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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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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6일 11시 50분 등록

 [북리뷰 37] 국화와 칼

 

1. 저자에 대해서

 

Ruth Benedict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1887~1948)는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로 잘 알려진 미국 인류학계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배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교사와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우연한 기회에 사회연구를 위한 뉴스쿨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인류학 강의를 접하고 매료되었고 1921년 34세의 나이에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프란츠 보아스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인류학 연구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1923년 아메리카 인디언 종족들의 민화와 종교에 관한 연구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에서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4년 문화의 상대성과 문화가 개인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한 『문화의 패턴Patterns of Culture』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어 『인종Race:Science and Politics』을 출간함으로써 그 연구성과를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1943년 전쟁공보청 해외정보 책임자로 일하였고, 1946년 만년의 역작인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을 통해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역자 : 김윤식

서울대와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서울대 국문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 근대 문예 비평가 연구』,『이광수와 그의 시대』,『염상섭 연구』,『김윤식 선집』(7권),『일제 말기 한국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외 다수가 있다.

오인석은 서울대와 같은 대학 대학원 서양사학과를 나와 독일 보쿰대와 미국 뉴욕주립대 방문교수를 거쳐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독일 문학사 대계』,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사』와 역서로『독일 현대사』, 『바이마르 공화국과 히틀러』외 다수가 있다.

 

2. 가슴을 무찔러드는 글귀들

 

역자 서문

단순한 일본 기행문이나 견문기가 아니라 엄밀한 학문적 노작이란 뜻이다. 저자가 목적으로 삼은 것은 평균적 일본인(average Japanese)의 행동과 사고의 틀(Pattern)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지(수치, 부끄러움)’의 인식에 놓인 문화다. p4

 

우리는 우리가 미국인으로서 행동할 때의 전제를 잠깐 옆에 제쳐놓고 될 수 있는 한 어떤 주어진 상황 아래서 일본인이 취하는 행동은 우리가 취하는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단정하는 안이한 결론으로 비약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었다. ... 전쟁 중에는 적을 나쁘다고 철저하게 깎아내리는 일은 용이하지만, 적이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보는가를 적 자신의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해야만 할 일이었다. p14

 

제1장 연구 과제─일본

 

어떤 국민이 자기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렌즈는 다른 국민이 사용하는 렌즈와는 다르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에 반드시 그것을 통해 보는 안구를 의식하기는 어렵다. p24

 

‘하나의 세계’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세계 구석구석의 사람들에게, 동과서, 흑인과 백인, 기독교와 이슬람교도간의 차별은 모두 피상적인 것이며, 전 인류가 실제로는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을 심는 데에 희망을 걸어 왔다. p24

 

강인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로소 안심한다. 그들은 차이를 존중한다. 그들의 목표는 차이가 있더라도 안전이 확보되는 세계, 세계 평화를 위협하지 않고도 미국은 철저히 미국답고, 같은 조건으로 프랑스는 프랑스, 일본은 일본다울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p25

 

나는 그 이유를 드러내어 보일 수가 있다. 나는 일본인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처음에는 그들이 사용하는 어구나 관념들이 이상하게 여겨졌으나, 마침내는 중요한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에 걸친 감정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덕과 악덕은 서양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체계는 전혀 독특한 것이었다. 그것은 불교적인 것도 아니고 유교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장점도 단점도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p30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일본은 대동아 여러 나라와 동일한 인종이므로 이 지역에서 먼저 미국을, 다음엔 영국과 소련을 쫓아내서 ‘자기네의 알맞은 위치’를 차지하도록 해야 한다. 세계 모든 나라는 국제적 계층 조직 속에 제각기 일정한 위치가 주어져 하나의 세계로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다. p33

 

그것은 일본이 만들어 내기에 알맞은 하나의 환상이었다. 일본에게 불행한 일은 일본 점령하에 있었던 나라들이 대동아의 이상을 일본과 같은 눈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전 후까지도 일본은 대동아의 이상이 도덕적으로 거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p33

 

아마도 앞으로 오랫동안 일본은 이 본래 태도를 계속 간직해 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계층 제도에 대한 신앙과 신뢰이다. 그것은 평등을 사랑하는 미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층 제도라는 것으로 일본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또 그 제도에 어떠한 장점이 있다고 여기고 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p33

