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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5일 11시 57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 1909, 11, 19 ~ 2005, 11, 11)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작가이자 경영학자, 대학 교수.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1909년 11월 19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하였다.

빈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독일 함부르크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193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신문기자로 일했으며 런던의 국제 은행에서 경영 전문가로 일하기도 했다.


1937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최초의 저서인 <경제인의 종말>을 출간했다. 1939년에는 뉴욕주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경제학 및 통계학을 강의했고, 1942년부터 1949년까지는 버몬트 주 베닝턴 대학에서 철학 및 정치학 교수를 지냈다.


1942년 20세기 사회의 발전 과정을 연구한 <산업인의 미래 The Future of Industrial Man>, 이 저서의 출간으로 드러커는 1943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이었던 제너럴모터스(GM)의 컨설팅을 수행했고, 1946년 이 기간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법인의 개념>으로 학문적 분과로서 경영에 대한 초석을 마련했다.


1947년에는 마셜 플랜에 고문 자격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 후 드러커는 제너럴 일렉트릭, 코카콜라, 시티코프, IBM, 인텔 등의 대기업과 수많은 중소기업, 정부 부처, 국내외의 비영리 단체를 위해 컨설턴트로서 활동했다.


1950년부터 1971년까지 뉴욕 대학 경영학부 교수를 재직했고, 1969년에는 이 대학에서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총장상을 받았다. 1971년부터 사망 전까지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 경영대학원(현재는 ‘드러커 경영대학워’으로 개명됨)에서 사회과학부 석좌교수로 재직하였다. 미국과 벨기에, 일본, 스위스, 스페인, 체코 등지의 대학에서 다양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에는 ‘드러커 비영리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를 비롯한 많은 잡지에 글을 기고했고, ‘월스트리트 저널’의 정기 기고자로 활동했다.  


피터 드러커는 사회, 경제, 정치, 경영의 모든 주제를 다룬 뛰어난 저술가로서 지금까지 30여 권에 이르는 경영 관련서들을 출간했으며, 그의 책들은 모두 20여 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번역되었다. 2002년에는 미국 시민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경제인의 종말> <단절의 시대> <미래 기업> <미래의 조직> <피터 드러커 자서전> <의사결정의 순간> <피터 드러커의 자기경영노트>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미래의 결단> <21세기 지식 경영> 등이 있다.


‘경영학 계보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경영의 구루’로 칭송받는 피터 드러커는 2005년 11월 11일 9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저술가로서, 교수로서, 컨설턴트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으며, 세계적 기업들의 흥망성쇠의 과정들을 지켜보고 분석하여 수많은 책들로 대중들에게 경영학에 대한 많은 교훈들을 남겨주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이 책은 자서전이지만 통상적인 자서전의 형식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통상적인 자서전이 자신의 얘기를 직접 혹은 제3자가 기술하는 방식인데 반해, 이 책은 드러커가 영향을 받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커 자신을 비추는 독특한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6)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따라서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어떤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어떤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통해서만 그 인간에 대해 더욱 입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9)


드러커의 눈으로 직접 관찰한 인물들을 통해,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통해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드러커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드러커의 성장 배경과 삶을 조망할 수 있게 되고, 그가 만났던 인생의 결정적 인물을 통해 그 자신이 가졌던 생각의 원천들을 발견하게 된다. (9)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다양성에 매료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름대로 흥미로운 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가 얼마나 인습에 순종적인지, 또는 얼마나 보수적인지, 아니면 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지 상관없이, 일단 그가 자신의 일이나 지식, 흥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매력적인 존재로 돌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결국 개별적인 존재다. (11)


나는 인간이 다양성과 다원성을 가지며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독창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이미 50여 년 전에 나온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내 모든 책 속에 내재돼 있는 핵심은 바로 이런 신념이다. (12)


어떤 소재를 선택하든 항상 상이성과 다양성을 강조했다. 거대 정부나 거대 기업에 의한 통제를 설파하는 학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나는 권한 분산과 실험정신 그리고 공동체 창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3)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도 ‘큰 것이 최고다’라는 말만큼이나 숨이 막히게 만드는 독선이다. 게다가 똑같이 멍청한 생각이다. 사람들은 신의 창조물 속에서 다양성을 봐야 한다. (14)


이제는 조직 설계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앞으로는 조직 설계를 위해 조직의 임무와 목적, 전략, 환경에 관한 정보를 확보해야 하고, 환경은 사회적 환경과 물리적 환경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15)


이 책은 사회적 초상화를 제공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17)


사회 초상화를 처음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19세기의 소설 작가들이다. 이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합적으로 19세기 초기 영국 사회의 실제 모습과 느낌, 의미를 전달해 준다. 역사학자나 통계학자는 결코 그 정도 수준의 생생한 표현을 전달 할 수 없으며, 그들이 전달하는 내용은 당시 ‘삶의 질’과도 큰 차이가 있다. (18)


이 책에 기술한 인물들은 내게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선택됐다. 그들이 내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내게 반사하거나 굴절시켜 보여주었던 방식 때문이었다. (19)


