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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5일 15시 20분 등록

활쏘기의 선

오이겐 헤리겔 지음/창호 옮김 삼우반(2008)

원제 : zen in der Kunst des Bogenschiessens

 

 

저자소개

 

오이겐 헤리겔 (Eugen Herrigel)

독일의 사상가, 철학자, 1884년 케엘(Kehl)태어났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신칸트학파의 두 대가인 빈델반트(W.Windelband)에게 배우고 리케르트(H.Rickert)의 지도하에 교수 자격 논문을 썼다.

192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로 있떤 중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의 초청을 받고 1924년부터 1929년까지 동 대학 객원교수로 철학을 강의했다. 귀국 후 1951년 까지 에를랑겐 대학 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사상적으로는 신칸트학파와 결별하고 독일 신비주의와 일본 선사상을 연구햇다. 1955년 사망했다.

저서로 [활쏘기의 선] 외에 칸트에 대한 연구서인 [형이상학적인 형식]과 유고집 [선의길]이 있다.

이 책의 서문을 쓴 다이세스 스즈키(Daisetz. T. Suzuki, 1869-1966)는 선불교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일보느이 선사이자 불교철학 교수로서 교토 대학과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의하며, 동양의 선사상을 서양 문화권에 전파했다. [선불교 입문 Introduction of Zen Buddhism] 등 선에 대한 많은 책과 논문을 썼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들어 온 글귀

 

서문

p6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식을 무의식의 상태에 조화롭게 합치시켜야 한다.

 

누군가가 진실로 활쏘기의 대가가 되기를 원한다면, 기술적인 지식의 습득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기술(Technik)을 뛰어 넘어서, 그 기예가 무의식의 상태에서 자라나는 무능의 기예로 되어야 한다.

 

궁사는 자기 앞의 과녁을 맞히는 일 이외에는 자기 자신조차 의식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의식의 상태는 궁사가 자기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고 또 완벽한 기술적 숙련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을 경우에만 도달할 수 있다. 

 

이 상태는 궁도를 배우는 과정에서 거쳐가는 일련의 발전단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다.

 

p7

전혀 새로운 질서에 속하는 이 다른 경지를 해탈이라고 한다. 그것은 직관이지만, 보통 직관이라고 불리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프라주나(prajna, 반야(般若)의 직관이라고 부른다. 프라주냐는 초월적 지혜라고 바꿔 말 할 수 있다.

 

프라주냐는 모든 사물의 총체성과 개별성을 한꺼번에 파악하는 직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숙고의 과정 없이 영(Zero) 곧 무한이고, 무한이 곧 영임을 인식하는 직관이다. 이러한 인식은 상징적이거나 수학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경험이다.

 

그러므로 해탈은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자아의 한계를 넘어선 피안의 영역이다.

 

p7-8 선과 기타의 종교적, 철학적, 신비주의적 교설 간의 특징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선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 결코 소멸되지 않고, 또 실제의 삶에서 응용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세속의 얼룩지고 번잡스런 연극으로부터 초탈한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선이 활쏘기 또는 검도, 꽃꽂이, 다도, , 예술등 다른 기예와 관계를 맺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반성하고 숙고하고 개념을 만들어 내는 순간, 원초적인 무의식의 상태는 사라지고 생각이 떠오른다.

 

p8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이지만, 계산하고 사고하지 않을 때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 낸다. 어린아이다움은 오랜세월에 걸친 연습과 자기 망각의 기예를 통해서 다시 얻어진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사고하지만 그럼에도 사고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사고한다.

 

p9 한 인간이 이런 정신적발전단계에 도달했다면, 그는 인생의 선의 )대가이다. 그는 화가처럼 화폭과 붓 그리고 물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p8-9

오조산의 법연은 말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어 허공을 한 장의 화선지로 삼고, 바다의 물결을 먹으로, 그리고 수미산을 붓으로 삼아서 다섯 글자를 썼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그에게 나의 좌구를 드리고, 깊이 머리를 조아린다.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느니,

 

( 祖師西來意 :  이 다섯 자의 한자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최초의 스승이 서쪽에서 온 이유이다. 이 주제는 자주 선문답의 내용을 이룬다. 그것은 선의 본질에 대해 묻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이해되면, 선은 이 육체 자체이다.)

(坐具 : 좌구는 선승들이 가지고 다니는 한 가지 물건인데, 부처나 스승에게 절을 할 때 앞에 펼쳐 놓는 것이다.)

 

-       다이세쓰 스즈끼 (Daisetz. Suzuki)

 

 

선과 활쏘기

 

p16

극동지역에서는 옛날의 무기가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병기로 대체된 것이 불과 몇 십 년밖에 되지 않아서 그 사용이 중단되기는커녕 더욱 개량되고, 갈수록 점점 더 폭넓은 층에 보급되고 잇다.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하나의 의식(儀式)을 의미한다.

 

p9

활쏘기의 고유한 정신은 유혈이 낭자한 싸움에서 그 고유성을 입증할 필요가 사라진 오늘날 더욱 순수하고 완전하게 되었다.

 

p17-18 활쏘기의 위대한 가르침은 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활쏘기는 궁사의 자기자신과의 대결인 한에서 여전히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이 대결의 방식은 외부적인(예를 들면 구체적인 적과의)대결을 퇴행적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결을 떠받치고 있는 근거이다.

그러므로 궁사의 자기자신과의 대결에서 이 기예의 비밀스런 본질이 드러난다. 궁도의 전승이 과거 무사도적 실천이 요구했던 유용성을 부정한다고 해도 본질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p20

선 불교라고 불리는 디아나 (Dhyana, 선종 禪宗)불교이다. 선불교는 사변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 즉 존재의 끝이 없는 근거로서 지성에 의해서는 결코 이해할 수도 또는 파악하거나 해석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추구한다.

 

p21

활과 화살은 모두 그것들과 독립해 있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한 핑계이며, 목표 자체가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정이고, 마지막의 결정적인 도약을 위한 보조물일 뿐이다.

 

 

p22

선의 전도사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선의 본질에 대한 유럽인들의 통찰은 지극히 초라한 실정이다. 마치 선의 본질 자체가 깊숙한 틈입을 거부하기라도 하듯 몇 걸음 감을 잡아 들어가다보면 곧 넘어설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다. 깨칠 수 없는 어둠에 쌓인 채 선은 동아시아의 정신적 삶이 제기한 특별한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그것은 풀 길이 없으나,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p22-23

현명한 사람이라면 선사에게 해탈의 경험을 그 사고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진리를 단순히 풀어서 쉽게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은 순수한 몰입의 신비학에 가깝다. 신비적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국외자에 머무른다. 모든 진정한 신비학을 지배하는 이 철칙에는 예외가 없다.

 

 

p23

선은 다른 신비학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신비가인 사람만이, 그래서 타인의 신비적인 경험을 신비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조작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p23-24

선을 통해서 변화를 겪은 사람, 진리의 불을 통해서 깨달은 사람은 눈에 띄게 남다른 삶을 영 위한다.

