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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4일 11시 59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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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고병권.

1. 저자 소개

니체를 일컬어 사람들은 기존의 권위와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차안의 지평을 연 철학자라고 말한다. 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니, 무척이나 소설적인 캐릭터였다.

♣생의 초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 직업의 대를 잇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5세 때 아버지와 이별했다.

어머니, 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성장하며,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을 계속한다.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기며, 그곳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으며, 바그너와도 조우하게 된다.

1869년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돌아왔다. 이후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 생의 중기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die》(1872)을 출간,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悲劇)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로 정리한 개념이다.

1873~1876년의《반시대적 고찰 Unzeitgem?sse Betrachtungen》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한다.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에서는 과거의 이상을 우상(偶像)이라 전제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선언하였다. 이 무렵,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1879년 건강의 악화,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술에 전념하였다.

♣생의 말기

《여명 Morgenr?te》(1881) 《환희의 지혜 Die fr?hiliche Wissenschaft》(1882)의 뒤를 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영겁회귀, 긍정, 초인의 이상을 주장하고, 《선악의 피안 Jenseits von Gut und B?se》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파란을 일으켰다.

또 《도덕의 계보학. Zur Genealogie der Moral》(1887)에서는 약자의 도덕에 대하여 삶의 통일을 부여하는 강자의 도덕 수립을 피력하였으며, 미완의 역작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1884∼1888)에서는 존재의 근간에 천착하였다.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하였다. 그 이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 니체와 바그너

어릴때 피아노를 2년간이나  배우고, 작곡했던 작품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니체는 음악이란 예술 장르에 심취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니체의 작곡은 습작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니체의 글은 많은 부분 바그너의 음악세계에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만큼,  바그너는 니체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쇼펜하우어와 함께 니체에게 큰 영향을 끼친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는 니체가 라이프치히시절 만났다. 
니체에게 바그너는 신선한 공기와 같은 역할을 했다. 니체는  바그너의 [트리스탄]을 듣고 나서 ‘독일의 새로운 음악’이라 한다. 
또한  1868년 11월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 부인으로 있는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온 바그너와  만나게 된다.  바그너 역시 니체처럼 쇼펜하우어에 대한 깊은 존경심 갖고 있었다.
 (바그너는 당시 존경하던 쇼펜하우어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으나 쇼펜하우어로 부터 거절당했다. 그리고 그에게 날아든 쇼펜하우어의 대답은 “그는 음악이라는 것을 모른다.”라는 대답이었다고 한다.)이 때부터 니체는 바그너와 함께 쇼펜하우어의 공감를 나누기 시작했다. 당시 니체는 바그너를 ‘너무나도 독일적인 남성다움의 표상’ 이라고 말할 정도로 바그너에게 매료된다.

이 시절, 35년 간의 학생 시절을 마무리하고, 1869년 스위스 바젤대학교수로서 활동하기 위해서 그는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세간에는 말이 많았다. 마침 그 당시 스위스로 이주하게 된 바그너와 니체는 급속도로 친밀해진다.

니체의 표현에 의하면, 바그너를 만나는 것이 ‘마치 신의 곁에 있는 것과 같은 안락함을 느낀다.’라고 할 정도로 두 사람은 깊은 유대감을 나눈다.  부인인 ‘코지마 바그너’는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후에 니체의 작품 속에서 ‘아리아드네’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니체와 바그너, 두 사람간의 사상적 공통점은 많은 곳에서 발견되어진다. 무엇보다도 예술적인 혁명성으로 관습화된 전통성에서 벗어나려는 혁명에 의기투합했다.

그 당시 발발된 전쟁에 참여해 국가와 민족적인 사명을 위해 싸우겠다는 니체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의무병으로 참전했으나 그 해 10월 병을 얻고 돌아오게 된다.

한편 니체는 바그너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매혹되어 그의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에서 바그너를 극찬하며, 이어 쓴 [반시대적 고찰]의 "바이로이트에 있어서 리하르트 바그너" 라는 항목에서 바그너를, "공포라는 것을 모르는 " 사람으로, 모든 예술을 처음으로 하나의 위대한 미적 종합으로 융합한 고로 위대한 유일의 예술의 창시자"라고 부른다. 또한 니체는 "장차 올 바그너 축제일의 장대한 의미를 이해하라" 고 독일인에게 말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데 그 이유는 바그너가 브람스를 질투하는 것, 상류층 인사들, 황족, 등의 인사들이 지정석에 앉게 되는 것과, 바그너의 작품이 무대 효과에 의해 과장되고 있다고 여기게 되는 점 등이다. 급기야 니체는 바그너 작품을 관람하면서 " 여기에 있으면 미칠 것 같다" " 나는 매일 밤의 이 긴 음악회가 무섭다. 나는 진저리가 났다"고 쓰게 된다.

바그너는 니체와 결별한 후 오래지 않은 1883년에 사망한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니체가 그의 부인 코지마와 화해를 시도하기도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니체는 바그너와의 시간들을 죽을 때까지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하였지만 , 저서에서는 바그너를  비판한다. 비판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 프랑스의 작곡가. 를 제시하여 바그너를 비판하였다. 비제의 주인공들과는 대조적으로 바그너의 주인공들은 헌신과 기독교적인 구원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니체는 이러한 주인공들의 모습은 현세적이며 자연스러운 삶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니체는 기독교적인 구원을 비난하였다. 기독교적인 것은 데카당스적인 면을 지니고 있는데 데카당스적이라는 것은 몰락과 죽음의 방향을 취하는 가치관과 태도를 지녔다는 것이다.

바그너가 그의 예술에서 애국주의와 반유대주의를 통한 게르만 민족주의를 표현하는 것을 또한 니체는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바그너의 음악이 음악과 예술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으며 바그너에게 음악은 일종의 수단일 뿐이라고 하였다. 즉 음악을 상업화해서 점점 기업화 해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니체는 바그너의 천재적인 기질과 강인한 의지력을 높이 사고 있다. 또한 독일인을 중간 계층의 인간 사유와 도덕에 있어서 적당한 순응주의자이며 비정신적인간이라고 말하면서 바그너는 비독일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그너와 만나기 전에 바그너의<뉘른베르크 명가수> 서곡을 듣고 1868년 10월 27일 그는 친구 로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 나의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경련을 일으켰지. 그렇게 끊임없이 지속되는 황홀경을 나는 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했네 ".

또한 바그너 사후에 니체는 종종 바그너의 초상을 보며 그를 회상하기를 " 내가 몹시 사랑하던 사람이다" 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1876년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눈과 귀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는 친구들로 부터 위안을 얻으려 노력한다. ‘파울루 레이’ 라는 유대인의 젊은 사상가로서 [도덕적 감정의 기원]이라고 하는 저서를 남겨 니체에게 인정을 받게 되는 사람과, ‘매르비더 폴 마이젠부크’라고 하는 니체보다 나이가 위인 귀족출신의 여성해방운동가가 그들이었다. 그녀는 후에 ‘루 살로메’라고 하는 여성을 니체에게 소개시켜주게 된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으나 이루지 못한 여인 루 살로메와의 인연은 거기서 시작된다.

1880년에 3월과 6월을 베니스에서 보내고, 11월 이후에는 제노바에서 보내는 등 유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40이 넘어서도 정착 하지 않으며, 죽음도 광장에서 맞이한다.

♣역자 고병권

수유공간너머, 우연한 기회에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책을 읽게 되었다. 어려웠던 글들이 편안히 다가와 마치 나에게 말을 건네는 듯 느껴졌던 책. 그러나 새로 읽으면서도 더 어렵게 읽혀졌던 이유는 가다머의 책을 읽고 난 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 관해서는 책머리에 씌여진 이 한 줄의 글로 대신하고 싶다. 맑스를 향한 사랑이 니체에 머물렀다가 다시 이제 사회로 나가봐야 겠다던 그는 그 후에도 니체를 향한 미련을 거두지 못한 듯 보인다.

“모든 책들은 동료를 구하는 몸짓이다. 이 책의 동료가 되어 줄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전하고 싶다.”

