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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4일 11시 48분 등록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고병권 지음/ 소명출판


1. 저자에 대하여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5]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7]

이 책을 읽으면서 위 두 개의 문장만 건졌어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 문장을 접하게 해준 고병권이란 저자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인문학자로 꽤 유명세를 타고 있는 소장 학자다.(1971년생) 이런 저자를 지금에야 접하게 되었다니, 나의 책읽기가 얼마나 편협하고 편중되어 있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그는 인문학을 하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평화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수감자들에게 10강의 인문학 강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 참여자들의 반응이 꽤 좋다고 한다.‘대학에서는 죽어가는 인문학이 교도소 창살 안에서 부활’하고 있다는 한겨례21의 기사 문구는 그가 인문학을 어떻게 생활화 하고 실천하고 있는 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 인터넷 저자 소개 >>

내 친구 고병권은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니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화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상에서 그는 항상 웃고 있다. 니체가 말한 ‘긍정의 힘’이 그의 신체에 각인되어 있는 것일까. 웬만한 일로는 화나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가 시도하는 유머는 대개 썰렁하지만, 다른 이의 썰렁한 유머에도 그는 크게 웃는다.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으며, 친구들과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게 그의 ‘행복론’이다.

현실에서 그는 자주 분노한다. 그의 분노의 대상은 주로 국가, 권력, 자본, 무기력 같은 것들이다. 친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게 하고, 친구들을 ‘삶’에서 내모는 그것들에 그는 눈 감거나 고개를 돌린 적이 없다. 삶에서 그것들을 ‘추방’시키기 위해 그는 오늘도 친구들과 함께 웃고, 공부하고, 투쟁한다.

최근의 운동 속에서 혁명이나 코뮨주의를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는, 연구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동안 쓴 책으로 『화폐, 마법의 사중주』(2005),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2003),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2001) 등이 있고, 맑스의 박사 학위 논문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2001)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곧 신자유주의 이후 한국 사회를 분석한 『추방과 탈주』라는 새로운 정치 에세이를 선보일 계획이다.

― written by 김현경(그린비 편집주간) [모닝365 제공] 


ⓒ 두산백과사전 참조 === 니체에 대하여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0.15~1900.8.25] 

< 요약  >
독일의 시인·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주저는 《반시대적 고찰》(1873~1876)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1883∼1885) 등이 있다.

국적  독일
활동분야  시, 철학
출생지  독일 레켄
주요저서  《반시대적 고찰》(1873~1876)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1883∼1885)

< 본문 >
레켄 출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어머니·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 전임하는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 있을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또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18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die》(1872)을 간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悲劇)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해명하고, 이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主知主義)에 의거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이미 그 몰락을 보았으며, 다시 그 재흥(再興)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기대 ·확인하는 이 저서는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것이다.

1873~1876년에 간행된 4개의 《반시대적 고찰 Unzeitgem?sse Betrachtungen》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天才)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이상은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1878∼1880)에서 더욱 명확해져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偶像)이라 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의도하였다. 이미 고독에 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1879년 이래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주로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작에 전념하였다.

<<여명(黎明) Morgenr?te>>(1881) 《환희의 지혜 Die fr?hiliche Wissenschaft》(1882)의 뒤를 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1883∼1885)로 그의 성숙기(成熟期)가 시작된다. 신의 죽음으로 지상(地上)의 의의를 설파하였고, 영겁회귀(永劫回歸)에 의해 삶의 긍정(肯定)의 최고 형식을 밝혔으며 초인(超人)의 이상을 가르쳤다. 《선악의 피안(彼岸) Jenseits von Gut und B?se》(1886)에서는 위의 사상에 부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생긍정(生肯定)의 새로운 가치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도덕의 계보학(系譜學) Zur Genealogie der Moral》(1887)에서는 약자(弱者)의 도덕에 대하여 삶의 통일을 부여하는 강자(强者)의 도덕 수립을 시도하였으며, 미완의 역작 《권력에의 의지(意志) Wille zur Macht》(1884∼1888)에서는 삶의 원리, 즉 존재의 근본적 본질을 해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하였다. 그 이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니체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극복이다. 그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 문명의 몰락과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득하였다.

