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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9일 11시 5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루스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 1887.6.5~1948.9.17) 미국뉴욕에서 출생.

1909년 바사대학에서 영문학을 수학, 교사와 시인으로 활동.

생화학자인 스탠리 베네딕트와 결혼, 1919년 인류학을 접하고 2년 후 다시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스승 프란츠 보아스를 만남.

아메리칸 인디언 종족들의 민화와 종교를 연구하여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30년부터 모교에서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저서:《문화의 패턴 Patterns of Culture》(1934) 《종족-과학과 정치성 Race:Science and Politics》(1940)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 등.

♣ <국화와 칼>은 1944년 6월 미 국무부의 위촉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인데, 특기할 것은 저자가 일본을 방문하지 않고 쓴 책이다. 인류학자의 입장에서 일본의 문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 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그 때문에 경험에 붙들리지 않고 좀 더 이성적으로 살펴 저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화의 패턴 또한 그녀의 명저이며, 여성의 시각으로서 볼 수 있는 인류 문화변천사에 주목했으며, 기여하고 있다.

2. 마음에 남는 구절

p.4. 이 저서는 ‘국화’와 ‘칼’이라는 두 가지 상징의 극단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저는 그 부제가 표시하듯 일본 문호의 틀의 탐구인 것이다. 그것은 문화 인류학이라는, 미국에서 크게 발달한 학문의 방법론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매우 전문적인 것이다.

5. 학문의 연구에서 그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쪽이 오히려 보다 엄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 저서는 입증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부분적 체험은 전체적인 방법론을 망쳐 놓기 쉬운 것이다.

p.9. 일본인은 서양 여러 나라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전시관례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p.10. 문호가 개방된 이래 75년간 일본인에 대해 쓰인 저작에는 세계 어느 국민에게도 일찍이 쓰인 적이 없을 정도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또한(but also)’이라는 표현이 연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p.11.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서는 날줄과 씨줄이 된다. 그러한 모순은 모두가 진실이다. 칼도 국화와 함께 한 그림의 일부분이다. 일본인은 최고도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동시에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p.20. 인류학자는 평범한 사실을 연구할 수 있도록 특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p.21. 어떤 국민 생활의 사소한 인간적 일상생활에 주의해야만, 비로소 어떤 미개 부족에도 또 어떤 문명국에도 인간의 행동은 일상생활 속에서 학습되는 것이라는 인류학자의 전체에 대한 중요한 의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행위나 의견이 아무리 이상한 것일지라도 어떤 인간의 느낌과 사고방식은 그의 경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p.23. 20세기의 핸디캡 가운데 하나는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을 미국인의, 프랑스를 프랑스인의, 러시아를 러시아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여전히 가장 막연하고도 편견에 가득 찬 관념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식의 결핍으로 세계 각국은 서로 오해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닮은 두 나라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난 경우라도 우리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p.25. 강인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로소 안심한다. 그들은 차이를 존중한다. 그들의 목표는 차이가 있더라도 안전이 확보되는 세계, 세계 평화를 위협하지 않고도 미국은 철저히 미국답고, 같은 조건으로 프랑스는 프랑스, 일본은 일본다울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p.30. 덕과 악덕은 서양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체계는 전혀 독특한 것이었다. 그것은 불교적인 것도 아니고 유교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장점도 단점도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p.32.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따라서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p.33. 세계 모든 나라는 국제적 계층 조직 속에 제각기 일정한 위치가 주어져 하나의 세계로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다.
p.34. 일본은 정신력으로 반드시 물질력을 이긴다고 부르짖었다.
p.36. 가미카제라는 것은 13세기에 칭기즈칸이 일본을 침략했을 때 그 수송선을 전복케하여 일본을 구한 성스러운 바람을 가리킨다.p.39.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인이 그들의 정신력부족 때문에 전장에서도 공장에서도 미국인의 정신력에 졌다고 자인하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p.41. 미국인은 생활양식을 끊임없이 도전해오는 세계에 맞게 조정한다. 그리고는 그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반면 일본인은 오히려 미리 계획되고 진로가 정해진 생활양식에서만 안심을 얻을 수 있으며, 예견하지 못한 일에는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
p.51. 일본군들은 죽음 그 자체가 정신의 승리이며, 우리 미국인같이 환자를 충분히 간호하는 것은 전투기의 구명 도구처럼 영웅적 행위를 해치는 것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p.59. 계층 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야말로 인간 상호 관계 및 인간과 국가의 관계에 관해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p.64. 일본인 또한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는 그들의 신념을 표명한 것은 스스로의 사회적 체험에 의해서 그들 속에 깊이 뿌리내린 생활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p.72. 일본에는 세대와 성별과 연령에서 오는 특권이 이처럼 크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멋대로 하는 독재자로서가 아니라 중대한 책무를 위탁받은 인간으로서 행동한다.
p.80. 상인 계급은 늘 봉건 제도의 파괴자였다. 실업가가 존경받고 번영하게 되면 봉건 제도가 쇠퇴한다.

p.89. 아래로는 천민에서 위로는 천황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명확하게 규정된 형태로 실현된 봉건 시대의 일본 계층 제도는 근대 일본 속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봉건 제도가 법적으로 종말을 고한 것은 요컨대 겨우 75년전에 불과하다. 그 뿌리 깊은 국민적 습성이 겨우 인간의 일생에 불과한 75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소멸될 수 없는 일이다.

p.90. 일본인은 다른 어떤 주권보다도 그 행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지도처럼 정밀하게 미리 규정되어 있어, 각자의 사회적 지위가 정해진 세계 속에서 생활하도록 조건지워져 왔다.