이 책의 마지막 장인 ‘그 밖의 사람들’에서 나는 사회적, 심리적, 감성적 환경의 실제 느낌과 의미를 재창조하려고 시도했다. ‘그 밖의 사람들’은 제 2차 세계대전 직전, 미국에서 실시된 뉴딜 정책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시기다. 이 시기는 사회, 역사학적으로 유래가 없는 기간으로, 불안과 희망이 동시에 존재했고 지식사회는 동요했으며 사회적 불균일성과 다양성이 풍부했던 시기다. (19)


이 모든 이야기를 한데 합치면, 개인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구성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20)


프롤로그 - 한 사람의 구경꾼, 탄생하다

여기서는 주로 내가 살아온 삶의 순서에 따라 인물들이 등장한다. (21)


여기서 다루는 사람이나 사건들은 내게 강한 느낌을 주었으며 여전히 그 영향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들로, 기록하고 검토하고 재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나는 그런 사람과 사건들을 기존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 사고 유형에 적용하고, 서로 분리된 채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내 시각에 끼워 맞춰야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주변세계와 내면의 세계를 보았다. (22)


1부 - 사라진 제국 아틀란티스

할머니 - 인간에 대한 예의를 깨우쳐 준 유쾌한 사람

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했다. 똑같이 친근하고 경쾌한 목소리로, 똑같이 구식 예절에 따라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41)


여성의 지위나 남녀간의 관계가 적절한지 아닌지의 문제는 할머니의 사고범위 밖이었다. 그것은 ‘멍청하고 늙은 여편네’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남성중심이고 여성은 그런 세상에 적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64)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팔아야 했던 창녀는 동정의 대상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예의를 갖춰서 대해야 하는 존재였다. 자신의 몸을 배역과 인긴, 결국 돈 많은 남편을 얻는 데 사용한 젊은 여배우는 오직 경멸의 대상일 뿐이며 결코 ‘영광’을 얻을 수는 없었다. (67)


공동체는 인간을 위한 조직이었다. (67)


직공들과 그들의 공동체가 만든 세계는 크기는 작고, 범위는 좁으며, 근시안적이고, 숨막히는 곳이다. 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 즉 일과 기능에 대한 존중과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을 생각해주는 것 등,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가치는 분명히 20세기에는 없어졌거나 부족한 것들임에 틀림없다. (68)


헤메와 게니아 - 경영의 귀감으로 삼은 괴짜 부부

나는 항상 추상적인 관념보다는 인간에게 관심이 더 많았고, 관념이란 철학자들이 범주화를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내게 흥미롭고 다양성을 가진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관념보다 훨씬 더 의미있는 대상이었다. 그들은 발전하고,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변화를 일으키면서 무엇인가로 바뀐다. (72)


그는 케인스가 등장하기 40년 전부터 이미 케인스 학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경제를 정치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않았거나 공급 관리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시대에 수요관리를 생각했다. 그는 정부의 통화와 신용, 화폐 조작이 필요하다고 믿었는데, 당시 지배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그런 조작은 아무런 효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멸을 향해 가는 지름길이었다. 게다가 그는 대부분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소비자의 구매력을 높이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단지 그와 같은 혁명적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이론적 수단이나 자료가 1890년대에는 없었을 뿐이다. 어쨌든 헤메는 체계적인 이론가라기보다 말로써 자기의 주장을 드러내는 선지자였다. (90)


그는 유대인을 현대사회가 갖고 있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고, 유대인이 가진 부르주아적 근성과 탐욕적이고 유물론적인 정신은 사회를 오염시킨다고 여겼다. 그에게 유대인이란 종교나 인종적인 문제가 아니라 태도와 정신의 문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유대인이라는 허물을 벗어던지고 최대한 비유대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했다. (92)


게니아가 잘하는 분야에서 그녀는 정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성취는 여러 가지 면에서 헤매보다 더 뛰어났는데, 훨씬 더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더 풍부한 상상력이 엿보였다. (106)


성공을 거둔 모든 활동가들이 그랬듯이, 그녀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오랜 아일랜드인의 정의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상대방을 신나게 두들겨 패 의식을 잃게 한 다음 기꺼이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111)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마라. 항상 그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라” 이것이 그녀의 좌우명이었다. (119)


그녀의 살롱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대중적인 속성을 게니아가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롱도 오페라나 발레를 비롯해 르네상스 이후의 다른 부르주아적 공연 예술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공연예술의 한 형태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24)


살롱은 여성에 의해 운영 및 관리됐고 여성에게 적합하도록 개발됐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그들이 주도권을 쥘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살롱이 고대의 비밀스런 종교의식이 제공했던 것과 같은 기능을 한 것 같다. 이런 종교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남성이 주도했던 문화에 여성의 영역이 생겼던 것이다. (125)


역사적으로 볼 때 살롱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처음 생긴 유형은 ‘프레시외즈 Precieuses (17세기 전반에 프랑스 사교계를 풍미했던 잘난 체하는 취미와 경향을 가진 여성들을 부르던 말), 즉 루이 14세 시절 파리의 ‘블루스타킹 (문학을 좋아하는 여성이나 여성 문학가를 자처하는 여성들을 경멸적으로 이르는 말. 풍습에 맞지 않게 청색 모직 양말을 신은 데서 연유됐다)’ 의해 생겼다. 이곳은 여성에 의해 운영됐으며 배우의 역할과 대화 상대의 역할을 하기 위한 여성들이 상주했다. 이런 살롱이 헨리 제임스가 1880~1890년 런던에 머물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바로 그곳이다. (134/135)