사람들은 지고(至高)의 가치나 목표를 잃어 이미 세계의 통일을 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소화(矮小化)되고 노예화하여 대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근대의 극복을 위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彼岸的)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此岸的)·지상적인 것을, 즉 권력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니힐리즘의 철저화에 의해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 하였다. ‘초인·영겁회귀·군주도덕’ 등의 여러 사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책머리에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 개의 주름을 본다.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제 시대의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단순화의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찾아낸 미세한 조각들을 집어넣고 보면 사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위대한 철학자는 하나의 비명 속에서도 여러 개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이다. 시대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대의 목소리가 가리고 있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숭고한 현미경을 가진 신”처럼 “선분이나 미세한 조각들”을 찾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또한 “얼음 덮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하는” 사람으로, “괴이하고 의심스러우며 금지되어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어” 자신의 생존을 위한 식량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3, 4]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5]


창조와 생성, 그리고 변신이 그를 오해하게 만든다. 니체를 하나의 체계 안에 가두려는 사람들은 항상 체계 바깥에서 웃고 있는 또 다른 니체를 목격하게 된다.[6]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과잉이 원인인가 결핍이 원인인가?” 당신이 천개의 손을 내밀 때, 그것은 베푸는 것인가 구걸하는 것인가? 당신이 지금 고통 받고 있다면, 그것은 “생의 과잉 때문인가 생의 빈곤 때문인가?”[6]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니체> [7]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7]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8]


서장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 천 개의 눈

눈처럼 쉽게 길들여지는 게 또 있을까? 광학의지(WM; 182) 혹은 시각 체계-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훈련,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들이 있다. 진리를 묻는 자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WM; 331)[17]


2. 천 개의 길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Z;117)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의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18]


3. 천 개의 기원

역사의 뿌리나 열매를 신성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묻혀져 있어야 했는가! 그러나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겹이다.”(Z;215) 지혜로운 탐사자라면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지나친 많은 것들 속에서도 파편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천 겹의 주름 속에 숨겨진 사건들이 햇빛 속에 놓이게 될 때 신성한 것들의 거짓이 떨어져 나가리라.[18]


4. 천 개의 젖가슴

과학적 인식이라고? 가치 중립이라고?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고, 양성 공유자도 아니고, 다만 중성일 뿐인 인간들, 성적 불능자들.”(U;142) 대낮같이 밝은 인식을 떠들면서도 밤만 되면 열린 창을 훔쳐보기 위해 지붕 위를 싸돌아다니는 수고양이들.(Z; 163) 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는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오르는지”(Z; 166)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19]


5. 천 개의 주사위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말라. 우리들은 세계라는 도박대 위에서 판을 벌이는 도박사들. 우리에겐 매 번 던져지는 주사위가 다 소중하다. 겨우 천 번? 우리는 벌써 천 한 번째 주사위를 주시하고 있다. 여섯 개의 면밖에 없다고? 우리는 동전의 앞 뒤 면만 가지고도 무한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유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또 한 번의 주사위를 던져라. 세계는 너희를 위해 천 개의 섬을 준비해두었다.[19]


6. 천 개의 화살

아포리즘은 모두 화살이다. “아포리즘과 화살.”(GD; 21-26) 그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누구든 활을 들고 쏘아라. “급소를 맞춘 화살의 저 떨림을 보라, 저 흔들림을 보라.”(FW; 368) 아포리즘들만이 아니다. 모든 책들이 “망치”가 되거나 “다이너마이트”(EH; 295)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저기 니체라는 화살통에 천 개의 화살이 들어 있다! 저기 니체하는 이름의 다이너마이트들이 널려 있다![20]


7. 천 개의 가면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한다.”(JGB; 64) 가면 뒤의 얼굴?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호기심 많으신 분이시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주시려거든 부디..... 또 하나의 가면! 제2의 가면을 주시오.”(JGB; 228) 허락하신다면 제3의 가면도..... 진정한 니체의 얼굴이 보고 싶다구요? 여기 니체의 가면이나 하나 받으시오.[20]


8. 천 개의 이야기

아직도 천 개의 이야기가 남았다. 요리사 니체가 소개하는 우연을 냄비에 끓이는 법-나는 어떤 우연이든 나의 냄비로 끓인다,(Z; 212) 낚시꾼 니체의 독자 낚는 법-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바늘이다,(EH; 282) 우주 비행사 니체의 타임머신 타지 않고 시간을 넘나드는 법-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Z: 160) 다이버 니체가 말하는 인간이 가보지 못한 심연으로 잠수하는 법-길게 숨을 쉬고 나서 잠수하라, 그래야만 깊은 바닥까지 볼 수 있으리라,(MA-I; 188)..... 아직도 니체에 관한 천 일 밤낮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21]



