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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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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5일 11시 20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다른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12]  

죠셉 캠벨은 신화 종교학자이자 비교 신화학자로 일생을 살았다. 그러면서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하는 신화적 영웅들의 이야기들을 찾아내어 세상에 알렸는데, 이로인해 그는 유명해졌으며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신화에 대한 연구’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뉴욕 자연사 박물관을 찾았던 경험이 어린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그 때의 관심과 경험을 통해 소년시절 북미대륙의 원주민의 신화와 아더왕 전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신화 연구에 본격적으로 몰입하였으며 콜롬비아 대학과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하게 되면서 학문의 깊이가 더해지게 되었다. 이후 켄터베리 스쿨을 거쳐 사라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 교수가 된 뒤 신화에 대해 본격적이고 집중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대공황 중에 뉴욕의 우드스톡에 있는 작은 집을 빌려 독서와 사색으로 하루 중 16시간을 4시간 씩 세 단위로 나누어 독서, 사색, 그리고 휴식을 활용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그의 책에서 비춰지는 명상이 그의 휴식의 시간에 할애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캠벨의 주 전공은 종교학, 그 중에서도 인도의 전통에 비중을 많이 비중을 두었던 비교 종교학자여선지신화와 인생’ ‘신화의 힘등에서 요가와 명상 이야기를 자주 접할 수 있다. ‘신화의 힘책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에 씌어진 힌두 <우파니샤드> 경전의 글귀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었다. 다민족의 종교와 신을 넘나드는 그의 폭 넓은 이해와 깊은 사고 덕분에 본 책과 같은 풍부한 이야기 거리를 가진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죠셉캠벨이라는 이름을 대중에 각인시킨 책은 신화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전달했던 심화의 힘이였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 환산, 심지어 황홀의 세계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고 있었다.이토록 우리를 끌게 한 힘은 그의 지헤이다. 그는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박식한 사람이기도 했다.

신화는 인류의 삶의 뿌리이며, 그 뿌리에서 자란 것이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에 신화와 그 체계를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언어가 철저하게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적 상상력을 넘어서는 시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캠벨은 말하고 있다.

조셉 캠벨은 1904 뉴욕에서 태어나 83년의 일기로  화와이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 곁엔 <세계  영웅의 신화> < 신와의 > < 신의  가면 시리즈> < 신화와 인생>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신화와 함께  하는 > <우리안의 남신들> <신화  이미지>  많은 저서들을 통해 아직도 신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신화 해설가 할아버지로서의 그를 만날 수 있다. 
 

무찔러드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가 없는 것이지요. [8]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을 했지요.[9]

 

인류는 ‘자기 내부에 식인종적이고, 색정적인 열정’ 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러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열정을 인류의 전염병이라고 불렀다.[11]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듯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12]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운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조셉 캠벨은 인생을 모험이라고 확신한다. [12]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12]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14]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 텐데 말이오.[15]

 

나는 캠벨만큼 말을 잘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원시사회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열린 하늘이라고 하는 거대한 지붕 밑으로 펼쳐진 광막한 들판으로 나가거나, 수목에 묻혀 있는 숲속의 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을 맛보고는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신들의 이야기가 왜 바람 속에서, 천둥 속에서 울려나올 수 있는지, 어째서 산자락의 시내라는 시내는 다 하느님의 육성을 내는지, 어째서 온 세상이 다 성소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19]

 

그는 환상과 진리의 갈등 너머 존재하는 지혜의 해각을 믿는다. 그의 믿음에 따르면 이 지혜가 우리의 삶을 원초의 상태로 되돌린다.[19]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들이는 그는 마치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 같았다.[21]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25]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25]

 

나이를 먹어 날의 삶에 대한 관심에 심드렁해지면, 사람은 내면적인 삶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 내면적인 삶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 참 곤란한 일이지요.[26]

 