p.92. 서양에서 봉건 제도가 붕괴된 것은 점점 발달하고 우세해진 중산 계급의 압력이 그 원인이었다. 중산 계급이 근대 산업 시대를 지배한 것이다. 일본에는 그러한 강대한 중산 계급은 발생하지 않았다.
p.93. 이 두 계급이 제휴한 것은 일본에서는 그렇게 하는 편이 두 계급 모두에게 이로웠기 때문이었다. 서구에도 그러한 제휴가 이루어진 몇몇 특수한 사례가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대체로 계급이 철저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프랑스 같은데서는 계급투쟁이 귀족의 재산을 몰수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일본에서는 계급간의 사이가 밀접하였다.
p.101. 그러나 문제의 중요성은 이 정치가들이 어느 계급 출신인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그들이 그토록 유능하면서도 현실주의적일 수가 있었는가에 있다.
p.103. 윗사람에 대한 전통적 의무, 특히 천황에 대한 전통적 의무는 일본의 큰 장점이다. 일본은 이 ‘웃어른’의 지도하에서 견실히 나아갈 수가 있다. 또 이것은 개인주의적인 나라들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방지할 수 있다고 스펜서는 말하였다.
p.104. 일본은 이렇게 하여 중요한 정부의 지위를 어디까지나 ‘각하’들의 수중에 두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결코 그 ‘알맞은 위치’에 자치 제도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나라와 정치 체제에 관계없이 위로부터의 권력이 아래로 미치는 과정의 어느 지점에서는 반드시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지방 자치제의 힘과 마주친다. 나라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은 단지 민주적 책임이 어느 정도까지 위로 미치고 있는가, 지방 자치 제도의 책임이 얼마만큼인가, 지방적 지도력이 지방 공동체 전체의 요망에 어디까지 부응하고 있는가, 또 지방의 세력가들에게 농락당하여 주민의 불이익을 얼마나 초래했는가 등등의 차이가 있는데 불과하다.
p.110. 일본인의 생활양식은 알맞은 권위를 할당하고 각각의 권위에 알맞은 영역을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웃어른’에게는 서구 문화보다도 더 큰 존경-따라서 더욱 큰 행동의 자유-을 주지만, 웃어른들도 그 지위를 지켜야 한다. ‘모든 것을 알맞은 장소에 둔다.’ 이것이 일본의 좌우명이다.
p.117. 일본이 이룩한 것은 실수와 헛된 소모를 최소한도로 줄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산업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 일본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과 그 후 여러 단계의 일반적 순서’를 수정할 수가 있었다.
p.120. 일본은 계층 제도 속에 거대한 부가 차지하는 위치를 주어서 그것과 제휴하였다. 그러나 부가 그 영역 밖에서 획득된 경우에는 일본인의 여론은 그것에 통렬한 비난을 퍼붓는 것이다.
p.124. 남에게 빚이 있는 인간은 극도로 화를 잘 내는 법인데, 일본인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 채무가 일본인에게 갖가지 큰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p.137. 아무리 착잡한 감정을 가졌더라도 온진恩人이 실제로 자기 자신인 한, 즉 그 사람이 ‘나의’ 계층적 조직 속에 일정한 위치를 점하는 사람이든지, 혹은 바람 부는 날 모자를 집어 준 경우처럼 나 자신도 아마 그렇게 하였으리라 상상되는 일이든지, 혹은 나를 숭배하는 사람일 경우에 한해서는 일본인은 안심하고 온을 입는다. 그런데 일단 이런 조건에 해당되지 않으면 그 온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 된다. 지워진 부채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불쾌하게 느끼는 것이 훌륭한 태도이다.
p.142. 사랑, 친절, 너그러운 마음 등은 미국에서는 부수적인 대가가 요구되지 않기 때문에 존중되지만, 일본에서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런 행위를 받은 사람은 채무자가 된다. 일본인이 잘 쓰는 속담이 있다. “온을 받는 데에는 더없이 타고난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p.144. 사람의 채무(온)은 덕행이 아니다. 변제가 덕행인 것이다. 덕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보답 행위에 몸을 바칠 때 시작된다.

p.147. 일본인은 양에서나 기한에서나 무제한적인 온에 대한 보답과, 받은 분량과 똑같이 갚고 특정한 기한에 끝나는 보답을, 각기 다른 규익을 가진 별개의 범주로 나누고 있다. 채무에 대한 한없는 변제는 ‘기무義務’라고 불리는데, 이에 관해서 일본인은, “받은 온의 만분의 일도 결코 갚을 수 없다”고 말한다.

p.150. 일본 현대 영화 가운데 한 어머니가 어느 마을 학교 교사인 결혼한 아들의 돈을 훔치는 장면이 있다. 이 돈은 이 교사가 어린 여학생, 즉 흉년으로 굶어 죽게 된 그녀의 부모가 자기 딸을 사창가에 팔려는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모금한 돈이었다. 교사의 어머니는 자신이 상당한 요리집을 경영하여 조금도 돈에 궁색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들로부터 이 돈을 훔친다. 아들은 어머니가 돈을 훔친 것을 알지만 자신이 그 책임을 뒤집어쓴다. 그의 아내는 진상을 알고 돈을 잃어버린데 대한 모든 책임을 지는 유서를 남기고 어린아이와 함께 자살한다.

p.152. 이처럼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일들이 효행 속에 포함되지만, 그 모든 일들이 부모부터 받은 채무에 대해 자식이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보은이다.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이야기는 개인의 정당한 행복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간섭의 사례라고 여겨지고 있다.
p.153. 일본인은 생생하게 기억되는 사람이외의 조상에 대한 효행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지금 여기에 있는 자에게 집중한다.
p.159. 일본은 유사 이래 서른여섯이나 되는 왕조가 교체된 중국과는 달랐다. 일본은 이제까지 여러 가지 변천을 거쳐 왔지만 그 어떤 변혁에서도 결코 사회 조직이 지리멸렬하게 파괴된 일이 없이 항상 불변의 형태로 지켜져 왔던 나라였다.
p.160~161. 주는 신하와 천황의 관계에 이중적 체계를 부여한다. 신하는 위를 향해서는 중간자를 거치지 않고 직접 천황을 우러러본다. 그는 그의 행동에 의해 직접 개인적으로 ‘폐하의 마음을 편안케’ 해 드리는 데 신명을 바친다. 그러나 신하가 천황의 명령을 받을 때는 그 명령은 그와 천황 사이에 개재하는 여러 중간자의 손을 거쳐서 중계된 것을 귀에 담는다.
p.162. 미국에서는 그것은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한다는 태도에 의존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난점을 지니고 있다. 미국의 난점은 법규가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경우에도 국민의 승인을 얻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본의 난점은 무엇보다 어떤 사람의 온 생애를 뒤덮을 만한 큰 부채를 지우기는 어렵다는 점에 있다.
p.163. 아침에는 소총을 겨누면서 착륙했지만, 점심때는 총을 치워 버렸고, 저녁때는 이미 장신구를 사러 외출할 정도였다.
p.164. 그러나 일본은 서구가 아니다. 일본은 서구 여러 나라의 최후 방법인 혁명을 이용하지 않았다. 일본은 또한 적국의 점령군에게 불복종 사보타주를 하지 않았다. 일본은 일본 고유의 강점, 즉 아직 전투력이 분쇄되지 않았는데도 무조건 항복을 수락한다는 막대한 대가를 주로서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능력을 사용하였다. -중략-즉, 일본인은 비록 그것이 항복의 명령이긴 했지만 명령을 내린 것은 천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것이었다. 패전에 있어서도 최고의 법은 여전히 주였다.

p.165. 일본인이 잘 쓰는 말에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란 기무를 갚아야 하는 것처럼 기리를 갚아야 한다. 그러나 기리는 기무와는 종류가 다른 일련의 의무이다. 영어에서는 이것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학자가 세계 문화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별난 도덕적 의무의 범주에서도 가장 드문 것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특히 일본적인 것이다.
p.166. 기리는 일본이 중국의 유교에서 받아들인 것도 아닐뿐더러 동양의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본 특유의 범주로서 기리를 고려해 넣지 않으면 일본인의 행동 방침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167. 기무는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친밀한 의무의 수행이라고 느껴지는 데 비하여, 세상에 대한 기리는 개략적으로 말하면 계약 관계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p.169. 데릴사위가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매우 커서, 일본인의 속담에 “쌀 세 홉만 있으면 데릴사위가 되지 말자”는 말이 있다. 일본인은 이 거부감을 ‘기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일 미국에 이런 습관이 있었다면 미국인은 ‘남자 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p.172. 이처럼 기리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전혀 혐오의 정에 더럽혀지지 않았던 시대의 옛 이야기는, 현대 일본이 꿈꾸는 황금시대의 백일몽이다.
p.173. 충절은 주군에 대한 기리였고, 모욕에 대한 복수는 자기 명예에 대한 기리였다. 일본에서 이 두 가지는 동일한 방패의 양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에 대한 옛 이야기들은 오늘날 일본인의 재미있는 백일몽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에 와서는 ‘기리를 갚는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정당한 주군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사람에 대한 온갖 종류의 의무를 이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p.175. 일본인은 어떤 사람이 기리를 갚을 수 없을 때, 그 사람은 파산하였다고 여긴다. -중략- 그것은 복잡한 세상에서 끊임없이 방심하지 말고 걸어 다녀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p.176. 가능하면 언제나 노력이든 물건이든 서로간에 주고받은 복잡한 관계를 기입한 기록이 만들어진다.

