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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5일 04시 52분 등록

5장 파블로 피카소: 신동과 천재

?  어린 시절에는 신동이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거장이 된 피카소와 같은 예술가를 만나려면 200년을 거슬러 올라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불러내야 한다 (250).

 

신동

?  신동들은 10대를 넘기면서 거의 예외 없이 급작스러운 충격을 받는다 (253).

?  이제 그들은 자기 시대의 거장들이나 신동은 아니었지만 그 동안 역량을 쌓아 온 다른 젊은이들과 경쟁할 만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253).

?  이제 그들은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도해 나가야 하고, 이렇게 주도권을 되찾게 되면 지금까지 그들의 경력을 관리해 온 사람들과 여러모로 충돌을 빚게 된다 (253).

n  이거 사실 꼭 신동이 아니더라도 모든 아이들의 문제 아닐까.

 

신동 피카소

?  피카소는 다른 아이들이 a b c를 쓸 때 그림을 그렸다그림은 언제나 그가 말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254).

?  파키소는 인간 세계에 매료되었고 10대에 접어들면서 인간의 모습과 인간의 폭넓은 감정을 유별나게 강조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55).

?  피카소의 조숙함은 시각- 공간 영역, 신체-운동 영역, 대인 영역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255).

?  피카소는 이 같은 여러 영역에 골고루 재주가 있었고 이들 재능에 두루 의존하여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255).

?  이 유품 (피카도르: 피카소의 첫 작품)을 통해 우리는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그 모델의 모든 형태적 특성을 마스터하려는 피카소의 끈질긴 노력만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집요한 실험 정신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피카소는 다양한 화면 구성을 시도하고 똑 같은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그렸으며, 호소력 짙은 극적인 감정을 화폭에 담았다 (258).

?  피카소의 실험적인 성향은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기질, 미술 소재로 작업하는 일에서 느끼는 순수한 즐거움, 점점 커지는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좀 더 불행한 일이지만 미술 소재를 다루는 데는 익숙하고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지만 표준적인 학과 공부를 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는 능력 간의 불균형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259).

?  모든 기록을 통해 보건대, 피카소는 유아 시절부터 자신이 몸소 겪은 사건이나 사람의 외양을 생생하게 기억할 만큼 감수성이 아주 예민했다 (260).

?  흔히들 피카소는 힘들이지 않고 주변의 다른 화가들을 능가한 그림 신동이었다고 얘기한다. 최근에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피카소의 전기 작가 존 리처드슨은 이런 통념을 공박했다. 그는 피카소가 일찍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인 사실은 인정했지만 비범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느꼈고, 화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많이 노력해야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262).

?  마드리드에서 불행했던 피카소는 17살에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좀 더 넓은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264).

?  엘스 쿠아트레 가츠 (고양이 네 마리)’ 라는 선술집에 모이던 테르툴리아라는 모임의 주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지치지 않고 일을 했으며, 잡지 <아르테 호벤>의 삽화를 도맡아 그렸다. 그는 정치와 예술 영역의 사상을 접하고 이를 기꺼이 흡수했는데, 아방가르드와 무정부주의 정서는 재능은 있지만 소외감을 느끼고 있던 젊은 예술가인 피카소의 정서와 잘 맞았다 (265).

?  바르셀로나 체류 기간에 피카소의 천부적인 재능은 틀이 잡히고 더욱 깊어졌다. 한편으로 그는 독학을 통해옛 거장들의 작품을 사숙했다 (265).

 

파리의 젊은 예술가

?  피카소는 다양한 심미적 모델을 재빠르게 탐구하고 직관적으로 모방하면서 자기에게 알맞은 측면을 손쉽게 골라냈다 (267).

?  스무 살에 이른 피카소는 더 이상 모방에 불과한 작품은 그리지 않았다. 실제로 바르셀로나를 떠난 지 일년 동안 그는 그 나름의 독특한 색채가 있는 작품을 창조했다. 솔직 담백하면서도 냉엄하고 또한 페이소스가 깔린 그의 작품은 쉽게 눈에 띄었다 (267).

