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혁산
  • 조회 수 2900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9년 12월 7일 05시 38분 등록

저자에 대해서

 

1887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배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교사와 시인으로 활동하다 생화학자인 스탠리 베네딕트와 결혼했다. 1921 34세의 나이에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절대적인 스승 프란츠 보아스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인 인류학 연구에 빠져들었다. 아메리칸 인디언 종족들의 민화와 종교를 연구하여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에서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저서로는 <문화의 패턴Patterns of Culture>(1934), <종족 Race:Science and Politics>(1940),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 등이 있다.

만년의 명작인 이 <국화와 칼> 1944 6월 미 국무부의 위촉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인데, 저자 자신은 일본을 방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학문적 연구에서 그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쪽이 오히려 엄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 저서는 입증하고 있다.

베네딕트는 문화를 인성의 확대로 보았으며, ‘문화와 인성'이라는 미국 인류학의 가장 주도적인 한 영역을 개척한다. 후에 그녀는 미국인류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에는 컬럼비아대학에 현대문화연구소를 설치, 대규모 연구 과제를 추진하다 61세가 되는 이듬해 사망하였다

 

 

내가 저자라면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 배울 것이 많다고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배타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민족성, 침략으로 물들어진 피 그리고 또 다른 공존의 역사 한가운데에 위치한 섬나라 일본, 저자 루스 베네딕트의 시선을 따라 일본을 해부한다.

루스 베너딕트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관대함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하였다. 미국의 태생으로서 미국적 문화적 안경을 벗고, 편견의 시선 밖에서 다른 나라를 볼 수 있을 때, 문화적 특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44 6월 미국 정부로부터 일본 문화에 대한 분석을 의뢰 받은 저자는 문화인류학자로서 일본에 거주한 경험이 없이, 문화적 자료를 취합하여 타 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특히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과 일본의 의식구조의 차이를 해명하는 데 있어 미국인들의 편견을 분명히 하고, 일본을 그 자체로 이해하는 문화인류학적 시도를 하였다.

연합군 수장들이 일본이 패전 후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베네딕트는 미국의 불합리한 견해들을 헤쳐 나아가야만 했다. 일본이 항복을 할 것인지, 최후까지 싸워 전멸할 것인지, 그들이 숭배하는 천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연합군 점령하에 일본은 어떻게 될 것인지 등을 예측 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일본 전문가도 아니고, 일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베네딕트는 오직 문서자료와 영화, 일본계 미국인들과의 인터뷰 자료등에 의존하며 이 문제를 해결해 나아갔다. 이 책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어쩌면 경험이라는 것은 하나의 틀의 형성이고 편견을 동반하는지도 모르겠다. 살아온 문화적 경험이란 다른 관점으로 보면 하나의 문화적 틀의 형성을 내제하고 있고, 그 틀 자체가 편협한 시야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베네딕트는 일본을 직접적으로 경험해 보지 않음으로써 외부적인 시선을 갖출 수 있었고, 그가 시도한 문화인류학적 접근 방식이 일본을 더 자세히 드려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준 것 같다. 오히려 가까이 일본을 접해온 한국으로선 외부적 시선이 아닌 피부로 접한 피의 역사속에서의 일본에 대한 경험이 주가 되어 왔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중요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베네딕트를 통해 경험하지 못했던 일본에 대한 새로운 문화적 특성을 제 3자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이 책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중요한 혜택일 것이다.

 

베네딕트가 미국 정부로부터 부여 받은 임무는 일본인들의 특성만을 분석하는 데 있지 않고,      

향후 일본인들이 어떻게 행동할 지 예측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 따라서 루스 베네딕트의 연구는 일본인들의 사고의 방식 즉 일본인들의 DNA를 찾아내어 어떻게 사고하는지 알고자 하는 것이다. 한 민족의 DNA를 들여다 보기 위해서 저자는 일본인들의 사고의 패턴을 인식하는 데 문학, 영화, 인터뷰등을 활용하여 그들의 시선과 판단의 결과를 분석해 들어갔다.