다른 유형의 살롱은 볼테르의 정부가 최초로 시작했다고 하며, 여성 관리자가 남성 스타를 주연으로 삼는 형태를 취했다. (135)


살롱에는 믿을 만한 조연 배우들도 있었는데, 적절한 질문을 던지거나 주연 배우를 응원해 주거나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일에서 그들은 정말 큰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136)


그녀를 인터뷰하며 사람들이 원칙을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물었다. … “그것이 인간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원칙이란 내게는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야.” 이는 절대주의적 세기에는 대단히 위험한 이단이다. 교육과 심리, 환경, 경제, 정치, 심지어 인종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이상적인 미래나 ‘절대 다수를 위한 선’이라는 망상을 위해 인간이 희생해야 한다는 사상이 판을 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146)


그들이 품고 있던 ‘전쟁 이전’의 환영에서는 천박하게 경제적 실체를 따지지 않았다. 실제로 게니아의 살롱에는 경제계의 인물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이 오히려 두드러지게 부각됐을 정도였다. 그 곳에는 유대인과 비유대인들이 함께 살면서 완벽한 우정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게니아의 살롱에 있는 사람들은 인종에 대한 아무런 차별없이 잘 지냈다. 그것은 아테네와 헬무트 몰트케, 도로시 톰프슨의 지성이자 아름다움이었다. (155)


엘자와 소피 - 교육의 길을 제시한 노처녀 자매 선생님

선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자신의 재능 가운데 가르치는 재능이 포함돼 있는 선생이 있는가 하면, 학생에게 학습을 프로그램해서 넣는 방법을 알고 있는 교육자가 있다. (158)


그녀는 조금도 ‘아동중심’적이지 않았다. 사실 아동이란 개념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아동의 학습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166)


미스 소피의 얼굴에는 나의 웃음에 답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이 그녀가 보여주는 유일한 칭찬이었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완벽한 희열 그 자체였다. 순간적인 깨달음과 작품이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을 겪었을 때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172/173)


미스 엘자가 소크라테스적 문답법을 완벽하게 적응했다면, 미스 소피는 선의 달인이었다. (174)


미스 엘자와 미스 소피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면, 나는 내 자신을 연마하는 데 게을러졌을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다른 사람을 지루하게 만든다는 사실에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문적인 작가가 별 생각 없이 빠져들게 되는 위험이다. 나는 자신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181)


나는 그녀 (소피) 덕분에 장인정신의 진가를 제대로 평가하게 됐다. 소박하고 꾸밈없는 작업의 기쁨과 노동에 대한 존중이 어떤 것인지 일생 동안 지속되는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182)


미스 엘자는 공부에 필요한 규율과 계획을 세우는 방법에 관한 지식을 전수했다. (182)


좋은 선생은 연예인과 같고 연예인에게는 관객이 필요하다. (191)


‘선생 관찰’을 통해 처음에 도달했던 결론에 따르면, 선생들은 어떤 유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육 방법에 있어서도 유일하게 옳은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르치는 능력은 재능이고, 좋은 선생은 그 재능을 타고 났다. (193)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나는 다른 종류의 선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학생들을 학습하도록 이끄는 방법을 사용해 가르침을 전수한다. (193)


그들은 개개의 학생이 가진 장점을 찾아내고 그들의 장점을 개발하기 위한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를 설정한다. 이 작업을 끝낸 뒤에 비로소 그들은 학생들의 단점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193)


이런 선생들은 비난보다는 칭찬을 많이 사용한다. 그들은 효과적 학습을 계획할 뿐 ‘가르치지’ 않는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어떤 학생을 만나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 (194)


사실 타고난 선생은 자신의 재능에 교육법을 추가함으로써 아주 쉽게 더 훌륭한 선생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 뒤에 그는 만능선생이 되는데, 여기서 만능선생이란 대규모 강연장이든 소규모 교실 수업이든, 초보자든 석사과정이든 어떤 조건에서도 뛰어난 교육효과를 거두는 선생을 의미한다. (198)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가르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학습’ 방법이었던 것이다. (198)


가르침과 학습은 인지적이며 동시에 행동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뭔가 특별한 요소를 더 갖고 있다. 그들은 또한 열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생의 열정에서부터 시작한다. 교육자는 학생들의 깨달음에 같이 도취됨으로써 열정을 얻는다. 학생의 얼굴에 떠오르는 깨달음의 미소는 어떤 마약이나 약물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200)


프로이트 - 프로이트에 대한 프로이트적 분석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영어권에 사는 사람들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거의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첫째, 프로이트가 평생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며 거의 빈곤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는 것. 둘째, 반유대주의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았고,

셋째, 빈에서 살던 시절에 빈 의학계가 프로이트를 무시하고 경시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사실’은 모두 완전한 허상이다. (205)

프로이트가 문화와 문학, 종교와 예술에 힘 있고 창의적이며 자극제가 되는 비평가였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영혼에 창을 냈다는 점은 기꺼이 인정한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그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이 치료가 될 수 있는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219)