?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는 외국인으로서 그는 세계주의 풍조로 가득한 파리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혼란을 겪었다 (267).

?  처음엔 작품을 팔 수가 없어서 가난하게 살았고 심지어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268).

?  피카소가 처음 인정을 받은 시기를 청색 시대라 부른다. 이 시기에 그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을 주로 그렸다 (269).

n  이를 두고 비평가들은 끔찍한 아름다움이라 부르거나 메마른 슬픔혹은 삶에 대한 비관적인 느낌이라 불렀다.

?  피카소는 상황이 조금 나아지자 처음으로 진지하게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카소의 장밋빛 시대가 이어졌다. … 피카소의 주된 주제는 이제 절대 빈곤에서 보헤미안적 예술가의 삶으로 이동했다 (269).

?  이 두 시기는 모두 피카소가 아직 진정으로 혁신적인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 나름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낸 첫 번째 성숙기로 여길 수 있다 (269).

?  피카소는 긴 생애 내내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무척 어려움을 겪었다. 대개의 경우는 죽음을 아예 부정하려고 했다 (271).

?  피카소의 경우는 이런 반응이 폭력과 죽음 그리고 재난에 대한 매혹과 결합되어 있었다 (271).

?  어찌 됐든 피카소는 2, 3년 후에 여러 면에서 젊은 시절의 최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대작을 그린다. <인생>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청색 시대의 작품은 어느 화가의 작업실이 배경이다 (271).

?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인생>은 카사헤마스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피카소의 노력과 그에 대한 혼란스러운 반응을 나타낸다. 좀 더 넓게 말하면, 이 작품은 죽음, 예를 들면 사랑하는 누이를 잃어버린 일에 대한 피카소의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예술적 생산성과 불모성에 대한 느낌과 그가 평생 동안 드러내놓고 모호한 태도를 보인 가족이나 여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감정도 이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273).

?  여러 밑그림을 조사하고 X 선 사진을 찍어 최종작을 연구한 결과 피카소는 <인생>을 준비하면서 꽤 많은 실험을 했음이 밝혀졌다 (275).

?  피카소를 비롯한 위대한 예술가들이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창조한 대표작들은 개인적 의미가 깊이 담긴 사건과 정서를 보편적인 주제와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n  결국 대중의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말인데저자가 말하는 자신이 속한 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것만큼이나 예술가들 현존의 승패를 가르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 같다.

 

<아비뇽의 처녀들>: 실험적인 양식을 향해서

?  1905년 무렵, 피카소는 이미 파리에서 비교적 인정받는 화가가 되었고… (278).

?  피카소에겐 현재의 영예에 만족하는 것을 막는 무언가가, 아마도 어린 시절에 형식을 해체하도록 했던 것과 동일한 충동일 터인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화가라는 전문가로서나 사사로운 개인으로서나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에 맞서 새로운 경지에 오르고자 했으며, 전례가 없는 깊이에 도달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와 같은 가차 없는 도전 의지는 이 책에서 다루는 창조적인 거인들 모두의 특징이며, 그들을 그들답게 만드는 특성이다 (279).

?  그 누구도 1907년작 <아비뇽의 처녀들>의 충격에 대비할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자, 미술사에서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간주한다. 피카소의 여타 대표작과 마찬가지로 <아비뇽의 처녀들> 역시 이전 시기의 작품을 결산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280).

?  피카소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적 영향을 미친 요소를 하나만 고른다면 (이 점에선 피카소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띤 동시대 화가였던 마티스와 브라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의 직계 선배 세잔의 작품이었다 (282).

?  세잔은 회화를 형태 위주의 작업으로 여겼다. … 그는 자연에서 우리는 원통과 구, 원뿔 형태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82).

?  피카소는 수십 년 후에 브라사이에게 내가 세잔을 아냐고요?” 그는 나의 유일한 스승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282).

?  최근에 피카소 연구에 엄청난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생겼다. 피카소가 대략 1894년부터 1967년까지 보관하던 175권의 드로잉 노트가 발견된 것이다. 이 기막힌 발견물에는 <아비뇽의 처녀들>의 스케치만 그린 노트 8권도 포함되어 있다 (283).

