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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31일 08시 27분 등록
저자.
이순신(李舜臣, 1545 ~ 1598)
본관 덕수. 자 여해. 시호는 충무. 조선시대 임진왜란당시, 일본군을 물리는데 큰 공을 세우다. 옥포대첩,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에서 승리. 

1572년(선조 5년)무인 선발시험(훈련원) 별과에 응시.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져서 실격된다. 32세 병과로 급제하고 첫 관직에 오른다. 1586년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해 백의종군한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이 되고,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 진도군수 등을 지낸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 군비 확충에 힘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척을 격파. 사천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 같은 해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오른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고, 전쟁은 소강상채로 접어든다. 이 틈에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 민생을 돌보는데 힘쓴다. 

1597년(선조 30년) 일본은 가토 기요마사 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생포하라는 계략을 꾸민다.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출동하지 않는다.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한다. 사형에 처해질뻔 했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한다. 권율 밑에서 두 번째로 백의종군한다. 

후임 원균은 칠천해전에서 참패하고 전사한다.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으로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여 대승한다. 1598년 선조 31년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한다.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뛰어나, 난중일기와 시조, 한시등 작품을 남겼다. 유품중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 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 3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노승석
난중일기 전문가. 순천향대 이순신 연구소 교수. 난중일기 완역본을 펴냈고, 2008년에는  난중일기 중 알려지지 않은 32일분의 충무공유사일기초를 발견했다. 새로 발견된 일기에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하거나 권율과 원균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한 부분도 있다. 지금까지 나온 이본을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을 해낸다. 초서 해독 전문인 노승석 교수는 2004년 국가가록 유산 정보화 산업에 참여. 난중일기 초고본을 판독할 기회를 얻는다. 그동한 미해독된 글자들을 모두 해독하고, 기존 판본의 인명과 지명 등 오류 100여 곳도 바로잡았다.  번역서로, 교감완역 난중일기, 충무공유사, 충무공사료집성, 단양한시선, 난중일기 완역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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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저자라면.
최초로 완역된, 난중일기다. 기존 판본에서 오역됐던 부분도 새로 수정했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발발 석 달 전인 임진년1592 1월1일 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무술년1598 11월 17일까지 쓴 종군기록이다. 긴박한 전장에서 초서로 흘려쓴 기록이기에 정확한 해독에 어려움이 있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매일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순신은 당시의 내용만큼이나, '기록한다'는 행위에도 의미를 가진것 같다. 별 다른 일상의 반복이라해도, 기록을 빼먹은 날이 없다. '날씨, 그날 주요 일과'가 기록의 전부다. 단 한 줄이라도 매일 기록한다. 당시의 기록이 오늘날에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장사를 하면서, 영업일지를 적는다. 몇 번 테이블에 손님이 무엇을 먹고, 어떤 반응과 태도로 먹었는 지 기록한다.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과 내 감정이 어떠했는 지도 알 수 있다.  멀게는 고교때 일기장에서 부터, 군대시절 몰래 적은 일기, 직장다니면서 쓴 메모, 책들을 초서한 노트들. 

기록을 하기 위해서 깨어있었고, 기록하는 그 순간은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한순간도 온전하게 몸과 마음과 정신이 일치하기 어려운 존재다. 사람의 속성은 '흩어짐'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중자체가 목표다. 기록은 정신집중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기록이 많을수록, 집중력도 강해진다. 기록은 노력과 시간의 구체적인 결과물이다.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일상을 기록한다. 일상의 의미는 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삭혀야 한다. 보고 또 보면 기록은 무르익는다. 

가족을 기록한다. 아이가 글을 읽고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성장일기를 선물해준다면 아이는 어떤 마음을 가질까? '나는 소중하다'라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나는 소중하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천지차이다. 자존감은 강력한 하드웨어로서 아이에게 장착된다. 하드웨어가 없으면, 소프트웨어로 살아야 한다. 고달프다. 

업을 기록한다. 

나를 기록한다. 3년 전, 4년 전의 메모를 보면, 나는 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걱정과 문제가 없어졌다. 분열된 자아는 통합된다. 받아들임 전에 필요한 것은 인식이다. 나에 대한 기록은 나에 대한 통찰력을 준다. 난 그 걱정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상태는 호전되지 않고 있다. 기록은 내 상태의 바로미터다. 내가 어떤 상황인지 기록을 하면, 가늠할 수 있다.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정성껏 기록한다. 기록 만큼 중요한 것은 정리이다. 잘 정리되지 않은 기록은 다시 보기도 싫고, 재활용하지 못한다. 기록으로서 의미가 없는 기록이다. 보고 또 보아야지 기록은 성장한다. 기록을 도와주는 보조도구도 많다. 다양한 디지털 기기들이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디카, 캠코더등을 다룰 수 있고, 편집해서 여러 매체로 다양하게 출력할 수도 있다. 아마도 나는 기록에 욕구가 있는가 보다.  기록하는 사람인가 보다. 노트를 좋아하는데, 내가 삶에 성과를 올렸을 때를 떠올리면 노트에 정성껏 기록했을 때이다. 한때, '노트 정리법' 같은 방법을 탐독한 적도 있다. 

