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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5일 03시 53분 등록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
 
그에게 신화는 ,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이다. 우리는 그 노래와 가락의 후렴을 듣는다. 우리는 은근히 즐기면서 콩고의 주의呪醫가 부르는 '뭄보줌보의 노래를 듣거나, 신명나게 번역한 노자<도덕경>의 난해한 대목 대목을 읽거나, 아퀴나스의 논의라고 하는 단단하기 짝이 없는 호두의 껍질을 더러 깨뜨려보거나, 문득 기괴한 에스키모 민담이 지니는, 귀가 번쩍 뜨이는 의미를 감청하거나 한다.
 
그의 상상력에 따르면 이 엄장하면서도 음산한 화성和聲은 우리 조상들이 끼리끼리 모여앉아 먹거리 삼아 죽인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죽은 동물의 영혼이 가는 곳으로 여겨지는 초자연적인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 태동한다. 우리 존재의 가시적인 지평 너머, '어딘가 멀고 아득한 곳에 동물의 주님이 있는데' , 바로 이 동물의 주님이 인간에게 동물의 삶과 죽음을 다스릴 권능을 넘겨준다. 만일에 이 동물의 주님이 동물을 인간의 손에 붙이지 않으면 사냥꾼의 일족은 굶은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옛 모듬살이는 일찍이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냥이라는 행위는 희생물을 바치는 제사가 되고, 사냥꾼은 그 동물이 희생하여 다시 한번 제물이 되어달라고 비는 마음으로, 죽은 동물의 영혼과 화합을 기도하는 일련의 몸짓을 보인다. 이 경우 공희제에 등장하는 동물은 저승에서 온 사절과 같은 역할을 한다.
 
캠벨이 요약하는 바에 따르면, 이로써 '사냥꾼과 사냥감이 된 동물 사이에는 참으로 불가사의하고도 놀라운 일종의 협약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협약을 통하여 이 양자는 죽음과 매장과 재생의 신비스럽고 영원한 주기 속에서 하나의 동아리가 된다.' 이들의 예술(이들이 그린 암벽화)과 구비문학은 오늘날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충동에 모습을 부여하게 된다. 16.
 
영적인 사람이었던 그는 인간의 믿음에 관련된 문학에서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는 인종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해방되지 못하면 세계의 종교는(오늘날 중동과 북아일랜드에서 그렇듯)타인에 대한 능멸과 공격의 수단밖에는 되지 못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의 이미지는 무수하다. 그는 이것을 '영원의 가면'이라고 이름한다. 이 '영원의 가면'은  그 '영광의 얼굴'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그는 세계의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신들이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까닭을, 이 수많은 문화의 가지에서 서로 비슷한 이야기 - 창세, 처녀 수태, 신자 성육(神子成肉), 죽음과 부활, 재림 그리고 최후의 심판 이야기 - 가 생겨나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 그는 ,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 역시 '신의 가면'이다.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그러나 이 신화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다른 까닭은 각 문화권에 따라 마땅히 자각하여야 할 삶 자체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18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 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는 전문화한 문화보다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38
 
그러다가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버팔로 빌이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해마다 와서 <와일드 웨스트 쇼>로 공연을 벌였는데, 그걸 보고는 그만 인디언을 짝사랑하게 되고 만 겁니다. 인디언을 좀더 알고 싶었지요. 우리 부모님은 너그러운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인디언에 관해 쓰여진 그 시절의 책을 사 볼 수 있었지요. 이렇게 해서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를 읽기 시작했습니다ㅣ. 그런데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수녀 선생님들에게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프가 있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39
 
그러니까 그 이야기들은 시공을 초월한 테마로서 어느 문화에도 있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테마가 시공을 초월해 있습니다. 문화는 이런 이야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요. 
 
그렇다면 이야기의 테마는 보편적이지만, 민족의 기질에 따라 적용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겠군요?
 
그럼요. 테마의 대응 구조라는 것을 모르고 읽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되겠지만, 다른 게 아니에요.
 
선생님께서는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38년간이나 신화를 가르쳐왔습니다. 고마고만한 중류 가정을 배경으로 하여 대학에 온 젊은 처녀들에게 정통 종교와 다른 이 신화를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어떻게 신화에 관심을 갖게 했습니까?
 
젊은 사람들은 덥석 집더군요.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판사가 법정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지요. 사람들은 그 친구를 보고 일어서는 게 아니라, 그 친구가 입고 있는 법복, 그 친구가 맡고 있는 역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판사로 하여금 자신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역할로써 판사가 지니게 되는 완전무결함, 즉 그 역할의 원리로 대표되는 완전무결함이지, 저마다 나름대로 생각과 편견을 지닌 판사들의 무리가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판사 자체가 아니라 신화적인 인격인 것이지요. 42
 
그래요. 엉뚱하게도 기계적인 방법으로 신비 체험에 뛰어들려고 해요. 나는 진짜 신비 체험과 정신 질환의 일종인 심리적 해리解離의 차이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심리학회 같은 데 참석해본 경험이 여러 번 있어요. 심리적 해리를 통하여 신비를 체험하는 것은 진짜 체험이 아니에요. 해리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기계적인 방법을 통하여 신비 체험에 빠져드는 것은 신비가 헤엄치고 있는 물에 빠져죽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신비 체험에는 준비가 필요한 법입니니다.
 
페요테(선인장의 일종. 혹은 그것에서 나오는 환각제 - 옮긴이) 문화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버팔로(들소)와 고유한 모습의 삶을 잃은 인디언들에게 두드러지게 보이는 현상 말씀입니다.
 
그래요. 우리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는 어느 문명 국가의 원주민의 역사 중에서도 최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아메리카 인디언은 사람이 아니에요. 심지어 인디언은 미합중국의 선거권자 통계에도 잡히지 않습니다. 독립 전쟁 직후에는 걸출한 인디언들이 미국 정부와 미국인들의 삶에 실제로 동참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조지 워싱턴은, 인디언은 마땅히 우리 문화권의 일원으로 흡수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지요? 그들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렸어요. 19세기에 동남부 인디언은 깡그리 마차에 실린 채 군대의 경비 아래, 이른바 인디언 거주 지역으로 옮겨졌어요. 이 인디어 거주 지역이라는 것은 미국 정부가 인디언들에게 영구 거주 지역으로 준 땅입니다. 하지만 2년 뒤에는 인디어들에게서 이것마저 빼앗고 말았어요. 45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 숲 속에서 많이 지냈습니다만, 숲 속에서 살다보면 서로 각기 다른 이런 의식이 상호 관계 속에서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숲 속에는 식물의 의식도 있고 동물의 의식도 있는데, 우리의 의식은 이런 의식들과 상호 작용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담즙은 우리가 먹은 음식에, 우리 의식에 도움이 될 만한 게 들어 있는지 없는지를 압니다. 이 모든 작용이 곧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을 단순한 기계적 술어로 번역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까?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명상이라는 게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인 명상이기는 하지만요. 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 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의 문제에만 관심을 둡니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조건과 관계가 있는 관심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자식들과 영적인 의식을 나누고자 하지만 이게 안 됩니다. 영적인 의식이 없는 사람이 자기 자식과 그것을 어떻게 나눕니까? 그러면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나는 뉴욕의 51번가와 5번가를 지나 성 패트릭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말하자면 나는 대단히 번잡한 도시,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경제문제에 대한 관심이 가장 첨예한 도시의 거리를 지나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이때부터 내 주위의 모든 것은 영적인 신비의 차원에서 나에게 말을 겁니다. 십자가의 신비....바로 이겁니다. 채색 유리는 나로 하여금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47 합니다. 내 의식 역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옵니다. 이때부터 나는 조금 전과는 아예 다른 고대高臺에 섭니다. 그러다가 나는 밖으로 나와 거리의 군중과 합류합니다. 자, 이 경우 내가 성당 안에서 가지고 있던 의식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을까요? 안 됩니다.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수준을 오르락내리락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 있다가 거리로 나오면, 문득 내 의식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는데 지금은 아주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구나 하는 인식이 생기겠지요. 의식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이러한 신비는, 가령 돈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합니다. 이른바 돈이라고 하는 것은 에너지를 감추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는 단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48
 
문득 테세우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를 주제로 한 피카소의 작품<미노타우로마키>이미지가 떠오르는군요. 위기감을 조성하면서 접근하는 거대한 괴물 소를 표현한 판화이지요. 이 판화에서, 철학자는 잔뜩 겁에 질린 채 달아나려고 사다리를 오릅니다. 투우장에는 죽음을 당한 말이 한 마리 있습니다. 제물이 된 이 말의 잔등에는 역시 죽음을 당한 여성 투우사가 널브러져 있지요. 이 무시무시한 괴물고 맞서고 있는 것은 꽃을 든 가녀린 소녀 하나뿐입니다. 모이어스 씨가 조금 전에 말한 람보 인형과 양배추 인형이 바로 이 미노타우로스와 소녀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하나는 무시무시한 위협을 상징하고, 또 하나는 단순하고 순진하고 아기 같은 이미지를 풍기니까요. 당신이 이 두 인형을 인상적으로 본 것은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문제를 극명하게 상징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시인 예이츠는 우리가 위대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주기를 산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그는 시 <재림>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빙글빙글 하늘을 돌고 또 돌면서도/ 매는 매잡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중심이 잡아주지 못해서. /세상에 흔한 것은 무질서/ 피거품이 번진다./ 그리고 도처에서/ 순진무구한 의례가 익사한다' 선생님께서는 이 세상으로 나오려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사람들의 구부정한 걸음걸이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모르겠군요. 적어도 예이츠 이상으로 알 도리는 없어요. 하지만 어차피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고통과 혼란의 시기가 있게 마련인걸요. 우리가 느끼는 위기, 모든 사람이 느끼는 위기....성서에 나오는 최후의 전장 아마겟돈이라는 관념이 바로 이것일 테지요. 
 
원자폭탄을 만들었던 오펜하이머는 최초의 원자탄이 폭발하는 것을 보고는, '나는 이 세계의 파괴자인 사신이 되었구나' 고 했다지요. 하지만 선생님 께서는 우리 세계가 이로써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실 텐데요? 51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결국 자기 아버지의 가면을 벗기고야 말지요?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면과 함께 아버지가 맡았던 기계의 역할을 벗겨버립니다. 그의 아버지의 가면은 제복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건 힘입니다. 국가가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지요. 
 
기계는 우리를 도와, 세상을 우리의 이미지에 따라 빚는다는 우리의 오랜 이상을 실현시켜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계에 대하여, 마땅히 기계가 맡아야 할 역할만을 요구합니다. 
 
그렇지요만,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시대가 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나는 얼마전에 놀라운 기계를 한 대 샀어요. 컴퓨터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신들을 섬기듯 심기고 있어요. 신들과 동일시하는 것이지요. 이 기계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금제禁制만 잔뜩 요구할 뿐 자비로운 구석이라고는 도무지 한군데도 없는<구약성서> 의 신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당시 최초로 개발된 컴퓨터 사이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지요. 아마?
 
아이젠하워가 컴퓨터가 가득 차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는 이 기계에다 '신이 있느냐?'는 질문을 입력시켰다지요? 그랬더니 기계들이 일제히 불을 번쩍거리면서 돌아가다가 한참 뒤에 '이제는 있지요' 하더라잖아요?55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손톱만한 판금板金이 온통 천사들의 자리입니다. 가느다란 튜브....그것은 기적이구요. 나는 내 컴퓨터에게서 신화에 대한 하나의 계시를 받은 적이 있어요. 소프트웨어를 하나 사면, 거기에는 우리가 겨냥하는 바에 따라 컴퓨터를 부려먹을 수 있는 명령 신호signals가 있습니다. 다른 소프트웨어 체계의 명령 신호로 어떻게 해보려고 해봐야 컴퓨터는 말을 들어먹지 않지요. 
 
