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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5일 11시 01분 등록

 

통섭” –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역/ 사이언스 북스 출판사

 

 

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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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윌슨(Edward Osborne Wilson, 1929~)은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사회생물학의 창시이며 보수적 자연주의자이자 작가이다. 개미에 관한 연구로 앨라바마 대학교에서 생물학 학사 및 석사 학위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개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서 <인간 본성에 대하여> <개미>로 비소설 부문의 퓰리처 상을 2번이나 수상하였으며, 그 밖에도 미국 국가과학메달, 국제 생물학상, 크래포드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하버드대학교 생물학과 석좌교수이다. 저서로는 <사회생물학>, <인간 본성에 대하여>, <개미>, <자연주의자>, <생명의 다양성>, <생명의 미래> 등이 있다.

그는 1929 6 10일 미국 앨라바마주 버밍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는 자연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7살 때 부모님이 이혼했는데, 그해 그는 낚시 도중에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했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계모를 따라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성장했다. 한쪽 실명 때문에 포유동물이나 새들을 관찰하기 힘들어서 그는 곤충의 관찰에 집중했다. 18세에 곤충학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표본들을 모으기 시작했지만 마침 2차대전의 영향으로 곤충핀을 구하기 어려워 관심 분야를 개미로 바꾸었고 알라바마 대학부터 개미연구를 시작해 결국 개미 연구로 박사학위와 퓰리처 상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옮긴이 서문

 

진리의 행보는 우리가 애써 만들어 놓은 학문의 경계를 존중해 주지 않는다. 학문의 구획은 자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때로 학문의 경계를 관통하거나 넘나든다.[7]

 

사실 중세에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학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다운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도 우리는 여러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른다.

 

지식은 대체로 보아 16세기를 기점으로 하여 쪼개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지식 자체가 쪼개진 것이 아니라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과 사람들이 쪼개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며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통합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8]

 

에드워드 윌슨은 이런 학문의 미래를 설명하기 위해 19세기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의 ‘Consilience’ 개념을 부활시킨다. 이는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도출되는 귀납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휴얼은 우리에게 ‘scientist’, 과학자라는 용어를 선사한 사람이기도 하다. 윌슨이 부활시킨 또 하나의 과거는 바로 계몽주의다. [15]

 

 

1장  이오니아의 마법

 

중국 격언에 있듯이 사물에 올바른 이름을 지어 주는 데에서부터 지혜가 싹트는 법이다.[32]

 

나는 이오니아의 마법에 걸린 것이다. 이 표현은 통합 과학에 대하 과학자들의 믿음을 뜻한다. 즉 세계는 질서 정연하며 몇몇 자연 법칙들로 설명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확신의 뿌리는 기원전 6세기의 이오니아에 살았던 밀레투스의 탈레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2세기 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전설적인 철학자를 물리학의 아버지로 추앙했다.[34]

 

이오니아의 마법은 그 후 계속 세련되어지면서 과학 사상을 지배해 왔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자연의 모든 힘을 통합해 보려는 시도로 초점이 모아졌다. 그 마법은 과학의 다른 분야들로도 확장되었다. [34]

 

직접적인 관찰로는 매우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현상들이 실제로는 통합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는 황홀함을 느낀다오.” – 알베트트 아인슈타인[35]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모든 과학자들은 손에 닿을 것처럼 보이나 결국 잡지 못하고 좌절하고 마는 탄탈로스(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로 배가 고파 과일을 따먹으려고 손을 뻗으면 과일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 버리는 징벌을 받았다)의 후예들이다.[35]

 

이오니아의 마법은 인간의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킴으로써 영혼을 구하고자 한다. 그것의 중심 주장은 지식의 통일이다.[38]

 

인본주의의 도덕적 명령은 오직 노력이다. 성공하건 실패하건 간에 그 노력은 존경 받을 만하고 그 실패가 기억할 만한 것이라면 상관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솟구치는 야심을 신화로 표현했다. 다이달로스의 아들 이카로스가 그 신화이다.[38]

 

태양이 우리 날개의 밀랍을 녹이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높이 날 수 있는지 알아 보자.” – 에딩턴 경[38]

 

 

2장  학문의 거대한 가지들

 

나는 17,8세기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거의 옳았다고 믿는다. 법칙을 따르는 물질세계, 지식의 본유적 통일성, 그리고 인간 진보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그들의 전제들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며 지적인 진보를 통해 최대로 보상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39]

 

인간 지성의 가장 위대한 과업은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해 보려는 노력이다. 지식의 계속적인 파편화와 그것으로 인한 철학의 혼란은 실제 세계의 반영이라기 보다는 학자들이 만든 인공물일 뿐이다.[39]

 

통섭은 설명의 공통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40]

 

통섭이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지적인 모험의 전망을 열어 주고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조건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는 데 있다.[41]

 

혼란이란 논증이나 추론이 하나의 경험 세계로부터 다른 경험 세계로 전달될 경우에 일어나는 실수들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41]

 

인간이 물리적 인과 관계에 따른 사건들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라면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왜 자연과학과의 통섭에서 면제되어야 하는가? 인간의 역사 과정을 물리적 역사 과정에서 분리할 만한 근본적인 차이는 인간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43]

 

지금 우리는 통섭을 시험해 보는 일을 가장 위대한 지적인 도전으로 간주하고 있는 시대, 즉 종합의 새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44]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21세기 학문의 거대한 두 가지가 될 것이다. 반면 사회과학은 계속해서 세분화되면서 그 중 어떤 부분은 생물학으로 편입되거나 생물학의 연장성 위에 있게 될 것이며 그 밖의 부분들은 인문학과 융합될 것이다.[45]