p.177. 일본인은 기리에 관하여 서구의 채무 변제 관례와 비슷한 또 한 가지 관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만일 갚는 일이 기한보다 늦어지면 마치 이자가 느는 것처럼 커진다는 것이다.
p.179. 이름名에 대한 기리義理란 자기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이다.
p.180. 타인의 호의에 반응하는 경우와 타인의 경멸이나 악의에 반발하는 경우의 행동이 왜 하나의 덕으로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일본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훌륭한 사람은 모욕에 대해서도 그가 받은 은혜만큼이나 강하게 느낀다. 어느 쪽도 그것에 보답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위이다. 그들은 서구인처럼 이 두 가지를 구별하여 한쪽은 침해 행위, 다른 한쪽은 비침해 행위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어떤 행위가 침해로 인정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기리의 세계’밖에서 행해지는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다. 사람이 기리를 지키고 오명을 씻는 한, 결코 침해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빚을 갚아 셈을 치르는 것일 뿐이다. 일본인은 모욕이나 비방이나 패배가 보복되거나 제거되지 않는 한,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말한다. 훌륭한 사람은 세상을 다시 균형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보복은 인간의 덕행이지, 인간의 본질적인 약점에 기초한 피할 수 없는 악덕이 아니다.
p.181. 보복은 인간의 덕행이지, 인간의 본질적인 약점에 기초한 피할 수 없는 악덕이 아니다.p.183. “어린 새는 먹이를 찾아 울지만, 사무라이는 이쑤시개를 물고 있다”
p.184. 또한 그들은 고통에 져서도 안 되었다. 일본인의 태도는, 나폴레옹에게 “다쳤느냐고요? 아닙니다. 폐하, 저는 지금 살해당하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한 어느 소년병의 응답과 비슷한 것이었다. 사무라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고통의 표정을 보여서는 안되며,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이것은 1899년에 세상을 떠난 가쓰 백작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는 어렸을 때 개에게 물려서 불알이 찢어졌다. 그는 사무라이 가문이었으나 집안은 구걸을 할 만큼 아주 가난하였다. 의사가 수술하고 있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그의 코앞에 칼을 뽑아들고 “한마디라도 우는 소릴 내면 무사로서 부끄럽지 않게 널 죽이겠다”고 말하였다.

p.186. 중요한 것은 일본이 오늘날 우리의 기초 위에서가 아니라 일본 자신의 기초위에서 자존심을 재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그것을 일본의 특유한 방법으로 순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p.188. 기리의 모든 용법에서 공통적으로 한 인간과 그가 하는 일이 극단적으로 동일시되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의 행위 또는 능력에 대한 비판은 자동적으로 그 인간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된다. -중략- 본심은 그가 알고 있는 체하기보다는 정직하게 알지 못한다고 하는 편이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p.189. 우리는 경쟁을 ‘좋은 일’로 생각하고 크게 의지한다. 그런데 일본에서의 테스트 결과는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일은 특히 소년기가 끝난 뒤의 시기에 현저하다. 일본의 어린이는 경쟁을 장난처럼 생각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청년이나 성인의 경우에는 경쟁자가 있으면 작업 능률이 뚝 떨어진다. 혼자서 할 때에는 비교적 좋은 진보를 보이고 실수도 적고 속도도 빨랐던 피험자가, 경쟁 상대와 함께 하면 자주 틀리고 속도도 늦어지는 것이다. 반면 그들은 그들의 진보를 그들 자신의 성적과 비교하여 측정할 때에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타인과 비교 측정하는 경우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p.190.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에 전념하는 대신에 그들의 주의력을 자신과 공격자의 관계에 빼앗기는 것이다.
p.191. 직접적 경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려는 노력은 일본인의 생활 모든 면에서 나타난다. 미국인은 친구들과 경쟁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반면, 온에 입각하는 윤리에서는 경쟁을 허용할 여지가 아주 적다. 각 계급이 준수해야 하는 규칙을 세밀하게 규정한 일본의 계층제도 전체가 직접적 경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있다. 가족 제도 또한 그것을 최소한도로 제한하고 있다. -중략 -어디에든지 나타나는 중개자 제도는 서로 경쟁하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것을 막는 좋은 방법의 하나이다.

p.197. 살인자-그는 타인의 육체를 살해한 인간이다. 조소자-그는 타인의 혼과 마음을 살해한 인간이다. 혼이나 마음은 육체보다 훨씬 귀한 것이다. 따라서 조소는 가장 큰 죄이다. 실제로 그 선교사 부부는 나의 혼과 마음을 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에 대단한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왜 ‘너 따위가’라고 말하는가?”라고 외쳤다.

p.199. 일본인은 사람이란 스스로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모욕 받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모욕하는 것은 ‘당사자로부터 나오는 것’뿐이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향하여 말하거나 행하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는 윤리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p.201. 일본의 충성에 관한 서양인의 논의가 대부분 공론임은, 기리가 단순히 충성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배반을 명령하는 덕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데 있다. 그들은 “매를 맞은 사람은 모반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모욕을 당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p.202. 일본인은 실패나 비방, 배척 때문에 상처받기 쉽다. 따라서 타인을 괴롭히기보다는 너무도 쉽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많다.
p.204.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만일 적절한 방법으로 행해지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구실을 한다. 미국에서는 자살을 죄악시하여 절망에의 자포자기적인 굴복으로 치부하지만, 자살을 존경하는 일본인에게는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행해지는 훌륭한 행위가 된다.

p.208. 그들은 국가주의적 목표를 세우고 공격을 내면으로부터 다시 밖으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외국에 대한 전체주의적 침략 속에서 그들은 다시금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불쾌한 기분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속에 새로이 큰 힘을 느꼈다. 

p.209. 맹렬한 노력과 단순한 답보 상태인 무기력 사이를, 기분이 흔들림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일본인의 본성인 것이다.

p.210. 그 필연적 귀결로서 대부분의 일본인은 무엇이든 당신이 하는 대로 내맡기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 목적으로 가장 안전하게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무엇을 하더라도 안 될 테니 잠시 걸음을 멈추어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제일이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을 정말 쉬운 일이다. 무기력은 확산되어 간다. -중략- 일본인의 영원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쓰여지는 수단은 그 때의 사정에 따라 취해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도구일 뿐이다. 사태가 변하면 일본인은 태도의 변경을 서구인처럼 도덕의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p.212. 기리는 항상 침략 행위의 행사와 상호 존경 관계의 준수를 동시에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패전에 이르러 일본인은 분명히 자기 자신에게 심리적 폭력을 가한다는 의식을 전혀 지니지 않았고, 전자에서 후자로 방향을 바꾸었다. 지금도 그들의 목표는 여전히 명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일본은 역사상 여러 가지 경우에서도 같은 태도를 보여 왔다. 그것은 항상 서구인을 당혹시키는 일이었다.

p.214. 이와 같은 상황적인 현실주의는 일본인의 이름에 대한 기리의 밝은 면이다. 달과 같이 기리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인 배척 법안을 만들게 하고, 해군 군축 조약을 크나큰 국가적 치욕으로 느끼게 하고, 마침내는 그처럼 불행한 전쟁 계획으로 내몰게 한 것은 그 어두운 면이었다. 1945년에 항복의 여러 결과를 호의를 가지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은 그 밝은 면이다. 일본은 변함없이 일본 특유의 방법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p.215. 기리는 모든 계급에 공통된 덕이었다. 일본의 다른 모든 위무나 규율과 마찬가지로 기리는 신분이 높아질수록 더욱 무거워지기는 하지만,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든 계층에 요구된다.

p.217.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죄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이지 않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쾌락은 추구되고 존경받는다. 그렇지만 쾌락은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물게 해두어야 한다. 쾌락은 인생의 중대한 사항의 영역을 침입해서는 안 된다.

