화는 흥미의 대상일 수 있겠지만 연구나 공부의 대상으로는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시장성이 떨어진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캠벨이 유럽 유학에서 돌아왔을 때 어느 대학에서도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 부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강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그의 길을 갔다. 전공을 바꾸어 강의 자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숲속의 오두막에 칩거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 책을 읽으며 더 깊은 공부를 했다. 그의 말대로 천복을 좇았다. 그리고 천복을 얻었다.

캠벨에게 신화는 모든 것이다. 나에게 신화는 별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캠벨이 신화 속으로 천복을 따라 발을 옮겼고, 평생의 삶을 기꺼이 바치며 살았다는 것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러기에 이제 신화는 나에게도 별것 아닌 것 이상의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르겠다.



Ⅱ. 마음에 들어 온 글귀

[8]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12]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오? 봉직하던 대학의 이사진이 좁으장한 학교의 커리큘럼으로 자기를 잡아두려 했을 때 캠벨이 내뱉은 말이다.

[14]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24]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 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25]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26] 나이를 먹어 나날의 삶에 대한 관심이 심드렁해지면, 사람은 내면적인 삶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 내면적인 삶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 참 곤란한 일이지요.

[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30] 우주는 무엇이던가요? 벼룩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32] 이들은 자기네 관계를 아이들을 통한 관계로 해석하면서도 그것이 실수를 범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제대로 된 관계를 지닌 사람들이라면 자기네이 관계를 상호간의 인간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33]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43]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삶의 모습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50년 전에는 온당했던 것이 지금은 온당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어요. 과거에는 미덕이던 것이 오늘날에는 악덕이 되었고요. 과거에는 우리가 악덕이라고 하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필요악이 되어 있는 경우도 수없이 볼 수 있어요.

[58] 나는 현대의 진정한 공포의 도가니를 베이루트에서 봅니다. 거기에서는 서양의 3대 종교,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 받고 합니다. 왜?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지 못해요.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참 의미는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그들은 자기네를 둘러싸고 있는 고리를 열어본 적이 없어요. 말하자면 그 고리는 폐쇄회로인 것이지요.

[63]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들은 종교의 관념을 저희가 사는 사회에만 적용시킬 줄 알지, 이 시대의 삶,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적용시킬 줄은 모르고 있어요. 이것은 우리 현대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종교의 실패를 증명하는 무서운 본보기입니다. 베이루트에서 치고 받는 세 신화학은 결국 현대 세계를 때려눕히고 있어요.

[74]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74]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86]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87] 우리는 고래 등에 서 있습니다. 만물의 바탕자리는 바로 우리 존재의 바탕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세상 여기저기에 널린 온갖 잡사를 다 보고는 하지요.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세상 잡사의 근원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96] 때로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이지요. 삶 역시 한 세대에서 이울면서 다음 세대로 넘겨져 거듭납니다. 뱀은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합니다.

[100]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102]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

[105] 물론 없었지요. 에덴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 나위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랍니다. 바로 이 원초적인 중심에서 인간의 의식은 서로 다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106]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107] 한가지 설명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114]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는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 중에 자주 인용되는 시가 있는데, 이게 중국의 도덕경에도 나옵니다. 이렇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115] 저는 토요일마다 신부님께 고해를 했습니다. 그러자니 토요일만 되면 한 주일 동안 짓지 않을 수 없었던 시시콜콜한 죄를 모두 생각하게 되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저를 축복해주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 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뿐입니다”, 이럴 걸 그랬다 싶군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118] 부처라는 사람은 깬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부처의 의식에 다가서야 합니다.

[133]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 일을 낙관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 할 수는 없을 테니까.

[134]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나는 누가 이런 식으로 되기를 의도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디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 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139]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 직관에서 끊임없이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인생의 경험에는 그런 기능이 있어요.

