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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6일 10시 58분 등록
 

피터 드러커 자서전

피터 드러커 지음 / 이동현 옮김 / 한국경제신문


I. 저자에 대하여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


  꽤 오랫동안 경영학에 관한 이야기 속에 꼭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다. 2005년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애도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경영학이란 학문을 만들어낸 장본이기도 한 그의 삶은 학자로써 당분가 나오기 힘들 만큼의 큰 업적을 인류에게 남겼다.

  그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인간관계를 지녔다. 그것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대가도 있었지만 가문의 영향도 매우 컸다. 어린 시절부터 중독수준의 독서는 그가 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때론 상당히 어린 나이 차이를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독서를 통해서만 그의 업적을 이룬 것은 아니다. 여러 해 동안 은행과 잡지, 신문 등의 현장 경험은 그의 통찰을 더욱 날카롭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이재규씨의 홈페이지 http://www.jklee.com/data2.htm#드러커와의%20대화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예측과 예언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미래학자


20세기 초엽부터 말엽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드러커는 20세기를 (제1차 세계대전,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일본의 부흥,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락사태, 인종분쟁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드러커가 접촉한 (이 글에서 일부 언급한) 인물들은 20세기의 여러 측면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며 20세기의 의미를 체험했던 인물들이므로 그들을 통해서 드러커는 20세기를 관찰해 온 셈이다.

드러커 박사는 1989년 《새로운 현실》에서 소련방의 해체를 예언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이후, 사실은 그전부터 여러 매스콤에서는 그를 마치 [미래학자]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드러커 자신은 예측(forecast)이나 예언(predict)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드러커는 "단지, 이미 일어난 현실을 바탕으로 미래를 남보다 앞서 갈 수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지금 결정해 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던 드러커 박사야 말로 다가올 미래사회에 대한 책들(《단절의 시대》(1969)·《새로운 현실》(1989)·《자본주의 이후의 사회》(1993)·《미래의 결단》(1995)·《21세기 지식경영》(1999) 등)을 쓰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Built to Last》의 저자 짐 콜린스(Jim Collins)는 "피터 드러커의 수많은 논문들과 심원한 통찰력은 1930년대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기원에 관한 선견력 있는 논문부터 시작하는데, 그는 현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일관성 있는 관점을 제공하는 기고가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스며든 [효과적인 경영]은 자유세계를 지탱케 하고, 독재자와 전체주의가 다시 등장하지 못하게 하는 단 하나의 대안인데, [효과적인 경영]의 확산이라는 점에서 피터 드러커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고 평하고 있다. 

비록 예언이라는 단어를 싫어하지만 드러커는, 미래의 세계의 모습에 대해 범세계주의(globalism)·지역주의(regionalism)·종족주의(tribalism)는 급속하게 새로운 국제정치체제, 즉 새롭고도 복잡하고 그리고 전례가 없는 정치구조와 정치체제를 창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일명 [지식사회], [피고용자사회], [연금기금 사회주의], [노동자 없는 공산주의], [개인자본가가 없는 자본주의] 등)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세 가지 벡터(vector)를 갖는다.

세 가지 벡터를 갖는 벡터 방정식은 불안정하며 예측할 수 없으며 그리고 하나의 해답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클레어몬트대학


드러커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경영학 교수로서 장기간 뛰어난 경력을 쌓았는데, 처음에는 뉴욕 대학의 경영대학원(New York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Business, 1950∼1970)에서, 1971년부터는 지금까지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 대학원(Claremont Graduate School)에 계속 봉직하고 있다. 1987년 클레어몬트 대학은 경영대학원의 명칭에 드러커의 이름을 붙여 경영대학원의 명칭을 Peter F. Drucker Graduate School of Management로 바꾸었다.

드러커는 최고경영자들에 대한 컨설턴트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지난 50여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최우수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드러커에게 조언을 구하고 또한 받아들이고 있다. 그 점은 정부의 정책입안가들이나 비영리부문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드러커는 미국, 벨지움, 체코, 일본, 스페인, 스위스, 그리고 영국의 많은 대학들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92년말 필자가 드러커를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정치학자·경제학자·철학자·사회학자·경영학자·저널리스트·경영컨설턴트·소설가·미술평론가·미래학자 등 다양한 호칭 가운데 박사님께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드러커는 "그야 물론 사회과학자 겸 경영학 교수이지" 라고 답했다.