?  내 작품은 일기와 같다이런 점에서 이들 드로잉 노트의 첫 번째 대중 전시회를 나는 노트이다라고 부른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284).

?  그림의 주제와 메시지는 애매하지만, 분명 이 여인들의 황량한 삶을 우의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원래 제목은 <아비뇽의 사창가>였다 (284).

?  이 작품은 그 때까지 피카소가 은밀하게 실험해 왔던 다양한 스타일의 절정을 보여준다. 다중 시점 (multiple view), 둥근 형태와 모난 형태의 충돌, 부드러운 색조와 거친 색조의 충돌 등 피카소는 마치 한 화폭에 얼마나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듯했다 (286).

?  그림은 자유다. 도약하면 밧줄을 놓쳐 추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이 부러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고 무슨 좋은 점이 있겠는가? 도약하지 않는 것 뿐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일깨워야 한다. 그들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미지를 창조해야 한다.” 피카소는 대개는 적대적이었던 주변 사람들의 반응으로 인해 길을 잃지는 않았어도 쓰라린 상처를 받았는지 어디론가 그림을 조용히 치워버리고 몇 년간은 공개하지 않았다 (287).

?  <아비뇽의 처녀들>이 이룬 성과와 당대의 미술사적 맥락에서 차지한 독특한 지위는 결국 널리 인정받았다. … 좀 더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장이 이 작품을 걸작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287).

?  하지만 피카소는 결코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단지 입체주의라는 더 큰 게임으로 향하는 도정의 중간 지점에 불과했을 터이다 (288).

 

입체주의를 낳은 동반자의 관계

?  피카소와 브라크는 공동 작업을 하면서 입체주의라는 새로운 미술 양식을 창안하고 탐구했다 (289).

?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에 브라크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몽마르트에 살면서 거의 매일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 피카소와 나는 당시 누구도 말하지 않던 일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우리들한테는 참으로 즐거웠던 일에 관해 얘기를 주고 받았다. … 같은 밧줄에 몸을 묶고 함께 산에 오르는 느낌이었다. … 서로의 얘기에 푹 빠져 있었다 (290).”

?  우리가 입체주의를 창시했을 때는 입체주의를 창안하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그저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293).”

?  이처럼 미리 준비된상황이었고 입체주의의 등장이 거의 필연적이었음에도, 학자들은 이 운동의 성격과 의의에 관해 좀처럼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293).

?  그는 미술사 전반을 검토하면서 특히 고전주의 시기의 화풍을 자기 것으로 소화했고, 결코 입체주의라 할 수 없는 양식을 새로 시도했다. 1915년 혹은 1916년 무렵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시대는 실질적으로 끝난 셈이었다 (300).

?  미술 비평가들은 이내 입체주의의 중요성을 알아챘지만, 일반 대중은 이 새로운 시도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 소개된 지 1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입체주의는 여전히 현대 미술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예술적 업적의 정점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수수께끼 같은 호기심의 대상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303).

?  입체주의 (및 이기의 다른 예술 운동)의 등장과 더불어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는데, 전문가들이 높이 평가하는 작품들이 폭넓은 대중들로부터는 막연한 이유로 외면을 받은 것이다 (304).

?  20세기 들어 대중적인 평가의 장과 아방가르드적인 평가의 장은 점차 그 간격이 넓어졌다 (304).

 

입체주의 이후: 유명 인사로서의 삶

?  피카소의 생애에서 이 무렵은 주로 고전주의 시기 혹은 신고전주의 시기라 불린다. 신중하게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작품 형식과 양식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신고전주의적 작품에도 피카소의 고유한 스타일은 명백히 각인되었다 (306).

?  티모시 힐턴은 피카소의 다채로운 연애 경험, 미술 양식과 매체에 관한 다양한 실험, 보헤미안적인 삶과 부르주아적인 삶이 혼융된 생활 등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영감이 사라지는 현상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시도였다고 보았다 (308).