[146]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냥꾼입니다. 사냥꾼은 맹수와 마찬가지입니다. 신화를 보면, 사냥하는 맹수와 사냥감이 되는 짐승이 어울려 의미심장한 역할을 연출해냅니다. 이 양자는 삶의 두 측면을 암시하지요. 즉 공격적이고 죽이고 정복하고 창조하는 삶의 측면과, 대상, 혹은 객체가 되는 삶의 측면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162] 유감스럽게도 그렇지요. 그래서 젊은이들은 제 손으로 그 의례를 만듭니다. 그래서 불량배들이 작당을 하여 설치고 다니는 등의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 불량배의 동아리가 되는 등의 행태는 결국 입문 의례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175] 수많은 철학자에 의해 되풀이 된 신에 관한 정의가 있습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 구체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바로 모이어스씨가 앉아있는 그 의자입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 둘 다 이 신빈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습니다.

[179]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같은 시간, 여백같은 날이 있어야 합닏.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179]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느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190]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194] 여성에게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 마력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의 마력이 대지의 마력을 버티어주게 딘 거지요. 고대의 전승에 따르면 최초의 경작은 여성의 손에서 이루어 집니다.

[198] 신화를 읽다 보면 가장 놀라운 게 그 점이지요. 나는 평생 이 짓을 해왔습니다만, 한 문화권의 이야기가 다른 문화권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데에는 여전히 놀라고는 합니다.

[204]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 두 문지기가 우리를 위협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쫒겨난 겁니다.

[211]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215] 사람들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매일 직장을 오가면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있다....... 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217] 단테의 신곡이 다루고 있는 문제도 결국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22]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 천복을 한 번도 좇아보지 못하고 산 셈입니다. 천복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223]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225]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테를 바퀴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자, 돈이 중요하겠어요. 천복이 중요하겠어요? 나는 유럽에서 공부하다가, 1929년, 월스트리트가 무너지기 3주일 전에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일자리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지요. 그런데 내게 그 시절은 정말 멋진 시절이었어요.

[226]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227]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 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 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어요? 있다면, 연민을 느껴야 당연한 불쌍한 사람이지요. 생명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목을 쥐어뜯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지요.

[229]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233] 여기에서 핵심은,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245] 브루클린의 고등학생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설문을 돌렸더니 3분의 2가 명살고 대답했다더군요. 뭐가 되자면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하는 한심한 대답이지요.

[248] 광명의 아들이 아닌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인간은 꿈같이 덧없는 존재. 그러나 하늘의 선물인 태양이 비치면, 광명한 일광이 머무르면, 아, 아름다워라

[254] 그래요.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마야의 신화가 가슴에 와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270] 구체적인 프로그램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 가슴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정신분열증적 해리의 위험이 있어요. 자기 중심에서 이탈해 있는 사람이거든요. 삶을 위한 프로그램에 맞게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2]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272]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273]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라도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 일, 자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구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273]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 있는데도,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꼼짝 못하게 합니다.

[274] 자기가 지키고 있는 것이 어디에 소용이 될는지도 모르고 그저 지키기만 하는 거지요. 사람들 중에도 그런사람이 있지요? 우리는 이런 사람을 자린고비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서는 나오는 삶이 없어요. 주는 삶이 없어요. 그저 남에게 빌붙어 돌면서도 죽자고 자기 삶의 방식에만 매달립니다.

[284] 우리는 예술을 공부하고 예술의 기법을 배우러 가서 스승이 강요하는 것만 열심히 좇곤 하지요. 그러다 보면 기법을 쓰기는 쓰되 스승이 시키는 대로 쓸 것이 아니라, 한번 자기 식으로 서보고 싶을 때가 오지요. 이게 바로 사자의 행위가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이때가 디면 학생은 스승에게서 배운 모든 기법을 버립니다. 자기에게 완전히 동화되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바로 이때부터 예술가로서의 홀로 서기가 시작됩니다.

[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297]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곹ㅇ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298] 프로이트는 우리 삶이 오점투성이인 것은 다 부모 탓이라고 했고, 마르크스는 우리 삶이 이렇게 열악한 것은 우리 사회의 상류 계급 탓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탓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밖에 없어요. 카르마라고 하는 인도의 개념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마 도움을 줄 겁니다. 이 개념 풀이에 따르면, 우리 삶은 우리가 지은 업의 열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밖에는 탓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

[299]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가령 우리 부모가 서로 눈이 맞는 것부터가 우연이지요! 우연, 혹은 인연이라고 합시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301] 나는 보통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ALE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통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북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보통사람, 보통여자, 보통아이 같은 걸 도무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308] 대지가 식물을 낳듯 인류의 여성은 인간을 낳지요. 대지가 그 식물을 기르듯 인류의 여성도 인간을 기릅니다. 따라서 여성이 지니는 마력은 대지가 지니는 마력과 같은 것이지요.