신화학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비의秘儀의 메타포가 아버지를 의미하는 신화가 있고, 이 세계의 지혜와 비의의 메타포가 어머니를 의미하는 신화가 있을 경우, 각각에 맞는 다른 명령 신호를 입력시키지 않으면 접근이 안 됩니다. 양자는 완벽한 메타포일 뿐인데도 말이지요. 이 중 어느 것도 사실은 아닙니다. 메타포이지요. 그것은 우주를 내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주를 내 어머니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는 '누구든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이를 수 없다'고 했어요. 
 
이때 예수가 말한 아버지는 성서에 나오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길을 따르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이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머니의 기을 통해서 아버지에게 이르려 한다고 칩시다. 그러자면 인도의 칼리 여신등을 통해서 여신을 찬송함으로써 이르는 편이 나을 테지요. 이것은 우리 삶의 신비에 이르는 또 하나의 다른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종교에 진정으로 몸을 담고, 진정으로 그 종교를 통하여 삶을 지어나가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거지고 놀기를 좋아하는(그래요, 아주 잘 가지고 놀지요)나 같은 작자는 성인들의 경험에 견줄 수 있을 만한 경험은 평생 해보지 못하고 말 겁니다. 56
 
후자의 경우 한 인간은 한 자연인이 아니고, 특수한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유럽의 신화학 역사를 보면 이 두 신화학 체계의 상호 작용이 눈에 띕니다. 대개의 경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체계입니다. 대신 자연 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것인 경우가 보통이지요. 
 
그런데 성서적 전승은 사회 지향적 신화학입니다. 여기에서 자연은 쫓겨납니다. 19세기 학자들은 신화나 의례를 자연을 통제하려는 기도라고 생각했지요. 그거야 마술이지 어디 신화나 종교이겠어요? 자연 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이 악마로 간주된느 순간부터 사람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대신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긴장과 불안이 조성되면서, 삼림을 베어내고 토인을 몰살시키는 등의 일이 일어납닏. 여기에 이르면 사람은 자연과 헤어집니다. 
 
그래서, 자연을 깔보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것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함부로 자연을 통제하거나 복속시키려고 하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일본에서 겪은 경험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여기에서 일본이라고 말하는 곳은 에덴 동산이 무엇인지도, 인간의 타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런 땅으로서의 일본입니다. 신도神道경전을 보면, 자연의 프로세스는 절대로 사악할리 없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즉 절대무류인 것이지요. 자연의 충동은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고, 복종해야 할 대상, 가꾸어야 할 대상이라고 되어 있어요.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자연과 관련된 환경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정말 놀라워요. 그래서 어떤 정원을 보면, 어디까지가 자연이고 어디까지가 예술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이게 내가 일본에서 했던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지요. 
 
하지만 캠벨 선생님. 오늘날의 도쿄는 그런 이상주의가 언어도단이라면서 반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쿄는, 몇몇 사람이 가꾸는 조그만 정원을 제외하고는 자연이라는 것이 자취를 감춘 도시 아닙니까?
 
일본에는 '파도와 함께 흔들려라'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복싱을 이야기할 때, 상대방의 가격加擊 리듬을 타라고 하는 말과 비슷합니다. 페리 제독이 일본의 문을 두드려 열게 한 지는 125년 밖에 안됩니다. 그 시절 일본인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기계를 모아들이고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일본에서 본 것은 일본인들이 기계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이 기계의 세계를 자기네 세계로 끌어들이는 광경이었어요. 겉을 보면 그렇지 않지만 일단 빌딩의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그러면 일본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겉을 보면 뉴욕과 다름 없는 게 바로 일본이지만요. 
 
'머리를 싸매고'라는 표현이 재미있구요. 온통 도시로 둘러싸여 있다 하더라도 내면적으로는, 즉 영혼이 있고 내적인 자기 자신이 있는 세계에서는, 선생님 말씀대로 여전히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군요. 
 
그러나 성서에서는 영원은 물러나고, 자연은 부패하고 타락해 있어요. 성서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우리는 추방된 채 살고 있지요. 
 
선생님과 여기에 앉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베이루트에서는 자동차를 이용한 폭탄 공격 소식이 연이어 들어옵닏. 기독교도 지역에 대한 회교들의 공격, 회교도 지역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공격, 기독교도들에 대한 기독교들의 공격....마셜 맥루언의 말이 과연 옳다 싶어서 섬뜩합니다. 맥루언은 텔레비전이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을 만들 것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맥루언도 그 지구촌이 이 세상을 베이루트 꼴로 만들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은 몰랐겠지요? 여기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들은 종교의 관념을 저희가 사는 사회에만 적용시킬 줄 알지, 이 시대의 삶,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적용시킬 줄은 모르고 있어요. 이것은 우63 리 현대 세계가 당명하고 있는, 종교의 실패를 증명하는 무서운 본보기입니다. 베이루트에서 치고 받는 세 신화학은 결국 현대 세계를 때려눕히고 있어요. 이들은 저희의 신화학이 미래를 이끌 자격이 없다는 걸 보여주었어요. 64. 
 
그런데 그런 독수리가 내려옵니다. 한 쌍의 대극對極이 병존하는 세상, 즉 행동의 장場으로 내려옵니다. 행동의 유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전쟁이고 또 하나는 평화이지요. 그래서 독수리는 한쪽 발로는 13개의 화살(전쟁의 원리를 상징하는)을 쥐고 있고, 나머지 발로는 열세 개의 잎이 달린 월계수가지(평화 회담을 상징하는)를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월계수 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합중국을 세운 이 이상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외교적인 관계 등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굴어라. 이런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외교가 안 통할 경우에 대비해서, 다행스럽게도 독수리는 다른 발로 화살을 그러쥐고 있네요. 
 
그러면 독수리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독수리는 머리 위에 보이는 빛나는 그림이 지닌 의미를 상징합니다. 언젠가 워싱턴의 외교연구원에서 힌두의 신화학과 사회학, 정치학을 강의한 일이 있습니다. 힌두의 치서를 보면, 군주는 마땅히 한 손에는 전쟁 무기를 상징하는 굵직한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단합을 상징하는 평화의 노래책을 들어야 한다고 되어 있어요. 내가 그 두 개를 들고 있는 시늉을 하느라고 이렇게 팔을 벌리고 서 있었더니, 좌중이 웃음바다가 됩니다. 이 양반들이 왜 이렇게 웃나 싶었을 뿐, 나는 그 이유는 몰랐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손가락질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더군요. 그쪽을 보았더니 바로 이 독수리 문장이 내 뒤에 걸려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나는 이 독수리 문장 앞 독수리의 머리 위에 그려진 그림과 아홉 개로 이루어진 꼬리털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아홉'이라는 숫자는 이 세상에 내린 신의 힘을 상징합니다. 삼종 기도 시간을 알리는 카톨릭 교회의 종은 아홉 번 울립니다. 68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신화의 상징을 오래 연구하셨고, 깊이 관심을 두셨기에 우리 국장을 이런 식으로 읽으실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이었던 당시 사람들이 자기네가 세우는 새 나라에 이러한 신화학적 함의를 투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왜 그런 상징을 이용했을까요?
 
그런 상징의 대부분은 프리메이슨의 상징 아닙니까?
 
상징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즐겨 썼던 암호 같은 것이지요. 피타고라스의 데트라키스는 수세기 전부터 일반에 알려져 있었거요. 아마 이들은 이 정보를 토머스 제퍼슨의 도선관에서 찾아내었을 겁니다. 어쨌든 대단한 박식들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박식한 신사들의 시대였지요. 하지만 우리의 근대 정치사에는 그런 박식한 신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사들의 무리가 권력을 잡고 그 시대의 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국가로 보면 대단한 행운이었지요.
 
이러한 상징과 프리메이슨 암호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초기 국부國父들의 상당수가 프리메이슨 당원들이었을까요? 프리메이슨 암호 역시 신화적인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이니시에이션(입문 의례)의 형식을 재정립시켜 영적인 지혜에 이르고자 하는 학문적인 노력의 소산입니다. 상당수가 프리메이슨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던 국부들은 실제로 이집트의 신화나 전설 같은 것을 공부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는 원초적인 무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연례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의 수위가 줄어들고 나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이 무덤은 재생한 세계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국장이 암시하고 있는 것도 그것입니다. 72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면,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신화의 두 번재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 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하고 반문합니다. 성냥을 켜면 불이 입니다. 불이 무엇이지요?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불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됩니다.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의 신화도 있고, 단혼의 신화도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호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75
 
이제 과학자들은 공공연하게 가이아(대지의 여신) 이론을 입에 올리는데요?
 
유기체로서의 지구 말인가요?
 
모신母神으로서의 지구일 테지요. 이 이미지에서 새로운 신화가 태동할까요?
 
할 테지요. 오늘밤에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알 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도 알 수 없어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도리 것이야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러한 신화는 다른 모든 신화가 다루었던 문제를 고루 다루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유아기에서 성장기를 거쳐 성인기에 이르고, 성인기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기까지의 모든 문제, 심지어는 이 사회와의 관계, 이 사회가 지니는 자연의 세계와 우주와의 관계까지 고루 다루어진 신화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화가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 이야기가 한결같이 반영하는 신화인 것입니다. 77
 
시대를 달리하고 나타날 적에는 옷만 바꾸어 입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요. 흡사 한 연극 대본이 각기 다른 곳에서 상연되고 있는 것과 같지요. 말하자면 지방에 따라 그 지방 연기자가 그 지방 옷을 입고 나와서 똑같은 옛날의 연극을 연기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화의 이미지는 아득한 옛날부터 앞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전수된 것이겠군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이게 왜 놀라운 것이냐 하면, 우리와,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사상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 방면의 학문에서는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 파스키난스(Mysterium tremendum ef fascinans)'라고 합니다.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적인 신비, 내적인 삶, 영원한 삶 같으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경우, 그 생각을 확장시켜줄 이미지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관념 체계에서 제시도니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세상을 보되 사람들에게 메세지를 전하는 것으로서 세상을 보는 견해가 중세에 있었지요?
 
그랬지요. 신화가 바로 이 메세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줄 겁니다. 신화는 우리 인류에게 전형적인 어떤 것을 일러주니까요.
 
예를 들면요?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어둠의 순간에 눈이 보기 시작한다'는 레트커의 시구처럼 말씀이지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신화가 바로 이 같은 의식을 선생님께 준해준 것 같은데요?
 
나는 신화와 같이 삽니다. 신화는 나에게 늘 그런 소식을 전해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게 되는 것 같은 순간에 은유적으로 이해가 되는 그런 문제이기도 하지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지 않아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음과 재생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시바Shiva 신과 동일시해도 좋겠지요. 나는 시바신이다. ....이것은 하말라야 요가 행자들이 수행하는 명상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기도 합니다.86
 
꿈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 꿈에 좀더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꿈의 기억을 떠올려 메모하는 겁니다. 다음에는 꿈의 작은 단편 중에서 하나, 두어 개의 이미지나 관념을 선택하고 이를 연관시켜보면서, 이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기록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체험(우리 삶에서 의미심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다가 다른 꿈을 꾸면 우리의 해석은 걸음마를 시작하게 되지요.
 