대학교 시절,  카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을 읽고 현지를 답사한 비디오를 가지고 있다. 가끔 일본 손님들이 가게에 오면, 당시 경험이 도움이 된다. 외국인이 자기 나라 소설가의 책을 읽고, 현지를 다녀왔다는 사실은 감동적이다. 기록자체도 도움이 되지만, 기록을 하기 위한 행위는 유익한 경험을 만든다. 

이순신은 전쟁뿐만 아니라, 기록에도 치열했다. 실험적으로 자기 일기를 책으로 낸 사람도 있다.(통의동에서 책을 짓다). 개인적인 내용이 많아서, 얼마나 팔렸는지는 모르겠다. 매일 기록하되, 보편성을 가진 내용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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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이순신은 항상 미리 대비하는 정신으로 생활하였다. 임진년부터 최후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진영에서 보고 들은 여러가지 사건과 문제들을 남긴 일기는 물론 나중을 위해 개인적으로 작성한 비망 기록이지만, 내용은 주로 일신一身보다는 국가와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항시 전투가 따르는 현실 속에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긴박한 전쟁 중에도 일기를 쓰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자세, 바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항상 위기에 대처했기 때문에 수십 차례의 해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11

또한 일기초에는 그간 소실로 인해 볼 수 없었던 초고본 [을미일기]30일치와 [병신일기]1일치, [무술일기]1일치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을미일기]는 지금까지 전서본만을 위지해 온 것이 주지의 사실인데, 최근에 새로 밝힌 내용 중에 당초 전서본을 만들 당시 삭제한 내용으로 추정되는 [을미일기]가 들어 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지금까지의 [난중일기]가 전쟁 상황을 위주로 한 기록이었다면, 이것은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내용을 위로 적은 것이다. 특히 상관과 동료에 대한 불만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내용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이순신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해준다. 20

10일 신축. 안개비가 오면서 개다 흐리다 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김인문이 감영에서 돌아왔다.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사(통역관)들이 뇌물을 받고 명나라에 무고하여 군사를 청하는 일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우리나라가 일본과 더불어 딴 뜻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하였으니, 그 흉포하고 패악함은 참으로 무어라 말할 수 없다. 통사들은 이미 잡아 가두었다. 해괴하고 분통함을 참을 수 없다. 54

27일 무오. 아침에 점검을 마친 뒤 북봉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외롭고 위태로운 외딴섬이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매우 엉성하니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심력을 다했지만 미처 시설하지 못했으니 어찌하겠는가. 늦게 배를 타고 경도에 이르니, 아우 여필, 조이립과 군관, 우후 등이 술을 싣고 마중 나왔다. 함께 즐기다가 해가 져 관청으로 돌아왔다. 

28일 기미.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을 쏘았다. 57

18일 정미. 아침에 흐렸다. 이른 아침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발포 권관은 이미 파직되었으니, 임시 장수를 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군관 나대용을 이날로 바로 정하여 보냈다. 미시(오후 2시경)에 영남 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함락되고, 양산, 울산 두 수령도 조방장으로서 성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패했다'고 햇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경상 좌병사와 경상 좌수사가 군사를 이끌고 동래 뒤쪽까지 이르렀다가 급히 회군했다니, 더욱 원통햇다. 저녁에 순천 군사를 거느린 병방이 석보창에 머물로 있으면서 군사들을 인도하지 않으므로 잡아 가두었다. 

19일 무신. 맑음. 아침에 품방에 해자 파는 일로 군관을 정해 보내고, 일찍 차임을 먹은 뒤 동문 위로 나가 품방의 역사役事를 직접 감독했다. 오후에 상격대上隔臺를 순시했다. 이날 입대하러온 군사 칠백 명이 점검을 받고 일을 하였다. 65

우리 나라 팔도 중에 오직 이 호남만이 온전한 것은 천만다행인데,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운송하는 것이 모두 이 도(전라도)에 달려 있고, 적을 물리쳐 국권을 회복하는 것도 이 도를 위한 계책에 달렸습니다. 본도의 감사가 재차 부임하여 나랏일에 힘쓰고, 절도사는 오랫동안 다른 도에 머물면서 군사와 말을 정선하여 부리되, 군기와 군량은 아곳으로 다 보내고, 진과 보루에 방어할 군사를 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또한 각각 반을 나누어 뽑아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군사들이 늙고 중도에서 굶주림과 추위가 한꺼번에 닥쳐와 과반수가 패주했습니다. 혹 패주하지 않는 자가 있어도 기근과 동상이 너무 심하여 사망하는 일이 연이었는데, 큰 고을의 경우는 삼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강성한 사람을 가려내 진압할 날을 정하고 출정을 독촉하니, 한 도가 소동騷動하였습니다. 게다가 소모사가 내려와서 남아 있는 군사들을 징발하고, 각 진영과 포구에 방군을 나누고 여러 고을의 수병들도 그 정한 기일 내에 뽑아서 충원하니, 한 도道가 소동하여 행할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도를 보전하기가 어려운 것은 뻔한 일이니, 길에서 통곡하고 있으며.....73