2. 마음에 남는 구절

p.3.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어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 그런 시도에 대해 삶은 “존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라고 답할 것이다.

니체는 사물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천개의 눈을 가진 사상가다. 그는 사물들의 기원에 감추어져 있는 천개의 주름을 본다.

p.4.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들으려 한다.”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p.5.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p.6. 그는 “단 여섯 줄의 문장”에도 천 개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천개의 의미를 하나의 의미아래 그 천개의 니체를 하나의 니체 아래 묶어두려는 사람들이 문제다.

p.7.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들이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압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악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위에 처박고 있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추다 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p.8.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며 안 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라도 실천이 필요하다.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지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중략-불쾌한 음악은 발걸음만으로도 반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 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색맹이 되고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서장

1. 천개의 눈

p.17. 눈처럼 쉽게 길러지는 게 또 있을까? 광학의지 혹은 시각체계-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훈련, 큰 것을 작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들이 있다. 진리를 묻는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

p.18.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p.19.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는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 오르는지”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제 1부

p.25.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이다. 철학은 얼마나 가치 있는 학문인지, 삶에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니체는 ‘삶에 대한 철학의 공과’를 묻는다.

p.26. 누구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제 무게를 달아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철학의 가치, 철학의 공과를 달아보고자 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지반을 떠나야 한다. -중략- 플라톤의 저 유명한 언급처럼 “철학은 전체를 본다” 알튀세는 이 말을 “철학에는 외부가 없다” 는 선언으로 이해한다. 진정한 철학이라면 자신의 체계를 벗어난 사물이나 사건으로 존재하게 놔두지 않는다. 헤겔 역시 자연으로 도피하는 루소에게 이렇게 말했다. “ 세계정신의 훈풍이 도달하지 못할 곳은 없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세계를 달아보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오늘 한 곶위에 서서…… 저울을 들고 세계를 달고 있었다.”

p.27. 철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요소를 포괄하는 질서를 말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진리를 찾는 철학자들과 황금을 찾는 모험가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목표의 실존을 남들보다 크게 확신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니체의 철학은 어떻게 철학의 외부에 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체를 보려는 철학적 시각의 편협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p.28. 니체가 보기에는 잘못된 사상만큼 건강에 해로운 것도 없다. 청명한 날씨가 어쩌면 철학보다도 휠씬 가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니체는 음식물이 철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영양 철학’이라는 이상은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중략-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힘, 생명 같은 것을....”

p.29. 건강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분명히 삶의 철학자이고 생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을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건강과 생명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철학이 맺는 관계, 혹은 철학 자체의 건강과 생명력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 외부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철학, 철학 외부에서 철학 진단하는 철학, 그래서 니체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는 삶과 건강이며, 그가 대결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과 질병이다. 그에게서 철학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 구도 속에 놓여있다.

p.30. 서구사상의 또 다른 뿌리인 기독교도 ‘죽음의 설교’ 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계’는 죄로 가득한 세계이며 천국은 ‘저 세계’ 안에만 있다. 기독교인들은 삶을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 괴로운 이유를 우리의 ‘죄’와 연관시킨다. 삶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클수록 우리가 지은 죄는 커진다. ‘불행의 크기’에 맞추어 죄의 크기는 역산된다. 이 세계는 죄로 출발한 세계이며, 그 죄가 번성하는 세계이고, 그 죄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세계이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죽음이후에 버러질 처벌을 환기한다. 이들 역시 삶을 ‘죽음을 위한 준비’에 쓰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한다. 삶이 그토록 추악한 것이라며 삶을 살지 않으면 된다.

p.31.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 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니체는 철학이 죽음을 위해서 쓰일 게 아니라 바로 삶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한 니체의 입장은 저 유명한 [에티카]의 저자의 입장과도 같은 것이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그러나 니체는 죽음의 설교자들을 반박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반박되어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치료받아야 할 존재다. 죽음의 설교, ‘몰락에의 의지’, 삶을 경멸하고 영원한 부정의 무게 아래 두는 것은 “삶에 있어 가장 깊이철학을 든 질병일 뿐이다.” -중략-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 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p.31. 불행히도 서규 사유의 기원에는 두 사람의 시체가 놓여있다. 보편적 진리를 위한 죽음과 보편적 구원을 위한 죽음, 서구 사유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니체는 철학이 비탄의 음울한 구름을 걷어내고 삶 앞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냐고 묻는다.

2. 거인들의 웃음소리와 신들의 한탄

p.32. 소크라테스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 이라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을 때, 부풀어 있던 사유의 공간 역시 단 하나뿐인 진리를 향해 급속히 얼어붙었다. 빅뱅을 상쇄할 만한 거대한 냉각으로 진리에 관한 사유는 완전히 가라앉았다.

이로써 극단적인 두 세계가 생겨난다. 초라함과 부족함의 세계, 그리고 아름다움과 완전함의 세계, “존재안의 피안에서 하나의 세계가 날조되었고, 그것이 참된 세계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참된 세계는 마침내 하나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 이제 상상된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평가한다. 진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철학자들이 상상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p.33. 신학자들이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보편적 진리가 발하는 빛에 눈부셔 할 때, 니체는 그들의 왜소증을 걱정한다. 신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왜소해진 것은 아닌가? 진리가 밝아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아닌가? 더 이상 신과 진리의 공과를 묻지 못하고 신과 진리에 대한 자신의 공과를 묻는 인간의 왜소증, 진리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의 완전성을 찬미하기 위하여 자신의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 바로 인간이 무한히 작아짐으로써 이다. 이 세계와 자신의 삶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 신과 진리의 위대함을 만들어 냈다.

p.34. 하강의 벡터를 나타내는 중력은 모든 날아오르는 존재들, 모든 춤추는 존재들, 모든 유목하는 존재들을 피로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중력은 인간을 난쟁이로 만든다. -중략- “내가(문을 지나다니기 위해) 몸을 굽히지 않아도 되는 곳, 소인들 앞에서 내가 더 이상 몸을 굽히지 않아도 되는 나의 고향으로 나는 언제 돌아갈 것인가.” -나의 별로 돌아가야 해.

p. 36~ 37. 그것은 비극성의 크기가 아니라, 그 비극성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스인들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공포를 고유한 명랑성으로 극복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거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소인처럼 고통과 죄의 크기를 연계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소인들의 삶에 대한 ‘부정’을 삶에 대한 ‘긍정’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삶을 살만한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삶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 고통은 그 사람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과잉에서 나오는 고통과 결핍에서 나오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그리스의 비극을 보고 놀라는 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비극을 활용하는 기술 때문이다. 심지어 고통과 싸우기 위해 꿈과 환영까지도 무기로 이용했다.

그리스인들은 고통이 극대화되는 순간에도가장 무서운 파괴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삶은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p.38. 오디오프스가 수동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프로메테우스는 능동적으로 죄를 범한다. 불을 훔친 범죄자 프로메테우스 영웅으로 받들어진다. ‘누가 오디오푸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라고 무든 그리스인들은 이제 프로메테우스야말로 우리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3. 세 개의 죽음

p.39. 니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세 개의 죽음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크라테스 죽음이다. 그러나 으 죽음이 대등하게 나열되는 것은 아니다. 선명한 대비는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다른 두 죽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디오니소스의 찢겨짐은 세계의 분화와 개별화된 사물들의 탄생을 의미하고, 그가 겪는 고통은 개별화된 사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고유한 개별성과 유한성으로 고통 받는다.

p.40. 개별적인 것들은 자신들의 한계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상위의 통일로 나아가면서 그것을 해소한다. 디오니소스는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충동을 나타내며 아폴론은 항상 절도와 자기 인식을 잃지 않는 이성을 나타낸다.