이 세상에 유식한 인간을 시인으로 만들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과 살아 있는 것과 일상적인 삶을 사랑하는 나의 고향일 것입니다. 따사로움의 모는 것, 정겨움의 모든 것, 유머의 모든 것은 내 고향이 알고 있는 이 같은 사랑에서 유래합니다. ‘천사의 혀와 인간의 혀로 모두 말하는’, 그러나 사랑이 부족하여 ‘꽹과리나 시끄러운 마라 소리’나 내는 사람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이들의 사랑이 심지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사양하지 않습니다.[28]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28]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29]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29]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30]

 

신화를 읽었지요.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30]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30]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31]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31]

 

제대로 된 상대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것입니까?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31]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종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32]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32]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33]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자아’라는 재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33]

 

‘자기’ 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서의 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33]

 

미국에는 온갖 배경을 가진 사람이 다 모여 살고 있어요. 그러자니 이 나라에서는 법이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잖아요.[36]

 

의식을 머리가 지닌 특수한 기능으로 여기는 것은 데카르트식 사고방식의 일부이지요. 데카르트파 사람들은 머리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의식에 영향을 미쳐 어떤 방향, 혹은 어떤 묵적에 맞게 작용하게 하는 기관이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은 아니지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온몸에 두루 존재합니다.[46]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명상이라는 게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47]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48]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48]

환경의 파괴는 결국 세계의 파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겠지요? 자연의 파괴는 곧 자연에 의한 계시를 파괴하는 것일 테니까요.[59]

 

인간은 자연만이 아니고 자기 본성도 파괴합니다. 노래를 죽이니까요.[59]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59]

 

일본에는 “파도와 함께 흔들려라” 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복싱을 이야기할 때, 상대방의 가격 리듬을 타라고 하는 말과 비슷합니다.[63]

 

영혼이 있고 내적인 자기 자신이 있는 세계에서는, 선생님 말씀대로 여전히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군요.[63]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71]

 

‘이성’ 이라는 말과 ‘생각’ 이라는 말부터 구분해볼 필요가 있겠어요.[73]

 

이성은 생각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73]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놓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73]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네 번째 기능은 어떻게 살아 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76]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76]

 

오늘밤에 무슨 꿈을 꾸게 도리지 알 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도 알 수 없어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지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77]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86]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86]

 

심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자로 현현한 것이지요.[86]

 

“고래 잔등 위에서 송사리를 낚는” 수도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고래 등에 서 있습니다. 만물의 바탕자리는 바로 우리 존재의 바탕자리에게도 합니다.[87]

 

잠들어서, 우리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삶의 조곤과, 그 조건과 관련된 우리 현세적 삶의 현장을 꿈꾸게 되는 시간을 말하지요.[87]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88]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족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89]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병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 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식물 역시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막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92]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듯이 말이지요. 달이 다시 차기 위해서 그 그늘을 벗듯,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이 양자는 대응하는 상징입니다. 때로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이지요. 삶 역시 한 세대에서 이울면서 다음 세대로 넘겨져 거듭납니다. 뱀은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합니다.[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96]

‘두려움’ 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아가 최초로 체험하는 것이 랍니다. 지금은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분석심리학자 스타니슬라프 그로프는 수년 동안 LSD 를 가지고 환자를 치료해온 사람입니다.[105]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106]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107]

 

소리가 대기를 응결시키고, 이 대기의 응결체 그 불, , 그리고 흙이 되는데, 세상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우주는 이 원초적인 소리, 이 떨림에 싸여 있어요. 바로 이 소리가 만물을 파편으로 이루어 시간의 장으로 보내는 것이지요.[111]

 

중국의 도덕경에 나옵니다. 이렇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 한다. 알지 못 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대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114]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 합니다. [114]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115]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도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115]

 