p.218.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마치 예술처럼 연마하고 나서 쾌락의 맛을 충분히 알게 되었을 때, 의무를 위해 그것을 희생한다.

p.223. 일본인의 생각에 따르면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단식하는 것은 얼마나 ‘단련’이 잘 되어 있는가를 아는 특히 뛰어난 감별법이다. 따뜻함을 멀리하고 수면을 줄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식 또한 고난을 참고, 사무라이와 마찬가지로 ‘(먹지 않았으면서도) 이쑤시개를 입에 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기회이다

p.231. 완고한 전통적 일본인은 음주와 식사를 엄중히 구별한다. -중략-일본인의 철학에서 육체는  악이 아니다. 가능한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p.232. 그들은 인간에게 두 가지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것은 서로 싸우는 선의 충동과 악의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온화한’ 영혼(니기타마)과 ‘거친’ 영혼(아라타마)으로, 그들은 모든 인간의 생애에는 ‘온화’해야 할 경우와 ‘거칠어’야 할 경우가 있다고 믿는다. 한쪽의 영혼이 지옥으로, 다른 한쪽이 천국으로 간다고 정해져 있지 않다. 이 두 개의 영혼은 모두 저마다 다른 경우에 필요하며 선이 된다.

p.233. 일본에서는 인간의 성질이 태어날 때부터 선하며,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자기의 나쁜 반쪽과 싸울 필요가 없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만 마음의 창문을 깨끗하게 하고, 경우에 따라 알맞은 행위를 하는 것뿐이다. 만일 그것이 더럽혀졌다 하더라도 더러움은 쉽게 제거되며, 인간의 본질인 선이 다시 빛나기 시작한다.

p. 235. 일본인의 견해를 반영하듯 일본의 소설이나 연극은 해피엔드로 끝나는 것이 극히 드물다. 미국의 일반 관중은 해결을 열망한다. 그들은 극중 인물이 그 후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게 될 것으로 믿고자 한다.

p.239. 일본인의 인생관은 그들의 주, 고, 기리, 진, 인정 등의 표현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이다. 그들은 인간의 의무 전체가 마치 지도위의 여러 지역처럼 명확하게 구별된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p.240. 어떤 사람이 이기적이라든지 불친절하다든지 하고 비난하는 대신에 일본인은 그 사람이 위반한 법도의 특정 영역을 명시한다. 그들은 지상 명령이나 황금률에 호소하지 않는다. 옳다고 여겨지는 행동은 그 행동이 나타나는 세계와 상대적이다. 사람은 ‘고를 위해’ 행동할 때와, ‘단순한 기리를 위해’, 혹은 ‘진의 세계에서’ 행동할 때에 전혀 다른 사람처럼 ? 서구인에게는 그렇게 생각되는데 ? 행동한다. 또한 각각의 세계에서 법도는 그 ‘세계’ 속의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서, 현저히 다른 행동이 당연히 해야 할 행동으로서 요구되도록 정해져 있다. -중략- 우리 경험에 의하면 인간은 그 인품에 맞게 행동한다. 우리들은 충실한지 불충실한지, 협력적인지 고집이 센지 등으로, 양과 염소를 구별한다.

p.242. 서구인은 일본인이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도 하나의 행동에서 다른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와 같은 극단적인 가능성은 우리의 경험에는 없다. 그런데 일본인의 생활에서는 모순 - 우리에게는 모순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 이 그들의 인생관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마치 우리의 획일성이 우리의 인생관에 뿌리박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서구인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일본인이 생활을 구분하고 있는 '세계' 속에는 '악의 세계'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나쁜 행동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생을 선의 힘과 악의 힘이 싸우는 무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p.243. 각자의 영혼은 원래는 새 칼과 마찬가지로 덕으로 빛난다. 다만, 그것은 갈지 않으면 녹이 슨다. 그들이 곧잘 말하는 ‘자기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녹’은 칼의 녹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것이다. 칼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인격이 녹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만 설사 녹이 슨다 하더라도 그 녹 밑에는 여전히 빛나는 영혼이 있고 그것을 다시 한 번 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p.244. 일본의 참다운 국민적 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47 로닌 이야기>이다.

p.245. 47명의 로닌은 명성, 아버지, 아내, 누이동생, 정의 등 일체의 것을 기리를 위해 희생시킨다. 그리고 최우에 그들은 자살을 하는 것으로 그들 자신의 생명을 주에 바친다.

p.252. 즉, 로닌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생명을 끊음으로써, 기리와 기무의 쌍방에 대한 최고의 채무를 지불하였다

.p.255. 일본인의 견해에 따르면 강자란 개인적 행복을 도외시하고 기무를 완수하는 인간이다. 성격의 강함은 반항함으로써가 아니라 복종함으로써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중략- 결혼 생활이 행복하게 영위되고 있을 때라도 아내는 여러 가지 의무의 세계에서 중심에 놓여지는 일은 없다.
 서구인은 우선 대개는 인습에 반기를 들고 수많은 장애를 극복하여 행복을 획득하는 것을 강함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본인의 견해에 따르면 강자란 개인적 행복을 도외시하고 기무를 완수하는 인간이다.

p.256. 그들은 주를 지도 위의 단순한 하나의 영역이 아니라 도덕적 아치의 근본 원리로 삼으려 하였다.

p.262. 의義는 산보다 무겁고 죽음은 새털보다도 가볍다는 것을 기억하라.p.266. 일본인이 성실이라는 말을 쓸 대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본의 도덕률 및 일본 정신에 의하여 지도상에 그려진 길을 따르는 열의다.

p.267. 마코토는 사리를 추구하지 않는 인간을 칭찬하는 말로서 끊임없이 사용된다. 이 사실은 일본인의 윤리가 이윤의 추구를 매우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p.268. 마코토는 일본인의 도덕 법전의 어떤 조항도 고차의 거듭 제곱으로 높인다. 그것은 말하자면 독립한 덕이 아니고 스스로의 교의에 대한 광신자의 열광이다. -중략- 그들의 윤리 체계는 마치 브리지의 승부와 같은 것이다. 잘하는 경기자란 규칙에 따라 그 규칙의 범위 내에서 경기하는 사람이다.

p.271. 일본어에서 다른 어느 것보다 강하게 말하는 방법은 “자중에 자중을 거듭한다”는 표현으로, 그것은 무한히 조심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결코 경솔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노력도 필요 이하의 노력도 소비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을 강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p.272. 여러 가지 문화의 인류학적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수치를 기조로 하는 문화와, 죄를 기조로 하는 문화를 구별하는 일이다. 도덕의 절대적 기준을 설명하고 양심의 계발을 의지로 삼는 사회는 ‘죄의 문화’라고 정의할 수가 있다. 일본인은 죄의 중대성보다도 수치의 중대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다.
p.273. 참다운 죄의 문화가 내면적인 죄의 자각에 의거하여 선행을 행하는 데 비해, 참다운 수치의 문화는 외면적 강제력에 의거하여 선행을 한다. 수치는 타인의 비평에 대한 반응이다. 오히려 반대로 나쁜 행위가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는 한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고백은 도리어 스스로 고민을 자초하는 일로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수치의 문화’에서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론, 신에 대해서조차도 고백한다는 습관은 없다. 행운을 기원하는 의식은 있으나 속죄 의식은 없다.

p.274. 일본인은 치욕감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다. 분명히 정해진 선행의 도표에 따를 수 없는 것, 여러 가지 의무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일어날 수 있는 우연을 예견할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치욕(하지)이다.