니체의 분석에 따른다면 주신 찬가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화해와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p.41. 디오니소스는 차이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 신이 되어 있었다. 괴로워하기는커녕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수성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그가 뛰는 이유는 차이들에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정력, 건강, 과도한 풍요.”때문이었다. 차이들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은 변증법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긍정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삶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과 대비시킨다. 디오니소스 대 그리스도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자, 삶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을 제공한 자, 이 반 기독교적 스승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디오니소스가 가장 혹독한 고뇌도 웃음으로 긍정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삶을 저주하고 삶으로부터 구제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낸다. “십자가에 달린 신이 삶의 저주라면, 디오니소스는 토막토막 잘리어 있으면서도 삶을 약속하고, 영원히 다시 살아나며 파괴로 부터도 돌아온다.”

p.42. 차이는 죄의식과 관계된다.

오히려 재생의 약속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전화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식을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심판과 함께 돌아온다.

디오니소스적 죽음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다. 니체는 이 철학자의 죽음에 대해 흥미로운 소절을 하나 남겨놓았다.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라는 제목이 붙은 소절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갖는 염세성을 그의 유언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만큼 비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삶의 염세성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4. 비극이 상연되는 극정과 심판의 법정

p.44. 니체의 저서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 비극의 타락이 일어난 두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극장과 법원이다. 극장은 삶을 연극으로 만드는 장소이고, 법원은 삶의 죄를 추궁하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비극은 연극으로 전락했고, 사람들은 관객으로 전락했다. “근대인들은 환희의 힘도 모르는 비평가가 되었으며, 결국은 도서관원이나 인쇄교정자 정도로 되고 말았다.

p.45. 플라톤의 동굴은 극장의 전형이다. 관객을 쇠사슬에 묶여 스크린만을 보도록 강제된다. 벽은 어둡고 사람들은 뒤에서 날아온 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들의 운동을 보게 된다. 플라톤은 참된 세계가 동굴밖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극장을 끌어 들였지만, 그가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자신의 극장 속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p.47. 이 때문에 니체의 철학처럼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은 연극의 반대편에 자리한다. “네가 이해하는 것처럼 나는 본질적으로 반연 극적이다.” 그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 가령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어릿광대에 불과하며, 바그너 역시 배우일 뿐이다. 관객들은 배우들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러나 아직 세계를 회전시킬 수 있는 가치들의 발명자들은 나타나고 않고 있다.

노래와 춤들이야 말로 미래 연극에 대한 실천적 모습들이라고 말한다.

p.48. 심판만큼 삶에 적대적인 것은 없다. “나는 법을 죽였습니다. 시체가 생명 있는 자를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법은 언제나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심판은 삶으로부터 사라의 요소를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신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심판의 사상과 정의의 주장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심판자는 아무리 자비롭다 해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5. 미래의 철학자

p.49.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더구나 순수한 사유의 체계가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수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p.50. 니체는 감리교의 원조로 알려진 존 웨슬리의 예를 통해 사상이 어떻게 물질적 힘으로 전화하는지 훌륭하게 설명했다. 웨슬리는 그의 스승 피터 뵐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그대가 신앙을 가질 때 까지 신앙을 설교하라. 그 다음부터 그대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설교한 것이다. 신앙이 삶을 생산하면 이제는 삶이 신앙을 생산할 것이다. 따라서 삶을 실천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신앙은 극복되지 않는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철학은 이 과정에서 동원되어 왔다. 철학은 군대가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고 난 뒤에 사람들의 정신을 길들이고 길러내는 작업을 수행해 왔다. 니체가 철학자를 “국가가 신하를 기르기 위해 베풀어주는 관직”이라고 비꼬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어용철학자로 존재하는 것을 감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리위에 더 높은 단계, 즉 국가가 있다는 것을 승인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국가를 통치하는 철학자의 꿈이지만, 현실에서 철학은 국가의 시녀였다.

p.51. 철학이 하나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할 때에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습속의 윤리의 압력에 굴복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나 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류공동체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이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 사회는 자신을 구원해 줄 미래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p.52. 분명히 광인은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니체는 우리의 문명을 ‘아픈 것’으로 진단하지만 사람들은 니체를 ‘미쳤다’고 본다. 니체는 ‘미친 것’의 반대가 ‘건강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 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 는 말과 다르지 않다.

“너희는 너희의 사상을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

p.53. 광인의 시간은 미래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다. 언젠가 이해되어야 하거나 언젠가 도달해야 할 시간도 아니다. 미래란 ‘항상’ 와 있지만 ‘항상’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그것은 시대의 불일치하는 시대이며, ‘때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가령 ‘왕후장상이 어디 씨가 따로 있는가?’ 라고 외쳤던 만적의 외침을 두고 1198년의 고려인들은 ‘미친 놈’ 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왕후장상과 천한 노예가 어떻게 동등한 출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적이 ‘미친놈’ 이었던 것은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였다. 그의 시간은 자유와 평등을 내세웠던 1789년 이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건 미래는 ‘때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

“미래라는 나무에 우리의 둥지를 튼다.” 그 자신이 이해되고 있지 않다고 느낀 니체는 자신의 독자를 미래의 시간에 둔다. 그리고 스스로를 ‘미래의 철학자’로 부르고 싶어 한다.

p.54. 미래의 철학자들은 가치의 평가자이며 창조자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 노동자들은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이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미래의 철학자는 그 자신의 권한으로 과거의 모든 가치들을 재평가한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들의 보고이다. 그는 과거를 재현하려고도, 기념하려고도,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긍정한다.

p.55. 니체의 법정은 질서나 평화를 선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전쟁을 예고한다. 비판은 법정에 세우는 것이지만 재판을 받는 것은 기존의 가치들이다. 니체에게 심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정을 법정에 세우는 것, 심판을 심판하는 것, 가치들에 대해 가치 평가하는 것이다.

6. 사랑의 의미

p.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p.57. 니체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우려하는 까닭은 그가 가진 폭군적 본능 때문이다. 그는 “아고는 이루어지고 있는 장에 칼을 들고 나타난 검술선생이었다.” 그는 철학에 토너먼트씩 칼싸움을 도입했다. 진리를 가리기 위한 칼싸움.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다.

“변증법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품성을 잃어버린 자가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움켜쥐는 마지막 필사의 무기다.”

이런 식의 진리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추하다. ‘진리와 사랑에 빠진 철학자’, 그는 ‘현인’이기보다는 ‘지혜의 친구’여야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구속으로 변질되는 일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철학에 들어있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즉 그것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p.58 ‘삶’을 ‘사랑’하는 것. ‘운명애’ 니체는 이것을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식이라고 말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p.59.말년의 니체는 그리스도에게서 그러한 신호를 발견했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 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제2장 - 강한 자와 선 한자 - 니체의 계보학

1. 계보학1 - 비판

p.61. 도덕학자나 도덕 철학자에 대한 니체의 불만은 그들이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도덕에 합리적 기초를 제공하기를 원했고, 이제까지 모든 학자들은 자신이 그러한 일에 성공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도덕 그 자체를 ‘고정불변의 것’으로 생각해왔다.”

p.62. 도덕 학자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의식이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생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이 도덕학이 결여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도덕 그 자체의 문제’이다.

p.63.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 - 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가까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리라’ 라든지, ‘모든 사람을 도우라’ 혹은 ‘거짓을 자행하지 말라.’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가하지 말라’ 등등 모든 가르침은 어떤 인간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는 바로 도덕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즉, “일반화 할 수 없는 것 까지 일반화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p.64. 니체는 도덕을 가리켜 “어리석음, 어리석음, 소심함, 소심함, 소심함이 뒤섞인 잡탕”이라고 불렀다.

2. 계보학2- 탐사

p.65.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의 유래와 발생을 묻는 작업이다. 기원이나 목적을 찬미하기 위해 동원된 역사가 아니라, 그 종합의 과정에서 빠져나가거나 휘어진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계보학자의 일이다. 과거로부터 신성화되거나 현재로부터 정당화된 가치들은 계보학자들이 찾아낸 간극들이나 이질적 층들, 파편들과 마주하게 된다.

p.68. 계보학자의 현미경은 미래 철학자의 망치만큼이나 강력한 전쟁무기이다. 그 작은 렌즈는 동일자의 세계에 거대한 지진을 만들어 내는 “다이너마이트”가 될 지도 모른다.