?  이 시기에 피카소의 작품이 질적으로 쇠퇴했는지 여부는 판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더욱 비극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훨씬 잔인한 장면을 그린 것만은 분명하다. … 피카소는 이제 여자의 모습을 잔혹하게 그렸다 (308).

 

피카소 스스로 걸작으로 인정한 작품 <게르니카>

?  특히 중년 이후에는 피카소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성향이 작품의 동기가 되었다 (310).

?  1930년대 중반이 되자 피카소의 삶에 혼재해 있던 갈등과 긴장이 작품에 그대로 드러났다 (310).

?  실제로 피카소는 이 무렵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고 말하곤 했다. 허나 공정한 관찰자라면 피카소의 고통은 그 태반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말해야 옳다 (310).

?  인류의 회화사에서 <게르니카>만큼 한 화가의 전모를 드러내는 특징적인작품은 없다 (313).

?  “… 예술가의 작품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가 언제, 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작업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313).”

?  <게르니카>는 미술학도뿐만 아니라 창조성 연구자에게도 한결 같은 관심의 대상이다. 다른 예술가의 여느 대표작과 마찬가지로 창조자의 내면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향에 의존한 작품인 까닭이다. <게르니카>는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의미 있는 작품이었지만, 동시에 민족적 의의와 세계적인 의의를 모두 지닌 작품이었다. 고전적인 구도와 어린아이 같은 이미지를 한꺼번에 드러낸 작품으로서 천진한 아이의 눈에 비친 혼돈의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다. 피카소는 모든 갈등, 스페인 내전으로 폭발한 사회적 갈등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폭력과 성, 예술 창조에 관한 갈등까지도 화폭에 담아냈다 (321).

?  실상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대표작 중의 대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불멸의 위치에 오른 작품이라고 자신 있게 단언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322).

 

노년기에 이른 신동

?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완성한 것은 그의 나이 쉰다섯 살 때의 일이다 (323).

?  피카소의 혼란스러운 사생활과 지속적인 예술적 다산성의 관계는 논평할 만한 가치가 있다. 피카소의 삶은 끊임없이 새로운 가정과 연인, 아이들 그리고 여름 휴양지를 찾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꾸준하게 새로운 양식과 대표작을 추구하는 과정이었다 (324).

?  그럼에도 피카소 사후에 나온 여러 얘기들은 피카소가 참으로 이기적이고 잔혹한 인물이었음을 새삼 들추어냈다 (327).

?  피카소는 나이가 다소 많은 동료 화가 마티스에 대해서만 우정에 값하는 예의를 보였고 평등한 관계를 인정했다 (329).

?  그는 결국 마티스밖에 없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마티스가 사망했을 때는 자신이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세기의 거장이라고 느꼈음에 틀림없다 (330).

?  그는 예술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세속적인 관심사보다 자신의 작품과 생존을 우선시했다 (331).

?  이 때 (브라크와의 공동 작업시기) 피카소는 이전이든 이후든 비근한 사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자아와 개성을 억눌렀고 덕분에 새로운 전망을 열 수가 있었다. 훗날 그는 이 무렵을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회상했다 (332).

 

6장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음악가이자 정치가

예술 창조의 정치적 측면

?  극소수의 예술가만이 별다른 외부자극 없이도 장의 인정을 받을 만큼 운이 좋으며, 소수의 예술가만이 끊임없이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동료를 만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기 최근까지도 자신의 창조물을 대중 앞에서 정당화하는 일은 여성에게 더욱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337).

 

러시아인의 유년기

?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에 심취하기는 했지만 음악 신동은 아니었다. 실상 그는 음악 자체보다는 회화나 연극에 더 흥미를 느낀 아이였다 (339).

?  그저 정규 교육에 흥미가 없었을 뿐이고 평생 동안 스스로 배워 익히는 방식을 선호했을 뿐이다 (340).

 

중심지의 음악

?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교육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좌장격인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만난 일이었다 (341).

?  생애 처음으로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환경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342).