최후의 경영르네상스인


190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한 드러커는 정치, 사회, 예술, 그리고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남녀 명사들에 둘러싸여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예술과 고전문학 그리고 법학교육을 받았지만, 사실상 그의 학문적 수업은 그가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가 수행한 업무들로 이루어졌다.

처음에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신문기자와 편집인으로 일했고, 그후에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상업은행의 행원으로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미국에 정착한 뒤에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드러커는 1950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경영자는 경영을 해야 한다"(Management Must Manage)를 기고한 이래 오늘날까지도 계속 좋은 논문을 게제하고 있다.

지금 그는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클레어먼트대학원 사회과학부 교수로 있으며,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저명한 경제학자 케네드 볼딩(Kenneth Boulding)은 드러커를 평하여 [미국 사회의 제1급의 철학자]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대로 드러커는 철학자로서의 평가도 대단하다.

또 드러커 비영리재단의 최고경영자 겸 이사회장인 프랜시스 헤셀바인(Frances Hesselbein)은 "피터 드러커는 저널리스트로서의 명쾌한 감각, 경제학자로서의 예리한 분석능력, 그리고 폭넓은 역사적 안목을 지닌 할아버지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유용하고도 통찰력 있는 그의 논문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드러커가 우리 사회에 끼친 공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20세기는 혁명과 전쟁 그리고 데땅뜨의 세기였고, 이데올로기와 냉전,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과 탈냉전의 세기였으며, 또한 산업화와 과학화 그리고 공해와 환경파괴의 1백년이었다. 20세기를 [파란만장과 질풍노도의 세기]라고 규정한다면, 1909년에 태어나 지금도 활동 중인 드러커는 이 한세기를 경험한 현자(賢者)이다.

드러커 박사의 관심의 영역은 이미 논의한 것처럼 경제학·경영학·정치학·사회학·철학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대상을 학문이라는 차원에서 논할 때는 그러하지만, 드러커의 지적 영역은 체르니(Karl Czerny, 1791∼1857)의 음악기법에서부터 에도(江戶)시대의 일본화(日本畵)까지, 마크 트웨인의 소설에서부터 유럽의 교육제도와 사회보장제도에까지 이른다.

그의 학문적 업적 즉 논문이나 저서는 그 깊이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수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1999년 8월 현재) 35회나 기고하였고, 경영학·경제학 관련 저서 또한 30여권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일본화에 대한 평론집과 소설을 두권이나 썼다. 따라서 드러커를 20세기의 마지막 경영르네상스적 인물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II.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프롤로그


구경꾼은 자신만의 역사가 없다. 그들은 무대 위에 있지만 연극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심지어 관객의 역할도 하지 않는다. 연극과 거기에 참여한 모든 배우의 성공은 관객들의 반응에 달려 있지만, 구경꾼의 반응은 연극의 성공과 전혀 관계가 없다. 21p


■ 할머니

   인간에 대한 예의를 깨우쳐준 유쾌한 사람


  “전보를 보낼 때는 내용을 극도로 간결하게 적은 것이 적절하고 예의에 어긋나지도 않는다고들 하니 난 그저 이 말만 하련다. 무한한 행복이 있기를.” 39p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천천히 그 청년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우산으로 그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말했다. “난 네 정치적 견해가 뭔지 관심이 없어. 게다가 나치당의 주장에 일부 동조하는 면도 있지. 넌 좋은 교육을 받은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이건 모르는 것 같아.” 그리고 만자 표시를 가치켰다. “이 물건이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몰랐나? 누군가의 종교를 비웃는 행위는 누군가의 여드름을 비웃는 건만큼이나 무례한 행동이야. 너도 누가 너를 여드름쟁이라고 부르면 기분이 나쁠 거야, 안 그래?” 60p


■ 헤메와 게니아

   경영의 귀감으로 삼은 괴짜 부부


  게나가 나는 런던에서 한 여성을 알게 됐고(그 여성은 결국 내 아내가 되었다), 그녀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그녀 곁에 있고 싶어 한다는 사실과 그녀가 사는 곳에서 나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확실해졌다. 75p


  “지금 네가 빈을 떠나겠다는 것도 전적으로 옳은 결정이다. 이곳은 과거 속에 있고 이미 끝난 도시니까. 하지만 피터, 일단 떠나기로 했으면 떠나야 해. 떠날 사람은 작별인사 따위는 필요 없는 법이다. 게니아에게 키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라.” 그러더니 나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집으로 가서 짐을 싸. 런던으로 가는 기차는 내일 정오에 출발한다. 너는 그 기차를 타야 해.” 그는 거칠게 나를 문 밖으로 끌어내더니 계단 밑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 외쳤다. “직장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세상에는 직장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게다가 네가 여기서 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자리도 많아. 나중에 직장을 잡거든 엽서나 한 장 보내다오. 우리를 완전히 잊니는 말란 말이야.” 77p