[317]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도 진짜 하느님의 아들은 아닙니다. 메시아는 그 성격으로 보아, 존귀한 정도로 보아, 하느님의 아들과 비슷한 가치를 지닐 뿐입니다.

[336] 그러나 여신은 다릅니다.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337] 우리는 이런 데 살고 있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사람은,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341] 에로스적 사랑은 생물학적 충동에서 나와요. 즉 이성에 대해 몸으로 충동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개인적인 요소, 개성적인 요소는 개입할 여지가 없지요.

[341]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식의 영적인 사랑이에요. 이웃이 누구이든 전혀 상관없이 사랑해야 하니, 이것도 개인적인 것일 수 없지요.

[344] 사람은 죄악을 생각하다 보면 정말 죄인 비슷하게 되니까요. 삶의 의지를 이렇게 짓밟아놓는 것, 이게 바로 크레도 라는 겁니다.

[347] 트리스탄은 자기의 사랑은 죽음보다, 고통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보자 귀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삶의 고통을 대단히 대승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지요.

[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352] 그러나 그런 야만적인 시대에 문명을 지향하는 힘이 있었어요. 중요한 것은 이 힘이 여성의 손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왜? 사랑 놀음의 주도권을 쥐고 규칙을 만들고 허무는 권리가 여성에게 있었기 때문이지요. 남성은 여성의 요구에 따라 놀아나는 정도의 역할밖에는 하지 못했습니다.

[356] 성배 이야기의 테마는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이나 나라를 그 무대로 합닏.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 곧 황무지 아닙니까? 황무지의 기본적인 성격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살기는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황무지입니다. 황무지를 통하여 엘리엇이 표현하려고 한 것도 바로 이겁니다. 황무지의 거죽은 실제성을 표상하지 못합니다.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들어 봤을 겁니다.

[359]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는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360] 낭만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가 두 세계에 걸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하면, 밖에서 강요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하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 두 세계를 조화 있게 상호 관계시킬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나는 이 모듬살이로 태어났으니까, 모듬살이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모듬살이의 울타리에 사맂 않겠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요. 왜냐, 살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죠.

[364] 그러나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 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은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370] 사랑의 고통이란 다른 고통이 아니라 곧 삶의 고통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삶이 있는 거죠.

[373]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 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375]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383] 원수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뽑아내려 하지 말고,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럴 수 있으면 원수가 사는 삶의 방법을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391] 결혼 반지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는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상징이라는 말은 둘을 서로 엮는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반쪽과 또 하나의 반쪽이 서로 엮이어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반지를 보세요, 완벽한 원형이지요? 이 반지를 보고 있으면 원이라는 게 두 반원이 엮이어 하나가 되었다는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보는 결혼입니다.

[393] 우리의 정신 안에는 인류의 공통되는 어떤 힘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자세한 데까지 같을 수가 없어요.

[404] 영원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까?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지요. 아니, 없는 데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지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영속하느 곳일 뿐입니다.

[407] 이웃이 곧 우리이니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군요? 이웃을 사랑해보면 곧 이웃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지요.

[409]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는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410] 이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모이어스시, 우릭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주제인 존재를, 우리 나름의 표현법을 통해서 그려내려고 하는 일에 지나지 못합니다.

[412]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왜?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울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Ⅲ. 내가 저자라면

미지의 장소로 여행을 떠나 뜻밖에 나 자신의 모습을 찾은 느낌이었다. 조셉 캠벨의 책 ‘신화의 힘’은 미지의 여행지였고, 선뜻 발을 들여 놓고 싶지 않은 길 이었다. 신화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부터 성큼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 출발이었다. 발을 어렵게 떼어 놓고 보니 이번엔 걷는 속도가 마냥 더디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서는 어둠속에서 빛의 줄기를 발견한 듯 했다. 그렇다고 발걸음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역시 어둠속 이었고, 달라진 것은 어렵지 않게 찾아내는 빛의 맛이 아주 각별하다는 것이었다.

