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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8일 09시 01분 등록
 

백범일지


김구 | 김혜니 편저 | 타임기획


Ⅰ. 저자에 대하여


백범 김구선생은 구한말에서 일제침략기를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민족독립’을 위한 외길을 꿋꿋하게 걸어왔다. 또한 해방 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통일민족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한 반외세 민족주의자이다. ‘백범일지’를 쓴 목적은 그의 두 아들 인과 신에게 아버지의 행적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단신으로 상해에 건너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식들이 아버지의 행적을 알 길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 자서전을 남겼다.


<초년>

본관은 안동.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구(龜)에서 구(九)로 개명하였다. 자는 연상(蓮上), 호는 연하(蓮下)· 백범(白凡)이며 아버지는 순영(淳永)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887년 11세 때 아버지가 집안에 세운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익혔으며 15세에는 정문재의 서당에서 당시(唐詩)와 〈대학〉을 공부하고 과문(科文) 등을 익혔다. 17세 때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인 경시에 응시하기 위해 해주에 갔으나, 매관매직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와 풍수지리서·관상학·병서 등을 읽으며 훈장을 지냈다.


<동학교문활동과 의병활동>

1893년 동학의 평등주의에 감화되어 입도한 뒤 포덕에 힘을 기울여 접주가 되었다. 1894년 황해도 도유(都儒)로 뽑혀 보은집회에 참가하였다가 그곳에서 손병희(孫秉熙)를 만났으며, 제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팔봉도소접주라는 첩지를 받는 등 북접계열로 동학교문활동을 하였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친일정권은 일본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공격하는 한편, 동학교도 전체를 비적으로 몰아 탄압을 하였다. 귀향길에 농민전쟁을 목도한 백범은 그해 9월 삼남에서 올라온 경통에 호응하여 해주 죽산장에서 척양척왜의 깃발 아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배신한 우군 이동엽 부대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학군 토벌에 나선 신천 진사 안태훈의 집에 은거했으며, 위정척사계열인 유인석과 동문인 고능선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춘추대의에 입각한 명분론적인 세계관에 몰입하게 된다.


1895년에는 남만주로 건너가 김이언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참패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1896년 2월 귀국하여 안악으로 오는 도중 치하포(河浦)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때려죽인 뒤 집에서 은신 중 체포되었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집행되기 직전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정지되었으나, 일본공사 하야시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했다. 1898년 탈옥하여 삼남일대를 떠돌다 하동 쌍계사에서 피신생활을 하였다. 그해 가을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서울의 새절을 거쳐 평양근교 대보산 영천암의 방주가 되었으나 1899년 환속하였다.


<애국계몽활동기>


1900년 강화도로 건너가 개화인사들과 교유하고 교육과 계몽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 사고의 틀을 벗어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으며,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해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 백남훈에게 인계하고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 1905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 · 이준 · 전덕기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한 뒤, 대한문 앞에서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가두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 1906년 종산 서명의숙의 교원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안악 양산학교의 교원이 되었습니다.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 교장을 겸했다. 1909년에는 해서교육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이 되어 도내 각지 강습소를 다니며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강연 주제는 "한인이 배일(排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것 등이었다. 이때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사건관련자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났다. 안창호가 주도하는 비밀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1910년 양기탁이 소집한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국내에서는 무력 항쟁을 하고 만주에는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일제와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1911년 안악 부호들을 협박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빼앗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 했다는 소위 안명근 사건의 관련자로 5월에 체포당했다. 김홍량 등 양산학교 관계자들도 서울에 압송되었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감형되어 1914년 7월 가출옥하였다. 그 뒤 양산학교장인 김홍량의 동산평농장의 농감이 되어 학교를 세우고 소작인을 교육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활동기>

상해로 망명한 그는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으며, 1923년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진로를 둘러싸고 제기된 창조론과 개조론 등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마련된 국민대표회가 분열로 치닫자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하였다. 1924년 국무총리대리를 거쳐 1926년 12월 국무령이 되었으며, 1927년 약체화된 당시 임정의 처지와 구성원상 국무령제로는 내각 구성조차 어려워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 겸 주석이 되었다.