제1부

제1장 아모르 파티; 삶을 사랑하는 철학/ 니체와 철학 사이에서


누구도 머리카락을 잡고 제 무게를 달아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철학의 가치, 철학의 공과를 달아보고자 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야 한다.[26]


그렇다면 니체의 철학은 어떻게 철학의 외부에 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체를 보려는 철학적 시각의 편협성을 읽었기 때문이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철학적 의지의 특수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삼는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행각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삼았다.[27]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 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 이 과정이 지속된다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고, 존경받고 있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어째서 광기가 아니면 안되었던가를 이해하는가?..... 모든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미치게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51]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와 불일치 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가령 ‘왕후장상이 어디 씨가 따로 있는가?’라고 외쳤던 만적의 외침을 두고 1198년의 고려인들은 ‘미친놈!’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왕후장상과 천한 노예가 어떻게 동등한 출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적이 ‘미친놈’이었던 것은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였다. 그의 시간은 자유와 평등을 내세웠던 1789년이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건 미래는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53]


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이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자료들을 정리하는 일이 고작이다. 입법자로서의 철학자들, 진정한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개념들을 해석하고 정리할 뿐 철학적 노동자들은 창조를 모른다.[54]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56]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57]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58, 59]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강조는 필자) ‘네 이웃을 사랑하라’든지, ‘모든 사람을 도우라’, 혹은 ‘거짓을 행하지 말라’,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가하지 말라’ 등등 모든 가르침은 어떤 인간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즉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63]


“아무렇게나 임의로 추출해서 제멋대로 정리한 도덕적 사실들”로부터 추론한 결론들은 도덕의 굳건한 기초가 되기보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 도덕에는 소심함말고도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환경에서 나온 생각들을 쉽게 일반화하는 데는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도 이유가 된다. 그래서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고 불렀다.[63, 64]


니체는 이러한 도덕에 대한 탐사 작업을 계보학(Genealogie)이라고 불렀다. 계보학자는 돋보기나 현미경을 들고 있는 탐사자이다. 도덕은 전체를 보고 싶어하지만 계보학자는 전체로 환원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을 본다..... 계보학은 무엇보다도 보편화에 반대한다. 보편적 가치란 가치에 있어 차이의 상실을 의미한다.[65]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과거로부터 신성화되거나 현재로부터 정당화된 가치들은 계보학자들이 찾아낸 간극들이나 이질적 층들, 파편들과 마주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겹이다.” 가치들도, 가치를 판단했던 인간들도 더 이상 동질적이지 않다. 출신과 혈통, 건강과 영양 상태에 따라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존재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가치 판단들이 존재했는가.[65, 66]


도덕은 그 사회의 건강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다. “모험 정신, 과감성, 복수심, 교활함, 탐욕, 지배욕 등 -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 이 좀더 강하게 육성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었던 시대”도 있고(공동체의 적들이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했으므로), 그런 충돌들이 “사회의 안정을 위해 부도덕한 것으로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시대에는) 독립적인 정신, 뛰어나게 되려는 의지, 강한 이성조차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개인을 떼거지보다 위로 끌어올리고 이웃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악이 되는 반면, 정중하고 유순하고 순응적인 정신과 평범한 욕망은 도덕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70, 71]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한 이웃은 다른 이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이웃의 영혼은 언제나 다른 이웃의 광기와 악의를 괴이하게 생각했다. 다른 민족, 다른 시대, 다른 과거에 대한 빈약한 지식이 특정한 환경과 계급, 교회, 시대 정신, 풍토에서 나온 도덕적 가치 판단을 일반화하는 무모함을 가져온다.[72]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선한 자야말로 약한 자이다.[77]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78]


아무도 보지 않아도 신이 보고 있다. 신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고 있다![82]


강자는 능동성이나 적극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강자의 운동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능동적(작용적, active)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운동은 부정에서 시작하며 반동적(반작용적, reactive)이다. 그렇다면 능동적 힘에 대한 반동적 힘의 승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84]


이제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84]


성직자라는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 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킨다.[85]


