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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일 09시 50분 등록


“난중일기” –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옮김 / 서해문집

 

 

저자에 대하여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찾아보다가 갑자기 ‘열정과 기질’에서 가드너가 기술한 방식으로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정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 기술한 몇 가지 책들을 찾아서 ‘10년 주기론’의 방식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가드너의 ‘10년 주기론’은 창조적 대가를 연구한 결과 그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10년간의 준비를 거쳐 창조성이 성숙하고, 10년간 창조성을 발휘하며, 다음 10년간 그 창조성을 다시 다른 분야로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창제와 23전 23승의 신화는 그의 철저한 준비와 전략 수립에 기반 한 결과이므로 그의 창의력의 발호라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어 적용해 보았는데,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에서도 유사한 패턴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학습과 준비의 시기(결혼 후부터 병과 급제 전까지, 21세-32세)

 

어린 시절 이순신은 재질이 영특하고 활달한 소년이었다. 학문으로도 성공할 수 있을 만큼 똑똑했지만 그는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생각한 바 있어 결혼 직후 22세가 되던 해부터 활을 쏘고 말을 타며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21세 되던 해 8월, 보성 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과 결혼했는데, 방진은 본래 무관 출신으로 궁술과 병학에 일가견이 있어서 이순신의 무예 수련에 큰 힘이 되었다. 무인의 길을 가고자 했던 이순신이 결혼 직후에야 그 뜻을 이룬 것으로 보아 아산 근처 경기 지역에 살던 장인 방진이 무인으로 살기로 한 결정에 영향을 끼쳤으며 가장 든든한 후원자 노릇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덕택에 가사가 기울어 16세에 서울에서 외가로 이사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이순신은 10년 이상의 긴 세월을 돈 벌이에 대한 걱정 없이 무예 수련과 무학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22세 되는 해 10월부터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고 병서를 탐독했다. 이 시기의 수련 과정을 통해 내면으로 바르고 지성스러운 성품을 닦아나가는 한편 말 타고 활 쏘는 것에서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을 기량을 갖추게 되었다.

 

28세 되던 해에 이순신은 별과 시험에 응시했다. 그런데 말을 달리며 기예를 부리는 도중에 타고 있던 말이 거꾸러졌고, 그 바람에 자신도 함께 넘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곧 정신을 가다듬고 한 발로 일어선 후 마당 가의 버들가지를 꺾어 상처를 싸매고 조용히 시험장을 걸어 나왔다.  비록 낙방은 했으나 그 광경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침착하고 의연한 처신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4년 뒤인 32세 봄에 이순신은 병과에 급제한다.

 

1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힘써 무예를 익히는 동안 이순신은 체력 단련과 병학 공부만 한 것이 아니다. 공직에 나아갈 때 그는 이미 스스로 수행을 통해 자신을 닦아서 완전히 정돈된 인격을 이루었다. 이 황금 같은 청장년 10년 세월 속에서 그는 오직 올곧음과 의로움만을 좇아 평생을 살아갈 고매한 인격 도야와 자기 수련을 병행한 것이다. 따라서, 무예를 닦아 관직에 나오기 까지 그 10년 세월이 이순신이란 거목을 생육 시킨 시기였던 것이다.

 

장수로서의 굴곡과 성장 시기(병과 급제 이후부터 정읍 현감까지, 32세 – 47세)

 

이순신은 32세 되던 해 2월에 무과에 급제하고도 권세의 문을 두드리지 않아 1년이 다 되도록 변변한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해 섣달에 가서야 겨우 미관말직인 종9품 권관(소대장격)이 되어 함경도 삼수 고을에서 장교의 임무를 시작한다. 이후부터 이순신의 장수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는데,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행동으로 인해 여러 일화를 남겼다. 훈련원의 정5품 병조정랑의 서열을 무시한 인사청탁을 거부했으며, 갓 벼슬길에 오른 사람으로서 권세가 기대어 승진을 도모하지않겠다는 이유로 병조판서 김귀영의 사위 자리를 거부했고,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관사 앞뜰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 하자 나라의 물건이므로 사사로이 쓸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며, 다른 병조판서 류전에게 화살통을 상납하지 않았으며, 이율곡과는 같은 문중인 관계로 사사로이 만나기를 꺼렸다. 이런 일화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제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의 신념이 확고했다는 점이다. 그는 어떠한 어려움에 처해도 주위의 힘과 세를 빌려 해결하려 하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의 실력을 바탕으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고자 했다. 실력이 못 미치면 그 뿐이지 자신에게 없는 것을 구해 허망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같은 정신은 이순신의 리더십에 큰 바탕을 이룬다.

