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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7일 11시 53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신영복 님.jpg


신영복은 1941년 밀양에서 지주의 딸이었던 어머니와 일제치하에서 일본인 교장의 차별에 저항했고 한글 연구 서클에 가담했다가 해직되기도 했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에 경험한 6•25와 그 시대의 가난으로부터 깊은 충격으로부터 자기반성을 배운 신영복은 서울대와 동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동안 경험한 4•19와 5•16를 통해 비판적 지식인으로 서게 되었다.

숙명여대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20년을 복역한 후 1988년 8월15일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그 이듬해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비정규직 교수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동양철학’을 강의하던 중 1998년 3월 15일에 사면•복권되어 후학을 길러내다 2006년 8월 정년퇴임하였고 현재는 동 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출옥후 클래식 음악 담당 PD로 지내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고  자제로는 1남이 있다. 지은 책으로는 옥중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필두로 국내외 여행을 하고 쓴 『나무야 나무야』와 『더불어 숲』, 성공회대 동양고전 강의의 녹취를 풀어 엮은 『강의』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외국무역과 국민경제』 그리고 공역한 『노신전』과 『중국역대시가선집』 등이 있다.
  

 - 그가 추억하는 어린 시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는 지주 집안의 외동딸이었어요. 아버님은 대구 사범학교를 나오셨으니까 그래도 자작농 정도는 되셨겠지요. 집안으로만 보자면 저는 좌익 사건에 연루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때문에 독방에 갇혀서 “내가 왜 여기에 앉아 있는가?”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그러한 고민의 결론은, 이념 때문이 기보다는 양심의 문제였다는 것이었어요. 4•19와 5•16사이에 목격했던 우리사회의 억압구조에 눈 뜨게 되기도 하고, 그러한 엄청난 억압과 부조리에 대한 청년다운 감수성 때문에 감옥에 앉아 있다는 생각을 한 거죠. 어린이들이나 약자들에 대한 저의 감정이 특별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형님들과 누님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집안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어요. 형제들도 많았고, 사촌 형님 두 분도 우리 집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 많은 식구들 틈새에서 별로 존재감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바깥에 나가면 친구가 많았어요. 왜냐하면 저는 가난한 친구들에 대한 배려도 없지 않았고, 어렵게 살고 있었던 친구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이 보호받는다는 미안함 때문에 벌을 자초해서 받기도 했었어요.

몇 년 전에 고향의 초등학교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어요. 감회가 새로웠지요. 교사(校舍)도 너무 작았구요. 그런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제가 자주 벌을 섰던 복도였어요. 그때 저는 일부러 벌 서는 일이 많았거든요. 친구들로부터 “너는 우리 학교 교장은 아니지만 아버님이 교장 선생이고, 너의 아버님 제자들 중에 우리학교 선생들이 많아서 1등을 한다.”는 말이 듣기 싫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이후에는 1등을 아마 안 했을 거예요. 1등을 못했는지 모르지만.(일동 웃음) 얼마나 벌을 많이 섰으면 수십 년 만에 학교를 방문했는데 벌 받았던 곳이 생생하게 기억났겠어요. 집안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 대신 할아버님이 저를 많이 가르치셨어요. 형제들 중에 할아버님 사랑방에 제일 많이 불려가서 붓글씨라든가 학문을 배웠던 그런 손자였으니까요.
 
저는 아버님만큼 구도자적인 삶을 살고 있지 못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옥의 검열과 걱정하는 가족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쓴 엽서였어요. 당시 저는 감옥의 관리들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내용으로 쓰면 검열에 통과될 수도 없구요. 그렇게 엄격한 자기 검열을 했기 때문에 제 글속에 나타나는 이미지가 구도자와 비슷하다고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는 그런 모습이 있었어요. 아버님의 세대가 그러하기도 했거니와, 절대로 거짓말이나 농담이나 노래 같은 걸 안하셨거든요. 가족들 간에도 별 대화가 없었고, 제자들도 한결같이 무서운 선생이라고 했었어요. 그런 성격 때문에 일본인 교장의 차별에 반대했고, 또 한글 연구 서클에 가담했다가 해직교사가 되기도 하셨지요. 제가 볼 때 아버님께는 식민지시대의 창백한 인텔리라는 자기 콤플렉스가 상당히 있었던 분 같아요.