 

진리에 이르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던가!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절망스런 느낌이 얼마나 자주 그를 괴롭혔던가! 그러나 어느 날 그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고, 심지어 자명한 것이 되었다.

 

p24-25

선사들은 경험 많은 스승의 세심한 지도 없이는 아무도 그 길을 찾아갈 수 없고, 도 대가의 도움이 없이는 완성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p25

선 자체에 대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결심을 하는 일에서부터 이미 진지한 검토 과정이 요구된다.

 

p26

선의 본질을 선의 절대적 여향을 받은 한 가지 기예를 통해서 밝혀 보고자 한다. 이 해명은 물론 선의 근본이 되는 의미에서의 해탈이 아니다. 그럼에도 적어도 마치 짙은 안개속에 있는 듯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마치 폭우 속의 희미한 섬광처럼 먼 곳에서 치는 벼락을 알려 주는 것, 그런 것이 있음을 보여 준다.

 

p27

독자들이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 (이 입문가정에 이미 많은 수수께끼들이 숨어 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잇는 것은 위대한 가르침의 정신으로 들어가기까지 넘어서야 했던 저항감과 떨쳐야 했던 거부감에 대해 회상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내 의도를 달성할 다른 길이 없기에,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다. 

 

p27-28

언제나 활쏘기의 기예가 서술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자주 느끼거니와 활쏘기는 배우기도 어렵지만, 서술하기는 더욱 어렵다. 여기서 나의 서술은 선이 숨쉬고 있는 곳에 접해 있는 저 먼 지평이 보이기 시작할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고작 신비주의 서적들에 피상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졌다. 또한 이른바 신비적인 근본 현상의 윤곽을 잡을 수는 있었지만, 그 비밀은 높은 담처럼 둘러싸고 있는 경계선을 뛰어 넘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수업

 

p29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고작 신비주의 서적들에 피상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졌다.  또한 이른바 신비적인 근본 현상의 윤곽을 잡을 수는 있었지만, 그 비밀을 높은 담처럼 둘러싸고 있는 경계선을 뛰어 넘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p30

오직 진정으로 속세를 떠난 사람만이 초탈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으며, 자기를 완전히 떠나 무아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만이 산을 넘어서 신과의 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즉 스스로 경험하는 외에는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란 없으며, 경험하지 않고는 신비에 대한 모든 논의는 단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위대한 대가들과 수백 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초탈에 이르는 길은 여전히 존재하는가?

 

p30-31

목표에 도달하도록 해 준다는 여러 과정과 단계들에 대해서 많이 들었지만, 그런 대로 만족할 만한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 필요한, 한 구간만이라도 명인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정확한 방법적 지침 같은 것은 없었다.

 

p31

아무리 시도를 해 보아도 마치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있는 느낌이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그 문을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그리움은 계속 남았고, 이윽고 그리움이 사그라들었을 땐 그리움에 대한 그리움이 남았다.

 

p32

지금까지 진지하게 선을 배우고자 했던 유럽인은 아무도 없었고 또 선 자체가 학설이 되기를 전적으로 거부하므로 철학 교수인 나를 이론적으로 만족시킬 전망도 없다는 것이었다.

 

올바른 호흡법

 

p35

기예없는 기예의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첫 시간에 벌써 알게 되었다.

 

p36

활쏘기는 근육을 단련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요, 활시위를 당기기 위해서 온몸의 힘을 쏟아서는 안 됩니다. 단지 두 손만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팔과 어깨의 근육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마치 활쏘기와 무관한 듯이 보여야 합니다. 이것을 배우면, 비로소 활 당기기와 쏘기가 정신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중의 하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p39

그게 안되는 이유는 숨을 바르게 쉬지 않기 때문입니다. 숨을 들이마신 뒤 가만히 호흡을 눌러서 배를 약간 팽팽하게 하고, 잠시 그대로 계십시오, 그리고 나서 가급적 천천히 그리고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잠시 멈춘 후 다시 빠르게 공기를 들이마시도록 하십시오, 내쉬고 들이수미을 계속하는데, 그 리듬은 차차 저절로 정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호흡을 올바로 하면 활쏘기가 날이 갈수록 쉬워짐을 느낄 것입니다. 호흡을 통해서 모든 정신적 힘의 원천을 발견할 뿐 아니라. 이 샘물이 점점 더 풍부하게 흐르면서 긴장을 풀수록 점점 더 가볍게 당신의 사지로 흘러드는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p40

선생은 숨을 내쉴 때 가급적 느리면서 고르게 흘러나오다가 마침내 멈추게 되는 과정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그래서 내쉬기를 하는 콧소리와 함께 하도록 했다. 그것은 연습과 감독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숨결과 함께 소리도 멈추었을 때 비로소 다시 공기를 마시도록 했다.

 

한 번은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들숨은 매고 묶으며, 들이마신 숨을 간직함에서 모든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날 숨은 모든 제한을 넘어섬으로써 묶인 것을 풀고 또 완성한다고 하였다.

 

 

p41

활을 잡고, 화살을 재고, 활을 높이 들고, 활을 당기고, 최대로 당긴 상태에서 잠시 멈추고, 쏘는 것이다. 각 단계는 들숨으로 시작되어서, 숨을 눌러 멈춘 상태에서 지속되고, 날술과 함께 마감된다.

 

호흡은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았고, 각각의 자세와 동작들에 명확한 강세를 주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리드미컬한 과정으로 엮어 주었다.  그래서 부분들로 나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전체과정은 철저히 완결된 살아 있는 무엇처럼 느껴졌다. 전체의 의미와 성격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부분을 마음대로 덧붙이고 떼어낼 수 있는 것이 통상적인 운동 연습과는 전혀 달랐다.

 

올바로 숨을 쉬는 것이 처음에는 얼마나 어렵게 느껴졌던가 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올바로 호흡했지만, 활을 당길 때 팔과 어깨 근육에 힘을 빼야 한다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며, 나도 모르게 다리의 근육이 격렬하게 경직되었다. 마치 두 발로 버티고 견고하게 서 있는 데에 내 목숨이 걸렸다는 듯이, 그리고 마치 가이아의 아들인 안타이오스처럼 모든 힘을 대지에서 빨아들여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면 선생이 얼른 달려와서 다리 근육의 특히 예민한 부분을 아프게 지압하곤 했다.

 

당신이 애를 쓴다는 사실, 그에 대해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바로 문제입니다. 다른 일은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오직 숨쉬기에만 정신을 집중하십시오!

 

ð     이너게임의 원리

 

문제는 내가 헛되이 캐내려고 했던 기술적인 요령이 아니라, 나를 자유롭게 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호흡법에 있었던 것이다.

 

p44

처음부터 올바른 호흡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위대한 명인은 동시에 위대한 스승입니다. 우리에게 이 두 가지가 한데 속한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만약 수업을 호흡법에서 시작했다면, 아마도 호흡에 결정적인 것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먼저 스스로의 거듭된 시도를 통해서 좌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던져주는 구명튜브를 움켜쥘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선생님께서는 당신과 모든 제자들에 대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알고 잇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이것은 정말입니다. 그는 제자들의 영혼에서 우리들이 인정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일고 계시지요.

