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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22일 12시 02분 등록

<3. 영국과 러시아의 사회 소설>

이상주의자와 공리주의자

ü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동일한 역사적 기원을 가졌다. 둘 다 계몽주의의 성과로 나타났으며, 논리적으로 상호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134).

ü         시민 계급의 해방은 봉건주의의 해체에 필요한 하나의 단계인 동시에 경제 활동이 중세적 속박과 제한에서 벗어날 것을 미리 전제로 삼는 것이었다 (134).

ü         프랑스에서는 지식인이 혁명이냐 부르즈와적 태도냐 사이에서 선택이 강요됨을 느꼈고, 설사 그 선택이 때때로 감정의 분열을 수반하는 경우에도 여하튼 선택은 뚜렷하고 결정적이었다. 이에 반하여 영국에서는 산업주의에 반대한 지식인 집단이 자본주의적 부르즈와 자신과 똑같이 보수적이고, 심지어 때로는 그보다 더 반동적인 세계관의 기초 위에 서 있었다 (135).

 

2의 낭만주의 운동

ü         성공한 부르지와는 점점 더 보수적으로 되고, 민주주의적 노력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다시 낭만적 성격을 지닌 반동적 자세를 취한다 (136).

ü         1832년에서 1848년까지의 기간은 가장 날카로운 사회적 위기의 시대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유혈적 충돌로 점철된 불안의 시기다 (136).

ü         부르즈와지에 대한 증오가 엄격, 냉혹한 자연주의로 표현된 프랑스에서와 달리, 17세기 이후 아무런 혁명도 겪지 않았으며, 프랑스인의 정치적 경험과 실패도 당해본 바 없는 영국에서는 그리하여 앞에서 얘기한 제2의 낭만주의 운동이 성립된다 (137).

ü         여기서도 역시 발전의 기본적 방향은 서구 전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증주의 쪽으로, 즉 합리주의 및 자연주의 원칙과 조화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137).

ü         가장 크고 유혹적인 목소리는 칼라일의 음성으로서, 그는 무쏠리니와 히틀러로의 길을 마법의 풍적수들 중에서 최초이자 가장 개성적인 인물이었다 (138).

ü         그는 역시 혼란된 두뇌의 소유자였고 무한과 영원에 대한 열광, 초인의 윤리와 영웅숭배 등의 자욱한 안개와 연기의 구름으로써 몇 세대의 사람들에게 객관적 사실을 흐리거나 숨긴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38).

 

러스킨의 심미적 이상주의:

ü         러스킨은 칼라일의 직접 후계자이다. … 그러나 그는 스승의 추상적인 영웅숭배를 의미있는 미의 예찬으로, 막연한 사회적 낭만주의를 구체적 과업과 분명히 정의할 수 있는 목표를 가진 하나의 심미적 이상주의로 변형시켰다. 러스킨 이론의 시대성과 현실성을 무엇보다 잘 말해주는 것은 그가 라파엘 전파 (1848년 런던에서 형성된 예술 운동으로 라파엘로 이전의 사실적이고 소박한 화풍을 모범으로 삼는 유파. 헌트, 로쎄티, 밀레이 등이 대표적 화가임)와 같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중요한 운동의 대변인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138).

 

라파엘 전파:

ü         라파엘 전파의 그림은 빅토리아조의 다른 모든 예술과 똑같이 문학적이요 시적이다 (140).

ü         예술의 최고 가치가 선량하고 위대한 영혼의 표현에 있다는 명제는 모든 라파엘 전파의 확신과 일치했다 (141).

ü         그는 (러스킨) 의심할 나위 없이 예술과 취미의 저하를 일반적 문화위기의 징후로 파악한 최초의 인물이요, 오늘날에도 충분히 인정되지 못한 기초적 원리, 즉 미의 감각과 예술의 이해력이 각성되자면 먼저 사람의 생활조건이 달라져야 한다는 원리를 발언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142).

ü         그는 예술이 예술가나 전문가 혹은 교양인의 특권이 아니라 만인의 유산, 만인의 재산에 속한다는 복음을 전파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사회주의자가 아니며 심지어 민주주의자도 아니었다 (142).

ü         미와 지혜가 통치하는 플라톤의 철인왕국이 그의 이상에 가까운 것으로서, 그의 사회주의는 인간은 교육받을 수 있는 자질과 문화의 혜택을 향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부란 물질적 재화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능력에 있다 (142~3).

 

윌리엄 모리스:

ü         빅토리아 시대의 일련의 대표적 사회비평가들 중에서 제3의 인물인 윌리엄 모리스는 사상 면에서 러스킨보다 훨씬 더 수미일관되고 실천적인 면에서 훨씬 더 멀리 나아간다 (143).

ü         예술 자체의 진로만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헛된 노릇이요, 예술을 좀 더 잘 감상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의 창조가 유일한 열쇠임을 그는 알았다. 그는 사회적 과정과 이에 따른 예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형태로서의 계급 투쟁을 완전히 의식했고, 이 의식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입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생각했다 (143).

 

사회 소설의 형성:  

ü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 비평과 문명 비평에서 거론되던 사회적 제현상은 또한 당시 영국 소설의 주제를 이룬다. 당시의 소설 역시 칼라일이 영국의 상태라는 문제로 불렀던 것을 중심으로 움직이며 산업 혁명과 더불어 성립된 사회적 상황을 묘사한다 (146).

ü         소설은 여전히 주로 시민계급의 상,중층의 관심을 바탕으로 하고, 계급 투쟁의 승리자들에게 일어나는 도덕적 갈등에 하나의 해결책을 제공한다 (147).

ü         어떤 작가들은 상층 계급에 공감하고 다른 일부는 천대받고 피해입은 사람들에 동정을 표하지만, 정말 혁명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기껏해야 그들은 진정한 민주적 충동과, 누가 무어라 하더라도 결국 계급적인 차별은 정당한 근거가 있으며 유익하게 작용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이리저리 서성거린다 (147).

ü         근대적 사회 소설은 프랑스에서와 같이 영국에서도 1830년경에 성립하여 나라가 혁명의 벼랑에 서 있던 1840년부터 1850년까지의 소란스러운 시기에 그 절정을 맞이한다 (147~8).

ü         그러나 영국 소설에서는 프랑스의 경우보다 토론된 문제들이 더 구체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인 반면 덜 주지주의적이고 세련된 것이며, 작가들의 입장은 더욱 인도적이고 애타적이지만 동시에 한층 더 유화적이요 기회주의적이다. 디즈레일리, 킹즐리, 개스켈 부인, 디킨즈 등은 칼라일의 첫 제자들로서, 그의 사상을 가장 흔연히 받아들인 작가들에 속한다 (148).

ü         월터 스콧에 이르러 비로서 소설은다시 사회적으로 된다. 스콧에게소 인물의 사회학적 제약성은 선배들의 경우보다 훨씬 더 의식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148~9).

ü         월터 스콧의 가장 가까운 후계자요 무엇보다도 일급의 이야기꾼이자 당대 최고의 인기작가로서의 스콧의 위치를 계승한 디킨즈… (149).

ü         1816년부터 1850년까지 영국에서는 평균 잡아 매년 100편의 소설이 나오고, 대부분 소설류인 1853년의 간행서적은 25년 전에 나온 작품의 세배에 이른다 (149).

 

디킨즈의 대중성과 위대성:

ü         디킨즈의 성공은 동시에 새로운 출판방식의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서, 그는 작품을 사서 읽고 즐기는 과정 즉 문화적 소비의 민주화에 따른 모든 혜택과 손해를 함께 맛보게 된다 (150).

ü         그는 자기 시대에 대한 저항이나 환경과의 긴장된 관계에서 작품이 생겨나지 않은, 독자대중의 요구와 완전한 일치를 이룬, 낭만주의 이래 유일한 참다운 작가이다. 그는 셰익스피어 이후 유례가 없는 인기를, 고대의 무언극이나 음유시인의 대중성에 관한 우리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인기를 누렸다 (151).

ü         디킨즈는 대중을 위한 오락소설의 조달자요 과거의 값싼 탐정소설의 계승자였으며 현대적 스릴러의 창안자, 요컨대 그 문학적 가치를 떠나서 본다면 모든 점에서 우리의 베스트셀러에 해당하는 책들의 저자였다 (153).

 

디킨즈의 사회의식

ü         디킨즈는 처음부터 예술적 및 이념적으로 진보적인 문학의 새로운 타입을 대변했다 (153).

ü         그의 고발은 모든 사람들의 귀를 시끄럽게 울렸고, 사회 전체에 부정의 책임이 있다는 불안한 느낌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채웠다. 하지만 고난의 외침과 실컷 울고 난 다음에 으레 뒤따르게 마련인 만족감을 뭔가 좀 더 확실한 것으로 인도하지는 못했다 (153).

ü         그는 중산계층에서 쫓겨나 프롤레타리아트의 변두리에까지 이르렀던 젊은 시절의 충격을 결코 극복할 수 없었다. …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내용을 이루는 본질은요컨대 근심 없는 상태 및 명예였던 것이다 (154).

ü         디킨즈는 자기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내적 모순들을 극복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한다. … 그가 민중이란 통치능력이 없다는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우중을 두려워하고, 이상적 의미에서의 민중이란 중산계층이라고 생각한다 (154).

ü         그는 다만 소시민의 부담과 불평을 알고 있었고, 부르즈와 사회의 기초를 뒤흔들지 않고 고칠 수 있는 악에 대해서만 싸웠을 따름이다. … 노동계급의 여러 요구, 점차 자라나는 저 커다란 미래의 세력은 단지 그를 얼떨떨하게 할 뿐이었다 (155).

ü         디킨즈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갈등의 의미를 완전히 잘못 파악한다. … 그는 폭동과 혁명을 압제와 착취보다 더 큰 악으로 여기기 때문에 폭력의 포기를 설교한다 (156).

ü         현대의 모든 영국 소설은 환경 서술, 인물 묘사 및 대화법의 기교를 그에게서 이어 받는다 (157).