어떤 분의 말을 들어보니까, 은퇴하기 전까지는 꿈을 꾼 기억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에너지를 집중시킬 곳이 없어지니까 매일 꿈을 꾸게 된다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우리 현대 사회를 사는 현대인에게는 꿈의 의미를 되씹어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까?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출판된 이래로 많은 사람이 꿈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그전에도 해몽解夢이라는 것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꿈에 대해 약간 미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가령, 내 꿈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실제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신화는 왜 꿈과 다릅니까?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89
 
역시<창세기>1장입니다. '하느님이 자기 형상,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중략)....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리....'
 
서아프리카 바사리족의 전설을 읽어보지요. '우눔보테가 인류를 창조하였다. 인류의 이름은 사람이다. 우눔보테는 그 다음으로 영양을 만들고는 영양이라고 이름하였다. 우눔보테는 뱀을 만들고는 뱀이라고 이름하였다. ...(중략)....우눔보테는 그들에게 이르되, '이 땅은 아직 다져지지 못했구나. 그러니 가서 앉아 땅을 부드럽게 다지거라.'우눔보테는 그들에게 온갖 종자를 주면서 이르되, '가서 이것을 심어라....'
 
<창세기>2장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느님 지으신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 끝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다시 피마 인디언 이야기를 읽지요. '내가 세상을 만들었으니 보라. 세상 짓기가 끝났구나. 이렇게 내가 세상을 지었으니 보라! 세상 짓기가 끝났구나!'
 
이번에는 <창세기>1장입니다. '하느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우파니샤드>에서 읽지요.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내가 지었구나, 무슩 까닭이나 내가 낳았음이라' 이로써 그는 그 지은신 이가 되었더라. 진실로 이 짓는 일에서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창조주이니라'
 
이 책에서 이 표현은 상투어구가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것을 알면 이 세상에 와 있는 하느님의 힘인 창조의 원리를 아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다. ....이런 뜻입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94
 
섹스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여자는 더욱 썩은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아담과 이브에게 왜 금지되어야 했던가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인류는 삶의 조건에 동참하지 못한 채 아직도 에덴 동산에서 멍청한 아이처럼 살고 있을 테지요.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꿈 같은 낙원은 신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世界樹입니다. 결국 뱀은 에덴 동산의 실질적인 신이었던 겁니다. 시원한 석양의 바람을 쏘이다가 그곳에 들른 야훼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아요. 동산은 뱀의 본거지였으니까요. 물론 옛날 옛날 한 옛날의 이야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원전 3천 5백년 경에 만들어진 수메르의 봉인이 있어요. 이 봉인에는 뱀과 나무와 여시놔 남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신은 외부에서 들어온 나그네인 남자에게 생명의 과실을 주고 있지요. 태곳적의 여신 신화가 여기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래전에 한 영화에서 아주 굉장한 장면을 보았어요. 산길을 오르면서 비내리기를 빌던 미얀마 뱀 사당의 여사제가 동굴에 있던 킹코브라를 불러내어 코에다 진짜로 세 번이나 입을 맞추는 겁니다. 이때의 코브라는 생명을 베푸는 존재, 비를 내리는 존재입닏. 그것은 긍정적인 신성을 상징하지 결코 부정적인 이미지는 아닙니다. 98
 
그러니까 '나'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공포인 셈입닏. 이어서 태어나기 위한 무시무시한 단계, 산도産道라는 아주 험한 길을 지나면, 드디어 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지요. 상상할 수 있겠어요?
 
'자기'가, '내가 있다'고 진술한 직후에 공포를 느낀다는 신화가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으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일단 '나'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 '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잇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 '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지요. 한 쌍의 대극이 비롯됨입니다.
 
인류가 놀랍게도 공통의 신화를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다는 점, 다시 말해서 모든 이야기에 여자라는 이름의 금단의 사실 모티프가 등장한다는 점을 신화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가령 어떤 신화, 어떤 창세 신화에도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금제가 등장합니다. 이러한 금제가 있기는 하지만, 남성과 여성은 필경 금제를 어기고, 그러고는 쫓겨나옵니다. 몇 년 동안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권의 이야기에도 이러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의 금제'라고 하는 민담의 표준 모티프랍니다. <푸른 수염>이야기를 생각해보세요. 푸른 수염은 아내에게 '저 벽장문은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디 이게 지켜집니까? 아내는 그 금제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를 보아도 하느님은 하나의 금제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된는 것이지요.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유사성의 문제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한 가지 설명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과, 같은 본능,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 박사의 이른바 원형原型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원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바탕이 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 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원형'이라는 술어가 '근본적인 관념'이라는 술어보다 아는 것 같군요. 후자는 어쩐지 머리를 굴려서 만들어낸 관념 같아서 말이지요.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한 까닭은 이 원형이라는 것이 하의식下意識에서 위로 솟아오르기 때문일 겁니다.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과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정신적 상흔)경험의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으로서 생리적인 것입니다만,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입니다. 생리적 원리는 생물학적 원리에 견주면 2차적인 것입니다.
 
세계 전역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를 ㅌ홍하여 이 원형, 혹은 근본적인 관념은 각기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옷이 이렇게 다른 것은 환경적,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동일시하거나 비교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차이점이지요. 107
 
하느님이 곧 창조 그 자체이고, 개인이 그 피조물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느님이 남자든 여자든 바로 그 개인 안에 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한 신에게는 두 측면이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태초에는 하나였는데, 이 하나가 분리되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생기고, 여자와 남자가 생겼다는 아주 기본적인 신화 모티프는 도처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하나였던 시대로부터 이렇게 쫓겨나오게 되었던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렇게 쫓겨나온 것은 누군가의 잘못 때문이다. 먹지 말라고 하는 실과를 먹었거나 하느님에게 망령된 말을 했거나 해서 하느님이 노하시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이런 것이겠지요. 어쨌든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는 어떻게든 그 영원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
 
그런데 이와는 다른 테마도 있어요. 즉 인간은 천신天神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고 '어머니 대지'의 자궁에서 나왔다는 주제이지요. 이런 이야기에는 종종, 사람들이 기어오르는 거대한 사다리 혹은 밧줄 같은 것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대지의 자궁에서 마지막으로 기어오르려는 사람들은 몸집이 대단히 크고 무거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밧줄을 당기면, 투욱, 밧줄이 끊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근원에서 멀어졌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렇게 근원에서 멀어진 것은 우리 마음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그 끊어진 밧줄을 다시 잇는 것이 되지요. 110
 
모든 종교에는 일장일단이 있지요. 즉 이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일 수도 있고 저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은유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은유라는 것을 오해하여 사실로 해석하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됩니다.
 
은유가 무엇입니까?
 
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뜻은 다른 데 있는 표현법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너는 도토리이다'라고 할 경우,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 정말 글자 그대로 도토리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도토리'는 '얼간이'의 은유인 것이지요. 종교 전통에 등장하는 은유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문자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거지요. 만일에 은유를 은유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를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달라고 한 뒤, 그 메뉴에 비프스테이크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페이지를 씹어먹는 것이나 같지요.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죠. 예수는 승천했습니다. 이 말은 명시적으로는, 예수라는 분이 정말 하늘로 올라갔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의 진의를 좇으려고 할 경우에는 언어라는 껍질을 버려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의 머리 위에는 예수가 갈 만한 데가 없지 않아요? 우리는 예수가 정말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에 물리적인 존재를 수용할 만한 물리적인 하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광속光速으로 승천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은하계 안을 맴돌겠지요. 천문학과 물리학은 하늘을 문자상의, 단순한 물리적 가능성의 세계 수준으로 떨어뜨렸습니다. 116.
 
그러니까 우리가 민담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화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서로 주고 받으면서 즐기기 위해, 혹은 위대한 영적 순례의 차원에 조금 못 미치는 존재의 어떤 측면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이야기이겠군요?
 
그렇습니다. 민담은 그저 듣고 즐기는 겁니다. 그러나 신화는 영적인 교시를 위한 것이지요. 인도에는 두 종류의 신화, 즉 민간의 관념과 근본적인 관념을 다타내는 아주 멋진 말이 있어요. 민간의 관념이 지니는 측면은 '데시desi'라고 하는데, 이 말은 '지방'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회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젊은이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젊은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사회 생활로 나서고, 들판으로 나가 사냥하는 법을 배웁니다. '응, 군인이 되어야 하는구나, 그러면 사회를 위해서 군인이 되어 싸워야지', 젊은이를 이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근본적인 관념을 나타내는 신화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르가marga'라고 하는데, 이것은 '길path'이라는 뜻입니다. 이 '길'은 곧,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데, 이 길은 신화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되돌립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신화가 무엇인지 가르치는데, 이 '마르가'는 개인을 신화에서 떼어내고, 명상을 통해서 곧바로 '길'을 좇게 합니다. 
 
문명은 신화를 그 바탕으로 합닏. 중세의 문명은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 십자가 위에서의 구속救贖, 구속의 영광을 통하여 사람을 성사에 이르게 하는 신화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성당은 성사의 중심이고, 성城은 성당을 보호하는 세력의 중심입니다. 이 양자에서 두 지배권이 형성되는데, 하나는 정신에 대한 지배권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인 삶에 대한 지배권입니다. 이 양자는 하나의 바탕, 즉 십자가의 영광이라는 바탕과 조화를 이룹니다. 122
 
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행위에 무리를 지어 참가하지요. 은밀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해위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영웅의 행동 반경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선악이 있는 시간의 장, 대극이 있는 곳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초월의 장을 나서면 대극의 장으로 들게 마련입니다. 인류는 선악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 정당함과 부당함, 이것과 저것, 빛과 어둠까지 알게 하는 지혜의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이 시간의 장에 있는 모든 것은 이원적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그러하고,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상상력 속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한 쌍의 대극은 남성과 여성입니다. 이 경우 남성은 공격적이고, 여성은 수용적이며, 남성은 전사戰士이고 여성은 몽상가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영역과 전쟁의 영역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에로스(사랑)와 타나토스(죽음)라고 하지요.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고 옳고 의로우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은 옳아 보이고 어떤 것은 옳아 보이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의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의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135
 
사방으로 뻗어 있는 머리카락은 흡사 사자의 털 같습니다. 첫번째 괴물은, 두 번째 괴물이 자기를 먹으려 하는 것을 알고는 기겁을 합니다. 자, 이런 상황에 처하며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인도의 전승은, 이 경우 신의 자비를 구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래서 괴물은 시바 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시바 신이시여, 이 몸을 신의 자비 앞에 던지나이다'
 
그런데 이 시바 신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누가 자신의 자비 앞으로 몸을 던지면 자비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바 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냐, 내가 너에게 자비를 내린다. 그러니 깡마른 괴물餓鬼이여, 그 괴물을 먹지 말아라.'
 
그러자 아귀가 항변합니다.
 
'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나는 배고파 죽겠어요. 신이 나를 이렇게 허기지게 했으니 이 괴물을 먹겠소'
 
이 말에 시바 신은 이렇게 명합니다.
 