 

이순신의 큰 역경은 39세에 함경도 권관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여진족의 침략을 미리 예견하여 거꾸로 침략한 여진족을 모두 사로잡는 쾌거를 이루었지만 상관의 시기로 인한 거짓 장계 때문에 전공이 취소되고 말았다. 40세에 부친이 돌아가셔서 3년 상을 치뤘으며, 이후 다시 부임한 함경도 조산보 만호(종4품) 임무 수행 중 부당하게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쓰고 파직 및 백의종군의 경험을 하게 된다.

 

23년 간의 군인 생활 중에 이순신은 세 차례 파직과 두 차례의 백의종군을 겪었지만, 자신을 좌천시켜도 누구를 비난하는 법이 없었으며 그대로 임지에 가서 그 직무에만 전념했다. 부당하게 파면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복직 운동은 생각지도 않았으며, 상사의 오해를 받아도 굳이 찾아가서 해명하려 들지 않았다. 승진하려는 노력은 물론 없었다. 이렇든 타고난 강직함과 결벽증에 가까운 청렴성을 지닌 그로서는 당시의 부패한 조선사회로부터 미움을 받고 쫓겨 다녔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파직 당했을 때마다 그가 복직될 수 있도록 힘쓴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유성룡이다. 유성룡은 이순신의 고비 때마다 그의 장수됨과 의로움을 널리 알려 그가 중용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이처럼 그는 두만강 가에서 온갖 정신적인 시련을 맛보았지만 그 시련을 의연하게 이겨냈으며, 이 시기의 부침 많은 무관의 생활 속에서도 그는 원칙을 지키며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으며 ‘오랑캐와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수’라는 평가를 조정 내부에서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여 최고의 장수가 되어 나라를 지키려는 자신의 가치를 키울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 당시 심각하게 돌아가던 왜국과의 전쟁 분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비변사 및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수사로 천거되어 구국 업적 달성에 참여하게 된다.

 

구국 업적의 달성 시기(전라 좌수사 이후 사망 때까지, 47세 – 53세)

 

이 시기의 삶이 <난중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러 가지 위대한 업적이 있지만 무엇보다 후일 연전연승의 기반이 되며 동시에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과 창의성을 보여주는 핵심이 되는 거북선의 건조가 이 시기에 이루어지게 된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1년 동안 전심전력을 기울여 전쟁 직전에야 가까스로 거북선을 완성시키게 된다. 바다에 나가 거북선에서 지자대포와 현자대포를 시험 발사하여 성공한 것이 4월 12일로 전쟁이 나기 불과 하루 전이었다. 사전 준비의 필요성과 운명의 아슬아슬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후 이순신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임진왜란 기간 동안 왜군 수군에 연승하여 그들의 북진을 막고 온갖 괴로움과 박해 속에서도 충을 지켜 조선의 수호신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이순신의 활약과 그 의미를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적이 본시 수륙으로 합세하여 서쪽으로 올라가려 했던 것인데 이 해전 한 번으로 적의 한쪽 팔이 잘려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고니시가 비록 평양을 얻었지만 형세가 외롭고 약해져서 감히 더 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전라, 충청부터 황해, 평산의 연해 일대를 확보하여 군량 보급과 호령 전달로 중흥을 이룰 수가 있었고, 또 요동의 김주, 복주, 해주, 개주, 천진 등지까지도 동요하지 않아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니 모두 순신의 승첩한 공이라.”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

 

평생 이순신 장군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유성룡은 그의 사람됨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정해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그의 뱃속에는 담기가 있어 자신을 잊고 국난에 몸을 바쳤으니 이는 평소 수양을 많이 쌓은 데 그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승지였던 최유해는 이순신을 기려 쓴 행장에서 그의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고 한다 :

 

“공은 엄하고 진중해 위풍이 있는 한편 남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겸손하며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고 식견과 도량이 깊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잘 나타내지 않았다. 일찍이 하는 말이 ‘대장부 세상에 나서 쓰이면 죽을 힘을 다해 충성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농사짓고 말아도 또한 족한 것이니,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해 든 영화를 탐내는 것은 나의 부끄러워하는 바라.’ 고 하였다.”