?  무엇을 배우던 신참자가 걸어야 할 길은 하나밖에 없다. 처음에는 학습 과정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지만 이것은 자기만의 표현 방법을 자유롭고 힘차게 추구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342).”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나의 제자이긴 해도, 결국 누구의 추종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엔 음악 재능이 너무나 탁월하고 독창적인 까닭이다 (342).”

?  비평가들에 따르면, 스트라빈스키의 초기 작품은 별볼일 없는 태작에 불과하다. 여느 창조자와 마찬가지로 스트라빈스키 역시 처음엔 선배들의 언어를 열심히 터득했고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도 골고루 사숙했다 (343).

?  스트라빈스키는 디아길레프에 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그는 새롭고 신선한 구상을 단숨에 알아채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기에 몸을 던질 줄 아는 대단하고 신기한 능력을 지녔던 사람이다 (346).”

?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작굑 교사인 나다아 블랑제, 편집자 맥수웰 퍼킨스,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 등이 있는데 이 소수의 예술 양육자들이 20세기의 예술사를 풍요롭게 키워낸 장본인이었다 (346).

?  디아길레프를 만나 발레뤼스 무용단에 동참하기를 부탁받은 일은 스트라빈스키의 인생을 하룻밤 사이에 바꿔놓았다 (348).

?  스트라빈스키는 아버지와도 같던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가르침에 금방 이끌렸듯이, 디아길레프 주변에 모여 잇던 기발한 재주꾼들에게도 곧장 매료되었다 (348).

?  젊은 스트라빈스키는 디아길레프의 활동 모습에서 공동작업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교훈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마감 시한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술적 이상은 각기 다르면서 고집은 무척이나 센 사람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며 타협을 이끌어내는 방법이었다 (348).

 

발레곡의 거장이 되자: <불새> <페트루슈카>

?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가 대가다운 솜씨로 <불새>를 창조하는 모습을 보고 새로운 영역에 진입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350).

?  <페트루슈카>는 훨씬 대담한 작품이었다. 부활절 사육제를 배경으로 전통적인 민요와 도시의 유행가를 혼합시킨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작품이었다. 서정적이고 피카레스크 풍의 정조로 시작해서 비극적인 정조로 막을 내렸으며, <불새>와 달리 이 외로운 인형의 비극에는 천편일률적인 공식이 아니라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 (352).

?  공전의 성공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이례적인 실패를 맛보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아무리 창조성이 뛰어난 혁신가라 해도 길을 잘못 들어설 수가 있는 법이며, 이들은 본래부터 오류 따위는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그 실패를 딛고 재기하는 방식이 보통 예술가와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점을 새삼 일깨우는 사실인 까닭이다 (355).

?  이러한 노력은 대중의 평가 기준에 의해 실패할 수는 있을지언정, 창조자 자신에게는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이 그 작품을 통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으며, 무엇을 성취하고자 했는지, 나아가서 그러한 목표를 미래의 작품 속에 가장 훌륭하게 담아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355).

 

<봄의 제전>: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알린 소리  

?  새 발레는 원시 부족의 제의 장면에서 시작한다. 여름 밤에 벌어지는 제의는 다음 날 첫 햇살이 비출 때까지 이어진다. 의식 무용을 위주로 안무를 구성한 작품인데, 뚜렷한 극적 이야기 없이 원시 부족의 삶을 재현하는 첫 시도가 될 것이다 (356~7).”

?  <봄의 제전>은 거의 모든 요소가 새로웠다. 주제, 민속적 소재, 로에리히와의 공동 작업, 안무를 담당한 니진스키 등이 모두 새로웠고, 무엇보다 작곡가 자신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음악 형식을 창안하고 있었다는 점이 쉽지 않았다 (357).

 

<봄의 제전>: 공연과 그 여파

?  현대의 뛰어난 고전 음악 가운데 <봄의 제전>만큼이나 노골적인 적대에 부딪혔던 작품은 없다 (362).

?  자주 인용되는 목격담은 관객의 반응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전해준다 (362).

?  초기에 나온 평도 대부분 비난 일색이었다 (363).