프로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정신분석이 치료라는 것을 주장하려 했고, 대부분의 빈 의사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주장이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이 ‘학문’이라기보다는 ‘시’라고 평가되는 데 아주 예민했다. (219)


프로이트는 죽는 날까지 정신분석학이 엄격히 과학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230).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과학적인 합리성과 비합리적인 내면의 경험이라는 두 세계를 하나의 종합 이론에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였다. 그것은 계몽시대가 낳은 극단적으로 합리적인 프로이트와 ‘영혼의 어두운 밤’을 꿈꾸는 몽상가이자 시인인 프로이트를 한 개체에 담으려는 거대한 시도였던 것이다. 이런 통합으로 정신분석학은 그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지만, 동시에 그만큼 허약해지기도 했다. (230/231)


현실의 프로이트는 전통적인 허상에 등장하는 프로이트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사람인 것 같다. 허상보다는 현실에서 더욱 위대한 그는 비극적 영웅이기도 하다. 불편한 모든 질문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세계와 영혼의 암흑세계 사이의 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던 프로이트의 이론은 종국에는 무너져버리고 말 약한 이론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좀 더 매혹적인 이론인 동시에 인간적 감동을 주는 이론이기도 하다. (233)


트라운 트라우네크 -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회주의자의 고백

인류 역사를 통틀어 문화나 문명, 법조문에 상관없이 사형과 사지절단, 추방, 구금, 벌금 등 형벌이 전부 똑같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어떤 문화나 문명이든 반드시 형벌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253)


내가 보기에 요점은 형벌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 설명이 필요한 것은 범죄의 존재였고, 그것은 내 능력의 한계를 크게 초월하는 분야였다. (254)


그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의 삶이 아니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세대와 잃어버린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시 우리는 사회주의를 새로운 사회를 향한 길잡이로 봤어. 우리 가운데 마르크스를 읽거나 경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지. 우리가 진정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평화였어. (257)


사회주의는 평화를 위해 헌신했지. 바로 그게 당시 우리가 사회주의자가 돼야 했던 이유야. 우리는 평화를 이룩했다고 생각 했었어. (258)


전쟁이 가져온 가장 큰 피해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우리의 희망을 파괴했다는 게 아니야. 그건 전쟁이 유럽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렸다는 거야. 전쟁으로 한 세대의 지배계층이 사라져버렸어. (265)


그 이후로 사회주의적 이상과 권력의 실체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결국은 권력이 승리를 거두었고, 사회주의의 약속과 민족주의의 열정 사이의 투쟁에서 언제나 민족주의가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268)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부활한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 독재와 오래된 구호 뒤에 숨어 있는 노골적인 권력 투쟁에 불과하다. (269)


2부 - 명멸하는 시대의 사람들

폴라니 가 -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흥미로운 가족

폴라니 가는 (아버지와 네 자녀) 19세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자유를 추구하되 부르주아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번영을 이루되 경제에 종속되지 않는, 공동체를 지향하되 마르크스주의의 집산주의가 아닌 새로운 사회를 추구했던 것이다. (286)


그들은 또 가장 생기 있고 호기심과 활력이 충만한 가족이었다. (286)


무지가 공적인 생활을 한 몇 년 동안 쏟아낸 팸플릿과 잡지, 기사, 연설 역시 20세기의 가장 흥미로운 사회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키부츠의 탄생에 한 역할을 했다 .(293)


<위대한 변환>에서 폴라니는 산업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려고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영국 사회와 경제를 바꾼 것은 기계가 아니었다. 영국 사화와 경제를 바꾼 것은 재화의 거래와 자본의 교환을 넘어서 또 다른 두 가지 생산 요소인 토지와 노동, 특히 고용과 사람들의 생계 문제를 포함하기 위해 ‘공급과 수요의 법칙’을 지닌 시장 시스템이 확대된 때문이다. (303)


카를에게 <위대한 변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경제와 그가 개발한 사회의 이론적인 통합 모델이었다. 시장만이 유일한 경제 시스템이 아니다. 또한 가장 진보적인 것도 아니다. 경제와 공동체를 조화시키면서 경제적 성장과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대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304)


그가 경제사에서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해답이었다.(305)


그들이 특별한 이유는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품었던 이상과 실패 때문이었다. (309)


그들의 실패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절대적인 하나의 시민 종교에 대한 탐구, 완전한 또는 좋은 사회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그들의 실패가 나타내기 때문이다. (310)


당시 카를은 미온적인 타협이라고 비판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완전한 사회 대신 적당하고 견딜 만한, 그러나 자유로운 사회를 받아들이자는 것이 <산업인의 미래>에 녹아 있는 내 의도였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시장의 혼란과 불화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자유를 지키게 될 것이다. (310)


크레머 - 키신저를 만든 외교 정치 고문

크레머는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그는 외부적인 힘없이는 히틀러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독일을 떠났다 (324).


자신은 인생에 딱 두가 야망만 있다고 그는 말했다. 하나는 육군 참모총장의 정치자문이 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위대한 외무장관의 정치적 멘토가 되는 것이었다 (324).


크레머는 키신저를 발견했고 키웠다. 사실상 그는 크레머의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329).