■ 엘자와 소피

   교육의 길을 제시한 노처녀 자매 선생님


  나는 산수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전 담임선생은 산수 점수가 좋지 않다고 야단을 치기까지 했기 때문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생각을 밝혔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물론 네 성적은 별로 좋지 않지. 하지만 네가 산수를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야. 산수 성적이 나쁜 것은 계산이 너무 느려서 검산을 할 만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야. 160p


  미스 소피는 결코 야단을 치지 않았으며 비평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 질렸을 때는 이단아의 옆에 앉아서 그 녀석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고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175p


  미스 엘자와 미스 소피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면, 나는 내 자신을 연마하는데 게을러졌을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다른 사람을 지루하게 만든다는 사실에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문적인 작가가 별 생각 없이 빠져들게 되는 위험이다. 나는 자신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김나지움의 선생들은 분명 그런 위험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181p


  미스 소피조차 내게서 장인의 재능을 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위대한 음악가가 음치를 가수로 만들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그녀 덕분에 장인정신의 진가를 제대로 평가하게 됐다. 소박하고 꾸밈없는 작업의 기쁨과 노동에 대한 존중이 어떤 것인지 일생 동안 지속되는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내 손가락들은 나뭇결에 따라 대패와 사포로 깨끗하게 다듬은 나무의 느낌을 기억한다. 내가 그런 느낌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미스 소피가 내 손을 붙잡고 나무 표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기 때문이다. 182p


  슈나벨은 한 달 뒤에 있을 다음 레슨 때 연주할 곡을 지정한 다음, 그 곡을 즉흥연주하게 했다. 이번에도 어린 소녀의 능란한 기교가 확연히 드러났다. 슈나벨은 그녀의 기교적 탁월성을 또다시 칭찬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한 달 동안 연습했고 레슨 시간 처음에 연주했던 두 작품으로 화제를 옮겼다. “사랑스런 릴리, 너도 느꼈는지 모르겠구나. 너는 그 두 작품을 정말 잘 연주했다. 하지만 너는 네귀에 들리는 대로 연주하지 않더구나. 단지 네 귀에 이렇게 들려야 한다는 식으로 연주했지. 그건 진실한 연주가 아니란다. 그리고 내 귀에 그게 들렸다면 청중들의 귀에도 들릴 거야.” 릴리는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슈나벨이 다시말했다. “이젠 내가 슈베르트의 소나타 가운데 안단테를 내 귀에 들리는 대로 연주할 거다. 나는 이 곡을 네 귀에 들리는 대로 연주할 수는 없어. 그리고 네가 연주하는 방식대로 연주하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 곡을 너와 같은 방식으로 듣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듣는 대로 들어보면 너도 차이를 느끼게 될 거야.” 185-186p


슈나벨이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네 귀에도 들리니? 그거 대단하구나. 네 귀에 들리는 대로 연주하는 한, 너도 음악을 연주하는 거란다.” 186p


학생들이 선생을 가리켜 “우리는 그분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어도 된다. 학생들은 분명히 좋은 선생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188p


  '선생 관찰‘을 통해 처음에 도달했던 결론에 따르면, 선생들은 어떤 유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육방법에 있어서도 유일하게 옳은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르치는 능력은 재능이고, 좋은 선생은 그 재능을 타고났다. 그것은 베토벤이나 루벤스, 아인슈타인이 자신만의 재능을 타고 났던 것이나 다를 게 없다. 가르치는 능력은 일종의 개성이지 기술이나 숙련이 아니다. 193p


  선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자신의 재능 가운데 가르치는 재능이 포함돼 있는 선생이 있는가 하면, 학생에게 학습을 프로그램해서 넣는 방법을 알고 있는 교육자가 있다. 선생은 타고난다. 그리고 타고난 선생은 자신을 향상 시키고 더 좋은 선생으로 거듭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자는 가르치는 방법을 갖고 있고, 그것은 학습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이든 그 방법을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타고난 선생은 자신의 재능에 교육법을 추가함으로써 아주 쉽게 더 훌륭한 선생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 뒤에 그는 만능선생이 되는데, 여기서 만능선생이란 대규모 강연장이든 소규모 교실 수업이든, 초보자든 석사과정이든 어떤 조건에서도 뛰어난 교육효과를 거두는 선생을 의미한다. 198p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가르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학습’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계획된 학습이다. 198p