3 도덕의 자연사

p.69. 화폐의 위조란 가치를 조작하는 행위다. 가치의 위계를 역전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에서의 화폐위조행위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화폐 자체의 위조물이자 마법이며 ‘철저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치의 보편적 기준을 찾아 나선 도덕학자들의 노력은 곧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지만, 경제학자들이 떠받드는 화폐는 하나도 가치 척도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사물이나 활동이 성공적으로 교환되도록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법이며 뛰어난 위조행위인 것이다.

우리가 도덕을 인위적인 것으로 본다면 자연은 분명히 도덕의 외부에 위치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자연 안에도 가치를 심어놓았고, 결국 우리는 자연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본다.

p.70. 니체가 ‘도덕의 자연사’를 이야기 할 때 그는 ‘자연의 도덕사’가 꿈꾸는 선한 자연(루소의연)을 인정하지 않는다. 19세기가 18세기보다 조촐하나마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이 있다면 자연의 비도덕성을 승인한 것이다. “자연에의 복귀는 아니다……. 결코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자연이란 바꿔 말하면 자연처럼 감히 비도덕적인 것이다.

p.72. 도덕의 자연사를 보면 한 시대의 도덕은 다른 시대의 악덕이며, ‘한 민족의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민족은 조롱거리, 치욕이라고 부른다. “ 한 이웃은 다른 이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이웃의 영혼은 언제나 다른 이웃의 광기와 악의를 괴이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니체는 서로 다른 도덕적 가치들이 역사에 존재했다고 말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가치의 가치를 묻는 계보학자는 그러한 도덕적 판단들이 어떠한 토양에서, 어떠한 건강상태에서 나온 것인지를 진단한다. 유래와 혈통을 밝혀주는 것. 고급과 저급, 강함과 약함, 거인과 소인의 위계를 세워주는 것이 계보학이다. 의사가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다른 건강상태’ 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처럼, 계보학자는 도덕의 유형을 세움에 있어 ‘다른 도덕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4. 강한 자와 선 한자

p.77. 여기서 평가 양식상의 중요한차이가 나타난다. 귀족적 평가 양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긍정과 부정은 귀족적인 것과 노예적인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 한자는 “억압하지 않는지,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

p.7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하고 했다.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5.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p.80. 양에게 독수리의 힘을 요구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면, 똑같이 독수리에게 양처럼 약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양은 자신이 독수리보다 강하다고 위로한다. 그것은 바로 강함을 억제하는 힘, 즉 유혹에 견디는 힘이며, 독수리는 이 힘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약자는 자신의 약함을 하나의 공적이자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p.82. 이제 매 맞고 있는 것은 약자나 귀족이 아니라 바로 약자 자신이다. 인간을 인간 자신을 질병처럼 학대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관리한다.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사악한 것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을 체크하는 청교도가 근대인의 얼굴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이제 죄는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닌가. 이미 인간은 ‘원죄’를 타고 났으므로 살아있는 한,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형벌도 이처럼 잔혹하지는 않을 것이다.

p.83. 원죄의 채무를 지게 되면 그 누구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는 빚쟁이가 되고 만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불쌍한 동물인 인간은 제 자신을 한탄하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다. “누가 강자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약자가 자신을 방어했던 수단이 본능이 되고, 인간성이 되고, 제도가 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니체는 노예적 도덕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한다. 질병은 건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질병의 어떤 적극성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자를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 지배한다.

p.84. 이제 약자는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약자가 뭉쳐서 강자를 이긴 것이 아니라,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것을 통해, 즉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강자일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것이다.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저지의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강자는 “능동성 개념을 박탈하고…… 적응이라는 개념이 전면으로 나온다. 그것이 바로 반동성인 것이다.

6. 도덕이라는 동물원

p.85~87. 성직자라는 의사들은 “의사로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혀서” 자신들을 필요하도록 만들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 시킨다.

첫번째, 진정제와 마취제의 투여, 두 번째 기계적 활동의 도입. ‘노동의 축복’. 베바가 프로테스탄티즘에대해 분석했던 바대로 니체는 노동이야말로 충동을 억누르는 훌륭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세 번째, 조그만 즐거움의 제공. 선을 행할 때 유용한 보답을 해주는 것. 네 번째 가장 결정적인 수단, 삶에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

“도덕은 하나의 동물원이다. 덫에 빠져 있을 때조차 자유보다는 철책이 유리할 지도 모른다 는, 그리고 거기에는 성직자라는 맹수 조련사가 있다는 것” 성직자들은 인간들이 ‘개선’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과연 ‘개선’된 것인가? 짐승은 단지 덜 위험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공포감과 고통, 상처, 굶주림이 야수를 병약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 다음 고차적 가치들 자체에 대한 평가절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결국 평가하는 것 자체를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칸트에서 헤겔로, 그리고 쇼펜하우어에 이르기 까지, 또한 초기 기독교적 원한의 정신에서 불교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부정의 운동은 무를 행해서만 나아간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의 마지막장을 허무에의 의지로 맺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약자의 운동, 노예적 도덕을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이다. 쇠우리에 갇힌 동물들은 죽어가고 동물원을 폐쇄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7. 선악을 넘어서

p.88. 선악이라는 도덕적 가치판단을 넘어서도 여전히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평가는 남는다.

니체는 자신이 인정한 덕은 “판단을 누구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인정받는 것과 상관없이 평가하는 것, 가축떼적 입법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요컨대 르네상스의 덕”이다.

p.89. 중력이나 전자기력처럼 덕도 사람을 당기고 밀치면서 행사되는 실재적인 힘인 것이다. 덕을 하나의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니체의 도덕학에 대한 비판이 자연학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학자들은 사람들이 종교나 미신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예속을 원할 수도 있음을 경고해 왔다. 자신의 신체 상태를 잘 아는 일, 그리고 그것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p.90. 악이란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이처럼 스피노자의 선/악의 개념은 좋고 나쁨의 의미만을 가진,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자연학적인 것이다.

니체는 『에티카』의 저자처럼 인류의 건강에 대해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을 넘어선 영역에서도 여전히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존재한다.” 그의 철학이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가치평가를 포기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귀족과 노예, 거인과 난쟁이, 덕과 도덕, 건강과 질병,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가치 평가한다. “나의 철학은 위계를 향하고 있다. 도덕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 3장. 투시주의와 광학의지

1 헤르메스가 전하는 메시지

p.93.그러나 이는 결국 해석학자가 신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헤르메스의 해석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중의 해석’을 거쳐야 한다는 것 의미한다. 이 이중의 해석은 참뜻을 알고 싶어 하는 해석자들에게 부여된 가장 가혹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p.94.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의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그와 거래를 해야 한다. 해석학자들은 어 떤 거래의 기술을 가지고 있을까?

<3-2> 진리의 해석학

p.95.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학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존재론적 차이, 고대와 근대를 가르는 시간적 차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공간적 차이,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르는 문화적, 종교적 차이, 해석학자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와 벌어져 있는 차이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 없다면 해석학자들은 우선 차이를 넘나들고 있는 헤르메스를 이해해야 한다.

‘타자’보다 ‘차이(거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니체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차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해석학자들은 헤르메스를 제우스를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로 여긴다.

p.96. 이들과 달리 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는 헤르메스가 메시지를 바꿀 수도 있는 배짱과 지혜를 갖춘 신인지도 모른다.

해석에 있어 주관적 계기들의 역할을 최대한으로 축소하고자 했으며, 대상을 대상 자체로 바라보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해석만이 합리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p.98. 가다머는 ‘객관적 이해’를 위해 제거하고자 했던 선입견이야말로 우리의 소중한 출발점을 극복하는 것도 말이 되진 않지만 이러한 제한적 상황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전제나 출발점도 갖지 않는 이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p.99. 하버마스가 주목한 것은 바로 상호주관성이다. 상호 주관성을 과학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주관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설 수 있는 방법이다. 행위자들은 의사소통 행위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수정해가고 결국에는 하나의 합의를 향해 점차 접근해 간다. 그는 ‘이상적 조건의 담화 상황’에서는 서로를 접근하도록 마드는 힘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물론 가다머는 이러한 ‘이상적 담화상황’ 이라는 가정을 “충격적일 만큼 비현실적”이라고 비꼬았다.