 

일본인 승리에 대한 가능성을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바탕 위에 놓고 있었다. 일본은 정신력으로 반드시 물질력을 이긴다고 부르짖었다. ...“만일 우리가 숫자를 두려워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의 풍부한 자원은 이번 전쟁으로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p34

 

1930년대를 통해 세입에서 군비로 충당된 비율은 천문학적으로 증가하였다. 진주만 공격 당시에는 국민 총소득의 대부분이 육군과 해군을 위해 지출되었고, 군사 이외의 일반 행정에 관한 경비는 정부 총지출액 중 겨우 17퍼센트 정도였다. 일본과 서구 여러 나라와의 차이는 일본이 물질적 군비에 무관심하였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러나 군함이나 대포는 바로 불멸의 일본 정신에 대한 외면적 표시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무라이의 칼이 마치 용기의 상징이었듯이 그것들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p35

 

미국인은 생활양식을 끊임없이 도전해 오는 세계에 맞게 조정한다. 그리고는 그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반면 일본인은 오히려 미리 계획되고 진로가 정해진 생활 양식에서만 안심을 얻을 수 있으며, 예견하지 못한 일에는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 p41

 

이러한 진술은 독일 포로들이 한 진술과는 전혀 달랐다. 독일 포로들은 휘하의 장군들이나 최고 사령부가 히틀러를 배신한 것에 대해서 큰 불만을 표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전쟁 준비의 책임은 최고 선동자인 히틀러가 져야 한다고 하였다. 반면 일본 포로들은 분명히 황실을 받드는 숭배는 군국주의 침략 전쟁 정책과는 분리되어야 하다고 단언하였다. 그들에게 천황은 일본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존재이다. p46

 

포로 심문에 경험 많은 사람들은, 심문서에 일일이 ‘천황 비방을 거부함’이라는 말을 기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라고 하였다. 포로는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천황 비방을 거부하였다. 심지어 연합군에 협력하고 미국을 위해 대일본 방송을 맡은 자들까지도 역시 그러하였다. p46

 

만일 군주제가 폐지된다면 일본의 젊은 부인들은 그들의 선망의 대상인 미국 부인들과 같은 자유를 얻기를 희망할 것이라고 억측하는 데 머무르고 있었다. p47

 

그들은 보통 어떤 사관을 비난하고 또 어떤 사관은 칭찬하였다. 그들이 일본에 관한 일에 선과 악을 식별하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증거란 전혀 없었다. 일본 국내에서도 신문이나 잡지는 ‘정부’를 비난하였다. 그들은 더 강력한 지도력과 더 긴밀한 전쟁 노력의 조정을 요구하였고, 정부가 그러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였다. 그들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비난하기조차 하였다. p48-49

 

제3장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일본인은 가정 생활에서 전제적인 권력을 존중하도록 배우지는 않는다. 또한 쉽사리 권위에 굴복하는 습성을 기르지도 않는다. 가족의 의사에 복종하는 것은 이를테면 그 요국 아무리 부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전가족의 문제에 관계를 갖는 최고 가치의 이름으로써 요구된다. 즉 공동의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p73

 

아내에게 지배당하는 남편, 아우에게 지배당하는 형일지라도 표면적으로는 존경을 받는다. 특권과 특권 사이의 형식적인 경계선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서 조종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파괴되지는 않는다.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 실제의 지배관계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특권 관계는 변경되거나 수정되지 않는다. p73

 

일본인 생활의 계층적 조직은 계급간의 관계에서도, 가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철저하다. 일본은 일본 역사의 전체 기간을 통해 현저한 계급 카스트적 사회였다. P74

 

세계사에서 주권 국가에 의한 계획적인 문명 수입이 일본만큼 훌륭히 수행된 예는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당초부터 카스트 제도가 없는 중국의 사회조직을 그대로 재현할 수가 없었다. 일본이 채용한 관직은 중국에서는 국가시험에 급제한 행정관에 주어진 것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세습적 귀족이나 봉건 영주에게 주어졌다. 이것이 일본 카스트 제도의 구성 요소가 되었다. P76

 