ü         그는 예술을 불필요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정신이니 지성이니 하는 것들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부릊와적인 데 그치지 않고 소시민적이며 속물적이었다. 그는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대중과의 연대감을 거듭 입증하려고나 하는 듯이 예술가와 시인 및 그와 비슷한 공론가들과의 어떠한 소통도 가지기를 거부했다 (158).

 

빅토리아 중기의 소설

ü         빅토리아 시대의 독서층은 이미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는 두 개의 서클로 나누어졌으며, 디킨즈는 상류 계급의 독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 받지 못한 마구잡이 대중들의 작가로 통했다 (158).

ü         그러나 1830년 이후부터 이 두 문화계층 사이의 간격은 훨씬 더 뚜렷해졌으며, 비록 많은 독자들이 여전히 중간지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하더라도 디킨즈의 독자층과 새커리나 트롤로프의 독자층은 쉽사리 갈라볼 수 있게 되었다 (158).

ü         오늘날에는 훌륭한 문학이 근본적으로 비대중적이요, 인기있는 문학이란 식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 (159).

ü         1851년의 세계박람회는 영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빅토리아조의 중기는 초기에 비하여 번영과 안정의 시대인 것이다. … 여러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그 예각적 위기는 제거된다 (159).

 

죠지 엘리어트:

ü         영국 소설사에서 내면으로의 전환은 죠지 엘리어트의 작품과 함께 완수된다. 그녀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정신적 및 도덕적 본성에 관한 것이며, 거대한 운명적 투쟁의 무대는 인간의 영혼, 내면세계, 도덕의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의 작품들은 심리 소설인 것이다 (160).

ü         그녀의 주인공들은 지적, 도덕적 체험을 육체적 사실처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사색인들이다. 그녀의 여러 작품은 어느 정도 심리학적, 철학적 에쎄이로서, 독일 낭만주의가 구상한 소설의 이상에 상당히 부합하는 것이다 (160~1).

ü         죠지 엘리어트와 더불어 소설은 새로운 정신적, 정서적 내용을, 고전주의 시대 이래 사라져버린 정신적 내용과 정서적 가치를 획득한다. 비합리적 인물의 감상적인 체험이 아니라 죠지 엘리어트 자신이 지적 정열이라 부른 태도가 그녀의 작품 세계의 중심을 이룬다. 그녀의 소설의 진정한 주제는 인생의 분석과 해석이요, 정신적 가치에 관한 인식과 평가이다 (161).

ü         일체의 안이함과 경솔성을 거부하는 진지하고 비평적인 의도는 죠지 엘리어트의 도덕적 입장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사고 전체를 특징 짓는다. 그녀는 영국 소설에서 지식인을 적절하게 묘사할 줄 안 최초의 인물이다 (161).

ü         발자끄의 강점은 체험의 묘사이고, 죠지 엘리어트의 강점은 체험의 분석이다 (162).

 

부르즈와지와 지식인:

ü         심리 소설은 부르즈와지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 있는 교양계층으로서의 지식인의 문학적 장르이다. 빅토리아조 중기가 시작되면서 비로서 지식인은 속박되지 않고 유동적이요 초계급적이며 여러 다른 계급 사이를 중개하는하나의 집단으로서 영국에 등장한다 (162).

ü         교양 계층은 자기 멋대로 움직이도록 부르즈와지가 풀어두는 한, 부르즈와지와의 유대를 유지한다 (162).

ü         혁명의 승리와 차티즘 (1836~48. 6개 항목의 급진적인 인민헌장을 내세운 영국의 정치 운동)의 좌절 이후에야 비로소 부르즈와지는 자기의 확고한 힘을 느꼈고, 그리하여 이제 양심의 갈등이니 양심의 가책 따위는 갖지 않게 되었으며, 이미 어떤 비판의 필요를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문화적 앨리뜨, 특히 문필가들은 사회에서 하나의 사명을 수행한다는 느낌을 잃어 버렸다. 그들은교육받지 못한 서민계층과 부르즈와지 사이에서 완전한 고립을 느끼게 되었다 (163).

ü         이 느낌과 함께 시민계급에 뿌리를 둔 초기의 교양계층으로부터 우리가 지식인이라고 지칭하는 사회적 집단이 처음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문화의 대표자가 점차 권력의 대표자로부터 떨어져나오는 해방의 과정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를 이룰 따름이었다. 인문주의와 계몽주의는 이 발전의 첫 계단으로서, 그것들은 한편으로 교회의 도그마에서, 다른 한편으로 귀족적 취미의 독재에서 문화의 해방을 완수했다 (163).

ü         뒤이어 프랑스 대혁명은 그때까지 교회와 귀족들만이 주무르던 문화의 독점에 종결을 짓고, 7월 왕정과 더불어 확실하게 된 부르즈와지의 문화적 독점을 위해 길을 닦았다. 19세기 중엽의 혁명기간의 종말은 지배계급으로부터의 교양계층의 해방을 향한 마지막 발걸음이자 좁은 의미의 지식인의 출현을 향한 첫 발걸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163).

ü         지식인은 부르주와 계급에서 나타났고, 그 선구자는 프랑스 대혁명에의 길을 준비한 시민 계급의 저 전위였다. 그들의 문화적 이상은 계몽주의적, 자유주의적인 것이며, 인간적 이상은 인습과 전통에 속박받지 않는 자유로운 진보적 인간성의 개념에 기초를 둔 것이다 (164).

ü         중세의 수도사와 반대로 근대 지식인은 재산 정도와 직업이 각기 다른 여러 계층의 출신자들로 성립되고, 따라서 서로 다른 계층들의, 때로는 적대적인 계층들의 이해와 관점을 대변한다 (165).

ü         그들의 임무는 처음부터 문화적 가치들의 여러 전제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데 있었다 (165).

ü         부르즈와지와 아직 일체이던 교양 계층은 개혁의 선봉자였으나, 부르즈와지로부터 떨어져나온 지식인은 반항과 분해작용의 요소가 된다. 1848년경까지 지식인은 아직 부르즈와지의 정신적 전위이나, 1848년 이후 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노동계급의 챔피언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불안전해진 결과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어느 정도 공동 운명체임을 느끼는데, 이 연대감은 때가 되면 부르즈와지를 모반하여 반자본주의적 혁명의 준비에 가담할 결의를 북돋아준다 (165).

ü         보헤미안에게 있어서는 지식인과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접촉점은 이런 일반적 공감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실상 보헤미안들은 그들 자신이 이미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이다 (166).

 

러시아의 지식인:

ü         근대 러시아 소설은 본질적으로 러시아 지식인의 산물인데, 이들은 제정 러시아의 기성체제와 결별한 정신적 엘리뜨들로서 문학은 무엇보다도 사회비판으로, 그리고 소설은 사회 소설로 이해한다. 러시아에서는 사회적 의의 또는 호용성을 내세우지 않는 단순한 오락문학이나 순수한 심리분석으로서의 소설은 1880년대에 이르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장르이다. 온 나라가 너무나 격동에 휘말려 있고 독서층의 정치의식과 사회 의식이 너무나 고도로 발달되어 있어서 예술을 위한 예술같은 원칙이 대두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167).

ü         근대 러시아 문학은 온통 반항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 첫 황금시대는 짜르의 전체 정치에 반대하여 계몽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진보적이고 세계주의적인 귀족들의 문학활동에 힘입었다 (167).

ü         문화계층 (지식인의 형성)의 성립과 함께 러시아 문학에서 1830년대 말까지 압도적이던 귀족층의 주도권은 끝을 맺는다. 뿌슈긴의 죽음 (1837)은 한 시대의 종언을 의미한다. 지적 주도권이 지식인의 수중으로 넘어가며 이러한 사태는 볼셰비끼 혁명 때 까지 대체로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다 (168).

ü         새로운 교양 계층은 귀족과 평민을 아울러 포함하고, , 하층의 계급 이탈자들로 보충되는 잡다한 집단이다 (168).

ü         모스끄바 대학에서는 학생 단체와 문화단체들이 있어 새로운 계급 없는지식인의 중심지가 된다. 고위관리와 장성들이 사는 쾌락주의적이고 퇴폐적인 고도 모스끄바와 정열에 넘치고 지식욕에 불타는 청년들의 근대적 대학도시 모스끄바의 대조는, 이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문학적 변모의 원천이 된다 (168~9).

ü         그리하여 1860년대에는 문학의 민주화와 새로운 지식인의 형성이 완성된다 (169).

 

서구파와 슬라브파:

ü         서구지향적 지식인의 합리주의에 자극되어 슬라브주의라는 형태로 일어나는 지적 반작용은 유럽에서 이보다 반세기 앞서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낭만주의적 역사주의와 전통주의에 대응하는 것이다 (169).

ü         그들은 서구파의 세계주의와 무신론적 자유사상에 대항하여 민족적, 종교적 전통의 가치를 강조하며 러시아 농민에 대한 신비주의적 신앙과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충성을 천명한다 (169~170).

ü         서구파가 러시아의 이상과 구원을 유럽에서 찾은 것처럼 슬라브파는 참된 기독교의 보유자요, 서구의 개인주의에 물들지 않은 전통적 러시아야말로 유럽의 이상이며 구원이라고 믿는다 (170).

ü         슬라브주의 운동이 열을 띠고 구체화된 것은 이른바 ‘40년대의 인물들 (1840년대에 활약한 밸린스끼를 비롯한 급진적인 작가 및 평론가들)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기로 해서이다. 이러한 선명한 이론과 의식적인 강령을 갖춘 슬라브주의의 대표자는 처음에는 주로 대지주들이었다 (170).

ü         그러나 슬라브주의가 보수주의나 반동주의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파 중에도 민주주의의 반대자가 있는 것처럼 슬라브파 가운데도 참된 민중의 벗이 있는 것이다 (170).

ü         여하튼 적어도 최초의 슬라브주의자들은 짜르의 전제정치의 반대자이며 니꼴라이 1세의 통치에 반항하여 투쟁한다 (170).