 

 

3장  계몽사상

 

지적인 통일이라는 꿈은 계몽 운동이 일어난 17, 18세기에 처음으로 꽃을 활짝 피웠다. 이때는 마음의 이카로스가 하늘로 날아 오른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세속적인 지식이 인류의 권리와 진보에 기여한다는 비전은 서양이 인류 문명에 남긴 가장 위대한 공헌이다.[49]

 

사실 이성이 최고의 권위를 가졌던 적은 없다. … 18세기의 타고난 사상가들이 지녔던 지성, 정직, 명석함, 용기 그리고 진리에 대한 사심 없는 사랑은 오늘날까지도 유례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지나쳤다. 그리고 그들의 비전이 예견했던 만큼 충분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52,53]

 

콩도세의 조용한 확신은 문명이 물리 법칙과 같은 법칙에 지배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콩도르세에 따르면 인류는 과학과 세속 철학이 지배하는 더욱 완벽한 사회 질서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우리는 인류로 하여금 그러한 운명적인 길을 걷도록 하는 법칙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그는 과거 역사 연구를 통해 이 법칙들을 예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콩도르세는 세부적인 사항에서 잘못 판단했으며 인간 본성을 과신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렇지만 역사란 진화하는 물질적 과정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커다란 사상적 공헌을 했다.[58]

 

콩도르세와 진보 사상을 지탱해 준 것은 진보의 필연성이라는 개념이었다. [59]

 

계몽사상은 17세기 초반의 과학 혁명 시기에 등장하여 18세기 유럽의 지식인 세계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과학은 계몽 운동의 엔진이었다. 좀 더 과학적인 계몽사상들은 우주가 정확한 법칙들의 지배를 받는 질서 정연한 물질세계라는 점에 동의했다. 계몽 사상가들은 우주를 신의 기계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을 것이다.[62]

 

귀납은 수 많은 사실을 모으고 그 패턴을 간파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써서 최상의 객관성을 확보하려면 우리는 선입견을 최대한 버려야 한다. [64]

 

베이컨은 이제 서로 평화를 이루고 당신의 눈을 자연으로 돌려 그 자연을 지배하는 통일된 힘을 발견하라. 그리고 자연의 성과 요새에 진격하여 점령하고 인간 제국의 영역을 확장하라.”라고 말하던 새로운 시대의 나팔수였다. [64]

 

베이컨은 학문의 모든 가지들에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귀납적 탐구라는 공통 수단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획득된 지식을 가장 잘 전달하는 방법을 모색했으며 결국에는 과학을 발전시키고 표현하는 최선의 방법으로서 인문학(예술과 문학을 포함하는)을 철저히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과학은 넓은 의미에서 시 혹은 시의 과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질서 정연하게 통합된 학문을 인간 조건 향상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70]

 

데카르트의 가장 소중한 비전은 지식이 궁극적으로 수학으로 추상화될 수 있는 상호 연계된 진리 체계라는 것이다.[72]

 

데카르트는 학문의 제 1 원리로 방법론적 회의를 주장했다. 모든 지식의 그의 앞에 노출되어 강력한 논리적 틀을 갖춘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유일한 전제만을 허락했다. 그것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널리 알려진 경구이다. 그의 회의의 체계는 가능한 모든 가정을 체계적으로 제거하여 이성적 사고의 논리적 바탕이 되고 엄격한 실험을 고안할 수 있는 하나의 공리 집합만을 남기는 것이다.[73]

 

데카르트는 개별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물리적 부분들의 집합으로서의 세계에 관한 연구, 즉 환원주의를 소개했다. 환원주의와 해석적 수학 모형화는 근대 과학의 가장 강력한 지적 도구가 되었다.[73]

 

뉴턴에 따르면 우주는 질서 정연할 뿐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마술과 혼돈이 지배하던 곳에 질서를 확립했다. 알렉산더 포프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로 그를 칭송했다 : “자연과 자연 법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신이 가라사대 뉴턴이 있어라!’ 그러자 모든 것이 밝아졌다.”[74]

 

서양 과학이 앞서 나갔던 이유는 환원주의와 물리 법칙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는 시공간에 대한 이해를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76]

 

이론 물리학과 분자 생물학은 원래 인간에게 잘 맞는 것이 아니었다. 과학적 발전의 대가로 인간은 실재가 인간의 마음으로 쉽게 잡을 수 없는 점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했다. 이것은 과학적 이해의 주요 교의이다. 인간이라는 종과 인간의 사고 방식은 진화의 목적이 아니라 진화의 산물이다.[77]

 

순수 이성은 냉혹하기 때문에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신성한 비밀을 벗어 버린 의례에는 아무런 감성적인 힘이 없다. 특히 위험과 비극의 시기에는 비이성적인 의례가 더욱 강한 힘을 가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과학은 매우 좋아하지만 과학으로 신의 능력을 재려 하지는 않는다.[80]

 

너무 많은 권위가 주어진 과학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불경스러운 힘으로 돌변할 우려가 있다.[81]

 

오래전부터 과학을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 아니라 파우스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워한 사람들은 계몽사상의 프로그램을 정신의 자유와 생명 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보았다. 그러한 위협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경멸하는 것이다! 자연인으로 돌아가서 개인적 상상력의 탁월함과 불멸에 대한 자신감을 다시 주장하는 것이다. 예술을 통하여 더욱 고차원적인 영역으로 탈출하여 낭만주의 혁명을 진행시키는 것이다.[82]

