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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29일 10시 15분 등록

 

1부 저자에 대하여

동양 신화를 바라보는 캠벨은 어떠했나..?

글쎄..

 

이 책의 구성을 보면 인도신화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이 중국 신화. 상대적으로 일본신화가 좀 더 적고, 티벳 불교로 넘어가면 조금은 뜬금없이 중국의 티벳 불교 강점에 대한 이야기만 나열된다.

 

아무래도 동양에 대한 캠벨의 지식은 대체적으로 인도에 그 줄기를 닿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극동지역은 여전히 서구 사상가 혹은 학자들에게 조금 먼 곳이어서 일까..?

그러다보니 한국 이야기는 일본에 전승한 민족으로서의 한 두 줄을 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인인 내게는 많은 아쉬웠던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정리하자면 캠벨의 동양신화는 그 무대 배경을 거의 인도신화 혹은 사상에 두고 펼쳐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인도가 동양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근원지임은 틀림없지만, 아무래도 캠벨이 서구 사상을 휘모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동양신화를 다루지 못하는 것은 나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의 경우, 이 책을 통해 극동사상보다 어렵게 느껴졌던, 인도 사상에 보다 한 걸음 더 들어서게 된 것이 아주 좋은 배움의 기회였던 것 같다.

 

3부 내가 저자라면

우주의 뿌리: 누미누스

 

루돌프 오토를 따라, 나는 종교만이 아니라 신화의 뿌리는 누미누스 (the numinous: 종교 경험의 원초적 형태이며, 성스러움에 압도되는 감정)에 대한 감지라고 가정하고자 한다 (58).

 

누미누스. 이것이 무엇일까? 불가에서는 삼매경이라고 표현하는 것과도 통하는 그 무엇이라 여겨진다. 자아를 잊고, 온갖 사유도 다 끊어버리고, 오직 우주와 합일한 것 같은 체험. 그 옛날 샤먼들이 느꼈을 것이고, 시간이 흘러 많은 수행자들이 또한 체험한 경지가 아닐까 싶다. 우주가 인류의 모체임을 알게 해주는 바로 그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교리적 신조의 경우처럼, 이미지 그 자체가 최종적 용어라고 주장할 때 누미누스에 대한 접근은 어려워진다 (58).

 

그러나 이 누미누스적 체험은 교조주의에 휩싸이는 순간 체험할 수 없다고 한다. , 진리가 종교화하는 순간, 진정한 진리를 인간의 체험 영역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은 왜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냈을까..? 그건 또 하나의 통치 시스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나는 모든 이름의 종교를 거부한다.

단지 석가모니 부처가 가르쳐준 손가락을 따라 달빛을 따라가고자 할 뿐이다..

 

신화적 인플레이션:

<신의 가면 1: 원시 시대>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구석기 시대의 신화는 사실주의였다. 이것이 농경시대로 넘어오면 신석기 시대의 기호 신화로 변한다.

 

이제 신화의 체계에 또 한번의 변화가 발생한다. 다름 아닌 신화적 인플레이션”.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에서 보면 인간은 주기적으로 사제를 살해하는 인신공희를 지속한다. 바로, 죽음과 탄생의 우주적 사이클에 인간을 맞추는 행위이다.

 

그러던 것이 반대로 이집트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이 태양신을 대변하게 된다. 바로 신화적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이 사상은 오랜 기간 동양 사상의 뿌리를 이룬다고 한다 (특히, 인도보다 중국 사상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이제 우리는 이 주제의 역사에서 신화적 사로잡힘의 두 번째 단계를 인정해야 한다. 신 안에 흡수되고 상실된 에고, 즉 신화적 동일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에고 안에 흡수되고 상실된 신, 즉 신화적 인플레이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전자는 초기의 사제 국가에서 희생된 왕의 현실적인 성스러움을 특징 짓고, 후자는 후기의 왕조 국가에서 숭배된 왕의 위장된 성스러움을 특징짓는다. 왕조 국가의 왕들은 세속적 측면에서 그들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96).