'그렇게 배가 고프거든 너 자신을 먹어라'
 
그래서 이 아귀는 발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차례로 먹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남의 생명을 먹고 사는 생명의 이미지입니다. 결국 아귀가 있던 자리에는 얼굴 하나만 덩그렇게 남게 되지요. 시바 신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지요.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을 터이다. 내 너를 '키르티무카'라고 이름하리라'
 
'키르티무카'는 '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시바 신전이나 불교 사원에 가보면 시바나 부처의 대좌臺座에서 이 가면 같은 것, 즉 영광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시바 신은 이 영광의 얼굴을 향하여, '누구든 너를 예배하지 않는 자는 나에게 올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정한 원칙에 어긋난다137고 해서 '아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삶의 기적 앞에서 고개를 끄덕거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138
 
인간의 발달 단계는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그러다가 결국 죽는 거지요?
 
그러다가 결국 죽는 거지요. 죽음은 최종적인 해방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두 가지를 두루 섬깁니다. 즉 젊은이를 이 세상의 삶과 만나게 할 때도 신화가 끼여들고(여기에서 바로 종족 특유의 곤념이 기능합니다), 이 삶에서 해방될 때도 신화가 개입합니다. 말하자면, 종족적 관념은 인류의 근본적인 관념의 껍질을 벗기는데, 이 근본적인 관념이 바로 우리를 내적인 삶으로 안내해준답니다.
 
이 신호는, 다른 사람들은 그 내적인 삶의 길을 어떻게 갔고, 나는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길에서 어떤 것이 선한지도 가르쳐줍니다. 마지막 순간을 향해 가고 있는 나에게도 그게 느껴집니다. 신화는 나에게도 어느 길로, 어떻게 가야할지 일러줍니다.
 
어떤 종류의 신화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실제로 선생님께 도움을 주는 그 신화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시지요.
 
가령 인도의 신화에 따르면 말이지요. 우리가 삶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들어갈 때는 입는 것도 달라지고 이름도 달라집니다.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나서 나는 내가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삶에 관한 나의 사고방식도 바꿨습니다. 말하자면 삶에 관한 관념 자체를 바꾼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하고 활동하는 삶을, 이 신비를 즐기고 감사하고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꾼 것이지요. 143
 
부시맨의 삶 침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과 들소의 관계로 보아 이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는 서로 숭배하는 관계,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부시맨은 아프리카의 사막에 사는 종족입니다. 이들의 삶은 대단히 고단합니다. 특히 사막의 환경 속에서 사냥은 대단히 힘에 겨운 일입니다. 사막에는 나무가 별로 없기 때문에 크고 강력한 활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시맨의 활과 화살은 아주 작습니다. 활을 쏘아봐야 채 30야드를 나갈까 말까 합니다. 이런 화살의 관통력이라고 해봐야 보잘것없는 것이 당연하지요. 짐승의 가죽도 겨우 뚫습니ㅏ다. 그러나 부시맨은 이 화살 끝에다 강력한 독약을 바르기 때문에, 일란드 영양같이 큰 짐승도, 맞으면 하루나 한나절 정도 괴로워하다가 죽어버립니다.
 
짐승이 화살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면, 사냥꾼은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않는다는 식의 자기 희생적인 금제禁制를 지킵니다. 그 동물의 죽음에 대해 일종의 '신비에의 참여'를 하는 거지요.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 짐승의 죽음은 자기네들로 인한 것이고, 또 그 짐승의 고기가 자기네들의 음식이 될 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동일시, 신화적인 동일시가 개입합니다. 따라서 죽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 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147
 
그런데 처녀를 데려온 들소가 바로 뒤에 있습니다. 마악 잠을 깬 그 들소는 처녀에게 뿔을 뽑아주면서, '들소 여울로 가서 먹을 물을 좀 길어와 주렴'하고 말합니다.
 
처녀가 뿔을 받아들고 들소 여울로 가니 아버지가 거기 있습니다. 아버지는 처녀의 팔을 거머쥐면서, '어서 가자'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처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대답합니다.
 
'안돼요. 안됩니다! 이러면 위험해지요. 들소 떼가 우리 모두 우리를 쫓아올 거예요. 제가 이 일을 수습해볼 테니까, 돌아가게 해주세요'
 
처녀는 이렇게 해서 들소 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요. 그런데 샤먼 들소가 냄새를 맡으면서 '킁킁킁, 인디언의 피 냄새가 나는걸' 합니다. 처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잡아떼지만, 들소는 '아니야, 정말 나는걸', 이러고는 외마디 소리를 질러 들소를 모조리 깨웁니다. 잠에서 깨어난 들소들은 꼬리를 세우고 춤을 춥닏. 이윽고 춤이 끝나자 들소들은 질풍처럼 내달아 불쌍한 인디언을 밟아버립니다. 인디언 아버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다 뭉개진 것이지요. 처녀가 울자 들소가 묻습니다.
 
'울기는 왜 우는가?'
 
처녀는 '우리 아버지니까 울지'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들소가 응수합니다. '우리는 어쩌고? 절벽에 떨어져 죽은 들소들은 우리 자식들이자, 아내들이자 부모들이다. 그런데 그대는 아버지의 죽음을 우는구나.....'
 
들소는 처녀가 너무 애처로워 보였던지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좋다. 그대가 어디 아버지를 살려내어 보아라. 그러면 내가 그대를 보내주리라' 154
 
학자들은, 소년을 사냥꾼으로 입문시키는 의례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합닏. 소년은 사냥하는 법도 배워야겠지만, 짐승을 두렵게 여겨 존중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례도 배워야 하고, 이제 자신이 더 이상은 소년이 아니라 어엿한 남자가 되었다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냥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 동굴은, 의례를 통해 소년ㄴ에게 더 이상은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라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음을 깨우쳤던 그 시대 사람들의 성소였던 것입니다.
 
소년이 이런 의례를 거치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동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하게는 모르지요. 그러나 우리는 오스트레일리라 원주민들이 베푸는 의례를 알고 있습니다. 아이의 머리가 굵어져 마음대로 다룰 수 없을 즈음에 이르면 , 날씨 좋은 어느 날 건장한 남자들이 이 아이에게 쳐들어옵닏. 이들의 몸은 옷 대신 깃털로 가려져 있습니다. 몸에다 피를 칠하고 거기에 깃털을 붙인 것이지요. 이들은 황소 울음소리를 내는데, 이 소리가 바로 영신靈神들의 소립니다. 그러니까 이 남자들은 영신의 자격으로 아이에게 쳐들어온 것이지요.
 
아이는 어머니를 피난처로 삼으려고 합니다. 실제로 어머니는 이 아이를 보호해주려는 척합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막무가내로 아이를 데리고 가버립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더 이상 아이의 보호자가 되지 못합니다. 아이는 이제 더 이상은 어머니에게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전혀 다른 삶의 마당에 이르렀으니까요. 160
 
성인식이 바로 이런 의례의 현대판입니다. 카톨릭 교회에 나가는 아이들에게는 견진성사堅振聖事를 통해서 받은 이름이 있는데, 아이들은 바로 이 이름으로 나중에 성인식을 치러 받습니다. 원시인들의 성인식에는 사제자가 입문자의 몸에 상처를 내거나 이를 쪼아내거나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성인식에서는 사제가 웃으면서 뺨을 한 대 살짝 쳐주는 것으로 끝납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약화略化한 거지요. 이런 성인식은 치러봐야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유태의 관습중 성이닉에 해당하는 게 '바르 미쯔바'라고 하는 의례입니다. 성인식이 입문자를 정신적으로 변모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입문자 개인에게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인식을 거치면, 소년은 전혀 다른, 씩씩한 성인이 되어 제 몫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163
 
선생님께서는 저서 <신화 이미지>에서 변모의 중심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지요. 변모의 중심은 현세의 벽이 무너지면서 우주의 경이가 드러나는 관념적인 성소라고 하셨습니다만, 성소라는 말은 어떤 뜻으로 쓰셨습니까?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걸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 성소가 우리에게, 초원이 사냥꾼에게 했던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초원의 사냥꾼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성소였어요. 그러나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닏.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天福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는냐....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안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180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신母神을 섬기는 종교는 적어도 이것을 바로 보고 있어요. 모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는 세상이 곧 여신의 몸이자 여신 자체이지요. 이 여신의 신성이라는 것은 타락한 자연 위에 군림하는 그런 신성이 아니었다고요. 중세의 성모 숭배 신앙 체계에도 이 정신이 있었어요. 바로 이 정신에서 13세기 프랑스의 성당 문화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에덴 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다룬 우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신화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부패시키고 있는 겁니다. 자연 자체를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죄악이고, 따라서 타기되어 마땅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시노하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신성은 누가 해석합니까? 누가 우리의 샤먼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닏.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단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오늘날 예술가들이 맡는 일을 고대 사회에서는 샤먼이 맡았던 것이군요.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건성으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 같던데요?190
 
북 아메리카 문화는 수렵 문화와 농경 문화가 상호 작용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이지요. 인디언의 대부분은 수렵민이기는 합니다면, 이들은 동시에 옥수수를 재배하기도 하지요. 옥수수의 기원에 관한 알곤퀸 인디언의 민화는 한 소년이 환상을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환상에서 소년은 머리에 초록색 깃털을 꽂은 한 젊은이를 만나는데, 젊은이는 소년에게 씨름을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소년은 이 씨름에서 이깁니다.
 
젊은이는 다시 하자고 합니다면, 이번에도 소년이 이깁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다음 판에 또 지면 자기를 죽여 땅에 묻고, 그 무덤을 잘 보살펴달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이 젊은이가 시킨 대로, 다음 판에 또 자기가 이기자 이 잘생긴 젊은이를 죽여 땅에 묻습닏. 그런데 어느 날 손년은, 머리에 깃털을 꽂고 다니던 그 젊은이가 묻힌 곳에서 옥수수가 올라와 자라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건 소년이 환상 속에서 본 광경입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늙은 사냥꾼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사냥을 하지 않고도 먹거리를 장만할 방법이 있으면 그토록 어렵게 사냥하러다닐 필요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그의 뇌리에 문득 얼마전에 보았던 환상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소년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사냥하러 나가시지 않아도 됩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 부족에게는 바로 이 순간이 엄청난 깨달음의 순간이었을 테지요.
 
그러니까 소년의 환상 속에서는 옥수수가 자라려면 먼저 그 젊은이가 땅에 묻혀야 했던 것이군요? 그래야 몸이 썩으면서 거기에서 옥수수가 자라 나올테니까요. 농경 문화권에 이와 비슷한 신화가 또 있습니까? 197
 
어떤 이야기는 아주 공격적이고 오만한 샤먼들이 등장합니다. 이 샤먼들이 어느 날 해와 달을 욕합니다. 그러자 해와 달이 하늘에서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세상은 암측 천지가 되지요. 샤먼들은 자기네가 해를 다시 불러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는 나무를 삼켰다가는 다시 뱃속에서 꺼내 보이지를 않나, 눈만 내어놓고 땅 속에 파묻혀 보지를 않나, 하여튼 별별 마술을 다 써봅니다. 그러나 마술은 영험이 없습니다. 해는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이지요.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사제들이 나서서 자기네가 한번 해보겠다고 합니다. 이 당시의 사람들 무리는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온갖 짐승으로 이루어진 수인의 무리였어요. 이들은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서서 계속해서 춤을 춥니다. 이들이 이렇게 춤을 추자 땅이 솟아 언덕이 되었고, 언덕이 솟아 산이 되면서, 그 산이 우뚝한 세계의 중심이 되는데, 세계의 바로 그 중심에서 사람들이 솟아나옵닏.
 