이러한 임정활동에서 백범은 사회주의를 배척 반대했으며,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에 대하여는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았다. 1928년 사회주의계열을 제외한 민족주의계열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동녕 · 이시영 · 조소앙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1932년에는 청년들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했다. 이봉창 · 윤봉길의 의거가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이 사건으로 일경의 탄압이 강화되자 상해를 탈출하게 되고 1933년 난징에서 장개석을 만나 광복군 무관양성소 설치와 항일전투방략을 협의했다. 1934년 국무위원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나,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의정원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의 폭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를 장서성의 전장, 후난 성의 장사로 옮기는 한편, 임정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6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했다. 이는 공세를 강화해가는 일본과 최후 결전을 앞두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민족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고 결전태세를 갖추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1940년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정당조직으로 조선혁명당 ·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3당을 한국독립당의 이름아래 통합하여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 25일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 · 공포했다. 이것은 통합된 단일정당조직이 단순한 물리적인 결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념적인 융합차원으로까지 진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체였다. 한국의 건국정신은 정치 경제·교육의 평등을 보장하는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있으며, 3·1독립선언에 입각하여 수립된 정부는 민족자력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물리치고 5천년 군주정치의 낡은 껍질을 벗겨 새로운 민주제도를 확립하고 사회계급을 타파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이 건국강령은 사회주의적 이념을 도입한 좌우합작 타협의 소산물이었다. 이 좌우합작은 전민족적 차원에서 결성된 것이 아닌 김구와 김원봉(金元鳳)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좌우연합전선상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또한 이는 이들을 주체로 민족해방을 쟁취한 뒤 추진할 새로운 국가건설의 가늠자로서 임시정부의 진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해 가을 충칭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고 일제를 무력으로 몰아낼 계획을 추진했다. 1941년 12월 9일 5개항의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임전태세에 돌입했다. 1942년 7월에는 중국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을 체결하여 연합군과 더불어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었으며,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 · 박찬익을 선출하고 결전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나온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켰으며,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국내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로 광복군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세우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전격적으로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참전하지 못한 채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정국기의 활동>


1945년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과 임시정부는 빠른 시일 내에 곧 입국할 것 등 14개항으로 되어 있는 '임시정부의 당면정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김규식 등 임정 국무위원들과 귀국했다. 그 뒤 전국을 순회하며 자유·평등·행복의 신한국을 역설하며 국가건설에의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하여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신탁통치안이〈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로 결의되자 반탁투쟁을 주도했다. 이 중심체는 비상정치준비회였다. 이 단체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합치기로 하고 비상국민회의로 개칭하였다. 1947년 2월 14일에는 제2차 비상국민회의전국대회를 열고 독립촉성국민회와 민족통일본부를 합칠 것을 결의하고 국민의회로 바꿨다. 이 시기, 그의 정치적 입장은 '삼천만동포에 경고함'이라는 성명에 잘 나타나 있다. 독립진영의 재편성, 새로운 합작위원회의 구성, 신탁통치반대, 미소양군의 철퇴로 38선 철폐, 자주독립정부 수립 등이 그것이다. 그는 즉시 독립을 열망하였으며 이에 따라 민족자주와 반탁을 일치시켜 반탁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넘겨졌으며, 1947년 11월 유엔 감시 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며,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1948년 2월 26일 총선거를 감시하려 파견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북한이 거부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제의가 유엔소총회에서 결정되었다. 이에 그는 단독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에는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미 2월13일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이란 글에서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호소하고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 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굳은 의지를 천명한 바 있었다. 이승만과 한민당계열이 선거를 주장하고 준비를 서두르자,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우리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민생문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하며 이들과 결별하고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위한 시도를 추진했다.


그는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회담에 참석하고 5월5일 서울에 돌아왔다. 도착성명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남조선 단정을 반대하며 미소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5월10일 남한 단정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9월 9일 북한이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등 통일이 점차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 들어갔지만 통일조국 실현을 위한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암살되기 한달 전 "동족상잔의 유혈과 국토양단의 위기를 방지하고 자주·민주의 원칙하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쟁취하려는 나의 주장과 태도는 변함이 없다"고 소신을 밝히고, 이승만과의 합작은 통일정부가 설 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수립이 그의 최대의 목표였다.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백범일지’가 있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나뭇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것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이 장부로다.  p.56