 

계몽사상에 대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은 인간 정신세계에 관한 탐구를 포기했고 철학자와 시인은 한 세기 동안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양보는 뜻하지 않게 과학 전문가들을 이롭게 만들었다. 이로써 연구자들이 형이상학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를 거치면서 물리학과 생물학 지식은 급격히 성장했다. 동시에 사회과학은 기초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서 만들어진 영지를 차지하며 새로 등장한 고위 귀족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지식의 거대한 가지들은 17세기와 18세기에 생성된 통일된 계몽사상의 비전에서부터 나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으로 갈라져 현재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86]

 

계몽사상은 서양 정신에 새로운 자유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모든 형태의 종교적 권력이나 세속 권력을 포함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두려움을 뿌리쳤고 자유로운 연구 윤리를 도입했다. 또한 인간을 우주 속에서 끊임없이 모험하는 존재로 그렸다. 두 세기 동안 신이 인간에게 새로운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것처럼 보였다.[87]

 

우리는 천상의 것도 지상의 것도 아니며, 멸하지도 불멸하지도 않도록 창조되었다. 그리하여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훌륭히, 마치 그대 자신의 창조자가 된 것처럼 그대가 원하는 형태로 그대 자신을 만들 수 있으리라.” – 조반니 피코델라 미란돌라, 1486년의 축도문 중에서

 

건축을 포함한 예술 분야에서 20세기에 등장한 모더니즘도 전문 지식의 파편화를 드러냈다. 모더니스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새롭고 도발적인 것을 성취하려 했다는 것만 빼놓으면 아무런 공통점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전통이 강요하는 굴레를 찾아내어 의식적으로 파괴했다.[90]

 

모든 운동은 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낭만주의에서 모더니즘에 이르는 열광적인 자기 실현은 철학적 포스트모더니즘을 불러왔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계몽주의는 완벽한 상극이다. 왜냐하면 계몽사상가들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믿지만 급진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91]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주류로 스며들었다. 이것은 일종의 메타 이론(이론에 관한 이론)이다. 학자들은 이 기법을 사용해 과학 분야의 주제들을 분석하기 보다는 특정 과학자들이 왜 그런 식으로 사고하게 되었는지를 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분석자는 과학자들이 이론과 실험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지배 이미지, 이른바 근원 은유를 사용하고 있음을 강조한다.[94]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가 점차 소멸하고 사회적으로 의미 없어짐을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두 종류의 독창적 사상가들이 늘 존재했음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들은 무질서를 보고 질서를 창조하려는 부류와 질서에 맞닥뜨려 무질서를 만듦으로서 이에 대항하려 했던 부류이다. 그 둘 사이의 긴장이 지식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 긴장이 지그재그형 진보를 통해 우리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여러 사상들이 다윈주의적으로 서로 경쟁할 때 승자는 늘 질서의 편에 서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제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96]

 

 

4장  자연과학

 

오늘날 인간성을 구분하는 가장 커다란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 간의 차이도 인종 간의 차이도 아니다. 그것은 과학 문화와 과학 이전 문화 사이의 간극이다. 자연과학의 축적된 지식과 도구가 없다면 인간은 인지의 감옥에 갇히고 만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그림자가 드리운 깊은 연못에서 태어난 지적인 물고기와 같다.[99]

 

과학은 철학도 아니고 하나의 신념 체계도 아니다. 과학은 실제 세계를 탐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과학은 우리가 역사적 전환을 통해 우연히 발견한 계몽의 문화이며 교육받은 사람들의 습관이 된 정신 작용의 복합체이다. 실험 과학을 통해 인간은 오감의 제약에서 벗어나 물리적 실재를 탐지하는 능력을 엄청나게 확장시켰다.[100]

 

나는 과학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좁은 영역 내에서만 물리적 실재의 본성을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화, 계시, 예술, 무아지경, 또는 그 밖의 가능한 수단으로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또한 과학 이전 시대에는 신비주의가 미지의 것에 대한 가장 강력한 탐구 방법이었지만 결국 감정적 만족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놓은 게 없다.[101]

 

그렇다면 이것은 과학의 신에 대한 찬가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근대에 와서야 자유로워진 인간의 독창성과 능력에 대한 찬가일 뿐이다. 그리고 운 좋게 인류가 우주를 이해하게 된 것에 대한 찬사이다. 인류의 위대한 업적은 인류가 질서 정연한 것으로 판명된 세계 속에서 자신의 길을 아무런 도움 없이 개척해 왔다는 사실이다.[102]

 

창조의 최고봉이라는 우리 종이 왜 다른 종들보다도 못한가? 왜 우리는 물리적인 장애가 있는 세상에 던져졌는가? 진화생물학은 이에 대한 단순한 대답을 내놓는다. 상이한 유전 형태의 차별적 생존과 번식으로 정의되는 자연 선택은 필요에 따라서만 개체를 만든다. 개체의 능력은 니치(어떤 종이 소비하는 자원들의 집합과 그 종이 점유하고 있는 서식지)에서 자신들의 적응도를 극대화하는 선까지만 진화한다. 그런 세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선택은 과거 역사의 조건들과 그때그때 일어나는 사건들에 의해서만 인도된다. 간단히 말해 자연선택은 미래의 필요를 내다보지 못한다.[104]

 