 

그 분석의 결과로 저자는 국화와 칼이라는 이중적인 상징성을 찾아 내었다. 일본 문화의 전체적인 틀을 규정하는 국화와 칼은 양면성의 특징을 상징하기도 한다.

왜 일본은 동양적이지도 서양적이지도 않는 섬나라의 특성을 갖게 되었을까? 그들에게 정의는 무엇이고, 정당성은 무엇인가? 침략을 일삼는 이유는 무엇이었고, 전쟁을 치르면서 전 국민이 목숨을 불사하겠다는 투철한 의지를 내보이면서도, 패전 후 급격히 미국에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분명하지 않는 행동패턴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그들의 유전자 일 것이다. 나는 일본인들이 앞에서는 웃지만, 뒤에서는 칼을 간다!라는 말을 늘 들어왔다. 그들의 양면성은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에서 정리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알맞은 장소에 둔다. 이것이 일본의 좌우명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돈된 의미의 글도 나에겐 섬짓하게 다가왔다. 언제든지 알맞은 위치에 맞게 생각과 행동이 바뀔 수 도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베네딕트의 지적은 앞으로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은 스스로의 호전적 정열을 다시 불태워 일본이 얼마나 전쟁에 공헌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일 것이다. 만일 다른 나라에서도 군국주의가 실패한 것으로 판단된다면,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 기도는 결코 명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교훈을 얼마나 뼈저리게 체득했는가를 증명할 것이다.”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 들어선 오늘날 일본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날로 증대되고 있다. 현재 두 나라는 정치, 경제, 산업, 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누구보다 가깝게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 그러나 언제라도 군국주의의 망령된 의식이 되살아날지 모를 일이며, 그들의 잠재된 양면적 선택이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아픔을 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본의 양면성을 이해하면서 우리에겐 그 양면성을 활용할 수 있는 혜안이 생겼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양면성도 하나의 판단의 형식으로 보여졌다는 것이다.

일본과의 관계를 해쳐나가는 하나의 눈이 생긴 것이다.

 

책을 읽고 몇가지 도움을 얻었다.

먼저 조사하는 방법으로서의 기술적 팁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브랜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리서치를 병행하는데, 최근에는 브랜드의 개성이 뚜렷해지고 문화적인 취향이 깊어지면서, 브랜드가 탄생한 배경 즉 문화적 토양을 이해하는 작업이 작업의 질을 높여주는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베네딕트의 조사방법과 관점은 직접 경험을 하지 않고 간접적으로도 충분히 제대로 문화를 인식해 볼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알게 해 주었다. 브랜딩을 하면서 깊이 활용해 볼 것이다.

 

또한 브랜드를 인식하고 창조하는 데 있어서도 깊이 있는 인식의 틀을 제공해 주었다.

이젠 브랜드도 하나의 특성을 상징화하는 것에서 벗어나 경험으로서의 가치가 중요시 되고 있다. 경험은 장이 필요하고, 장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즉 사람의 특성과 기질, 그들의 오랜 역사속에서의 취향의 특질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브랜딩은 깊이 관계할 수 있다.

최근에는 어떻게 하면 오래가는 브랜드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고민하곤 하였는데 이 책을 통해서 느낀 것은 역시 문화적 차원에서의 오랜 사고의 관점과 틀을 근간으로 적합한 브랜드가 오래갈 수 있음을 느껴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직업상 일본의 브랜드의 특질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브랜드 역시 문학처럼 정신의 산물이며, 의식의 결과물이다. 일본 최고의 아트 디렉터라고 칭송받는 하라켄야무지라는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무지는 비울 것은 다 비우는 태도속에서 탄생한 브랜드로서 세계적으로 점차 일본의 정신적 특성을 살린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좋게만 보였던 비움을 토대로 한 브랜드에도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인의 양면적인 태도상, ‘비움을 토대로 성격의 규정은 채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비움은 브랜드를 구입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간소한 생활태도속에서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무지는 그렇게 가벼운 간소한 가격대의 브랜드는 아니다. 진짜 비움의 철학이었다면 저렴한 가격대로서 품질좋은 브랜드여야만 했는데 지금은 비움이라는 철학을 갖고 비싸게 팔고 있다. 진정한 비움의 철학은 아닌 것이다. 나는 생활속에서 더 진실하고 깊이 있는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싶다.