ü         우리가 서구파를 두 세대로 나누어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라브주의 운동에서도 두 단계를 구분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마치 1840년대의 개혁주의와 합리주의가 1860~70년대의 사회주의와 유물론으로 전개되었듯이 봉건적 지주들의 슬라브주의는 다닐레프스끼, 그리고리예프 및 도스또예프스끼의 범슬라브주의와 인민주의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슬라브파의 이러한 새로운 민주적 경향은 이전의 귀족주의적 경향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농노해방 이후 나이 많은 문필가들 다수가 지식인과 서구파에 등을 돌리고 민족주의자의 진영에 가담한다 (171).

ü         이제 슬라브파와 서구파는 그들의 목표보다도 투쟁방법으로 서로 분간하기 쉬워진다. 전러시아의 지성이 슬라브적 이념을 표방하고 나오며, 모든 지식인들이 애국자가 되고 러시아의 사명의 예언자가 된다 (171).

ü         우리는 한 2,30년 동안 유럽이 필요하지만, 그 후에는 유럽에 등을 돌릴 것이다라고 한 뾰뜨르 대제의 유명한 말은 분명히 개혁자 대다수의 생각과 아직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171).

ü         급진주의자들의 슬라브파적 편향은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단계에 처해 있는 러시아 국민이 서구의 여러 국민들보다 휠씬 동질적이라는- 다시 말해서 계급적으로 덜 분화되어 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러시아의 모든 정신적 엘리뜨들은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예술과 문화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171).

ü         러시아인들은 사회로부터의 개인의 소외, 그리고 현대인의 고독과 고립이라는 유럽의 운명적인 대문제를 자유의 문제로 정립했다. 그리고 이 문제가 러시아에서처럼 강렬하고 깊고 생생하게 체험된 곳은 아무데도 없으며,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에 따르는 책임을 똘스또이나 도스또예프스끼보다 더 뼈아프게 느낀 사람도 없다 (172).

ü         서구의 소설은 사회에서 소외되어 고독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파멸하는 개인을 묘사함으로써 끝나는 데 비해, 러시아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그리고 같은 인간들의 사회에서 이탈하도록 하려는 악령과의 투쟁을 묘사한다. 이러한 차이가사랑과 믿음에 대한 이 두 작가의 복음뿐 아니라 전 러시아 문학의 메시아주의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172~3).

 

러시아 소설의 행동주의:

ü         러시아 소설은 서구 소설보다 훨씬 더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향 문학이다. 서구 문학에서보다 사회문제가 훨씬 더 많은 지면과 훨씬 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훨씬 더 오랫동안 더 절대적으로 그 우위를 지켜나간다 (173).

ü         러시아인들에게 19세기는 계몽주의의 시기로서, 그들은 혁명 전 시대의 정열과 낙관주의를 서구 국민들보다 한 세기가 더 오래 지니고 있었다. 러시아는 유럽의 여러 혁명들이 맛본 배신과 패배와 변질의 환멸을 겪지 않았고, 따라서 1848년 이후에 프랑스와 영국을 휩쓴 피로의 기색이 없는 것이다 (173).

ü         러시아 소설은 그 암담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굽힐 줄 모르는 낙관주의의 표현이며 러시아와 인류의 장래데 대한 믿음의 증거이다 (174).

ü         이러한 낙관주의는인간의 고통과 희생이 의미가 있으며 절대로 헛되지 않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나타나 있다. 위대한 러시아 소설가들의 작품은 거의 언제나, 비록 슬프기는 하지만 화해롭게 끝난다. 그 작품들은 프랑스 작가들의 소설보다 더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그처럼 각박하고 절망적이지는 않다 (174).

 

자기소외의 심리학:

ü         러시아 소설의 놀라운 점은 그 연천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영국 소설의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로부터 주도권을 넘겨받아 당대의 가장 진보적이고 생기있는 문학 형식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174).

ü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의 작품에 비할 때 19세기 후반의 모든 서구 문학은 지치고 정체된 것처럼 보인다. <안나 까레니아> <까라마조프 형제>는 유럽 자연주의의 정상을 이룬다. 이들은 커다란 초개인적 질서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 소설의 감각을 조금도 잃어버림이 없이 저들의 심리학적 업적을 집대성하고 능가하는 것이다 (174).

ü         사회소설은 발자끄에서, 교양 소설은 플로베르에서, 삐까레스끄 소설은 디킨즈에서 각기 그 완성을 보듯이 심리소설은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에 이르러 그 완전한 성숙이에 들어간다 (174).

ü         근대 심리학은 영혼의 분열상을 어떤 구체적인 내적 갈등으로 선명하게 규정할 수 없는 부조화를- 묘사하는 데서 출발한다 (175).

ü         이러한 새로운 발전의 첫 단계를 보여주는 스땅달의 경우, 우리는 영혼의 여러 다른 구성 요소들이 바로 우리 눈앞에서 변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어떤 정신상태 묘사의 잠정적 성격과 정신적 태도의 애매모호한 성격은 모든 문제될만한 심리분석의 기준이 되며 단지 인간 영혼의 현란하고 만화경 같은 모습만이 예술적인 흥미를 지닌 것으로 통한다. 이러한 발전의 최종단계를 이루는 것이 완전히 예측할 수 없고, 비합리적인 도드또예프스끼의 인물들이다 (176).

ü         그대는 밖으로 보이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라는 측면이 이제는 심리학적인 표준 상태가 되며 이제부터는 인간에게 있어서 이상하고 야릇한 면, 악마적이고 불가사의한 면이 그의 심리학적 중요성의 전제조건으로 통하게 된다 (176).

ü         도스또예프스끼는 현대 심리학의 가장 중요한 원칙, 즉 과장되고 지나치게 과시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모든 정신적 태도의 분열적인 성격과 그러한 모든 감정들의 양면성이라는 원칙을 발견한다 (176).

ü         도스또예프스끼의 주인공들은 항상 그들이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양자택일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그들의 사고와 자기분석 및 자기비판은 그들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질타이며 몸부림이다 (177).

ü         도스또예프스끼가 옹호하는 지성의 자살이라는 개념이야말로 그가 스스로 제기한 진정한 문제와 타당한 질문을 전혀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도스또예프스끼 철학의 문제점을 집약하는 것이다 (177).

 

도스또예프스끼의 신비주의와 리얼리즘:

ü         도스또예프스끼의 심리적 통찰이 갖는 깊이와 섬세함은 그가 현대 지성인의 문제성을 체험하는 강도에서 온다. 이에 반해 그의 도덕 철학의 순진성은 그의 반합리주의적 탈선행위와 이성배반, 그리고 낭만주의와 추상적 이상주의의 유혹을 물리칠 능력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다 (177).

ü         우리가 흔히 교훈가, 신비주의자, 반동분자로 쉽사리 못박아버리는 도스또예프스끼는 그의 만년에 가서야 볼 수 있는 것이다 (178).

ü         도스또예프스끼의 경우는 발자끄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의 예술에는 발자끄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다치고 모욕당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연대감이 있으며그의 작품에는 일종의 빈곤의 존엄성 같은 것이 있다. 적어도 도스또예프스끼는 정말 빈곤에 관해 쓸 줄 아는 몇 안되는 작가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178).

ü         그 자신 거의 평생을 궁핍 속에서 보내며 이따금씩 문자 그대로 굶어본 사람으로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종교적 또는 도덕적 문제를 이야기할 때에도 그가 불러 일으키는 효과가자극적이고 혁명적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179).

ü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를 혁명적 대중의 대변자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민중을 이상화하고 슬라브주의적 태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나 농민들과 아무런 긴밀한 점이 없다. 그가 정말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지적 프롤레타일아트 뿐이다 (179).

ü         그는 자랑스럽게, 거의 도전적으로 자신을 문인이라고 부르며 자기를 이제까지 한번도 문학에 나타나본 일이 없는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사회계급의 대표자로 간주한다. 그리고 지식인의 정치적 목표에 대한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러시아 소설에서 이 계급의 최초의 진정한 대변자이다 (179).

 

도스또예프스끼의 사회철학:

ü         도스또예프스끼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부르즈와 지식인들이며 도스또예프스끼는 비록 내놓고 자신을 그들과 일치시키지 않지만 대체로 그들의 관점에 준해서 사회를 분석한다. 그런데 한 작가의 세계관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누구의 편을 드느냐보다는 오히려 그가 누구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느냐에 하는 데 있다 (180).

ü         도스또예프스끼는 당대의 사회 문제들- 무엇보다도 사회구성원의 미립자화와 계급간에 점점 깊어가는 심연-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보고, 그 해결책을 교육받은 사람들이 원래 그들이 스스로를 소외시켜버렸던 소박하고 신앙심 깊은 민중과 다시 하나가 되는 길에서 찾았다. 똘스또이는 같은 문제들을 귀족의 관점에서 보고 사회의 재건에 대한 희망을 지주와 농민들 간의 상호이해에서 기대했다 (180).

ü         도스또예프스끼와 디킨즈의 사회적 위치가 비슷하다는 점은 거듭 이야기되어왔다. 두 작가가 다 사회에 별로 깊이 뿌리박지 못한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고 두 사람 다 젊을 때부터 사회적 불안정감과 뿌리뽑힌 느낌을 맛보았다는 사실이 지적된 바 있다 (181).

ü         도스또예프스끼와 디킨즈의 이율배반적이고 여러모로 정리 안된 사회관과, 그들 아버지의 불안정한 사회적 위치 및 그들 자신이 일찍이 사회적 신분 상실의 느낌을 맛보았던 경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181).

 

도스또예프스끼의 자연주의와 낭만주의:

ü         사회소설의 역사에서 도스또예프스끼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는 무엇보다도 현대의 대도시를 그 소시민과 프롤레타리아트 군중, 소규모 장사치와 하급관리, 학생과 창녀, 무위도식자와 빈민들을 망라하여 처음으로 자연주의적으로 그려낸 것이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181~2).

ü         도스또예프스끼는 철두철미 대도시의 어둠침침한 모습을, 어둡고 아무런 색채 없는 비참한 상태로서의 도회를 그린다 (182).