-          최유해의 행장 중에서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책들의 저자들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서술 중에서 특히 마음이 가는 글은 <여해 이순신:너라야 세상을 화평케 하리라>의 저자 김종대씨의 평가였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그러나 공의 일생을 찬찬히 한 번만이라도 살펴본 사람이라면 공은 그냥 명신이나 명장수, 전쟁 영웅으로 불릴 사람이 아님을 금방 알게 된다. 충무공은 왕이 삼고초려해서 군사 혹은 승상으로 모시고 받드는 복된 환경에서 적과 싸운 사람이 아니다. 개인적인 허물을 감싸주고 힘껏 싸우도록 온 나라가 보필하는 가운데 적과 싸운 사람도 아니다. 그는 왕이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죽이려고 까지 했던 기막힌 상황 속에서도 한 번 세운 충을 굽히지 않았다. 왕과 그를 모함하는 세력들이 자신을 파면하고, 투옥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까지 했으나 그들을 원망한 일이 없었고, 그들 때문에 자신이 수년을 두고 일궈온 수백 척 전함이 모두 부서져 바다 속으로 던져지고 겨우 열두 척만이 남아도, 또 자신이 키워낸 수만의 수군이 몰살되고 기백 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서 원망과 격분으로 일을 그르치지도 않았다. 조정에서는 싸울 전선과 병사들을 모조리 없애놓고 그 열 배, 백 배가 넘는 적의 수군과 싸우라며 뻔뻔스러운 재임명의 교서를 내려도 불평은커녕 배가 열 두 척이나 남아있으니 괜찮다면 담당히 그 명을 받들었다. 높은 지위에 있을 때도 마음에 넘치는 바가 없었고, 권세를 잃고 백의족군 신세가 되어서도 원망과 타락이 없었으니 그의 마음에는 진실로 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냥 영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뚜렷한 사생관으로 생사를 초월한 도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요, 원망하고 화내는 경지를 넘어 능히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대인격을 갖춘 성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참고 문헌

l       <여해 이순신 : 너라야 세상을 화평케 하리라> 김종대 지음, 예담

l       <부활하는 이순신 :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라> 황원갑 지음, 마야

l       <이순신의 두 얼굴> 김태훈 지음, 창해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글을 시작하기 전에

 

<난중일기>를 통해 만난 이순신은 ‘’성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이었다. 그는 단순히 군사를 호령하고 함대를 이끌고 왜적을 쳐부순 무패의 장수가 아니었다. 이순신은 부하였던 이의 궁핍한 사정에 기꺼이 옷을 벗어주고, 아들의 죽음에 오열하고, 부하가 다른 장수를 욕하는 것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오랜 싸움에 몸져눕기도 하는 인간이었다.

 

<난중일기>와 이순신에 대하여

 

그렇지만 적과 대치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에서 바쁜 가운데 일기를 계속 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순신은 부하들과 함께 신중하게 싸움을 준비하고, 부모를 걱정하다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고, 매일같이 활쏘기 연습을 하고, 전쟁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다. 이순신은 꿈에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대하여 이야기가 미치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아들을 보내놓고 걱정스럽다 못해 병이 나고, 홀로 어머님 생각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적에 맞서 싸울 때는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는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고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곁코 용서하지 않겟다.”라고 외치며 아군의 10배가 넘는 적에게 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도 했다. 특히 뒷날 그를 모함하여 죽음 직전에까지 몰아넣은 원균에게 이순신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물론 일기를 보면 그가 원균을 나쁘게 본 데는 대개 그럴 만한 근거가 따르기는 한다. 일기에 따르면 여러 지휘관들이 원균의 잘못이나 흉을 여러 차례 보고하고 있다. 이순신은 그런 원균을 ‘可笑(가소롭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표현은 이순신이 몹시 못마땅할 때 쓰는 욕으로서 대부분 원균에게 쓰였다.

