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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8일 02시 21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따끔거리고 쑥스럽고 죄송스럽고 죄스러웠다. 이 나라를 위해 아니 이 한민족을 위해 끊임없는 육신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흔들림없는 애국정신을 발휘한 백범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내 자유가 있음을 감사할 따름이다.

 

이 책은 유서이다.

백범은 어린 두 아들 인과 신에게 우리 민족에게 자주독립과 나라사랑의 애국자로서의 그의 생애를 통해 나라와 독립의 중요성 더 나아가 이 이 나라가 앞날에 대한 희망을 담아 내었다. 역경속에서 영웅이 탄생한다고 하는데, 나는 영웅이라서 역경을 이겨내었다고 말하고 싶다. 백범은 타고난 애국자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지 않고선 그 숨막히는 삶의 역경을 어찌 한 개인이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의 삶 자체가 유서이다. 그는 몸소 실천을 통해 살아온 영웅이었기에 그 어떤 영웅보다 위대하다. 매순간의 고초 마저도 반성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은 성스럽다.

 

17년형의 언도를 받을 무렵,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야밤에도 몇 차례 죽었다 깨어나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도 그는 스스로를 반성한다.

"저놈(왜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인 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할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강하게 만든 것인가? 이 책속에 많은 사건들이 그의 심경에 변화를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으로서 그는 너무나도 강직하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역설적이게도 난 그가 빨리 죽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그 고통스러운 나날이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있기에 그 고진 역경을 이겨내야만 했던 것일가. 너무 고통스럽게 느껴져 순간 죽는 것이 좋게도 보여졌다. 고통으로 보면 그는 죽음이 가장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일 것일진데 그 죽음마저도 쉽게 용인되지 않았다.

그의 자주적 독립에 대한 원대한 뜻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스스로 그 운명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하여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 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윈이 무엇이냐고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 라고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그의 꿈은 오직 독립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목적이 아니다. 그는 자유를 위해 독립이 필요하다고 한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여야 한다. 나는 어떠한 의미든지 독재 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해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 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와,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 나라를 건설하자고."

 

이 조국이 자유를 통해 고유의 민족의 문화를 살려 세계 만방에 그 아름다운 문화를 뻗치기를 소망하는 차원에서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민족주의자의 편협된 사고자가 아닌, 세계의 민족이 더불어 잘 살아가는 덕을 품고 살아온 것이다.

 

그는 일제에 검거된 뒤 감옥에서 지은 호인 백범(白凡)의 뜻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고자 하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희생당하더라도 동포들의 비극을 사전에 막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유 민주의 통일 조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한국 민족의 영원한 큰 스승이다.

 

그는 개인이 아닌 범국민적인 의식의 변화를 통해 창조적인 문화국가로서 이 나라가 세계만방에 그 인후지덕 문화의 아름다움을 떨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병자년 칠월 십일일 자시(이 날은 조모님 기일이었다.)에 텃골에 있는 웅덩이 큰댁이라고 해서 조부와 백부가 사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다. 내 일생이 기구할 예조였는지 그것은 유례가 없는 난산이었다. 진통이 일어난 지 육 칠일이 되어도 순산은 아니 되고, 어머님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어 혹은 약으로 혹은 예방으로 온갖 시험을 다해도 효험이 없어서, 어른들의 강제로 아버지가 소의 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에 올라가서 소의 소리를 내고야 비로소 내가 나왔다고 하니, 겨우 열 일곱 살 되시는 어머님은 내가 귀찮아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다는 데, 젖이 말라서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나를 품속에 품고 다니시면서 동네 아기 있는 어머니 젖을 얻어 먹이셨다.

 

백범의 가계는 안동 김씨로서 신라 경순왕과 고려 김방경의 후예이다. 그의 전대는 조선조에서 선조 방조 김자점의 역모사건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해주 서쪽의 백운방이란 곳에 자리를 잡고 상놈의 행세를 하였는데, 덕수 이씨로부터 멸시를 받아 양반에 대한 분노와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의지속에서 집념이 강해진 듯 하다.