ü         이 모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회적 의의와 날카로운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도 도스또예프스끼는 그의 작중인물로부터 그들의 출신계급을 말해주는 계수를 빼버리려 하는 것이다. 그는 그들 상호간의 경제적, 사회적 장벽을 헐어버리고 마치 만인 공통의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들을 모두 한데 섞어버린다 (182).

ü         도스또예프스끼의 정신주의와 민족주의도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즉 인간은 신분, 계급, 교육 정도 등을 초월한 더욱 높은 법칙에 의해 규제되고 있으며 이러한 제약 저 너머의 삶을 사는 정신적 존재라는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182).

ü         곤차로프, 뚜르게네프, 똘스또이에게는 출신계급에 의해 규정된 특징들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어떤 인물이 귀족인지 시민계급인지 평민인지가 단 한순간도 간과되거나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그에 반해 도스또예프스끼는 흔히 이러한 차이점을 놓치고 있으며 때로는 일부러 지나쳐버리는 것처럼도 보인다 (182).

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물들의 계급적 성격이 독자에게 전달되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의 지식인들을 정확히 명시된 하나의 사회집단으로 느낀다는 사실이야말로 도스또예프스끼를 그 자신의 뜻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유물론자로 만들고 있는 저 리얼리즘의 승리의 일부인 것이다 (182).

ü         그러나 이러한 유물론은 그의 정신성에 눈에 안 띄고 대부분 무의식적인 전제 중의 단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182).

ü         도스또예프스끼는 지적 경험을 감각적 경험 못지 않게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줄 안 최초의 현대 소설가일 뿐 아니라 그 이전에는 아무도 감히 들어가보지 못한 정신적 영역에까지 파고들어간다 (183).

ü         주지주의와 낭만주의의 종합이야말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예술의 획기적 업적이며, 그것은 19세기 후반의 가장 진보적인 문학 형식, 즉 낭만주의와 끊을 수 없는 유대를 지닌 채 주지주의를 향해 강렬히 움직이던 이 시대의 요구를 가장 잘 충족시키는 형식을 낳았다 (183).

ü         그의 스타일의 멜로드라마적 성격은 심리소설에 관한 그의 생각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의 과장된 방법은 단순히 스릴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것 없이는 그의 작품의 극적 상황들을 생각할 수 없는 그 과열된 정신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184).

ü         작가는 오히려 여기서 문제 되는 영적, 정신적 과정이 가장 원시적인 충동들과 똑같이 원초적이라는 느낌을 자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184).

ü         도스또예프스끼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정신적 존재들의 유토피아적 고도는 실상 하나의 좁은 새장임이 드러난다. 그들 존재의 내재성이 깨어지는 정신적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사회적인 스캔들이 터지는 것이다. 이러한 스캔들 장면들이 번번히 가장 다양한 사회적 신분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사회적으로 무엇보다 함께 있을 수 없는 요소들이 참여하여 벌어진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장면들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185).

ü         그것은 마치 작가가 사회적 지위나 계급의 차이란 만사가 와해되는 마당에서 가장 미미한 것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다 (185).

 

도스또예프스끼의 극적 형식:

ü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도스또예프스끼의 걸작들의 극적 형식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이러한 형식적 특징을 단지 극적 효과를 거두는 한 방법으로 해석하며 그것을 똘스또이 소설의 광할하고 도도한 서사시적 흐름과 대조시킨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가 연극적 수법을 쓰는 것은오히려 줄거리 전체에 극적 생기를 채워주고 서사시적 인생관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ü         도스또예프스끼에 의하면 인간 존재의 의미는 그 시간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이 발가벗겨져 몇 개의 간단명료한 공식으로 환원되는 것처럼 보이는 고조된 순간들, 인간의 본질 그대로의 진정한 자기임을 느끼고 자신의 자아 및 자신의 운명과 일치됨을 선언하는 그런 지고의 순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들이 실제로 있다는 것이 도스또예프스끼의 비극적 낙관주의의 근거이며, 그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비극에서 카타르시스라고 부른 저 운명과의 화해를 뜻하는 것이다 (186).

ü         도스또예프스끼는 항상 최고의 행복과 가장 완벽한 조화의 느낌을 초시간성의 체험으로 묘사했다 (186).

ü         이렇게 본질적이고 표현적이고 그러나 모자이끄식으로 뜯어맞춘 에피소드들을 위해서 연속성을 희생함으로써 그것은 현대 표현주의 소설 형식의 원칙을 예고해준다. 설명과 심리학적 분석과 철학적 토론에 비해 서술이 줄어들며, 소설은 대화장면과 내면의 독백과 거기에 작가가 덧붙이는 논평과 객담을 모아놓은 것이 된다 (187).

 

도스또예프스끼의 표현주의:

ü         이러한 방법은 서사적 장르로서의 소설뿐만 아니라 자연주의의 스타일로부터도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187).

ü         도스또예프스끼 자신이 그의 문학적 위치를 그야말로 정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는 나를 심리학자라도들 말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나는 더욱 높은 차원의 리얼리스트일 뿐이다. 즉 나는 인간 영혼의 심층을 속속들이 그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이러한 심층이란 인간의 비합리적인 면, 귀신들리고 꿈같고 도깨비 같은 면을 뜻한다. 그것은 표면의 진실을 그리는 것과는 다른 자연주의를 요구하며, 실생활의 요소들이 환상적으로 서로 섞이고 서로 어지럽게 밀어대고 서로 다투어 눈을 끄는 현상에 눈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187).

ü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예술에서 무엇보다도 리얼리즘을 사랑한다. 환상적인 것에 접근하는 리얼리즘을현실보다 더 환상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 현실보다 더 있기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에 대한 이보다 더 정확한 정의는 없다 (187).

ü         19세기 자연주의 예술의 과학주의와의 결별은 여기서 이미 마련되고 있다. 과학적 태도에 대한 반동, 자연주이에 대한 반항, 인생문제의 합리적 통어에 대한 불신에서 새로운 정신주의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삶 자체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으로 느껴기고 사방에서 신비스러운 음성들이 들린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며 예술은 이러한 음성들의 메아리가 된다 (188).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

ü         여러가지 극단적인 대조에도 불구하고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는 개인주의와 자유의 문제에 관한 그들의 태도에서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다 사회로부터의 개인의 해방과 그의 고독 내지 고립을 최대의 악이라고 본다. 두 사람 다 그들이 지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사회로부터 소외된 개인에게 들이닥치려고 하는 혼돈을 막아보려고 한다 (188).

ü         특히 도스또예프스끼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자유의 문제를 중심으로 돌고 있으며, 그의 위대한 소설들은 근본적으로 이 개념의 분석과 해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188).

ü         물론 문제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낭만주의자들이 항상 그 문제에 몰두해 있었고, 1830년대 이래로 그것은 정치사상과 철학사상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자유는 인습에 대한 개인의 승리를 의미했다 (188).

ü         천재의 (도스또예프스끼) 개인주의는 그에 이르러 하나의 추상적이고 기교 위주의 형태, 말하자면 일종의 유희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 즉 개인의 자유가 그것 자체로서 가치있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해답은 첫눈에 볼 수 있듯 그렇게 명료하지만은 않다. 개인주의가 무정부상태와 혼돈으로 이끌고 가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강제와 질서가 가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대 심문관 (<까라마조프의 형제>의 한 장)의 이야기에서 그 최종적이고 가장 심오한 형태로 제기되는데, 여기서 도스또예프스끼가 도달하는 해답은 그의 모든 종교 철학과 윤리관의 총화라고 볼 수 있다. , 자유를 없애면 제도의 경직화를 낳고 종교를 교회로, 개인을 국가로, 물음과 찾음의 불안을 교리 속에의 안주로 대체하게 된다 (189).

ü         똘스또이의 작품에서는 자유의 문제가 도스또예프스끼의 경우에 비해 훨씬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똘스또이에 있어서도 이 문제는 심리적으로 가장 흥미롭고 도덕적으로 가장 풍부한 단서가 되는 그의 작중인물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189).

ü         <안나 까레리나>가 결코 무해한 책이 아니라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말은 옳았다. 그것은 의문과 망설임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189).

ü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와 똘스또이의 반개인주의에는 그들의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개인주의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반대이유는 좀 더 비합리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그는 개체화의 원칙 자체가 민중과 민족과 공동체 사회를 통해 그 구체적 역사적 모습을 드러내는 세계 정신, 원초적 단일자 내지는 초월적 관념으로부터의 탈락이라고 본다. 그에 반해 똘스또이는 순전히 합리적이고 행복론적인 이유로 개인주의를 배격했다. 사회로부터 개인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인간에게 아무런 행복이나 만족을 가져올 수 없고 오직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해 헌신함으로써만 평안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190).

ü         우리는 세계관의 대립이 그 대변자들간의 사회신분의 격차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190).

ü         작품을 두고 말한다면 똘스또이는 때때로 도스또예프스끼와 똑같이 무절제하고 자의적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둘 다 무정부주의자들이다. 다만 똘스또이는 영혼의 심층을 파헤치는 데 있어 좀 더 자제력을 보이며 감정적 효과를 거두기 위한 방법을 좀 더 분별하여 선택할 따름이다. 그의 예술은 도스또예프스끼의 그것보다 훨씬 우아하고 견실하고 아름답다. 불안정한 19세기의 전형적 대표인 도스또예프스끼의 비해 똘스도이를 18세기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옳은 말이었다. 낭만적, 신비주의적이고 디오니쏘스적인 도스또예프스끼와 견주면, 그는 언제나 고전적이라는 느낌을 주고- 니체의 용어를 계속 쓴다면- ‘아뽈로적이고 조형적이고 조각 같은 데가 있다 (191~2).

