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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9일 10시 37분 등록

 

1부 저자에 대하여


글을 쓰지 않은 저자, 니체:

어려웠다. 너무도 어려웠다. 그의 작품을 언어로 읽으려 든다면, 한 마디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아니, 도대체 어떻게 니체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유일한 길은 내 안의 초인을 깨우는 것 뿐이다.

 

비록 내 안의 초인이 아직 가여우리만치 그 실체를 띄고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래도 거기에 의지해서 어둠 속을 더듬으며 저 멀리 뿌옇게 보이는 니체를 쳐다보고 그를 파악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한 가지 의문이 들기는 한다. 세상 많은 현자들의 책 중에는 이보다 쉽게 다가오는 책들도 있는데, 어째서일까? 도대체 왜 니체는 혹은 그 밖의 몇몇 철학서들은 어려움의 상징이 되고 있는 걸까?

 

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도 거대한 벽에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이 들만큼 진리나 철학은 너무도 높은 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생각해보면,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 현자들에 비해 철학자들은 철저히 스스로 일어서기 혹은 깨치기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사람들에 의해 종교화된 몇몇 종교의 현자들도 내면의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이미 수많은 인간화를 겹쳐서 본질적 가르침에서 너무도 멀어졌다면, 그에 비해 철학은 아직 다행히 (?)도 종교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 자체로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언어로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니체를 다루는 책은 어려웠다. 너무도 어려웠다.

 

3부 내가 저자라면


왜 니체일까?

이 책을 하면서 내 머릿 속에서 돌고 돈 생각은 왜 하필 니체였을까?였다. 이 책은 관념과 개념 그리고 언어 사이를 말들이 오고가는 참으로 어려운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부님께서 왜 통찰의 첫 책으로 니체를 선택하셨을까? 궁금했다. 도대체 왜?

 

솔직히 처음 읽을 때는 정말이지 이게 뭘까 싶기만 했다. 그리고 인용문 타이프 치기가 끝날 즈음, 오빠가 어째서 니체는 나를 나체로 만들었다라는 표현을 썼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랬다. 니체 앞에선 아무 것도 없었다. 종교도 국가도 사회적 규범도 심지어 합리성이라는 과학적 사고방식조차도. 니체는 그 어떤 것도 인간을 속박하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후, 그러나 과연 인간의 신앙심마저 죽었는지를 되묻는 니체. 그 앞에서 우린 남는 것이, 아니 숨길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

 

훈육되어지고 길들여지어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니체. 참으로 철저하게 인간을 해부하는 철학자가 아닐 수 없다.

 

내 안에서 천복을 찾아 그것을 따라 살라하던 죠셉 캠벨을 시작으로 니체에 도달했다. 이제 니체는 우리에게 나는 진정 나인지 아니면 만들어진 나인지를 묻고 있다. 니체가 괴로운 건 지금까지 내가 선하다고 믿고,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까지도 철저하게 나를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했음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어서 일 것이다.

 

태양 아래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나를 드러내게 만드는 니체. 나는 진정 낙타의 시기를 지나, 사자도 극복하고 어린아이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세상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발걸음도 가볍게 춤추고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입력되어진 코드에 맞춰서 사는 삶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여지껏 잠자고 있던 초인을 깨워 세상이 아닌 내 안의 초인이 나를 리드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언젠가 미래 사회 인간들은 DNA가 조작되어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다. 니체는 그 미래가 미래가 아니고, 현재의 내가 나만 자각하지 못했을 뿐 결국은 오늘의 내가 이미 가축의 무리에 속해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서운 철학자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오늘 아침 왜 눈을 떴을까? 무엇을 하기 위해? 내가 오늘 아침 눈을 뜬 것은 나의 자발성이 들어간 행위일까? 아니면 짜여진 시간표에 따라 길들여진 내 신체의 반응이었을까?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뜨고, 정해진 시간에 차에 몸을 실어 출근하고, 정해진 시간에 일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여 집에 오면, 가족과 사회는 나를 선하다고 할 것이다. ? 그게 외부적으로 결정된 규칙이니까. 먼 옛날 수도원과 군대로부터 내려온 시스템이 그러하니까. 니체에 의하면 선한 사람은 능동적 권력의지가 결여된 사람이라고 한다.

 

책임감이 절대선이라 결정한 것이 누구일까? 순종하는 삶이 선하다고 결정한 것은 또 누구일까? 그와 같은 윤리적 질문 자체도 이미 내 인식의 밑바닥을 흔들고도 남음이 있는데, 니체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보라 밀어 붙인다. ? 내 안에 입력된 선한 사람 코드 대부분이 나를 통제하기 위한 국가와 사회의 조작이었다면? 지금까지 내가 그토록 지키고자 애썼던 그 모든 것들이 국가와 사회가 나를 통제하기 위한 기만에 속은 거라면?