p.275. 일본인이 생활에서 수치가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행동에 해단 사람들의 평가에 마음을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p.277. " 나는 나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감각과 감정을 가진, 어느 다른 유성에서 떨어져 온 생물체처럼 느껴졌다. 모든 동작을 얌전하게 하고, 모든 말투를 예의에 맞도록 하지를 요구하는 나의 일본식 예절이, 이 나라의 환경 속에서 나를 극도로 신경과민과 자의식에 빠지게 하였다." ?미시마의 자서전 <나의 좁은 섬나라>

p.278. 그들은 옛날의 생활을 어느 때는 잃어버린 낙원, 어느 때는 ‘질곡’, 어느 때는 ‘감옥’, 또 어느 때는 분재를 심는 ‘조그만 화분’에 빗대어 말한다. 분재로 꾸며진 소나무 뿌리가 화분 속에 갇혀 있는 동안은 아름다운 정원에 미관을 더해 주는 예술품이 된다. 그런데 한번 직접 대지에 옮겨 심어진 분재 소나무는 절대로 다시 원상으로 되돌려질 수 없는 것이다.
p.279. 어떤 문화의 자기 훈련은 항상 다른 나라에서 온 관찰자에게는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p.281. 그들의 자기 훈련 개념은 능력을 주는 것과 그 이상의 것을 주는 것으로 나눌 수가 있다. ‘그 이상의 것’을 나는 숙달이라 부르기로 한다.

p.282. 무한한 도야의 가능성을 가진 육체를 의지로써 지배해야 한다…어떤 훈련을 해서라도 사람은 일본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p.283. 미국인에게는 자기희생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p.285. 태어난 그대로의 어린아이는 행복하지만 ‘인생을 맛보는’ 능력을 갖지 않고 있다. 정신적 훈련(혹은 자기 훈련, 슈요)을 쌓아야 비로소 사람은 충실한 생활을 하고 인생의 ‘맛을 음미하는’ 능력을 획득한다.
p.286. 수양은 ‘자기 몸에서 나온 녹’을 갈아 떨구어 내는 것이다. 수양은 사람을 잘 갈아서 예리한 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물론 그가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p.288. 달인은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전혀 갖지 않게 된다. 회로는 열려 있고 전류는 자유로이 흐른다. 행위는 노력 없이 행해지게 된다. 그것은 ‘일점적’으로 변한다. 행위는 행위자가 마음속에 그린 형태와 한 치도 다르지 않게 실현된다. 숙달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의지와 행동 사이에 말하자면 일종의 절연벽이 가로막는다. 일본인은 이 장벽을 ‘보는 나’, ‘방해하는 나’라고 부른다. 그리고 특별한 훈련에 의해 이 장벽이 제거되었을 때에 달인은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전혀 갖지 않게 된다. 회로는 열려있고 전류는 자유로이 흐른다.

p.290. 일본은 불교국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윤회와 열반사상이 국민의 불교적 신앙의 일부분이 된 일이 없다.

p.291. 일본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육체와 정신이 대립되는 교의(敎義)이다

p.293. 그들은 이 방법에 의하여 ‘육관’이 비정상적으로 예민한 상태에 달한다고 한다. 육관은 마음속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육관은 보통 훈련에 의하여 오관을 지배하게 되는데, 그러나 미각·촉각·시각·후각·청각도 황홀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에 각각 특별한 훈련을 받는다.

p.295~296. 12세기 및 13세기 동란 시대에, 경전 속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직접 체험 속에서 진리를 발견해 내려는 이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가르침이, 승원이라는 피난처 속에서 세상의 폭풍을 피해 출가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었던 일어겠지만, 설마 그것이 무사 계급이 애호하는 생활 원리로서 받아들여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된 것이다.

p.296~297. “선은 사람이 자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광명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선은 이 추구의 방해가 되는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는다. 당신 앞의 장애를 모조리 제거하라. -중략- 만일 도중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만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성자를 만나면 성자를 모조리 죽여라. 그것이야말로 구원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다.” p.300~301. 마지막으로 그의 마음과 고안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보는 나’의 장벽이 제거된다. 전광의 섬광처럼 빨리, 양자-마음과 고안-가 융합한다. 그는 ‘깨달음’을 얻는다. 

p.300. 선의 고안은 12세기 혹은 13세기 이전의 중국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선종과 함께 이 수단들을 채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안은 중국 대륙에서는 없어졌지만 일본에서는 숙달 수행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되었다. 선의 입문서에서는 고안을 매우 중요시하여 다루고 있다. “고안은 인생의 딜레마를 포장하고 있다.”고안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진퇴양난의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마치 뜨거운 쇳덩어리를 삼키려하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p.302. 고안은 ‘문을 두드리는 벽돌’이라고 불리고 있다. 문은 눈앞에 있는 수단만으로 과연 충분할까하고 지레 걱정을 하고, 자기의 행동을 혹은 칭찬하고 혹은 비난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감시의 눈을 번쩍이고 있다고 망상하는 어리석고 우매한 인간성의 주위에 둘러쳐진 벽에 붙어 있다. 이 벽은 모든 일본인이 대단히 절실하게 느끼는 하지(치육)의 벽이다. 벽돌로 문을 두들겨 부수고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은 자유의 천지로 해방되어 벽돌을 내던져 버린다. 이제 이 이상 고안을 푸는 일은 하지 않는다. 수행은 완료되고 일본인의 덕의 딜레마는 해결된 것이다. 그들은 필사적인 기세로 막다른 골목에 부딪쳐 간다. 수행을 쌓기 위해 그들은 철우를 무는 모기가 되었다. 그 결과 드디어 그들은 막다른 골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 기무와 기리의 사이, 기리와 인정의 사이, 정의와 기리의 사이에도 역시 막다른 골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한 갈래의 길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무가의 경지에 달한다. 그들의 숙달 훈련은 훌륭하게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p.303. 반드시 모순 상극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행위자(로서의 나)는 방관자로서의 나의 구속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p.304. 그들이 습득하는 것은 무한이 아니고, 유한한 미를 명료하게 방해받지 않고 지각하는 것인데, 혹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꼭 알맞은 정도의 노력을 할 수가 있도록, 수단과 목적을 조화시키는 일이다.

p.305. 미국인은 ‘보는 나’를 자기 안에 있는 이성적 원리로 간주하고 위기에 임해서도 빈틈없이 이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행동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데 반하여, 일본인은 영혼의 삼매경에 몰입하여 자기 감시가 부과하는 제약을 잊을 때 지금까지 목둘레에 매여 있던 무거운 맷돌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문화는 그들의 영혼에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귀가 따갑게 들려준다.

p.306. 죽은 자는 이제 온恩을 갚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는 자유롭다. 따라서 ‘나는 죽은 셈치고 산다’는 표현은 모순 상극으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을 의미한다.
 
p.307. 서구인과 동양인의 심리적 차이를 실로 명료하게 엿볼 수 있는 것은 미국인이 양심을 갖지 않은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행에 당연히 수반되는 죄의식을 이미 느끼지 않게 된 인간을 말하는 것인데 비하여, 일본이 동일한 표현(무심, 무념 무상 등)을 사용할 때에는 이미 굳어지지 않고 방해받지 않게 된 인간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악인의 뜻이고, 일본에서는 선인, 즉 수행을 쌓은 인간,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p.308. 그는 ‘숙달’의 수행을 쌓아 ‘하지’의 자기 감시를 배제하려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육관’은 장애가 제거된다. 그것을 자의식과 모순 상극으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이다.