10일 을미. 아침에 흐렸으나 늦게 맑아졌다. 묘시(오전 6시경)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과 웅포에 이르니, 적선이 여전히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두 차례 유인했으나, 우리 숙ㄴ에 이미 겁을 먹고는 나올 듯하다가 돌아가 버려 끝내 잡아 섬멸하지 못하였다. 참으로 통분한 일이다. 밤 이경에 영등포 뒤 소진포로 돌아가 정박하고서 밤을 지냈다. 이에 병신일(11일) 아침에 순천 참후선이 돌아갈 예정이어서 본영에 편지를 보냈다. 79

2일 정사. 온종일 비가 왔다. 배의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속에 치밀어 올라 마음이 어지럽다. 이응화를 불러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그길로 순천 부사가 탄 배로 보내는데 병세를 살펴본다고 했다. 이영남, 이여념이 와서 원 영공의 비리를 들이 더욱더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이영남이 왜군의 작은 칼을 두고 갔다. 그때 이영남에게서 들으니 강진에 사는 두 명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고성으로 붙들려 가서 문초를 받고 왔다고 한다. 

3일 무오. 아침에 비가 왔다. 오늘은 답청절이나, 흉악한 적들이 물러가지 않아 군사들을 데리고 바다에 떠 있어야 했다. 또 명나라 군사들이 서울에 들어왔는지를 듣지 못하니, 근심스러움을 말로 다하기 어렵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86

더위가 혹심한데 삼가 실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전에 앓던 학질과 이질이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근심과 걱정이 과도하니 그 병환의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밤낮으로 그리워함에 생각하는 것조차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일찍이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탄환 맞은 자리의 통증 때문에 바로 나아가 배알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만 이제 도내의 민심을 살펴보면, 지난번에 군사를 되돌린 뒤로 군대 사정은 더욱 궤란하여 바로 징집하는 명령을 내린다 해도 모두 달아날 꾀만 낼 것을 생각하므로 혹 의병을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92

혹심한 더위에 삼가 살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삼가 사모하는 마음 간절한 따름입니다. 전날에 앓던 학질과 이질이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가뭄과 더위가 이토록 심하여 강여울도 매우 얕아져서 더욱 적을 도와주게 되었으니, 마침내 독한 왜적이 이동하여 침범하는 것은 촛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할 따름이며,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 두 번이나 안부 편지를 받고 곧바로 나아가 뵈려 하였으나 탄환을 맞은 자리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억지로라도 달려가려고 하면 증세가 헐어 뭉그러러지려고 하여 두려움에 주저하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또 인심은 이미 무너져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으니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혹 징집에 응하는 자가 있다 해도 혼자서는 나아갈 수 없는 일입니다. 95

나라를 위해 힘쓰느 일이 이제 급급한 일이지만 몸의 병이 이렇게 되었으니, 북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때면 다만 스스로 눈물을 드리울 뿐입니다. 군사를 움직이는 시기는 어느 날로 정하셨습니까. 요즘 이 도의 민심을 보니, 한번 연해 지방에 징병한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면 모두 달아날 계책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 말하는 자가 있다면, '물길을 따라가서 적을 토벌하고 자리를 옮겨 싸우러 깊이 들어가면 되돌아올 기약을 하기가 어렵다'고 하고, 또 '경상도와 인접한 땅에서 남김없이 징발한다면, 이는 곧 이 도를 왜적에게 넘겨주는 것이니, 수비하는 사람은 부모처자가 없게 되고 다시는 서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한답니다. 인심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통제하여 회합할 수 있겠습니까. 순천 부사가 힘을 다하여 사람을 취합해 보았지만 온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하니, 통분한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각 포구의 보고 내용도 이어짐이 또한 이와 같으니, 군대를 동원할 기한을 늦추고 서서히 의리로써 깨우쳐 취합해야 할 것입닏. 97

더러는 배 위에 있다고 보고하므로, 다시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동시에 뒤쫓아가 소선 두 척을 유인하였는데, 층루가 있는 대선과 여러 배들이 흔들거리며 따라오면서 소리지르고 날뛰었습니다. 또한 나각을 불게 하여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동시에 둘러싸게 하고 먼저 거북선으로 곧장 쳐들어가 연이어 천자, 지자 총통을 쏘아 그 층루가 있는 대선을 쳐부수었습니다. 적의 무리들은 형세로 보아 더 버틸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도로 당포 선창으로 들어가 육지로 내려가는데, 탄환과 화살을 쏘는 것을 바람과 비처럼 마구 날리니, 거의 다 맞아 다치고 죽은 자도 많았습니다. 먼저 왜장을 참수하고 또 그를 따르는 왜군의 목 일곱 급을 베었으며, 그들의 배도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101