내가 비움이라는 브랜드를 한국에서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오래 써도 낡아도 버리기 아까운 그 무엇일 것이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연합군 수장들은 일본이 패전 후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베네틱트는 이런 불합리한 견해들을 헤쳐나가야 했다. 일본이 항복할 것인지, 아니며 schlgn의 한 남자, 한 여자, 그리고 한 아이까지 싸울 것인지, ,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일본 천황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은 어떻게 될 것인지 등을 예측해야 했다.[8]

 

인종과 국가에 대한 준 과학적 이론들이 제시되면서 민족 집단의 고유한 특성을 추출해낼 수 있다는 주장은 상당 부분 설득력을 잃었다. 이제 이론가들은 한 국가의 단일문화적 정체성보다 문화가 갖는 다문화적 특성, 혹은 교접성을 더 강조하고 있다.[8]

 

죄책감과 수치심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그녀는 절대적인 기준을 정하지 않고, 다만 특정 부부에 더 강조점을 둘 뿐이었다.[10]

 

일본인들은 사후의 인간뿐 아니라 심지어 바위, , 강 등에도 신성의 아우라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배네틱트의 주장은 적절하다.[11]

 

배내틱트는 일본인들에게는 삶을 바라보는 경해에 조건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유일신 종교가 제시하는 윤리적 절대기준이 없는 일본인들에게, 윤리나 삶의 목적 등 모든 것은 상황의존적일 뿐이다. 따라서 그렇게 호전적이던 민족이 쉽사리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12]

 

베네딕트는 일본을 둘러싼 세계가 평화를 구가하는 동안 일본인들은 기꺼이 평화주의에 헌신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 열강이 전쟁 준비에 돌입하는 순간 일본은 다시 예의 군국주의로 회귀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12]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 문화의 특성을 국화와 칼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일본 문화의 틀을 탐구하고 있다. 미국에서 크게 발달한 문화인류학의 방법론에 의거한 저자의 연구는, 따라서 매우 전문적이다.[14]

 

저자가 목적으로 삼은 것은 평균적 일본인의 행동과 사고의 틀을 탐구하는 것이다. 원래 이런 문화인류학적 방법은 역사주의 방법과는 다르고, 그런 역자주의 방법은 주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15]

 

이 책의 방법론은 그런 주관성을 극복했다는 의미에서 학문적 객관성을 얻고 있다. 특히 이 책의 정수는 계층제도의 분석에 있다. 그 계층제도가 근대사회로 넘어올 때 어떠한 질서와 충동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고찰은 제3메이지유신속에 선명히 드러나 있다.[15]

저자 자신은 일본을 방문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부분적 체험은 전체적 방법론을 망쳐놓을 수도 있다. 이 책이 수많은 개인적 기행문이나 저널리스특한 일본 인상기와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으리라.[15]

 

일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유순하면서도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 들인다.[21]

 

1944 6, 나는 일본에 대한 연구를 위촉받았다. 일본인이 어떤 국민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나는 문화인류학자로서 모든 연구 방법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다.[22]

 

두 나라가 교전중이라는 사실은 연구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미국에는 일본에서 자란 일본인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경험한 구체적인 사실을 묻고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는가를 알아내어, 연구의 많은 결함을 그들의 설명으로 보충했다.[25]

 

인류학자가 연구하려는 부족의 생활양식 속에는 처음부터 당연한 것으로 예상한 것은 하나도 없어야 한다.[30]

 

인류학자는 평범한 사실을 연구하는 특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30]

 

종교적 교리와 경제적 관습과 정치는 결코 명료하게 격리된 작은 연못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경계를 넘어 흘러간다. 그래서 그 물은 서로 섞여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모르게 합쳐진다. 이 사실은 항상 진리이므로 연구자는 그 연구가 경제, 성생활, 종교 또는 어린아이 양육 등 여러 가지 사실 속에 분산된 것처럼 보일수록, 사회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을 더욱 잘 추적할 수 있는 것이다.[33]

 

이 책은 일본인의 보편적 특성을 그들의 생활방식에서 검토한 책이다.[33]