 

처음에 쉬우면 나중에 어렵다.

 

P45-46

왜 사람들이 상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가해온 공격을 태연히 아무 힘도 쓰지 않고 유연하게 받아 줌으로써 오히려 그 힘을 되돌려 상대를 쓰러뜨리는 체계적인 호신술을 부드러운 기예(유도 柔道)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부터 왜 유도의 원형으로서, 피해가지만 결코 후퇴하는 법이 없이 흐르는 물을 드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

p46

처음에 쉽게 터득한 자는 나중에 그만큼 어렵다.

 

p47

당신이 지금까지 배운 것은 모두 발사를 위한 준비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뿐만 아니라 특히 어려운 과제 앞에 서 있으며, 동시에 활쏘기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선생의 경우 발사는 너무도 단수하고 평범하게 보여서 마치 장난인 듯이 여겨졌다.

큰 힘이 요구되는 일을 힘쓰지 않고 해내기, 바로 거기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동양인들은 특별히 예민하고 또 높이 평가함에 틀림없다. 반면 나에게 그 상황은 부드러운 발사가 명중률을 높여 준다는 점에서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p50

선생은 올바른 발사를 계속해서 시범해 보였다. 나도 계속해서 그와 똑같이 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점점 더 불안정해질 뿐이었다. 마치 다리가 1000개인 동물이 어떤 순서로 다리를 움직여야 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것과 같은 상황에 빠진 듯했다.

 

해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하면 될 지를 궁리하지 마십시오  라고 선생은 말했다. 

쏠 때는 쏘는 사람 자신도 모르게 쏘아야만 흔들림이 없습니다. 활시위가 엄지손가락을 수간적으로 베어버린듯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오른손을 의도적으로 열어서는 안됩니다!

 

p51 발사가 제대로 되려면, 손이 열릴 때 움찔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 보아도 항상 실패하고 맙니다. 제가 시위를 가능한 한 세계 잡고 있으면, 손을 열 때 흔들리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가급적 유연하게 잡으려고 애를 쓰면, 활시위는 완전히 당겨지기도 전에 정말 의도하지 않았는데 너무 빨리 튕겨 나갑니다. 이 두 가지 방식의 실패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데, 출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p53

올바른 순간에 올바른 발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성공에 온 정신을 쏟는 것이 아니라 미리부터 실패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당신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그런 동작을 스스로 불러오는 길밖에 없는데, 그러면 손은 올바른 방식으로, 즉 어린 아이의 손처럼 열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손이 잘 익은 과일의 껍질처럼 저절로 벌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결국 목표를 맞추기 위해서 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기기는 그런 목적을 위한 수단입니다. 이런 관계를 도저히 도외시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는 아직 그것을 모르지만, 저는 그것을 없는 일로 할 수가 없습니다.

 

p54

그러자 선생은 언성을 높여 말했다.

진정한 기예는 목적도 의도도 없습니다. 목표를 정확하게 맞추기 위해서 화살을 발사하는 법을 배우는 데 집착하면 할수록 목표를 맞추기는 더 어렵고, 또 발사하는 법은 더 배워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방해가 됩니다. 당신은 의식적으로 행하지 않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p55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생각에 잠긴 채 물었다.

참된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배우지요?

자기 자신으로부터 멋어남으로써이지요, 단호하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버려서, 오직 의도하지 않은 긴장만이 남아 있도록 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의도를 가지고 무의도적으로 되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아직 어떤 학생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답을 모르겠군요

 그럼 언제 이 새로운 연습을 시작하게 됩니까?

때가 올때까지 기다리시오!

 

아무 의도도 갖지 않고 그저 기다리는 것이 활이 충분히 당겨진 상태에서의 발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물론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연습 또 연습

 

p59

앞으로 수업에 오실 때는 오시는 길에서부터 마음을 가다듬도록 하십시오, 여기 이 연습장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중요하고 실제적인 것은 오직 하나, 즉 활쏘기 뿐이라는 듯이 다른 모든 것은 모른 척하고 흘려 지나치십시오!    하고 선생님은 우리에게 요구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도 선생은 작은 부분들로 잘게 나누고, 그것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연습하게 했다. 다만 여기서도 단지 짧은 암시만을 해 줄 뿐이었다.

 

p60

올바른 발사가 이루어지려면, 이제 육체의 이완은 영혼의 이완 속에서 그 궁극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즉 단지 정신을 운동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자유롭기 때문에 운동하며, 근원적인 운동성 때문에 자유롭다.

 

p60-61 이 근원적인 운동성은 종종 정신적인 운동성이라는 말에서 이해되곤 하는 것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육체적인 이완과 정신적인 자유의 두 가지 상태 사이에는 수준의 차이가 놓여 있다.

그 차이는 단지 호흡법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아의 경지를 통해 모든 종류의 구속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이로써 정신은 자기 속에 침잠하여 자신의 이름 지을 수 없는 근원의 완전한 영향아래 놓이게 된다.

먼저 감각의 문을 닫으라는 요구는 감각적인 세계를 억지로 애써 외면함으로써 충족되지 않고, 오히려 아무 저항 없이 비켜 나가려는 마음의 자세를 통해서 충족된다. 아러한 무위의 태도가 본능적으로 달성되려면 영혼은 내적인 정지 상태를 필요로 하며, 이 내적인 정지는 호흡에 집중함으로써 얻어진다.

 

p61 호흡에 몰입하면 할수록 외부의 자극은 점점 퇴색된다. 외적 자극들은 서로 뒤섞여 몽롱한 소음 속으로 가라앉는데, 그 웅웅 거리는 소리는 처음에는 아직 어렴풋하게 들리지만, 마지막에 일단 익숙해지면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파도소리처럼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

p61-62

단지 숨을 쉰다는 사실만을 알고 또 느낀다. 이 느낌과 앎에서마저 벗어나는 데 새로운 결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호흡은 저절로 느려지고, 점점 더 적은 공기를 소비하며, 마침내 점차로 엷어지고 단조롭게 되면서 전혀 의식되지 않게 된다.

 

그러 이 고요한 침잠의 상태는 불행히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내부로부터의 방해에 시달리기 수비기 때문이다. 마치 무에서 또오르는 듯 뜻하지 않은 기분, 느낌, 희망, 걱정, 그리고 생각 들이 어지럽게 섞여서 떠오르며, 그것이 동떨어지고 낯선 것일수록, 그리고 의식을 집주하는 목적과 무관하면 할수록, 더욱 더 집요하게 달려든다.