 

그럼에도 그가 영웅으로 불려진 데는 일을 함에 있어, 자기 몸을 보살피지 않고, 조금도 물러섬 없이, 그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는 병으로 자리에 누워 신음하면서도 그가 관장한 고을의 공문이나 백성들의 소장을 처리했다. 시간을 미루지도, 일을 남에게 떠넘기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순신의 용맹과 전략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준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제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병선은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또한 짐작하겠다.[25]

 

4월 16일 밤 10시께 영남 우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과 같은 큰 진이 벌써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42]

 

여러 장수들은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모두 죽을 힘을 다했다. 배에 있는 관원과 군사들도 역시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동서로 에워싼 채 바람과 우레같이 대포를 쏘고 활을 쏘아 대었다. 적들도 탄환과 화살을 쏘다가 기운이 떨어지자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정신없이 바다에 내던졌다. 화살을 맞은 자가 몇 명인지 알 수 없고 물에 떨어져서 헤엄치는 놈도 몇 명인지 몰랐다. 한꺼번에 무너지고 흩어져서 바위 언덕으로 기어오르며 서로 뒤쳐질까 겁을 내는 꼴들이었다.[49,50]

 

견내량의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의 배끼리 부딪치기 쉬우므로 싸움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적이 만일 형세가 불리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라 생각되기에 한산도 한바다로 꾀어내어 통째로 잡아 버릴 전략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있어서 사방에 헤엄쳐 나갈 길도 없다. 혹 육지로 오르더라도 굶어죽기 십상일 것이다.[62]

 

먼저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습격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배의 왜적들이 일제히 돛을 달고 쫓아왔다. 우리 배가 거짓으로 물러나며 돌아 나오니 적들도 줄곧 쫓아왔다. 바다 한가운데 와서는 다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학의 날개처럼 진을 치고 일제히 진격하였다. 각각 지자․현자․승자총통 등을 쏘아서 먼저 두 세 척을 박살 내니, 여러 배의 왜적들이 기가 꺾여 도망갔다. 여러 장수, 군사, 관원들이 승리할 기세로 앞을 다투어 돌진하며 화살과 총알을 퍼부으니 그 형세가 바람과 같고 우레와 같았다. 적의 배를 불사르고 적군을 한꺼번에 거의 다 쳐부수었다.[63]

 

그 동안 네 차례 출전하고 열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그러나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따진다면 이번 부산 싸움에 비길 것이 아니다. 전날의 싸움에서는 적선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70여 척에 불과하였는데, 이번에는 왜적의 소굴에 4백 여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그 속으로 돌진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 내내 공격하여 적선 1백 여 척을 깨뜨려 적으로 하여금 겁내어 떨게 하였다. 비록 목을 벤 것은 없었으나 힘껏 싸운 공로는 먼젓번보다 훨씬 더하였다. 전례에 따라 공로를 참작하여 등급을 마련하였다.[75]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그런데 전라 우수영의 우후가 술주정하며 마음대로 지껄여 대었다. 그 짓이 입에 담을 바가 되지 못하니 어찌 모두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어란포 만호 정담수, 남포도 만호 강응도 마찬가지였다. 큰 적을 무지르려 작전을 약속하는 이때에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 할 말이 없다. 분통을 이길 길이 없었다.[84]

 

2월 22일 발포 2선,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얕은 곳에서 (좌초에) 걸려 적들에게 공격 당하고 말았다. 분하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87]

 

5월 4일 맑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94]

 

5월 13일 밤에 달빛이 배에 가득하데 혼자 앉아 뒤척뒤척하였다. 온갖 시름이 가슴을 쳐서 자리에 들었으나 잘 수 없었다. 닭이 울 즈음에야 얕은 잠이 들었다.[97]

 