점점 다 작은 세계로 내려가 전자처럼 극미 존재자를 찾으려는 시도는 서양의 자연과학을 추동해 온 힘이다. 이것은 일종의 본능이다. 인간은 기본 물질들을 찾는 것에 강박 관념을 갖고 있다. 극미소 단위로의 환원은 근대 과학에서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다.[107]

 

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두뇌와 감각체계는 인간의 유전자를 보존하고 배가시키는 생물학적 장치로서 진화했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 세계 중 아주 작은 영역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도록 진화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해 있던 니치는 모든 종류의 감각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10]

 

전제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전제들을 사용하는 것은 헛될 수 밖에 없다.” – 오컴의 윌리엄,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용어의 기원[111]

 

과학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모아서 그 지식을 시험 가능한 법칙과 원리로 응축하는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탐구이다.[112]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은 (1) 반복 가능성, (2) 경제성, (3) 측정 가능성, (4) 발견 기법, (5) 통섭이다.[112]

 

과학의 최전선에는 언제나 자연을 자연적 구성 성분으로 쪼개는 환원주의가 있다. 환원주의는 다른 방도로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복잡한 체계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채용된 탐구 전략이다. 환원주의는 그 복잡성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환원주의 없이 복잡성을 추구하면 예술이 탄생하지만 환원주의로 무장하고 복잡성을 탐구하면 그것은 과학이 된다. [113]

 

더 큰 조직을 작은 부분들로 나누는 작업 뒤에는 환원주의의 개념적 쟁점이 숨어 있다. 각 조직의 수준에서 잘 통하는 법칙과 원리를 더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조직 수준의 법칙과 원리로 환원할 수 있을까? [115]

 

이런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 중 가장 강한 형태는 완전 통섭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자연은 물리학의 단순한 보편 법칙에 따라 조직되어 있고 모든 다른 법칙과 원리가 결국에는 이 법칙으로 환원된다. 이런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길이요 빛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참은 아니다. 이 견해는 지나친 단순화의 산물이다. 예컨대 살아 있는 세포 수준과 그 위 수준들에서는 새로운 법칙과 원리로 설명해야 하는 현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그 그런 법칙과 원리는 더 일반적인 수준의 법칙과 원리로부터는 예측될 수 없는 것들이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가장 복잡한 체계를 예측하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115]

 

과학은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인류가 뽑아든 마지막 검이다.[116]

 

독창적인 발견이 전부다. 과학자들은 알기 위해서 발견하기 보다는 발견하기 위해서 안다고 말한다.[117]

 

만일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당신이 과학 문화에 남길 수 있는 것은 거의 또는 아예 없다. 이것은 당신이 과학을 얼마나 많이 배웠으며 그것에 대해 얼마나 많이 집필했는지와도 상관이 없다. 물론 인문학자들도 발견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독창적이고 가치 있는 작업은 대개 이미 존재하는 지식에 대한 해석과 설명이다. 과학자의 생명은 그 자신만의 과학적 발견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118]

 

과학적 연구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예술이다. 즉 당신이 어떻게 발견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당신의 주장이 참이고 확실히 타당한지만이 문제시된다.[119]

 

과학에서 최종 주장은 거의 없다. 하지만 증거들이 계속 쌓이고 이론들이 더 단단하게 서로 얽히면서 보편적인 인증을 받은 지식들은 있다. 신빙성의 증가는 흥미로운’, ‘그럴듯한’, ‘설득력 있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그리고 명백한이라는 수식어로 변환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승인 등급을 잴 수 있는 외적이고 객관적인이 기준은 없다.[122]

 

외부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내부적 표상의 관계는 인간 진화의 특이성 때문에 왜곡되어 왔다. 즉 자연선택은 생존을 위해 뇌를 만들었기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것보다 더 깊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부차적인 결과일 뿐이다. 과학자들의 주요 작업은 이런 불일치를 진단하고 교정하는 일이다.[125]

 

과학적 이해에 바탕을 둔 객관적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중요하고 야심만만하며 존귀한 지적 비전이다. 이 비전은 처음에는 그리스 철학에서 강조되었다가 근대에 와서는 18세기의 계몽사상, 즉 과학이 모든 물리적 존재를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발전했다. 이 계몽사상의 꿈은 낭만주의의 유혹 앞에서 시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이제까지 과학이 인간 마음의 물리적 기초를 탐구하지 못했다는 점이 오히려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계몽사상의 약속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계몽사상이 낭만주의 앞에서 무플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두 가지 형편없는 이유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낭만주의자라서 신화와 도그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과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를 과학자들이 설명할 수 없다는 점 말이다. 19세기가 마감되는 시점에서 객관적 진리를 향한 꿈은 두 철학 사조 덕분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는 유럽에서 시작된 실증주의이고 또 하나는 미국에 시작된 실용주의였다.  객관적 진리를 향한 꿈은 논리실증주의가 정식화되자 절정에 달했다.[126]

 

 

5장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과학적 방법에 힘입어 우리는 물리 세계에 대해 지난 세대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포괄적인 이론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향한 엄청난 모험이 시작되었다. 학문 분과들이 불확실하게 함께 엮이는 현실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을 기쁘게 만들었을 만한 신화적 요소들, 예컨대 험난한 길, 위험을 무릅쓴 역정 그리고 우리를 무사히 귀환시킬 비밀스러운 가르침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신화들 중 통섭의 은유로 적절할 것 같은 것은 크레타 섬의 미로 이야기와 이를 풀어준 이라아드네의 실타래이다.[133]

 