p.310. 일본의 생활 곡선은 미국의 생활 곡선과 정반대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저변이 얕은 큰 U자형 곡선으로 갓난아이와 노인에게 최대의 자유와 제멋대로 구는 것이 허락된다.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바로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자의대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최저선에 달한다. 이 최저선은 장년기를 통하여 몇 십 년 계속되는데, 그 후 곡선은 다시 점차로 상승하여 60세가 지나면 유아와 거의 마찬가지로 수치나 외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p.311. 그들이 아이를 원하는 첫 번째 이유는 미국의 부모들이 그런 것처럼 아이를 사랑하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인이 아이를 바라는 것은 그 이유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훨씬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일본인이 아이를 원하는 것은 단지 정서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혈통을 잇는 데 있다.

p.312. 뿌리 깊은 연속성의 의식 때문에 완전히 성인이 된 자식이 아버지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 미국에 비해 훨씬 오래 계속되어도 서구 여러 나라에서와 같이 부끄러운 일, 면목없는 일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는다.

p.314. 일본에서 갓난아이를 사지를 벌린 듯한 자세로 업는 풍습은 태평양 여러 섬, 그 밖의 곳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갓난아이를 숄로 어깨에 걸어 데리고 다니는 풍습과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아이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데리고 다닌 갓난아이는 일본인이 그렇듯이 자라게 되면 어디에서나 어떤 자세로도 잘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경향이 있다.

p.318.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꾸짖을 때 쓰는 ‘위험해’라는 말과 ‘안돼’라는 말 속에는 이와 같은 감정이 들어 있다. 세 번째로 늘 쓰인 훈계의 말은 ‘더럽다’는 말이다. 일본의 집은 정연하게 정돈되고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어린아이는 그것을 존중하도로 배운다.

p.321. (어린 시절 놀림을 당하는 경험은) 성인이 된 일본인들에게 현저하게 나타나는 조소와 배척에 대한 공포심을 기르는 비옥한 토양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조롱받고 있다는 의식과 함께 일체의 안전한 것, 익숙해져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아이들의 무서운 공포의 하나가 된다. 어른이 된 뒤 타인에게 조롱을 당하게 될 경우에도 이 유아기의 공포가 어디엔가 남아 있게 된다.

 p.325.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논리는 어른이 된 후에도 일본인의 생활 속에서 크게 존중되는 논리이다.

p.326. 일본의 어린아이가 받는 가장 엄한 벌은 뜸이다.p.327. 사내아이는 큰 대자로 몸을 벌리고 자도 괜찮지만 여자아이는 조심성 있고 품위 있게 기자처럼 몸을 구부리고 자야 했다. 그것은 ‘자제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p.330. “아이들은 무엇이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한다. 그러나 점점 자람에 따라, 그들은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전부 말할 수는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누구에게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또 자기 자랑도 하지 않게 된다.”

p.331. 어머니들은 아이들은 안전한 절에서 놀게 하기를 좋아한다. 어린아이의 경험 속에는 신을 두려워한다거나 혹은 공정한 감시자로서의 신들을 만족시키려고 자기 행위를 규제하는 일은 없다. 어린이들은 신의 은총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신들은 권위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p.335. 계집아이의 유년기는 사내아이의 생활에서 배척됨으로써 끝난다. 앞으로 몇 년의 세월 동안 그애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오로지 자중에 자중을 거듭하는 것 말고는 없다.

p.338. 1년이 지나 고참이 된 병사는 지난 1년간의 쌓이고 쌓였던 갖가지 원한을 이번에는 신참병을 괴롭힘으로써 해소하고, 여러 가지 교묘한 방법을 만들어 그들을 ‘단련’시킨다. 

p.339. 일본의 재건 과정에서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지도자들은 국민들이 청춘시절을 보내는 여러 학교나 군대에서의 학대와 소년들을 괴롭히는 습관에 특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p.342. 가정교육은 습관이지 규칙은 아니다. 유아기에 익히는 젓가락 사용법이나 방에 들어갈 때의 예의범절도 그렇고, 조금 뒤에 배우게 되는 다도나 안마의 방법도 그렇지만 모든 동작은 글자 그대로 어른의 직접 지도하에 익숙하게 될 때까지 반복 실습을 통해 익혀진다.
p.342. 할머니는 조용히 차분하게, 모든 사람이 할머니의 생각대로 행동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나무라거나 반박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할머니의 솜털같이 부드러우면서도 아주 강인한 기대가 항상 그녀의 가족을 그녀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p.347. 일본인은 서구에서 말하는 ‘순결한 부인’ 또는 ‘음탕한 여자’와 같이 한번 낙인이 찍히면 변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라 그때그때의 상황에 적합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p.348. 종래 모든 서구인이 묘사한 일본인의 성격적 모순은 일본인이 아이를 훈련하는 방법을 보면 납득이 간다. 그것은 일본인의 인생관에 그 어떤 측면도 무시할 수가 없는 이원성을 가져다준다. 그들은 유아기의 특권과 마음 편하던 경험에 의하여 그 후 여러 가지 훈련을 받은 뒤에도 다시금 ‘부끄러움을 몰랐던’때의 편한 생활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미래에 천국을 그릴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과거에 천국을 가지고 있다.

p.350. 아이는 점차로 많은 개인적 만족을 포기할 것을 요구 당하는데 약속되는 보상은 ‘세상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고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요, 벌은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어린아이를 훈련하는 데 대부분의 문화가 의지하는 강제력이긴 하지만, 일본에서는 달리 유례가 없을 정도로 중요시된다.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는, 이미 부모가 아이를 밖에 내다 버리겠다고 협박했을 때, 아이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의 일생을 통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배척되는 것은 폭력보다 무서운 것이다.

p.351. 사람들은 거울 속에서 혼의 문인 자기 자신의 눈을 본다. 그리고 이것이 '부끄러움 없는 자아'로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p.352. 미국인은 목적 달성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자유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생활 체험이 다른 일본인은 그것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다고 여겨 왔다. 그들은 자제에 의하여 자아를 한층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그들 도덕률의 중요한 신조의 하나로 여겼다.

p.353~354. 서구인을 놀라게 하는 일본 남성의 행동적 모순은 그들의 어린 시절 훈육의 불연속성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덧칠’을 한 다음에도 그들의 의식 속에는 그들이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작은 신이었던 시절, 마음대로 투정을 부릴 수 있었던 시절, 어떤 소망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의 깊은 흔적이 남아 있다.

p.354. 성격의 이원성은 긴장을 수반한다. 그리하여 이 긴장에 대해 일본인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반응을 나타내지만, 사실 그것은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졌던 유아기의 경험과 그 후 생활의 안녕을 약속하는 속박을 융화시키는 동일한 중요 문제에 대해, 각자가 제각기 자기 나름으로 반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p.356~357. 스스로를 존중하는(자중하는) 인간은 ‘선’이냐 ‘악’이냐가 아니라,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이 되느냐 ‘기대에 어긋나는 인간’이 되느냐는 것을 목표로 삼아 진로를 정하며, 세상사람 일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포기한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부끄러움(하지)을 알고’ 한없이 신중하고도 훌륭한 인간이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가정에, 자기 마을에, 또한 자기 나라에 명예를 가져오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하여 빚어지는 긴장은 대단히 커서, 일본을 동양의 지도자이자 세계의 일대 강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고상한 대망으로 나타난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생활양식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러왔다. 그들은 미국인이 공기처럼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단순한 자유를 스스로 거부해왔다.