3. 스핑크스의 눈

p.103. 진리의 해석학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보여주는 단어는 투시주의다. 개인이나 집단은 모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마치 풍경화의 원근법처럼 하나의 소실점을 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거기에 맞추어 사물의 크기를 다르게 본다.

p.105. 니체의 해석학은 대상이나 해석자 어느 쪽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니체는 필연성을 갖는 사실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알게 되고, ‘주체’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연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p.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 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 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체계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p.108. 이것은 일종의 ‘항변할 수 없다는 식의 주관적 강요’다고할 수 있다.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 때는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이 때문에 니체는 논리학을 “참된 것을 인식하라는 명법이 아니라 우리가 참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세계를 정립하고 조정하라는 명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4. 가치의 발명

p.109. 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침과 과잉이다.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겐 즐거움의 대상이다.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끝없는 길이 미로가 아니겠는가.

p.110.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p.111.특히 니체의 투시주의는 “나의 해석은 이렇다. 그렇다면 당신의 해석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p.112. 니체에게 해석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생성의 문제이다. 해석행위는 모드 차이를 아우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떠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래를 만들려는 자가 벌이는 가치 평가 행위인 것이다.

사람들이 사실들을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 받아들일 때, 그것은 매우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 그들은 해석을 통해 하나의 가치를 창조하고 생성한다. 니체가 절대주의나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p.113. 니체의 해석은 지배가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다. 그것은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이기도 하다.

p.113-니체의 역사에 대한 세 가지 관점

첫 번째 ,기념비적 방식 : 과거의 고전적인 것이 다시 한 번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태도다.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시도 그러나 대개의 기념식이 그렇듯이 이러한 시도 속에서 수많은 차이들은 재현을 위해 깎이고 휘어진다.

두 번째, 관점, 골동품적 역사관으로서 과거를 그대로 보존하려고만 한다.

세 번째, 비판적 방식. 인간이 살기 위해서 과거를 파괴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생각. 이들은 과거를 법정에 끌어내 심문하고,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이다. 과거와 대립해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은 곤란한 욕망이다.

p.114. “늦게 온 손님이 자리를 얻으려면 아주 위대한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늦게 도착했어도 진실로 좋은 자리가 마련되리라.”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재현이나 보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건설의 질료와 힘들이 모두 미래적 건축가에게는 소중하게 이용된다.

해석의 비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생성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계속해서 생성된다. 생성된 차이는 괴로운 것이기는 커녕 하나의 멜로디다. 니체가 가장 자유로운 작가라고 칭찬해마지 않았던 로렌스 스턴은 작품이 그렇다. “그가 정말로 칭찬 받아야 할 점은 완결한 멜로디를 구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하는데 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p.115. 니체는 “새로운 견해의 태양이 새로운 열기와 더불어 인간 위를 내리 쪼이자마자 고대의 모든 질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회질서도 천천히 녹아내린다.”고 말했다. 니체의 해석이란 바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차이의 생성이다.

5. 니체에 대한 해석학 -방법과 스타일의 문제

p.116. 그녀는 니체의 스타일, 특히 경구나 은유가 ‘저속한 무리를 내쫒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보면 니체는 자신의 이야기를 포착할 수 있는 독자를 선택하기 위해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경구나 은유는 단일하고 결정적인 해석을 쉽게 무너뜨린다. 해석은 항상 무한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p.118. 들뢰즈는 더 이상 니체의 텍스트를 분석 수준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니체 사상의특징이 방법에 있다고 말한다. 즉 니체의 텍스트들을 파시스트적인 것, 부르주아적인 것, 혁명적인 것으로 규정짓기보다 그런 힘이 만나는 하나의 장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니체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가로지르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것과 만나는 일이다. 누가 니체주의자인가? 누가 니체의 해석자인가? 어떤 니체인가?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가는 사람, 혁명적 니체를 만들어 가는 사람, 니체로 혁명하는 사람, 바로 그가 니체주의자이다.

6. 헤르메스는 해석자였다.

p.120.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제4장. 우상의 몰락과 위대한 정치 - 니체의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1. 작은 정치의 시대

p.122. 아마도 니체는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역사가 정지해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p.123.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한다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미래를 낳을 능력을 상실한 근대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용여이다.

p124. 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회’이다. ‘사회’는 공통성의 영역이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영역이다.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다원성’이었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은 ‘표준화’다.

p.125. 니체는 근대의 정치를 ‘작은 정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시대가 끝나간다고 말한다.“이제 작은 정치의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세기의 도래와 더불어 지상의 지배를 위한 투쟁이 막을 열 것이고, 필연적으로 위대한 정치가 도래할 것이다.”

2.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1 - 근대국가와 전쟁

p.126. 좋은 것과 나쁜 것, 친구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해내는 기술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가치의 창조와 평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에 대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정치는 이러한 창조와 평가, 세력들 및 권력에 대한 물음을 봉쇄하려 한다. 그러한 물음이 커다란 혼란을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유주의자들에게서 이러한 봉쇄가 두드러진다.

p.127. 가치 창조와 평가를 봉쇄했던 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허무주의적인 인간형을 산출하는 점에 있다. 정치는 강한 인간을 육성하기 보다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잔인한 길들이기와 길러내기가 개입한다.

p.128. 니체는 국가라는 잔인한 도구가 전쟁에서 왔다고 말한다. “패자의 것은 부인, 자식, 재산과 핏줄을 포함하여 모두 승자에게 속한다. 폭력은 최조의 권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국가의 원형은 전쟁을 통해, 그리고 군사계급 속에서 제시되고 있다. 전쟁은 혼돈 상태의 대중들을 군사적 카스트 계급들로 분리시켜 전사적 사회 구조를 만들어 내는 효과가 있다.

홉스 역시 국가의 기원이 전쟁에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사회상태 외에는 항상 모든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람의 전쟁이 존재한다. 인간은 그들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공통의 힘이 없을 때는 전쟁이라고 불리는 상태에 있게 되며, 그러한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될 것이다.” “국가는 바로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공통의 힘”으로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실체다

p.131. 칼을 든 군주는 전쟁을 막으면서도 그 흔적을 지니고 있지만, 일반의지는 칼 없이도 전쟁을 막아낸다. 모두에게 주어진 한 표가 전쟁의 힘을 흡수해 버렸다. 민주주의는 가장 효과적인 전쟁 억제 수단이다.

3. 새로운 우상의 탄생과 몰락2-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p.132. 니체는 우선 자유주의자들이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하는 기본원리에 대해 비판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하나의 형이상학적 실체일 따름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선험적인 개별화된 자아라는 개념에 동의하며, 사회적 관계에 우선한 완전한 인간을 단위로 삼는다.

‘자유로운 개인’은 떠드는 자유주의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니체는 자유주의에서 “자유로운 인격을 볼 수 가 없으며,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비겁하게 정체를 숨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뿐이다. 개성은 내면적인 것으로 옴츠려 들어가 밖에서는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고 말한다.

p.136. “사회주의자들은 소유물의 분배가 과다한 불공정과 폭력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부당한 기반위의 구축물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데, 이 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개개의 것만을 보고 있다.”

p.137. 니체는 “사회주의가 원하는 국가가 달성된다면 생성의 강한 에너지는 파괴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 때 국가는 새로운 생성적 힘을 상실하고 허무주의적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니체는 현대 민주주의를 ‘국가의 몰락에서 나온 역사적 형태’라고 말한 것이다.

p.138.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이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 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4. 길들이기와 길러내기

p.140.다이어트라는 말과 관련해서 하나는 비율이라는 단어와 합리성이라는 단어 사이에 존재하는 친화성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성’의 중시이다.

p.142. 노동이 칭찬받고 노동의 축복에 관하여 지치는 일도 없이 이야기 되는 경우…나는 저의를 본다. 노동을 바라볼 때, 현재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것, 노동은 각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방해할 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노동을 통해 보다 안전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길들이기와 길러내기를 항상 ‘개선’이라고 불러왔는데, 사실상 이것은 뛰놀던 야수가 동물원에 갇혔을 때처럼, ‘개선’이 아니라 ‘덜 위험한 상태’로 나약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p.143.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은 또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된다. 그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p.144.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재갈 물린 이들을 매개로 하여 그 나라의 모든 청년층은 국가에 유익한 것을 교육받는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의해 승인되고 인정된 생활 진로만이 사회적 영예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그러한 성향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전염된다.