 

그러므로 인류 역사는 서서히 농경시대의 주술적 원시 신화시대를 벗어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심리학적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고 한다 (기원전 8~5백년경에).

 

이제 주요 관심으로 대두한 것은 더 이상 주술적인 것 (날씨, 수확, 재화의 풍요, 그리고 장수)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것 (심리의 이완과 조화)과 사회학적인 것 (사제 전통을 대신하여 세속 전통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와 개인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완벽한 신화 발생적 지대가 확립되었다 (291).

 

그리고 드디어 나의 오랜 궁금증 하나가 풀렸다. 마치 고대 속에서 열쇠 하나를 건져 올린 느낌이 들었다.

 

따라서 같은 종류의 심리학적 포획이 모든 곳에 나타날 것 같았으며, 사실 제의화된 절차 및 그와 관련된 신화의 배경 속에 그러한 것이 이미 침전되어 있었다 (291).

 

그러한 예비 지대에 있던 관념과 실천들은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났으며, 섬광처럼 빠르게 확산되었다. 칼 케레니 박사는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에서 유행한 오르페우스의 영적 입문 의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족에 속박되어 있는 광범위한 인구의 원시적인 제의의 배경을 벗어나,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종교적 욕구에 맞게 자신들의 예술을 수정하여 내놓았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입문 의례의 의미와 성격이 변화되었다. 그것은 저차원의 의례주의적 방향과 순수한 고차원의 영적 방향으로 분화되었다. 후자의 영역에서는 철학자들이 선구자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피타고라스 학파, 후에는 다른 자들이 나왔다. 그렇지만 모든 철학자들이 엠페도클레스식으로 행동하였던 것은 아니다 (291).

 

인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 상황이 일어났다. 죽음에서의 재생, 금욕, 심리학적 초연, 신화적 동일시와 같은 근본 주제들을 제공하는 전 아리안 시대의 도시에서 나타나는 낡은 의례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방향으로 새로운 가르침이 출현하였다 (292).

 

인도와 그리스에서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 위치한 페르시아에서도 초기의 이원론적인 신화적 철학의 근본 모티브들이 갑자기 새로운 형태로 출현하였다. 이는 거의 동시에 출현하였고 곧바로 확산되었다 (292).

 

연구원 시절 언젠가의 북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늘 왜 기원전 6세기라는 특정 시기에 서양의 철학자들과 동양의 석가모니, 공자, 노자 등 인류 역사상 최고의 사상가들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동시에 출현했는지 너무도 궁금했다. 그렇지 않나? 전율에 가까운 이러한 사건을 그저 간단히 우연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기에는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터인데,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오래도록 답을 내리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답을 비로소 찾았다.

 

, 기원전 6세기는 다름아닌 인류 역사상 단순한 농경시대에서 처음으로 심리학적 사회로 넘어가는 시대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위에서 캠벨이 언급하는 것처럼 그토록 빨리 많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사상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고, 그 물결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놀랍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이제 해묵은 궁금증이 풀렸으니, 인도 사상과 중국 사상의 유사점과 다른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인도 사상의 두 축: 불교와 브라만교

알다시피 불교의 근원지는 인도이지만, 정작 인도를 통치하는 사상은 브라만 체제이다.

 

겉에서 인도를 보면서 궁금했던 점이 또 하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상을 발전시켜온 인도가 어째서 그다지도 혹독한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마치 전 국민이 어느 정도는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듯한 그들이 어째서 가장 무자비하게 느껴지는 계급 제도를 유지하는걸까..? 인도를 잘 모르는 내 안에 늘 담겨 있던 궁금증이었다.

 

불교는 본래 포기의 가르침이며, 피안을 찾아서 수도원으로 은거한 삭발 탁발승이 불교를 전형적으로 대표한다. 이와 달리 굽타 왕조 부흥기에 부활한 브라만교는 수도원의 목적만이 아니라 세속 사회의 유지에도 똑 같은 관심을 보였다. 이 맥락에서 다르마라는 말은 불교에서처럼 일차적으로 초연의 교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우주적 법칙과 그 과정을 가리킨다.