?  리허설 무대에서 어느 정도 진가를 인정받았고 파리의 예술 감식가들이 기대를 아끼지 않은 작품이었는데 어째서 이처럼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반응이 나온 것일까? (363).

?  우선 원시적인 희생 제의라는 주제에는 심금을 울릴 만한 구석이 없었고, 그런 주제가 부드럽게 완화되기는커녕 너무 노골적으로 묘사되었다. 게다가 그 내용이 구제불능이라 할 정도로 부도덕했다. 그리고 <봄의 제전>의 불협화 화음은 몇 차례 연주된 정도가 아니었다 (364).

?  사람들이 음악이나 발레에 대해 품었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365).

?  이러한 음악상의 충격에 대해 니진스키의 안무 역시 당시의 관객들로서는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365).

?  <봄의 제전>의 첫 공연에 대한 감상 중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친구인 작곡가 라벨의 평이 가장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라벨은 이 작품의 새로움은 관현악법에 있지 않고 음악 전체의 새로운 면모에 있다고 보았다 (366).

?  스트라빈스키 자신은 훗날 이 작품이 혁명적이라는 평가를 부인했다. 그는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약동하는 봄의 기운, 다시 태어나는 자연의 거침 없는 기세였다고 말했다 (366).

?  분명히 이 작품은 여러 이유로 처음 듣는 청중을 소외시킨 면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와 똑 같은 이유로 결국에는 수용되고 인정받았던 것이다. 물론 변한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장이었다 (366).

?  <봄의 제전>에 대한 드뷔시의 평이 정곡을 찌른다. “기상천외하고 난폭한 음악이다. 현대 문명의 이기를 모두 갖춘 원시 음악 같다. 드뷔시이 평을 바꿔 말하면,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을 작곡하면서 원래의 착상을 표현하기 위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조치와 기교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결합을 좋아할지 여부가 아니라, 작품 전체를 수용할지 여부이다 (367).”

?  스트라빈스키 자신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당연하게도 그는 자신의 노력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낙담했다. 다만 디아길레프는 분명히 이런 스캔들에서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만년의 스트라빈스키 역시 이런 논란과 물의에서 나오는 배당 이익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368).

 

시학에서 정치로

?  음악계의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처음부터 스트라빈스키의 특징이었다 (370).

?  대규모의 공연을 해야 하는 예술가라면, 젊은 스트라빈스키처럼 직접적으로 참여하거나 혹은 만년의 스트라빈스키처럼 대리인이나 에이전트, 후원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어찌 됐건 정치적인 복마전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374).

?  어쨌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작업을 하기 원하는 예술가라면, 자신의 권리와 신조를 위해 싸우거나 아니면 더 유력한 인물이나 설득력 있는 주장에 양보하는 수 밖에 없다 (374).

 

<결혼>: 또 다른 종류의 걸작

?  <결혼>은 디아길레프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고,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을 그에게 헌정했다. 스트라빈스키 역시 <결혼>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376).

?  그는 영감으로 멜로디를 구성하는 작곡가가 아니었다. 자신의 음악적 구상을 제대로 표현하고 자신의 마음에 맞는 음악적 효과 및 표현 효과를 내려면 악기 파트와 단편적인 악절을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그에 가장 알맞은 악기 및 기악 앙상블로 실험해 보고 또 고전 음악이나 민요의 단편적인 악절을 차용하여 멜로디를 구성했다 (378).

?  스트라빈스키는 활용 가능한 악기와 음악 자원을 염두에 두고 문학적 주제와 연극적인 등장 인물의 성격 그리고 지배적인 정조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복잡한 작업을 해야 했다 (378~9).

?  다양한 악보 초고는 이런 여러 요소들을 조정하면서 기울였던 변화 시도를 나타낸다 (379).

?  스트라빈스키가 러시아의 발레곡 전토에서 점차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불새>는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테고 <페트루슈카>는 다소 애매하게 여겼을 테지만 <봄의 제전>에 대해서는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봄의 제전>은 파리의 아방가르드 예술에 속하며, 또한 아방가르드 운동에 기여한 작품이었다. 러시아의 민족 음악이나 러시아-유럽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380).