저의 고향 밀양이라는 곳이 의열단의 본고장이거든요.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이 밀양 출신이고, 밀양에서 의열단을 처음 창립할 때에 함께 했던 13명 중 9명이 밀양 출신이었어요. 그래서 밀양 경찰서가 폭파되기도 했고, 해방 이후에는 유성모직이라는 큰 모직공장이 있어서 노동운동 기반도 상당히 강했습니다. 아버님은 고향 출신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김종직의 도학사상연구』라는 책을 쓰시기도 했는데 점필재 김종직은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이잖아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훈구세력에 대한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문화가 남아 있었던가 봐요. 아버님은 아마 그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 감옥이 인생대학

“제 인생은 감옥 전과 감옥, 감옥 후로 나눌 수 있어요. 감옥 전은 엄밀한 의미에서 배우고 시키는 것 하는, 심부름같은 삶이었습니다. 감옥은 혹독하게 우리 사회와 시대를 체험하는 시간이었지요. 감옥 후는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는 중입니다. 제가 가장 많이 성장한 기간은 감옥인 셈이죠. 감옥에서 나와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하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요. 제게 지금 사는 아파트 대신 한옥집으로 옮기라고 권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무슨 도사 대하듯 하는 사람들을 접하면 참 난감합니다.”

“할아버님의 슬하에서 붓글씨를 익혔습니다. 그러나 제가 조금이나마 서도를 하게 된 것은 감옥에서 훌륭한 스승들을 만난 덕입니다. 교도소 당국에서 초빙했던 만당 성주표(晩堂 成周杓)선생, 정향 조병호(靜香 趙炳鎬)선생으로부터 옥중사사를 했고 한학자인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선생과 같은 방에서 지내는 행운이 주어져 동양고전을 익혔지요.”


- 그의 사랑, 결혼, 가족

그는 감옥에서 나오고 반 년 쯤 있다가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 상대는 KBS 라디오의 클래식 프로를 맡고 있던 유영순 PD였다. 두 사람은 여섯 살 차이가 난다.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에 대해 그동안 주변에서는 설왕설래했다. 본인은 그것에 대해 간단 명쾌하게 이렇게 설명했다.
"출감 직전에 아내를 알았어요. 감옥에서 나올 때가 거의 다 되어 가니까 주변 분들이 늙은(?)총각을 위해 소개해 줬어요. 감옥에서 나오고 나서 곧 결혼했지요. 89년 초였어요.  어머니가 오래 앓으셨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하는 모습을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신영복 교수와 유영준 PD는 결혼 이듬해에 아들 지용을 낳았다.

그의 책 「나무야 나무야」에는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의 사랑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신교수는 아름다운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많이 오염됐어요. 그건 원래 '생각한다', '상대를 고려한다'는 뜻이었잖아요. 그런데 요즘엔 너무 소유만 하려는 것 같아요. 이기적인 거죠. 너무 당연한 얘기인진 모르지만, 사랑이란 신뢰와 이해가 기본이잖아요. 그런데 그 신뢰와 이해라는 것이 금방 생기는 건 아니에요. 오랜 세월 나무를 키우듯이 키워나가는 거죠. 어느 순간 만나서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다는 건 사랑이 아닐 수도 있어요. '사랑한다'는 말을 상대에게 하는 것도, 그 사랑이 튼튼하지 못하다는 반증이지요. 나무처럼 뿌리내린 사랑에서는 말이 필요가 없지요."


- 가슴에 와닿는 그의 시서화

1)  나이테
나무의 나이테.gif

2)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나무.jpg


3) 입장의 同一함 

입장의 동일함.jpg



[참고자료]
- http://www.shinyoungbok.pe.kr/
- 작은이야기(1999. 1. 창간호 도서출판 이레) - 자유기고가 문강선
- [인물포커스] 신영복 성공회대교수  더불어 나누는 사람만이 희망 (2001.9.28) – 동아일보 서영아 기자
- [인물과 사상] 2007년 11월호 신영복 인터뷰 – 지강유철 기자


2. 내가 저자라면

연구원에 뽑히고 나서 일 년 동안 읽어야 할 책이 발표되었을 때 스승님은 ‘인류최고의 스승들이라며, 죽은 자까지도 선생으로 모셔왔다’ 고 말씀하시며 50권의 책을 소개하셨다.

<강의>를 읽고 나니 스승의 그 말이 가슴 깊이 와닿는다. 5천년 전의 스승들이 나를 깨우쳐주기 위해 2009년으로 온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그 긴 여행의 공백을 멋진 가이드(통역) 분이 메꿔주시게 되었다. 바로 신영복 선생이다. 신영복 선생은 동양고전으로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읽고 미래로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야말로 <오래된 미래>이다.