“누구나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혼자만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네. 저마다 남이 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저마다 맡은 바 제 일을 하면 자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지. 어떤 사람은 정계에, 또 어떤 사람은 학계나 상계에 이처럼 자기가 합당한 방면으로 활동하여서 그 결과가 모이면 큰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네.”  p.58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99


나는 이에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저마다 배우고 사람마다 가르치는 것이라 깨달았다. 옥중에 있는 죄수들을 보니, 글을 아는 이는 없고 또 그들의 생각이나 말이 모두 무지하기 짝이 없어서, 이러한 백성을 이대로 두고는 결코 나라의 수치를 씻을 수도 없고 다른 나라와 겨루어 나갈 부강한 힘을 얻을 수도 없다고 단정하였다. 이에 나는 내가 깨달은 바를 곧 실행하여서 내 목숨이 있는 날까지 같이 옥중에 있는 죄수들만이라도 가르쳐 보려고 하였다.  p.99


홀로 우뚝 솟아 넓은 도량을 펼치고, 천하를 홀로 걸어감에 누가 나를 짝하랴.  p.191



“네가 옥에 있는 동안에 그렇게 정절을 지키고 고생한 아내를 박대해서는 안 된다. 네 동지들의 아내들 중에 별별 일이 다 있었지만 네 처만은 참 절행이 갸륵하다. 그래서는 못쓴다.  p. 199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평생을 지냈다.  p. 207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대강 맛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p.235


"나도 윤 군의 성공을 확신하오. 처음 이 계획을 내가 말할 때 윤 군의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지 않았소? 그것이 성공할 증거라고 나는 믿고 있소.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되오.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 마음이 움직이는 게요.“  p.243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잃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을 장한체 말라는 것이다. 제 머리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라는 말이다.  p.255


나의 소원


1. 민족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達)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 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의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朴堤上)이, “내 차라리 계림(鷄林)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倭王)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을 물리치고 달게 죽음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에서였다.


근래에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큰 이웃 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 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내에서나 혹은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하여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에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흥망성쇠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오 내오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 경제상, 사회상으로 불평등, 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 알력, 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끊일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 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自屈之心)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 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마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기에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댄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p.299-303



2. 정치 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어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이어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 경제 ․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아담 스미드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에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튼, 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노자의 무위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 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 몇 사람의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즉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겨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하여도, 그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제 의견을 발표하여서 훤훤효효하여 귀일할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갑론을박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재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국론, 즉 국민의 의사의 내용은 그때 그때의 국민의 언론전으로 결정되는 것이어서, 어느 개인이나 당파의 특정한 철학적 이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특색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 투표. 다수결 복종이라는 절차만 밟으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도 정책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그 헌법의 조문뿐이다. 그런데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서 된다.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이상에 말한 것으로 내 정치 이념이 대강 짐작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의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에 보태는 일이다.  p.304-310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성하기에 넉넉하고 우리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또 1차, 2차의 세계 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 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 배우로 세계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건립과 국민 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와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한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을 만드는 데 있다. 대한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 투쟁의 정신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 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이 태탕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든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락과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에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이 이번에 당한 보복은 국제적, 민족적으로도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이상에서 말한 것은 내가 바라는 새 나라의 용모의 일단을 그린 것이거니와,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의 기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였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도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 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1947년, 샛문 밖에서.   p.311-314




Ⅲ.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는 金九 선생의 자서전이다. 일지(逸志)’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백범일지는 김구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진솔한 육성으로 기록한 20세기 전기문학의 고전이다. 역사에 가려진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자 했던 백범의 의중을 책의 구성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1947년 출간된 국사원 본을 기준으로 본다면 <백범일지>에는 상권, 하권 그리고 속편 격인 귀국 직후의 활동과 <나의 소원>이 수록돼 있다. 상권은 1928, 29년 백범이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령에 취임한 이후 노모와 두 아들을 고국으로 떠나보낸 시기에 쓰여 졌다.


따라서 목숨에 대한 위협이 상존하는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생애를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에게 남기는, 일종의 ‘유서’인 셈이다. 반면 하권은 1942년 중경임시정부 당시 해외 동포를 포함, 독자를 어느 정도 고려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의 경과를 알리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알려졌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있던 그는 두 아들에게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백범일지를 썼다고 밝혔다. 황해도 벽촌의 궁핍한 집안에서 태어나 임시정부의 주석까지 오른 민족 지도자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 ’다. 백범일지는 여러 단체·기관에서 추천 도서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책이다.