그렇다면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학문 분과들 간의 통섭적 가로지르기를 상징한다. 그리고 테세우스는 인류이며 미노타우로스는 우리 자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비합리성이다. 경험 지식의 미로 입구에는 물리학이 한 통로를 차지하고 있고 그 다음에는 모든 탐구자들이 따라가야만 하는 몇몇 통로들이 갈라져 있다. 깊은 아녹에는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 그리고 종교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만일 인과적 설명들을 이어 주는 실타래가 잘 풀려져 있다면 어떤 통로에서든 되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로를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만드는 복병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곧 발견하게 된다. 풀린 실을 따라 결과에서 원인으로 되돌아갈 때 우리는 오직 하나의 막다른 골목에서 시작할 수 있다. 따라서 실제 세계의 미로는 거의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보르헤스의 미로이다. 우리가 모든 것들의 지도를 그리고 모든 것들을 발견하고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밝혀진 부분들을 통해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기를 희망하며 그 경로들을 영원히 추적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횃불과 실타래가 있기 때문에 실들을 연결하여 설명의 그물을 더 넓힐 수 있다.[134,135]

 

하나의 현상을 그 요소들로 분해하는 작업은 환원을 통한 통섭으로 간주된다. 반면 그것을 재구성하는 일, 특히 환원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자연이 그것을 처음에 어떻게 조립했는지를 예측하는 일은 종합을 통한 통섭이다. 자연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두 가지 방법을 차례로 동원하여 연구한다.[136]

 

예측적 종합은 결코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 반면 반대 방향으로의 설명, 즉 환원을 통한 설명은 어떤 경우에는 모든 수준의 조직을 가로질러 달성될 수 있다. 즉 지식의 모든 분과들을 가로질러 달성될 수 있다.[141]

 

꿈의 기능은 무엇일까? 생물학자들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꿈이 깨어 있는 동안에 배운 정보를 정돈하고 통합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반복을 통해 인지 기능을 보다 예리하게 다듬는 과정은 REM 수면이 이루어질 때로 제한되어 있다고 밝혀졌다.  즉 그 과정이 꿈을 꾸는 동안에만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꿈을 꿀 때 우리는 감정을 깊게 만들고 생존과 성적 활동에 대한 기본 반응력을 향상시킨다.[152]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복잡한 체계는 생물이며 모든 생물 현상들 중에서 가장 복잡한 체계가 인간의 마음이다. 만일 뇌와 마음이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현상이라는 것이 증명된다면 생물학은 물리학에서 인문학에 이르는 모든 학문 분과들의 정합성을 확보해 주는 본질적으로 중요하고 독특한 학문의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159]

 

흔히 전일론적 접근이라고 하는 종합을 통한 통섭은 조직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면서 복잡성이 엄청난 비율로 증가한다는 복병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주된 이유는 구성 요소들간의 관계를 파악해야 되는데 그 복잡도가 현대 물리과학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162]

 

조직 수준이 한 단계씩 상승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해서는 잘 정의된 수학적 연산들로 구성된 새로운 알고리즘을 고안해 내야 한다. 거의 예술에 가까운 이런 작업이 이뤄진 후에 그들은 좀 더 상위의 조직체 진화하는 가상 세계를 창조해 낸다. 크레타 섬의 미로가 가상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미로를 배회하면서 기본 원소와 기본 과정만으로는 예측이 불가능하며 초기 알고리드므에서 고려되지 않았던 복잡한 현상들, 다시 말해 창발적 현상들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167]

 

복잡성 이론은 조직의 다양한 수준들을 가로지르는 공통적 특성들을 드러내 보이는 자연계 내의 알고리즘을 찾는 작업이다.[168]

 

 

6장  마음

 

지식의 통일성 미로의 실재 에 대한 믿음은 궁극적으로 모든 정신 과정이 물리적 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그 과정이 자연과학에 잘 부합한다는 가설에 근거해 있다. 마음은 우리가 알고 있으며 알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창조된 장소이다. 마음은 통섭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183]

 

진화와 정신에 관한 경험적 연구들을 통해 우리가 배운 분명한 사실은 뇌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도록 조립된 게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조립된 하나의 기계라는 점이다. 자신을 이해하는 일과 생존하는 일이라는 이 두 목표는 기본적으로 같지 않기 때문에 과학으로부터 사실적인 지식을 공급받지 못한 마음은 세계를 부분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수 천 세대 동안 사람들은 뇌라는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 필요가 없는 상태로 살았고 번식했다. 신화와 자기기만, 부족의 정체성과 의식 등은 객관적 진리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적응적 이득을 안겨 주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기 자신의 마음보다도 자동차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184]

 

모든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의식과 합리적 과정들로 구성되어 있는 마음이 바로 뇌의 작용이라는 점에 등의한다. 그들은 <성찰>(1642)에서 신적인 힘에 의해 마음은 신체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며, 신체는 마음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라고 결론내린 르네 데카르트의 마음/뇌 이원론을 배격한다.[187]

 

뇌과학자들은 마음에 대한 진화론적 견해가 옳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열정과 이성이 밀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감정은 이성을 당혹케 만드는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다.[199]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뇌과학자들은 마음에 연관된 요소들 뉴런, 신경 전달 물질, 호르몬 의 근본 속성들은 이미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뉴런 회로의 창발적/전일적 속성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회로가 지각과 지식을 창조하도록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아직도 모르는게 너무 많다.[204]

 