 5. 아곤의 정치

p.152. 전쟁을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의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

제 5장 권력의지와 영원 회귀(1) 자연학 + 윤리학

5-1 초월적인 것의 죽음과 내재적 우주론 - 원자론의 경우

p.155. 니체는 원자론을 이렇게 비꼬았다. “저울에 달아보아 차이를 확인할 수 없게 되자” “다이아몬드와 흑연과 석탄이 동일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동일한 어떤 것, 불변의 어떤 것을 공상해야 했던 것 아닌가?

p.158. 데모크리토스가 필연성을 중시했다면 에피쿠로스는 우발적인 사건들과 그것들의 복수의 원인들을 생각했다. 데모크리토스가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성의 세계만 보았다면, 에피쿠르소에게 세계는 ‘사건들의 사건’, ‘변화로서의 변화’가 구성하는 시간이 흐르는 생성의 영역이었다.

 2. 왜 원자가 아니라 힘인가

p.159. 힘은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힘이 없다면 힘은 존재하지 못한다.

힘의 두 번째 특성은 ‘표현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서 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것만이 힘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힘 사용의 극대경제”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자신의 능력을 남겨두지 않는 힘의 속성을 절묘하게 드러냈다.

“어떤 양의 힘이란 사실 그것과 같은 양의 충동, 의지,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충동작용, 의지 작용, 활동 작용에 불과하다.”

p.161. 이제 니체는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본다. 원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힘들의 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힘, 증대하는 일도 감소하는 일도 없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청동과 같은 확고한 양을 가졌으면서도 ... 여러 힘과 힘의 파랑이 유희로서 하나인 동시에 다수이고, 여기에 모이는가 싶으면 저기서 감소하는” 힘들의 바다, 그것이 “세계 그 자체" 이다.

 3 힘의 질 - 능동과 반동

p.164. ‘무거운 정신’은 중력의 상징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힘들의 모든 우발적 운동을 잠재우는 족쇄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드높은 하늘”에 던져진 “주사위”를 “영원한 이성의 거미줄”로 묶어 버린다. 던져진 모든 주사위들은 지구의 중심을 행해서만 떨어지고, 모든 반응들은 평형상태를 향해서만 돌진한다.

p.165. ‘힘의 양이 얼마나 되는가?’ 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질을 가지고 행사되는가?’ 는 물리학자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다.

p.166. 니체에게 강함은 무엇보다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p.167. “본성의 강함은 반동을 대기시키고 연기시키는 일에서 나타난다. 어떤 종류의 무관심이 강함에는 고유하다. 마치 약함에는 반동의 부자유함이 고유한 것과 같다.

p.168. 능동은 “반동을 뒤로 밀거나” 그것에 “무관심한 듯” 자기 능력의 한계까지 나아간다. 능동적 힘은 “정면에서 공격한다.”: 이때의 능동적 힘 역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다.

 4 권력의지에 대한 오해

p.171.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권력의지’는 ‘권력’과 ‘의지’의 결합한 개념이 아니다. 니체는 힘의 내면의지를 ‘권력의지’라’ 말로 바꾸었는데, 그때 ‘의지’란 사실상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p.173.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이다.”

p.174. 허무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무의 의미’, 혹은 ‘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무화하려는 의지’이다. 허무주의가 모든 것이 헛되다 고 말할 때, 그때의 권력의지는 모두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힘들의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시킨다.

 5 권력의지의 윤리학과 권력 느낌

p.175. 긍정은 디오니소스적 정신이며, 그리스예술의 정수이고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이기도하다. 반대로 부정은 삶을 비난하는 노예의 것이고, 심판을 불러오는 사제의 것이며,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포섭하려는 변증법의 것이다.

p.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어떤 행동이나 힘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을 ‘부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긍정으로 다루는가’ 가 권력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말해준다. 부정의 권력의지가 힘을 다룰 때 그것이 가져오는 것은 약화이다. 긍정의 권력의지가 다룰 때, 그것은 “저축이고 강화”이다.

p.177. 마주침의 순간에 작동하는 권력의지가 어떤 것이냐의 문제는 ‘강하게 되느냐(강자의 생성)’, ‘약하게 되느냐(약자의 생성)’을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곧바로 윤리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인가 선악이라는 도덕의 문제를 넘어서 ‘좋음’과 ‘나쁨’이라는 윤리의 문제로 한 힘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힘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좋은 해석이나 가치 평가란 긍정의 권력의지이다. 긍정의 권력의지야말로 좋은 지배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 까? 우리 육체는 긍정의 권력의지를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 니체는 그것이 권력느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p.179. 그것을 느끼고 평가하는 것, 육체는 감각과 평가를 통해 권력의지를 경험한다. 사회든 개인이든 나쁜 권력의지는 이러한 감각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강자들이 창피하고 비참하게 여기는 것을 약자는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낀다. 권력의지는 하나의 평가방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감각방식인 것이다.

제 6장 권력의지와 영원회귀(2), 두 가지 반복과 두 번의 긍정

 1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계, 그리스적 사유로부터

p.182. 모든 불멸하는 존재의 죽음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오히려 기쁜 일이다. “장례식의 비가 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 아닌가” 죽음은 항상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멸할 수 없는 존재는 태어날 수도 없다. 원자들의 해체가 죽음을 의미했다면 그것들의 조상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원자들의 놀이가 “하늘과 바다, 땅과 강, 그리고 나무와 동물들을 생성시켰다.” 그러면서도 반복은 “또 다른 것들로, 그리고 그 다른 것들은 또 다른 것들로 끊임없이 계속된다.”

p.184. 생성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헤라클레이토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어떤 철학자들의 무리와도 뒤섞을 수 없는 고귀한 인물로 생각했다.

p.185. 헤라클레이토스는 규규정자이든 이데아든 별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생서의 세게만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p.186.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이 다수다.” 오, 위대한 세계의 어린아이 제우스, 오! 위대한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

6-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익숙한 오해

p.192. 니체의 독특한 존재론, 즉 생성의 존재론이 나온다. 이제 “‘존재하는 것’에 대립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는 것’, ‘의욕 하지 않는 것’이다.

3. 반복의 경우 -병에 걸린 차라투스트라와 회복된 차라투스트라>

p.196.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 과거를 생성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개의 길이 만나는 출입구”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순간’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모든 순간들에는 이 세 가지가 공존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공간인 순간들은 ‘흘러간다. 순간들의 생성, 그리고 소멸.

p.199.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이해해 가는 속도와 긍정의 권력의지에 다가가는 속도가 일치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영원회귀를 이해한 뒤의 차라투스트라는 완전히 긍정적으로 돌변했다. “나는 어느 심연으로라도 축복하는 예라는 말을 가져갈 것이다.

 4 긍정을 부르는 긍정

p.201.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작은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된다.

p.204. 우리는 긍정을 부정에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긍정 그 자체 내에 부정을 위치시키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은 긍정을 부정하지만, 긍정은 부정을 긍정하므로, 부정에는 긍정이 포함되지 않고, 긍정에는 부정이 포함된다.

새로운 사원을 지으려는 자는 기존의 사원을 부수고자 한다. 새로운 가치 표를 써넣으려는 자는 낡은 가치 표를 지워야 한다.