술이 여러 배 돌자 경상 수사 원균이 왔는데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 안의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영산령이 취하여 넘어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우습다. 밤에 바로 두 선전관이 돌아갔다.[98]

 

5월 16일 마음이 매우 불편하여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명나라 장수가 증도에서 머뭇거리는 게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98]

 

원 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동요하게 하였다. 진중에서도 속임을 쓰는 것이 이럴 정도이니 그 흉악스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101]

 

원균이 송 경략이 보낸 불화살을 자기만 쓰려 하였으나 병사 편에 공문을 보내 나누어 보내라 하니까, 공문의 내용을 매우 못마땅해 하면서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명나라 관리가 보낸 불화살 1천 5백 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다니 그 잔꾀가 아주 심하여 말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다. 저녁에 조붕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104]

 

5월 30일 남해 현령 기효근이 배를 우리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처녀를 싣고 남이 알까 봐 두려워했다.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배에 예쁜 색시를 싣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꼴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가 이러하니 어찌 하겠는가?[105]

 

6월 8일 각 고을의 담당 서리 11명을 처벌하였다. 옥과현의 향소(유향소)에서 지난해부터 군사를 동원하는 일이 부실하여 도망간 사람이 거의 1백 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매번 거짓말을 하기에 이날 목을 베어 매달았다. 모진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음도 어지러웠다.[107]

 

밤 기운이 매우 서늘하여 자리에 누웠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잠시도 풀리지 않았다. 혼자 배를 덮는 뜸 밑에 앉으니 가슴속의 생각이 만 갈래나 되었다. 선전관이 내려왔다는 전갈을 받았는데 초저녁의 왕의 유지를 가지고 왔다.[114]

 

7월 9일 오늘 밤 달빛이 맑고 밝아서 티끌 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선 듯 불어 온다.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구나.... 광양의 적들은 진짜 왜적이 아니고 영남의 피난민이 왜적처럼 차리고 광양으로 뛰어들어 민간의 집들을 분탕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진짜 왜적이 아니라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진주성에 관한 소문도 또한 거짓말이라고 한다. 진주의 일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벌써 닭이 울었다.[117]

 

7월 15일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지네.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120]

 

7월 20일 명나라 장수의 보고서가 왔다. 그 보고서의 내용이 참으로 괴상하다. 두 치의 적이 명나라 군사에 쫓겨 도망갔다고 하니 그 거짓됨을 말할 수가 없다. 큰 나라 장수가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따질 것인가? 한탄스럽다.[121]

 

8월 1일 새벽에 꿈에서 큰 대궐에 이르렀는데 마치 서울인 듯했다. 신기한 일들이 많았다. 꿈에 영의정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하였다. 이야기가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미치자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였다. 적의 형세는 벌써 사그라졌다고 말하며 서로 실정을 의논할 즈음 좌우의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는데 꿈이 깼다.[124]

 

8월 28일 원 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에 빨리 가자고 독촉하였다. 흉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내보내고 다만 일고여덟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129]

 

1594년 명일 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1월 12일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140]

 

1월 19일 소비포 만호로부터 경상도 여러 배들의 사부와 격군들이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라는 말을 들었다. 참담하여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141]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는 큰 고개를 바로 내려갔다. 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 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꿈에 미인 하나가 홀로 안자 손짓을 했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웠다.[146]

 

2월 5일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는 큰 고개를 바로 내려갔다. 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 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꿈에 미인 하나가 홀로 앉아 손짓을 했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원수(권율)의 답장이 도달하였는데, 명나라 심 유격(심유경)이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왜적의 간교한 꾀를 미리 알기 어려우니, 이미 술책에 빠져 들었건만 또 이렇게 빠져드니 한탄스럽다.[147]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151]

 

암행어사 유몽인은 국가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을 꾸며 갈 것에만 힘써서, 남쪽의 헛된 소리에만 귀 기울인 것이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 이상 심하다.[152]

 

6월 4일 저녁에 겸사복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172]

 

10시경 급창 금산과 처자 세 명이 모두 전염병으로 죽었다. 3년 동안 눈앞에 두고 부리던 자가 하루 저녁에 죽어 버리니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172]