ü         (똘스또이)는 도스또예프스끼를 첫눈에 굉장한 인상을 주는, 1천 루블은 나갈 것 같은 말에 비유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말은 다리에 무언가 잘못된 데가 있어 절룩거리는 것이 드러나고 유감스럽게도 단 두푼 어치도 안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도스또예스끼는 다리에 무언가 잘못된데가 있었고 튼튼하고 건강한 똘스또이에 비하면- 이성적이고 균형잡힌 볼떼르 옆에 세워 놓으면 루쏘가 항상 그렇듯이- 언제나 좀 병적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경우는 볼떼르와 루쏘의 경우처럼 두 범주가 선명히 갈라지지는 않는다 (192).

ü         가부장적 촌락의 목가적인 삶에 대한 그 (똘스또이)의 갈망은 문명에 대한 낭만주의적 적대감을 새로이한 것일 뿐이다. 야만인이 하나도 없게 될 때 인류는 끝장날 것이라는 리히텐베르크의 말을 똘스또이가 인용한 것도 공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192).

 

똘스또이의 정치관

ü         그는 현대 문명이 사회를 분화하고 분리시킨다고 죄악시하며 셰익스피어, 베토벤 및 뿌슈낀의 예술 역시 사람들을 한데 묶는 대신 여러 계층으로 갈라놓는다는 이유로 배격했다 (192).

ü         그 자신의 목표는 자기완성과 영혼의 구제이다 (193).

ü         외부 현실에 대한 똘스또이의 수동적 태도는 배부른 지배계급의 평화주의와 일치하며 그들의 수심에 쌓인 자기비난적 자학적 도덕주의와 더불어 평민대중의 생각과 감정에는 전혀 생소한 태도를 표현한 것이었다 (193).

ü         하지만 똘스또이도 도스또예프스끼와 마찬가지로 어떤 좁은 정치적 범주에 집어넣어지지 않는다 (193).

ü         똘스또이는 혁명가가 아닐 뿐 아니라, 모든 혁명적 태도의 명백한 적이기조차 하다. 그러나똘스또이는 혁명가들의 테러리즘도 용인하지 않지만 기존 정부의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더욱 냉담하다는 것이다 (193).

ü         그의 편견과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대한 혁명적인 힘이 된다.그 자신의 삶의 본보기는낡은 사회를 붕괴시키고 러시아 혁명뿐아니라 유럽 전체에서의 반자본주의적 혁명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효소가 되었다 (194).

 

똘스또이의 합리주의:

ü         똘스또이의 예술과 사상을 불모성과 무기력의 운명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은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합리주의 정신이다 (194).

ü         러시아 정교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열성이나 슬라브파 공통의 친교회적 경향 모두 그에게는 낯선 것이다. 그가 신앙에 도달한 것은 합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이며 의식적인 방법을 통해서였다 (194).

ü         그가 <참회록>에서 말했듯이, 그를 기독교인으로 만든 것은 불안과 고독과 고아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194).

ü         그는 스스로 사랑이 없는 것을 의식하여 사랑의 사도가 되고, 인간에 대한 그 자신의 불신과 경멸을 속죄하기 위하여 인간적 유대를 찬양하며, 자기가 죽는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으므로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외친다. 그의 모든 종교적 행위는 하나의 합목적적인 고행이요 동양적 규범에 따른 기독교의 수행이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의 그의 도피는 기독교적 겸허라기보다는 귀족적인 당당함을 보여준다. 그는 세상을 완전히 정복하고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195).

 

똘스또이의 서사시적 양식:

ü         똘스또이에 있어 현대 문명의 인습성과 정신적 공허에의 환멸은 플로베르나 모빠상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것이다 (196).

ü         똘스또이에 있어 이상과 현실, 시와 산문, 젊음과 노년 사이의 엇갈림은 프랑스 작가들의 경우에서처럼 그렇게 비참하지만은 않다. 그의 환멸은 결코 허무주의에 다다르지 않으며 삶 전체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규탄에 이르지 않는다 (196).

ü         실상 자연주의 소설과의 거리는 도스또예프스끼 못지 않게 큰데, 단지 똘스또이는 정반대 방향으로 떨어져 있을 뿐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 연극적 구조를 가졌다고 한다면, 똘스또이의 소설은 서사시적-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의 소설들을 주의깊게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그 호메로스적인 도도한 흐름을 느꼈을 것이고 이들이 펼치는 세계의 파노마라적 모습과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그 생명감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7).

ü         똘스또이의 비낭만적, 비극적, 비강조적인 형식, 모든 극적인 클라이맥스와 흥분의 배제를 독자는 항상 호메로스적이라 느껴왔다 (197).

ü         그는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불가피한 비극으로 보지 않고, 18세기적인 의미에서 통찰과 이해와 도덕적 진지성의 결여로 야기된 불행이라 본다. 그는 아직도 러시아 계몽주의 시대에, 세계와 미래에 대한 신앙의 분위기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197).

ü         그러나 <안나 까레리나>를 집필하는 도중 그는 이러한 낙관주의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예술이 만인의 공유물로 되돌아오지 않는 한 전혀 무용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해롭기까지 하다고 선언한다. 다수 대중으로부터 예술이 소외되고 그 감상자의 범위가 날이 갈수록 좁아지는 현상에서 똘스또이는 커다란 위험을 인식했던 것이다 (197).

ü         똘스또이가 예컨대 셰익스피어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윤택한 감정과 세련된 기교를 혐오하는 청교도가 어떻게 시인의 매너리즘에서- 설사 그가 동서고금을 통해 최대의 시인이라 할지라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인가? (198).

ü         똘스또이와 예술의 관계는 오로지 어떤 역사적 전환점의 징후로서, 19세기의 심미적 문화에 종언을 고하고 예술을 다시 전처럼 사상의 매개자로 평가하는 세대를 대두시키는 역사적 발전의 표지로서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198).

ü         이 새로운 세대가 <전쟁과 평화>의 작가를 숭배한 것은 단순히 위대한 소설가, 세계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의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회개혁가이며 종교의 창시자로서 숭배한 것이었다. 똘스또이는 볼떼르의 명예와 루쏘의 인기와 괴테의 권위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차라리 그 명성이 옛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방불케 하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198).

ü         그의 소박한 루쏘주의와 정적주의로는 결코 유럽의 주인으로 남아 있을 수는- 실제로 그가 한때나마 주인이었다 하더라도- 없었을 것이다. 예술가는 체호프가 생각했듯이 올바른 질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 족할는지 모르지만, 자기 시대의 주인 노릇을 하려면 동시에 올바른 해답까지도 제시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199).

 

<4. 인상주의>

ü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의 경계선은 유동적인 것이어서, 역사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두 경향을 엄밀히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199).

ü         경제 활동은 고도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들어, 이른바 자유로운 실력 경쟁에 따라 철저히 조직화되고 합리화된 체제로 변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

ü         불안의 징후와 해체의 조짐은 부르즈와 사회 전반에 걸쳐 확인될 수 있었다 (200).

ü         이러한 분위기는 이상주의적, 신비주의적 경향들을 부활시키고 압도적인 비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강력한 신앙 운동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발전 과정 속에서 비로소 인상주의는 자연주의와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리고 특히 문학에서 낭만주의의 한 새로운 형태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200).

ü         기술의 빠른 발전은 유행의 교체를 촉진시킬 뿐만 아이라 예술적 취미 기준의 혼란을 야기하며, 오직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쉴새없이 새것을 추구하는 흔히 무의미하고 실속 없는 쇄신 욕구를 초래하는 것이다. 기술의 성과에서 실제로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면 기업가는 새로 고쳐 만든 신식 제품에의 수요를 인위적인 수단으로 높이지 않을 수 없으며, 새것이 언제나 더 나은 것이라는 느낌이 가라앉을 여지가 없도록 해야 한다. … 이리하여 현대의 기술은 유례없이 생활감정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거니와, 인상주의에 표현된 것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새로운 동적인 감정인 것이다 (201).

 

생활감정의 역동화:

ü         기술의 진보와 관련하여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문화의 중심이 현대적 의미의 대도시로 발전해 가는 일로서, 이 대도시는 새로운 예술이 뿌리내리는 토양을 형성하게 된다. 인상주의는 유례없이 도시적인 예술인데 세상을 도시인의 눈으로 보고 현대적 기술인의 극도로 긴장된 신경으로 외부 세계의 인상들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201).

ü         인상주의는 감각적인 지각의 엄청난 팽창, 새롭고도 예민한 감수성, 하나의 새로운 민감성을 뜻하며 고딕 예술 및 낭만주의와 더불어 서양 예술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대변한다 (201).

ü         인상주의를 가장 단순하게 정식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속과 존속에 대한 순간의 우위, 모든 현상은 어쩌다가 일시적으로 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라는 느낌, 두 번 다시 발디딜 수 없는 시간의 강물 위로 사라져가는 하나의 물결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202).

ü         모든 인상주의의 그림은 존재의 영구운동에서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하며 서로 갈등하는 힘들의 유희적 운동에서 위태롭고 불안정한 균형 상태를 묘사한다. 인상주의적 시선은 자연의 모습을 생성과 소멸의 한 과정으로 변모시킨다 (202).

ü         예술적 표현을 이처럼 순간적 분위기에 귀속시키는 데에는 동시에 인생에 대한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태도, 수용적, 관조적 주체로서의 방관자의 역할에 대한 만족, 멀찍이서 바라볼 뿐 뛰어들지는 않겠다는 입장, 요컨대 전적으로 심미주의적 태도가 드러나 있다. 인상주의는 자기중심적인 심미적 문화의 정점으로서 실제적이고 활동적인 삶에 대한 낭만주의적 체념의 극단적 귀결을 의미한다 (203).

 

인상주의의 방법:

ü         스타일 면에서 인상주의는 대단히 복합적인 현상이다 (203).

ü         이전의 모든 예술이 종합의 결과라면 인상주의는 분석의 결과이다 (204).

ü         인상주의는 작품에 묘사된 것이 곧 현실 자체와 같다는 착각을 자연주의보다 덜 불러일으킨다 (204).

ü         인상주의는조소성을 버릴 뿐 아니라 윤곽을 버리며, 대상의 공간성을 포기할 뿐 아니라 대상의 선마저 포기하는 것이다 (205).