  교육자는 학생들의 깨달음에 같이 도취됨으로써 열정을 얻는다. 학생의 얼굴에 떠오르는 깨달음의 미소는 어떤 마약이나 약물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교실에 만연된 무시무시하고 학생을 고사시키는 전염병에 교사의 권태감을 치유하는 것이 바로 이 열정이다(교사의 권태감은 가르침과 학습을 완벽하게 가로막는 장애요인이다). 200p


  “너는 그 때와 다름없는 피터 드러커임에 틀림없구나. 교편을 잡는 동안 겪었던 몇 안되는 실패작 말이야. 너는 내게 글씨를 알아보게 쓸 수 있는 기술을 익혔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지.” 진정한 선생과 진정한 교육자에게 게으르다거나 열등하다거나 멍청한 학생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선생이 잘했거나 능력이 없었을 뿐이다. 201p


■ 프로이트

   프로이트에 대한 프로이트적 분석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영어권에 사는 사람들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거의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다. 첫째, 프로이트가 평생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며 거의 빈곤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는 것. 둘째, 반 유대주의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학에 임용될 권리가 당연히 있었음에도 불고하고 그러지 못했으며, 완전한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는 것. 셋째, 빈에서 살던 시절에 빈 의학계가 프로이트를 무시하고 경시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사실’은 모두 완전한 허상이다. 205p


  프로이트는 죽는 날까지 정신분석학이 엄격히 과학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마음의 작용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용어로, 또 화학 및 전기적 현상으로, 또 물리학의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과학적인 합리성과 비합리적인 내면의 경험이라는 두 세계를 하나의 종합이론에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였다. 그것은 계몽시대가 낳은 극단적으로 합리적인 프로이트와, ‘영혼의 어두운 밤’을 꿈꾸는 몸상가이자 시인인 프로이트를 한 개체에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였던 것이다. 이런 통합으로 정신분석학은 그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지만, 동시에 그만큼 허약해지기도 했다. 이 시도는 정신분석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정신분석학은 시대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서구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19세기의 체계(마르크스, 프로이트, 케인즈)는 모두 과학가 마법을 통합시켰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 “모순되기 때문에 나를 믿는다”로 이어지는 논리와 경험적 연구를 모두 강조했다. 231p


■  트라운 트라우네트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회주의자의 고백


  한스 삼촌 - 나는 그분 에게 법철학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형벌의 이유를 설명하는 문제’라는 것이 삼촌의 답이었다. 252p


  내가 보기에 요점은 형벌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형벌은 사회 속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하나의 사실이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든 사회에 만연된 현실이었다. 진정 설명이 필요한 것은 범죄의 존재였고, 그것은 내 능력의 한계를 크게 초월하는 분야였다. 254p


  트라운 트라우네트 백작이 자신의 역할, 그리고 자신의 죄의식을 과장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사회주의는 1914년 8월의 총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때 사회주의 대중들은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포기하고, 그 대신 열광적으로 민족주의를 수용하면서 동지들 간의 상잔인 전쟁을 택했던 것이다. 그것은 신학으로 마르크시즘의 끝이 아니었다. 신학은 신앙보다 더 질겼다. 그것은 또한 정치세력으로 사회주의자들의 끝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이상으로서 사회주의의 종말이었다. 비록 영원히 끝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하나의 세대 전체에 관한 한 말이다. 268p


  1914년 이후부터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그람시로, 그가 전쟁 전의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솔리니가 그를 감옥에 집어넣는 바람에 실상을 접할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다. 269p


2부 명멸하는 시대의 사람들

■ 폴리니 가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흥미로운 가족


  순간 네 사람 모두 말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그들의 침묵이 끝도 없이 길게 느껴졌다. 그러고는 네 사람 모두 나를 쳐다보며 합창이라도 하듯이 동시에 말했다. “아주 훌륭한 생각이군요. 월급을 자신을 위해 쓰다니! 우리는 그런 소린 생전 처음 들어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요.”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285p


■ 크레머

   키신저를 마든 외교정치 고문


  독일의 명민한 정치학도였던 크레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으로 참전했다 퇴역한 후 미 육군참모총장의 유럽 담당 정치고문이 되었다. 이때 군 복무 중이던 키신저를 만났으며, 키신저가 정치학 공부를 마치고 하버드의 교수로 취임할 때까지 크레머는 키신저의 친구, 개인교사, 고문의 3역을 맡았다. 닉슨 대통령 시절 미국 외무장관이 된 키신저는 프리츠 크레머에게서 처음 들은 세 가지 정치철학, 즉 외교정책의 우선원칙, 외교정책에서 힘의 우선원칙, 천재 외무장관의 필요성이라는 원칙을 키신저 정책의 3대 핵심으로 삼았다. 크레머는 드러커 자신이 정치적으로 이단자임과 드러커의 진정한 관심이 무엇인지 개닫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312p