‘초월적’ 이라는 말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과 관련된 기술적. 철학적 술어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초월적인 존재’ 라는 말은, 자연계 너머, 혹은 자연계 밖에 있는 존재로서의 하느님을 뜻합니다. 이것은 초월적인 존재를 표현하는 말로는 지나치게 유물적입니다. 하느님이 바깥 어딘가에 있는 일종의 영적인 존재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126]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126]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없이 인생이 원래는 이러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조르바는 인생에 대하여 “말썽?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말썽 아니가” 하고 있습니다.[126]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일을 낙관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 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126]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나는 누가 이런 식으로 되기를 의도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되어 있잖아요? 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디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 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원천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134]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139]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돌아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모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141]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 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옵니다. [142]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ㄹ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나는 내 문제의 해답도 신화에서 배웠어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빛을 내는 전구인가, 전구가 수레가 되어 실어 나르는 빛인가……. 나이를 먹어갈 대 생기는 심리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죽음의 문턱을 한사코 거부해요. 그러나 육체는 의식의 수레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의식의 수레인 육신이 낡은 자동차처럼 부서져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143]

 

초기 신화는 , 삶의 필요한 행위일 경우이면 그 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하면서도 공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지요. [148]

 

거미가 아름다운 거미줄을 만들 때, 그 아름다움은 거미의 심성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거미줄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거미가 지닌 본능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삶이 지닌 아름다움 중에 어느 정도가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일까……. 어느 정도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일까…….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겠지요.[158]

 

인간은 환경에 반응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환경에 반응하지 않는 문화 전통이 생겼어요. 이것은 기원전 약 1,000년에 다른 데서 온 겁니다. 이 문화 전통은 우리 현대 문화와, 새 우주관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동화시키지 않아 왔어요.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68]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 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179]

 

정신이라는 것은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189]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자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위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190]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부계적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모계적입니다.[193]

 

여성에게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 마력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의 마력이 대지의 마력을 버티어주게 된 거지요. 고대의 전승에 따르면 최초의 경작은 여성의 손에서 이루어집니다.[194]

 

“땅에 쓰러진 고목과 떨어진 잎에서 새싹이 나온다. 이것은, 죽음에서 생명이 솟고 죽음으로부터 새 삶이 비롯됨을 깨닫게 한다. 어설프게 결론을 내려 보자면, 생명이 늘어나려면 죽음이 늘어나야 한다. 이 지구의 적도대 문화의 특징은 희생 재물(식물, 동물, 혹은 인간) 바치기에 광분해 잇다는 데 있다.[201]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 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 라는 것은 한 생명의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 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211]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거 없이 미래를 맞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봐야 현재는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즉음, 탄생......상실, 죽음, 탄생..... 삶은 이렇게 돕니다. 십자가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삶의 신비의 상징을 명상하는 것입니다.[213]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 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 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 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17]

 

자기가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않던 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방향 전환의 계기를 기다리는 능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225]

 

“제가 이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저걸 할 수 잇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어요.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잇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225]

 

돈이 없다는 건 느꼈지만 가난하다는 느낌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어요. 그 당시 사람들, 좀 좋았어요? 나는 그 당시에 프로베니우스를 발견했어요. 문득 이 양반이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나는 프로베니우스가 쓴 것은 모조리 읽겠다고 결심했어요.[225]

 

우리는 이제 혼자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다. 시대의 영웅들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주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 -조셉 캠벨-[229]

 

사람의 행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229]

 

출산은 영웅적인 행적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니까요. [231]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 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탐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233]

 

의식은 어떻게 변모합니까?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234]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 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239]

 

하지만, 12세기와14세기의 전염병 구덩이에서도 사람들은 살아왔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 양식은 우리의 것 보다 훨씬 더 활동적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지요. 우리 문명권에서 중년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겁니다.[241]

 

우리 좌식생활권 사람들에게는 지적인 흥분이 다소 있거나 있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몸은 그렇지 못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루에 얼마, 일주일에 얼마 하는 식으로 의도적으로 기계적인 운동은 하지요. 나 자신은 별로 즐기기 않지만, 하여튼 이런 현상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젠가 육체가 우리에게, “이봐, 나라는 존재는 아주 잊어버리고 있군, 그래”, 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고인 물이 되고 말았어. 썩겠지” 하고 말입니다.[241]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아야 한다. 너무 높이 날아오르지 말아라. 너무 높이 날아오르면 태양의 열기에 네 날개의 밀랍이 놀을 터이니, 필경은 떨어지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낮게 날지도 말아라. 너무 낮게 날면 파도가 네 날개를 적실 것이야. [242]