 

이런 식으로 계속 질문을 파고 들어가는 것을 사회는 광기라 부른다 한다. 사회의 거대한 흐름에 맞서는 자들. 문득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가 생각났다. 우리 모두는 눈을 뜨고 있으되 눈이 멀었다는 소설 말이다. 역시 작가는 샤먼이 맞는 것 같다.

 

내가 내 발로 걸어 들어간지도 모르는 체 감옥에 들어가 철창이 혹여라도 느슨해졌을까 일기까지 써가며 능동적으로 자신을 관리, 감독하는 우매한 인간들. 그게 지난 수십 년간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니!

 

변화경영.

 

과연 무슨 변화인가? 2010년에 내 책이 한 권 나와서 작가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는 것이 변화일까? 구 본형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변화인가? 수많은 밤, 인용문 타이프를 치느라 오른손 손목에 굳은 살이 베긴 것이 변화인가?

 

캠벨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스승들의 날카로운 창칼 앞에서도 견고하기 이를 데 없이 나를 칭칭 동여매고 있는 나의 갑옷은 도대체 뭘까? 그렇게 먼 길을 걸어오면서도 그 무거운 갑옷을 차마 다 내려놓지 못하는 내 앞에 니체가 나타났다. 그리고 마음껏 웃고 있다. 춤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 만치 앞에서 나를 뒤돌아보며 마음껏 웃고 있다. 그러나 나를 쏘아보는 그 눈빛만은 빛나고 있다. 그 눈에서 빛나는 광채가 너무 강렬하여 눈을 뜰 수가 없다. 차라리 눈을 감자. 그러면 보인다.

 

눈을 감으면 나를 세상에서 떼어 놓을 수가 있다.

눈을 감으면 나를 신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가 있다.

눈을 감으면 나를 내게서 떼어 놓을 수가 있다.

 

눈을 감으면 신도 세상도 내가 만든 허상인데, 이제 그 허상이 나를 허상화시키고 있음이 보인다.
느껴진다. 알 수 있다.

 

신은 죽었다. 아니 신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만이 있었고, 그 우주에 눈 뜬 소수의 현자들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또 외치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며.

그러나 우리는 그런 그들을 광인이라 치부하며 가능한 외면하고 싶어한다.

거기 진실이 있기에.

 

니체는 우주를 지배하는 것을 힘이라 본다. 영원회귀하는 힘.

내게는 흐름이다.

조직의, 사회의, 그리고 국가의 흐름이 거대할 때

인간들은 그 흐름에 휩쓸려 버린다.

견디다 못한 인간들이 거대한 흐름을 만들면

그 곳에 혁명이 일기도 하고 사상의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가벼워야 한다.

거대한 흐름이 몰려올 때 휩쓸려 떠내려 가지 않기 위해서는

흐름에 올라탈 수 있을 정도로 가볍거나

흐름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아주 깊게 침잠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내게 남은 시간이 더 짧을 수도 있다. 

진리에 다가간 현자들의 책을 읽다보면 한 가지 공통으로 논하는 것이 있다.

다름아닌 내 안의 신성 혹은 영혼의 깨어남.

그거 하나면 족하다.

 

이제 난 더 이상 노예로서 살지 않겠다.

관습의 굴레, 사회의 굴레, 국가의 굴레, 인식의 굴레

인간들이 규정한 모든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다.

수십 년간 나를 옥죄던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이젠 맨 발로 춤추며 살아갈 것이다.

 

오늘부터 난 나의 단어를 만들 것이다.

나만의 언어를 만들어, 그것으로 나의 세계를 창조할 것이다.

그렇다. 나의 세계는 내가 창조한다.

 

나의 세계에는 더 이상 책임이란 단어는 없다.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나의 세계에는 더 이상 죄책감이나 의무라는 단어는 없다. 이해와 배려만이 있을 뿐이다.

나의 세계에는 더 이상 집착이나 미련이란 단어는 없다. 열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내가 아닌 것을

나의 세계를 통해 내 흔적을 남기려 하지는 말자.

돌아갈 땐 모든 것이 불로 환원될 뿐이다.

 

맨발로

하늘하늘, 나풀거리는 가벼운 옷을 입고

밝은 햇살 아래 웃고, 떠들며 춤추며 사는 삶

 

이것이 내게는 변화이다.

IP *.202.116.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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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11.11 00:48:22 *.12.20.58
오! 언니야말로 변화하셨군요.^^
역시 언니야! 질투날 만큼 철학적이고 자신만의 언어를 찾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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