첫 번째 긍정은 “파괴하는 기쁨”이며, “망치 휘두르기”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바로 다음의 긍정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긍정은 새로운 입법자의 등장이며, 새로운 건축가의 등장이다. 첫 번째 긍정을 단순한 파괴와 부정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다. 두 번째 긍정을 통해서만이 첫 번째 긍정이 비로소 긍정된다.-5 차이의 놀이와 회귀의 비밀

p.207. 놀이가 만들어 내는 차이! 긍정은 차이의 생성을 멈추려하지 않는다. 차이를 해소하고 싶어 하는 것은 부정이다. 변증법이 그렇듯이 부정은 차이를 적대로 발전시킨다. 차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대립감을 느끼는 것은 부정의 권력의지다. 그래서 부정은 생성의 놀이, 차이의 놀이를 멈추고 싶어 한다.

p.209.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써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정욕의 비밀의 세게, 영원회귀의 유혹,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7장 인간,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있는 밧줄

 

p.211.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잘 해야 대지의 살갗에 생긴 피부병” 이거나 “작은 구더기가 아닐까?” “인간은 우주의 눈들이 자기 방에서 망원경을 통해 자신의 행위와 사유를 보고 있다.” 생각하지만, “우리가 모기들과 의사소통한다면 그들도 동일한 파토스를 가지고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p.212.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을 했다고 해도, 인간이 진정한 만물의 척도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p.213. 데카르트가 드러낸 것은 존재의 확실성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분리와 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이점에서 니체는 17세기를 “인간을 발견하고 질서를 세우고 발굴하려 노력한 세기”라고 발한다.

 2 진화와 변신

p.216.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저 쪽으로 건너가기도 위험하고, 가는 중에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다.

p.217. 인간의 역사는 약자들이 승리한 역사이며, 따라서 진화라고 말할 게 아니라 퇴화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인간은모든 생물의 시간을 인간을 향한 ‘양의 축적’과 ‘질의 변화’로서 이해한다.

p.221. 니체에게 초인과 동일한 종족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는 것은 지인, 강자, 귀족, 주인, 어린아이다. 어떻게 거인과 어린아이는 같은 종족이 될 수 있을까? ‘같은’것은 힘과 권력의지의 종류이고 존재방식으로서의 영원회귀다. 만약 초인이 생성의 힘이라면 그것은 긍정의 권력의지를 내면적 질로 가지고 있으며, 영원회귀를 통해서 존재한다.

3 신의 죽음과 인간의 몰락>

p.222. 니체는 사실 구세주가 전하려 했던 복음이 사실상 신의 죽음과 통한다고 본 것 같다.

p.223.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제야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성시킨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광인은 신이 죽은 후에도 새로운 삶을 목격하지 못한다. 그는 신의 죽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에 춤추는 단 한 명의 인간도 만나지 못한다.

p.225. 신들의 죽음도 즐겁고 유쾌한 적이 있었다. “한 신이 나타나 신에 대해 가장 무식한 말을 했을 때, 신들의 죽음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은 하나다 너는 나 말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신들은 비웃었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그들은 웃다가 죽은 것이다.” 정말로 신을 철저히 죽이고자 하는 자는 웃는다. 그는 신을 분노로써가 아니라 웃음으로써 죽이는 것이다.

4. 보다 높은 인간들

p.230. 낮은 인간이든 보다 높은 인간이즌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다. 그들은 신의 죽음이 만들어준 생성의 공간에서 반동적으로 뒷걸음질 친다. 신앙을 가진 자는 다른 신이라도 찾기를 바라고 여행에서 지친 자는 그만하기를 바라며, 확실성을 찾는 자는 그것을 신으로 생각함에 주저하지 없다. 그들은 모두 신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한다.

p.231. 긍정이란 어떤 것인가? 영원회귀란 어떤 것인가? 초인이란 어떤 것인가? 바로 영원하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번 더’ 라고 말하는 것이다.

<7-5 놀이와 웃음, 그리고 춤>

p.232. 어린아이의 놀이는 즐거움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놀이의 반복을 가져온다. 놀이는 다음의 놀이를 계속하여 부른다.

p.233. “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서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은 중력의 정신에 대한 승리의 표시이다. 그 것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높이뛰기와 넓이뛰기, 그리고 옆으로 뛰기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차라투스트라의 신은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 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 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 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디오니소스는 “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

p.234. 차라투스트라에거는 영원회귀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긍정의 권력의지를 획득하는 과정이었으며, 또한 그것을 느끼는 새로운 신체를 생성시키는 과정이었다.

신체가 즐거움을 경험하면 “한번 더”라고 말한다. 신체는 영원회귀를 의욕한다. 그것이 또한 긍정의 권력의지다.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 시켰는가>

1. 가면의 철학

p.238. 그는 하나의 정체성을 쉽게 내던졌다. “사람을 불멸하기 위해서 여러 번 죽어야 한다.” 니체의 여러 이름들은 다음과 같은 영원회귀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니체의 이름은 하나의 가면이기도 하다.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 그는 가면을 바꿔 쓰며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상형문자를 놓고 괴로워하는 이집트의 청년처럼 가면 뒤에 있는 진정한 얼굴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p.239.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p.240. 완벽한 독자란 항상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로 변하곤 한다. 게다가 그는 순종적이면서도 교활하고 조심스럽다. 그는 또한 하나의 타고난 모험가요. 발견자이다.

2. 비극의 시대에서 냉소의 시대로

p.242. 비견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생의 즐거움과 명랑성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정신이 숨쉬고 있으며, 공포와 연민을 초월한 생성이라는 테마가 은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p.244. 니체는 바그너에 몰입했던 자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압박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마약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바그너를 필요로 했다. 바그너는 탁월하다고 하는 모든 독일적인 것에 대한 해독제였다. 나는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도 하나의 독이다.”

3. 화약냄새가 사라진 전투

p.245. “이 책은 부정을 행하고 있지만, 그 수단도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4. 모든 가치의 전환

p.247. 병균속에서도 치료의 백신을 찾아내듯 니체는 상처로부터 치료의 힘을 발견한다.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p.248. ‘모든 가치의 전환’ 이것이 인류에 있어 최고의 자기성찰의 행동을 위한 정식이고, 이것이 나의 살이 되고 나의 천재성이 된다. 나는 전에 아무도 나만큼 거역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거역한다. 그럼에도 나는 부정적 정신의 소유자와는 반대자다. 나는 기쁜 소식을 전달해주는 복음의 사자이다. 모든 것이 허위였으므로 지상에는 미증유의 전쟁이 있게 된다. 나의 출현과 함께 세상은 위대한 정치를 펼치게 된다.

5. 다시 떠나는 여행자

p.250.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 프리드리히 니체” 그의 서명이 붙어 있는 전하는 메시지도 이제 “니체씨로부터 떠나라” 는 것이다. 여행객은 항상 그 사회의 이방인이고 외부자이다. 니체는 그 자신을 독일 안에 있는 이방인이라고 소개한다.

p.251.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돌아가리니”

p.252. 니체의 사상은 유목적 사상이다. 유목민이란 여행자이며 외부자이다. 그러나 니체의 여행자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는 공간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나는 것은 지배적인 질서이며 지배자의 코드이다.

p.253.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이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

제2부 베버 근대 허무주의 비판의 딜레마

1. 근대라는 탈주술화된 주술

p.258. 절대적 가치가 붕괴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 항상 새것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근대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2. 근대인의 탄생

p.263. 내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재화를 벌어들인다면 그것은 신이 돕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전환이 부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뒤집어졌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재화를 쌓는 것이야말로 신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다.

3. 관료의 기제

p.267. 우리는 기계로서의 관료제가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 어떤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은 사라진다. 생산하는 것은 관료제로 불리는 기계다. 인간 역시 기계의 생산 작업에 동원되는 부속품일 뿐이다.