2일 을유. 맑음. 아침에 본영의 공문을 작성하여 보냈다. 온양의 강용수가 진중에 와서 명함을 들여보내고는 먼저 경상도 본영으로 갔다. 판옥선과 군관 송두남, 이경조, 정사립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아침 식사 후에 순찰사의 군관이 긴급 공문을 가지고 왔다. 적의 정세를 정탐하고 돌아가는데 우수사와 상의하여 답장을 보냈다. 강용수도 왔기에 식량 다섯 말을 주어 보냈다. 원견이 같이 왔다고 한다. 정 영공이 내배에 와서 이야기하는데, 가리포 첨사 우경도 한참 동안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송아지를 잡아 나누어 먹었다. 116

9일 임진. 맑음. 수십 일 내린 궂은비가 비로소 개니, 진중의 장병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순천 부사, 광양 현감이 와서 개고기를 바쳤다. 몸이 불편한 것 같아 하루 종일 배에 누워 있었다. 접반관의 공문이 도착하여 올라오니, 제독 이여송이 충주에 다시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방의 의병 성응지가 돌아올 때 본영의 군량미 쉰 섬을 싣고 왔다. 118

7일 기미. 말금. 아침에 순천 부사, 가리포 첨사, 광양 현감이 와서 만나고, 군사 일을 논할 때 각각 가볍고 날랜 배 열다섯 척을 뽑아 견내량 등지로 보내어 탐색하기로 하였다. 위장이 거느리고 가보니 왜적의 종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거제에서 포로가 되었던 한 사람을 데려와서 왜적의 소행을 상세히 물으니, '흉적들이 우리 배의 위세를 보고 후퇴하여 돌아가려고 하였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진양이 이미 함락되엇지만, 어찌 전라도까지 넘어가겠냐'고 하였다. 이 말은 거짓말이다. 우수사(이억기)가 내 배로 와서 함께 이야기하였다. 

8일 경신 맑음. 남해를 왕래하는 사람인 조붕을 통해 '적이 광양을 친다 하여 광양 사람들이 이미 관청과 창고를 불질렀다'는 말을 들었다. 그 해괴함을 이길 수가 없다. 순천 부사, 광양 현감을 곧 보내려다가 길에서 전한 소문을 믿을 수 없으므로 그만두고, 사도 군관 김붕만을 살펴서 알아보라고 보냈다. 

9일 신유. 맑음. 남해 현령이 또 와서 전하기를, '광양, 순천이 이미 분탕당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광양 현감, 순천 부사 및 송희립, 김득룡, 정사립등을 내보냈고, 이설은 어제 보냈다. 이 소식을 듣자니 뼛속까지 아파 와 말을 할 수 없었다. 우 영공(이억기)및 경상 영공(원균)과 함께 일을 논했다. 이날 밤은 바다의 달이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고 물과 하늘이 일색을 이루었다.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어와 홀로 뱃전에 앉았는데,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삼경 말에 본영이 탐후선이 들어와서 적의 소식을 전하는데, '실은 왜적들이 아니고, 영남의 피란민들이 왜군 차림을 가장하고 광양으로 마구 들어가서 여염집을 분탕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왜적이 아니라서 기쁘고 다행임ㅇㄹ 이기지 못했다. 진양에 관한 일도 또한 헛소문이라고 하엿다. 그러나 진양의 일만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닭이 벌써 울었다. 128

26일 정미.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원 수사가 왔다. 얼마 뒤에 우수사와 정 수사를 함께 만났다. 순천 부사, 광양 현감, 가리포 첨사는 곧 돌아갔다. 흥양 현감도 와서 명절 제사 음식을 대접하는데, 원 공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지껄였다. 매우 해괴하였다. 낙안 군수(신호)가 풍신수길이 명나라 황제에게 상서한 초본과 명나라 사람이 고을에 와서 적은 것을 보내왔다. 통분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27일 무신. 맑음
28일 기유. 맑음. 원수사가 왔다. 음흉하고 속이는 말을 많이 했다. 몹시 해괴하다. 
29일 경술. 맑음. 아우 여필과 아들 울, 변존서가 한꺼번에 왔다. 139

지난해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내리는 데 마음을 다했는지의 여부를 기회와 사정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면, 혹은 먼저 진격을 외쳐 서로 다투어 돌진하여 싸우게 되는 때가 되면, 사랑하는 처자를 돌아보고 살기를 탐하여 중도에서 빠지는 자가 있었고, 혹은 공로와 이익을 탐하여 승패를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다가 적의 손에 걸려 들어 마침 나라를 욕되게 하고 몸을 죽게 하는 재앙을 만든 자가 있었다. 144
 