중국에서는 빈번히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일본에서는 한 번도 그러한 일이 없었다. 천황은 불가침이며 천황의 몸은 신성한 것이었다. P76

 

일본의 봉건 사회는 복잡한 계층으로 나눠지고, 각자의 신분은 세습적으로 정해졌다. 도쿠가와는 이 제도를 고정시켜 카스트마다의 일상 행동을 세밀히 규제하였다. 각 가정의 가장은 문 앞에 그의 계급적 지위와 세습적 신분에 관한 소정의 사실을 게시해야 했다. 입을 수 있는 의복, 사 먹을 수 있는 음식, 생활할 수 있는 집의 종류도 그 사람의 세습적 신분에 따라 규정되었다. 황실과 궁정 귀족 밑에 신분순으로 무사(사무라이), 농민, 공인, 상인의 네 가지가 일본의 카스트였다. P79

 

상인 계급은 천민 계급의 바로 위에 놓였다. ... 상인 계급은 늘 봉건 제도의 파괴자였다. 실업가가 존경받고 번영하게 되면 봉건 제도가 쇠퇴한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17세기에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가혹한 법률로 일본의 쇄국을 선포한 것은 상인의 설자리를 빼앗기 위해서였다. P80

 

국내 무역 역시 각 번의 접경에 관소를 설치하여 상품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또한 상인 계급의 사회적 지위를 낮추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법률을 정하였다. P80

 

그는 도쿠가와 시대 초기에 가문에 따라 수령액이 정해진 일정한 봉급을 받는 연금 생활자였다. 봉록은 결코 많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사무라이 계급 전체의 평균 봉록은 농민의 소득과 거의 같다는 추산을 하고 있는데, 이는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 그래서 사무라이들은 가족수를 제한하였다. .. 그들은 절약과 검소라는 높은 덕목에 비상한 역점을 두었다. P82

 

사무라이가 그들의 특권으로서, 또 그 카스트의 표시로서 허리에 찬 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사무라이는 도쿠가오 시대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서민에 대해 칼을 사용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의 법령이, “사무라이에 대해 무례하게 군다든가, 그들의 상관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서민은 즉석해서 참해도 좋다”고 규정하 것은 이전부터의 관습에 법적 효력을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P82

 

도쿠가와 시대의 사무라이는 단순히 칼을 휘두르는 무인은 아니었다. 그들ㅇ느 점차로 그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 고전극이나 다도 같은 평화로운 예능의 전문가가 되어 갔다. P83

 

농민은 사무라이에 비해 법률상의 보호를 받지 못하였고, 무거운 세금을 내면서 여러 가지 제한을 받았지만, 몇 가지 보증은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농지의 소유권을 보장받았다. P83

 

농민은 그가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것, 즉 토지의 영구 경작권을 가졌다. 농민은 오늘날 그의 후손이 그 토지를 경작하는 것과 같은 근면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그 토지를 경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P83

 

사무라이의 봉급 등을 포함한 거의 200만을 웃도는 기생적 상층 계급 전체를 그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였다. P84

 

그러나 농민의 주장에 대해서 바쿠후가 판결을 내리는 것만으로는 일본의 법과 질서의 요구는 충족되지 못하였다. 그들의 불평은 정당하며 국가가 그 불평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조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민의 폭동 지도자는 엄격한 계층 제도의 법을 어긴 것이다. 설령 판결이 그들에게 유리했을 경우에도 그들은 상전(다이묘)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법도를 어긴 것이어서, 이 점은 도저히 간과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사형을 언도받았다. 동기의 정당함은 법을 어긴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농민들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체념하였다. ... 그들은 처형당한 지도자들 위해 사당을 지어 순교자로서 숭배하기도 했으나 처형 그 자체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계층의 본질적 요소로서 시인했던 것이다. P86-87

 

번과 번의 접경에서는 여행 허가증을 조사케 하고, 관세를 받는 관리를 두어 다이묘가 처첩을 타국에 보내 총기를 밀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가는 여자와 들어오는 총’을 엄중히 감시시켰다. 다이묘는 쇼군의 허가 없이는 약혼을 할 수 없었다. 결혼으로 정치적 동맹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번과 번의 교역은 다리를 건널 수 없도록 하면서까지 방해하였다. 또 쇼군의 밀정이 항상 다이묘들의 재정에 관한 정보를 캐냈다. P86