시詩와 언言, 주역, 논어, 맹자, 노자… 평소 읽어보고 싶었지만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동양고전이다. 동양고전에 대한 내 오래된 관심은 고등학교때 한문선생님에 대한 짝사랑에서부터 시작된다. 유난히 남자 선생님이 드물었던 여고시절, 총각도 아니었지만 한문선생님은 유달리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나 역시 한문선생님의 관심을 끌고 싶어, 영어, 수학 등 주요 교과목 시험과 한문시험이 한 날에 겹치더라도 한문공부를 먼저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문실력이 좋아지고, 논어, 맹자에 인용된 다양한 문장을 익히며 그 참뜻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종종 외국인 직강을 듣다 보면 통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통역은 외국말만 잘 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한국말도 잘 해야 한다. 또한 해당 강의자의 전공에 대해서도 섭렵해야지 올바른 통역을 할 수가 있다. Heart를 ‘심장’이라고 직역을 하는 것을 넘어 문맥상 ‘따뜻함’, ‘감동’, ‘열정’ 등의 단어로 융통성 있게 잘 바꿔주는 것이 좋은 통역자이다.

고전도 마찬가지이다. 수천 년 전의 저자와 현재의 나 사이의 긴 공백을 튼튼한 동아줄로 엮어줄 수 있는 사람, 과거와 현재 사이에 通하는 공통의 물줄기의 방향과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미래로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지, 어느 지점에서 물꼬를 틀어야할지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 그가 훌륭한 해설자이다. 그리고 나는 동양고전에 대한 내 오래된 숙제를 도와줄 훌륭한 해설자를 만나게 되었다. 신영복 선생이 파악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흐름의 중심은 무엇일까?

그는 그의 책, <강의>에서 인간관계론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중용]을 통해서는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고 [논어], [맹자]를 통해서는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라는 것을 부끄러움(恥) 이라는 단어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가 이렇게 인간관계에 대해 집중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만남의 단절, 일회적인 만남이 낳는 부끄러움 모르는 사회, 그것이 그가 경계하는 현대사회의 어두운 부분이다.

<강의>에서 인상적인 구절은 너무나 많았다. 대화체로 되어 있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끊어 마음을 치고 들어야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했던 나의 마음을 지저분한 책의 여러 낙서들이 증명해준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몇 개 꼽는다면 다음과 같다.

- 행운만들기와 나목으로 서기

“ 박괘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 만들기입니다.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박괘는 늦가을에 잎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끝에 빨간 감 한 개가 남아 있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잎사귀를 떨어버리고 있는 나목裸木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을 박괘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허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엽락이분본’葉落而糞本, 잎은 떨어져 뿌리의 거름이 됩니다. 우리 사회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자립성, 정치적 주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목표의 올바름과 과정의 올바름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 스스로 불러들이는 행운과 재앙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타협이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 찬란한 꽃으로 피어나는 일상, 그리고 개인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無邊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微物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 주 과제를 위한 책으로 무엇을 골라야 할까?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곱씹어보고 곱씹어볼만한 신영복 선생의 강의다운 강의, 그로 인해 5천년 전 스승과 아름다운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서문

[21]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22] 우리의 고전 강독은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 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24] 고전 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29]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
 
[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35] 동양 사상은 물론 사후의 시공에서 실현되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세를 신의 소명과 직선적으로 연결시키는 단선적인 신학적 사유 체계가 아닙니다.
 
[36]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입니다. 도道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辵과 수首의 회의문자 會意文字입니다. 착辵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37]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 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9]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1] 仁 은 기본적으로 人 + 人의 의미입니다. 즉 인간관계입니다. 인간을 인간, 즉 인과 인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혹시 여러분 중에 間에다 초점을 두는 ‘사이존재’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존재에 중심을 두는 개념입니다. 동양의 구성원리로서의 관계론에서는 관계가 존재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사이존재아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지요.
 