  크레머와 나는 패권을 잡으려 하는 것은 자멸적인 형태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우리는 아테네 몰락의 역사를 쓴 투키디데스가 패권의 어리석음에 대해 경고했던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우리는 또 열강이 약소국과 동맹을 맺어 자국의 위치를 튼튼히 하려고 ‘블록’을 형성 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라는 데 동의했다.

  1930년대 초에 가장 눈에 띄는 블록은 비스마르크 이후의 독일과 쇠락해 가는 오스트리아의 동맹이었다. 이는 독일의 힘을 키우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독일은 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했고, 결국에는 오스트리아의 무능력함과 무책임함의 포로가 되어 자멸적인 전쟁에 말려들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외교정책의 기초로 ‘피보호국’을 두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예가 무궁무진하다. 그런 외교정책은 늘 ‘피보호국’이 주인이 되고, 부주의한 국가는 쫓겨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335p


  그 예날 크레머와 나눈 긴 대화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공적인 일에서 위대한 인물이 지니는 패러독스를 인식하게 됐다. 위대한 인물이 없으면 비전도 리더십도 우수함과 업적의 기준도 없다. 또한 공적인 일에서 평범함은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이나 과학과는 달리 공적인 일에서는 개인적인 성취 외에도 연속성이 필요하다. 공적인 일에서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위대함을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위대한 사람은 자기 뒤에 공백상태를 남긴다. 디즈레일리의 지적처럼 그의 빈자리는 대개 기법만 알지, 다른 것은 거의 알지 못하는 ‘해병 대위’가 물려받게 된다. 338p


  키신저의 경험이 뭔가를 증명한다면 그것은 ‘천재 외무장관’이라는 원칙이 오류라는 것, 사실은 속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국내 정치활동이라는 물 위를 떠다니는 코르크 마개가 아닌 외교정책을 필요로 한다. 세력균형의 정책이 필요하다. 중간국가를 동반자로 통합하고 힘이라는 정의에 군사적인 잠재력 이외의 다른 요인들을 포함하는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아울러 미국의 외교정책에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리더십은 영리함이나 기교가 아니라 단순함과 정직함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342p


■ 헨슈와 셰퍼

   나치즘이 불러온 개인의 비극

헨슈는 드러커가 <프랑크푸르트 게네랄 안치이거>의 금융담당 기자로 일하던 당시 동료 편집자였다. 이후 포악한 나치의 앞잡이 역할을 도맡아 ‘괴물’로 불렸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던 헨슈는 권력을 잡으려는 야망 때문에 나치의 중심부로 편입한 인물이다. 헨슈에 대한 기억은 드러커 최초의 저서인 <<경제인의 종말>>을 집필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어린 양’으로 표현한 셰퍼는 <베를리너 타게블라트>의 미국 주재원으로 근무했다. 기자이자 정치분석가였던 세퍼는 나치의 만행을 막으려는 사명감으로 <타임>과 <포춘>의 유럽 총국장직을 뿌리치고 <베를리너 타게블라트>의 편집장을 맡기위해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치의 권력에 이용만 당하다가 2년 후 숙청되고 만 비운의 인물이다. 343p


■ 브레일스포드

   영국의 마지막 반체제자


경건한 인품의 브레일스포드는 영국 사람이다. 그는 시대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인사이더’였지만 기질적으로 반체제자였다. 옥스퍼드 대학의 지도교수였다가 1899년 발발한 영국과 트란스발 공화국 간의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났다. 이후 저명한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날렸는데 역사의 과학적 법칙보다 신념과 도덕을 토대로 한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형안의 분석가, 굴하지 않은 양심의 소유자로 유명했던 브레일스포드는 스스로를 유용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결국 자신의 양심을 권력에 영합시켰다. 그 결과 지난날의 무게 있는 존재에서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추락하고 말았다. 365p


  당시 나는 내 첫 번째 주요저서인 <<경제인의 종말>>을 막 마친 다음 노엘이 자신의 친구라며 소개시켜준 미국인 출판업자에게 그 원고를 보낸 후였다. 그 출판업자는 그 원고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출판은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나치가 ‘마지막 해결책’으로 유럽의 유대인을 모두 학살할 계획이며, 가까운 시일 안에 히틀러와 스탈린이 협정을 맺을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그 당시 자유세계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 에게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393p