ü         명료성과 명징성을 잃어버리는 대신에 움직임과 감각적 매력을 새로 얻는 것은… (206).

ü         물론 인상주의는 여러 세기 동안 진행되어온 불명료화 과정의 마지막 한 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206).

ü         인상주의가 사용한 색체 자체가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 근거한 현실상을 변화시키고 일그러뜨린다 (206).

ü         이제 인상주의는 이론적으로 정립된 색채를 떠나 실제의 감각으로 파고드는데, 그것은 결코 어떤 자연발생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극히 인위적이요 극도로 복잡한 심리학적 과정이라 할 것이다 (206).

 

회화의 우위:

ü         19세기 후반에는 회화가 주도적 예술이 된다. 문학 분야에서는 아직 자연주의를 둘러싼 싸움이 한창인 시기에 회화에서는 인상주의가 하나의 독립된 양식으로 발전한다 (207).

ü         1886이 무렵에 통일된 집단 운동으로서의 인상주의는 해체되고 새로운 후기 인상파 (혹은 인상주의 이후파) 시대가 시작되어 세잔느가 죽은 1906년경까지 계속된다 (207).

ü         17, 8세기의 문학의 우월한 위치,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의 주도적 역할에 뒤이어 19세기 중엽에는 회화에 유리한 하나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207).

 

인상주의와 관객층:

ü         집단적 운동으로서의 인상주의 성립하는 데 기여한 것은 무엇보다도 한편으로 마네와 모네에게서 그 첫 모습이 발견되는 도시 생활의 회화적 파악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관객층의 반발을 계기로 이루어진 젊은 화가들의 세력 규합이다 (209).

ü         잘 알려진 바이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것처럼 인간을 고립시키는 것은 없으며, 낯선 사람들의 떼거리 속에서처럼 외롭고 버림받은 느낌이 강한 경우도 없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생기는 기본적인 두 감정, 즉 한편으로 남이 봐주지 않는데서 혼자 있다는 느낌과 다른 한편으로 번잡한 교류와 끊일 사이 없는 움직임과 쉴새없는 변화의 인상이 가장 섬세한 기분과 가장 신속한 자극의 교체를 결합시키는 인상주의적 생활 감정을 낳게 되는 것이다 (209).

ü         인상파 화가들의 예술적 이념이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도록 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모네, 르느와르, 삐사로같이 정직하고 온화하며 위대한 예술가들이 거의 굶어죽다시피 하도록 내버려둔 관객층의 예술 이해란 대체 얼마나 한심한 것이었는가! (210).

ü         인상주의에는 또한 부르즈와 예술관객들이 좋아하지 않을 서민적 체취란 조금도 없다. 도리어 그것은 하나의 귀족적 양식으로서 우아하고 까다로우며, 신경질적이고, 예민하며, 감각적, 향락적이요, 값진 것과 희한한 것에 애착을 가지며, 엄격하게 개인적인 체험 즉 고독과 고립의 경험 및 극도로 섬세한 감각과 신경의 경험에 몰두한다 (210).

 

자연주의의 위기:

ü         회화에서는 인상주의의 가장 왕성한 시기가 이미 지나간 때에야 비로소 그 양식적 특징이 문학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215).

ü         문학의 이러한 지성화는 아마 이 시대의 가장 현저하고 가장 일반적인 특징일 것인데, 그것은 진보적 작가나 보수적 작가 양쪽에 다 같이 나타난 현상이다 (216).

ü         1870년 프랑스는 가장 심각한 정신적, 도덕적 위기에 봉착하는데그것은 19세기 전체에 스며든 낭만주의적 질병의 일부로서, 1885년의 세대에게 속죄양 취급을 당한 졸라의 자연주의는 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불충분하나마 유일한 진지한 시도를 대변한다. 1880년대 후반기 이래의 문학계는 졸라에 대한 공격과 주도적 운동으로서의 자연주의를 해체하려는 움직임이 휩쓸었다 (216).

ü         인간적 다큐먼트에 관심을 둔 자연주의적 관찰의 결과가 없었다면 부르제와 바레스와 위스망 및 심지어 프루슽의 심리 소설이 어찌 가능했겠는가? 그리고 모든 현대 소설은 결국 구체적인 정신적 현실의 정확하고도 상세한 묘사 이외의 무엇이란 말인가? (217).

ü         자연주의에 대한 반론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이상한 점은 자연주의가 이미 승리를 거둔 듯한 시기에 그것에 대한 맹렬한 반격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217).

ü         사람들이 자연주의에서 용서할 수 없었던 것 혹은 용서할 수 없는 체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 인간을 단지 야수적이고 방자한 짐승으로 그리며 사회를 오직 파괴 과장의 면에서, 인간적 관계의 해체라는 면에서, 가족과 국가와 종교의 붕괴라는 면에서 묘사한다는 것이며, 요컨대 자연주의는 파괴적이요 반자연적이며 인생에 적대적이라는 것이다 (218).

ü         상징주의는 당시 가장 제 철을 만난 문학사조로서 베를렌느와 말라르메는 대중적 관심의 초점이 된다 (218).

ü         가장 깊고 성과있는 영향력은 보들레르에게서 나오는데, 그는 상징주의 문학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요 현대시 일반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218).

 

심미적 쾌락주의:

ü         심미주의는 인상주의 시대에 와서 발전의 절정에 달한다. 그 특징적 성격들, 즉 인생에 대한 수동적이요 순전히 관조적인 태도, 체험의 덧없음과 불확실성 및 쾌락주의적인 감각주의는 이제 예술 일반의 평가 기준이 된다 (219).

ü         심미적 문화란 쓸데없고 남아돌아가는 것으로서의 생활 방식, 낭만주의적 체념과 수동성의 구현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낭만주의보다 한술 더 떠서 예술을 위해 인생을 버릴 뿐 아니라 예술 자체 속에서 인생의 정당화를 찾는다. 그것은 예술의 세계를 인생의 환멸에 대한 단 하나의 진실된 보상으로, 원래 불완전하고 불명료하게 마련인 인간 존재의 참다운 실현이요 완성으로 여기는 것이다 (219).

ü         그러나 이것은최후의 위대한 인상주의자요 심미적 쾌락주의자인 프루스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기억과 환상과 심미적 체험 속에서만 인생이 비로소 뜻깊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19).

ü         인생에 대해 철저히 수동적인 관조적 태도의 세계관으로서 근대 심미주의는 그 이론적 기초에 있어 예술을 의지로부터의 구제로, 욕망과 격정을 가라앉히는 진정제로 정의한 쇼펜하우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심미적 세계관은 이 의지와 격정에서 해방된 예술의 관점에서 전 존재를 판단하고 평가한다 (220).

ü         문명화된 세계는 그들에게 하나의 거대한 아뜰리에요 최선의 예술 감상자는 예술가 자신인 것이다 (220).

 

인공적 생활’:

ü         인상주의적 심미적 세계관은 예술에 있어 완벽한 자가수정 과정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 , 예술 자체가 예술의 참다운 대상이 된다 (220).

ü         문화의 세례를 받지 않고 조형되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자연은 심미적 매력을 잃고 자연성의 이상은 인공서의 이상에 밀려난다 (221).

ü         일체의 단순하고 분명한 것, 모든 세련되지 않고 본능적인 것은 가치를 잃고 문화의 의식성, 주지성, 비자연성이 추구된다 (221).

ü         이러한 생각은 인공적 생활의 철학 전체가 그러하듯이 근본적으로 보들레르에게서 연유하는 것이다 (221).

ü         그러나 문화의 인공성에 대한 열광은 어떤 점에서 낭만주의적 현실도피의 새로운 한 형태일 따름이다. 현실은 결코 환상만큼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현실과의 모든 접촉, 꿈과 소망을 성취하려는 모든 기도는 꿈과 소망의 타락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공적, 허구적 삶이 선택되는 것이다 (221).

ü         근대의 심미주의자에게는생활의 부르즈와적 질서와 안전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224).

 

데까당스:

ü         1880년대에는 사람들이 당대의 심미적 쾌락주의를 데까당스라고 즐겨 불렀다. … 데까당스의 개념은 심미주의의 개념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지는 않은 특징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문화의 몰락과 위기라는 느낌, 즉 흥망성쇠라는 한 생명과정의 종말에 서 있으며 한 문명의 해체에 직면해 있다는 의식을 포함한다 (224).

ü         낭만주의자와 데까당스를 함께 매혹시킨 것은 똑 같은 심연이며, 그들을 도취시킨 것도 똑 같은 파괴와 자기 파괴의 쾌감이다. 그러나 데까당들에게는 모든 것이 심연이요 모든 것이 삶의 불안과 불안전으로, 보들레르가 노래하듯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마연한 전율로가득 차 있다 (225).

ü         창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시킨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해서 도취에 빠질 때에도 그녀는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녀는 예술가의 쌍둥이인 것이다. 창녀에 대하여 보이는 데까당스 예술가들의 이해심은 감정과 운명의 이러한 공통성에서 생겨난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몸을 팔고 어떻게 자기들이 가장 신비한 감정을 희생하며 또 얼마나 값싸게 자기들의 비밀을 팔아넘기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226~7).

 

예술가와 부르즈와 인생관:

ü         창녀와의 이러한 연대감을 선언함에 이르러 부르즈와 사회에서의 예술가의 소외느 ㄴ그 극에 달한다 (227).

ü         인상주의 시대는 사회에서 소외된 현대적 예술가의 극단적인 두 타입, 즉 새로운 보헤미안과 서구 문명으로부터 먼 이국으로 도망하는 예술가를 낳았다 (228).

ü         이제 보를레르는 그러나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만이 참 여행자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진짜 도망이요, 무엇이 끌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 구역질나기 때문에 떠나는 미지에의 여행인 것이다 (228).

ü         랭보는 보들레르의 유일한 참다운 후계자요, 스승인 보들레르의 상상적 여행을 실현시키고 그럼으로써 랭보 이전에는 보헤미안 세계로의 단순한 탈주에 불과했던 것을 하나의 생활 형태로 만든 유일한 인물이다 (229).