 

그는 어머니의 성품을 닮았다. 그의 어머니 또한 위대한 독립운동가 이시다.

백범이 옥에 갇혔을 때 옥바라지를 맡아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에는 "경기감사를 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말함으로써 백범에게 큰 격려를 주었다. 일찍 죽은 며느리를 대신하여 손자 인()과 신()을 양육한 자정이며, 백범이 독립운동을 하는 데에 지장되지 않도록 두 손자를 이끌고 귀국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는 인내며, 왜경을 따돌려버린 여성답지 않은 특유의 대담성과 지모(智謀), 백범이 일지(逸志)를 쓸 때 그 자세한 연월과 일시를 일일이 자문할 정도로 만년에까지 간직한 총기 등은 백범의 성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백범역시 강옥에 면회와서 하실 말씀을 하시는 어머님의 강직한 성품을 이야기 한다.

 

백범은 1892년 과거에 낙방하는 것을 계기로 인생의 활로를 새롭게 모색한다. 그는 한때 풍수지리와 관상을 공부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19세기말의 민족적 수난을 감지하면서 동학에 입문한 백범은 최시형으로부터 황해도 팔봉접주로 임명받아 해주성 공격에 앞장섰으나 청군의 철수로 실패하였고, 황해도 동학군의 자중지란으로 세력을 잃게 되자 안중근의 부친 태훈의 호의를 받아들여 부모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들어가 잠시 우거하였다. 그는 거기서 일생동안 자신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 척사위정(斥邪衛正)계의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그의 섬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백범은 청계동을 찾아온 김형진을 만나 의기투합, 조국 순례에 나선다. 그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을 돌아서 간도땅에 이르러 국경지역 주변에 거주하는 동족들의 어려움을 목도한다. 강계 부근에서는 김이언 부대를 따라 '국모' 의 원수를 갚는 의병운동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였다. 청계동으로 돌아온 백범은 그가 없는 동안에 고능선의 요청으로 그의 손녀와 약혼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기뻐하였으나 김치경의 방해로 성혼되지 못했다. 백범은 다시 '방랑의 길'에 올랐다.

 

이때 국내에서는 명성황후가 '왜놈' 들에게 시해당한 데다가 단발령 시행으로 백성들의 분기가 탱천하여 이곳 저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방랑길'에 오른 백범은 대동강 하류인 치하포 주막에서 만난 일본인을. 그가 명성황후를 죽인 미우라(三浦梧樓) 공사이거나 그 일당의 하나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살해하였다.

 

이 일로 그는 해주 감영을 거쳐 인천 감옥에 수감되었다. 백범은 재판을 받으면서 그의 거사가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여 관리들과 수감자들은 물론 인천 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백범은 일본의 압력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국왕의 재가로 사형집행은 면했다. 감옥 밖의 구출운동이 한계에 이른 것을 안 백범은 탈옥의 비상수단을 감 행하였다.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삼남 지방을 주유하다가 공주 마곡사에 이르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탈옥에 따른 위험을 감추기 위해서는 승려로 신분을 위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범은 평안도의 영천사 방주(房主)를 끝으로 일년여 동안의 승려 생활을 청산하고 환속, 귀가하였다.

 

그에게는 민족을 위한 새로운 구상이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즉 그가 감옥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 (世界地誌)] 등을 통해 깨달은 신지식에 의하면,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취했던 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민지(民智)를 깨우쳐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를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한국강점을 서둘렀다. 한국인의 저항은 여러 형태로 일어났다. 1909 10월에는 안중근의 의거가, 12월에는 이재명의 의거가 있었다. 백범은 안중근의 의거로 잠시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무혐의로 곧 출감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연말 '안악사건(일명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징역을 언도받았고 수감 중에 터진 '105인사건' 에 걸려 또 2년을 추가받아 17년의 징역에 처하게 되었다. 처음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1914년에는 17년전 치하포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어 항만 축조공사 등에 강제 노역당했다. 그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이름 김구(金龜)김구(金九)로 바꾸고, 호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고, 호를 바꾼 것은 "우리 나라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의 정도는 되고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소원을 가지자"는 뜻에서였다.