 

이 내면의 동요는 마치 정신의 집중이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영역에 도달한 것에 대해 복수라도 하듯 우리를 위협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위협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데,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고요하게 호흡을 하며 머리에 떠오르는 것들과 친구가 되고 또 그것을 평정한 마음으로 관조하기를 배우며, 마침내 관조하는 것조차 귀찮아짐으로써 달성된다.  이렇게 해서 점차 우리는 잠들기 직전의 가수(假睡) 상태와 유사한 상태에 도달한다.

 

p63

이 상태로 완전히 빠져드는 이은 위험하므로 피해야 한다. 그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정신 집중의 특별한 도약이 필요하다.  그것은 밤을 꼬박 세운 사람이 그의 모든 감각이 깨어 있어야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때 스스로 가하는 충격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충격을 스스로 가하는 데에 단 한 번이라도 성공하면, 다음부터는 실수 없이 그것을 반복할 수 있다.

이러한 충격을 통해서 정신은 저절로 외부에 대해 무관심한 자기 내 약동으로 이행한다. 자기 내 약동의 상태는 아주 가끔 꿈속에서나 경험할 수 잇는 무중력감과 행복감을 점점 더 강화시킨다. 그리고 마음먹은 대로 에너지를 움직이고 단계에 맞추어 긴장을 높이거나 늦출 수 있게 된다.

p63-64

이 상태는 특정한 것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추구하고 희망하고 기대하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로서, 아무런 방향도 추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충만한 힘의 집중을 통해서 가능한 것은 물론 불가능한 것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상태이다. 이렇게 근본적인 무의도, 무자아의 상태를 선생은 정신적이라고 불렀다. 이 상태는 정신적인 각성으로 충만해 있고 그래서 또한 진정한 정신의 현존이라고도 불렀다.

정신은 아무런 특정한 장소에 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곳에 현존한다. 또한 정신은 이것 또는 저것과 관계하지만 그에 얽매이지 않으며, 동시에 근원적인 운동성을 결코 잃어 버리지 않기 때문에 현존한다. 마치 연못을 채우고 있으나 언제라도 흘러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물과도 같이, 정신은 자유롭게 때문에 매 순간 고갈되지 않는 힘을 발휘하고 또 비어 있기 때문에  만물에 스스로를 개방한다. 이 상태가 진정 근원적인 상태로서, 이는 텅 빈 원으로 상징되는 바, 텅 빈 원은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자에게는 모종의 의미로서 다가온다.

 

p64-65

모든 구속에서 벗어난 궁사는 어떠한 숨겨진 의도에 교란되지 않고, 오로지 정신의 현존의 충만 속에서 기예를 수련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자기 자신을 잊고 창조적인 과정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역으로 기예를 수련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 속에 침잠한 자가 본능적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상황에 대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먼저 그 상황을 의식으로 가져가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전에 벗어 던졌던 저 모든 관계로 다시 들어서야 할 것이다.

 

p65

그는 잠에서 깨어나 그날의 일정을 살펴보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지만, 깨달음을 얻어 근원적인 상태에 살면서 거기에 몸을 맡기고 있는 사람에게 비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행위 과정의 각 마디가 신의 섭리를 통해서 비로소 그의 손에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어떤 사건의 약동이 스스로가 바로 약동하는 운동인 사람에게는 얼마나 황홀하게 전달되는지를, 또한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행해지는 것임을 결코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요구되는 벗어남과 자기 해방, 완전한 정신의 현존에 도달하기 위한 삶의 내면화와 밀도화는 다름아닌 정신의 현존 자신에 의존하는 것이지, 좋은 소질이나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모든 힘의 발휘를 요구하는 수행의 과정이나 동시에 필요한 정신 집중이 저절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에 우연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행위와 수행 이 전에 , 모든 자기 헌신과 자기 투입 이전에 이 정신의 현존이 불러일으켜지고, 또 수련을 통해서 보전된다. 그러나 정신의 현존을 단지 가끔씩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순식간에 얻을 수 있게 되면, 비로소 정신집중은 활쏘기와 결부된다.

 

p66

활쏘기는 위대한 가르침을 드러내는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p67

요령 있게 배울 수 있는 것을 왜 신물이 날 정도로 세심하게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하는가를 이해하다. 모든 과정이 자신을 완전히 망각한 채 무심한 상태에서 저절로 벌어지는 일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데에 달려 있다면, 그의 외면적인 행동은 자동적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조종과 통제를 위한 숙고가 개입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

 

p69

적어도 전통적인 기예를 배우는 경우에는 언제나 그렇다. 시연과 시범, 그리고 공감과 모방, 이것이 교육에서 기본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p70

 제자는 세 가지를 이미 갖추고 있는데, 즉 예의범절, 자기가 선택한 기예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 스승에 대한 무비판적인 존경이 그것이다. 예로부터 사제간의 관계는 근본적인 삶의 유대에 속하기 때문에, 스승의 입장에서 보자면 수업의 틀을 휠씬 뛰어넘는 높은 책임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스승은 장황한 설교와 설명을 피하고 단지 간략한 지침들을 제시하는데 그치며, 제자로부터 어떠한 질문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덤덤하게 학생들의 실수 섞인 노력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 자립성이나 독창성 등도 바라지 않고 그저 참을성있게 제자가 성장하고 원숙해지기를 기다린다. 

 

p71

스승은 제자의 내면에 있는 예술적 재능을 일찍 깨우려하기보다는 무엇보다 먼저 제자를 완벽한 기술을 가진 장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제자는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통해서 이런 의도에 응답한다. 그는 더 이상의 욕심이 없는 듯 묵묵히 헌신적으로 순종을 하는데, 여러 해가 지난 후 그 동안 완전하게 익힌 기본 형식들이 더 이상 자신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제자는 날이 갈수록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여감을 기술적으로 손쉽게 실행할 수 있게 되며, 또한 세심한 관찰을 통해서 새로운 영감을 떠올릴 수 있께 된다. 말하자면 붓을 움직이는 손은 정신이 움직이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마음속에 떠오른 것을 그리고 완성한다. 그래서 제자는 정신과 손, 둘 중 어느 것이 그 그림을 그린 주체인지 알 수가 없다.

 

기술적 능숙함이 정신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활쏘기의 기예에서와 같이 모든 육체적, 정신적 힘의 집중이 요구된다.

 

그들은 생각에 잠긴 듯이 고요한 상태에서 예비동작을 행하고는 자기 자신을 망각한 채 작업 과정에 몰입한다. 그 시작부터 끝까지의 과정이 스승과 제자 모두들에게는 자기 완결된 사건으로 간주되는 듯하다. 이 모든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강력한 자기 표현력을 지니고 있다.

 

p73

그가 이러한 전통적인 의식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러한 준비과정이 동시에 창조를 위한 올바른 마음의 틀을 제시해준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준비작업을 할 때의 명상적인 고요함 덕분에 우리는 결정적 의미를 지닌 이완 힘빼기과 자시의 모든 힘의 조화, 그리고 정신집중과 정신의 현존 등을 달성할 수 있다.