아침에 소지와 여러 가지 공문을 작성하여 보내고, 스스로 항복해 온 왜놈을 잡아 왔기에 문초했다. 원 수사의 군관 양밀이 제주 판관의 편지와 말안장과 해산물, 귤, 유자등을 가지고 왔기에 바로 어머니께 보냈다. 저녁에 녹도의 복병한 곳에 왜적 다섯 명이 함부로 다니면서 포를 쏘기에 한 왜군을 쏘아 목을 베었다. 나머지는 화살을 맞고 달아났다. 저물녘에 소비포 군관이 왔다. 우후의 배가 재목을 싣고 왔다. 153
 
5일 갑인 맑음. 새벽꿈에 좋은 말을 타고 곧장 바위가 첩첩인 큰 산마루로 올라가니 산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이 있어 자리를 잡으려고 하다가 깨었다. 그것이 무슨 징후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서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다. 아침에 군기시에서 받아 온 흑각궁 백장을 일일이 세어 서명하고 벚나무 껍질 여든아홉 장도 셈하여 서명했다. 발포 만호(황정록)와 우우후가 와서 만나고 함께 식사했다. 늦게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순창과 광주 색리들의 죄를 벌하였다. 우조 방장 및 우우후, 여도 만호 등은 활을 쏘았다. 원수(권율)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심 유격이 벌써 화해할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은 헤아릴 수 없다. 전에도 놈들의 꾀에 빠졌었는데 또 이처럼 빠져드니 한탄스럽다. 저녁에 날씨가 찌는 듯하여 마치 초여름 같았다. 이경에 비가 내렸다. 156
 
10일 무자. 맑음. 병세가 차츰 덜했지만 열기가 치올라 찬 것만 마시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저녁에 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1일 기축. 큰비가 종일 내리다가 어두울 무렵에 갰다. 병세가 훨씬 덜하고 열도 내리니 참으로 다행이다.
 
12일 경인. 맑았지만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매우 불편했다. 영의정에게 편지를 쓰고 장계도 정서하기를 마쳤다. 166
 
25일 계묘. 맑음. 흥양 현감과 보성 군수가 나갔다. 사로잡혔던 아이가 왜의 진중에서 명나라 장수(담종인)의 패문을 가지고 왓기에 흥양 현감을 보냈다. 늦게 활터 정자에 올라갔는데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숙소로 내려왔다. 저녁에 여필, 아들 회, 변존서 그리고 신경황이 왔는데, 어머님이 평안하시다는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다. 다만 선산이 모두 들불에 타 버려 끌 사람이 없었다고 하니 몹시 애통하다. 168
 
9일 병술.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멍하기가 취중이고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176
 
비가 올 것인가 갤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내뿜은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앞으로 큰 비가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경에 발포의 탐후선이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189
 
13일 무오. 맑음. 아침에 심준이 돌아가고 노윤발도 돌아갔다. 사시에 배에서 내려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갔다. 별도로 날랜 장수들을 선정하여 춘원 등지로 보내어, 적을 정탐하여 사로잡아 무찌르도록 사도 첨사에게 전령하여 여러 배들을 보내게 하고는 그대로 머물러 잤다. 달빛이 비단결처럼 고와 바람도 파도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해海를 시켜 피리를 불게 했는데 밤이 깊어서야 그쳤다. 197
 
29일 갑술. 맑았으나 북풍이 크게 불었다. 아침에 마량 첨사, 소비포 권관이 와서 함께 밥을 먹었다. 늦게 활터 정자로 옮겨 앉아 공문을 작성하여 보냈다. 도양의 목자 박돌이를 처벌했다. 도둑 세 명 중에 장손은 곤장 백 대를 치고 얼굴에 '도盜'자를 새겨 넣었다. 해남 현감이 들어왔는데, 의병장 성응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참으로 슬프다. 200
 
1일 을사. 새벽에 출발하여 장포문에 이르니 경상 우수사, 전라 우수사가 장문포 앞바다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충청 수사 및 선봉의 여러 장수들과 함께 곧장 영등포로 들어갔다. 흉악한 적들은 바닷가에 배를 매 두고 한 명도 나와서 항전하려 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에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와서, 사도의 2호선이 육지에 배를 매려 할 때, 적의 작은 배가 곧장 들어와 불을 던졌다. 불이 비록 일어나지 않고 꺼졌지만, 매우 분통하였다. 우수사의 군관 및 경상 우수사의 군관은 그 실수를 약간 꾸짖었지만, 사도의 군관에게는 그 죄를 무겁게 다스렸다. 이경에 칠전량으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208
 