뇌 안에서 누가 혹은 무엇이 이 모든 활동들을 감시하는가? 어떤 이도, 어떤 것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뇌의 어떤 영역도 그 시나리오를 볼 수는 없다. 그것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의식은 이 시나리오들로 구성된 가상세계이다. 다만 전뇌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신경 활동의 얽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나의 집행 자아가 모든 정보를 수집, 통제하는 것 같은 단일한 의식의 흐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적 사고에 순간적으로 기여했다가 사라져 버리는 뇌 활동의 다중 흐름이 존재한다. 의식은 정신 활동에 참여하는 회로가 대량으로 연결되어 있는 집합체이다. 마음은 스스로 조직하는 시나리오들의 공화국이며 이 시나리오들은 개별적으로 생격나고 자라고 진화하며 사라진다.[205]

 

나는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206]

 

의식의 시나리오들이 자극에 의해서 추동되고 이전의 시나리오들에 관한 기억의 도움으로 떠다니는 동안 그것들은 감정에 의해서 강화되고 수정된다. 감정이란 무엇인가? 신경 활동의 수정을 통해 정신 활동을 집중시키고 거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감정이다.[209]

 

우리가 의미라고 부르는 것은 심상을 확장하고 감정을 개입시키며 확산되는 흥분을 통해서 창조된 신경망들 간의 연관이다. 그렇다면 의사 결정은 시나리오들 간의 경쟁적 선택을 지칭할 것이다. 승리한 시나리오는 그에 따른 감정의 ㅈ오류와 강도를 결정한다. 감정의 일정 형태와 강도가 바로 기분이다. 창조성은 새로운 시나리오를 생산하고 그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을 고르는 뇌의 능력이며, 현실성과 생존 가치를 결여한 시나리오들을 계속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망상이다. [213]

 

과학은 느낌을 설명하는 반면 예술은 그것을 전달한다. 예술은 비슷하게 인지한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의존하는 수단이다. 느낌의 전달을 통해서 문화가 공유된다는 사실은 인간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이다.[216]

 

자아는 뇌로부터 독립된 존재자가 아니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기묘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나리오들의 극 중 주인공이다. 자아는 존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중심 무대에서 호라동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감각들은 몸 속에 위치해 있고 그 몸은 모든 의식적 행동들의 통치를 표상하도록 마음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와 몸은 분리될 수 없도록 융합되어 있다. 자아를 시나리오와 독립적으로 창조된 무엇으로 보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220]

 

자아는 자신의 행동들을 완벽하게 조종하지는 못한다. 자아는 의식적인 순수 이성적인 선택만으로 의사 결정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 결정을 위한 많은 계산들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꼭두각시 자아를 춤추게 할 수 있는 끈이 존재한다.[220]

 

따라서 인간 사고에 대한 단순한 결정론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사고 과정은 명확한 인과 관계를 통해 몸과 분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물리 법칙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이렇게 개인의 마음을 완전히 ㄱ파악하고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의 자아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자유 의지를 갖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222]

 

 

7장  유전자에서 문화까지

 

학문의 커다란 가지들을 통합하고 문화 전쟁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과학 문화와 인문학 문화 간의 경계를 국경으로 보지 않고 양쪽의 협동 작업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미개척지로 보는 방법 뿐이다. 오해는 미개척지를 무시할 때 생기는 것이지 정신 구조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남아 있는 문제는 생물학과 문화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가이며 특히 모든 사회에 걸쳐 진행되는 그런 상호 작용이 어떻게 인간 본성의 공통성을 만들어 내는가 하는 점이다.[231]

 

생물학, 심리학, 그리고 인류학의 다양한 관점들로부터 우리는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라고 불리는 하나의 과정을 상정해 왔다. 이 이론은 우리 인류가 유전적 진화에 병행하여 문화적 진화를 덧붙였으며 이 두 진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견해이다.[232]

 

어떤 이들은 주변 문화와 환경에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하도록 해 주는 후성 규칙들을 대물림한다. 그리고 그런 규칙들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이 있어도 약한 규칙을 가진 사람들은 생존과 번식에서 밀려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좀 더 성공적인 후성 규칙들은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그 규칙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과 함께 개체군 내에서 널리 퍼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 두뇌의 해부, 생리적 구조가 진화해 왔듯이 행동도 자연 선택에 의해 유전적으로 진화해 왔다.[233]

 

나는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놓인 다리의 개념적 종석을 유전자에서 문화까지라는 문구로 표현했다.[248]

 

유전자와 문화의 인과 관계는 유전자와 다른 생명 활동들의 인과 관계와 마찬가지로 유전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환경만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그것은 그 둘 간의 상호 작용이다.[248]

 

후천주의자들과 유전주의자들은 문화 사이의 거의 모든 차이들이 대개 역사와 환경의 산물일 개연성이 높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개인들은 특정한 사회 내에서는 매우 다른 행동 유전자들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들 간에는 그런 차이들이 통계적인 수준에서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258]

 

인간 본성의 유전적 기초는 생물 조직의 세 가지 수준들을 함께 열거함으로써 표현될 수 있다. 최상위에는 문화의 보편자가 있고, 그 아래 수준에는 사회적 행동의 후성 규칙들이 있으며, 최하위 수준에는 행동 유전이 자리잡고 있다.[264]

 

유전자-문화 공진화의 단계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l  유전자의 규정을 받는 후성 규칙들은 문화적 습득과 전달을 가능케 하는 감각 지각과 정신 발달의 규칙성이다.

l  문화는 어떤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달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을 돕는다.

l  성공적인 새 유전자는 개체군의 후성 규칙을 변화시킨다.

l  변화된 후성 규칙은 문화적 습득이 이뤄지는 경로의 방향과 효율성을 변화시킨다.[280]

 

 