 

p74 활쏘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기예들도 의식의 문제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선생의 100마디 말씀보다 이러한 의식이 제자로 하여금 다음의 사실을 훨씬 더 명료하게 깨닫게 해 준다.  즉 예술가의 올바른 정신적 상태는 준비과정과 제작 과정, 기술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상황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이 물 흐르듯 서로 교류하는 경우에만 달성될 수 잇따는 것을,

 

p75

그가 대가로 가는 길목에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위험이 또 하나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은 공허한 자기만족에 빠져 버리는 위험이 아니라(동양인들은 자아 숭배에 빠질 정신의 소질이 전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성취, 즉 그의 성공이 약속하고 명예가 부추기는 성취에 빠져 버리게 되는 위험이다. 이는 다시말해 예술가적 실존이 마치 그 자체로 자립적이고 타당한 삶의 형식인 듯이 행동하게 될 수 있는 위험성이다.

p76

모든 올바른 창작은 전정한 무아의 상태에서만 달성될 수 있음을 암시할 뿐이다.

그리고 진정한 무아의 상태에서 창작자는 더 이상 그 자신으로 그곳에 있을 수 없다. 오직 정신만이 그곳에 있으며, 또 특수한 방식으로 깨어 있다. 이 깨어 있음은 나 자신의 색조를 띠지 않으며, 따라서 더욱 제한 없이 모든 너비와 깊이를 듣는 눈과 보는 귀로관통한다.

 

스승이 이미 반복해서 말했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의 실상을 이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파악할 수 있게 된다. 

 

p76-77

그러나 이와 함께 하나의 결정적인 내적인 운동이 도입된다. 스승은이 운동을 뒤따를 뿐이며, 단지 방해가 될 뿐인 한 걸음 앞서 나간 가르침을 통해 그 진행과정에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 그는 가장 비밀스럽고 내면적인 방식으로 즉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직접적 전달을 통해서 제자를 돕는다. 불붙은 초로 다른 초에 물을 붙이듯 그렇게 스승은 진정한 기예의 정신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한다.

 

내적인 작업은 제자가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느끼고 또 언제나 다시 발견하는 자아로서 교양과 형성 과정의 소재로 된다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이 교양과 형성의 과정은 대가의 경지에 이름으로써 마감된다. 대가의 경지에서 예술가됨과 인간됨은 단어의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보다 고차적인 것 속에서 만난다. 왜냐하면 대가의 경지는 광대무변의 진리에 따라서 살고, 또 거기에 의지함으로써 근원적 기예가 된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삶의 형식으로서 인증되기 때문이다.

 

p78

대가는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발견한다. 대가는 예술가로서 성직을 수행하는 인간이며, 인간으로서 예술가이다. 그의 모든 행위와 무위, 창작과 침묵, 존재와 비존재에서 부처는 그의 가슴을 들여다보고 있다. 인간과 예술가와 작품, 이것들은 하나를 이룬다. 내적인 작품의 기예는 외적인 작품과 달리 예술가로부터 떨어질 수 없으며, 또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언제나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도 모르는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온다.

 

대가는 제자에게 내면적인 작품을 삶으로써 보여 주며, 단지 자신의 현존재를 통해서 설득한다. 이 단계에서 제자의 모방은 가장 최종적이고 성숙된 의미를 획득한다. 모방은 뒤쫓음을 통해서 대가의 경지의 본질에 참여할 수 있게한다.

 

p79

스승과 대가는 제자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자마자 제자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가도록 한다. 제자가 고독을 이겨 내도록 하기 위해서 스승과 대가가 할 일이 아직 한 가지 더 있다. 그는 자기보다 더 먼 데까지 나아가도록, 그리고 스승의 어깨에 올라서도록 진심으로 요구함으로써, 제자를 자기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대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길이 그를 어디로 인도든 간에 제자는 스승을 시야에서 잃을 수는 있을지언정 잊을 수는 없다. 초심자의 무비판적 존경과 예술가로서의 구원적인 믿음은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감사로 바뀌고, 제자는 스승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예들이 보여 주듯이, 이 감사의 마음은 일반적인 인간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정도를 휠씬 능가한다.

 

대나무 잎에 쌓인 눈처럼

 

p83

이 시기에 선생님은 철학입문서를 통독하려고 시도했는데, 그것은 어떻게하면 나의 전공 분야에 속하는 것들을 통해서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p92

내적으로 또는 궁사 자신에게 올바른 발사는 마치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듯이 느껴진다. 올바른 발사 이후에 궁사는 모든 올바른 행위와 더 중요하게는 모든 올바른 무위를 행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크나큰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마치 그것을 가지지 않은 듯이 가져야 한다고 선생은 엷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흔들림 없는 평상심을 유지해야만, 그 상태가 망설임 없이 다시 찾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어둠 속의 표적

p93

우리 속담에 100리 길을 가는 사람은 90리를 중간 지점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새로 배워야 할 것은 표적을 맞히는 것입니다.

 

p94 -95

화살이 정신적으로 충분히 멀리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궁사는 중간 강도의 활로도 정신이 결여된 궁사가 가장 강한 활로 쏘는 것보다 더 멀리 쏠 수 있습니다. 활의 대가들은 늘 겪고 있어서 잘 아는 사실이지요, 그러니 활이 문제가 아니라 활을 쏠 때의 평정심, 즉 활려과 깨달음, 이런것들이 중요합니다. 이 정신적 각성의 힘을 최대로 분출시키기 위해서는 의식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진정한 무용수가 춤을 추듯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지의 움직임이 단전, 즉 올바른 호흡이 이루어지는 곳으로부터 샘솟게 됩니다. 단지 외워서 반복하는 의식이 아닌 순간적인 영감으로부터 의식을 창조하는 듯이 행하게 됩니다. 거기서 무용과 무용수는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의식을 제례의 무용처럼 수행함으로써, 당신의 정신적 각성은 최고의 힘을 얻게 됩니다.

 

p96

활쏘기의 위대한 가르침은 사수 앞에 저만치 떨어져 잇는 표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단지 기술적으로는 결코 겨냥할 수 없는 표적에 대해서만 알 뿐입니다. 그 표적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부처라고나 할까요

 

p97

제발 명중이라는 말을 머리에서 지워 버리세요, 백발백중이 아니라도 명궁이 될 수 있습니다. 저기 있는 표적에 명중시키는 것은 최고도의 무심, 무아지경, 자기몰입, 또는 뭐라고 이름 붙이든 간에, 이런 상태에 대한 외적인 검증에 불과합니다. 통달에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사람만이 비로소 저기 외부에 있는 표적도 백발백중 맞출 수 있습니다.