■ 프리트베르크

   19세기의 탁월한 개인 금융업자


1934년 드러커는 직장을 구하기 우해 기약 없이 런던으로 갔다. 이때 부친의 부탁으로 옛 친구의 아들에게 뻐꾹시계를 전해 준 일이 드러커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이 일을 계기로 개인금융회사인 프리트베르크사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이 회사를 운영하던 프리트베르크는 탁월한 은행가이자 중개업자였다. 그는 책을 통해서만 경제를 공부하던 드러커에게 은행업은 사람을 다루는 일이라며 관찰해 볼만한 사람들을 소개시켜주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 소매업계의 일대 혁신자인 헨리 아저씨와 재무의 천재 파르붐을 만나게 되었다. 프리트베르크와 이들의 경제활동 방식은 드러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398p


  “드러커, 자네는 다른 누군가의 평판을 방어해 주는 변호사가 아니네. 자넨 은행가이고 자네가 얻거나 잃은 평판은 모두 자네 자신의 거야.” 415p


  일단 상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사가 효과적으로 일하게 만드는 것이 하급자로서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자 해결방안은 아주 간단했다. 나는 프리트베르크의 휴지통을 비우지 말고 다음 날 아침에 내가 점검할 때까지 뇌두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3일도 안 돼 회계상의 혼선이 없어졌다. 417p


  프리트베이크가 나를 불렀다. “로베르트 씨와 리하르트 씨는 자네가 앞으로 은행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더군.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자네는 너무 많은 시간을 책하고만 씨름하는 것 같아. 책을 통해 경제전문가가 되는 법을 배울 수도 있지. 하지만 은행업이란 사람을 다루는 일이야. 앞으로는 사람을 관찰해 보게. 내가 관찰해 볼 만한 몇 사람을 만나게 해주지.” 417p


  우산에 관한 길고 긴 이야기를 그는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소매에는 오직 두 가지 원칙만 있네. 첫 번째 원칙은 ‘2센트 에누리에 안 넘어오는 고객은 없다’이고, 두 번째 원칙은 ‘진열해 놓지 못한 상품은 팔 수 없다’는 거지. 나머지는 모두 노력이야.” 또는 “어리석은 고객은 없어. 단지 상인이 게으른 거지. 고객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어리석다고 말해서는 안 돼. 고객을 ‘재교육’ 시키려고 해서도 안 돼. 그건 상인이 할 일이 아니거든. 상인이 할 일은 고객을 만족시키고 그들이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것이지. 만일 고객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 같다면, 밖으로 나가 고객의 입장에서 상점과 상품을 살펴보는 거야. 그러면 그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 단지 그들의 셩실이 상인의 현실과 다를 뿐인 거야.” 424p


  "드러커씨, 당신도 나이가 들면 사람은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일을 고수한다는 걸 알게 될 거요. 난 내가 어떤 여성에게 좋은 남편이 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으며, 그 타입을 고수할 만큼 나이가 들었소. 물론 내 선택은 성공했지요.“ 435p


  파르붐은 그것을 검토하더지 이렇게 말했다. “맞아요. 이 채권은 지금 팔리는 가격보다 최소한 6배의 가치가 있어요. 하지만 난 관심이 없소.”

  “어째서죠?”

  우리의 질문에 파르붐은 이렇게 답했다. “당신들이 그 채권을 사려는 이유는 단 하나, 확실한 이익을 얻기 위해서죠. 난 내가 그 회사를 위해 기여하고 뭔가 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투자하지 않소. 머리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은 오래전에 버렸지요.” 444p


  "하지만 저는 제가 은행가가 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프리트베르크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총명한 젊은이가 하고 싶은 일이 그것 말고 뭐가 있겠나?” 445p


  새뮤얼 존슨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할 때 가장 순수하다.” 현대의 귀에는 아주 의아하게 들릴 말이지만 그 ‘영감님’이 인간의 행동에 대해 얘기한 것은 절대로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는 가장 지혜로운 판단을 내렸다. 구시대의 종교적 도덕주의자인 그가 돈을 버는 일, 즉 수익이 생기는 일을 좋지 않게 생각하리라고 예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존슨 박사는 수식이 생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좋은 일을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해가 되는 일을 가장 적게 한다는 말이었다. 수익사업을 하는 사람은 권력을 추구하지 않으며, 사람은 지배하거나 힘들게 하지도 않는다. 또한 축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상징에 만족하고 현실을 흘러가는 대로 놔둔다.