정리해 보자. 먼저 저 세계를 성정하고, 그것의 고차적 가치를 통해 이 세계에 대한 평가절하가 일어났다. 그 다음 고차적 가치들 자체에 대한 평가절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결국 평가하는 것 자체를 명가절하하기 시작한다. 칸트에서 헤겔로, 그리고 쇼펜하우어에 이르기까지, 또한 초기 기독교적 원한의 정신에서 불교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부정의 운동은 무(無)를 향해서만 나아간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 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 밝힌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87]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굳이 ‘악’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것은 내 신체에 해로운 존재-나쁜 음식이나 나를 슬프게 만드는 사람 따위-와의 마주침에 적합한 말일 것이다.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90]


제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르는 문화적?종교적 차이. 해석학자들은 자신과 차이를 두고 있는 타자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해석학자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95]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아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96]


가다머는 과거나 전통이 결코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과거나 전통은 우리가 사고하기 위한 전제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만큼, 그 위에 서 있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사고방법을 전통에 적용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평과의 융합뿐이다. 과거는 그 자체로 인정되어야 한다. 과거를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는 우리가 딛고 설 지반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과거와 지평 융합을 하지만 그 방식은 우리의 유한성을 깨닫는 것을 통해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전통의 우위를 인정함으로써만 융합할 수 있다.[98]


하버마스에 따르면 가다머의 주장은 역사의 이데올로기적 오용과 연결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전제로서 당연시 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러한 지평들이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지평이나 맥락 속에 숨어 있는 권력 관계를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가다머의 해석학에는 포괄적인 사회 이론이 결여되어 있어서 이러한 권력 관계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99]


하버마스는 차이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도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차이는 합의를 향한 출발점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는 객관적 진리를 가장한 초월적 가치의 침투를 막기 위해 ‘상호 주관성’을 택했다. 상호주관성에 기초한 의사소통의 운동은 서로의 공통성을 찾아 나선다. 의사소통은 변증법적 운동이며, 모든 변증법이 그렇듯이 차이를 해소하는 운동이다. 하버마스는 본인이 헤겔의 계승자임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102]


니체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불쑥 내던졌다.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103]


니체의 해석학은 해석 대상이나 해석자 어느 쪽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니체는 필연성을 갖는 사실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주체’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연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105]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regime)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107]


사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110]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보자.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111]


개인은 무언가 전혀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이다..... 개개인은 전통적 용어도 역시 개인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식을 개인이 창조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이다. 즉 해설자로서 개인은 한결같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112]


니체가 절대주의나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거 없다고 설득한다.[112]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114]


해석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 흄,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칸트, 마조흐, 니체, 푸르스트, 푸코 등 여러 철학자들에 대한 해석을 각각 책으로 내놓았던 들뢰즈는 아주 흥미로운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작업은 철학에 있어 일종의 계간(鷄姦)을 통해 사생아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생아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다. 자식을 본 아버지는 자신의 핏줄임을 부인한다. 해석된 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해석! 그런데 들뢰즈는 이 계간의 작업이 니체에 대해서는 다소 엉뚱하게 이루어졌다고 고백한다. 니체를 계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등뒤에 올라타고 있던 것이 바로 니체였다는 것이다. 니체는 들뢰즈를 상대로 사생아를 낳은 셈이다.[115, 116]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사회주의자들은 문화나 제도, 도덕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들은 오직 소유물의 분배만을 본다. “사회주의자들은 소유물의 분배가 과다한 불공정과 폭력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부당한 기반 위의 구축물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데,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개개의 것만을 보고 있다.[136]


체제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 “인간을 가능한 한 재빨리..... 시대의 목적을 향하여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니체는 이 ‘훈련’의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우선 “사회나 국가 같은 개체가 개개인을 굴복케 하여 고립에서 끌어내고 하나의 단체에 정렬시킬 때,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기초가 정비”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하여 그것이 본능이 되도록 한다.” 하나의 도덕이 자연스러운 지배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전사적인(prehistorical)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 이후에 본능적으로 ‘미덕’으로 숭상되어야 한다. 첫 번째의 작업이 ‘길들이기’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작업은 ‘길러내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문명(길들임)의 과정은 무시무시한 맹수 같은 본성에 대항하여 철퇴와 고문을 필요로 한다.”[142]


제5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자연학 + 윤리학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들의 영속성과 통일성을 비판했던 인물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사물들이 변화한다는 것, 변화야말로 세계의 본질이라는 점을 주장했다.[156]