 

독일군 포로들은 휘하의 장군이나 최고 사령부가 히틀러를 배신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재오가 전쟁 준비의 책임은 최고 선동자인 히틀러가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본군 포로들은 황실 숭배는 군국주의 침략 전쟁 정책과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단언했다.[58]

 

그러나 천황의 뜻에 순종하라는 가르침은 양날의 칼이었다.[60]

 

일본인은 죽음 그 자체가 정신의 승리이며, 미국인처럼 환자를 잘 간호하는 것은 전투기의 구명 도구처럼 영웅적인 행위를 해치는 것이라고 배웠다.[64]

 

일본인의 병력 소모 이론을 극단적인 수준까지 이르게 한 것은 무항복주의였다.[65]

 

일본인들은 미군 포로가 자기 이름을 본국 정부에 보고하여 생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려달라고 의뢰한것을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경멸할 만한 일이라고 했다.[68]

 

일본인은 모든 것을 건 어떤 행동방침이 실패할 경우, 다른 방침을 취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 같았다[69]

 

일본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알아야 한다. 질서와 계층제도를 신뢰하는 일본인과, 자유와 평등을 신뢰하는 미국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계층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는 인간 상호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국가의 관계에서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의 기초가 된다.[71]

 

우리는 가족, 국가, 종교, 경제생활 등 국민적 제도를 살펴봄으로써, 비로소 그들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가 있다.[71]

 

머리를 숙이는 사람이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일에도, 상대방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다.[78]

 

씨족을 제도화하는 또 다른 방법은 선조나 종족의 신을 신사나 성소에서 숭배하는 것이다.[80]

 

가문의 요구는 개인의 요구에 선행된다.[84]

 

일본인은 누구나 우선 가정 내부에서 계층제도의 관습을 배우고, 그것을 경제생활이나 정치생활 등 넓은 영역에 적용한다.[85]

 

일본인이 어떻게 연대감을 확립했는가 하는 물음은, 이 책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86]

 

중국에서는 빈번히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일본에서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천황은 불가침이며 천황의 몸은 신성하다.[88]

 

동기의 정당성은 법을 어긴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농민들도 이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체념했다. 사형을 언도 받은 사람은 농민의 영웅이다.[97]

 

그리하여 폭동의 지도자가 기름가마에 들어가거나 교수형 당하거나 못 박혀 죽는 형장에는

민중이 대거 몰려들었지만, 결코 폭동을 일으키지는 않았다.[98]

 

일본인은 다른 어떤 주권국보다도 그 행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지도처럼 정밀하게 규정되어 있다. 개인은 각각 정해진 사회적 지위 속에서 생활하도록 제약 되었다.[102]

 

일본에는 만일 현행의 행동지도에서 허락받지 못한 일탈 행위는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펴져 있다.사람들은 이 지도를 신뢰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꾸든가 저항하는 대신, 그것을 지키는 데서 자신의 용기와 고결함을 드러냈다. 여기에 명기된 범위는 이미 아는 세계이며, 따라서 일본인의 눈으로 본다면 신뢰할 수 있는 세계였다.[103]

 

메이지유신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혁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사업으로 취급했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사업으로 취급했다. 그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목표는 일본을 세계열강의 대열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상파괴자가 아니었다.[113]

 

윗사람에 대한 전통적 의무, 특히 천황에 대한 전통적 의무는 일본의 큰 장점이다.[115]

 

국가는 국민이 소망하는 알맞은 위치를 인식하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122]

 

모든 것을 알맞은 장소에 둔다. 이것이 일본의 좌우명이다.[122]

 

전문적으로 종교적 고행에 몸을 바친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본에서 종교란 결코 위압감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은 즐겨 먼 곳의 신사나 절에 참배하러 가지만, 이것 역시 휴일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127]

 

다른 대다수 국가에서 군대는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지만, 일본의 군대는 소농계급에 동정을 가졌다. 그 동정심 때문에 군대는 여러 차례 대금융 자본가나 생산 자본가에게 저항하기도 했다.[128]

 