 

1914년 그는 출옥하였으나 자유롭지 못한 몸으로 신천 동산평의 농감이 되어 농장 내의 소작인들에게 절약정신과 상부상조의 정신을 교육하였다. 또한 학교를 세워 자녀교육에 힘쓰로록 하였다. 1919 3.1운동이 일어날즈음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민족돌립을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망명을 한 것이다. 사리원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넌 백범은, 1945년 11월 23 그의 나이 70세에 환국하기까지, 27년간 근대사에서 가장 긴 시간을 버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붙들게 되었다

 

백범은 안창호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문지기 역할을 자원하였다. 안창호는 국무회의를 거쳐 백범을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그의 임무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모시고 임시정보의 보위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신문관,검사,판사로 집행의 임무까지 수행하며 임시정부의 경찰사법권까지 전담해야만 했다.

 

초기와는 다르게 와해되는 임시정부는 192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어 보다 시련이 가중되면서, 임시정부는 단돈 30원에 불과한 임시정부의 청사 조금(租金)이나 20원 미만이던 불가결 용인(庸人)의 월급도 지불하기 어려운 곤경에 빠져 그 활동이 극히 위축되었다.

 

이와 같은 난국에 직면하자, 백범은 다음과 같은 활동을 통하여 난국에 대처하고 임시정부의 새 활로를 찾았다.

 

그는 편지정책을 통해 미주 한인사회의 지원을 얻었고, 구미외교를 강화해 나갔다.

또한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결행하여 동경의거와 홍구공원의거를 차례로 거사함으로써 한중 양국 인민의 환호를 받았다. 이 거사를 통해 침체되어 있었던 독립운동의 불씨를 다시 지필 수 있었다.

 

일제는 홍구공원 의거 직후 백범의 몸값을 30만원에서 60만원으로 올리는 등 백범 체포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일시 비취 목사 댁에 몸을 숨겨 있던 백범은 가흥(嘉興) 피신을 시작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그러나 100여명이 넘는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헌신으로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14인으로 구성된 국무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백범은 이와 같이 임시정부를 강화하면서 연래의 숙원인 한국광복군을 창설, 지청천을 총사령관, 이범석을 참모장, 그리고 황학수를 서안(西安)의 전방사령관에 선임, 항전을 시작하였다. 처음 30여명의 인원으로 미주 교포의 성금을 바탕으로 발족한 한국광복군은 김원봉(金元鳳)이 지휘하던 조선 의용대까지 통합하면서 병력을 증강, 1945 8월 해방전후에는 700여명 내외의 임시정부 국군으로 성장하였다. 그동안 광복군은 OSS훈련이라 칭하는 미군과의 합작 특수공작 훈련도 받았고, 대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 2차대전에 참전, 본토 수복을 위한 국내 정진작전(挺進作戰)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패망과 조국 해방의 소식을 들었다.

 

백범은 그의 숙연이었던 조국해방을 위한 광복군의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것에 대한 아쉬움을 품고 27년만에 고국을 다시 찾았다.

 

이 책은 그 어떤 전기보다 진실하다. 또한 내 나라의 운명과 함께한 영웅의 서사시이기도 하다. 그 모진 역경을 넘어 오직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위인보다 강하게 느껴진다.