우리는 직관적으로 서로가 추구하는 답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똑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는 것도 금세 알게 됐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용해 자기 이야기를 듣고 자신에게 입장을 분명히 하게끔 만들었다. (331)


내가 정치적인 이단자로서의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내 진정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데 크레머는 그 누구보다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내 관심사는 그의 관심사와 같지 않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나 자신을 알게 된 것이었다. 나 역시 그에게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331)


어떤 토론이든 크레머의 주장은 딱 세 가지로 요약됐다. 이 세 가지 주장이 그의 정치 철학을 형성했고, 나아가 키신저의 정치 철학을 형성했다. (332)


첫째는 외교정책이 국내 정책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외교 정책은 한 국가의 존립을 결정한다. 국가의 존립이 보장되고 나서야 비로소 국가는 헌법과 법률, 사회정의 그리고 경제를 생각할 수 있다.


나는 국가의 존립이 우선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당시 (현재는 더욱 더 그렇다) 나는 외교 정책이 절대적으로 언제나 우선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었다. 국가나 제국은 외세의 침략이나 정복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내적인 부패에 의해서도 파괴된다. 국내문제를 경시하는 외교정책의 대가들이 사용한 바로 그 수단이 궁극적으로 나라의 쇠락을 가져왔던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리슐리외, 19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그리고 특히 19세기 초 비스마르크의 경우가 거기에 해당된다.


내가 모범으로 삼은 이는 엘리자베스 세 때 영국의 위대한 대신이자 훌륭한 외교관이었던 제 1대 세실이었다. 그는 적대적인 세계에서 국가존립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이해했지만, 언제나 외교 정책과 국내 정책의 균형을 유지했고, 양자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양자 간의 거래와 타협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사실 나는 이런 토론을 통해 정치를 최적화의 예술로, 손해를 최소화하는 거래를 모색하는 방안으로 깊이 생각하게 됐다.


두 번째 주장은 대외 문제에서는 힘이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힘이란 정치적인 힘, 궁극적으로는 군사적인 힘을 의미했다. 크레머는 정치가가 기획이나 정책을 수립할 때는 경제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아주 작은 역할, 즉 단역을 맡겨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 역사에서는 기초로 ‘피보호국’을 두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예가 무궁무진하다. … 이를 근거로 크레머는 열강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외교 정책만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 옛날 크레머와 나눈 긴 대화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공적인 일에서 위대한 인물이 지니는 패러독스를 인식하게 됐다. 예술이나 과학과는 달리 공적인 일에서는 개인적인 성취 외에도 연속성이 필요하다. 공적인 일에서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위대함을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위대한 사람은 자기 뒤에 공백 상태를 남긴다. (337/388)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자 진짜 ‘지도자’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이며 다르게 행동한다. 그는 사람들을 카리스마로 이끌지 않는다. 카리스마는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짜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노력과 헌신으로 이끈다.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팀을 구성한다. 조종이 아닌 성실성으로 지배한다.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정직하다. 따라서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리슐리외나 메테르니히, 비스마르크 같은 ‘천재 외무장관’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프리츠 크레머가 발견해서 가르친 헨리 키신저가 되고자 했던 것은 ‘천재 외무장관’이었다. (339)


세력 균형의 정책이 필요하다. 중간 국가를 동반자로 통합하고 힘이라는 정의에 군사적인 잠재력 이외의 다른 요인들을 포함하는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아울러 미국의 외교 정책에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리더십은 영리함이나 기교가 아니라 단순함과 정직함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342)


헨슈와 셰퍼 - 나치즘이 불러온 개인의 비극

악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지만 인간은 평범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떠한 조건으로든 악과 흥정해서는 안 된다. 한슈처럼 악을 자신의 야망에 이용하겠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악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셰퍼처럼 더 나쁜 것을 막기 위해 악과 손을 잡을 때 인간은 또한 악의 도구가 된다. (344)


나는 가끔 이 둘 가운데 어느 편이 더 해로울까를 생각한다. 권력을 탐한 헨슈의 죄와 셰퍼의 자기 과신과 오만의 죄 가운데 어느 편이 더 나쁜 것일까를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죄는 아마도 이 두 가지 고전적인 죄가 아닐 것이다. 가장 커다란 죄는 20세기에 새로 나타난 무관심의 죄. (364)


브레일스포드 - 영국의 마지막 반체제자

노엘 브레일스포드는 절대로 권력자가 아니었다. 그는 양심이었다. (367)


그의 사회주의는 역사의 과학적 법칙보다는 신앙과 도덕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머리나 재력의 사회주의라기보다는 가슴의 사회주의였다. 따라서 그는 완전한 외톨이였다. 하지만 페이비언주의자나 블룸즈버리 그룹, 노동조합주의자 또는 마르크스 주의자보다는 더 오래된 영국의 전통을 대표했다. (375)


그것은 프롤레타이라의 결속보다는 동정심을 호소하는 전통, 부자에 대한 보복보다는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를 요구하는 전통, 정부의 행동보다는 개인적 변화, 그리고 번영보다는 존엄성의 전통, 힘보다는 양심의 전통이었다. 근본적인 소수 의견의 전통이었다. 그는 양심이었다. (376)


1913년이 저물어갈 무렵 발칸 전쟁이 끝났다. … 그리고 몇 달 후에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브레일스포드는 즉시 전쟁을 반대하기로 결심했다. (376)