 

힌두교에서는 본질적으로 우주 질서를 신적인 것으로 긍정한다. 그리고 사회는 우주 질서의 한 부분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전통적인 인도의 사회 질서는 전통 사회의 질서도 영원하다. 사회적 장에서는 인간의 자유나 창조성에 대한 관용이 결여되어 있다. 진보적인 그리스나 로마 혹은 근대 서구에서와는 달리, 거기서는 사회를 지성과 변화에 따라 인간에 의해서 진화되어온 질서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의 법칙은 자연적인 것이지 결코 제안되거나 향상되거나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태양, , 식물, 동물이 각자의 본성에 깃든 법칙을 따르듯이, 각 개인도 그들 자신의 출생의 본성, 곧 브라민,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드라 혹은 파리아 (천민)의 본성을 따라야 한다. … 그러므로 , 의무, 을 뜻하는 다르마라고 하는 인도어는 매우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388~9).

 

그랬다. 불교의 인도인들이 이 세상과 자아를 공 혹은 무로 보고 초탈의 길을 추구했다면, 브라만교의 인도인들은 이 세상조차도 우주의 하나로 보고, 모든 것을 우주의 법칙 중의 하나라 수용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신분제도를 뛰어넘거나 타파하려는 치열함이 타 지역에서보다는 미비했던 것 같다.

 

중국 사상의 두 축: 공자와 노자

아무래도 중국 사상은 인도사상보다는 조금 더 익숙하다: 현실 통치의 대가인 공자와 우주 원리를 자연과의 합일로 풀고 있는 노자.

 

다만 한 가지, 캠벨의 이야기를 통해 중국에는 창조 신화가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 시초부터 중국은 상당히 현실적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세상이 분열되기 시작할 때, 중국 사상은 전쟁을 포기하고 숲으로 은둔하는 대신 그 사회 질서를 회복하는 문제에 몰두하였다. 그러므로 은둔의 방식이라는 고고한 역사 대신에 중국 철학은 존재하는 세계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정향들의 체계로 특징지어 진다 (431).

 

첫번째로 지적하여야 할 점은, 주나라의 이러한 초기 신화들이건 후대의 유교 경전이건 그 어디에도 창조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 중국 문헌에서는 이 세상이 인도인의 우주적 신기루보다 훨씬 더 실재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434).

 

왜일까? 어째서 중국은 이다지도 시작부터 현실적이었을까?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6세기 사상가들의 총출동이 겨우 이해되자 또 하나의 물음이 시작되었다..끙이다…).

 

내 짧은 지식을 총동원해서 이해해보려 애써본다면, 중국의 광활한 대지 위에 분포한 다양한 민족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그들은 역사 시초부터 다른 부류 (부족이 되겠다) 간의 싸움이 빈번했고, 이를 저지하고 통합하기 급급했던 역사를 지니다 보니, 신화나 우주 이러한 것보다는 황제가 곧 천자가 되는 통치이념이 더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나. 공자 시대, 즉 전 인류 역사로 놓고 볼 때, 신화 중심의 농경시대에서 드디어 신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기원전 6세기 경,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아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었으니.. 잘 모르겠다. 아마, 이에 대한 좀 더 깊은 답은 훗날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인도 사상 Vs 중국 사상

인도와 중국 사상. 무엇이 유사하고, 무엇이 다를까?

 

슈펭글러가 사유와 행위의 양식에 관하여 언급한 주요 내용들 속에서 중국과 인도를 대비하면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문명에 서명을 하는 자가 중국에서는 정치가였고, 인도에서는 사제였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정치적 성취를 목적으로 변화하는 운명, 즉 도를 탐구하는 점복을 매우 강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영원한 진리로 간주되는 지식의 공식 안에 응축되어 있는 불변하는 법칙의 체계, 즉 다르마를 강조한다. 한쪽에는 역사 의식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어떠한 역사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조상 숭배 (시간 안의 방향)가 지배적이고 인도에서는 땅과 대기와 하늘의 신 (공간의 장)이 지배적이다. 한편에서는 인간의 최고 목적이 의미 있는 참여 의식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초탈 의식이다 (463).