하나, 순변사 이일이 [병사들의 소속을 거의 다 바꾸어]명령이 내려진 날에 검사 받을 모병 소속 군사들이 각자 집에 물러가 있다가 적들이 근경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시에 달려와 모였다고 합니다. 연해의 수군의 원수 소속 병사들은 어찌하여 잠시 한때의 안일함에 거의 다 내던져 맡기는 것입니까. 해당 관리에게 이를 감독하게 하였지만, 순변사가 연해에 머물러 있으면서 잡아가지 못하게 하니 일마다 이와 같은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221
 
26일 기해. 맑음. 영광 군수가 나갔다. 늦게 신호(박종남) 두 조방장 미치 우후와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저녁에 배 수사, 이운룡, 안위가 와서 새 감사 맞이할 일을 고하고, 사량으로 갔다. 이경에 동쪽이 어둡다가 밝아지니, 무슨 상서로운 조짐인지 모르겠다. 239
 
15일 정해. 궂은비가 개지 않아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새벽꿈이 몹시 심란했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신지 소식을 듣지 못한 지가 벌써 이레나 되니 몹시 애가 타고 걱정이 된다. 또 조카 해가 잘 갔는지 모르겠다. 아침 식사 후에 나가 공무를 보니, 광양의 김두검이 복병으로 나갔을 때 순천과 광양의 두 수령에게서 이중으로 월급을 받은 일 때문에 벌로써 수군으로 나왔는데, 칼도 안 차고 또 활도 안 차고서 무척 오만을 떨기에 곤장 일흔 대를 쳤다. 늦게 우수사가 술을 가지고 와서 몹시 취하여 돌아갔다. 247
 
경상 우병사에게 유지가 왔는데, '나라의 재앙이 참혹하고 원수가 사직에 남아 있어서 귀신의 부끄러움과 사람의 원통함이 온천지에 사무쳤건만, 아직도 요사한 기운을 재빨리 쓸어 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한 하늘을 이는 분통함을 모두 절감하고 있다. 무릇 혈기 있는 자라면 누가 파를 걷고 절치부심하며 그놈의 그 살을 찢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경은 적과 마주하여 진을 치고 있는 장수로서 조정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도리에 어긋난 말을 지꺼링는가. 또 누차 사사로이 평지를 보내어 그들을 높여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고 수호, 강화하자는 말을 하여, 명나라 조정에까지 들리게 해서 치욕을 끼치고 사이가 벌어지게 했음에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도다.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려도 아까울 것이 없거늘, 오히려 관대히 용서하고 돈독히 타이르며 경고하고 책망하기를 분명히 하였다. 258
 
19일 정사. 맑음. 아침 식사 후에 나가 공무를 보고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다. 다 먹인 뒤 제찰사가 떠나고, 나도 배로 내려왔다. 바람이 몹시 사나워 배를 몰 수 없었다. 그대로 머물러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20일 무오. 맑음. 바람이 세게 불었다.(이후 21일부터 30일까지 빠져 있음)283
 
7일 갑술. 맑음. 이른 아침에 이영남과 좋아지내는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권숙이 치근거리기에 피해 왔는데, 바로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늦게 권 수사와 우후, 사도 첨사, 방답 첨사가 오고 권숙도 왔다. 미시에 견내량의 복병장인 삼천포 권관이 급히 보고하기를' 항복한 왜인 다섯 명이 부산으로부터 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안골포 만호 우수, 공태원을 뽑아 보냈다. 날씨가 몹시 춥고 서풍이 매섭게 불었다. 287
 
24일 신유 맑음. 식후에 나가 공무를 보고 둔전의 벼를 다시 되는 것을 감독했다. 우수사가 들어왔다. 신시에 비바람이 크게 일었다. 둔전의 벼를 다시 된 수량 백일흔 섬을 곳간에 들이니, 줄어든 것이 서른 섬이다. 낙안 군수(선의경)가 교체되었다는 기별이 왔다. 방답 첨사와 흥양 현감이 와서 모였다. 배를 본영으로 보내려 했는데 비바람이 심해 그만두었다. 밤 내내 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몸이 노곤했다. 301
 
24일 신묘. 맑음. 새벽에 미역을 따러 나갔다. 헌 활집은 베로 만든 것이 여덟 개, 솜으로 만든 것이 두 개였는데, 그중 활집 하날ㄹ 고쳐 만들라고 내주었다. 아침 식사 후에 나가서 공무를 보고 마량 첨사 김응황, 파지도, 권관 송세웅, 결성 현감 손안국등을 처벌했다. 늦게 우후가 가져온 술을 방답 첨사, 평산포 만호, 여도 만호, 녹도 만호, 목포 만호 등과 같이 마셨다. 나주 판관 어운급에게는 휴가를 주어 내보냈는데, 4월15일까지 기한을 정하기로 기약하였다. 저물녘 몸이 몹시 피곤하고 수시로 땀이 흐르니 이 또한 비가 올 징조다. 309
 