p.358. 자유의 정신이 나의 문을 노크하였다.p.359. 돌의 배치는 연못, 건물, 나무들과의 관계를 신중하게 고려하여 정해진다.
p.360. 칼을 찬 인간에게 칼이 녹슬지 않고 번쩍이게 할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각자 자기의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일본적인 의미에서 칼이란 공격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적이며 훌륭히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비유이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시대에서 이 덕은 가장 훌륭한 평형의 역할을 한다.
p.361. 칼은 더욱 자유롭고 더욱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상징인 것이다.

p.368. 사회는 안쪽 구석을 핀으로 눌러 놓은 삼각형이다. 달리 말하자면 삼각형은 책상 위에 있으며 누구나 볼 수가 있다. 핀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때는 삼각형이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기울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그 정체를 들어 내지 않는 축을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중략- 일본인은 그들의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사리나 부정에 대해 반항하기는 하나 결코 혁명가는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세계의 조직을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찍이 메이지 시대에 행한 것같이 제도 그 자체에는 조금도 비난을 퍼붓지 않고도 가장 철저한 변혁을 실현할 수가 있었다.

p.369.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미국인 독자들이 보기에는 거의 무의미하게 보이지만, 일본이 서양적 이데올로기 위에 서기보다는 과거와의 연속성에 기초하는 편이 훨씬 쉽게 시민적 자유의 범위를 확장하고 국민 복지를 이룩할 수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p.372. 일본인은 어떤 일정한 행동 방침을 취해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지면 ‘잘못’을 범하였다고 판단한다. 그의 어떤 행동이 실패로 끝나면 실패한 주장을 버린다. 언제까지나 집요하게 실패로 끝난 주장을 고수하는 성질은 아니다. 일본인은 “배꼽을 깨물어도 아무 소용없다”고 말한다.p.376. 러시아에 대한 승리와 필리핀에서의 미국에 대한 승리는 모욕이 개재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일본인 행동의 가장 극단적인 양면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p.374. 그들의 윤리는 사람은 자기 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모든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하며, 어떤 과오의 당연한 결과에 의해 그 행위의 잘못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p.382. 어느 외국인도 자기와 같은 습관이나 가정을 가지지 않는 국민에게 자기와 같은 생각이나 생활 방식을 따르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p.383. 미국이 할 수 없는 것-어느 나라에서도 할 수 없는 것-은 명령으로 민주적 일본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러한 방법은 어떤 피지배국에서도 지금까지 성공을 거둔 일이 없다. 어느 외국인도 자기와 같은 습성과 가정을 가지지 않은 국민에게 자기와 같은 생활방식을 따르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p.384.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구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무장된 진영으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이다.

p.388. 사람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합리적으로 운영해 오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민족이 뛰어나다거나 못났다거나 하는 등의 평가는 무용지물이다. 인류학에서는 모든 사람의 가치가 똑 같다. 다만 각기 태어난 장소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여러 조건을 가장 합리적, 경제적, 논리적으로 영위하고 있고 그것을 문화라고 한다.

p.389. 인류학에서는 어느 정도의 문명은 필요하지만 그 문명이 사람을 교활하게 만든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중략-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시간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가졌기 때문에 시간을, 미래를, 내세를, 종교를, 영혼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었다.
p.396.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그렇게 예의바르고 착하고 겸손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일본 사람들 속에 무서운 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 스스로도 자신들은 앞에 내세우는 얼굴과 속마음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p.398. 혹자들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1대1로 있으면 한국인이 훨씬 우세하지만 집단으로 있을 때는 그 반대이다”라는 말을 한다.

p.399. 예를 들어 일본이나 우리나라에는 동네마다 그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있었는데 일본은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호신이 없었던 면, 군, 읍에까지 새로운 수호신을 만들었다. 그래서 신사를 만들어 정신적인 통일을 했는데 우리는 같은 유신이라는 말을 쓰면서 그런 수호신 같은 것들을 미신이라고 다 철거했다. 그러나 일본은 수천년 동안 내려온 토착신앙을 기초로 신토이즘을 만들고, 서양에서 교육제도를 받아들여 교육칙력을 만들었고, 그 교육칙령을 쓴 사람이 <해석서>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이퇴계 선생의 사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바로 메이지유신 시대의 교육헌장이었다. 우리는 그 백년 후에 이퇴계 선생 사상 근처에도 가지 못한 국적 불명의 교육헌장을 만든다.일본은 거기서부터 우리와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일본보다 백년 늦게 같은 유신이라는 말을 썼지만 우리의 토착 신앙을 다 때려 부수었고, 한문권에서 이탈하고, 차의 세계에서 이탈한다.

p.400. 베네딕트는 이것을 기초로 서양 문화는 길트 문화라고 하고 일본, 동양은 셰임 문화라고 했다. 서양 사람들에게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양심’이다. -중략-그러나 동양 사람들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에, 행동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이목이다.

401.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일본의 일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일본의 종합적인 면을 파악하는 데는 불충분한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서양인의 한계일 것이다.

402. 근대 사회와 봉건 사회의 차이점은 봉건 사회 하에서는 주어진 신분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는, 즉 생득 지위였지만 근대 사회에서는 자신의 출신 배경이 어떠하든 노력 여하에 따라 지위를 성취할 수 있는, 즉 성취지위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생득 지위가 우세하고 그 대표적인 예가 재벌들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오랜 전, 이십대 때, 일본 청년을 알게 되었다. 선박회사에서 일을 하던 엔지니어였다. 계약기간이 끝나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관광을 도와주라는 아저씨뻘 되는 이의 부탁으로 그를 매주 만나며, 인사동이나 고궁을 함께 보았다. 의사소통이 어렵지 않을 만큼, 우리말 실력이 좋았음에도, 그는 새로운 말을 들으면, 메모를 하고, 내말을 따라 발음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좋았다. 열정적이지만, 조용하고, 다감하기 그지없던 그와 두 달 정도를 만나며, 나도 그에게 아주 간단한 인사말을 배워보기도 했다. 마지막 날, 나는 그에게 작별의 선물로 부채를 사서 주었다. 그 후, 나는 그를 잊어 버렸다. 두 달 여가 지난 후, 아저씨에게 상자를 하나 건네받았는데, 그 속에는 서툴게 쓴 편지와 일본 부채가 4개나 들어 있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계절이 바뀔 때 마다 다른 것을 들라는 뜻이라고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난히 혼혈인 듯, 피부색이 하얗고, 키가 크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는 이름도 아스라이 잊혀진 그는 한국을 참 좋아했다. 여러 정보의 도구들 가운데, 문자로 전해지는 책은 때로 아주 유익하지만, 때로 위험하다, 한 사람의 편향된 시선을 300여 페이지에 걸쳐 쫓다 보면 독자가 그대로 이입되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십여 년 전 그가 주었던 그 부채는 내가 그에게 먼저 주었던, 부채에 대한 기리였을까? 한 번도 내가 그에게 식사를 대접하지 못하게 하고, (물론 나보다 나이가 많기는 했다) 차 한 잔조차도 그가 대접하려 애썼던 것들이 일본에 뿌리 깊게 내린 그네들의 사고방식에서 오는 행동의 결과 였을까. 이 책을 덮을 즈음 그가 내게 베푼 호의를 다시 가늠해보고,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서양인의 관점에서 쓰인 책이다. 문화권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일본을 해부하기 위해 쓰여진 책, 거기에는 그들만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재단된 점이 엿보인다.