 

일본에는 만일 현행의 행동 지도 위에서 허락된 것이 아닌 침략 행위는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는 보증이 실제로 주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 지도를 신뢰하였다. 그리고 그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를 때에만 안전하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꾸든가 혹은 그것에 반항하는 대신, 그것을 지키는 데서 자신의 용기와 고결함을 드러내었다. P90

 

각각의 계급에 일종의 보증이 주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천민 계급일지라도 특수한 직업을 독점하는 권리를 보증받았고, 또 그 자치 단체는 당국자의 승인을 받고 있었다. 각 계급에 가해지는 제한은 컸지만 그 대신 질서와 보증이 있었다. 이 카스트적 제한에는 또한,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전혀 인정되지 않는 어느 정도의 유연성이 있었다. P91

 

이 카스트 제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 제도를 교묘히 조종함으로써 부자는 상류 계급 신분을 획득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각각의 카스트가 절대로 동일한 카스트 안에서만 혼인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카스트간의 통혼도 가능하게 하는 공인된 절차가 있었다. P92

 

상인이나 돈놀이꾼들은 공인된 방법에 의해 상류 계급의 신분을 샀다. ... 일본이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들보다도 더 많은 계급간의 이동을 승인한 것은 기묘하고도 의외의 일이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무엇보다도 유력한 증거는 귀족과 서민 사이에 계급 투쟁이 행해진 흔적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P93

 

일본인이 상세한 행동의 지도를 좋아하고 신뢰한 것에는 그럴만한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 지도는 사람이 규칙에 따르는 한 반드시 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부당한 침략에 대한 항의를 인정하였다. 또 그것을 교묘히 조종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상호 의무 이행을 요구하였다. P93

 

결국 농민들에게 중과세를 더욱 부과하였다. 몇 년 후의 세금까지 미리 강요하여 농민들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바쿠후도 역시 파산 상태에 놓여 현상 유지 능력이 전혀 없었다.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나타난 1853년 무렵의 일본 국내는 극도로 비참한 상태였다. 페리의 강제 입국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과의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때 일본은 이미 그 강요를 거두할만한 힘이 없었다. P94

 

혁명을 싫어하던 일본이 갑자기 방침을 바꾸어 서양 여러 나라의 모범에 따르기로 하였고, 겨우 그로부터 50년 후에는 서양 여러 나라가 본령으로 하는 분야에서 서양 여러 나라와 경쟁하게 되리라고는 실로 생각조차도 못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일본은 자신의 고유한 장점을 이용하여... 일군의 높은 지위에 있는 유력한 사람들도 또 일반 민중의 여론도 결코 요구하지 않은 목표를 이루어 냈다. P95

 

제4장 메이지유신

 

일본 근대화 초기의 구호는 손노조이, 즉 ‘왕정을 복고하고 오랑캐를 추방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을 외국에게 짓밟히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천황과 쇼군의 ‘이중통치’ 속에 있었던 10세기의 황금 시대로 복귀하려는 슬로건이었다. p97

 

반도쿠가와 세력이 승리를 거두어 1868년 왕정 복고에 의해 ‘이중통치’가 종말을 고했을 때, 우리 서양인의 기준으로 보면 승리자들은 이제부터는 놀라울 정도로 보수적인 고립주의 정책이 실시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신정부가 취한 방침은 처음부터 그 반대였다. ... 다음 5년 동안에 계급 사이의 모든 법률상 불평등이 철폐되었다. p98

 

갓 태어난 메이지 정부의 이같은 괄목할 만한 개혁은 대중의 뜻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대중들로부터 가장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1871년에서 1873년에 걸친 조선 침략론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는 방침을 결코 굽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침략계획을 묵살하였다. p99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은 마을, ‘부라쿠 部落’ 단위이다. 부라쿠는 폐지되지도 않았고 하나의 단위로 행정 기구 속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그곳은 국가의 기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다. (여기서 ‘부라쿠’는 ‘部落’이라고 쓰지만, 실제로는 천민 계급의 마을을 뜻한다.)p105

 

학교는 구석구석까지 국가의 통제를 받아, 프랑스처럼 어느 학교나 같은 교과서로 같은 과목을 같은 날에 공부한다. 어느 학교든 아침에는 같은 시간에 같은 라디오 반주로 같은 체조를 한다. 이처럼 시.정.촌은 학교와 경찰과 재판소에 대해서는 지방 자치권을 갖지 못한다. p108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교회에서도 약간의 맥주가 나오고,

우리의 영혼을 데워 줄 즐거운 불이라도 있다면,

우린 온종일 찬송가를 부르기도 하고 기도드리기도 하면서,

교회를 빠져나와 방황하려는 생각은 갖지 않을 텐데.