?  이에 반해서 <결혼>은 스트라빈스키가 러시아의 원천으로 회귀한 곡이자 그런 회귀를 신앙 고백한 곡이라 할 수 있다 (380).

?  한 음악 거장이 자기만의 작풍을 발전시켜가는 과정의 한 계기를 상징했다 (380).

 

과거의 음악으로부터 얻은 신선한 자극

?  <결혼>은 스트라빈스키가 현대와 러시아의 과거에 다리를 놓은 작품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내부에 길항하고 있는 이런 두 성향을 조정하려는 시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작곡가 생애 내내 러시아적인 것과 현대성을 동시에 견지했다 (380).

?  하지만 <결혼>을 완성하기 오래 전부터 스트라빈스키는 새로운 기획에 착수하고 있었다. 과거의 고전 음악을 재발견하고 이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재창조하는 기획이었다 (380).

?  언제나 그랬듯이 스트라빈스키는 그 자신에게 최고의 스승이었다. 이제 그는 20여 년 전에 현대의 거장들을 사숙할 때처럼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17, 8세기의 음악을 연구했다 (382).

?  부쿠레슐리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음악사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굳게 마음 먹었다. 당시 그가 매혹되고 영감을 받은 것은 무엇이든 때와 여건을 불문하고 활요하여 스트라빈스키 자신의 색깔이 담긴 새로운 작품으로 창조하기로 굳게 마음 먹은 것이다 (381).”

?  스트라빈스키에 따르면 피카소는 내가 음악 작곡을 맡기로 한 것과 똑 같은 이유로 <풀치넬라>의 무대를 디자인해 달라는 주문을 받아들였다. 그냥 재미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381).”

?  <풀리넬라>는 스트라빈스키가 매우 중대한 시점에 놓여 있을 때 작곡한 작품이다 (381).

?  풀치넬라는 과거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발견이 있었기에 나의 모든 후기 작품이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처음으로 뒤를 돌아다보는 일이긴 했지만, 내 안을 들여다 보는 일이기도 했다 (382).”

?  프랑스 시인 장 콕토와는 <오이디푸스 왕>,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앙드레 지드와는 <페르세포네>를 함께 작업했다 (383).

?  스트라빈스키는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의식이라는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는 작품을 경멸했다.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양식을 창조하기보다는 전통을 확인하고 유지하기를 원했다 (384).

?  엘리엇과 내가 낡은 배를 수리하지 않았는가? 낡은 배를 수리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진정한 임무다. 예술가는 이미 말해진 것을 그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384).”

 

사고와 인격의 성숙

?  스트라빈스키는 과거의 음악에 기반하여 작품을 창조하는 와중에 인격이 성숙하는 체험을 했다. 1926년 파도바에서 열린 성 안토니우스 축일 700주년 행사에 참석했을 때 그는 심원한 종교적 체엄에 맞닥뜨렸다. 이 일이 있은 직후 그는 청년 시절에 저버렸던 바로 그 종교에 다시 귀의했다. 흥미롭고 우연한 일치로서 스트라빈스키가 러시아 정교회에 귀의했을 때 엘리엇 역시 영국 성공회에 몸을 담았다 (385).

?  나는 내가 태어난 세상에서 만난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고 견뎌냈다. 타락한 면이 없지 않은 출판업자나 음악 축제, 음반사, 홍보업계의 오랜 인습 (물로 나 역시도 그런 인습에 빠져 있었지만)을 극복해낸 것이다 (387).”

?  스트라빈스키의 삶은 대중적인 이목과 논란의 중심에 선 저명한 음악가로서의 삶과 지성적이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장인의 삶이 균형을 이루었다. 그 자신은 스스로를 특별한 경우에만 격렬한 디오니소스의 세계에 들어가는 기본적으로 질서와 균형이라는 아폴론적 원리를 체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387).