그런데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구약성서>에서 나옵니다. 조금 전에 내가 한 이야기는 나바호 인디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나바호족 인디언이 이 세상으로 나왔을 때, 푸에블로 인디언은 이미 이 세상에 나와 있었습니다. 이건 아담의 아들들이 이 땅에서 아내를 얻는 문제
와 비슷하지요. 아담과 이브가 최초의 인류라면, 이들의 두 아들이 장가가게 될 즈음에는 이 세상 인구는 넷밖에 안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담의 며느리가 될 인간이 어디에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인간이 창조되는 것과 저쪽에서 인간이 창조되는 것은 별개인 모양입니다. 199
 
뉴기니아에서 벌어지는 남성 비밀결사의 의례는 실제로, 농경 사회의 죽음과 재생과 식인食人의 신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요. 이 의례는 성별聖別된 마당에서 베풀어지는데, 참가자들은 북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뚝 그치고는 합니다. 이들은 이 짓을 4 ~ 5일 동안이나 줄기차게 계속합니다. 의례가 상당히 지루하게 여겨지겠지요? 그래요. 참가자들은 지쳐 쓰러지곤 하는데,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하여 참가자들은 일상에서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경험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절정의 순간이 옵니다. 이대가 되면 모든 참가자가 모든 규범을 팽개칩니다. 성적인 '오르지'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성인식을 치른 젊은이가 처음으로 여성을 경험하는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이들의 성소에는 굵은 통나무로 지은 거대한 통나무집이 있습니다. 이 통나무집은 두 개의 기둥이 떠받칩니다. 때가 되면 신의 모습으로 치장한 젊은 여성이 끌려나옵니다. 어른들은 이 여자를 그 거대한 통나무집의 천장 아래 눕히니다. 그러면 대여섯 명의 소년이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들어와, 차례로 이 여성을 범함으로써 처음으로 여성을 경험합니다. 이윽고 마지막 소년이 들어와 이 여성을 범하는 순간, 어른들이 기둥을 뽑아버립니다. 그러면 지붕이 내려앉으면서 둘은 죽음을 당합니다. 이것은 남녀의 성이 분리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남녀 상태로의 통합을 상징합니다. 생성과 죽음의 통합을 상징합니다. 이제 이 둘은 둘이 아닙니다.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세요? 동아리가 우우 모여 이 불쌍한 한 쌍을 끌어내서는, 바로 그날 밤에 구워먹는답니다. 이 의례는 신을 죽이는 원초적인 행위의 반복입니다. 이렇게 신을 죽이면, 바로 이 신, 바로 이 구세주에게서 먹을 것이 나오는 것이지요. 미사의 성찬식에서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곧 구세주의 피요. 살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은 내면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살과 피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되어 역사하는 것이지요.
 
이 제의가 드러내고 있는 진리는 어떤 것이지요?
 
삶의 모습 자체는, 반드시 삶의 행위를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수렵문화권에서 공희제가 치러질 경우, 제물 자체는 거기에 임재臨在한 신에게 바치는 선물, 혹은 뇌물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드시고 우리에게도 뭘 주십사, 하는 거지요. 그러나 농경 문화권에서 어떤 것이 제물로 희생될 경우는 다릅니다. 그 제물은 곧 신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땅에 묻히고 거름이 됨으로써, 거름이 되어 곡물을 기름지게 가꿈으로써 곧 우리의 양식으로 돌아옵닏.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났지요? 바로 그의 육신에서 영적인 양식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이야기는 원래 농경 문화권에 속하던 이미지가 승화된 것인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스도는 '성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지요. 이 '성 십자가'는 나무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그 나무의 열매가 되는 셈이지요. 그리스도는 영원한 삶의 열매입니다. 이 나무는 에덴 동산에 있던 두 번째 금단의 나무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첫번째 나무의 과실을 따먹자, 하느님은 이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내 버리지요. 에덴 동산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곳입니다. 남녀와 선악과 신인神人이라는 이원적인 구별이 없는 곳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여기에서 이원성의 과실을 먹고는 쫓겨납니다. 이렇게 쫓겨난 인간을 다시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게 하는 나무는 영생의 나뭅니다. 이 영생의 나무 아래 이르러야 우리는 '나'와 '아버지'가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은 많은 종교가 겨냥하는 것입니다. 야훼는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 버린 뒤에 문 앞에다 '그룹[cherubim](에덴 동산의 문을 지키는 천사)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세웁니다. 절에 가면, 안에는 영생의 나무 아래에 앉아 잇는 부처 이미지가 있고 문 앞에는 두 문지기가 있는데, 이 문지기가 바로 '그룹'입니다. 우리는, 영생의 나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그룹 사이를 지나야 합니다. 기독교 전승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린 채 영생의 나무 위에 걸려 있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바로 이 영생의 나무의 열매인 것입니다. 204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자기를 희생시키는 신화적 영웅에 대한 관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트남전 당시의 일이 기억나는군요. 집에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자니, 화면에, 헬리콥터 안에 있다가 전우를 구하러 달려나가는 젊은이의 모습이 비치더군요. 글자 그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말이지요. 그 전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반드시 나가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나는 여기에서, 쇼펜하우어의 이른바 타인을 위한 자발적 행위와 똑같은 것을 보았어요.
 
사람들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매일 직장을 오가면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릐고 무서운 것이다.....그러나 나는 살아 있다.....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이 젊은이는, 전우를 위해 용감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지하철역의 플랫폼에 서 있는데, 어떤 사람이 저에게 '나는 매일 저 아래에서 조금씩 죽어간다네,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지',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 친구는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약간 영웅 같은 데가 있지 않습니까? 어머니들도 가족을 위해 그렇게 합니다. 정을 위해 자기 몸을 떼어내지 않습니까?
 
어머니는 곧 희생이지요. 하와이에 있는 우리 집 베란다로는 새들이 많이 날아와서 둥지를 틉니다. 해마다 어미새 한두 마리가 거기에서 새끼를 낳아 기르니까요. 이 어미새가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물어오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정말 안쓰럽습니다. 새끼는 자그마치 다섯마리나 됩니다. 215
 
그러나, 자기가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않던 일에 종사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방향 전환의 계기를 기다리는 능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실제로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종종 있던 일이어서 나는 알고 있지요. 
 
남학생들에게 교양 과목을 가르칠 당시, 나는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어요. 어떤 학생이 나에게 와서, '제가 이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저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어요.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부모는 자식에게, '너는 법과대학에 가야 해. 법관이 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거든', 이런 말을 능히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테를 붙잡는 삶입닏.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자, 돈이 중요하겠어요, 천복이 중요하겠어요? 나는 유럽에서 공부하다가, 1929년, 월스트리트가 무너지기 3주일 전에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일자리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지요. 그런데 내게 그 시절은 정말 멋진 시절이었어요. 

대공황의 와중에 멋진 시절이라니요? 얼른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돈이 없다는 건 느꼈지만 가난하다는 느낌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어요. 그 당시 사람들, 좀 좋았어요? 나는 그 당시에 프로베니우스를 발견했어요. 문득 이 양반이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나는 프로베니우스가 쓴 것은 모조리 읽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돈이 있습니까? 나는 돈이야 어찌 되든, 뉴욕의 서적상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그 서적상은 내가 바라던 책을 모조리 보내면서 일자리를 구하거든 갚으라는 거예요. 자그마치 4년 뒤에나 갚았지만요.

뉴욕의 우드스톡에 아주 멋진 노인이 있었어요. 이 양반에게는 방이 아주 많은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는 이 방을 예술을 공부하는 가난뱅이 학생들에게 1년에 20달러 정도의 임대료로 빌려주었어요. 그런데 이 집에는 수도가 없었어요. 물은 우물물을 길어다 쓰거나 펌프로 자아올려 써야 했어요. 그런데 수도를 놓지 않는 이유가 걸작입니다. 수도를 설비해놓으면, 이 집이 수도가 있는 집에 살던 학생들의 관심을 끈다는 거에요. 나는 이 집에서 기본 독서와 공부는 거의 다 했어요. 

정말 멋진 시절이었죠. 나는 내 천복을 쫓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말하는 이 천복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배운 겁니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즉 '사트sat' '취트chit', '아난다ananda'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처방에 영험이 있었던 것 같군요. 

우리도 그 진리를 알 수 있을까요? 그 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깊이와 경험과, '사트, 취트, 아난다'와 관련된 존재의 확신과, 의식과 천복을 통한 나름의 존재 방식이 있어요. 종교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보기까지는 끝내 천복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나 나는, 살아 있을 동안에도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게 천복이라고 생각해요.226

천복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것이군요. 

천국에서는, 하느님을 우러러보는, 생전 안 하던 경험을 하니 대단하긴 하지요. 하지만 우리 자신의 경험은 바로 이곳에서 하는 거지, 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선생님은 천복을 좇는 그 순간 수간에, 혹시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저에게는 그럴 때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늘 하지요. 정말 놀라운 일입닏.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껴본 적이 있으신지요?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어요? 있다면, 연민을 느껴야 당연한 불쌍한 사람이지요. 생명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목을 쥐어뜯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지요.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227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의식은 어떻게 변모합니까?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이 모든 이야기에는 보상의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 처녀가 괴물에게서 구출된다든지, 도시가 멸망을 면한다든지, 영웅이 구사일생한다든지 하는.....

있지요. 그런 보상 성격의 성취가 없으면 영웅 신화가 아니지요. 물론 실패하는 영웅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웅은 자기가 성취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바라는 광대 영웅인 셈이지요. 

영웅과 지도자는 어떻게 다릅니까?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이 문제를 다룹닏. 아시다시피 나폴레옹이 유럽을 황무지로 만들고 바야흐로 러시아를 침공하려고 할 때, 톨스토이는 '그 지도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도자인가, 아니면 무리의 선두에 선 자에 지나지 않는가?'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심리학 용어를 써서 말한다면, 지도자는 성취 가능한 어떤 선을 인식하고 그것을 성취시킨 자인가, 아닌가 하는 문맥에서 분석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지도자는 어차피 해야 할 일을 찾아내어 선두에서 그 일을 해치우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나폴레옹은 지도자였지요. 그러나 영웅은 아니지요. 그가 성취한 것은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프랑스의 영광을 위한 것이니까요. 

그러면 프랑스의 영웅일 수는 있겠지요.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겁니다. 지구촌 전부가 우리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 마당에, 특정 국가, 혹은 특정 국민의 영웅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나폴레옹은, 20세기 히틀러의 19세기 판입니다. 나폴레옹의 유럽 침공 역시 무서운 사건이었지요. 235 

영웅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여행을 스스로 선택하는 영웅과 그렇지 않은 영웅이 있는 것이지요. 전자의 영웅은 모듬살이의 필요에 반응하여, 자진해서 그 일을 하러 떠납니다. 

아테나 여신은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가서 아버지를 찾으라'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를 찾는 일은, 젊은 영웅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아버지를 찾는 일은 곧 자신의 이력, 자기의 이름, 자기의 근본을 찾는 일입니다. 이런 모험은 자진해서 하는 법입니다. 수메르의 천녀신 이난나의 전설도 이런 유형에 속합니다. 이난나는 애인을 찾으로 하계로 내려가, 사랑하는 애인을 지상으로 되살려 보내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그런데 자진해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던져지는 여행이 있어요. 가령 징집 영장을 받고 입대하는 것이 곧 이런 여행이지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도, 생사의 갈림길을 경험해야 하고, 제복을 입어야 하고, 민간인 시절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켈트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영웅 이야기가 있어요. 사냥꾼인 이 영웅은 사슴을 쫓아가다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숲에 이릅니다. 여기에 이르자 사슴은 '파에리 산의 여왕', 혹은 그 비슷한 존재로 모습을 바꿉니다. 이런 유형의 모험담에서의 영웅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가, 문득 자신이 변모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합니다. 