 
백범은 이 자서전을 통해서 유서의 절절함으로 우리에게 조용히 외친다.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ㅇ르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 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백범의 의로움과 강직함을 느꼈다.동시에 그의 실천적인 삶과 자선전으로서 그의 꼼꼼함과 성실함을 동시에 느껴보게 된다. 또한 유서로서 절절하며 생생한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애국심속에 비춰진 고난의 역사를 통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느껴보기도 하였다. 그의 꿈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 백범일지를 통해 내 스스로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았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 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13]

 

우리의 서울은 우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14]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15]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거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15]

 

나는 병자년 할머니의 기일인 711일 자시에 할아버지와 큰아버님이 사시는 텃골 웅덩이 큰집에서 태어났다. 아픙로 내 일생이 기구할 조짐이었는지 나의 탄생은 유례없는 난산이었다.[24]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 없이 참지 못한느 불 같은 성격이셨다.[27]

 

아버님은 어렸을 때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왼손 무명지를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넣어드려 사흘이나 더 사시게 한적이 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날 영원히 돌아가셨다.[28]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29]

 

나는 아침이면 밥구럭을 메고 ㅅ한 고개를 넘어 집에서 서당까지 서당에서 집까지 오며 가며 끊임없이 글을 외웠다. 동무들 중에서 나보다 수준 높은 자도 있었지만, 배운 것을 외우는 시험에서는 늘 내가 최우등이었다.[31]

 

나무하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그 동네 큰 서당에서 밤낮 책 읽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겼다.[32]

 

책은 빌려서 읽었으나 먹과 붓이 나올 곳이 없었다. 어머님이 품팔아 김매고 길쌈하여 먹과 붓을 사 주시면 얼마나 감사한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32]

 

드디어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위의 몇가지 현상만 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래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내가 시,부를 지어 과문6체에 능통하더라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과거장의 대서업자에 불과할 것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38]

 

상좋은 것이 몸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결심하였다.[39]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64]

 

나라가 망하는 것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65]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한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66]

 

산은 들이 좁을까 저어하여 저 멀리 솟아 있고

물은 배 가는 것이 두려워 얕게도 흐르는 구나.[70]

 

두령인 김이언은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성벽이 있는 만큼, 자신감이 지나쳐 다른 사람의 도모를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도량이 부족해 보였다.[80]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토벌하고 서양 오랑캐가 하는 서학을 한다는 말이 매우 괴이하였다.[88]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네가 보기에 저왜인을 주경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그렇다.”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94]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100]

 

짧은 소견에 자살을 하려고 동료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이마 위에 손톱으로 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졸라 드디어 숨이 끊어졌다. 숨이 끊어진 잠깐 동안, 나는 고향으로 가서 평소 친애하던 재종동생 창학이와 놀았다. 고시에 고향이 눈앞에 늘 아른거니, 굳이 부르지 않아도 혼이 먼저 가 있도다.[106]

 

내가 해주에서 다리뼈가 다 드러나는 악형을 당하고 죽는 데까지 이르었으면서도 사실을 부인했던 것은, 내무부에 가서 대관들을 보고 내 뜻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불행히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놈 죽인 취지를 분명히 말하고 죽으리라.[107]

 

지금 소위 만국공법이니 국제공법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이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108}

 

본인은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신하된 백성의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푸른 하늘 밝은 해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왕을 죽여 복수하였단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몽백을 하고 있는데, 춘추대의에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어 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 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덕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109]

 

나는 벼슬을 못하는 상놈이기 때문에 작은 놈밖에 죽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벼슬하는 양반들은 너희 황제의 목을 베어 원수를 갚을 것이다.[114]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115]

 

의리는 유학자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15]

 

하루는 아침에 황성신문을 읽어보니, 경성,대구,평양,인천에서 아무 날 강도 누구누구, 살인 누구누구등과 함께 인천에 있는 살인강도 김창수를 교수형에 처한다는 기사가 나와 있었다. 누구나 그런 기사를 본 다음에는 일부러라도 태연자약한 태도를 가지려고 하겠지만, 어찌된 일인지 내 마음은 조금도 격동되지 않았다. 교수대에 오를 시간이 반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음식과 독서와 사람 만나는 일을 평상시처럼 하였다. 그것은 고선생 말씀 중에 박태보의 보습 단근질 일화가 이었는데, 그는 보습으로 단근질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너라고 했다고 한다.[118]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126]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심사숙고하다가 탈옥하기로 결심하였다.[128]