“우리는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비존재는 동일하며 동시에 동일하지 않다”는 명제. 파르메니데스가 막 해명하고 해결했던 모든 것을 다시 불투명하게 만들어 버린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제가 파르메니데스를 격노하게 만들었다.[157]


힘은 니체의 철학적 태도를 대변하고 있다.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존재하는 독단적인 표상이란 없으며”, “부분이나 사건들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고, 이들 특성은 관계를 통해서 결정된다.”[159]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론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이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의 유회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이다.[161]


니체에게 강함은 어떤 것이었는가?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166]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모든 것을 권력의지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권력의지가 아닌 존재라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 다시 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173]


선(좋음)이란 무엇인가? 권력 느낌, 권력 의지, 권력 자체를 인간 안에서 강화시키는 모든 것. 악(나쁨)이란 무엇인가? 허약함에서 비롯하는 모든 것. 행복이란 무엇인가? 권력이 증가하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178]


제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개의 시간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인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

순간들을 통해 볼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들 속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며 경쟁하고 있는 시간이다.[196, 197]


니체는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많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니체는 반시대적인 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때에 맞지 않는’ 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살았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시간과는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멀리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그리하여 내 주의를 둘러보았을 때,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다.”[197]


끔찍한 고통조차 긍정될 수 있는가? 그러나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한다. 권력의지가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느낌 방식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권력의지가 영원회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초인이란 다른 느낌 방식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이기 때문이다.[201]


나는 병에서 나의 더 높은 건강을 얻었다. 이 건강이란 병이 말살시켜 버리지 못한 모든 것들에 의하여 오히려 더 강해지는 건강을 말한다. 나는 병에서 하나의 철학도 얻었다.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후의 해방자다..... 그런 고통이 우리를 개선시키는지에 대해 의심스러울 때도 있으나 나는 고통이 우리를 심오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202]


막연한 파괴와 긍정 안에 들어 있는 파괴를 구분하면서 우리는 단 하나의 긍정이 정립되기 위해서라도 긍정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첫 번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망치가 파괴의 도구인지 창조의 도구인지는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 결정된다.[204, 205]


제7장 인간/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푸코는 인간을 바닷가 모래밭에 그려진 얼굴에 비유하면서 밀물이 한 번 밀려들고 나면 지워질 운명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인간이 제 발로 서서 스스로를 자각했던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듯이 그의 운명이 끝날 날도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 운명의 날에 등장하게 될 존재의 이름도 정해두었다. 바로 초인(위버멘쉬)이다. 초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의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다.[216]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그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광장에 나와 “신을 찾고 있노라”고 외친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의 살해자다.”[221, 222]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233]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233]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그는 가면을 바꿔 쓰며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상형문자를 놓고 괴로워하는 이집트의 청년처럼 가면 뒤에 있는 진정한 얼굴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가면 쓰기는 하나의 놀이이며 예술이다. 철학이 변모의 예술이라면, 철학은 가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238]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239]


『차라투스트라』는 1883년부터 84년 사이에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니체의 변신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변신의 비밀을 담고 있다.[246]


『차라투스트라』에는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창조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부정과 창조는 과거를 구제하는 긍정의 정신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 책의 끝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알아차린다. “디오니소스의 신호를 듣는 아리아드네.” “망치를 든 파괴자”이자 “춤추는 무희”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246, 247]


병균 속에서도 치료의 백신을 찾아내듯 니체는 상처로부터 치료의 힘을 발견한다. “치료하는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위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247]


니체는 자신을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어떤 때는 자신을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렀다가 “광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여행자이다. 그가 썼던 모든 가면들, 그를 대신했던 모든 인물들은 그가 벌인 “탐험”의 결과물이다. 누구보다도 차라투스트라가 여행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여행 기록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제3권에 등장하는 “방랑자”가 바로 그 자신이다.[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250]


이제 이 책의 첫 장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은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253]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253]


제2부


베버 -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확실히 베버는 자본주의를 자본이나 기술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베버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인간(근대인)은 전혀 새로운 종의 인간이다. 우리는 그 독특함의 전형을 벤자민 프랭클린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260, 261]


시간이 돈임을 잊지 말라. 매일 노동을 통해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반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가 오락을 위해 6펜스만 지출했다고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된다. 그는 그 외에도 5실링을 더 지출 한 것이다. 아니 갖다 버린 것이다.....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재산이라 생각하고 그에 따라 살려고 하지 말라. 신용을 가진 많은 사람이 이러한 착각에 빠져 있다. 이런 점에 주의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지출과 소득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일단 세부적인 것까지 주의하는 노력을 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벤자민 프랭클린>[261]