 

p98

이 현묘한 연관에 대해 대강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과정은 지성의 접근이 불가능한 영역에 놓여 있습니다.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없지만, 그럼에도 너무 현실적이어서 어쩔 수 없이 그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상호일치들이 자연에는 이미 존재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자주 생각하던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거미가 춤추며 거미줄을 칠 때, 거미는 거미줄에 걸릴 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햇빛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춤추던 파리가 영문도 모른 채 거미줄에 걸립니다. 이 두 가지 사태를 통해서 춤추고 있는 것은 그것입니다. 이 춤 속에서 내면과 외면은 통일되어 하나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수는 외적으로 겨냥하지 않은 채 표적을 맞춥니다. 이렇게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군요

p101

선생은 의식을 춤추었다 그가 쏜 첫 번째 화살이 밝은 사대를 벗어나 깊은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화살이 꽂히는 소리를 통해서 표적에 명중했음을 알았다. 두 번째 화살도 명중햇다.

내가 표적대의 불을 밝혔을 때, 나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화살이 표적 정 가운데의 검은 점에 꽂혔고, 두 번째 화살은 첫 번째 화살의 깃을 찢고, 더 나아가 대를 약간 쪼개면서, 역시 검은 점에 나란히 꽂혀 있었던 것이다.

 

p102

이 두 개의 화살로 선생은 분명히 나도 명중시켰다. 밤새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나는 더 이상 내 화살에 대해서,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 걱정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행하는 최고의 정신 집중을 통해서, 활쏘기의 기예의 정신을 제자에게 전달했다. 오랫동안의 심사숙고를 거친 나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자신 있게 말하건대, 이심전심의 직접 전달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수사법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현실과정이다.

 

p104

발사가 잘못 됐다 하더라도 불쾌해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진작부터 잘 알고 잇는 사실입니다. 또한 발사가 잘 됐어도 기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쁨과 고통 사이를 오가는 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넉넉한 평정심을 통해서 그것을 초월하는 법을 즉 마치 당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잘 발사하기라도 한 듯 기뻐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도 당신은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은 아직 짐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p105

도대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가장 단순 명료한 것조차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군요 제가 활을 당기는 것인지, 아니면 활이 저를 최대의 긴장으로 당기는 것인지, 제가 목표를 명중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목표가 저를 맞추는 것인지, 그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면 정신적이고, 정신의 눈으로 보면 육체적인지, 또는 둘 다인지, 그도 아니면 둘 중 아무 것도 아닌지 활, 화살, 목표, 그리고 저 자신, 이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어서 더 이상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분리하려는 욕구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활을 잡고 쏘는 순간 모든 것이 너무도 말고 명료하며, 그저 우습게 느껴지기…”

이 때 나의 말을 끊으며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방금 마침내 활시위가 당신의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갔습니다.

 

시험

 

p107

구사의 정신적 태도에 휠씬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특히 관중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끼리만 있는 것처럼 차분하게 의식을 치르기를 기대합니다.

 

p109

그가 가장 상세히 설명했던 것은 기예 없는 기예의 본질에 대해서였는데, 활쏘기가 완성되려면 바로 거기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토끼의 뿔과 거북이의 머리카락으로 쏠 수 있는 사람, 즉 활()과 화살(머리카락)없이 명중시킬 수 있는 사람이 비로소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의 명인, 기예 없는 기예의 명인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기예 없는 기예 자체이며, 또한 명인인 동시에 명인이 아닙니다. 이러한 전환과 함께 활쏘기는 운동 없는 운동으로서, 춤 없는 춤으로서 선으로 이행합니다.

 

p109- 110

우리가 나중에 고향에 돌아가서 선생님 없이 어떻게 해야 계속 진보해 나갈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다.

두 분에게 시험을 보게 한 것으로 이미 그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스승과 제자가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하나인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나를 떠날 수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 넓은 바다가 가로놓여 있더라도 당신이 배운 대로 연습할 때는 나도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또 하루도 빠짐없이 (활과 화살없이도) 의식을 행하고, 또는 적어도 올바른 호흡 수행을 하라고 굳이 부탁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런 부탁을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당신이 정신적인 활쏘기를 결코 중간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로는 내게 편지를 쓰지 마시고  때때로 당신이 어떻게 활을 당기는지 볼 수 있도록 사진을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 수 있습니다.

 

p110-111

단 한 가지에 대해서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두 분은 최근 몇 년을 지내면서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활쏘기의 기예가 그렇게 한 것이지요, 궁사로서 겪은 자신과의 심오한 대결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마 그 변화를 못 느꼈겠지만, 고향에 돌아가 친구와 친지들을 다시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전처럼 그렇게 사이가 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일 것이고, 다른 기준으로 사물을 잴 것입니다. 나 역시 그랬고 이 기예의 정신에 접한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됩니다.

 

이별이 아닌 이별의 선불로 그는 나에게 그가 가장 아끼는 활을 주었다. 당신이  이 활을 쏠때면, 명인의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 활을 단지 호기심을 가진 사람 손에는 쥐어주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활이 더 이상 못쓰게 된 다음에는 기념품으로 소장하거나 하지 마십시오, 한 줌의 재밖에 남지 않도록 태워 없애 버리십시오.

 

명인의 경지

 

p114

내가 검도를 비교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단지 나의 스승인 아와 선생이 검을 정신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고, 또 가끔 궁도와 검도의 경험 사이에 놀라운 일치가 있음을 지적햇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무사도가 만개했던, 그래서 검술의 명인들이 자신의 솜씨를 생사를 건 싸움을 통해 판정시비의 여지없이 증명하던 시대로부터 전해지는 최고급의 문헌이 있기 때문이다.

 

p115

위대한 선사인 다쿠안의 서간집[흔들림 없는 파악 不動智劍抄錄] 으로서 선과 검도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칼 싸움의 실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글이다. 

 

유명한 검술의 명인에게 쓴 편지 형식의 이 글을 거의 완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한 것은 D. T. 스즈키의 큰 공적이다.

 

p116 -117

검도의 명인들 사이에는 자신의 경험과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명백한 상식이 하나 있다. 초심자는 아무리 힘이 세고 호전적이라도, 또 대담함과 용감성을 타고났다 해도, 막상 수련에 들어가면 원래의 순수함과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초심자는 칼싸움에서 생명을 해할 수 잇는 모든 기술적 가능성을 배운다. 그래서 이윽고 주의력을 극도로 집중시키고, 적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적의 공격을 기술적으로 방어하며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지만, 그럼에도 그는 검도에 입문하기 이전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던 때보다도 더 싸움을 못한다. 그때는 연습 경기여서 반은 재미로 그리고 반은 진지하게 순간적인 영감과 싸움의 재미가 요구하는 대로 멋대로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더 강하고 더 빠르고 더 많이 수련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약해서, 상대의 정확한 일격에 냉혹하게 내맡겨지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또 이에 적응해야 한다.

그에게는 지칠 줄 모르는 연습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고, 그의 스승도 우선은 달리 해 줄 말이 없다. 그래서 수련생은 다른 수련생들의 수준을,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수준을 능가하는 데에만 온 힘을 쏟는다. 그는 잃어버린 자신감을 조금 회복시켜 주는 한 가지 기술을 터득하고서, 추구하는 목표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스승은 그에 대해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데, 당연히 그럴수밖에 없다고 다쿠안은 단언한다. 왜냐하면 수련생의 모든 기량이란 단지 그의 심장이 칼로 도려내지는 데로 귀결될 뿐이기 때문이다. 