 

과학은 바야흐로 신비주의의 차원으로 넘어 들어오고 있지요. 과학은 머지않아 신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벼랑으로 접근하고 있지요.[244]

 

벼랑이지요. 벼랑 이쪽에 있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벼랑 아래에 있는 것은 인간에게서 탐구 가능한 범위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절대로 알아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벼랑은 이 양자가 만나는 곳이지요. 삶의 바탕……. 이게 도대체 무엇이지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심지어는, 원자가 입자인지 파동인지, 아니면 이 둘을 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존재에 대한 정보가 없어요.[244]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빛의 신이 사는 이 섬에서도 인간의 비천한 의식은 그런 식으로 가능했던 겁니다. 광명이라는 존재 앞에서, “아, 쇠고기 샌드위치나 좀 먹었으면 좋겠다. 고 하는 사고방식, 이게 얼마나 참람한 겁니까? 그 광명을 내적으로 체험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그것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거나, 읽을 능력이 없었던 겁니다.[247]

 

동화는 어린이들의 신화예요. 간 나이에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신화가 있어요. 나이를 먹게 되면 튼튼한 신화가 필요해집니다. 기독교의 근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 이야기는 물론 영원성이 시공의 마당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253]

 

좋은 코치는 선수에게, 팔은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 다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등의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아요. 좋은 코치는 선수가 달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잇다가 선수의 천성적인 동작 양식만 조금 수정해줍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 는 식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예술가들도 제자를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게 좋은 스승이 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은 던져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들려줄 스승이 없으면 스스로 창안한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자기에게 어울리는 바퀴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지요.[263]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263]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이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270]

 

나는 ‘내적 원동력’ 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최고’ 는 저위에 있지만, 그 의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잖아요? 저 위에 있는 늙은이는 바람에 날려가고 없어요.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동양의 영적인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자신 있게 “ 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 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271]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 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272]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안 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 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런다면 그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272]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즌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아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273]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라도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 일, 중요한 일은 역시 혼다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소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도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273]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 있는데도,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꼼짝 못하게 합니다.[273]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본’ 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 지도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276]

 

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짐작케 해주는 좋은 기준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개인차가 엄청나게 납니다. 사람들 중에는 대기만성형이 있어서 아주 늦게야 빛을 보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 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게 해복을 관찰하는 데는 야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287]

 

여자가 물속에 있다는 것은, 결혼을 통하여 여자가 합리적. 의식적인 세계에서 무의식의 강박 충동의 세계로 들어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수중 여행 모티프는 거의 다 이런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지요. 결국 개성이 의지로 통제가 가능한 영역에서 초개성적인 충동의 영역으로 함몰된 상태를 말합니다.[290]

 

모험 자체가 모험에 대한 보답이고말고요. 하지만 모험이라는 것은 위험해요. 모험에는 가능성도 있고 부정적인 가능성도 있는데, 둘 다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살면서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명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 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 않아요.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 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296]

 

‘자비’ 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 는 뜻입니다. 물론 자비는 고통을 해소시킵니다.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곧 삶이라는 인식을 통해서, 그래요 ……. 해소시킵니다.[296]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297]

 

고통의 원인은 당신에게 있다. 당신이 그 고통을 비롯하게 되게 했다. 이런 믿음을 갖게 했어요.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면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 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 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도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298]

 

부처는 “인생은 고해”라고 했고 조이스는 “인생이라는 게 우리가 이 세상에 흔적을 남겨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298]

 