신화적인 입장에서 보아, 그런 모험을 하는 사람을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있지요. 변모의 기적을 겪어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이런 이야기에서, 영웅은 생소한 여행을 경험하지만, 사실 영웅에게는 그런 여행을 할 준비가 사전에 다 되어 있어요. 여행은 그러니까, 그를 등장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인 것이지요. 환경의 상황이나 조건도 영웅에 맞게 예비되어 있는 겁니다. 239

저에게는, 불감증, 권태, 보편적인 질서로부터의 소외감....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에게 내려진 저주 같아 보입니다. 우리 심층의 갈망을 일깨워줄 영웅이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T.S. 엘리엇의 <황무지>가 그리고 있는 게 바로, 모이어스 씨가 지적하고 있는 무기력한 삶과 강요된 삶으로 빚어지는 사회학적인 침체 상황입닏. 이런 삶은 우리의 영적인 삶, 우리의 잠재력, 우리의 육체적인 힘을 촉발할 수 없지요. 세계 대전이 무엇이던가요? 이런 삶이 지배하는 분위기가 빚어낸 전쟁 아니던가요?

선생님께서는 과학 기술의 반대편에 서시는지요?

천만에요. 고대 그리스 문화권의 최고 기술자였던 다이달로스는 , 자기 손으로 만들었던 크레타의 미궁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기 손으로 만든 날개를 아들 이카로스에게 달아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아야 한다. 너무 높이 날아오르지 말아라. 너무 높이 날아오르면 태양의 열기에 네 날개의 밀랍이 녹을 터이니, 필경은 떨어지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낮게 날지도 말아라. 너무 낮게 날면 파도가 네 날개를 적실 것이야.'

다이달로스는 중간을 납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잔뜩 신이 나서 자꾸만 높이 높이 날아오르는 이카로스가 보입니다. 결국 밀랍이 녹으면서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이달로스 이야기보다는 이카로스 이야기를 더 많이 합니다. 문제는 이카로스가 아니라 이 우주인을 바다에 추락시킨 날개 속에 들어 있는 태도인데도요. 산업이나 과학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엾은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지만,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았던 다이달로스는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 해변에 착륙하지 않았습니까? 242

신화학적 의미에서 그는 개혁자였어요. 비틀즈는 우리 사회가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음악을 만들었어요. 하여튼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완벽하게 들어맞았지요. 만일 이들이 그보다 30년 전에 나왔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에 알맞았을 겁니다. 대중의 영웅은 자기 시대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법입니다. 비틀즈는 대중 음악에다 정신적인 깊이를 더했습니다. 이것을 분위기라고 해도 좋을 까요. 하여튼 명상적이고 동양 음악적인 분위기를 더한 것이지요. 동양 음악은 수십 년 전에 벌써 미국으로 건너와 있었습니다만, 그저 호기심의 대상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비틀즈 이후에 와서야 우리 젊은이들은 그게 뭔지 냄새를 맡았던 거죠. 지금에 와서는 심심찮게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결국 이제는 이런 음악이 명상의 보조 수단이라는 그 원래의 의도에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비틀즈가 얻은 명성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영웅은, 존경의 대상만 되는 것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도 될 수 있다 싶을 때가 있는데요. 많고 많은 영웅이 남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필요를 희생시키니까요.

영웅은 다 그렇지요.

영웅이 성취한 일이 그 추종자들이 안목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듯한데요. 

그렇지요. 숲 속에서는 금을 가지고 나왔는데 나와서 보니 잿덩어리더라....이건 동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티프지요.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배는 갈가리 찢기고, 선원들은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오디세우스만 파도에 실려 출렁거립니다. 부러진 돛대에 매달려 표류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해변에 닿은 그는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혼자 되고 말았구나. 결국은 혼자 되고 말았구나'247

전설적인 영웅은 큰 일을 한 사람, 무엇을 세운 사람인 경우가 보통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 새 종교를 세운 사람, 새 도시를 세운 사람,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세운 사람인 것이지요. 이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땅에서 새로운 것을 싹 튀울 잠재력이 있는 씨앗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모든 종교의 조교들도 그런 것을 찾으로 살던 곳을 떠났지요. 석가는 출가하여 영원한 앎의 나무인 보리수 아래 좌정했어요. 바로 여기에서 그는 2천 5백년 동안이나 아시아를 계몽할 수 있었던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뒤 그리스도는 광야로 나가 40일을 명상했지요. 그가 하느님에게서 메세지를 받은 것은 바로 이 광야에섭니다. 모세는 산으로 올라갔지요. 그는 이 산에서 십계명판을 가지고 돌아왔어요. 이 밖에도 새 도시를 세운 영웅들이 있지요.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 도시는, 살던 곳에서 탐색의 여행을 떠나, 무서운 시련이나 모험을 이겨낸 영웅들에 의해 세워집니다. 우리 삶(남의 삶을 시늉하는 것이 아닌 우리만의 삶) 역시 탐색의 여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왜 인류에게 중요한 것입니까?

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도 있고 중요하지 않은 것도 있으니까요. 만일에 어떤 이야기가 이른바 원형적인 모험(아이가 어른이 되는 이야기, 혹은 성인으로서 살게 될 새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다룬 이야기)을 다룬 것이라면 그것은 중요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도중에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 본보기가 되어줄 테니까요.251

'침머 박사님, 인도 철학 강의 정말 잘 들었습니다. 하지마 '마야'라는 것은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요.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자 침머 박사가 이러시더군요.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게. 자네같이 꽃 같은 아가씨는 몰라도 되는 것이니까.'

그래요.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마야'의 신화가 가슴에 와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작가 토마스 베리는, 그게 바로 이야기가 밝혀내려는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만물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 우리가 삶과 우주에, 우리의 기본적인 가정과 근본적인 믿음에 부여하는 줄거리라는 것입니다. 그의 글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우리가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옛 이야기는 아주 오래도록 우리를 버티어왔다. 옛 이야기는 우리의 외양과 정서적 태도를 다듬고, 우리 삶에 목표를 부여해왔으며, 우리 행위에 에너지를 공급해왓고, 고통을 성별해왔으며 우리 교육의 길잡이 노릇을 해왔다. 그래서 아침에 잠을 깨어도 우리는 우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아이들의 질문에 대답도 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기 때무에 우리는 온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옛 이야기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다. 새로운 이야기도 우리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254

우리가 아기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의 의식 아래에는 이미 어떤 기억이 분명히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군요. 

거기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이 얼마나 어마어마한가를 알면 더 놀라게 되지요. 아기는 엄마의 젖꼭지가 입술에 닿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압니다. 아이의 기억에는 우리가 동물에게서 볼 수 있는 붙박이 행동 체계가 있어요. 우리는 이걸 본능이라고 하지요. 이게 바로 생물학적 기반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조금 더 지나면, 외부로부터 강제를 당할 때만다 무엇인지 거북살스럽고, 이질적이고, 두렵고, 죄의식이 느껴지는 일을 경험하게 됩ㄴ다. 바로 이 시기가 우리의 가장 까다로운 심리적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시기인 거죠.

신화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런 문제를 이해하게 하는 데 필요한 기본 교육 자료였어요.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적당한 신화 교육을 베풀고 있지 못해요. 그래서 젊은이들이 이 사회 안에서 통일을 하는 데 그렇게 애를 먹고 있는 거지요. 나에게는 하나의 이론이 있어요. 어떤 젊은이가 모종의 장벽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특정 신화 대응물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이의 경우는, 문턱 넘기 의례와 관련된 신화 대응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너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말의 뜻을 어떻게 푸시는지요?

우리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막연할 때는 이웃의 충고나 영향력이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요. 나는,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사회 상황에서 자라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그만큼 모르는 상태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262

배의 신화학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소화 작용이 일어나는 곳, 즉 새로운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뱃속은 어두운 곳이에요. 고래 뱃속에 들어가는 요나 이야기는 세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신화 테마의 본 같은 겁니다. 물고기가 삼키는 바람에 영웅이 물고기의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들어갈 때와 전혀 다른 모슴으로, 다시 말해서 변한 모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세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어요. 

왜 영웅은 이런 걸 경험해야 합니까?

어둠(저승)으로 내려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심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고래는 우리의 무의식에 갇혀 있는 생명의 힘을 상징합니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물은 무의식이고, 수생동물은 생명, 혹은 무의식의 에너지입니다. 고래가 나타났다는 상황은 이 무의식이 의식적인 인격을압도하고 힘을 얻은 상태를 만들지요. 즉 이때부터는 무의식이 의식을 극복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런 종류의 모험의 첫째 단계에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자기에게 버릇 들어 있는 곳, 일정한 수준의 힘을 행사하던 곳을 떠나 한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의 문턱에 이릅니다. 이 문턱이 말하자면 호수나 바다의 가장자리지요. 이 문턱에서 심연의 괴물이 영웅을 기다립니다. 여기에서부터 두 가능성이 생깁니다. 요나 이야기 같은 유형의 모티프에서 고래는 영웅을 삼키지만, 영웅은 고래의 뱃속이라는 심연에서 되살아나옵니다. 즉 죽음과 부활의 테마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바로 여기에서 의식적인 인격은 통제 불가능한 무의식적인 에너지의 충전을 받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영웅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련을 겪으면서 무서운 밤바다를 여행해야 합니다. 이 무서운 밤바다 여행에서 이 어둠의 에너지를 극복할 방법을 깨닫게 되면 마침내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지요. 269

소년 시절에 <원탁의 기사>를 읽었는데요. 문득 저도 영웅이 될 수 있겠다 싶더군요. 정말 집을 떠나 용과 싸우고 싶었습니다. 어둠의 숲으로 들어가 악의 세력을 무찌르고 싶었습니다. 신화가 오클라호마주의 농투성이 아들을 꼬드겨 영웅이 되고 싶어하게 만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정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내가 인디언 이야기를 읽고 그랬듯이 모이어스 씨도 그랬군요.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신화는 우리에게 그만큼 더 수다스러워집니다. 종교 관념이나 신화 관념을 진지하게 다룬 적인 있는 사람들은, 우리는 그런 것을 어린아이의 단계인 제 1단계에서 배운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 단계는 무궁무진합니다. 각 단계마다 신화가 드러내는 계시 역시 무궁무진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우리 개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선생님의 이른바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일입니까. 사람입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 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272

햄릿의 문제는 자기의 운명에 깨어 있지 못했다는 거지요. 햄릿은 운명을, 너무 커서 도저히 다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운명이 햄릿을 다스려버렸던 거지요. 이런 일은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어요. 