그 일을 계기로 브레일스포드는 1920년에 인도의 독립을 지지한 최초의 영국인이 됐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핵심적인 지지자가 됐다. (378)


브레일스포트에게는 영국의 인도 통치가 인도를 위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가 요점이 아니었다. 그에게 인도의 독립은 영국의 양심 문제였다. (379)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싸우는 것보다는 비공산주의 좌파를 약화, 파멸시키는 데 훨씬 더 관심이 있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386)


20세기 현실의 반대자인 노엘 브레일스포드는 효과를 위해 자신의 양심을 권력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397)


프리트베르크 - 19세기의 탁월한 개인 금융업자

일단 상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사가 효과적으로 일하게 만드는 것이 하급자로서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자 해결 방안은 아주 간단했다. (417)


“소매에는 오직 두 가지 원칙만 있네. 첫 번째 원칙은 ‘2센트 에누리에 안 넘어오는 고객은 없다’이고, 두 번째 원칙은 진열해 놓지 못한 상품은 팔 수 없다’는 거지. 나머지는 모두 노력이야.” (424)


“어리석은 고객은 없어. 단지 상인이 게으른 거지. 고객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어리석다고 말해서는 안 돼. 고객을 ‘재교육’시키려고 해서도 안 돼. 그건 상인이 할 일이 아니거든. 상인이 할 일은 고객을 만족시키고 그들이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것이지. 만일 고객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 같다면, 밖으로 나가 고객의 입장에서 상점과 상품을 살펴보는 거야. 그러면 그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 단지 그들의 현실이 상인의 현실과 다를 뿐이야.” (424)


“고객의 불만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해.” (426)


헨리 아저씨가 주장한 방침은 모두 그 자신이 밖에 나가 관찰해서 깨달은 것이었다. (427)


나는 좋은 예술가나 좋은 과학자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좋은 상인의 마음은 헨리 아저씨의 마음이 움직이는 식으로 가장 분명하고 가장 구체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일반화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428)


“특별사업이란 내가 적절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생기는 리스크 외에 다른 리스크가 없어야 하오. 그리고 최소한 돈의 두 배는 거둬들여야 하죠. 투기사업이란 리스크가 높은 사업을 말해요. 반면에 그 사업을 성공시키면 최소한 투자액의 다섯 배를 보장하죠.” (440)


난 내가 그 회사를 위해 기여하고 뭔가 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투자하지 않소. 머리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은 오래 전에 버렸지요. (444)


19세기의 은행가는 사라졌다. 아니, 최소한 그들의 ‘시티’에 존재했던 특유의 문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을 상징으로 그물망으로 이해하는 그들의 방법은 보편화됐다. (447~8)


로베트트와 파르크하슨 - 사업가에게 여성이 미친 영향

그는 우울하고 감정적이었으며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통찰력이 있었다. 그는 결코 충동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이런 통찰력은 여러 주나 여러 달 동안 조용히 사색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는 연구와 분석을 몹시 싫어했다. (452/453)


3부: 순수의 절정기

헨리 루스 - <타임>, <포춘>, <라이프> 잡지 왕국의 제왕

관계가 진지해질 조짐이 보이면 곧 우리의 근본적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다. (467)


나는 글을 쓰는 일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책을 내는 것은 공격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474)


지식인은 이제 더 이상 여러 분야의 아마추어가 아니라 자신의 전문 분야를 지식의 영역과 결부시킬 능력이 있는 전문가다. (493)


독자가 그 출판물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으면 광고가 판매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런 출판물에 들어가는 광고는 제품의 가치를 믿지 않게 만들며, 그러면 광조주는 그 출판물을 더 이상 이용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돈을 주고 산 최고의 발행부수는 파멸을 불어 온다. (496)


미국 잡지는 현격한 변화에 직면해 있다. 마셜 맥루안이 “인쇄된 말은 죽었다”고 한 것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죽은 것은 우편으로 전달되는 말이다. 편집자와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메시지일 뿐, 전달자가 누구인가가 아니다. (496)


전자전송은 엄청난 경제적인 이익과 함께 융통성, 다양성, 편집의 개성에 있어 엄청난 이익을 제공할 것이다. (497)


잡지는 계속 살아남아도 우편 전송은 구시대의 유물이며 이미 사라지고 있다. (498)


“나는 누가 국가의 정책을 만들었는지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국가의 비전을 만들어 나가겠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505)


플러와 맥루안 - 테크놀러지의 위대한 예언자

어떤 일이 달성될 때 마다 나는 그것이 사명감을 갖고 한 가지에 정진하는 사람들이 해낸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버키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도 없이 황무지에서 40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비전에 헌신했다. 맥루안은 비전을 찾는 데 25년을 소비해서 마침내 비전이 그를 붙잡았다. 그 역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시대가 왔을 때 영향을 주었다. (507)


맥루안에게 기술이란 인간의 자기완성이며, 인간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시켜 완성해 가는 수단이다. 다시 말하면, 동물이 자연적인 친화를 통해 특정 기관을 새롭게 발달시켜 다른 동물이 되는 것처럼, 인간은 새로운 도구를 개발해서 자신을 성장시키고 다른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508/509)