자신이 구원받았는지에 대한 염려가 높아지면서 이른바 ‘구원의 표지’ 문제가 생겨났다. 그 누구도 구원 여부를 알려줄 수 없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기서 중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는 것은 오히려 신앙심이 부족하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만약 자신이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면 신은 현세에서 자신이 하는 일도 돌볼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표지를 찾는 것이란 스스로 구원의 표지를 증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스스로 구원받았음을 믿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화를 벌어들인다면 그것은 신이 돕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전환이 부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은 뒤집어졌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재화를 쌓는 것이야말로 신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다.[263]


즐기고 낭비하기 위해서 돈을 모으는 것과 신을 영광되게 하려는 소명에서 돈을 모으는 것의 차이가 분명해진다.[263]


프로테스탄트의 삶에서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는 계획표(시간표)의 도입이었다. 원래 시간표는 중세의 수도원에서 생겨난 것이다..... 서양의 수도원에서는 도를 닦는 데 방해가 되는 충동이나 잡념을 억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시간표가 이용되었다. 하루 동안 할 일을 시간 순서에 맞추어 적어 놓고 모든 행동을 그것에 맞춘다면 잡념이 들어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수사들은 아침에는 마당을 쓸고 오전에는 성경을 읽고 점심에는 밭을 돌보고 하는 식으로, 삶을 시간의 순서대로 분할해서 사악한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차단하고자 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프로테스탄트들을 통해 숲 속 외진 곳에서 도시 한 복판으로, 그리고 각자의 가정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시간표는 사람들의 삶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주었다..... 가정은 물론이고 학교와 공장에서 시간표는 아이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을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해 주는 수단이 되었다. 자신들의 의지로 행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중요한 전환이다.[265, 266]


처음엔 시간표는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든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268]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과 관료제적 정치인의 차이는 진리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학자와 단순한 효율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술자의 차이와 같다.[280]


대중들이 카리스마에 의존하면 대중들의 자율성이 박탈되고, 카리스마가 대중들에게 의존하면 카리스마적 성격이 박탈된다.[281, 282]


현대의 정당들은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더 많은 규율들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규율들은 더 많은 대중들을 수동적으로 만들 것이다. 정치가가 대중들의 의사를 더 잘 대표할수록 대중들은 그에게 더욱 복종한다. 계몽은 계몽 대상의 계몽 필요성을 더욱 증대시킬 뿐이다.[283]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


시장의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개인들로부터 집합적인 규범성이나 정체성을 추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각 가치들이 화해하기 쉽지 않다면 해결책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각기 상이한 가치들에 대해 ‘관용’하는 것이며, 그 문제를 정치의 문제에서 제외하는 것이다.[298]


우리는 개인들의 계약이나 합의로부터 공동체나 국가를 도출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문제를 반대 방향에서 제기하는 것, 즉 공동체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301]


사람들은 국가를 통해서만 파편화된 개별자(individual)로부터 훌륭한 시민(citizen)으로 이행할 수 있다. 국가는 시민들의 합의체라기보다는 시민들을 길러내는 생산적 실체다.[301]


“서로 갈등하고 심지어 불가공약적인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교리에 의해 파편화되어 있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어떻게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가?” 자유주의는 명백히 아나키 상태의 공포를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평화의 문제’ 즉 안정성이다. 롤스 정치철학의 핵심도 안정성의 문제다. “우리는 어떻게 질서정연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가?”[304]


“국가의 본질은 경찰이다. 그것은 핵심적인 것으로의 축소이다..... 경찰은 비록 그것이 그림자 속에서 남아 있고, 오직 최종 심급에서만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포스트모던의 자유주의 국가에서 질서를 보증하는 쐐기인 셈이다.”[309]


정치에는 관성이 있으며, 만약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고 보자는 식의 자유주의적 사고는 ‘비결정의 결정’이라고 하는 정치적 행위의 필연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311]


공동체주의자들은 국가가 중립적일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형태의 삶을 장려하고 어떤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중립적일 수 없고 반드시 ‘윤리적 국가’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공동체주의자들의 강한 국가에 대한 요구가 나온다.[311]



3. 내가 저자라면

철학 관련 서적을 언제 읽었던 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대학 다닐 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슬쩍 들춰 봤던 기억이 있는 데, 너무 어려워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좋아했던 분들은 안병욱 교수와 김형석 교수였다. 철학을 철학답지 않게 아주 쉽게 설명해 주시는 분들. 그 분들이 내게 철학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셨다.