 

보헤미안의 변모:

ü         보헤미안이란 원래 단지 부르즈와적 생활 방식에 반대하는 하나의 시위를 뜻했었다 (229).

ü         다음 세대의 보헤미안, … 전투적 자연주의의 보헤미안, 완전히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예술 프롤레타리아트였다 (230).

ü         보헤미안이 낭만주의적이기를 그친 이제, 부르즈와지는 보헤미안을 낭만화하고 이상화하는 것이다 (230).

ü         속물들은 보헤미안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대도시의 암흑가를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 태도를 취한다. , 보헤미안에게 유혹과 반발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보헤미안의 자유와 무책임에 추파를 던지지만, 이 자유의 실현이 뜻하는 무질서와 혼란에 놀라 뒤로 물러선다 (230).

ü         하지만 자연주의의 시대에는이들에 이르러 보헤미안은 사회에서 쫓겨난 방랑자 집단이 되었으며, 비도덕화의 무질서 가운데서 비참하게 생존하는 한 계층으로 부르즈와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서구문명에 결별을 고한 절망자들의 집단이 되었다 (231).

ü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사회에 쓸모가 있을 법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삶에 영속성과 지속성을 부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격분하며, 또한 남들과 공통된 모든 것을 자신의 존재에서 말살시켜버리려는 듯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채찍질한다 (231).

ü         보들레르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이 불행하다는 의식뿐만 아니라 또한 남들의 행복이란 것이 비속하고 천박하다는 감정이다 (232).

ü         우리는 체호프의 단편 소설 <산딸기>에서도 값싼 행복감에 대한 똑 같은 모멸을 보게 된다. 그것은 보헤미안에 대해서 그렇게 몹시 공감을 느낀 체호프 같은 작가의 경우 우연한 일이 아니다 (232).

ü         이제 예술은 더 이상 도취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취시킬 따름인 것이다 (232).

ü         그러나 보들레르도 체호프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랭보 같은 인간에게 삶이 어떠한 지옥으로 전개될지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 랭보, 그는 어떠한 인간이었는가마침내 37세의 나이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 사나이, 17세에 불멸의 시를 쓰고 19세엔 시작을 완전히 걷어치운 다음 죽을 때까지 문학 얘기를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않은 천재, 자기의 가장 귀중한 보물을 팽개치고 일찍이 그 보물을 가졌었다는 것조차 완전히 잊고 완전히 부정했던, 남들과 자신에 대한 범죄자, 현대시의 한 개척자요 흔히들 주장하는 것처럼 현대시의 진정한 건설자, 자기 명성의 소문이 아프리카로 전해져왔을 때 이 명성에 관하여 털끝만큼도 알려고 들지 않고 다만 시에다 똥이나 싸라란 한 마디를 던진 사나이-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을, 시인의 개념과 더 어긋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232~3).

ü         이것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허무주의요, 극단적인 자기 부정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점잖고 예의바르고 까다로운 플로베르와 그의 교양있고 예술을 이해하는 세련된 친구들이 뿌린 씨의 열매인 것이다 (233).

 

상징주의:

ü         1890년 이후 데까당스란 말은 암시적인 느낌을 잃어버리고 상징주의가 주도적 예술 경향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233).

ü         인상주의와 상징주의를 구별하는 것은 때로는 매우 어렵다. 두 개념은 대립적인 면도 있고 동의어적인 면도 있다 (233).

ü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에서, 즉 시의 핵심으로서의 메타포의 발견에서 시작하여 인상주의의 풍성한 형상들로 인도한 발전 과정의 총결산을 대변한다 (234).

ü         말라르메는 시가 이리저리 떠돌며 늘 사라지려는 이미지들의 암시라고 생각하고… (234).

ü         상징은 직접적 명명을 고의적으로 피하는 것일뿐더러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 없는 의미, 정의를 내리거나 정식화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의미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234).

ü         반면에 상징은 관념과 이미지에 불가분의 통일성을 가져오며 따라서 이미지의 변화는 동시에 관념의 변형을 뜻하게 된다 (235).

ü         알레고리가 사고의 정적 과정의 표현이라면 상징은 그 동적 과정의 표현이며, 전자는 연상의 목표와 한계를 설정하지만 후자는 연상 작용을 발동시키고 발동 상태로 지속시킨다 (235).

ü         언어는 사물들 사이에 숨겨져 있는 관계를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에 시인은 말라르메가 강조한 대로 단어들 자체의 움직임에 몸을 맡겨야한다 (236).

ü         시인은 예시자가 되어야 한고 그러기 위해서는 감각들을 정상적 기능의 관습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분리시켜서 비자연화, 비인간화시킬 용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현대 문학 전반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발언을 한 것은 바로 랭보였던 것이다 (236).

ü         말라르메는 일상적 실제 생활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자기의 지성주의라는 진공 상태에 살며, 문학 이외의 세계와는 거의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았다 (236).

ü         세상의 모든 것은 한 권의 책으로 되기 위하여 존재한다”- 플로베르 자신도 말라르메의 이 말보다 더 플로베르적으로 요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37).

ü         세련되고 교양있고 명석한 말라르메의 생애는 랭보의 방랑자적 생존과 똑같이 지독한 실패로 끝났다. 그들은 둘 다 예술과 문화와 인간사회의 의미에 절망했으며, 이 점에서 둘 중의 누가 더 철저하게 일관성이 있었는지는 말하기 힘든 일이다 (237).

 

순수시

ü         순수시의 이념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플로베르에게서 였다 (237).

ü         순수시의 개념은 어쨌든 그의 예술관의 최선의 요약으로, 시인이란 것에 대해 품고 있던 모든 생각의 총괄로 간주될 수 있다 (237).

ü         현실로부터의 시인의 이러한 소외와 고립에 표현된 귀족적 초연성은 표현의 고의적인 불명료성과 시적 사상의 의도적인 난해성에 의해서 더욱 강조된다 (238).

ü         말라르메는 불확실한 것, 수수께끼 같은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추구한다. 표현이 막연할수록 암시성이 더욱 풍부해 보인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시란 그의 의견에 의하면 독자가 그 열쇠를 찾아야 하는 어떤 비밀스러운 것이어야 하기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238).

ü         난해성 그 자체를 추구하는 이러한 야심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려는, 그리고 가능한 한 작은 동호인의 집단에 자기를 제한하려는 시인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239).

 

영국에서의 모더니즘:

ü         왕정복고 (1660) 이후의 영국에서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처럼 프랑스의 영향이 강했던 시기는 없다 (239).

ü         대불황 1870년대 중엽에 시작하여 10년이 채 못되어 끝나지만 이 기간 동안에 영국의 시민 계급은 왕년의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외국, 특히 독일, 미국 등 신흥 국가들의 경제적 경쟁을 의식하고 식민지 확보를 위한 치열한 각축전에 말려들게 된다 (240).

ü         경쟁능력이 있는 외국과 대립하고 있다는 의식이 영국 고립주의에 종언을 가져오며, 외국으로부터의 정신적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지를 마련했다. 이러한 정신적 영향 가운데 제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프랑스 문학이다. 그리고 러시아 소설, 바그너, 입센, 니체 등의 영향이 프랑스로부터의 자극을 보완했다 (240).

ü         젊은 세대는 인생 그 자체를 소유하고 즐기기 위해 낡은 세대와 싸운다. 이제 대문을 두드리며 집안에 들어올 권리를 주장하는 젊은 세대의 미학적, 도덕적 표어로 모더니즘이 등장한다. 입센적인 자기실현,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그 정당성을 쟁취하려는 의지는 인생이 목적이자 내용이 된다. 그리고 비록 이 자기실현이라는 말의 의미는 매우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낡은 부르즈와 세계의 도덕적 안정은 젊은 세대의 공격을 받아 허물어지고 만다 (241).

ü         이제는 사회 생활의 모든 규범이 일거에 그 구속력을 상실한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문젯거리가 되며 논의의 여지를 남기게 된 것이다 (241).

ü         … 1880년대 영국 문학 및 예술에서의 자유주의적 경향은 비정치적 개인주의의 성격을 띠었다. 이들 젊은이들은 철저히 반부르즈와적이지만 결코 민주주의자들은 아니며 사회주의자는 더구나 아니다 (241).

ü         그들의 반속운동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부르즈와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이해 못하는 시민들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속물 혐오는 그것 자체가 다시 하나의 새로운 인습이 되고 마는데, 영국에서 모더니즘을 온통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속물 혐오의 경향이다. 인상주의가 영국에서 겪는 많은 변화는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241).

 

댄디즘:

ü         영국 데까당스의 세계는 메이페어 (런던의 귀족적인 주택지구, 런던의 상류 사교계를 뜻하기도 함)와 보헤미아를 합친 것이라고 누가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영국에서는 프랑스에서처럼 절대적인 보헤미안도, 말라르메의 경우처럼 순수하고 범접 못할 상아탑적 존재도 없다 (242).

ü         프랑스에서는 이에 앞서 이미 댄디가 보헤미안의 대응현상이었듯이, 영국에서는 댄디의 일부가 보헤미안의 지위를 차지한다. 보헤미안이 프롤레타리아로 떨어진 예술가라고 한다면, 댄디는 상층 계급 쪽으로 탈락해나간 부르즈와적 지식인인 셈이다. 댄디의 세심한 멋부림과 사치는 보헤미안의 방탕하고 무질서한 생활과 동일한 기능을 가진다. 둘 다 기계적이고 천박한 부르즈와지의 삶에 대한 항의 표현인데… (243).

ü         이러한 댄디의 존재야말로 퇴폐의 시대에 있어 영웅주의의 마지막 발현이요, 인간적 긍지의 한가닥 남은 밝은 빛이며 낙조와도 같은 것이다 (243).

ü         보들레르는 댄디를 예술가보다도 상위에 두었다. … 이쯤되면예술가는 자기의 작품을 파괴할 뿐 아니라 명성과 명예에 대한 자신의 권리마저 파괴하는 것이다 (243).