, 해운 장관은 외무성이나 내정을 맡은 각 성의 장관과는 달리, 천황을 직접 배알하고 상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따라서 천황의 이름을 이용하여 그들의 방책을 강제할 수가 있었다.[128]

 

일본은 계층제도 속에 거대한 부가 차지하는 위치를 주고 그것과 제휴했다. 그러나 부가 그 영역 밖에서 획득된 경우, 일본인의 여론은 그것에 통렬한 비난을 퍼붓는 것이다.[133]

 

이와 같이 일본인은 끊임없이 계층제도를 고려하면서 사회의 질서를 다듬어나갔다. 가정이나 개인 간의 관계에서는 연령, 세대, 성별, 계급 등이 알맞은 행동을 지정한다. 정치, 종교, 군대, 산업에서는 각각의 영역이 신중하게 계층으로 나뉘어 있어,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자신들의 특권의 범위를 넘어서면 반드시 처벌받는다. ‘알맞은 위치가 보장되어 있는 동안 일본인은 불만없이 살아간다. 그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의 최대의 행복이 보호되는가 하는 의미에서는 안전하지 않은 경구가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계층제도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유에서 안전하다.[133]

 

일본은 상상력 자체가 계층제도에서 형성되었다.[134]

 

일본인은 스스로에게 요구한 일을 다른 나라에도 요구할 수는 없었다.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들은 각자 알맞은 지위를 받아들이는일본의 도덕체계가, 다른 곳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른 국가에는 그런 도덕률이 없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일본만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덕체계를 이해해야 한다.[134]

 

최우선이자 최대의 채무인 천황의 온을 일컫는 경우, 온은 항상 무한한 헌신이란 의미로 사용된다.[141]

 

일본인은 이 땅에서 태어나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자기 신변의 크고 작은 일이 잘 되어간다고 느낄 때, 언제나 그것을 한 사람이 내려준 은혜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모든 역사 시대에 일본인이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그들이 소속하는 세계의 최고 윗사람이었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방 영주, 봉건 영주, 쇼군 등으로 변했다. 오늘날엔 그것이 천황이다.[141]

 

근대 일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정서를 천황에게 집중시켜왔다.[141]

 

일본인은 조상숭배의 대상을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최근의 조상만으로 한정한다. 이런 사실은 일본인에게, 자신이 유년시절 조상에게 현실적인 신세를 졌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142]

 

상대가 단순히 아는 사람이거나, 자신과 대등한 사람인 경우에는 온을 받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한다.[145]

 

도움을 베풀면 상대가 자신에게 크게 은혜를 입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어떻게 해서든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할 법도 한데, 반대로 도움을 베풀지 않으려 애써 조심한다.[145]

 

일본인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조상 이외에는 효행을 중시하지 않는다.[169]

 

서양인은 자식을 위한 일체의 수고로움을, 어머니의 본능이나 아버지의 책임감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일본인은 조상에 대한 효성으로 생각한다.[170]

 

일본인이 잘 쓰는 말에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183]

 

기리를 갚는 것은 동년배에게 온을 갚는 의무이다.[185]

 

세상에 대한 기리는 계약관계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185]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행한다면 그것은 기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185]

 

일본인의 속담에는 쌀 세 홉만 있으면 데릴사위가 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187]

 

현대에 들어 기리를 갚는다는 것은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이니라, 온갖 종류의 사람에게 온갖 종류의 의무를 이행하는 일이다.[191]

 

기리의 규칙은 엄밀히 말해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하는 갚음의 규칙이다.[192]

 

기리를 따라야 하는 것은 세상의 소문이 무섭기 때문이다.[192]

 

기리는 정확히 같은 양으로 갚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기리는 기무와 구별된다. 기무는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완전하게는, 아니 완전에 가까운 정도까지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리는 무한정한 것이 아니다.[194]

 

기리에 몰린 인간은 때때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커진 부채의 변제를 강요당한다.[196]

 

이름에 대한 기리는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이다.[199]

 

사람이 기리를 지키고 오명을 씻는 한, 결코 침해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단지 빚을 갚아 셈을 치르는 것일 뿐이다.[201]

 

중국인은 모욕이나 비방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소인 즉 도덕적으로 보잘것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202]