백범일지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어 있다. 상권은 1928년 2월과 3월 사이에 집필을 시작, 다음해 5월 3일에 마쳤다. 하권은 1942년에 탈고했다. 끝 부분에 있는 ‘나의 소원’에는 백범의 독립을 위한 간절한 소망과 함께 백범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원문은 국한문 혼용체다.


1) 상권


상권은 머리말에 해당하는 [두 아들에게 주는 글](與仁信兩兒書)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신 소장본(영인본)의 [두 아들에게 주는 글]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이 부분이 이 책에서 유일하게 백범의 친필이 아니며, 사용된 용지 또한 본문의 원고지와는 다른 갱지라는 점이다. 또 다른 특징은 집필 당시 백범의 나이인데, 등사본·필사본의 54세와는 달리 53세로 기록하고 있다. 백범은 1928년(53세) 3월경에 『백범일지』 상권의 집필을 시작하여, 이듬해(54세) 5월 3일 종료했는데, 아마도 이 책에서는 집필 종료 후(54세) 쓴 서문을 앞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집필 시작 시기의 나이(53세)로 수정한 것인 듯하다. 아무튼 이 책의 [두 아들에게 주는 글]은 백범의 친필이 아니며, 시기적으로도 다음에 살펴볼 '등사본'보다 이후의 것이다.


상권을 집필한 동기와 당시의 실정은 머리말인 [두 아들에게 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는 백범이 어머니와 두 아들을 고국으로 보내고,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피선되어 유명무실한 임시정부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어려운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범일지』를 집필한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어린 자식에게 남기는 일종의 유서(遺書)와 같은 것이었다.


상권의 본문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부분 일부(一. 祖先과 家庭, 二. 出生 及 幼年時代)는 본문 속에 일련번호로 목차를 정비하였으며, 붓으로 집필하였다. 반면 뒤의 대부분은 원고지 본란에 펜 또는 만년필로 기록하고 목차는 주로 원고지 상단의 여백에 일정한 표식(∞)과 더불어 병기하였다. 여기서 펜으로 기록한 뒷부분이 1928∼1929년 처음 집필 당시의 원본 그대로이며, 붓으로 정서한 앞부분은 책으로 출간하기 이전 어느 시점에서 시범적으로 다시 정비한 부분이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김신 소장본의 경우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지만,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머리말은 다른 사람이 필사한 것, 본문의 앞부분 일부는 백범이 다시 정비한 부분, 뒤의 대부분은 최초 집필 당시의 원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하권


하권 역시 머리말인 [서문](自引言)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권의 [서문]도 본문 앞에 있지만, 본문 이후에 집필한 것이다. 그것은 필기도구가 본문의 후반부와 일치하며, 필사본에 서문이 책의 마지막에 첨부되어 있는 것 등으로도 방증할 수 있다.


하권의 집필 종료시기는, [서문]에 기록된 백범 나이 67세와 본문 내용의 끝부분이 대한민국 24년(1942) 2월인 점 등으로 살펴볼 때 1942년이다. 그런데 하권의 [서문]에는 1943년 11월의 '카이로회담'을 의미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시기가 어긋남을 알 수 있다. 이 점으로 보아 하권 역시 집필 종료 후 일정 시점이 지난 후 [서문]이 다시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권과는 달리 하권 집필 당시는 임시정부의 사정이 많이 개선되고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정세가 많이 호전되었다. 또한 백범의 두 아들도 장성한 상태였다. 따라서 백범의 지위, 가정의 형편, 임시정부의 사정 등을 고려할 때, 하권의 집필 목적은 백범의 개인사보다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선전하고 기금을 확보하기 위한 측면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세가 반영되어, 상권이 주로 백범의 성장과정과 다양한 경력을 소개하고 있다면, 하권은 임시정부와 그 저변의 일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하권의 본문에는 첫 목차를 원고지 여백에 병기한 것 이외에 어떠한 목차도 설정되어 있지 않다. 즉 백범은 상권을 집필하고 난 뒤 적절한 목차를 원고지 여백에 병기하였으나, 하권의 경우 그러한 여유마저 없었던 듯하다. 하권 집필 종료 당시는 태평양전쟁의 발발 등으로 백범이 매우 바쁜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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