ü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명성과 명예를 포기한다는 이들의 태도가 사실은 얼마나 자신감에 차 있고 일종의 교태를 부리는 태도인가 하는 점은 영국 데까당스의 특색인 딜레땅띠슴과 유미주의의 기묘한 결합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244).

ü         체험의 결실이 아니라 체험 그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다. … 이 황홀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의 성공을 의미한다라고 페이터는 그의 저서 <르네쌍ㅅ의 역사 연구> 결론부에서 말한바, 이 몇마디에 모든 유미주의 운동의 강령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244).

 

지성주의:

ü         영국 소설에서 죠지 엘리어트와 헨리 제임스를 연결하는 하나의 전통이 있다면 그 전통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이 지성주의일 것이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볼 때 영국 문학사에서는 죠지 엘리어트와 더불어 하나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됐다. , 좀 더 엄격한 요구를 제기하는 새로운 독자층의 형성이 그것이다 (246).

 

국제적 인상주의:

ü         19세기 말에 이르러 인상주의는 유럽 전역에 걸쳐 주도적인 양식이 된다. 이 무렵부터 기분의 문학, 분위기적 인상의 문학, 흘러간 세월과 흘러가는 나날의 문학이 도처에서 생겨난다 (247).

ü         애매하고 막연한 것, 우리의 감관으로 겨우 잡힐까 말까 하는 것들이 시의 주요 모티브가 된다. 시인들의 관심사는 객관적 현실이 아니고 자신의 민감성이나 체험 능력에 대한 시인의 감정적 반응이다. 이러한 실체 없는 기분과 분위기의 예술이 문학의 모든 형식을 지배한다. 모든 문학 형식이 서정 위주로 변하고, 이미지와 음악, 색조와 뉘앙스로 변한다. 이야기는 단순한 상황으로, 플롯은 서정적인 장면으로, 인물 묘사는 심적 성향 및 심리 상태의 묘사로 환원된다 (247).

ü         프랑스 이외의 문학에서는 묘사의 인상주의적 특징들이 상징주의적 특징보다 더 뚜렷이 부각된다. 프랑스 문학만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인상주의와 상징주의는 동일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수도 있다 (247).

ü         인상주의는 그 모티브들이 아무리 섬세하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적이요 감각주의적인데 반, 상징주의는 비록 그 관념 세계가 하나의 승화된 감각 세계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어디까지나 관념론적인요 정신주의적이다 (247).

ü         일체의 행동성을 외면하고 체험의 흐름에 대한 일체의 저항을 포기하는 인상주의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대표하는 것은 빈의 시인들이다 (248).

ü         이 인생관에는 항상 지배적이고 점점 더 깊어지는 한 가지 불변의 특징이 있다. 소외와 고독의 의식이 그것이다 (249).

 

체호프:

ü         유럽에서 인상주의 역사상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러시아가 인상주의를 받아들여, 인상주의 운동의 가장 순수한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체호프 같은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249).

ü         고르끼는 체호프가 러시아 문학에서 행사하게 될 결정적인 영향을 처음부터 간파했다. 체호프와 더불어 한 시대가 완전히 끝났고, 체호프의 스타일은 새로운 세대라 이제 도저히 단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졌음을 고르끼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250).

ü         체호프의 세계관에 이르러 비로소 인상주의 특유의 체험, 즉 인간 상화간의 근본적 단절의 체험, 인간들을 갈라놓는 최종적 심연을 메울 수 없다는 체험, 또는 어쩌다가 메우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인간과 인간과 인간의 격의 없는 유대를 보존할 수는 없다는 체험이 중심적 문제로 등장하는 것이다 (250).

ü         드가가 중요한 부분을 그림의 가장 자리로 몰아내어 액자에 의해 끊어지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체호프는 그의 소설과 희곡을 발단에서 끝맺음으로써 작품이 끝나지 않고 중단되었다는 인상, 우연히 아무렇게나 끝맺었다는 인상을 주고자 한다 (251).

ü         체호프의 희곡 형식은 아마도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연극적이지 않은, 아마도 극적인 고비라든다 돌발사건이나 긴장이 가장 미미한 역할을 하는 형식일 것이다. 그의 연극처럼 사건이 적고 극적인 갈등이 적은 연극은 없다. 등장인물들은그냥 자기들 스스로 몰락하고 서서히 망해가며 아무 사건도 희망도 없는 삶의 일상성 속에 휩쓸려들고 만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에 인생을 고스란히 내맡기는데, 이 운명은 파국을 통해서가 아니라 환멸을 통해 완성된다 (251).

 

자연주의 연극의 문제:

ü         자연주의가 극예술을 정복하는 것은 1880년대, 그러니까 소설에서는 자연주의가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다음이다 (252).

ü         엄격한 의미에서의 자연주의 연극은 프랑스 바깥에서, 즉 스칸디나비아 제국과 독일 및 러시아에서 형성되었다 (252).

ü         실제로 자연주의 연극에서 달라진 것은인간이란 그때그때의 경우, 즉 유전, 환경, 교육, 천성, 장소, 계절, 우연 등 여러 영향의 소산으로서 인간의 행위는 어느 한가지 동기에서가 아니라 수많은 일련의 동기들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253).

ü         이 시대의 모든 예술에는 심리주의와 서정주의로 기우는 경향이 있으며, ‘이야기를 기피하고 외적 움직임을 내적인 것으로 대체하고 플롯을 세계관, 인생 해석으로 대체하는 경향은 바로 새로운 예술의욕 자체의 기본적 특징으로서 모든 분야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253).

ü         연극 평론가들은 희곡에서 풀롯이 경시되는 것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254).

ü         어떤 상황이 비극적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한 인간의 영혼 속에서 상호 공존이나 화해가 불가능한 도덕적인 원칙들이 얼마나 강렬하고 굽힘 없이 충돌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255).

 

입센:

ü         근대 연극사상 중심 인물은 입센이다 . … 그의 예술가적 발전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이루는 것은 그이 세대의 숙명적인 문제였던 유미주의와의 결산이다 (256).

ü         입센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데에는 키에르케르고의 힘이 컸던 것 같다. … 키에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무엇보다도 입센의 도덕적 엄격주의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를 이룬다. 입센의 윤리적 정열, 선택하고 결단해야만 한다는 의식, 작품을 쓰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일이라는 생각, 이 모든 것이 키에르케르고의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256).

ü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처음으로 종교적, 윤리적 체험이 미나 천재와 전혀 무관하며 신앙상의 영웅이란 예술적인 천재와 전혀 별개의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 키에르케르고였다 (257).

ü         입센이 전 유럽에 걸쳐 명성을 떨친 것은 주로 그의 연극이 지닌 사회적 교훈 때문이었다 (258).

ü         입센은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자로서 개성적 자유를 인생의 최고 가치로 삼았고, 일체의 외부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은 그 자신을 위해 매우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데 반해 사회는 그를 위해 별로 해줄 게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258).

ü         그는 사회에서 단지 어리석음과 편견과 폭력의 지배를 보았을 뿐이다 (259).

ü         똘스또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입센의 명성과 영향력도 그의 작품 활동보다는 오히려 그 선동가적, 교훈자적 역할에 힘입은 바가 더 컸다 (259).

ü         그는 신앙 없는 십자군 전사요, 사회적 이상이 없는 혁명가이며, 종국에 가서는 서글픈 숙명론자로서의 정체가 드러나고 마는 개혁가였다 (259).

ü         결국 입센은 발자끄의 프랭오페나 랭보와 말라르메가 머물렀던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260).

 

버나드 쇼:

ü         버나드 쇼는 입센의 유일한 진짜 제자이자 후계자이다 (260).

ü         자기 기만의 심리학은 쇼 문학의 근원이며, 그는 자기기만자의 가면을 벗기는 데 있어 가장 용감하고 철저할 뿐 아니라, 가장 유쾌하고 재미있기도 한 작가 중의 하나이다 (260).

ü         그의 희곡은 입센의 희곡보다도 더욱 사변적인 연극이다 (261).

 

폭로의 심리학:

ü         폭로적 기술에 의해 무장된 역사적 유물론 자체가 사실은 그 폭로의 대상이 된 부르즈와적, 자본주의적 세계관의 한 소산이었다. 경제가 서구인의 의식에 있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이전에는 그러한 이론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263).

 

프로이트:

ü         프로이트의 이론 즉 인간은 타인과 자기 자신에게 모두 숨겨진 삶을 산다는 이론은 인상주의가 나오기 이전에는 아마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상주의는 이 시대의 예술양식인 동시에 사고방식이며 19세기의 마지막 몇 십년간의 철학은 모두 인상주의의 그늘에 서 있는 것이다 (267).

 

실용주의:

ü         낱말 하나하나는 예나 다름없을지 모르나 문학작품이란 단순히 낱말만이 아니라 낱말의 의미까지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 의미는 세대가 바뀜에 따라 항상 변하게 마련인 것이다 (268).

 

베르그쏭과 프루스트:

ü         인상주의적 사고는 베르그쏭의 철학에서그 가장 순수한 표현을 얻는다 (268).

ü         우리의 시간관의 변화, 아울러 체험적 현실 전체에 대한 평가의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 것으로서, 그것은 제일 먼저 인상파의 그림에서, 다음에는 베르그쏭의 철학에 와서, 끝으로는 (가장 명확하고 가장 의미심장하게)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일어났다 (269).

ü         인간은 과거의 귀결점으로서의 현재의 국면에서 처음으로 실감있는 삶과 약동하는 움직임과 색채, 관념적 투명성과 정신적 내용을 획득한다. 프루스트의 말대로 진정한 낙원이란 잃어버린 낙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낭만주의 이래 거듭 되풀이하여 인생의 상실에 대한 책임을 예술에게 물어왔고 플로베르가 말하는 인생의 소유표현간의 선택을 비극적인 양자택일로 보아왔다. 이에 반해 관조, 회상, 예술의 길이 우리가 인생을 소유하고 체험하는 한가지 가능한 형식일 뿐 아니라 오직 단 하나의 가능한 형식이라고 본 최초의 인물이 프루스트이다 (269~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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