책은 한편으로는 난해하고 지루하지만 한편으로는 복잡하면서도 신나는 퍼즐조각 맞추기처럼 즐거움을 선사한다. 난해하고 지루하다는 것은 신화학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당연히 저자가 평생을 일구어 온 신화의 내용을 책 한권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복잡하면서도 신나는 퍼즐조각 맞추기처럼 즐겁다는 말은, 책을 읽어 갈수록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자각이 솟아난다는 것이다. 거기에 스스로의 삶 자체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까지 가득하다. ‘신화의 힘’은 신화를 잘 아는 독자들에게는 신화이야기 자체로 힘을 갖지만, 신화를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신화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책에는 삶에 관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캠벨은 신화 이야기를 토대로 하면서도 그것을 개인과 현재의 삶에 연결시키고 있다. ‘신화와 현대세계’ 에서는 신화가 왜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가를 일러주고, ‘내면으로의 여행’ 에서는 신화와 개인들의 내면의 관계를 보여주고 삶을 보는 인간의 마음의 근원을 일깨워 준다. ‘희생과 천복’은 개인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한마디로 잘라 말한다. 책은 그 외에도 죽음, 행복의 모습, 사랑과 결혼 등 삶 전체를 관통하는 것들에 대한 경구로 이어진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식으로 책을 보면, 캠벨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쉽고 단순하다. ‘주어진 삶을 천복을 따라서 살라. 너의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라.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물라. 두려워 말아라.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강력한 울림을 주는 말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처럼 실행하기 어려운 말도 찾아보기 어렵다. 처절한 이율배반이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 이율배반을 스스로 알고 살아간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천복이나 꿈보다는 현실을 먼저 생각한다. 그럴 즈음 캠벨은 한마디를 보탠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살은 내가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권합니다. 천복을 좆되 두려워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그래도 망설인다면 저자인 캠벨은 협박에 가까운 말을 던진다. ‘사람들이 살기는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황무지입니다.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어느 날 불현듯 ‘몸은 시들어 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삶의 주제가 매일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온다거나,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삶의 한 모습이다. 거기에 덧붙여 ‘삶이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다’ 든지 ‘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면, ‘신화의 힘’을 집어 들고 빠져들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미국의 PBS(사회교육방송)에서 방송한 여섯 시간의 대담을 책으로 묶었다는 점에서 ‘신화의 힘’은 다른 책과는 구성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대담을 책으로 묶은 예가 없지는 않지만, 이론적으로 쉽지 않고 경구로 가득 찬 대담을 활자화 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장단점을 지닌다. 장점으로는 구어체의 문장이 TV 대담프로를 보듯 접근이 수월하다. 또한 이론적인 문체로 책을 쓸 경우 피하기 어려운 건조하고 현학적인 표현이 적다. 단점은 대담형식으로 책을 구성하면 책의 고유한 느낌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대담형식의 책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도 단점이 될 수 있다.
대중적이지 않은 신화학을 일반 대중의 삶과 연결시키는 이야기의 전개라는 점에서, 책의 내용을 따라가는 독자들의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도 있다. 저자의 끝을 알기 어려운 사유의 결과물들을 펼쳐놓았지만 독자들은 장면 장면의 연결이 어려워 보인다. 신화의 내용이나 책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간단한 설명을 책 곳곳에 배치했으면 이해가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IP *.214.2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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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3.03 22:56:27 *.125.205.55
유인창 말씀마따나 저도 신화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구요.
이번 신화의 힘을 읽고 정리하면서 여러모로 느끼는바가 있었습니다.
지금 삼국유사를 읽고 있는데요.
아마 신화의 힘을 읽지 않았다면 일연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인창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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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4 19:02:07 *.70.72.121
<‘신화의 힘’은 신화를 잘 아는 독자들에게는 신화이야기 자체로 힘을 갖지만, 신화를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신화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담담한 필체가 돋보이네요. 차를 마시며 오늘같이 눈 오는 창밖을 내다보는 여유까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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