맥루안의 가장 중요한 통찰력은… 기술이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확장’이라고 본 것이다. 기술은 ‘인간의 주인’이 아니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킨 바로 그만큼 인간과 인간의 본성,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을 변화시켰다. (524)


버키 플러와 마셜 맥루안은 내게 한 가지 목표에 정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례로 보여준 사람들이다. 나를 포함해 나머지 사람들은 좀 더 다양한 재미를 즐기기는 하겠지만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다. 하지만 플러나 맥루안 같은 사람은 ‘사명’을 수행한다. (526)


앨프레드 슬론 - 절대적 권위로 GM을 이끈 전문 경영자

<기업의 개념>이 지난 30년 지속됐던 ‘경영학 선풍’을 일으킨 것은 내겐 행운이었다. 나는 우연히 그런 시류의 선구자격인 사람이 됐다. 어쨌든 경영학이라는 학문의 주요한 관심사인 조직과 사회의 책임, 개인과 조직의 관계, 최고경영자의 기능과 정책결정 과정, 관리자의 양성, 노사관계, 집단 관계, 소비자 관계(심지어 환경까지도) 등이 모두 <기업의 개념>에서 다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제들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다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43).


이 경연 대회를 통해서 알게 된 또 한 가지는, 고용인들은 자기 직업과 업무에서 만족감을 느끼기를 원하고, 그 일이 무엇이든지 자기가 보수를 받고 있는 일에서 배제되는 것만큼 모욕적인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572)


“우리가 실수를 적게 하는 것은 사람들을 잘 판단해서가 아니라 신중하기 때문이죠.” (582)


“사람에 대한 결정보다 더 냉정한 것은 없습니다. 회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을 적소에 잘 배치시키는 것이 전부에요. 그게 회사의 역할이에요.” (583)


슬론은 그 어떤 것보다 사람에 대한 결정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601)


그에게 전문가란 관심사가 없고, 신념도 없고, 사생활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문가란 자신의 관심사와 신념과 사생활을 공적인 업무와 분리할 수 있는 사람을 뜻했다. (602)


슬론은 전문 경영인들에게 좀 더 많은 권위를 주고 싶어했고, 따라서 그들이 높은 책임감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직업적인 권한으로 국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외부의 영역에서 책임을 받아들이거나 주장하기를 거부했다. (606)


그들은 항상 ‘공적 책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전문적’인 것에만 제한하려는 고집 때문에 공격을 받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한 사회에서 조직들은 (그리고 그 조직을 관리하는 ‘전문인들’까지도) 반드시 공공복리를 위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문 경영자밖에 없다. (606/607)


그 밖의 사람들 - 대공황 시기 미국 사회에 대한 스케치

서로가 도우면서 살아가는 자세는 대공황에 대한 미국인만의 대치법이었다. 대공황에 대응하는 미국인의 방식은 자연재해를 극복할 때와 똑 같은 방식이었다. 공동체는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각자가 상대방의 구원자가 됐다. 1930년대 미국인들은 대공황을 마치 자연재해를 회상하듯 이야기했다. (609)


서로가 도우면서 살아가는 자세는 대공황에 대한 미국인만의 대처법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현상이 없었고, 오히려 대공황으로 인해 의심과 무뚝뚝함, 두려움, 질시만 더 깊어졌다. (621)


경제적으로 경기 침체는 ‘재앙’이 아니라 일종의 ‘새로운 정상상태’다. 하지만 ‘중심을 유지하지 못하겠다’고 느꼈던 유럽과는 달리 미국은 ‘중심’을 유지했다. 사회와 공동체가 건전하고 활력이 넘쳤으며, 사실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626)


대공황 때 종족주의가 정점에 도달했던 이유는 분명 당시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도덕하고 심각한 해약을 끼칠 수 있다. 하지만 차별은 순수한 동기로 이루어졌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종족주의가 대공황 시기 미국인의 삶과 상상력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아침에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637)


기술은 미국 흑인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 기술은 대량생산 산업 분야에서 대체 일자리를 창조해 냈고, 그곳으로 숙련되지 않은 산업화 이전의 남부 흑인 소작농들이 이주해 들어갈 수 있었고, 돈을 벌 수 있었으며, 학교에 다니는 것은 물로 노조에 가입하고 투표권이라는 정치적 권력도 누릴 수 있었다. (644)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고결함을 통해 일어섰다. 고결함은 흑인 지도자들에게 내적 자주권과 도덕적 권위를 부여했고, 그것은 자기와 같은 흑인들뿐만 아니라 미국의 백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646)


강연은 대단히 힘든 노동이었다. 그것은 낯선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는 의미도 됐다. (662)


강연은 어떤 국가를 직접 보고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당시 나는 대부분 대도시에서 연설했지만, 강의는 점점 더 작은 단과대학에서 했다. 그들은 해외 출신에 이해력이 빠르고 개방적이고 매력적인 누군가에 목말라 있었다. (664)


유럽이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유럽은 세련미, 즉 ‘문화’와 ‘질적으로 우월한 삶’의 상징으로서 미국인들에게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았고, 특히 미국 역사상 그 이전 또는 그 이후 어떤 시대보다 그 시절에 더 경건하게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572)


뉴딜은 미국인의 근본 믿음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메리카 합중국은 다른 나라들처럼 하나의 국가나 제도가 아니라 가치관이다. (674)


미국은 점차 대공황의 미국에서 전쟁 이전의 미국으로 전환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설정된 기본 입장이 40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미국의 국내 및 외교 문제를 지배하고 있다. (680)



3. 내가 저자라면


흔히들 사람이 재산이라고 말한다. 그 사람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도 한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어떤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어떤 영향을 받으며, 그들과 어떤 일을 했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통해 그 사람에 대해 판단할 수 있고, 그 사람의 가치가 평가되기도 한다.