 

사무라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고통스런 표정을 보여서는 안 되며, 눈 한 번 깜박잊 않고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204]

 

기리의 모든 용법에서는 공통적으로 한 인간과 그가 하는 일을 극단적으로 동일시 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의 행위나 능력에 대한 비판은 자동적으로 그 사람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된다.[208]

 

일본에서는 자기 방어가 대단히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면전에서 직업상의 과오를 지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 예의이며 또한 현명한 태도라고 여긴다.[209]

 

우리는 경쟁을 바람직한 일로 생각하고 크게 의지한다. 심리 테스트는 경쟁이 우리를 자극시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만든다는 것을 증명한다.[209]

 

그런데 일본에서의 테스트 결과는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준다.일본의 어린이는 경쟁을 장난처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반면 청년이나 성인은 경쟁자가 있으면 작업 능률이 뚝 떨어진다. 혼자서 할 때는 비교적 좋은 진보를 보이고 실수가 적고 속도도 빨랐던 피험자가, 경쟁 상대와 함께 하면 자주 틀리고 속도도 늦어진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비교하여 능률을 측정할 때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측정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210]

 

문제를 경쟁으로 해결하려 하면 피험자들은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빼앗겨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들은 경쟁을 외부의 공격이라고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그들은 종사하는 일에 전념하는 대신 주의력을 자신과 공격자의 관계에 빼앗긴다.[210]

 

미국은 아무리 지는 것이 싫다 하더라도, 졌다고 해서 울거나 소리 지는 사람을 경멸한다.[211]

 

일본에서는 어떠한 계획이건 성공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될 수 잇는 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예절이다.[213]

 

그들은 모욕이 불러일으키는 분노를 더없이 성공의 자극제로 삼고 있지만,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태는 제안하고 있다.[215]

 

일본의 윤리에서 기리란 가신이 주군을 죽을 때까지 충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주군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면 갑자기 증오의 태도로 돌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221]

 

역사물에 나오는 이런 두 가지 주제- 자신이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옳았던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 설령 상대가 주군이더라도 모욕에는 복수하는 것-는 일본문학에서 가장 잘 알려진 상투적인 주제로서, 여러 가지 양상으로 서술되고 있다.[222]

 

사무라이는 명예롭지 못한 처형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공적 명령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26]

 

현대에 들어 항의를 위한 자살은, 협상이 아니라 자기 주장에 대한 순교적 행위이다.[227]

 

1930년대 중반, 그들의 대다수가 그런 상태에서 벗어난 방법 또한 전통적이었다. 그들은 국가주의적 목표를 세우고 공격의 방향을 내면에서 다시 밖으로 돌렸다. 다른 나라를 전체주의적으로 침략함으로써 그들은 다시금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228]

 

이번 전쟁의 결과로 그 신념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된 현재, 다시금 이런 무기력이 일본에서 큰 심리적 위협이 되고 있다. 일본인은 의도가 어떻든 쉽사리 이 무기력을 극복할 수 없다. 도쿄의 한 일본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더 이상 폭탄이 떨어질 걱정이 없어 정말 안심이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모든 목적이 없어지고 말았다.”[229]

 

일본인은 침략의 근거를 다른 데서 구한다. 그들은 세계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강대국이 존경을 받는 것은 무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강대국에 필적하는 나라가 되기 위한 방침을 취했다.[233]

 

기리는 항상 침략행위의 추구와 상호존중 관계의 준수를 동시에 의미했다. 그리하여 패전에 이르자 일본인은 자기 자신에게 심리적 폭력을 가한다는 의식은 전혀 하지 않고, 단지 침략 행위에서 상호존중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지금도 그들의 목표는 여전히 명성을 획득하는 일이다.[233]

 

영국은 보복을 위해 원정군을 파견하여 사쓰마의 중요한 항구 가고시마를 포격했다. 일본인은 도쿠가와 시대를 통해 계속 화기를 제작하고는 있었으나, 구식 포르투칼 대포를 모방한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사쓰마는 영국 군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 폭격은 의외의 결과를 초래했다. 사쓰마 번은 영국에 영원한 복수를 맹세하는 대신 오히려 우호를 청했다. 그들은 적이 강대하다는 것을 알고는 적의 가르침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234]