15일 신사.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우수사는 오지 않았다. 식후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들으니 한산도 뒤의 상봉에서 다섯 섬과 대마도를 볼 수 있다고 하기에 혼자 말을 달려 올라가 보니 과연 다섯 섬과 대마도가 보였다. 해가 저물자 작은 냇가로 돌아와 조방장과 거제 현령과 함께 점심을 먹고 날이 저물어서야 진영으로 돌아왔다. 어두워져 따듯한 물에 목욕하고서 잤다. 바다 위의 달빛은 분명한데 바람 한 점 없었다. 319
 
13일 무인. 맑음. 명나라 사신을 따라 갈 배신들이 탈 배 세 척을 정비하여 사시에 보냈다. 늦게 활 열세 순을 쏘았다. 어두울 무렵 항복해 온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많이 벌였다. 장수된 자로서 좌시할 일은 아니었지만, 귀순하여 따르는 왜인들이 마당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금하지 않았다. 329
 
9일 기사. 맑음. 동네 사람들이 각기 술병을 갖고 와서 멀리 가는 이의 심정을 위로해 주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몹시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홍군우는 창을 하고 이 별좌도 창을 하였다. 나는 창을 들어도 즐겁지 않았다. 금부 도사는 술을 잘 마시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356
 
21일 신사. 맑음. 일찍 출발하여 은원에 이르니, 김익이 우연히 왔다고 한다. 임달영이 곡식을 사 오려고 배로 은진포에 왔다고 하는데, 그의 행적이 매우 괴상하고 거짓되었다. 저녁에 여산 관노의 집에서 잤다. 한밤중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 358
 
5일 을미. 맑음. 새벽꿈이 매우 어지러웠다.아침에 부사가 와서 만났다. 늦게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도로부터 와서 원 공의 흉포하고 패악함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이탈하여 반역한지, 그 형세가 장차 어찌 될지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되는 천애의 떠ㅏㅇ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받는 것인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에도 같은 것이 없을 터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362
 
16일 을해. 맑음. 종일 혼자 앉아 있었는데 와서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들 열과 이원룡을 불러 책을 만들어 변씨 족보를 쓰게 했다. 저녁에 이희남이 한글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 '병사가 보내 주지 않는다'고 했다. 변광조가 와서 만났다. 아들 열은 정상명과 함께 큰 내로 가서 전마를 씻겨 가지고 왔다. 376
 
15일 갑진. 비가 오다 개다 했다. 늦게 조신옥, 홍대방 등과 여기 있는 윤선각까지 아홉 명을 불러서 떡을 차려 먹였다. 가장 늦게 중군 이덕필이 왔다. 저물어서 돌아갔다. 그를 통해 우리 수군 이십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분통하였다. 제어할 방책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 저녁비가 크게 내렸다. 
 
16일 을사. 비가 오다 개다 하면서 끝내 흐리고 맑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에 손응남을 중군에게 보내어 수군의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돌아와서 중군에 대한 말을 전하기를 '좌병사의 긴급 보고를 보았더니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자세히 말하지 않더라고 하였다. 한탄스러운 일이다. 늦게 변의정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는데, 그 꼴이 형편 없어 어리석고 용렬해 보였다. 궁벽한 촌에 사는 사람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을 지켜서 형세상 그렇게 된 것이리라. 이 역시 소박하고 순후한 모습이다. 이날 낮에 이희남에게 칼을 갈게 했는데, 매우 예리하여 적장의 맨머리를 벨 수 있을 것이다. 소나기가 급히 쏟아졌다. 아들 열이 떠나가는데 고될 것을 많이 걱정하여 침묵의 걱정이 그치지 않는다. 저녁에 영암군 송진면에 사는 사노 세남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기에 연유를 물으니, '7월 4일에 전 병사의 우후가 타고 있던 배의 격군이 되어 5일에 칠전량에 이르러 정박하고, 6일 옥포에 들어왔다가 7일에는 날이 밝기 전에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이르니, 왜선 여덟 척이 머물러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바로 돌격하려는데, 왜인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뭍으로 올라가고 빈 배만 걸려 있어, 우리 수군이 그것을 끌어내어 불을 지르고, 그길로 부산의 절영도 바깥바다로 향하였습니다. 때무침 무려 천여 척의 적선을 만나 대마도에서 건너와서 서로 싸울 것을헤아려 보니, 왜선이 어지러이 흩어져 회피하므로 끝내 잡아 초멸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탄 배와 다른 배 여섯 척은 배를 제어하지 못하고 서생포 앞바다까지 표류하여 뭍으로 오르려고 할 즈음에 모두 살육을 당하고, 저만 혼자 수풀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목숨을 건져 간신히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믿는 바는 오직 수군이 있었는데, 수군이 이와 같으니 또다시 가망이 없을 것이다.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또 선장 이엽이 왜적에게 붙잡혔다니 더욱 통분하다. 손응남이 집으로 돌아갔다. 
 