 
2. 오래된 시詩와 언言

[56]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64]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 자신의 삶과 정서를 분절시켜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동서남북의 각각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춘하추동의 각각 다른 시간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결코 즉물적이지 않습니다.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65]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72] 한마디로 무일無逸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75]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어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77]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81]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82]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3. 주역의 관계론
 
[89]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1] 개인이게 있어서 그 자리[位]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101]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105]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 하지요.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德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9] 태괘는 주역 64괘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괘라고 합니다. 하늘의 마음과 땅의 마음이 화합하여 서로 교통하는 괘입니다.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양은 물론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자연의 형상과는 역전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태화泰和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위로 향하고 땅의 기운은 아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만난다는 이치입니다. 서로 다가가는 마음입니다.
 
[110] 혁명은 한 사회의 억압 구조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억압당한 역량을 해방하고 재갈 물린 목소리를 열어줍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잠재적인 역량을 해방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혁명은 흔히 혼란과 파괴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지천태라는 뒤집힌 형국, 즉 혁명의 의미가 어떻게 태화의 근본일 수 있을까 다소 납득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혁명을 치르지 않은 나라가 진정한 발전을 이룩하기는 어렵습니다.

[117] 천지비天地否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형상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괘를 비괘否卦라 이름 하고 그 뜻을 “막힌 것”으로 풀이합니다. 비색否塞, 즉 소통되지 않고 막혀 있는 상태로 풀이합니다. 천지폐색天地閉塞의 괘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올라가고 땅의 기운은 내려가기 때문에 천지가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저 혼자 높고 땅은 하늘과 아무 상관없이 저 혼자 아래로 향한다는 것이지요.

[119]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그것이 태泰인 까닭, 그것이 비否인 까닭이 오로지 열려 있는가 그리고 소통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판단되고 있는 것이지요.

[122] ‘석과불식’碩果不食은 내가 좋아하는 글입니다. 붓글씨로 쓰기도 했습니다. 왕필 주에서는 이 석과불식을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독전불락獨全不落 고과지우석故果至于碩 이불견식而不見食”, 즉 떨어지지 않고 홀로 남아 씨 과실로 영글고 먹히지 않는다고 풀이합니다… 이 괘의 상황은 흔히 늦가을에 가지 끝에 남아 있는 감[紅]을 연상하게 합니다. 까마귀밥으로 남겨두는 크고 잘생긴 감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비단 감뿐만 아니라 모든 과일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을 먹지 않고 씨 과실로 남기지요.

[123] 박괘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만들기입니다…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24] 박괘는 늦가을에 잎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끝에 빨간 감 한 개가 남아 있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잎사귀를 떨어버리고 있는 나목裸木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124] 어쨌든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을 박괘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허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엽락이분본’葉落而糞本, 잎은 떨어져 뿌리의 거름이 됩니다. 우리 사회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자립성, 정치적 주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27]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128]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完成態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129]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130] 『주역』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1]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141]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오늘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144] 어쨌든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의 습은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時의 의미도 ‘때때로’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성숙한 ‘적절한 시기’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 실천의 시점이 적절한 때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時는 often이 아니라 timely의 의미입니다.
 
[149]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단절된 형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사유思惟의 차원에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149]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구절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新]를 지향[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150]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구나 과거지사過去之事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152]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예六藝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154]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6]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159]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160] 소위 독특의 의미는 그 독특한 의미를 읽는 것과 동시에 그와 다른 것을 함께 읽기 때문에 그것이 독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체성 역시 결과적으로는 타자他者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162]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64] “극좌極左와 극우極右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同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극좌와 극우는 그 근본적인 구성 원리에 있어서 상통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이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66]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대륙적 소화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도대체 자기 흉내를 내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요.

[168] 마음[心]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좌우명으로 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녹아 들어 있는 그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2] 정正은 정整이며 정整은 정근整根입니다.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의 근원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175] 지知와 애愛는 함께 이야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179] 사思 글자의 구성도 ‘전田+심心’입니다. 밭의 마음입니다. 밭의 마음이 곧 사思입니다. 밭이란 노동하는 곳입니다. 실천의 현장입니다.

[181]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現場性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고 우연적입니다. 한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經驗知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學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임에 비하여 사思는 특수한 것[specialism]입니다.

[184]
“머리는 하나지만 손은 손가락이 열 개나 되잖아요.”

[187] 세상에 영합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법이지요. 그나마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것은 세상을 우리에게 맞추려는 우직한 노력 때문입니다.