 

이와 같이 상황에 따른 현실주의는 일본인의 이름에 대한 기리의 밝은 면이다.달처럼 기리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235]

 

극단적인 의무와 변제와 철저한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일본의 도덕률은, 당연히 개인적 욕망은 인간의 가슴속에서 제거해야 할 죄악이라고 낙인찍을 것처럼 생각된다.[239]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일부러 함양한 후에, 엄숙한 생활양식에서는 쾌락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도덕률을 제정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다.[240]

 

현대의 초등학교에도 난방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이들의 신체를 단련하고, 장래 인생의 갖가지 난관에 견뎌낼 수 있게 한다는 이유에서 매우 좋은 일로 치부된다.[242]

 

그들은 아내에 속하는 영역과 성적 향락에 속하는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그 둘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두 영역은 모두 공공연히 인정된다.[247]

 

일본에서 동성애는 사무라이나 승려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공인된 즐거움이었다.[251]

 

일본인은 자위행위의 향락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인만큼 여러 가지 자위도구를 고안한 국민도 없을 것이다.[252]

 

일본인의 인생관은 주, , 기리, 진 인정등의 표현에 나타난 그대로이다. 일본인은 인간의 의무가 마치 지도 위의 여러 지역처럼 몇 개의 부분으로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261]

 

일본인은 다른 사람을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로 판단 하지 않고, ‘ 고를 모른다. 기리를 모른다등의 말로 표현한다.[261]

 

그들이 곧잘 말하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녹은 칼의 녹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다. 칼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인격이 녹술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만 설사 독이 슨다 하더라도 녹 밑에는 여전히 빛나는 영혼이 있고, 그것을 다시 한번 갈아내기만 하면 된다.[265]

 

그들은 의무의 법도를 저버리고 개인적 욕망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을 약자로 판단한다.[277]

 

그들은 주를 단순히 지도 위의 하나의 영역이 아니라 도덕의 근본 원리로 삼으려 했다.[278]

 

감정을 입 밖으로 낸다는 것은 수치다. 그것은 자기를 속속들이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287]

 

일본인이 성실이라는 말을 쓸 때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본의 도덕률이나 일본 정신에 의해 지도상에 그려진 길을 따르는 열정을 말한다.[289]

 

너는 자중해야 한다는 말은 부모가 청년기의 자식을 훈계할 때 끊임없이 입에 올린다.[292]

 

수치의 문화에서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론 신에 대해서도 고백의 관습이 없다. 행운을 기원하는 의식은 있으나 속죄의식은 없다.[298]

 

무리라는 말은 의지와 행동 사이에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빈틈도 없을때의 체험을 말한다.[312]

 

일본인은 단지 기독교와 비행기를 연결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침착하고 일을 할 때 당황하지 않는 마음을 기르는 훈련을 교육학 시험을 치를 때에도, 연설을 할 때에도, 정치가로서 활약할 때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일로 생각하고 있다. 집중하는 태도를 기르는 훈련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314]

 

일본인은 예부터 사후세계를 상상하는 일에는 흥미를 갖지 않았다. 그들의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나, 죽은 사람의 생활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조차 버리고 말았다.[315]

 

그들은 속박은 가장 좋은 정신적 훈련이고 자유로는 달성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굳게 믿는다.[337]

 

일본에서의 아버지는 현실의 인격을 떠난 계층제와 올바른 처세의 상징이다.[395]

 

일본인은 사리나 부정에 대해 반항하는 일은 있지만 결코 혁명가는 되지 않는다.[398]

 

일본인은 양자택일적인 윤리를 가지고 있다. 여태껏 받아온 일체의 훈련이 그들을 방향 전화에 응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399]

 

일본은 스스로의 호전적 정열을 다시 불태워 일본이 얼마나 전쟁에 공헌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일 것이다. 만일 다른 나라에서도 군국주의가 실패한 것으로 파단된다면,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 기도는 결코 명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교훈을 얼마나 뼈저리게 체득했는가를 증명할 것이다.[414]

 

 

IP *.126.231.229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