 

7월 12일 순변사에게 유 정승(유성룡)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가 말을 만들어 그를 훼손하려는 것이리라.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저녁에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혼자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길이 없고 걱정이 더욱 심해져서 밤 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유 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180]

 

아침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이미 생사가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가슴이 아프고 괴롭구나.[193]

 

이른 아침에 세수를 하고 조용히 앉아서 아내의 병세를 점을 쳤더니, 중이 속세에 돌아오는 것 같다고 하였다.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하다. 또 병세가 나아질 것인지 어떤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것도 오늘 안으로 좋은 소식을 들을 징조이다. ………저녁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아내가 나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운이 몹시 약하다고 하니 매우 걱정이다.[194]

 

9월 3일 새벽에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이라도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 여러 장수와 맹세하여 목숨을 걸고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크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루 내내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나랏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도 안으로는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195]

 

혼자 앉아서 간방의 꿈을 떠올려 보았다.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달려와 눈앞에 주춤 서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모두들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지만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았다.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것은 왜 높이 평을 구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좋은 말을 타고 천천히 갔는데 이것은 내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198]

 

상주에 사는 사촌누이의 편지를 가지고 그 아들 윤엽이 본영에 왔다. 누이의 편지를 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208]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1월 1일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나랏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팔순의 병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213]

 

장흥 부사가 찾아 왔는데 그에게 들으니 순변사 이일이 하는 것이 아주 모양이 좋지 않다고 한다. 나를 해치려고 애를 쓴다고 하니 우습기 짝이 없다.[216]

 

5월 29일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하루 내내 주룩주룩 내렸다. 사직의 위엄과 영령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233]

 

7월 초1일 나라의 제삿날이어서 관청에 나가지 않았다.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239]

 

체찰사와 만나 조용히 이야기 나누다 보니 그는 백성의 고통을 없애려는 일에 뜻이 있는 것 같다. 호남 순찰사가 헐뜯으려 하는 기색이 많으니 한탄스럽다. 나는 김응서와 같이 늦게 촉석루에 올라가서 장사들이 싸우다가 죽은 곳을 둘러보았다. 참담하고 비통하기 그지 없었다.[247]

 

같이 이별주를 마시고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선 수사와 작별하며 짧은 시 한 수를 써 주었다.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 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는 구나.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251]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맑았으나 서풍이 거세게 불었다.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 어떨지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점을 치니 임금을 뵙는 것 같단 괘가 나왔다. 좋은 괘라고 모두 기뻐하였다.[268]

 

이전에 영의정이 천식으로 몹시 편찮다고 들었는데 나았는지 모르겠다. 글자로 점을 쳐보았더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이 있는지 들으려고 점을 쳐 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괘는 매우 좋구나. 매우 좋구나![269]

 

밤에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은 대낮처럼 밝고 물결 위에 비친 빛은 비단결 같은데, 혼자서 높은 수루 위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수선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277]

 

2월 28일 늦게 나갔더니 장흥 부사와 체찰사의 군관이 같이 왔다. 장흥 부사는 체찰사의 종사관이 군령을 가지고 자기를 체포해 가려고 왔다고 했다. 또 전라도 수군 가운데 우도의 수군은 좌도와 우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도와주라는 명령도 있다고 한다. 참 어이가 없다. 조정의 계책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작정할 수 있는가. 나라의 일이 이렇고 보니 어떻게 할 것인가.[281]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하였는데 그것은 내 스스로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주자는 생각에서였다.[296]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화상을 멀리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혼자 점을 쳐 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걷어차니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고 하겠다.[307]

 

8월 12일 하루 내내 노를 저어 밤 10시쯤 어머니가 계신 곳에 당도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끊어지는 듯 하시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하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위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이어서 13일) 어머니를 모시고 옆에 앉아 아침 진지를 올리니 대단히 즐거워하시는 빛이었다. 늦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본영으로 돌아왔다.[319]

 

병영으로 돌아왔다. 원균이 흉한 짓을 하였으나 여기에 적지 않겠다.[321]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324]

 

1597년 백의종군에 나서다

 