If at the church they would give us some ale,

And a pleasant fire our souls to regale,

We'd sing and we'd pray all the livelong day,

Nor ever once from the church to stray. p113-114

 

일본의 정치가들은 산업개발이란 일본에 너무나 중요한 사업이므로, 수요 공급의 법칙이나 자유 기업의 원칙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결코 사회주의적 신조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다. 결국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은 재벌들이었다. 일본이 이룩한 것은 실수와 헛된 소모를 최소한도로 줄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산업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 일본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과 그 후 여러 단계의 일반적 순서’를 수정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소비재의 생산과 경공업에서부터 시작하는 대신 먼저 중요한 중공업에 손을 댔다. 조병창, 조선소, 제철소, 철도 건설 등에 우선권이 주어져, 기술적 능력이 짧은 기일에 고도의 수준에 달하였다. p117

 

일본의 정치가들은 다른 여러 분야에서의 계층 제도처럼 재계에서도 귀족제가 필요하다는 방침을 결정했을 때에, 그들을 위해 각종 전략적 산업을 건설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우호적인 상인 가문을 선택하여 다른 계층 제도와 마찬가지로 ‘알맞은 위치’를 갖도록 하였다. 정부가 이러한 재계의 유력 가문과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일본 정치가들의 계획 속에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재벌은 그들에게 이윤과 함께 높은 지위를 주는 일종의 지속적인 ‘비호 정책’에 의해 이익을 얻었다. 종래의 일본인의 이윤 및 금전에 대한 태도로 보아 재계 귀족이 국민의 공격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었지만, 정부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체제를 공인된 계층제의 관념에 따라 확립하려 하였다. p118-119

 

‘나리킨’은 종종 ‘누보리슈(nouveau riche : 벼락부자)’라는 말로 번역되지만, 그 번역으로는 일본인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미국에서 누보리슈란 엄밀하게는 ‘새로 온 사람들’이란 뜻이다. ... 그러나 일본에서 나리킨이란 말은 일본의 장기놀이에서 온 낱말로서, 여왕으로 승격된 졸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렇게 날뛸 수 있는 아무런 계층적 권리도 없으면서 거물처럼 장기판 위를 사납게 날뛰는 졸이다. 일본인은 나리킨은 사람을 속이고 이기적으로 이용하여 돈을 모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p119

 

일본인은 끊임없이 계층 제도를 고려하면서 사회의 질서를 다듬어 나갔다. 가정이나 개인간의 관계에서는 연령, 세대, 성별, 계급 등이 알맞은 행동을 지정한다. 정치, 종교, 군대, 산업에서는 각각의 영역이 신중하게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어, 윗사람도 아랫사람도 자기들의 특권의 범위를 넘어서면 반드시 처벌된다. ‘알맞은 위치’가 보장되어 있는 동안은 일본인은 불만 없이 살아간다. 그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p120

 

일본의 인과응보는 그 ‘안전’의 신조를 외국에 수출하려 했을 때 찾아왔다. 일본 국내에서 계층 제도란 일본 국민의 상상력에 꼭 맞았다. 왜냐하면 그 상상력 자체가 계층 제도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p120

 

제5장 과거와 세상에 빚을 진 사람

 

테니슨(Tennyson)의 시에 ‘the heir of all the ages'란 구절이 있다. p123

 

서구인이 조상 숭배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동양인에게는 실은 숭배가 아니며, 또한 조상 숭배라 하더라도 전적으로 조상들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체에 대해서 인간이 지고 있는 큰 채무를 인정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p124

 