?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작곡 행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성찰했다. “창조적인 음악가로서 나는 매일매일 짐을 풀 듯이 내 마음 속의 아이디어를 표출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나는 작곡가라는 운명을 타고났고 다른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곡을 했다… (388).”

?  이 작품 (페트루슈카)을 작곡할 때 무엇보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손가락이 알아서 상이한 리듬의 에피소드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388).”

?  피카소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스트라빈스키는 늘 책을 가까이 하는 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중년의 시기에 음악에 관한 일관된 철학을 구상하고 있었다 (389).

?  나의 행동 반경을 좁힐수록 그리고 내 주위에 장애물을 더 많이 쌓아둘수록 나의 자유 역시 더욱 커지고 풍부해진다. 속박을 없애면 그만큼 내가 발휘할 힘도 줄어든다. 더 많은 제한을 부과할수록 우리는 영혼을 구속하는 사슬에서 더 자유로워진다 (390).”

n  직관적으로 동의가 될 듯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  탁월하고 위대한 예술가의 원동력은 대담한 용기이다 (390).”

 

마지막 업적

?  사실 미국의 대중 영화와 연극을 위해 곡을 써달라는 부탁을 몇 차례 받기도 했다 (391).

?  스트라빈스키는 음악 인생의 세 번째 시기를 맞을 만큼 운이 좋았다.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독창성을 잃지 않고 작곡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물론 에너지와 영감은 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두 명의 젊은 예술가와의 만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392).

?  오든은 스트라빈스키의 권유를 받고 <난봉꾼의 행각>의 오페라 제작에 참여했다 (392).

?  <난봉꾼의 행각> 1950년대 초 유럽과 미국에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흔히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 시기의 정점에 이른 작품으로 평가받는 <난봉꾼의 행각>은 그가 영어를 사용해서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고, 또 자신의 예술적 품격을 희생하지 않고도 새로운 청중에 다가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393).

?  스트라빈스키는 오든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시기에 젊고 재능 있는 미국의 지휘자 로버트 크래프트와 첫 대면을 했다 (393).

?  스트라빈스키는 20대에는 디아길레프와 교제하면서 음악적 영감을 얻었고, 중년에는 고전 음악을 사숙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으며, 만년에는 음렬주의 음악을 접하면서 창조력의 원천을 얻었다 (394).

?  스트라빈슼기가 노년에 들어서도 당시에 생존해 있던 다른 어떤 음악가들보다 변함 없는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크래프트가 이러한 다양한 욕구를 채워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97).

?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스트라빈스키는 20세기의 상당 기간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흔적을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그는 광대한 음악적 원천에서 받은 영향을 흡수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 어쩌면 그에겐 피카소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와 변화무쌍한 능력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피카소에겐 부족했던 작업 방향이나 철학의 일관성과 자신의 아이디어를 음악과 언어로써 명확히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398).

?  만년에 이른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과 점점 더 평화롭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398).

?  그는 오든과 크래프트처럼 동시대의 분위기를 호흡하고 동시대의 주위 환경에 관여하도록 그에게 권유하는 젊은이들에게 먼저 협력의 손을 내밀 수 있을만큼 영리했다 (398).

?  피카소는 젊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은 훨씬 강렬했지만, 방향 설정이 잘못되어 주로 젊은 연인들이나 찾아다니면서 가장 혁신적이고 풍요로운 예술적 동향과는 별 접촉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이 책에서 논하는 다른 창조자들보다도 유년기에서 흘러나오는 중요한 어떤 것을 간직할 줄 알았고, 또 만년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열매를 만끽할 수 있었다 (399).

?  스트라빈스키는 우리 시대의 거장 누구 못지않게 늙어가는 현실에 잘 대처했고 부인과 양자크래프트와 함께 개인적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다른 창조자들과 부대끼며 치러야 하는 갈등과 분쟁의 요소를 스스로 단념할 줄도 알았다 (399).

?  그가 사랑했던 도시 베네치아에, 반세기 전에는 언쟁을 벌였지만 이제는 단체를 세우고 예술적 촉매 역할을 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와 화해를 원한다는 듯이 디아길레프 옆에 묻혔다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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