<피터 드러커 자서전> 이 책은 지금까지 내가 접한 여느 자서전들과는 그 형식과 전개 방식에 있어 확실히 달랐다. 보통의 자서전이 어린시절, 유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연대순에 따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형식을 취하는 데 반해, 드러커는 그가 살면서 접한, 그가 영향을 받은 주변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생각과 시선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타인의 삶을 통해 다양한 시선으로 배우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다양성에 매료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름대로 흥미로운 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가 얼마나 인습에 순종적인지, 또는 얼마나 보수적인지, 아니면 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지 상관없이, 일단 그가 자신의 일이나 지식, 흥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매력적인 존재로 돌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결국 개별적인 존재다." (P11)


저자가 이 책의 구성원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는 자신의 직접적인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통해 다양성, 다원성, 독창성 등 다양한 시선, 열린 시선으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치고 있다.


평범한 인물에게 배우다

드러커의 유년 시절, 그를 지식인으로 키우고 그의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그의 친할머니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는 할머니에게서 음악을 비롯한 다방면에서의 지식, 사회생활에서의 예의범절,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 등 삶의 교훈과 지혜를 배웠다.


엘자와 소피, 이 두 사람에게서 드러커는 “교육과 학습이 대단히 수준 높고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소피는 아이들에게 깨달음과 학습을 제공하는 교사였고, 엘자는 아이들에게 기술과 비전을 제공하는 교육자였다. 그는 두 스승으로부터 가르치는 재능이 더 뛰어난 선생님과 학습을 위한 안내자인 교육자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스승들을 만나왔지만, 이 자매 선생님보다 더 큰 교육자를 만나보지 못했다고 한다. 엘자와 소피, 이들은 드러커가 교육자의 길로 들어서는 데 훌륭한 역할 모델이 되어주었고, 드러커가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에게 끝없는 영감을 불어넣어준 인물이었다.


위대한 인물에게 배우다

드러커는 미국의 유명한 외무부 장관 헨리 키신저를 키운 크레머와 나눈 대화를 통해 공적인 일에는 개인이 뛰어나다는 것만 갖고는 부족하고, 반드시 연속성이 필요하며, 진정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위대함을 이어받을 사람을 육성해야 한다는, 현대 기업 경영에서도 중요 주제로 다뤄지는 ‘위대한 사람 패러독스’를 주장했다. 크레머는 드러커의 진정한 관심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전문 경영인에게 배우다

헤메와 게니아에게서는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힘과 옳다고 믿는 일에 온 몸을 바쳐 싸우는 용기, 전략을 수립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을 보게 된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말고 할 일을 지시하라’는 게니아의 좌우명은 훗날 드러커의 경영 이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GM를 이끈 앨프레드 슬론과의 만남은 드러커에게 최초로 대기업의 경영 컨설턴트로서 경험을 쌓는 기회를 열어 주었다. 슬론은 자신의 신념과 업무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빈틈없는 원칙주의자였고, 매사에 공정했고, 다양성을 인정했고, 전문 경영자가 무엇인지를 제시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공공복리를 위한 기업 책임에는 소홀했고, 드러커는 전문경영자들이 반드시 공공복리를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슬론은 드러커와 많은 차이를 보였지만 드러커가 끝까지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 든든한 후원자였다.


또, 드러커는 폴리니가의 예를 통해 사회 탐구의 의미를 살펴보고, 19세기의 탁월한 개인 금융업자였던 프리트베르크의 구시대적 삶을 추적하고, 타임과 포춘, 라이프 지를 창간한 헨리 루스라는 인간의 삶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자신의 삶을 직접적으로 서술한 책은 아니지만, 타인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독특한 시도로 자신의 살아 온 역사를 다른 이의 삶을 통해 관찰할 수도 있음을, 이러한 방법도 있음을 제시해 주고 있는 듯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다양성이 있으며, 그는 자신의 삶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한발 짝 물러나 그들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자신의 인생과 학문의 교훈으로 삼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이고, 그러다 보니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고 배우게 되는 것 같다. 드러커의 시선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지혜, 위대함, 훌륭함을 보게 되었다. 또한 이로 인해 드러커, 그가 의도한 대로 그의 성장 배경과 삶을 조망할 수 있었고, 그가 가졌던 생각의 원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에서 배우고 사람에게서도 배운다는 말을 그야말로 실감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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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프로페셔널의 조건 - 피터 드러커 [1] 書元 이승호 2009.10.11 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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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4 피터 드러커 자서전 효인 2009.10.05 2341
2053 피터 드러커 자서전 [2] 예원 2009.10.05 3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