탓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밖에 없어요. ‘카르마’라고 하는 인도의 개념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마 도움을 줄 겁니다. 이 개념 풀이에 따르면, 우리 삶은 우리가 지은 업의 열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밖에는 탓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298]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은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예수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 합니다. 블레이크는, “지각의 문전이 깨끗하면 만물이 그 자체로 영원하다는 것을 보아 낼 수 있다” 고 씁니다.[301]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통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북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보통 사람, 보통 여자, 보통 아이 같은 걸 도부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302]

 

가슴 ‘차크라’ 라고 하는 것은 가슴과 관련된 상징적 중심이지요. 차크라 ‘원’ 혹은 ‘영원’ 이라는 뜻이지요.[320]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뱐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깨달음에 이르는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336]

 

에로스적 사랑은 생물학적 충동에서 나와요. 즉 이성에 대해 몸으로 충동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개인적인 요소, 개성적인 요소는 개입할 여지가 없지요.[341]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식의 영적인 사랑이에요. 이웃이 누구이든 전혀 상관없이 사랑해야 하니, 이것도 개인적인 것일 수 없지요.[341]

 

아모르적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랑입니다. 이 아모르적 사랑은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듯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지요. 말하자면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경험입니다.[343]

 

트리스탄은 자기의 사랑은 죽음보다, 고통보다, 이 세사의 어떤 것보다 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삶의 고통을 대단히 대승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지요. 그러니까 지옥에서 영원히 벌과 저주를 받는 한이 있어도 사랑의 고통을 선택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347]

 

사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간은 인생에서 고귀한 순간이지요.[349]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349]

 

“ 이거야말로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달게 버틸 수 있다.[349]

 

여기에서 중세 기사가 섬기던 다섯 가지 미덕을 소개할 필요가 있겠군요. 첫째는 절제, 둘째는 용기, 셋째는 사랑, 넷째는 충성, 다섯째는 예의 바름입니다. 예의 바름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단정하게 처신하기를 이르는 겁니다.[351]

 

사랑을 수용할 만한 다정한 가슴은 곧 ‘자비’를 수용할 만한 마음인 것이지요.[353]

 

사랑은 내 앞에 있는 것이군요. 아모르는 내 앞에 있는 길이기 때문에 눈과 눈이…….

그거지요. 바로 눈과 눈의 만남인거지요. 그래서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은 가슴을 얻는 거지요.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이 가슴을 얻는 것은, 눈이 늘 가슴을 염탐하기 때문인 거지요.[355]

 

눈과 눈이 만나는 순간의 짜릿함, 그 후에 찾아오는 고통의 순간…….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이지요. 그러나 음유시인들은 사랑의 고통, 의사가 낫게 할 수 없는 고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받는 상처를 찬양했지요. [355]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 전설의 상징적인 의미인 것이지요.[358]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이참 삶인 겁니다.[359]

“ 모든 행동은 좋게도 결과하고 나쁘게도 결과하느니......

우리 삼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는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359]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366]

 

테이레이시아스가 어느 날 숲길을 걷다가 서로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말하자면 사랑에 빠져 있는 한 쌍의 뱀을 봅니다. 물론 장님이 되기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테니레시아스는 여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는 여성인 채로 몇 년을 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숲길을 걷다가 서로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한 쌍의 뱀을 봅니다. 여성인 테이레시아스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또 지팡이로 둘을 갈라놓습니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는 남성으로 되돌아오지요.[366]

 

올림포스 산에서 제우스는, 사랑에 빠지면 남자가 더 좋아한다느니 여자가 더 좋아한다느니 하는 문제를 놓고 아내 헤라와 가벼운 입씨름을 벌입니다. 그러니까 제우스는 사랑에 빠지면 여자가 더 좋아한다고 우기고, 헤라는 여자가 더 좋아하는 게 아니고 남자가 더 좋아한다고 우기는 겁니다. 답이 나올 리 없지요. 제우스는 여자가 되어 본 적이 없고, 헤라는 남자가 되어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지요. 듣고 있던 누군가가, “그럼 테이레시아스에게 물어보지요.” 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우스는 누군가를 보내어 테이레시아스를 불러오게 하고는, 사랑에 빠지면 남자가 더 좋으냐, 여자가 더 좋으냐, 하고 물어 봅니다. 테이레시아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 사랑에 빠지면 여자가 아홉 배쯤 더 좋아하지요.[367]