 

중국 고전 사상은 정치적 개혁에 최고의 관심을 두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이고 우주적인 해탈이 최고의 관심사인 인도 사상과 대조를 이룬다. 중국적 맥락에서 중심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세상의 권세와 권력의 바른 소재에 관한 것이다. … 중국 신화에 따르면, 하늘, , 인간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의 영역 안에서 권세와 권력의 핵심 원천은 황제이며, 그는 신화적 종속의 정신 속에서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황제는 천명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최후의 사회적 질문은 천자의 천명을 유지하는 덕에 관한 것이다 (467).

 

전반적으로 두 나라의 사상 체계는 다르다.

 

인간 세계를 뛰어 넘어 우주조차도 초월하고자 애쓰는 인도에 비해, 비록 도교가 있다 하더라도 중국은 확실히 현실에서의 통치 이념이 강한 나라이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불교와 도교가 그 근본이 닿아 있고, 브라만과 공자가 비슷하다고 표현하면 억측일까?

 

도교: 기원전 400년경 이후. 한편에는 부당하게 다스려지는 저급한피착취 대중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통치 능력이 없는 혼란스러운 상류층의 폭군이 존재하는 사회의 질서를 생각해보라. 기원전 4~3세기경이 바로 이러한 상황이었다. 이때 예민한 감각을 지닌 많은 수의 중국 지성인이 숲으로 은거한 것은 놀라운가? 그 시대는 그보다 3세기 혹은 4세기 전에 해당하는 인도의 숲의 철학자들이 시대를 닮고 있으며, 적어도 그 시대를 연상시키고 있다. 당시의 인도에서도 초기의 봉건 질서가 와해되고 있었다 (480).

 

중국이 가장 혼란했던 시절, 공자가 출현했는가 하면, 그에 조금 앞서 노자 역시 출현하여 도교를 창시하였다. 그런데 도교의 출현이 인도 사상 출현 배경과 닮아 있다. 역시 현실이 혼란스러우면 아무래도 그 현실을 뛰어넘는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염원 또한 간절한 것 같다.

 

현실적인 중국 사상 가운데서도 도교는 그 근본이 가장 인도 사상에 닮아 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인도의 통치 이념인 카스트 제도의 경우, 사람들도 우주의 일환으로 자연 제각각이 자신의 위치를 지니고 있듯, 인간 또한 그러하다 여긴다. 여기서 공자의 유교 사상과 유사점을 찾기는 어렵지만, 내가 말하는 유사함이란 둘 다 양국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 인도의 불교 혹은 사상이나 중국의 도교가 정신 세계를 지배한다면, 인도의 브라만 사상과 중국의 공자 사상은 양국을 대표하는 통치 이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일본 신화:

인도와 중국은 내적으로 완성되고, 소진되었으며, 슈펭글러가 부르듯이 농민으로 간주될 수 있는 데 비하여, 일본은 젊고, 아직 꿈꾸고 있으며, 니체가 말하듯이, “춤추는 별을 낳을 수있다 (522).

 

중국의 현실주의가 중국의 대표 성향이라면, 일본 역시 나름의 독특한 정서가 있는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섬나라여서 일까?

 

영국처럼 섬나라인 일본에서는 사회 질서의 꼭대기에서부터 밑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근본적인 교감 (rapport)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륙에서는 인종, 문화, 그리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계급 사이의 충돌이 사회사의 규범으로 실제 나타나고 있었던 반면, 일본에서는 가장 잔인한 무질서의 시기에도 제국이 하나의 유기적 단위로 기능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명예심을 동반한 본질적으로 영웅적이고 귀족적인 정신이 일본 사회의 곳곳에 스며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523).