지금 읽은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도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하지만 젊었을 때 처럼 공허한 어려움과 참을 수는 지루함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본 몇몇 문구들은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고, 또 다른 구절들은 책 읽기를 멈추고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니체> [7]

내가 장년기에 들어서서 철학을 할 만한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일까?


책의 전체적 구성은 니체에 관한 철학 입문서로 비교적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모두 여덟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전반부는 니체와 철학의 관계, 도덕과 윤리의 문제,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니체의 근대 정치 비판을 다루고 있고, 후반부는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초인 등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니체의 저서를 따라가면서 니체 스스로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하지만 독자들을 배려하는 점에서 본다면 그리 잘된 책이라고 볼 수 없다. 철학책이 인문학 서적 중에서도 특히 잘 읽히지 않는 책이라는 점을 감안 한다면, 적어도 서문에서 이 책이 의도하는 바와 책의 전체적인 구성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려운 책이라면 에필로그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독자들에게 읽은 내용에 대한 정리를 해주는 친절함이 필요할 것 같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논쟁을 중심으로”에서 앞으로 내가 쓰게 될 책의 방향 설정을 위해 고민해 봐야 할 문구를 발견했다.

우리는 개인들의 계약이나 합의로부터 공동체나 국가를 도출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문제를 반대 방향에서 제기하는 것, 즉 공동체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301]

사람들은 국가를 통해서만 파편화된 개별자(individual)로부터 훌륭한 시민(citizen)으로 이행할 수 있다. 국가는 시민들의 합의체라기보다는 시민들을 길러내는 생산적 실체다.[301]

사람(시민)들은 정부(국가)에서 하는 일에 대해 수많은 비판과 의견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들의 (개별화된) 의견이 반영되기를 바란다. 이런 요구가 대의기관인 국회를 통해서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시민사회 단체들이 탄생했고 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국가의 활동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들의 계약이나 합의로부터 공동체나 국가를 도출’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개인들은 얼마나 이 과정에 참여하고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인가? 얼마만큼 참여하게 되면 민주적인 방법으로 공동체의 의견이 수렴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자유주의자도 공동체주의자의 생각도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앞으로 생각해볼 과제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5]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7]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8]

1. 천 개의 눈
눈처럼 쉽게 길들여지는 게 또 있을까? 광학의지(WM; 182) 혹은 시각 체계-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훈련,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들이 있다. 진리를 묻는 자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WM; 331)[17]

2. 천 개의 길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Z;117)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의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18]

6. 천 개의 화살
아포리즘은 모두 화살이다. “아포리즘과 화살.”(GD; 21-26) 그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누구든 활을 들고 쏘아라. “급소를 맞춘 화살의 저 떨림을 보라, 저 흔들림을 보라.”(FW; 368) 아포리즘들만이 아니다. 모든 책들이 “망치”가 되거나 “다이너마이트”(EH; 295)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저기 니체라는 화살통에 천 개의 화살이 들어 있다! 저기 니체하는 이름의 다이너마이트들이 널려 있다![20]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강조는 필자) ‘네 이웃을 사랑하라’든지, ‘모든 사람을 도우라’, 혹은 ‘거짓을 행하지 말라’,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가하지 말라’ 등등 모든 가르침은 어떤 인간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즉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63]

도덕은 그 사회의 건강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다. “모험 정신, 과감성, 복수심, 교활함, 탐욕, 지배욕 등 -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 이 좀더 강하게 육성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었던 시대”도 있고(공동체의 적들이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했으므로), 그런 충돌들이 “사회의 안정을 위해 부도덕한 것으로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시대에는) 독립적인 정신, 뛰어나게 되려는 의지, 강한 이성조차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개인을 떼거지보다 위로 끌어올리고 이웃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악이 되는 반면, 정중하고 유순하고 순응적인 정신과 평범한 욕망은 도덕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70, 71]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78]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regime)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107]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보자.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111]

니체의 해석학은 과거의 참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긍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을 때, 해석은 이 문제를 ‘생성’으로 돌파한다.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114]