 

눈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모르폴로지, 즉 사물의 근분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367]

 

결혼을 하고도 다른 이성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는 일도 있습니다. 여기에 반응하지 못 한다면 결혼 관계에서 사랑의 생명력을 체험하는 것을 둔화시키는 이도 있을 수 있겠지요.[369]

 

사랑에는 면역성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을 어떤 관게에 면역되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훌륭한 연애 관계, 내가 말하는 건 진짜 근사한 연애 관계를 말합니다만, 그런 걸 가지면서도 동시에 결혼 관계에 성실할 수 있느냐 하면, 나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봐요.[369]

 

성실한 태도가 분산되니까요. 그러나 결혼 관계에 성실하게 임한다고 해서 이 성실 자체가 다른 데 대한 애정, 이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금지 시키지 않지요.[369]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조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373]

 

“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경험을 하지요. 즉 인간의 차원보다는 훨씬 위대한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375]

 

내게는 삶의 경이에 대한 경험이 있어요. 내게는 대한 경험이 있어요. 나에게는 증오의 경험도 있고, 남의 턱주가리를 부셔놓고 싶다는 악의의 경험도 있어요. 상징의 이미지화와 관련된 관점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내 마음속에서 기능하는 서로 다른 힘들입니다.[377]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수준의 생각이든 명상에서는 가능합니다. 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별로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돈에 관해서 명상하는 것도 좋은 명상으로 칩니다.[378]

 

기도는 신비에게 말을 걸고 명상하는 행위이지요.[378]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오래 명상을 경험하고 나오면 말이지요. 자기의 모든 것을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주어버립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이지요.[382]

 

결혼반지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는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상징’ 이라는 말은 ‘둘은 서로 엮는다’ 는 뜻입니다. 하나의 반쪽과 또 하나의 반쪽이 서로 엮이어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반지를 보세요. 완벽한 원형이지요? 이 반지를 보고 있으면 원이라 게 두 반원이 역이어 하나가 되었다는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보는 결혼입니다. 둘로 이어진 더 큰 하나, 여기에서 나의 개인적인 삶이 생겨납니다. 결혼반지는, 우리는 원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상징합니다.[391]

 

흔히들 천국과 지옥을 영원하다고 하지요. 천국은 끝나지 않는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여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가고 하는 곳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어요. 불교에는,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이 세상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이 있어요.[405]

 

나는 인생에 목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412]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주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 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412]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414]

 

이 세상 도처에 있는 언어의 신비를 드러내는 소리에''(AUM) 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소리의 의미를 깨달으면 밖으로 나가 다른 것을 위해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가만히 앉아서 이 소리를 정관하고, 경험하고, 알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절정 경험일 테니까요.[414]

 

‘옴’은 우리 귀가 들을 수 있는, 만상이 체현하는 우주 에너지의 소리입니다. 먼저 목구멍으로 아! 소리를 내고, ‘오’라는 소리를 입안에 가득 채웠다가, ‘음’하면서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이 소리를 제대로 내면 모든 모음이 이 소리의 발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한번 해보세요, “옴”! 자음은, 모음의 소리를 끊는 일밖에는 못합니다. 모든 형상이, 궁극적인 ‘형상’의 단편에 지나지 못하듯 모든 말 또한 이 ‘옴’의 단편에 지나지 못 합니다. ‘옴’은 소리 나는 것. 곧 우주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소리입니다.[414]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데 있는 것이지요.[415]

 

 