[189] 대중은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192]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198]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199]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이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5. 맹자의 의義

[219] 현자란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229] 그 사람의 성선이란 어떤 경우에나 변함 없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에 따라 달리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본성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공자의 ‘성상근 습상원’과 같은 의미입니다. 본성은 서로 차이가 없지만 습관에 따라 차츰 멀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230] 맹자가 말하였다. “화살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여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불인不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만 화살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화살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갑옷이 화살에 뚫려서 사람이 상할까 봐 걱정한다. 무당巫堂과 장인匠人도 역시 그러하다[무당은 당시 의사였기 때문에 사람의 병이 낫지 않을까 걱정하고, 장인은 관棺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지 않아서 관이 팔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므로 기술[職業]의 선택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仁에 거居하는 것이 아름답다. 스스로 택해서 인에 거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을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237]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는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2차 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242]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249]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6. 노자의 도와 자연
 
[253] 노자의 귀歸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281] 상품 이외의 소통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상품 형태를 취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시장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상품화된 거대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282]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287]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이며, 또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300]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7. 장자의 소요
 
[309]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311]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逍遙는 보행步行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舞蹈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319]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327]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道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合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사실은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332]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삶이며,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고,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343]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步行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347]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은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즉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interpenetrate]하는 것이지요.

[352]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를 여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은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큰 도적은 궤를 훔칠 때 통째로 둘러메고 가거나 주머니째 들고 가면서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것이다.”
 
[353] 감추어진 것을 알아내는 것이 성聖입니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勇입니다.
늦게 나오는 것이 의義이며,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지知입니다.
도둑질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인仁입니다.

[356]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天網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374]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387]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돌아오는 아들을 맞으러 언덕에 서 있는 어머니의 상像이야말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전승의 의미를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느냐

[388]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는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 실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400] 묵가는 좌파 사상과 좌파 운동이 그 이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겪어 나갈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역사의 초기에 미리 보여준 역설적인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409]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聽天由命]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人定勝天]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능참, 즉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23] 곧은 나무를 휘어서 바퀴가 되게 하는 것을 유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그리고 바퀴가 예전처럼 다시 펴지지 않는 것도 이 유의 효과입니다. 나무를 곧게 만드는 것도 교육이며 쇠를 날카롭게 벼리는 것도 교육의 역할입니다.
 
[423] 순자가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욕구 충족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성악적 측면이 순자의 교육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으며, 성인이나 폭군이나 군자나 소인이나 그 본성은 같은 것이며,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인간관이 되고 있습니다

10. 법가와 천하 통일
 
[443]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생스럽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로우며, 인仁의 도리는 처음에는 잠깐 동안 즐겁지만 뒤에 가서는 곤궁해진다”
 
11. 강의를 마치며
 
[471] 동양고전은 5천 년 동안 쌓여온 것으로 엄청나기가 태산준령입니다. 우리의 강좌는 호미 한 자루로 그 앞에 서 있는 격입니다.
 
[474]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無邊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微物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475]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覺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476] 모든 사물의 정체성은 애초부터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긴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04] 새로움이란 단지 이론에 있어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입장과 자세에 있어서의 ‘새로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창신創新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지적 관심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505] 창신이 어려운 까닭은 그 창신의 실천 현장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우리의 선택 이전에 주어진 것이며 충분히 낡은 것입니다. 현실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요. 과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을 창신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과거란 지나간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실천은 무인지경無人之境에서 새집을 짓는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506] 바다로 간다는 것은 단순한 고전 독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독법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근대성을 반성하고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문명사적 과제와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508] 창신의 장에서는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509]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510]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511] ‘그림’은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나아가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515]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 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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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11.17 16:20:15 *.11.176.203
 어린이를 위한 동양고전책 보다 더 쉽게 쓰신듯.^^ 내 언어로, 내 생각으로 만들고 싶어 안달하지만 너무나 큰 사상에 어루만지기만 할 뿐. 이 안타까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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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11.18 09:33:50 *.108.48.236
나도 분명히 읽은 책인데
이 책이 이렇듯 '관계'에 대해 강조한 책이었는지 가물가물할 때
숙인이 퍼다 준
'입장의 동일함' 그림과 글귀에서 암시 하나를 받고 가네.
예기치 않게 내 작은 몸짓이 누군가에게 가서 씨앗이 되는 것을 보니,
세상 사람이 모두 연결되어 있음 - 관계론이 더욱 소중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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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9.11.25 19:59:57 *.160.33.244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어찌 잘키우지 못하겠느냐 ?   그러나 잘 키우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스스로  잘 자라주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 
너는 잘자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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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 Max 2011
2011.07.11 11:00:17 *.26.7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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