4월 1일 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에 있는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러 봉, 분, 울, 사행, 원경 등과 한 방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보러 왔다. 울적한 마음을 한층 이기기 어려웠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영의정(유성룡)이 종을 보냈고, 판사부 정탁, 판서 심희수, 찬성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 등이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술에 취하여 땀으로 몸이 흠뻑 젖었다.[331]

 

4월 13일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 찰방 집에 들렀다....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337]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고 나니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떠날 길이 또한 급해서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338]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이 만나 서로 붙들고 울었다. 형님들이 말씀하시기를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맡아서 한다는 말이야? 통곡을 하더라고 어떻게 할 것인가?”하셨다.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오셔서 이와 같이 근심하고 걱정하시니 슬프고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또 남원의 추수 일을 감독하는 데 대해서도 걱정 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매일같이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들의 혼령이 은근히 걱정하여 주시는 것이라 생각하니 슬픔이 한결 더했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슬퍼서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었는데도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나를 밝혀 주지 않는가? 어찌 빨리 죽기 않는가?[342]

 

원균이 온갖 계략을 써서 나를 모함하려고 하는데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에 잇닿아 있으며, 헐뜯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344]

 

나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으로서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348]

 

6월 22일 아침에 초계 현감이 연포를 끓여 가지고 와서 권하였는데 오만한 빛이 역력했다. 그의 처사가 예를 잃었음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359]

 

7월 18일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함께 와서 “16일 새벽 어둠이 걷히기 전, 수군이 기습을 당하여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많이 피해를 입었으며 수군은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하였다. 듣고 있으니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원수가 와서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소.” 하였다. 내가 “직접 해안 지역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원수가 매우 반가워 하였다.[369]

 

7월 21일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기에 패했던 상황에 대해 물었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또한 대장의 잘못은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371]

 

밤에 꿈을 꾸었는데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이른 아침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와서 임금이 내린 교서, 유서와 유지를 가져왔는데,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374]

 

8월 12일 늦게 거제 현령, 발포 만호가 들어와서 나의 명령을 들었다. 그들에게서 배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377]

 

벽파진으로 돌아와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오늘 밤에는 반드시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니 모든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하리라.” 하고 두 번 세번 거듭 타이르고 끝마쳤다. 과연 밤 10시쯤 적이 쳐들어와서 어둠을 이용하여 탄환을 계속 쏘면서 공격해 왔다. 내가 탄 배가 곧바로 앞장을 서서 지자포를 쏘았더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적들도 우리를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네 번쯤 들어왔다 물러갔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었다.[381]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385]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다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하였다.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하였다.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돌맹이를 가지고 마구 후려쳤다.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운이 빠지게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 댔다. 적선 세척이 거의 다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와서 서로 힘을 합쳐서 적을 쏘아 죽여 적은 한 놈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386]

 

우리 배들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 들어갔다...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도망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387]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393]

 

10월 14일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394]

 

아산 집에 편지를 쓰려고 하니 눈물을 거둘 수가 없었다.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정을 누르기 어려워서였다.[403]

 

12월 5일 도원수의 군관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이번 선전관 편에,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를 좇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걱정스럽게 여긴다고 들었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랏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전쟁에 나가 용감 하려면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떨어진 자로서는 능히 하지 못하는 일이다. 예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經)이 있고 방편을 취하는 권(權)이 있는 것처럼 꼭 원칙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잘 깨달아서 소찬을 먹는 것을 그만두고 권도를 좇도록 하라.” 아울러 고기 반찬을 내려주셨다. 비통하고 비통하였다.[405]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2월 17일 이순신은 강진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7월 16일 명나라 수군 도둑 진린이 5천의 병력을 끌고 왔다.

7월 18일 적선 1백여 척이 녹도를 침범했다.