8장  인간 본성의 적응도

 

인간 본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유전자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라. 그것은 후성 규칙들이다. 즉 문화의 진화를 한쪽으로 편향시켜 유전자와 문화를 연결해 주는 정신 발달의 유전적 규칙성이다.[291]

 

지혜로운 선택을 한 뇌는 더 높은 진화적 적응도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그 뇌가 잘못 선택한 뇌들보다 통계적으로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자손을 남기게 됨을 뜻한다. [293]

 

유전적 적응도 가설 문화에 가장 널리 퍼진 형질들은 그것들을 있게끔 해 준 유전자들에게 진화적 이득을 안겨 준다-은 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합당하게 잘 입증되어 왔다.[303]

 

 

9장  사회과학

 

사람들은 사회과학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그리고 정치학-에서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미래를 통제할 지식을 기대한다. 사회과학은 그 예측 능력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며 대개는 자연과학과 연계 없이 진행되고 있다.[317]

 

의학과 사회 과학은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이 두 분야가 맡고 있는 문제들은 하나같이 복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은 극적으로 진보하고 있다. 물론 사회과학에도 진보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보 공유와 낙관적 전망이 부족한 상태에서 훨씬 더 천천히 진행된다. 두 영역 간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통섭이다. 즉 의학은 통섭을 행하고 있지만 사회과학은 그렇지 않다.[318]

 

사회과학자들은 대체로 자연과학을 통일시키고 이끌어 가는 지식의 위계성 개념을 일축한다. 그들은 부족적 충성심에 쉽게 속박된다. 사회과학 이론의 가르침 중 많은 것들은 아직도 창시자들에 얽매여 있다.[319]

 

만일 사회과학자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연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엄밀한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들이 시공간의 넓은 범위들을 얼마나 자유롭게 왕래하며 조망할 수 있는지에 따라 성공의 질이 결정될 것이다. 바로 자연과학의 설명과 사회과학의 설명을 같은 선상에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331]

 

후성 규칙들은 감각 체계와 뇌의 선천적 작용들의 집합체인데, 이들은 개체가 환경에서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빠른 해결책을 찾도록 만드는 일종의 어림법(rules of thumb)이다. 후성규칙들은 대부분 감정을 통해서 작동되는데 모든 행동 범주에서 개인으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빠르고 정확한 반응을 하도록 하여 결국 생존과 번식에 더 성공적이도록 만든다. [336]

 

심리학과 생물학을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에 도입하는 일은 결국 효용성이라는 복잡 미묘한 개념을 미시적으로 검토하는 일이다.[353]

 

심리학과 생물학에서 수행된 연구들을 모아 보면 효용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일반화가 가능하다 :

l  선택의 범주들에는 우열이 매겨져 있다.

l  몇몇 필요한 기회는 다른 것들에 비해 단지 우위를 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l  합리적 계산은 감정들의 동요에 기반한다. 그리고 감정 간의 상호 작용은 유전과 환경적 요소의 상호 작용으로 해결된다.

l  합리적 계산은 종종 이타적으로 나타난다.

l  선택은 집단 의존적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l  의사 결정은 후성 규칙들에 의해 범주마다 다르게 형성되는데, 이 규칙들은 처음에 특정한 것을 배우게 하여 계속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드는 선천적 성향들이다.[354]

 

 

10장             예술과 그 해석

 

 

11장             윤리와 종교

 

 

12장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통섭 세계관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현상들이 비록 길게 비비 꼬인 연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460]

 

만일 자연과학이 인문/사회과학과 성공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면, 고등 교육에서 교양 과목은 새로운 활력을 얻을 것이다. 전문가가 되려는 학생들은 단지 지식을 가진 것만으로는 21세기를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교육받아야 한다.[463]

 

지식에의 접근은 결국 민주화와 전 지구화의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 대답은 분명하다. 종합이다.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지혜의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따라서 세계는 적절한 정보를 적재적소에서 취합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중요한 선택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돌아갈 것이다.[463]

 

장기적으로는 문명화된 국가들이 인간성이라는 잣대로 다양한 문화들을 재단할 것이다.[463]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자연 환경이 끊임없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에 따른 에너지와 자원의 양도 감소한다. 고등 기술은 궁극적인 인공 보철물이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부족에게 공급되던 전기를 끊어 보라.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캘리포니아 주에서 전기를 차단하면 수백만이 죽을 것이다.[465]

 

최근 인간 진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방향성 변동도 자연선택도 아닌 이주와 이질 교배를 통한 균질화이다. 균질화는 이전의 인종 차이를 점진적으로 없애는 결과만을 낳는다.[468]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계속되는 진보 덕분에 유전적 변화는 이제 곧 자연선택 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선택에 더 의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의지적인 진화의 가망성 때문에 인류는 지금까지 직면해 온 선택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지적/윤리적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470]

 

나는 미래 세대가 유전적으로 보수적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들은 장애를 야기하는 결함을 치료하는 것 외의 유전적 변화를 거부할 것이다.[476]

 

환경 위험은 얼마나 절박한가? 내 생각에는 인류가 자기 보존에 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만큼 충분히 절박하다.[481]

 

자원과 기후의 미래는 인류가 광물 및 에너지 부족이 아니라 식량과 물 부족이라는 장벽으로 치닫고 있는 것으로 요약된다.[490]

 

인구 증가가 지구를 제압할수록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원을 늘리고 생활의 질을 높이는 것이 공동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인공 보철물에 의존하여 이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 본질적으로 그것이 지속 가능한 발전의 윤리이다.[495]