17일 병오. 비가 간간이 내렸다. 아침에 이희남을 황 종사관에게 보내 세남의 말을 전했다. 늦게 초계 군수가 벽견산성에서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송대립, 유황, 유홍, 장득홍 등이 와서 만나고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변대헌, 정운룡, 득룡, 구종 등은 초계의 아전들인데 어머니 족성의 같은 파 사람으로서 와서 만났다. 큰비가 종일 내렸다. 성명을 적지 않은 고신을 신여길이 바다 가운데서 잃어버린 일로 심문 받으로 갔다. 경상 순변사가 그 기록을 가져갔다. 
 
18일 정미. 맑음. 새벽에 이덕필,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스블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이, 충청수사 및 여러 장수들이 다수의 피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듣자 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얼마 뒤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되,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사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말했더니, 원수가 기뻐하기를 마지않았다. 나는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니, 새로 부임한 수령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치겸도 와서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19일 무신. 종일 비가 내렸다. 오는 길에 단성의 동산산성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니, 매우 험하여 적이 엿볼 수 없을 것이다. 그대로 단성현에서 유숙했다. 
 
20일 기유. 종일 비가 계속 내렸다. 아침에 권문임의 조카 권이청이 와서 만나고 수령도 와서 만났다. 낮에 진주 정개산성 아래에 있는 강가 정자에 이르렀다. 진주 목사가 와서 만났다. 굴동 이희만의 집에서 잤다. 
 
21일 경술 맑음.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가 고을에 있고, 백성들은 대부분 농사에 힘써서 혹은 이른 벼를 거두기도 하고, 혹은 밀보리 밭을 갈기도 하였다. 점심을 먹은 뒤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여남은 명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으며 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 수사는 도망가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한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올라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 다 말할 수 없고 그 사라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현령과 사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22일 신해. 맑음. 아침에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한 일을 많이 말했다. 식후에 남해 현감 박대남이 있는 곳에 이르니, 병세가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전마를 서로 바꾸자고 다시 이야기했다. 종 평세와 군사 한 명을 데려오겠다고 했다. 오후에 곤양에 이르러 몸이 불편하여 그대로 잤다. 
 
23일 임자.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아침에 노량에서부터 만든 공문을 송대립에게 주어 먼저 원수부에 보냈다. 뒤따라 출발하여 곤양 십오리원에 이르니, 배백기(흥립)의 부인이 먼저 와 있었다. 말에서 내려 잠깐 쉬고 진주 운곡의 전에 유숙했던 곳에서 잤다. 백기도 와서 잤다. 391
 
28일 병술. 맑음. 묘시에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 않게 돌입하자, 우리의 여러 배들은 겁을 먹고 후퇴하려는 계획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도 동요하는 빛을 띠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하게 하니, 여러 배들은 회피하지 못하고 일시에 적선을 추격하여 갈두까지 나갔다. 그러나 적선이 멀리 도망쳤기에 끝까지 뒤쫓지는 않았다. 뒤따르는 왜선이 오십여 척이라고 했다. 저녁에 장도에 진을 쳤다. 412
 
15일 계묘. 맑음.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하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416
 
1일 무오. 맑음. 아들 회를 보내서 제 어머니도 보고 여러 집안 사람의 생사도 알아오게 하였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여 편지를 쓸 수 없었다. 병조의 역자가 공문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아산 고향 집이 이미 적에게 분탕질을 당해 잿더미가 되고 남은 것이 없다고 전하였다. 
 
2일 기미. 맑음.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는데 잘 갔느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하랴. 
 
3일 경심. 맑음. 새벽에 배를 출발하여 법성포에 돌아왔다. 
 
4일 신유 맑음. 여기서 머물러 잤다. 임선과 임업이 사로잡혔다가 적에게 빌어 임치로 돌아와서 편지를 보내왔다. 
 
5일 임술. 맑음. 그대로 머물게 되어 마을 집으로 내려가 잤다. 
 
6일 계해. 흐리고 가끔 비가 왔다. 진눈개비가 내렸다. 
 
7일 갑자 바람이 순하지 않고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소문에 호남 안팎의 적의 자취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한다. 
 
8일 을축. 맑고 바람도 약했다. 배를 띄어 어외도에 가서 잤다. 
 
9일 병인. 맑음. 일찍 출발하여 우수영에 이르니, 성 안팎의 인가가 하나도 없고, 사람의 자취도 없어서 보기에 비참하였다. 저녁에 해남의 흉악한 적들이 머물러 진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초저녁에 김종려, 정조, 백진남등이 와서 만났다. 421
 
6일 무오. 맑았으나 서북풍이 세게 불었다. 도원수(권율)가 군관을 보내 편지를 전하는데, '유 제독(유정)이 달아나려고 한다.'고 했다. 통분할 일이다. 나랏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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