♣마치며

이 책은 교양과목 시간에 토론에 부쳐졌던 책이다. 그때 논란의 쟁점이 되었던 것은 과연 경험, 즉 그녀가 방문을 해 보지 않고 쓴 것이 독자의 이해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느냐 였다. 그 당시, 미디어 가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가 의지해서 썼을 그것들이 과연 얼마나 일본인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기여했을가란 의문이었다. 때문에 그녀가 일본을 방문하지 않고 썼기 때문에 더 학문적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물론 그녀의 관찰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반면에 이 책의 여러 대목이 물위에 뜬 기름처럼 이입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학문은 논리적이어야겠지만, 사실을 외면하고, 추측에 기저하여 진실인양 포장해 전해져서는 안 된다. 한권의 평전을 쓰기 위해서도 인물의 생가를 방문하고, 고인의 자취를 더듬는데, 한 나라의 문화를 논하면서 그 나라를 방문하지도 않고 그저 문헌이나 외부에 사는 그 나라 사람을 취재하는 것에 기대어 책을 쓴다는 것은 역부족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를 살펴서 책을 썼다면 무어라 했을지 상상해 본다. 하기야 그녀가 저술을 했던 그 당시보다도 훨씬 거슬러 온 지금, 서양과 다른 문화를 찾아내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들로서 이해하기 요령부득이었던 일본을 이만큼이나 풀어냈던 것은 문화 인류학자로서의 그녀의 역량이 우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책은 다름의 차이를 살펴보고 있기도 하지만, 그 다름을 틀리다고 논하고 있는 부분들도 있어, 불편했던 구절도 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책은 일본이라는 요령부득의 나라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그녀만의 목소리로 전달하고 있는 것에 성공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다시 보는 구절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범죄의 유혹에 빠지고 만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히 훈련되지만 또한 반항적이다.

p.32.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따라서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p.124. 남에게 빚이 있는 인간은 극도로 화를 잘 내는 법인데, 일본인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 채무가 일본인에게 갖가지 큰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이글로 미루어 본다면, 우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그들의 태도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p.137. 아무리 착잡한 감정을 가졌더라도 온진恩人이 실제로 자기 자신인 한, 즉 그 사람이 ‘나의’ 계층적 조직 속에 일정한 위치를 점하는 사람이든지, 혹은 바람 부는 날 모자를 집어 준 경우처럼 나 자신도 아마 그렇게 하였으리라 상상되는 일이든지, 혹은 나를 숭배하는 사람일 경우에 한해서는 일본인은 안심하고 온을 입는다. 그런데 일단 이런 조건에 해당되지 않으면 그 온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 된다. 지워진 부채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불쾌하게 느끼는 것이 훌륭한 태도이다.

 

p.147. 일본인은 양에서나 기한에서나 무제한적인 온에 대한 보답과, 받은 분량과 똑같이 갚고 특정한 기한에 끝나는 보답을, 각기 다른 규익을 가진 별개의 범주로 나누고 있다. 채무에 대한 한없는 변제는 ‘기무義務’라고 불리는데, 이에 관해서 일본인은, “받은 온의 만분의 일도 결코 갚을 수 없다”고 말한다.

p.150. 일본 현대 영화 가운데 한 어머니가 어느 마을 학교 교사인 결혼한 아들의 돈을 훔치는 장면이 있다. 이 돈은 이 교사가 어린 여학생, 즉 흉년으로 굶어 죽게 된 그녀의 부모가 자기 딸을 사창가에 팔려는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모금한 돈이었다. 교사의 어머니는 자신이 상당한 요리집을 경영하여 조금도 돈에 궁색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들로부터 이 돈을 훔친다. 아들은 어머니가 돈을 훔친 것을 알지만 자신이 그 책임을 뒤집어쓴다. 그의 아내는 진상을 알고 돈을 잃어버린데 대한 모든 책임을 지는 유서를 남기고 어린아이와 함께 자살한다.

p.165. 일본인이 잘 쓰는 말에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란 기무를 갚아야 하는 것처럼 기리를 갚아야 한다. 그러나 기리는 기무와는 종류가 다른 일련의 의무이다. 영어에서는 이것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학자가 세계 문화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별난 도덕적 의무의 범주에서도 가장 드문 것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특히 일본적인 것이다.

한국인이 보기에도 별난 것만은 틀림없다. 그 기준의 형평성이나 일관성이 의심되는 바가 있는 것이다.

p.175. 일본인은 어떤 사람이 기리를 갚을 수 없을 때, 그 사람은 파산하였다고 여긴다.

우리나라처럼 신세를 졌을 때 그것을 마음으로 고마워하며, 보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무가 지나쳐서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 도가 지나치다 아니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유형을 찾아본다면, 십시일반의 성격을 띠던 미풍양속의 부조금이나 축의금도 점점 같은 의미로 변질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

p.180. 타인의 호의에 반응하는 경우와 타인의 경멸이나 악의에 반발하는 경우의 행동이 왜 하나의 덕으로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일본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훌륭한 사람은 모욕에 대해서도 그가 받은 은혜만큼이나 강하게 느낀다. 어느 쪽도 그것에 보답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위이다. 그들은 서구인처럼 이 두 가지를 구별하여 한쪽은 침해 행위, 다른 한쪽은 비침해 행위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p.255. 일본인의 견해에 따르면 강자란 개인적 행복을 도외시하고 기무를 완수하는 인간이다. 성격의 강함은 반항함으로써가 아니라 복종함으로써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중략- 결혼 생활이 행복하게 영위되고 있을 때라도 아내는 여러 가지 의무의 세계에서 중심에 놓여지는 일은 없다.

수치를 견디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하면서 강자에게 복종하는 것,

p.267. 마코토는 사리를 추구하지 않는 인간을 칭찬하는 말로서 끊임없이 사용된다. 이 사실은 일본인의 윤리가 이윤의 추구를 매우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p.273. 참다운 죄의 문화가 내면적인 죄의 자각에 의거하여 선행을 행하는 데 비해, 참다운 수치의 문화는 외면적 강제력에 의거하여 선행을 한다. 수치는 타인의 비평에 대한 반응이다. 오히려 반대로 나쁜 행위가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는 한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고백은 도리어 스스로 고민을 자초하는 일로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수치의 문화’에서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론, 신에 대해서조차도 고백한다는 습관은 없다. 행운을 기원하는 의식은 있으나 속죄 의식은 없다.

일본인은 이 장벽을 ‘보는 나’, ‘방해하는 나’라고 부른다. 그리고 특별한 훈련에 의해 이 장벽이 제거되었을 때에 달인은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전혀 갖지 않게 된다. 회로는 열려있고 전류는 자유로이 흐른다.

 

p.290. 일본은 불교국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윤회와 열반사상이 국민의 불교적 신앙의 일부분이 된 일이 없다.

340. 여자아이들이 존중해야 할 처세술은 공공연히 자기 주장을 할 특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p.347. 일본인은 서구에서 말하는 ‘순결한 부인’ 또는 ‘음탕한 여자’와 같이 한번 낙인이 찍히면 변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라 그때그때의 상황에 적합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p.368. 사회는 안쪽 구석을 핀으로 눌러 놓은 삼각형이다. 달리 말하자면 삼각형은 책상 위에 있으며 누구나 볼 수가 있다. 핀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때는 삼각형이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기울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그 정체를 들어 내지 않는 축을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p.389. 인류학에서는 어느 정도의 문명은 필요하지만 그 문명이 사람을 교활하게 만든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중략-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시간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가졌기 때문에 시간을, 미래를, 내세를, 종교를, 영혼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었다.p.396.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그렇게 예의바르고 착하고 겸손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일본 사람들 속에 무서운 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 스스로도 자신들은 앞에 내세우는 얼굴과 속마음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끼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인에 대해 가지게 된, 선입감의 대목이다. 동양인은 예를 중시하고.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한다. 일본인에만 국한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401.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일본의 일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일본의 종합적인 면을 파악하는 데는 불충분한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서양인의 한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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