  그러나 존슨 박사가 이 말을 했을 당시에는, 돈의 상징이든 대중매체의 상징이든 간에 상징인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빵 굽는 사람과 구두 만드는 사람, 집주인과 판사, 귀족과 농민등 대다수는 ‘수익이 생기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물건을 만들거나 권력을 꾀하거나 사람을 지배하거나 지배당했다. 그들은 돈에서 현실 그 자체를 본것이 아니라 고전주의 경제학자들과 함께 그 자체를 본 것이 아니라 고전주의 경제학자들과 함께 ‘현실의 베일’을 보았다. 프리트베르크와 파르붐은 해를 끼치지 않고 수익이 생기는 일을 한 이 극소수의 부류에 속했다. 그러나 상징과 이미지를 궁극적인 현실로, 사람과 사물을 허울로 여기는 극도의 최소한주의가 대다수의 인식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그것이 여전히 무구하고 무해한 것일까? 449p


■ 로베르트와 파르크하슨

  사업가에게 여성이 미친 영향


프리트베르크사의 공동경영자였던 로베르트는 까다롭고 공격적이었으나 단 한 사람, 귀족이나 부자를 상대로 하는 고급 창년, 즉 코르티잔이었던 파르크하슨을 아주 사랑했다. 프르트베르크사에서는 공동경영자가 되기 위한 절차로 코르티잔도 함께 인계받아야 했다. 프리트베르크사의 핵심 중개인인 블라디미르가 공동경영자로 추대되기 위해 파르크하슨을 인수할 시기가 되자 로베르트와 블라디미르 두 남자는 모두 고민에 빠졌다. 블라디미르는 부인 마샤를 지극히 사랑하는 데다 파르크하슨을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돈, 권력, 여자라는 통속의 삼박자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450p


3부 순수 절정기


■ 헨리 루스

   <타임>, <포춘>, <라이프> 잡지왕국의 제왕

  나는 글을 쓰는 일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책을 내는 것은 공격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게다가 내 책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었다. 474p


  루스는 <타임>, <라이프>, <포춘>에 능력 있는 사람들을 무척 많이 고용했다. 그러나 일단 직원이 되고 나면 대부분이 일생 도안, 심지어는 회사를 떠나고 나서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돈을 많이 주고 호사를 시킨 루스의 친절이 그들을 망쳐버린 것이다. 과연 내게 그런 것을 버틸 만한 꿋꿋함과 성숙함이 있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당시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475p


■ 풀러와 맥루안

   테크놀로지의 위대한 예언자


풀러와 맥루안은 외향적인 모든 면에서 무척 다르지만, 기술의 시인이며 전도사라는 점에서 이 둘은 매우 흡사하다. 풀러는 전쟁 시기에도 기하학적인 곡선 하나로 세계 경제의 폭발적인 성장을 예측했으며, 맥루안은 기술을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확장’으로 보고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로 텔레비전의 출현을 예고했다. 지금은 이들이 테크놀로지 시대의 선각자로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엉뚱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여기서는 시대를 앞서 일상의 틀에 박힌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두 사람과 드러커의 유쾌한 만남이 펼쳐진다. 506p


  버크민스터 풀러와 마셜 맥루안은 선각자의 성공은 바로 실패라는 선각자의 패러독스를 보여준 실례이기도 하다. 마르틴 부버가 초기에 쓴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제자가 랍비에게 물었다. ‘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기 전에 모세를 죽게 두였습니까?“ 랍비는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약속의 땅에 도착해서 예언자의 비전이 실제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을 바꾸고 깨끗이 해서 새로 태어나야 하는데도 고집스럽게 회개하지 않아 신에게 버림받는다. 그들은 예언자가 잠시 한눈을 파는 순간 비전과 예언자를 잊어버리고 금송아지를 숭배한다. 예언자에게는 신이 밝히신 진실이, 추종자들에게는 ’경험적인 원칙‘이 된다. 즉, 유일한 계시가 아니라 여러 계시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는 것이다. 527p