내가  저자라면 

책의  주제와 구성 

 책은  신화학자 죠셉 캠벨과 CBS 뉴스와 PBS (사회교육  방송)  통해 시청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모이어스의 대담으로 엮어진  책이다. 질문과 대답 형태의 글은 군더더기가 없이 시험 보기 전 중요한 부분을 골라 정리 해 놓은 요점 정리장 같은 느낌이었다. 예를 들면 아직 신화에 대한 그의 깊이 있는 사상에 빠져들지 못하고 신화를 왜 이렇게 중요시 하고 연구 했는지 알아가는 과정이 안개 속처럼 답답했다. 이 전에 신화는 제우스나 헤라, 사랑의 신 큐피도 정도만 알았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었는데 말이다. 빌스모아 친구 중 나 같은 사람이 빌스모아에게 이렇게 묻는다. “자네 왜 신화라는 것에 그렇게 홀딱 빠졌는가?” 죠셉 캠벨이 하는 말에 도대체 무엇이 있나?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빌스모아의 대답은신화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말을 건단 말이야. 신화라고 하는 게 말이지. 내가 혼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 그러면서도 내가 진실일 거라고 믿던 것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단 말이야. 하고 대답했다.[83]

이렇게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을 구체적으로 알아가게 되는 과정이 이 책이 주는 힘이었고 신화에 대한 캠벨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종교와 인생에 대한 통찰과 연결시킨 명상서 같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내면으로의 여행을 하는 시간을 갖을 수 있었다.

그가 연구한 광범위한 신화들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너무 우주적이고  그 폭이 넓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었지만 앞으로 만나게 될 그의 책들에서 좀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지는 않을까 남겨둔 부분들도 있었다.

1장과7장에서 장을 뛰어 넘어 같은 내용이 흩어져 있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아직도 안개 속을 운전하는 운전자의 시아처럼 여러 갈래의 길 중 내가 가야할 길을 찾아 분석해 적어 보기는 여려웠다. 여러 번 가본 길은 어떤 장애에도 느낌으로 찾아 갈 수 있는 것처럼 그를 여러 번 만나봐서 그가 터 놓은 길을 확실히 이해하고 편안하게 갈 수 있는 것이 숙제처럼 남아있다.

  마음을 사로잡은 글귀들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는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제대로   상대와 결혼애야 우리는 육화(肉化)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상대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상대를 고를  있는  것입니까?”

“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31]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347] 

사랑은   앞에 있는 것이군요. 아모르는   앞에 있는 길이기 때문에 눈과 눈이…….

그거지요. 바로 눈과 눈의 만남인 거지요. 그래서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람은  가슴을 얻는 거지요.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이 가슴을 얻는 것은, 눈이   가슴을 염탐하기 때문인 거지요.”[355]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수준의 생각이든 명상에서만  가능합니다. 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별로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라서 돈에 관해서 명상하는 것도  좋은 명상으로 칩니다.[378]

 책의  핵심은 메시지이다. 신화를 통해 우리  인류에게 주고 싶은 이야기, 또는 교훈을  준다. 신화가  삶이고 삶이   신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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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04.05 18:45:51 *.30.254.28
황진이 흉내를 내는 것을 보면, 은주는 이미 손아귀에 '용'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것 같다..연구원의 길을 가면서 '갇혀 있는 용'...제대로 함 잘 가지고 놀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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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 선
2010.04.05 23:01:59 *.106.7.10
캠벨 아저씨가 이야기하는 신화는 결국 내 안에 있는 힘을 온전히 꺼내야 하는 것.
이미 언니는 스스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이 느껴져 ^^
올 한해 조용히 명상하는 연니를 따라 명상을 열심히 배워봐야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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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2010.04.06 10:20:58 *.236.3.241
부족한 시간에도 늘 일정한 성과물을 내놓는 우리 은주 누님^^

우리  행복해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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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연주
2010.04.08 00:46:33 *.68.10.114
캠벨의 책은 내면으로의 여행을 도와주는 책이죠....
캠벨에게서 명상의 팁을 발견하는 일도 즐거움중의 하나인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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