 

그럴지도 모르겠다. 최악의 경우도 결국은 섬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면, 서로 보이지 않는 교감이 저절로 생성되어야만 할지도 모르겠다.

 

같은 극동의 나라이지만, 유사한 듯 참으로 다른 두 나라, 중국과 일본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일본을 잘 아는 듯 가장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만의 독특한 사고 체계 안에서 역사를 이어오고 있으니 말이다.

 

작년에 <국화와 칼>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정서적 다름이 어쩌면 캠벨의 말을 빌자면 중국 사상에 깊이 물들지 않은 그들만의 젊음이 아직 유지되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교와 불교가 전해졌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유교, 일본의 불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에서는 늘 조금씩 빗겨나 자신들만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역시나 사람이나 국가나 풍토, 지형 등의 지리적 요인들이 얼마나 삶 깊숙이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일본이다.

 

티벳 신화:

정통 불교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티벳에 대해 캠벨은 무어라 이야기하는지 잔뜩 기대했었는데, 아쉽게도 캠벨은 현대사에서 중국이 얼마나 티벳을 무자비하게 강점하였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구성으로만 놓고 보면, 절대 이 책과는 어울릴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티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다.

 

비폭력 무저항의 종교인들을 그리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중국. 그것도 과거 고대 시대도 아닌 현대 역사에서, 불과 수십 년 전에 그러한 일이 지척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하긴, 한국전쟁도 겨우 수십 년 전의 일이기는 하다…).

 

어찌하여 티벳 같은 불국토가 그렇게 잔인하게 유린되어야 하는지 왼종일 마음이 울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들의 희생이 계기가 되어 티벳 불교, 나아가 동양 불교 철학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상쇄하기에는 그들의 최후가 너무 아프다.

 

캠벨도 그러했을까..? 그래서 티벳 신화가 아닌 티벳 현대 역사를 적은 걸까..?

 

한국 신화:

아쉽게도 캠벨은 한국에 대해서는 지면을 할애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특성이 없거나 상대적으로 서구 학계에 영향력이 없는 국가여서 일까..?

 

서운한 마음을 스스로 정리하는 것으로 달래보려 한다.

 

한국의 사상을 시간차로 나열해보자면 불교, 유교 그리고 현대의 기독교 사상 유입까지가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사상의 흐름이고, 가만히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기실 우리의 사상은 참으로 토속적인, 그 중에서도 타력 신앙이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펼쳐 놓고 볼 때, 최근의 한국 전쟁까지 참으로 무수히도 많은 전쟁에 시달리는 민족이요 지역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토속적인 타력 신앙없이는 오히려 민족이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안쓰러운 우리 민족이다..

 

우리가 유교의 옷을 강하게 걸치고 있는 것은, 외세에 시달리는 민족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통치 이념이 아닐 수 없기 때문 아닐까? 우린 늘 군대 같은 조직력을 갖추고 살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말이다.

 

그런만큼 우린 구속을 싫어한다. 기회만 닿으면 그 불꽃이 터져 나온다. 혁명이든 응원이든 우리의 피는 늘 뜨겁다.

 

그러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운명 앞에 또한 우리는 자연에 빌고, 부처에 빌고, 하나님께 빈다. 빌고 또 빈다.

 

결국 우린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한국은 한국일 뿐이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

단군의 후예.

어쩌면 인내는 우리 민족이 숙명처럼 끌고 가야 할 운명적 유전자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우린 늘 호랑이처럼 인내하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 나가고 싶은 욕망 또한 강하다.

 

이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단군 신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남다르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다.

한국인에게 주어진 과업은 인내로서 달성될 수 있음을..

 

나의 신화:

먼별 샤먼. 그게 내 이름이다. 긴 말이 필요 없는.

샤먼이 되는 일이 그리 쉽고, 그리 간단할까.

100일의 열 번. 천 일을 기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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