 

p117-119

부분별하게 싸움의 열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철함을 유지하는 법을 오랫동안 배운 사람, 또한 체력을 신중하게 배분하고 호흡이 긴 전투도 감당할 만큼 단련되었으며 원근에는 더 이상 대적할 자가 없는 사람, 이런 사람도 궁극적인 기준으로 보면 결국 실패하며 조금도 진보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가?

다쿠안에 따르면, 그것은 상대를 그리고 상대가 어떻게 칼을 휘두르는 지를 세심하게 살피는 일을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그를 공략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허점이 드러나는 순간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칼싸움에서 자신의 기예와 지식모두를 총동원하는 데에 기인한다.

다쿠안에 따르면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수련생은 평정심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한 발 늦게 결정적인 타격에 도달하며, 그래서 상대의 칼을 상대 자신에게 되돌릴수가 없다. 그가 검술의 우월성을 자신의 솜씨에 대한 의식적 평가, 싸움의 경험과 전술에 의존시키면 시킬수록 그만큼 더 자유자재한 마음의 움직임을 방해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기술적인 기량이 정신적으로 되고, 어떻게 최고의 기술적 성취로부터 명인의 검술이 나오는가? 그것은 수련생이 마음을 비우고 무아의 상태가 됨으로써 가능하다. 수련생은 상대로부터 그리고 또한 자기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데로 나아가야한다. 그가 아직 서 있는 단계를 꿰뚫고 가야 하며, 마침내 넘어서야 한다. 물론 완전히 실패해 주저앉아 버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리해야 한다.

 이 것은 활쏘기에서 요구되는 것, 가령 겨냥하지 않고 맞추어야 하고 표적과 표적을 맞추려는 의도를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는 요구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하게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다쿠안이 그 본질을 서술한 검도의 명인의 경지는 실전에서 수없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스승의 임무는 길 자체를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궁극 목표를 향한 길이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찾아 나가도록 하고, 또 그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먼저 그는 제자가 본능적으로 공격을, 전혀 예상 밖의 공격까지도 피하도록 훈련을 시키는 데서 시작한다.

 

p121-122

새로운 감각,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감각의 새로운 각성을 획득해야 한다. 그래서 마치 미리 예감했다는 듯이 위협적인 공격을 피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이러한 피함의 기예를 터득하면, 더 이상 상대의 또는 여러 상대들의 운동을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제 막 시작되려는 것을 보고 예감하는 순간, 그는 이미 본능적으로 이 사건의 결과로부터 몸을 피했다. 마치 보고 느낌과 피함 사이에 깻잎 한 장 차이도없다는 듯이.

그것이 중요한 점이다. 이런 직접적인 전광석화 같은 반응을 위해서는 의식적인 관찰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그 제자는 더 이상 아무런 의식적인 예측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이미 그는 많은 것을 배운 것이다.

 

그러나 휠씬 더 어렵고 도 수료를 위해서 정말로 결정적인 스승의 임무는 제자가 상대를 어떻게 가장 잘 공략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탐색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다. 바로 그렇다. 제자는 상대와 마주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사실에 대해 까맣게 잊어야 한다.

 

p122-124

제자는 처음에는 상대의 태도와 관련된 것들에 대한 모든 관찰과 숙고를 포기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승이 요구한 금기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차츰 자신을 통제해 나간다. 그러나 자기지신에게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싸우고 잇는 자신을, 그러면서도 상대를 주목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자신을 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는 아직 상대를 은밀하게나마 보고 있는 것이다. 단지 가상적으로만 상대에게서 벗어났을 뿐이고, 그만큼 더 강하게 상대와 결부되어 있다.

단지 주의력의 이전만 가지고는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달성한 것이 없음을 제자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정신지도의 아주 세밀한 기술이 요구된다. 제자는 상대를 외면하는 그만큼 자기를 외면하고, 근본적인 의미에서 무의도적으로 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활쏘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양의 끈질기고 소득 없는 연습의 요구된다. 그러나 연습이 일단 목표에 도달하면, 이렇게 달성된 무의도성(또는 무상함)속에서 의도성(자기노력)의 마지막 찌꺼기 까지 사라진다.

이러한 토탈과 무의도성의 상태에서 저절로 앞의 단계에서 달성한 본능적 회피의 기술과 거의 유사한 태도가 생겨난다. 앞에서 의도된 공격을 간파하는 것과 그것을 피하는 것 사이에 깻잎 한 장 차이도 없었듯이, 이제는 피함과 앞으로 나아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 피하는 순간에 이미 일격을 가할 준비를 하며, 일부러 의도하기도 전에 이미 치명적인 일격이 손쓸 겨를 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진다. 마치 칼이 스스로 움직이는 듯하다.

활쏘기에서 그것이 겨냥하고 명중시킨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듯이, 여기서도 대신에 그것이 등장하고, 그 것이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습득한 나의 능력과 솜씨를 사용한다. 여기서도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포착할 수도 없는 그리고 단지 이미 경험한 사람에게만 자신을 드러내는 그 무엇에 대한 이름일 뿐이다.

 

p124

다쿠안에 따르면, 검도의 완성은 나와 너에 대해, 상대와 상대의 칼에 대해, 자신의 칼과 그것을 어떻게 쓸지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심지어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그러므로 모든 것이 공()이다. 너 자신, 거머쥔 칼, 그리고 칼을 휘두르는 두 팔 모두가, 그렇다. 공에 대한 생각마저도 없다. 이 절대적인 공으로부터 행위의 가장 놀라운 전개가 생겨난다.고 다쿠안은 확언한다.

 

p125

이런 점에서 활쏘기와 검술에 대해 타당한 것은 모든 다른 기예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수묵화에서 명인의 경지는 기술을 완벽하게 터득한 손이 정신이 움직이는 그 순간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그려서 보여준다는 데서 드러난다. 마치 그 사이에 깻잎 한 장의 차이도 없다는 듯이, 여기서 그리기는 자기 ㅗ할동적인 쓰기로 된다. 이기서도 화가가 받을 지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0년 동안 대나무를 관찰하고, 스스로 대나무가 되어라, 그리고 모든 것을 잊고, 그려라.

 

검의 명인은 다시 초심자처럼 순진하다. 수업을 시작할 때 잃어버렸던 겁 없음을 마지막에 흔들림 없는 성격으로서 다시 획득한다. 그러나 초심자와 달리 그는 차분하고 조용하며 겸손하다.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욕구는 전혀 없다. 초심자와 명인의 두 단계 사이에는 지칠 줄 모르는 연습의 길고 험난한 세월이 가로 놓여 있다.

 

p126

검의 명인에게는 명예, 승리, 그리고 생명 등 다른 모든 것보다도 지금까지 그가 경험했고 또 그를 인도했던 진리의 검이 가장 고귀하다.