해석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와 생성이다. 흄,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칸트, 마조흐, 니체, 푸르스트, 푸코 등 여러 철학자들에 대한 해석을 각각 책으로 내놓았던 들뢰즈는 아주 흥미로운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작업은 철학에 있어 일종의 계간(鷄姦)을 통해 사생아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생아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다. 자식을 본 아버지는 자신의 핏줄임을 부인한다. 해석된 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해석! 그런데 들뢰즈는 이 계간의 작업이 니체에 대해서는 다소 엉뚱하게 이루어졌다고 고백한다. 니체를 계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등뒤에 올라타고 있던 것이 바로 니체였다는 것이다. 니체는 들뢰즈를 상대로 사생아를 낳은 셈이다.[115, 116]

“문명(길들임)의 과정은 무시무시한 맹수 같은 본성에 대항하여 철퇴와 고문을 필요로 한다.”[142]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통해 힘을 주고받으며, 힘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모든 것을 권력의지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권력의지가 아닌 존재라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 다시 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173]

니체는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미래를 사유함으로써, 그리고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많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니체는 반시대적인 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때에 맞지 않는’ 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살았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는 시간과는 동시대적이다. 바로 그 자신이 새로운 미래를 건축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멀리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그리하여 내 주의를 둘러보았을 때,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다.”[197]

끔찍한 고통조차 긍정될 수 있는가? 그러나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한다. 권력의지가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느낌 방식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권력의지가 영원회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초인이란 다른 느낌 방식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이기 때문이다.[201]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239]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250]

확실히 베버는 자본주의를 자본이나 기술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베버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인간(근대인)은 전혀 새로운 종의 인간이다. 우리는 그 독특함의 전형을 벤자민 프랭클린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260, 261]

자신이 구원받았는지에 대한 염려가 높아지면서 이른바 ‘구원의 표지’ 문제가 생겨났다. 그 누구도 구원 여부를 알려줄 수 없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기서 중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는 것은 오히려 신앙심이 부족하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만약 자신이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면 신은 현세에서 자신이 하는 일도 돌볼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표지를 찾는 것이란 스스로 구원의 표지를 증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스스로 구원받았음을 믿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화를 벌어들인다면 그것은 신이 돕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전환이 부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은 뒤집어졌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재화를 쌓는 것이야말로 신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다.[263]

즐기고 낭비하기 위해서 돈을 모으는 것과 신을 영광되게 하려는 소명에서 돈을 모으는 것의 차이가 분명해진다.[263]

프로테스탄트의 삶에서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는 계획표(시간표)의 도입이었다. 원래 시간표는 중세의 수도원에서 생겨난 것이다..... 서양의 수도원에서는 도를 닦는 데 방해가 되는 충동이나 잡념을 억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시간표가 이용되었다. 하루 동안 할 일을 시간 순서에 맞추어 적어 놓고 모든 행동을 그것에 맞춘다면 잡념이 들어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수사들은 아침에는 마당을 쓸고 오전에는 성경을 읽고 점심에는 밭을 돌보고 하는 식으로, 삶을 시간의 순서대로 분할해서 사악한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차단하고자 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프로테스탄트들을 통해 숲 속 외진 곳에서 도시 한 복판으로, 그리고 각자의 가정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시간표는 사람들의 삶을 계산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주었다..... 가정은 물론이고 학교와 공장에서 시간표는 아이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을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해 주는 수단이 되었다. 자신들의 의지로 행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오히려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중요한 전환이다.[265, 266]

처음엔 시간표는 무엇이든 본인이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수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강철로 만든 구속복이 되어 도저히 벗어버릴 수 없었고,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그 단단한 강철 껍질 안에서 영혼은 사라져 버렸고, 영혼이 사라진 근대인들은 자신이 창조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268]

대중들이 카리스마에 의존하면 대중들의 자율성이 박탈되고, 카리스마가 대중들에게 의존하면 카리스마적 성격이 박탈된다.[281, 282]

우리는 개인들의 계약이나 합의로부터 공동체나 국가를 도출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문제를 반대 방향에서 제기하는 것, 즉 공동체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301]

사람들은 국가를 통해서만 파편화된 개별자(individual)로부터 훌륭한 시민(citizen)으로 이행할 수 있다. 국가는 시민들의 합의체라기보다는 시민들을 길러내는 생산적 실체다.[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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