■ 앨프레드 슬론

   절대적 권위로 GM을 이끈 전문 경영자


GM을 세계 최대의 기업으로 키운 앨프레드 슬론은 외향적인 성격이다. 하지만 매사에 공정하기 위해 직장에서는 친구를 만들지 않았으며, 자신의 신념과 업무를 분리하기 우해 개인적인 것은 모두 포기한 빈틈없는 원리원칙주의자였다. 그는 ‘전문경영자’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분명히 제시해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GM은 슬론의 지도 적분에 전문적인 회사가 되긴 했지만 슬론은 공공복리를 위한 기업의 책임에는 소홀하고 GM의 전문성 확보에만 매진했다. GM에 대한 기업연구를 의뢰받은 드러커가 가까이서 지켜본 슬론과 GM의 개성적인 중역들의 이야기를 통해 GM 성공의 명암을 보여준다. 528p


 하지만 존스는 내가 연구결과를 출판하는 일에 대해 우려하기도 했다. “자네는 경제학자로든 정치학자로든 미래가 창창한 교수라는 직업의 길로 이제 막 들어섰네. 기업을 정치적, 사회적 기관으로 취급한 기업 관련의 글을 쓴다는 것은 자네가 속한 두 영역에 해를 끼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네.” 그런 지적 역시 옳았다. 542p


  나는 두 가지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하나는 노동비용 유연성과 노동시장의 유동성을 해치지 않고 고용인에게 수입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장치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훗날 명명했던 ‘자체관리 공장 커뮤니티’의 필요성이었다. 다시 말해서 개개인의 고용인, 작업 팀, 그리고 고용단체가 모두 똑같이 개별업무의 구조, 주요업무 행사 및 근무교대 스케쥴, 휴가 스케쥴, 시간외작업 할당, 작업장 안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용인 혜택 같은 공장 커뮤니티에 대해 관리상의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565p


  이 경연대회를 통해서 알게 된 또 한 가지는, 고용인들은 자기 직업과 업무에서 만족감을 느끼기를 원하고, 그 일이 무엇이든 자기가 보수를 받고 있는 일에서 배제되는 것만큼 모욕적인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572p


■ 그 밖의 사람들

   대공황 시기 미국 사회에 대한 스케치


1930년대 말 드러커가 미국으로 건너왔을 당시에는 전 세계적으로 대공황 시기였다. 하지만 미국은 서로의 갈등이 깊어지는 다른 나라와 달리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자세로 대처했다.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던 시기에도 미국은 확고한 중심을 유지했고, 사회와 공동체는 활력이 넘쳤다. 대공황 극복을 위해 시행되었던 뉴딜 정책의 핵심 쟁점이 정책의 정당성 여부가 아닌 미국적이냐 아니냐 였다는 것은 미국 사회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순수의 절정기에 대한 상징으로 남아 있는 대공황 시기에 만난 사람들을 통해 미국이라는 사회는 국가나 제도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가치관임을 역설한다. 608p








III. 내가 저자라면


참 다른 자서전

  최근 자서전을 꽤 읽었다. 대부분 역사적으로 큰 업적을 이룬 분이거나 아직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대단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 분들이다. 이러한 책의 특징은 개인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 피터 드러커의 자서전은 이전 책들과는 많은 부분에서 너무나 다르다. 자신의 개인사에 대한 내용이기 보다는 주변의 인물에 대한 관찰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자서전이라고 해야 할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다. 그렇지만 이러한 형태의 글 또한 저자 피터 드러커가 직접 쓴 것이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엄청난 기억력과 관찰력

  어떻게 저런 것을 다 기억할 수 있을까? 궁금함을 넘어 대단하단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최근의 일이라면 모를까 아주 어릴 적 그가 보아온 어른들의 세상까지 마치 녹취를 하여 정리해 놓은 것처럼 책은 자세한 부분까지 정밀하게 다루고 있다. 나는 이럴 수 있는 힘이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가 무척 궁금했다. 어쩌면 책 속에 그러한 비밀이 숨겨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끝내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한 톨도 찾지 못했다. 책을 읽는 내내 어쩌면 이것은 기억력이 라기 보다 상상력이 아닌가 의심이 일기도 했다.


투철한 자기 주관

  청년이 되면서 피터 드러커의 삶은 파란만장해 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 충분히 들게 했다. 은행가로써의 성과은 물론 편집자로써의 큰 명예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시챗말로 우습게 넘겼다. 범인으로써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저는 제가 은행가가 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주로 썼을법한 말이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이 물음에 그가 선택한 것은 학자의 길이었다.


내가 저자라면

  솔직히 내가 저자라면 이런 정도로 다른 사람에 대한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기지 못할 것 같다. 아니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고 해야 솔직한 표현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물처럼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 못할 것 같다. 삶의 수많은 언덕을 오르내린 선각의 모습이 이런 것일까? 그저 흠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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