 

검의 명인은 초심자처럼 겁이 없다. 그러나 초심자와는 달리 날이 갈수록 더 담대해진다. 그는 오랫동안에 걸친 쉼없는 명상에서 삶과 죽음이 근본에서 하나이며 똑 같은 운명의 차원에 속함을 경험 하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삶에 대한 걱정과 죽음에 대한 공표가 없다. 그는 기꺼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언제나 죽음에 대한 생각에 당황하지 않고 세상을 하직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것이 선 일반의 특징이다.

 

p127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지금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죽음 앞에서 떨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믿고, 또 죽음의 시련을 견뎌 내리라고 확신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초탈한 사람은 모든 종류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서, 도대체 공포가 어떤 느낌인지를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이어야 한다. 진지하고 지속적인 면상의 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어떤 초극을 가능하게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완전한 명인은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일거수일투족으로 자신의 두려움 없음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직접 보고 그에 감동받는다. 그러므로 전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명인의 경지이다. 단지 소수만이 이 경지에 실제로 도달하는 데,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기예없는 기예의 길

 

p131 선을 본분으로 하는 기예의 명인들의 존재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진리의 구름 속에서 치는 번개와 같다. 진리는 그의 정신의 자유로운 운동성 속에 현존하며, 명인은 그것 안에서 근원적이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본질로서의 진리와 만난다. 그리고 명인은 반복해서 자기 존재의 극단적 가능성으로서의 이 본질과 만난다. 진리는 그에게, 그리고 그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수천 개의 형식과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그러나 명인이 끈기 있게 그리고 겸손하게 수행해 온 전대미문의 단련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최고의 마지막 단계, 즉 삶의 모든 행동이 선에 의해 인도되고 오직 행복한 시간만이 앞에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선에 의해 충일되어 붉게 달아오르는 단계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가장 높은 단계의 자유가 아직은 가장 깊은 단계의 필연성으로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명인을 이 마지막 단계에까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몰아가면, 그는 다시금 또 길을 떠나야 한다. 그것은 기예없는 기예의 길이다.  진리와 완전히 하나가 된 사람처럼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한다면 그는 근원적 도약을 감행해야 한다.

 그는 다시 제자가 되고 초심자가 되어야 하며, 그가 들어선 길의 마지막 가파른 구간을 돌파해야 한다.새로운 변신을 통해서!

이 시도에 성공하면 그의 운명은 완성된다. 그는 흠결 없는 진리, 모든 진리를 초원한 진리와 만나며, 이로써 모든 근원의 형태 없는 근원, 즉 모든 것인 무()와 만나고, 무에 의해 잡혀 먹히고, 그리고 무로부터 부활한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150 쪽도 되지 않는 짤막한 분량이지만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만남과 충돌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저자 오이겐 헤리겔 교수가 1920년대에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배웠던 궁도와 선에 대한 보고이다. 이 책은 정신의 길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의 독서가 중요한 경험으로 회자되면서 오늘날 20세기가 낳은 경이적인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서구적 이성주의 관점에서 철저한 방법론적 탐구를 주로 하는 신칸트학파의 철학자와  동양적 사유 중에서도 논리 초월적인 경향을 가진 선() 사상의 대가인 궁도의 명인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화적 만남과 충돌의 과정을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다.  내용에 있어서도  신비적 체험으로 관주되는 에 관하여 말로는 명료한 듯 하면서도 뜬구름 잡는 식의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함께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적인 정황을 통해서 구체적인 느낌을 전해 준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활쏘기의 기예를 익히면서 '정신적'으로 새롭게 태어나  고향으로 귀국한 후에는 그 자신의 철학적 사조였던 신칸트 학파와 결별하고 독일 신비주의 전통의 비조인 중세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연구와 일본의 선사상을 독일 사회에 소개하는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이 책으로부터 얻어지는 강렬한 감흥과 깨달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일상 생활과 활동 영역에서 실천할 수 있는 귀중한 정신의 길을 가르쳐 준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파울로 코엘료는

젊은 시절 나는 오이겐 헤리겔이 쓴 이 매혹적인 책을 읽었다. 궁술을 통해 영적 여행을 이야기하는 책이었다.

라고 자신의 젊은 시절 자신의 영감과 열정을 일깨워준 책으로 바로 이 책을 들고 있다.

 

이 책 활쏘기의 기예를 통해서 서양사람들은 무엇을 배웠을까?  인지라는 지성 중심의 서구 사회에서 지성의 접근이 불가능한 영역, 즉 어떤 기술을 완전히 익힌다는 본질 또는 모든 예술적 작업의 본질, 난관을 넘어선 삶의 실천을 두루 일관하는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다고 편집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이미 서양화되어 버린 우리 동양인에게 더 많은 의미와 깨달음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젠 우리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 되어 버린 것에 관해서 서양인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지식 노동자로서의 우리에게, 배움이 삶의 무기가 아닌 삶의 일용할 양식으로서 삶의 본질적인 이해와 깨달음을 얻도록 노력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나는 이런 '진정한 배움'이 혼란스럽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 자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주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을 읽는 동안에 과거의 내가 생각났다. '기예없는 기예' 에 이르고 싶어 했던 나는(그것이 내가 항상 중얼거리는 무형검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많은 몸부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명인이 되지는 못했다. 그저 명인들의 경지에  조금은 더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나온 오랜 시간 동안의 경험을 보다 더 체계화할 수 있었고, 설명하기 어려운 정황들을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신이 부여한 크나큰 인간의 잠재력을 기능화 시키려는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 신이 인간 내면 깊숙이 숨겨놓은 대우주의 에너지, 신의 에너지 이기도 한 그것은 심오한 자기수양을 통한 수련으로써 신에게 가까이 접근하기 위한 배려인 것이다.

자기 수양을 통한 수련이라야 나이가 들수록 신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것은 영격을 높이기 위한 열쇠인 것이다. 기능화 시킨 기술로 개발한다면 그것은 곧 인간 파멸의 행위인 것이다.

 

코치 시절에 기록을 하던 노트의 비워 둔 첫 페이지에 기록했던 코칭를 위한 올바른 태도에 관한 내용을 찾아 냈다.  '이기기 위한 코칭'과 깨달음을 위한 코칭' 사이에서 스스로에게 명확한 지침을 내리려고 노력했던 흔적이 아닌가 싶다.  조금은 스스로가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2
년의 기록이므로 이미 18년이 지난 것이지만  그 의미는 새롭지 않으면서도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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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희향
2009.10.25 15:37:47 *.206.74.51
오빠. 맨 끝의 문장 참으로 심오하네...
그야말로 하나의 문장, 한 권의 책에 어떤 세계를 담아내려는지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으면서도
나 정도가 가늠하기에는 무척이나 깊은 세계인 것도 같고...

여하간 사부님 말씀처럼 오빤 참으로 "무사"인 것 같아..
무사들의 깊은 세계에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먼 발치에서 마음으로 응원할께.

오빠의 사상이 올곳이 담긴 좋은 책이 세상에 나오기를 믿고 바라며, 오빠, 홧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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