더구나 동양인이 부채를 지니고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나날의 접촉 모두가 현재의 그의 채무를 증대시킨다. 그의 일상적인 의사 결정과 행동은 틀림없이 이 부채로부터 발생된다. 그것은 기본적인 기점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이렇게 소중히 양육되고 교육을 받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혹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단순한 사실까지도 모두 세상의 덕이기 때문입니다. ... 그들은 과거를 도외시하지 않는다. 일본에서의 의는 조상과 동시대인이 함께 포함되는 거대한 채무의 망상조직 속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는 데에 있다. p124

 

일본인은 미국인들이 이 사실을 경시하고 있다고 통감한다. 그리하여 어느 문필가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 부모의 온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말은 기껏 부모에게 친절을 다하라는 정도뿐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 아이들에게 온을 베풀지 않고 방임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자식들에 대한 헌신적인 보살핌은 일찍이 자신이 무력한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는 것이다. p129

 

일본의 거리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났을 때 모인 군중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은 단지 자발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경찰이 아닌 사사로운 사람이 제멋대로 참견을 하면 그 행위가 그 사람에게 온을 입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메이지 이전의 가장 유명한 법령의 하나에 “싸움이나 말다툼이 났을 때, 불필요한 참견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있었다. 그런 경우에 분명한 권한이 없이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은 무언가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받게 된다. p131

 

제6장 만분의 일의 은혜 갚음

 

우리는 일본인의 기본적인 가정인 모든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큰 채무를 진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누구나 가난한 양친을 불쌍히 여겨 도와야 하며, 아내를 때려선 안 되고, 자식들을 부양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금전상의 부채처럼 양으로 계산되지 않으며, 또 사업상의 성공처럼 보상받지도 못한다. p144

 

일본에서의 그것은 미국에서의 채무 변제와 아주 흡사하게 여겨진다. 그리하여 그 배후에 있는 강제력은 미국에서 청구서나 저당 이자 지불의 배후에 있는 강제력처럼 강력하다. p146

 

그러나 이 같은 소망의 억압은 아무리 유덕한 행위로 치부되더라도 가슴속에 개운치 않은 울분이 남게 마련이다. 따라서 미얀마에서는 싫어하는 것에 대한 속담에서, ‘화재, 홍수, 도둑, 관리, 악인’을 열거하고 있는 데 비해, 일본에서는 ‘지진, 벼락, 오야지(the Old Man : 가장, 아버지)’를 들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p152

 

“미움받는 며느리가 귀여운 손자를 낳는다.”는 일본 속담에도 있듯이,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는 항상 고孝가 존재한다. 며느리는 겉으로는 한없이 유순하다. 그러나 이 순하고 사랑스럽던 사람이 세대가 바뀜에 따라 이전에 시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가혹하고 말 많은 시어머니가 된다. 그 여인들은 젊은 시절에는 반항심을 나타낼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순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p155

 

어느 일본인 저자는, “일본인은 집을 대단히 존중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가족 개개의 성원과 그 상호간의 가족적 유대를 그리 크게 존중하지 않는다.”고 썼다. 물론 이 말은 언제나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일반적인 형편을 말해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의무와 부채의 갚음이며, 연장자가 중대한 책임을 맡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책임 가운데 하나는 아랫사람에게 필요한 희생을 반드시 치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 희생에 불복한다 해도 큰 변함이 없다. 그들은 연장자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기무를 태만히 한 것이 된다. p156

 

주가 이처럼 쉽게 천황에게로 옮겨진 것은 황실을 태양의 여신의 후예라고 하는 옛 민간 신화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신성의 전설적 주장은 서구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주요한 것은 아니었다. p158

 

일본인은 인간과 신 사이에 서양인처럼 큰 차이를 두지 않는다. 일본인은 누구드 죽으면 가미가 된다. 사실 봉건시대에 주는 전혀 신적 자격을 지니지 않았던 계층제의 우두머리에게 바쳐졌다. 주를 천황에게로 옮길 때 더욱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은 일본 역사의 모든 시기에 걸쳐 유일한 왕실이 계속하여 왕위에 등극했었다는 사실이었다 p158

 