 

최우선 환경 목표는 지구의 허약한 환경이 지속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생태적 발자국을 축소하는 것이다.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의 많은 부분은 두 가지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개념인 탈 탄소는 석탄, 석유, 장작 연소를 연료 전지, 핵융합, 태양력과 풍력처럼 환경적으로 부담이 적은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다. 두 번째 개념인 탈 물질은 대량 하드웨어와 그것이 소모하는 에너지를 줄이는 것이다.[496]

 

통합된 지식 체계는 아직 탐구되지 못한 실재 영역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이것은 이미 알려진 것에 관한 명확한 지도를 제공하며, 미래 연구를 위한 가장 생산적인 질문을 창안한다.[507]

 

나는 창조적 사고의 새로운 길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가 실존적 보수주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다.[508]

 

 

 

 

내가 저자라면

 

책의 주제와 구성

 

이 책은 계몽사상의 퇴조 이후로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회과학으로 각각 나뉘어 발전되어온 학문의 가지들이 주는 문제점(좁은 시야에서의 지식 탐구)을 제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분석과 통합적인 통섭을 통해 지식의 대통합을 이루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통합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통섭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서 이 책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먼저 과거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이 가졌던 자연에 대한 통합적 이해에 대한 추구를 이오니아의 마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 후 중세의 암흑기를 끝내면서 이를 다시 지식 추구의 목표로 삼은 계몽 사상에 대하여 설명한 후 이 시기에 자연과학의 발달 과정을 생물학을 중심으로 제시하면서 다양한 생물학 연구가 인간의 마음과 문화, 인간 본성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사회과학의 연구 동향에 대해서 살펴 보면서 이들이 자연과학 특히 생물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연구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지구상에서의 인간의 삶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에 대해서 고찰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떤 삶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이드하고 있다.

 

내가 받은 긍정적 영향

 

먼저 저자의 광범위하면서 또한 깊이있는 지식과 이해의 수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개미의 연구와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물학자이면서 동시에 계몽사상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회과학의 제분야에 대한 그의 박식함은 정말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또 하나는 의로운 추구의 정신이다. 학문 간의 분파를 이루고 각각의 분파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학계의 현실에서 욕 먹을 것을 무릅쓰고 학계간 통합적 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그의 자세는 깊이 새겨둘 만 하다 생각된다. 그와 같은 대가가 아니면 누가 나서서 이런 횃불을 들 수 있을 것인가 싶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저자는 통섭의 필요성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신화와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그렇다면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학문 분과들 간의 통섭적 가로지르기를 상징한다. 그리고 테세우스는 인류이며 미노타우로스는 우리 자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비합리성이다. 경험 지식의 미로 입구에는 물리학이 한 통로를 차지하고 있고 그 다음에는 모든 탐구자들이 따라가야만 하는 몇몇 통로들이 갈라져 있다. 깊은 안쪽에는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 그리고 종교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만일 인과적 설명들을 이어 주는 실타래가 잘 풀려져 있다면 어떤 통로에서든 되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로를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만드는 복병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곧 발견하게 된다. 풀린 실을 따라 결과에서 원인으로 되돌아갈 때 우리는 오직 하나의 막다른 골목에서 시작할 수 있다. 따라서 실제 세계의 미로는 거의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보르헤스의 미로이다. 우리가 모든 것들의 지도를 그리고 모든 것들을 발견하고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밝혀진 부분들을 통해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기를 희망하며 그 경로들을 영원히 추적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횃불과 실타래가 있기 때문에 실들을 연결하여 설명의 그물을 더 넓힐 수 있다.[134,135]

 

그는 또한 지식 사회 도래 이후의 핵심 경쟁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

 

지식에의 접근은 결국 민주화와 전 지구화의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 대답은 분명하다. 종합이다.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지혜의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따라서 세계는 적절한 정보를 적재적소에서 취합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중요한 선택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돌아갈 것이다.[463]

 

이와 아울러 환경 위험에 대응하는 우리 행동의 기본 원칙도 제시하고 있다 :

 

최우선 환경 목표는 지구의 허약한 환경이 지속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생태적 발자국을 축소하는 것이다.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의 많은 부분은 두 가지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개념인 탈 탄소는 석탄, 석유, 장작 연소를 연료 전지, 핵융합, 태양력과 풍력처럼 환경적으로 부담이 적은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다. 두 번째 개념인 탈 물질은 대량 하드웨어와 그것이 소모하는 에너지를 줄이는 것이다.[496]

 

비판적 시각과 교훈

 

허접한 번역

 

본 책 안의 좋은 내용에 대비하여 단순 의역한 듯한 번역은 책 읽는 재미를 상당히 반감시켰다. 역자들이 교수들임을 감안할 때 통상적으로 대학원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역자들이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대학원생들을 시켜 번역한 것을 한데 묶어 대표로 감수만 한 결과가 아닐까 추측을 해 본다.

 

시각적 보조 도구의 부재

 

그리고 책에 그림이 하나도 없다. 유전자 구조, 뇌의 자세한 기능과 설명 등 아주 과학적인 내용들이 자세히 실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통한 설명만 있을 뿐 보충적인 사진이나 그림이 하나도 없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주 힘들었다.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이 정도니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봤을 때에는 중간에 던져 버리기 딱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본인도 중간에 얼마나 많은 유혹을 느꼈는지 모른다!). 통섭을 강조하면서 통섭에 도움이 되는 주장과 내용은 있지만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통섭으로 유도할 수 있는 친절함은 빠져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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