신화의 어떤 이야기가 죽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까지 인간 종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그리스도 이야기가 죽음을 수용하는 데 필요한 교과서가 될 것 같군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이야기 역시 도움을 주겠어요. 오이디푸스 이야기에 나오는 스핑크스는 이집트의 스핑크스가 아니에요. 단지 새의 날개, 짐승의 몸, 여자의 가슴, 목, 얼굴로 이루어진 여성적인 존재일 뿐이지요. 모든 인간의 운명을 상징하고 있는 듯한 이 스핑크스는 온 땅에 전염병을 보내고는, 영웅이 자기에게 와서 자기가 내는 수수께끼를 풀어야 그 전염병을 거두겠다고 하지요. 수수께끼가 무엇인고 하니, '처음에는 네다리로 걷고, 다음에는 두 다리로 걷고, 다음에는 세 다리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답은 '인간'이지요. 아기는 바닥을 기니까 네 다리이고, 성인은 두 발로 걸으니까 두 다리, 노인은 지팡이를 짚으니까 세 다리가 되는 겁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인간이 사는 한살이(유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고, 나이를 먹고는 세상을 떠나는)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죽음을 직면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받아들일 때,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핑크스의 저주도 풀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279

그러나 석가는 이것을 거절하는데, 바로 그날 밤에 석가는 깨달음을 얻고 윤회를 벗어납니다. 

그러나 거웨인이나 오디세우스는 유럽인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세속의 진실에 머물기 위해 태양신의 섬을 떠나 아내 페넬로페에게로 돌아옵ㄴ디ㅏ. 그러니까 오디세우스는 이승의 삶의 가치에서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 이승의 삶의 가치에 충실하는 방법을 받아들입니다. 거웨인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석가가 취한 방법을 택하건 거웨인이 취한 방법을 택하건 욕망과 공포라는 이 무서운 계곡을 벗어나야 성취의 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석가에 가깝기보다는 거웨인에게 가까우면서도 속세의 삶의 가치에 충실하는 방법이 <짜라투라스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쓰는 방법입니다. 니체는 이 책에서 일종의 우화 수법으로 이른바 '영혼의 세 가지 변모'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첫번째가 낙타의 변모, 즉 어린아이와 소견의 변모입니다. 

낙타는 무릎을 꿇고, '내게 짐을 실으라'고 말합니다. 책임 있는 삶을 살기 이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과 수업을 받아야 하는 복종의 시절이 있는 법입닏. 탁타가 무릎을 꿇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짐이 실리면 낙타는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광야로 나가는데, 낙타는 여기에서 사자로 변모합니다. 등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사자의 힘은 그만큼 강해집니다. 이 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용을 죽이는 일인데, 용의 이름은 '그대의 미래' 입니다. 이 괴물의 비늘이라는 비늘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의 미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요. 그 중에는 4천 년 전에 씌어진 것도 있고 바로 오늘 아침에 씌어진 것도 있습니다. 낙타, 즉 아이는 '그대의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에, 사자, 즉 청년은 이것을 벗어던지기 대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283

석가 이야기를 하시니 석가의 예화를 들기로 하지요. 석가의 어린 시절 이야깁니다. 그는 왕자로 태어났어요. 그가 태어날 즈음 한 예언자가 그의 아버지에게, 장차 태어날 아기는 자라서 세계의 통치자, 혹은 세계의 대 스승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지요. 좋은 아버지였던 왕은 왕이라는 직분을 대단히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었지요.그에게 소우너이 하나 더 있다면, 자기 아들이 만인의 대 스승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특별히 궁전을 하나 마련하고 여기에서 왕자를 키웠어요. 말하자면 이 왕자에게는 세상의 추한 꼴을 하나도 보이지 않을 생각이었던 거지요. 세상의 추한 꼴을 보면 왕자가 장차 할 터인 명상에 방해가 될 테니까요. 그래서 왕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그 궁에 배치하여 순번을 돌아가면서 음악도 연주하고 왕자도 돌보게 합니다. 이렇게 자라 왕자는 어느덧 늠름한 청연이 됩니다. 어느 날 청년 왕자는 가까운 친구이기도 한 자기 전용 마차의 어자御者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성 밖으로 나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구나'

이 말을 전해들은 부왕은 왕자가 볼 마을을 아름답게 꾸며 왕자로 하여금 세상 삶의 고통스러운 구석, 비참한 구석은 하나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신들은, 부왕의 계획이 필경은 아들을 망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신 중 한 신이 왕자가 마차를 타고 지나갈 마을, 부왕이 깨끗이 꾸멶은 마을에 꼬부라진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저것은 무엇이냐?'

왕자가 노인을 보고는 어자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어자가 대답합니다. 

'노인입니다. 나이를 먹어서 그렇습니다' 294

하지만 사람들은 묻습니다. 신화는 결국 거짓말이 아니냐고요?

아니에요.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 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의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닏.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모험이라면 영웅의 모험 말씀이신지요?

그래요. 영웅의 모험. 즉 살아 있음의 모험이지요. 303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됩니다. 왜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가 아닙니까?

이건 대단히 상징적인 이미지입닏. 모든 종교 이미지와 신화 이미지는 우리 의식의 차원, 인간 정신에 잠재해 있는 경험의 장場입닏. 바로 이러한 이미지가 존재의 바탕자리의 신비에 대한 명상 상태와 비슷한 자세와 경험을 촉발합닏. 어머니가 양친 중의 으뜸자리에 속하고, 삶의 근원인 종교 체계도 있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식과 더 가까이 있는 분입닏. 까닭이야 간단하지요. 우리는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의 경험을 어머니와 함께 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이따금씩, 결국 신화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 이미지가 승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우리는 '어머니 대지'라는 말을 곧잘 쓰지요? 이집트에는 '어머니 하늘'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요. 여신 투트가 바로 어머니 하늘입니다. 이 누트는 하늘로 그려지지요. 305

나는 먹거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자기 삶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먹거기라 되어주지 않는 것도 삶을 거부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생명의 흐름이 끊겨버립닏. 이 흐름을 타는 것은 매우 신비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먹거리가 된 동물에게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 자신을 주어야 할 거에요. 

우리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우리라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그런데 인도의 영적 발전 단계에서 정신의 두 번째 중심은 성기性器로 상징됩니다. 성기는 곧 생식의 충동을 실현하지요. 세 번째 중심은 배꼽 높이입닏. 이곳은 의지력의 중심이기도 하지요. 이 의지력은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자기 통제와 자기 성취가 됩니다만,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정복, 파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의, 공격적인 기능입니다. 

인도 심리 체계의 상징성에서 보았듯 첫번째 기능인 보양은 동물의 본능입니다. 두 번째 기능인 생식 역시 동물의 본능입니다. 세 번째의 기능인 의지력 역시 그 부정적인 기능을 보면 동물의 본능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래서 이 세 중심은 상징적으로 골반과 가까이 있습ㅈ니다. 

그 다음 네 번째의 중심은 가슴 가까이 있어요. 이 중심은 자비로운 마음 쪽으로 열려 있지요. 바로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동물적인 행동의 장에서 나와 인간적이고 영적인 장으로 들어갑니다. 

이 네 중심에는 각각 상징적인 형상이 투사되어 있어요. 가령 첫번째 중심, 즉 가장 아래쪽에 있는 중심의 상징은 링감과 요니, 즉 결합되어 있는 남성과 영성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의, 가슴 가까이 있는 중심의 상징도 링감과 요니, 즉 결합되어 있는 남성과 여성입니다. 319

이단일 뿐만 아니라 간음, 정신적인 간음인 거지요. 결혼이 사회에 의해 결정되는 풍토였기 때문에 음유시인들이 마란 이른바 눈과 눈의 만남에서 오는 사랑은 대단히 높은 정신적 가치를 지녔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이야기에서 이졸데는 원래 마르크왕과 약혼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둘은 서로 얼굴을 본 적도 없어요. 트리스탄은 이졸데를 마르크왕의 궁전까지 데려다주는 임무를 맡지요. 이졸데의 어머니는 사랑의 묘약을 준비합니다. 이 사랑의 묘약이 있으며 결혼하기로 내정되어 있는 두 사람은 진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졸데의 어머니는 이졸데의 유모에게 사랑의 묘약을 맡기지요. 그런데 유모의 관리가 허술했던 바람에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이걸 포도주인 줄 알고 나누어 마시게 됩니다. 물론 사랑에 빠지고 말지요. 하지만 이들이 이때 처음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전부터도 서로를 은밀하게 사랑하고 있었지만 서로 의식하지 못했다뿐이지요. 그 의식하지 못했던 사랑을, 사랑의 묘약이 일깨워놓은 겁니다. 누구에게나 젊은 시절에는 이런 종류의 체험이 있었을 겁니다. 

음유시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마르크왕과 이졸데는 비록 혼약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 사랑할 자격은 없는 것이죠. 게다가 둘은 서로의 얼굴도 본 적이 없어요.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345

트리스탄은 사랑과 천복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천복을 위해서라면 고통을 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지옥의 상태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가 이루려 했던 어떤 상태이겠지요. 

그래요. 위릴엄 블레이크는 그의 유명한 아포리즘<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내가 지옥의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을 때....천사는 내가 큰 고통을 받고 있는 줄 알았으리라.'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지옥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천사가 아닌 사람들에게, 그 불길은 고통의 불길이 아니라 열락悅樂의 불길인 것이지요. 

<신곡>의 <연옥편>에 보면, 단테는 지옥에서 인류 역사상 유명한 연애 사건의 주인공들을 줄줄이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닏. 단테는 헬레네도 만나고, 클레오파트라도 만나고 트리스탄도 만나지요. 그는 어떤 뜻으로 이런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일까요?

단테는 교회의 견해를 빌려, 이곳은 지옥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이러고 있는 겁니다. 보세요. 단테는 바로 거기에서 당대 이탈리아에서 유명했던 연애 사건의 주인공인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도 만납니다. 프란체스카는 시동생인 파올로와 정분을 맺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졌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단테는 무슨 사회학자처럼 프란체스카에게, '아가, 어째서 그렇게 되었느냐? 보아라. 이 꼴이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자 프란체스카가 그 내력을 잠깐 이야기하는데, 이 대목은 단테의 <신곡>중에서도 명구로 꼽힙니다. 

'저와 파올로는 정원의 나무 밑에서 기사 랜설럿과 귀네비어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두 주인공이 첫 입맙춤을 나누는 대목을 읽다 말고 저와 파울로는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러고 나서는 그날 그 책을 한 줄도 더 읽지 못했습니다. ' 348

상처란 다른 것이 아닙닏.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닏. 이 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중세의, 창의 상징적인 이미지와 관련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지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창에 상처를 입히지요? 이 세상에 그 상처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은 그 창을 상처에 문지르는 것뿐이다. ....이런 유의 이야기가 있지 않아요?

성배 전설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수도원판修道院版 성배 전설에서는 성배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해석됩니다. 성배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 있던 술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그 술잔을 말합니다. 

수도원적 해석이 그렇다면 일반적인 해석은 어떻습니까?

성배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의 어떤 작가는 이 성배를, 중립적인 천사들이 하늘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쓴 적이 있지요. 아시겠지만, 하늘에서 하느님과 악마 사이에, 선과 악 사이에 전쟁이 터졌을 때 어떤 천사 무리는 하느님을 편들고 어떤 천사 무리는 악마를 편들었다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성배는 바로 이때 중립을 지킨 천사들이 가져온 것이라는 이야기예요. 이럴 때의 이 성배는 한 쌍의 대극對極의 사이, 곧 욕망과 공포의 사이, 선과 악의 사이로 난 영적인 길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성배 이야기의 테마는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이나 나라를 그 무대로 합니다.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 곧 황무지가 아닙니까? 황무지의 기본적인 성격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살긴는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황무지입니다. <황무지>를 통하여 엘리엇이 표현하려고 한 것도 바로 이겁니다. 357

사람들에게, 특히 처녀들에게 교회나 부모가 정해주는 사람과 결혼하기를 강요한 것은 바로 교회 조직의 전횡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어떤 아픔을 안겼습니까?