 

한걸음 한 걸음씩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의 길을 간다.[152]

 

나는 풍진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망명객의 임시은신책으로든 어떻든 간에, 오직 청정적멸의 도법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하였다.[156]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먼저 그 나라 사람들의 경국대강을 보고 오랑캐의 행실이 있으면 오랑캐로, 사람의 행실이 있으면 사람으로 대우함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탐관오리들이 바록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나 금수의 행실이 많으니, 이것은 참으로 오랑캐의 소행입니다. 또 지금은 임금이 스스로 벼슬 값을 매겨 팔고 있으니, 그것은 오랑캐 임금이 소행입니다.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저 대양 건너에 사는 각 나라에는 제법 국가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고 문명도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공자,맹자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발달된 법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계속오랑캐,오랑캐하면서 배척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소견에는 오히려 오랑캐에게서 배울 것이 많고, 공맹에게서는 버릴 것이 많다고 생각됩니다.[179]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살조각 한점을 떼어 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따.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으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햇따. 두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뗴어내지 못했따. 나는 스르로 탄신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지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181]

 

나는 간곡히 만류하였다. 장래 대규모의 전쟁을 하려면 인재 양성이 없고는 성고을 기약할 수 없고, 일시적인 격발로는 5일은 커녕 3일도 기약하기 어려우니, 분기를 참고 다수 청년을 북쪽지대로 데려가 군사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당장 급한 일이라고 했다.[217]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221]

 

나는 실로 말 한마디를 못하였다. 그러다 면회구가 닫히고, 어머님께서 머리를 돌리시는 것만 보고, 나도 끌려 감방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이 면회 오실 때 아내와는 물론 많은 상의가 있었을 것이요. 내 친구들도 주의를 해드렸을 듯하지만, 일단 만나면 울음을 참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인데, 어머님은 참 놀라운 어른이다.[247]

  

옥중의 고통은 여람, 겨울 두 계절에 더욱 심하다. 여름철에는 감방에서 수인들의 호흡과 땀에서 증기가 피어올라 서로 얼굴을 분간할 수 없다. 가스에 불이 나서 수인들이 질식되면 방안으로 무소대를 들이쏘아 진화하고, 질식된 자는 얼음으로 찜질하여 살리는데, 죽는 자도 여러 번 보았다. 수인들이 가장 많이 죽기는 여름철이다. 겨울철에는 감방에 20명이 있다면 솜이불 네 장을 들여주는데, 턱 밑에서 겨울 무릎 아래만 가려지므로 버선 없는 발과 무릎은 태반 동상이 나고, 귀와 코는 얼어서 극히 참혹한데, 발가락 손가락이 물러 터져 불구가 된 수인도 여럿 보았다.[252]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264]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를 구()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民籍)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窓戶)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267]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288]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할 결심과, 어머님에게 너무도 죄송하여, 내 죽는 날까지 내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하고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290]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296]

 

어떤 사람이 나이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사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298]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로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298]

 

문영이란 조상은 면화 씨를, 문로란 조상은 물레를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하나, 그 나머지는 말마다 오랑캐라 지칭하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또한 명대 시절 우리나라 의관문물은 모두 중국제도에 따른다 하고서. 실제는 아무 이익도 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망건, 갓 등 망할 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리다.[352]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 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 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 하리오.[352]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353]

"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378]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 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 차 귀가하였던,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395]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 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 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402]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요,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423]

 

우리나라가 독립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424]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 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427]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427]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430]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고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431]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적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뿐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을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호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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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희향
2009.06.09 09:43:57 *.204.150.138
리뷰 앞 부분에 나오는 그대의 목소리가 좋아.
책을 그대 안에서 그대의 것으로 만들어서 내는 목소리.
그런 목소리 더욱 더 많이 듣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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