4. 신체 길들이기, 신체 길러내기

p.270. 베버는 “훈육은 모든 계산 가능하도록 그리고 공통의 명분과 합리적으로 의도된 목표에 헌신하도록 대중들의 육체와 전신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5. 베버의 정치학

p.276. 베버의 정치학은 합리적 훈육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고 개인의 도구화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형 창출을 목표로 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소명’을 가진 정치인, 강한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인의 출현이었다. 영혼이 사라진 강철 겉옷 속에 다시 영혼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사람, 스스로 강철 감옥보다 더 강한 영혼을 소우하고 있는 사람!

p.277. 정치인에게는 소명에 대한 열정과 함께 뛰어난 목측능력이 요구된다. 목측능력이란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고 그것에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내재적 거리를 두는 것이다.

p.280. 그는 자신의 다이몬을 선택하고 자신의 행위가 초래할 결과를 정확히 계산한다. 그리고 관료제 기계를 수단의 기능에 엄격히 한정시킴으로써 합리적 훈육이 초래하는 사회적 삶에 대한 통제를 저지시키는 사람이다.

6. 베버 전략의 딜레마

p.283. 현대 정당들은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더 많은 규율들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규율들은 더 많은 대중들을 수동적으로 만들 것이다. 정치가가 대중들의 의사를 더 잘 대표할수록 대중들은 더욱 복종한다. 계몽은 계몽 대상의 계몽 필요성을 더욱 증대시킬 뿐이다.

p. 285. 신체의 능력은 초월적인 가치를 지도 받거나 내면화시킴으로서 성장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신체는 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함으로써만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긍정해야 함을 여러 번 주장했다.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

p.293. 그러나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자유주의에서처럼 약화되지는 않는다. 군사적 지출의 확장이나 경제적 조정비용의 확장은 물론이고 가치와 도덕적 구조물에 대한 위기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현대 국자의 또 다른 중요한 얼굴이며, 헤겔로 대표되는 근대적 국가의 이상이기도 하다.

p.298.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국가에 대해서는 서로의 편차 이상으로 그 둘 모두를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어주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가치들의 투쟁, 차이들의 투쟁을 정치 영역으로 보내서 경제적 영역의 자유를 확실히 보장받고자 했던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열망은 동일한 요소를 정치의 영역에서도 배제하고자 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자 열망과 그리 멀지 않다. 자유의 보증자로서의 국가, 국가의 영역, 정치의 영역들의 범위는 계속해서 줄어들지만, 그것은 네그리의 표현대로 ‘핵심으로서의 축소’라고 할 수 있다.

p.301. “공허한 이치를 내세우며 반성을 일삼는 오성의 것”이라고 말하며, 완전성은 결코 “진행의 영속적 진행”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수령이 오래된 거목이 계속해서 가지를 뻗는다고 해서 새로운 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p.316. 그것이 바로 ‘차이’의 고유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다. 차이는 회피되어야 하거나 해소되어야 하거나, 심지어는 그것이 인정되고 보존될 때조차 ‘문제’다. 그것은 생산되기보다는 관리되어야 한다.

p. 319.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파괴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다. 생태계의 어떤 것들도 자신의 특이성을 전개함에 있어 다른 것과 대립하지 않으며, 종들의 다양성과 특이성이야말로 생태계의 징표다. 차이의 아상블라주로서의 생태학에 못지않게, 여러 잡다한 것들이 모여 만든 예술품으로서의 아상블라주 또한 같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퀼트처럼 각각의 것은 자신의 이야기들을 전혀 양도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이룬다. 우리가 생태적이고 미적인 패러다임을 말한다면, 그것은 정치에 대한 어떤 생태적 신비화나 심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발견해야 할 정치적 주체들과 그들의 새로운 소통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스무살, 준비되지 않은 이별에 암울하던 시기에  읽게 되었던,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그들. 그러나 돌아보면, 나는  어렴풋이 성글게 이해했던 듯하다.

내가 다시 그의 책을 읽게 된 것은 다시 혹독한 이별을 겪고, 터널을 지나고 있을 시절이었다.
나의 시름을 알아보고, 기꺼이 따듯한 손을 내밀어 주었던 친구. 그 친구에게 나는 질 들뢰즈, 짜라투스트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을 받았다.

친구가 첫 장에 써준 글귀는 “짜라를 통해 참된 짜라를 만나길, 그리하여 자유로와지길” 이었다. 그러나 그시절, 나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고통이 여백 없이 가득 차서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숙고해 볼 겨를도 없었다. 나는 너무나 누추했고 가난했고, 초라했다. 도대체 어느 곳에서 내가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분노와 상실감에 아무것도 내안에 들여 놓을 수 없었다.

이번 오프 수업에서 사부님은 물으셨다.
“너희는 연구원이 되고 자유로워졌느냐? 그 물음의 뒤편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기에 ‘자유로워져야 공부를 잘한 연구원이 되는 것이다’ 라는 행간의 의미를 추측해 볼 수 있었다.

나는 기꺼이 대답했다. “자유로워졌습니다. 쇼윈도우를 깨고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아직도 물론 깨야 할 틀이 많지만, 틀림없이 자유로워졌다. 여지를 생각하고 여지 뒤에 느낌을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삶이 이렇듯 충만하고 아름다운 것을  연구원이 되고 다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사부님이 왜 그렇듯 니체에 영향을 받으셨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 변화를 꿈꾸던 그, 니체는 문명에 대한 비판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뒤의 대안을 제시했다. 전 세계적 종교로 자리 잡아 유럽 문명을 지배해 온 그리스도교의 몰락을 예언한 것은 전통적인 가치관에 대한 공격으로 인지되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공격적이고, 혁신적이며, 두려움이 없는 사람. 그러나 일생을 병마와 싸우고, 한 번도 결혼하지 못한 사람. 한 철학자의 여정을 따라가며 마음이 다시 아파지는 아침이다.

19세기와 20세기를 살다간 러시아 여인, 루 살로메를 사랑했으나 루는 그의 친구, 레를 선택해 동거하게 된다.
 
“제발 내게 그런 편지를 쓰지 마세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당신은 알 것입니다.
이제 와서 난 당신을 전혀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직해야 할 때 당신은 내게 정직하게 굴지 않은 것 말고
 당신은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조심하세요.

내가 지금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신에게는 고통일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도 그 못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누가 당신 같은 여자를 만나겠어요?
당신은 나 말고도 다른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어요. 그러니 당신도 상처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점을 잘 상기 해 보세요. 사랑조차 할 줄 모르는 당신의 그 못된 이기주의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그 암담한 성격, 그건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는 가장 혐오스런 성격이고 가장 끔찍한 죄악입니다. 잘 가요. 루!
나의 사랑. 다시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겁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당신을 나는 영원히 기억하고 간직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세요. 특히 나의 친구 레에게 주세요.”

 아쉬움이 가득한 니체의 이 편지는 사랑을 잃은 한 남자의 사랑의 비통함이  담겨 있다. 

  이 편지를 받은  루 살로메는 레와 동거에 들어간다. 루 살로메와 헤어진 니체는 그녀에 대한 애증으로 좌절 속에서  역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원고를 불과 10여 일만에 탈고한다.


 니체가 페미니스트를  남성을 연기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루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니체는 후에 루와 차라투스트라 둘 가운데 선택의 기회가 있다면 어느 것을 선택했을 것이냐는 물음에 '당연히 루를 선택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길을 잃고 헤매던 나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었던 그 친구가 몹시도 그리워지는 맑은 날이다. 혹시 그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면 ‘ 오늘 내가 느끼고 있는 자유는 그때  나를 위해 울어 주었던, 나를 위해 주었던 몇십 권의 책, 즉 너의 그 마음 덕분이라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 리뷰를 쓰기 위해 들뢰즈의 책장을 열어 보았더니 수 없이 많은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영원회귀 속의 동일성은 되돌아오는 것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차이나는 것을 위해 되돌아오는 상태이다. 그래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종합으로, 즉 시간과 그것의 차원들의 종합, 다른 것과 그것의 재생산과의 종합, 생성과 자신을 생성으로 긍정하는 존재의 종합, 이중적 긍정의 종합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


사부님의 이책에 대한 서평 중 한 대목을 올려 두며 마친다.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은 니체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는 변신의 힘이며, 가장 극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에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라는 단호한 유혹에 따라 늘 “떠나야할 곳은 알지만 도착할 곳을 모르는 배”를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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