강요에 의해 부부가 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사랑이 자랄 수는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종류의 관계도 상당히 깊은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가족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 삶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도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영혼의 나머지 한쪽을 발견했을 때, 여기에서 생기는 사랑과는 견줄 수가 없지요. 음유시인이 찬양한 사랑, 오늘날 우리의 이상이 되어 있는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 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365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결혼이 교회에서 이루어질 경우 결혼의 주례는, 하느님이 맺은 관계는 사람이 풀지 못한다고 하지요?

그건 초보에 불과하지요. 진짜 결혼은 그 선언이 구체화시킨 하나됨을 상징적으로 재천명합니다. 

초보라고 하셨습니까?

결혼은 우리의 동일성, 즉 한 사물에 두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결혼은 진짜 결혼의 초보 같은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선생님께서도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전설을 알고 계시겠지요? 

그럼요.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이지요. 테이레시아스가 어느 날 숲길을 걷다가 서로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말하자면 사랑에 빠져 있는 한 쌍의 뱀을 봅니다. 물론 장님이 되기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테이레시아스는 이걸 보고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지팡이로 둘을 떼어놓았지요. 그 순간 테이레시아스는 여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는 여성인 채로 몇 년을 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숲길을 걷다가 서로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한 쌍의 뱀을 또 봅니다. 여성인 테이레시아스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또 지팡이로 둘을 갈라놓습니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는 남성으로 되돌아오지요. 366

그거야 할 나름이지요. 결혼을 하고도 다른 이성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반응하지 못한다면 결혼 관계에서 사랑의 생명력을 체험하는 것을 둔화시키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요. 

문제는 그겁니다. 눈이 상대의 가슴을 염탐하고, 상대의 가슴이 열정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간취看取한다. ......이것이 의로우려면 가슴이 바라는 것이 의로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랑에는 면역성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을 어떤 관계로 면역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휼륭한 연애 관계, 내가 말하는 건 진짜 근사한 연애 관계를 말합니다만, 그런 걸 가지면서도 동시에 결혼 관계에 성실할 수 있느냐 하면, 나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봐요. 

왜요?

성실한 태도가 분산되니까요. 그러나 결혼 관계에 성실하게 임한다고 해서 이 성실 자체가 다른 데 대한 애정, 이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금지시키지는 않지요. 중세의 연애 이야기를 보면 어떤 여성과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도 다른 여성과의 관계, 자기에게 성실한 여성을 찬양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런 건 그런 의미에서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요.

음유시인들은 사랑이 성취될 가망이 없는 여성을 두고도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고는 하지요?

그래요. 

신화도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지요?

일반적으로 신화는 개인의 사랑 문제는 다루지 않아요. 결혼을 허락받았기 때문에 결혼한다. 특정 족속에 속할 경우, 이 족속과는 결혼할 수 있지만 저 족속과는 안 된다. 뭐 이런 걸 다루는 정도에 그치지요.370

'만달라mandala'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가 곧 '원'입니다. 그러나 만달라의 원은 그냥 원이 아니고 다른 원과 상호 관계하거나 상징적인 문양을 이룸으로써 하나의 우주 질서를 상징합니다. 만달라를 그리는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 작용하게 합니다. 가령 아주 정교한 불교 만달라를 보면 중심에 힘의 근원이자 깨달음의 근원인 신이 있습니다. 주변 이미지는 그 신의 드러남顯現, 혹은 그 신이 지니는 빛의 측면이지요. 

우리는 이 만달라를 만들어 우리에게 적용시켜볼 수도 있어요. 우선 원을 그리고, 우리 삶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충동 체계와 가치 체계를 명시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이 두 체계의 자리를 정하고 다음에는 자기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검토해봅니다. 만달라를 그려본다는 것은 우리 삶의 흐트러진 여러 측면을 한 자리에 모으는 훈련 방법이 될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중심을 찾아 여러 측면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결국 우리 자신의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 관계를 맺게 하는 작업입니다. 

중심을 찾아 자기 마음을 거기에다 두자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중심에 두자는 것이지요. 나바호 인디언은 병자에 대해 모래 그림을 이용하여 병 낫게 하기 의례를 베풉니다. 그런데 모래 그림이라는 것은 바로 모래 위에 그려지는 만달라예요. 병자는 만달라 안으로 들어가 앉아 자기 자신을 상징적인 힘의 중심과 동일시함으로써 신화적 문맥 속으로 돌입합니다. 만달라 상징을 이용한 이 모래 그림 자체와, 명상 상태를 겨냥하는 그 쓰임새는 티베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티베트의 승려들 역시 모래 그림을 그리는데, 이 모래 그림이 바로 우리 삶에 작용하는 영적인 힘을 나타내는 우주적 이미지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중심을 우주의 중심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이군요. 392

저도 얼마전에,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퇴역 장군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벌쥐 전투의 경험이 어떠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혹독한 겨울 벌쥐에서는 독일군의 공격이 연합군에게 상당한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대를 회고하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장엄했지요'

따라서 괴물도 신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겁니다. 

괴물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고 계시는지요?

내가 여기에서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조화와 질서와 윤리적인 행동에 대한 우리의 기준을 송두리째 무너뜨려버리는 무서운 존재, 혹은 무서운 도깨비를 말합니다. 가령 이 세상에 종말의 때가 오면 비쉬누는 괴물로 나타납니다. 이대 그는 우주를 부숴버리는데, 처음에는 불로 부수고 다음에는 물로 쓸어버립니다. 이 물은 불을 쓸어버리는 동시에 이 세상 만물을 쓸어버립니다. 남은 것은 재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파괴자 역할을 맡는 신의 모습입니다. 이런 경험은 윤리적, 미학적 판단을 초월합니다. 윤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종교를 보면, 인간에게 상당한 공간을 할애한 다음에는 윤리에도 그런 공간을 할애합니다. 그러다가는 신을 상당히 선한 존재로 그립니다. 천만에! 천만부당하지요! 신이 왜 선해요? 신은 무서운 존재입니다. 지옥을 발명한 신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아십니까? 구세군救世軍에서도 이런 신은 안 받아줄 겁니다. 세상의 종말을 생각해보세요. 회교도들이 하고 있는 죽음의 천사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회교도들은, '죽음의 천사가 다가오면 그는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윽고 손으로 쓰다듬으면 그는 천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402

흔히들 천국과 지옥을 영원하다고 하지요. 천국은 끝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는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가고 하는 곳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어요. 불교에는,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이 세상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이 있어요. 이 개념은, 시간이 있는 데엔 슬픔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참 모습입니다. 405

그러나 천국이라는 것은 광휘에 휩싸인 하느님을 바라보는 어떤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시간이 없어져버립니다. 왜냐? 시간이 사라져버린 상태이니까요.

여기에서 다시 한번 우리는, 영원은 영속하는 시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도 체험할 수있습니다. 지상적 관계의 체험 속에서도 그 영원을 체험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때의 깨달음을 나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이 깨달음은, 이 세상에서의 영생불사 체험과 관계가 있습니다. 

부처가 어느 날,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어느 여인을 만났습니다. 부처는 절망으로 몸부림치는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마을을 다니면서 아들을, 혹은 지아비를 , 혹은 친척이나 친구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세요'

필멸必滅의 필자와, 우리 안에 있는 초월적 영생불사의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신화에는 영생불사하고 싶어하는 인물이 많이 나오지요?

그래요. 하지만 영생불사라는 말이. 육신으로 영생하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지요. 육신으로 영생불사하는 자는 종종 어릿광대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영생불사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의 영원성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굉장한 것이지요.

선생님께서는 삶의 모든 문제는 '존재하기'와 '되기'를 맴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09

저는, '말씀은 육으로 되어 있다';는 강력하고도 신비스러운 선언을, 우리의 인간적인 여행에서, 우리의 체험에서 찾게 될 수 있는 영원한 원리로 해석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그 말씀을 찾을 수 있어요.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없다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시는, 언외言外의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요. 괴테는, '만물은 메타포'라고 말했습니다. 무상無常한 것은 모두 은유적인 해석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고요.

어떻게 하면 메타포를 섬기고, 메타포를 사랑하고, 메타포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메타포를 위해 죽는 것, 이것은 사람이 늘 하고 있는 짓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있는 언어의 신비를 드러내는 소리에 '옴AUM'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소리의 의미를 개달으면 밖으로 나가 다른 것을 위해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가만히 앉아서 이 소리를 정관하고, 경험하고, 알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절정 경험일 테니까요.

'옴'이라는 걸 좀 설명해주십시요. 

'옴'은, 우리 귀가 들을 수 있는, 만상이 체현하는 우주 에너지의 소리입니다. 먼저 목구멍으로 '아!' 소리를 내고, '오'라는 소리를 입안에 가득 채웠다가, '음', 하면서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이 소리를 제대로 내면 모든 모음이 이 소리의 발음안으로 들어옵니다. '한번 해보세요.'옴!' 자음은, 모음의 소리를 끊는 일밖에는 못합니다. 모든 형상이, 궁극적인 '형상'의 단편에 지나지 못하듯 모든 말 또한 이 '옴'의 단편에 지나지 못합니다. '옴'은 소리나는 것, 곧 우주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소리입니다. 테베트 승려의 '옴' 송頌을 한번 들어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겁니다. 우주는 존재의 '옴'송입니다. '옴'송을 통하여 우주와 접촉하고 우주를 느끼는 것, 이것이야말로 절정 체험입니다.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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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272 북리뷰 32. 서양철학사_버트런드 러셀(을유문화사) [2] 박상현 2010.11.01 2307
3271 #5 <코리아니티> file jeiwai 2013.05.19 2307
3270 백범일지 앨리스 2014.09.15 2307
3269 [독서31]천의얼굴을가진영웅/조셉캠벨 素田 최영훈 2007.11.08 2308
3268 국화와 칼(菊と刀) / 루스 베네딕트 [3] [2] 香仁 이은남 2007.12.19 2308
» 5. 신화의 힘_발췌 맑은 김인건 2010.04.05 2307
3266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 니체, 고병권 [2] 好瀞 2007.10.16 2309
3265 [번역010] 15장 서두르지 않는 삶, 16장 한결같은 삶 [4] 香山 신종윤 2008.04.25 2309
3264 [04] 신화와 함께하는 삶 - 조셉캠벨 [2] [2] 최지환 2008.04.27 2309
3263 [11] 백범일지 - 김구 최지환 2008.06.16 2309
3262 [번역016] 27장 내면의 빛에 따르는 삶, 28장 덕있는 삶 香山 신종윤 2008.06.20 2309
3261 [31]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신영복 2008.11.16 2309
3260 두 번째 읽기 : <신화의 힘> -조셉캠벨 김연주 2011.01.09 2309
3259 (08) 인간적인 길 - 자크 아탈리 [5] [2] 옹박 2007.05.01 2310
3258 [17] 제러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저자 및 내가 저자라면 수희향 2009.08.03 2310
3257 '영적인 비즈니스' - 아니타 로딕 희산 2009.09.21 2310
3256 [북리뷰32] 서양철학사 다시 읽기 <The Best 50> 신진철 2010.11.01 2310
3255 [북리뷰 36]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2] 신진철 2010.11.28 2310
3254 열정과 기질 [1] 暻山 2007.01.25 2311
3253 『나의 일은 프로젝트다』를 읽고 file [2] [2] 현운 이희석 2007.09.17 2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