8월 18일 풍신수길이 죽으면서 조선에서 철병할 것을 명령했다.[412]

 

11월 18일 조명 연합 함대가 노량으로 진격하였고, 19일 새벽부터 싸움이 시작되어 왜적을 크게 쳐부수고 선두에서 싸움을 지휘하던 이순신이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418]

 

 

 

내가 저자라면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책들을 찾아 보면서 든 생각은 장군과 관련된 책들은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크게 4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는 것 같았는데 (1) 난중일기를 완역한 책들, (2)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 혹은 숨겨진 이야기를 서술한 책들, (3)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리더십과 경영 전략에 중점을 둔 책들, (4) 장군이 승리한 해전을 군사적 전술 관점에서 분석한 책들 등이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대부분의 책들이 임진왜란 기간 동안의 장군의 업적과 난중일기를 통해 드러난 인간적인 면모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공적이 지대하고 이를 뒷받침 할 명확한 사료와 관련 연구 분석이 있었으므로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한 성과가 가능하기 위해 그가 그 이전의 성장기에 겪었던 고난과 이의 극복 과정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이 아쉽다. 여러 책들을 살펴 보면서 특히 놀라웠던 부분은 장군이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서도 승진에 연연하기 보다는 원칙을 지키며 그로 인한 불이익에 크게 괘념하지 않았으며 생과 사에 초연한 삶의 자세를 미관 말직 시절에 이미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장군의 임진왜란 시절의 혁혁한 공과 못지않게 이 부분에도 마음이 갔는데, 우리가 장군의 삶을 통해 현실적인 삶에서 배우고 추구해야 할 그의 가치관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성웅으로 추대하는 그의 사후의 과도한 열기와 관심 이전에 허황된 꿈에 휘둘리지 않고 삶의 가장 밑의 자리에서 기득권과의 불화 속에서도 자신이 정한 절대가치를 추구하면서 그로 인한 손해를 분연히 무릅썼던 또 하나의 ‘바보’를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임진왜란 이전의(직위만 높을 뿐 그 이후에도) 장군은 ‘성웅 이순신’이라기 보다는 ‘바보 이순신’에 가깝게 느껴졌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역발상적으로 ‘바보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구성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의 ‘바보 노무현’에 대한 추모의 열기에 편승한 마케팅적인 접근이라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에 ‘바보’를 하나 추가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젊은 시절의 일화들을 살펴 보면서 느끼게 된 생각이다.

 

집착은 아닌 것 같은데 알아가면 갈수록 이순신 장군과 노무현 대통령의 공통점을 자꾸 찾아가게 되는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 정부 시절 업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 이루어지겠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방향으로 평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권한을 내려놓음으로써 발생했던 외관적 소란과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당대의 사람들의 시각이 어느 정도 사라져야(즉 한 세대가 흘러야) 그 이면의 참된 가치가 드러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여 정부의 가치가 향후에 역사적으로 권력을 내어 놓고 일반 서민을 향한 복지와 평등의 정책을 추진하여 민주주의를 신장시킨 역사적 과업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가정했을 때 두 분의 인생 행로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몰락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자신의 힘으로 자수성가를 했고, 공과 사를 분명히 하고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았으며, 공직을 행함에 있어 원칙을 지킴을 최우선으로 하였으며, 늦은 나이에 리더 위치에 올라 국민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국가에 중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신화의 영웅적 스토리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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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3 09:13:22 *.12.130.125
이순신 장군의 삶을 <열정과 기질> 방식으로 분석해본 건 역시 오빠다운 발상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빠답다고 감히 말하네 ㅎㅎㅎ

그게 정말 그래. 우리와 같은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분이시면서 걸어간 길은 도인에 가까우니 참...

임진왜란 전 그 분의 행적에서 이미 드러난 면이 포인트란 말은 아주 날카로운 지적인 것 같아.
맞아. 거기 그 분이 이미 계셨던 거지...

근데 언제 딴 책꺼정 읽은거야? 참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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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09.06.04 10:42:16 *.248.91.49
희산,
그래 맞아.
두사람 많이 닮았어.
그리고 옆에 모여있는사람들도 닮았어.

특히 마지막 장면, 갑옷을 벗고 적을 맞은 건 ....정말 그래
그사람, 아름다운 바보는  탄핵기간에 <칼의 노래>를  열심히 읽었어.

세상의 모든 글쟁이들은...이런 만남을 ...깊이 성찰해야 할 것 같아.
하워드 가드너의 멀티 지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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