이런 이유로 일본인은 미국인을 준법정신이 결여된 국민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미국인은 일본인을 민주주의 관념이 결여된 굴종적인 국민이라고 판단한다. 양국 국민의 자존심은 각각 다른 태도와 결부되어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미국에서는 그것은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한다는 태도에 의존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p162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항복했을 때, 세계는 이 주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한 사실을 목격하였다. 일본에 관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많은 서구인은 일본이 항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p162

 

이와 같이 일본을 분석하고 있던 미국인은 주를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천황이 입을 열자 전쟁은 끝났던 것이다. 천황의 목소리가 방송되기 전에 완강한 반대자들이 궁성 주위에 비상선을 쳐서 정전 선언을 저지하려 했다. 그런데 그 선언이 일단 읽혀진 다음에는 모든 사람이 그것에 승복하였다. p163

 

그 대신 일본인은 무엇보다 높이 평가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즉, 일본인은 비록 그것이 항복의 명령이긴 했지만 명령을 내린 것은 천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것이었다. 패전에 있어서도 최고의 법은 여전히 주였다. p164

 

제7장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주忠과 고孝는 일본이 중국과 공유하고 있는 덕목으로, 일본은 이 두 가지 개념에 여러 가지 변화를 주기는 했지만, 동양의 여러 나라의 도덕적 망령과 어느 정도 동족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기리는 일본이 중국의 유교에서 받아들인 것도 아닐뿐더러 동양의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본 특유의 범주로서 기리義理를 고려에 넣지 않으면 일본인의 행동 방침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인은 누구나 행위의 동기나 명성 혹은 본국에서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딜레마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기리를 입에 담게 된다. p166

 

기무는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친밀한 의무의 수행이라고 느껴지는 데 비하여, 세상에 대한 기리는 개략적으로 말하면 계약 관계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리는 법률상의 가족에 대해 지고 있는 일체의 의무를 포함하고, 기무는 직계 가족에 대해 지고 있는 일체의 의무를 포함한다. p167

 

제8장 오명을 씻는다

 

일본인은 모욕이나 비방이나 패배가 보복되거나 제거되지 않는 한,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말한다. 훌륭한 사람은 세상을 다시 균형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보복은 인간의 덕행이지, 인간의 본질적인 약점에 기초한 피할 수 없는 악덕이 아니다. p181

 

어떤 사람이 돈을 빌릴 때 이름에 대한 기리를 저당잡히는 수가 있다. 2,30년 전만 해도 그것은 보통 “만일 돈을 갚지 못하면 대중 앞에서 조롱당해도 좋다”는 문구가 씌어졌다. 다만, 실제로는 돈을 갚을 수 없을 경우에도 문구처럼 조롱거리가 되는 일은 없었다. 일본에서는 공개적으로 웃음거리가 되는 관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빚을 깨끗이 갚아야 하는 기한인 설날이 다가오면, 빚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는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자살을 하는 일이 있었다. p186

 

이와 같은 실패나 무능의 오명에 대한 일본인의 반응과 똑같은 태도가 미국에서도 가끔 발견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쁜 말을 들으면 미친 듯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미국인은 일본인처럼 자기 방어에 급급하는 일은 드물다. 만일 교사가 개구리가 어떤 종에 속하는지 모르면, 가령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경우라도, 본심은 그가 알고 있는 체하기보다는 정직하게 알지 못한다고 하는 편이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p188

 

그들은 경쟁을 너무나 민감하게 자신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공격이라 여긴다.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에 전념하는 대신에 그들의 주의력을 자신과 공격자의 관계에 빼앗기는 것이다. p190

 

일본인은 예부터 늘 무엇인가 교묘한 방법을 궁리하여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려 하였다. .. 미국인은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좋은 성적으로 올리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반면, 온恩에 입각하는 윤리에서는 경쟁을 허용할 여지가 아주 적다. 각 계급이 준수해야 하는 규칙을 세밀하게 규정한 일본의 계층 제도 전체가 직접적 경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있다. .. 그들은 서로 배척하는 일은 있으나 경쟁하는 일은 없다. p191

 

어디에든지 나타나는 중개자 제도는 서로 경쟁하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것을 막는 좋은 방법의 하나이다. ... 그리하여 중개자끼리 자세한 절충을 끝낸 후에 각기 자기측에 보고한다. 이처럼 간접적인 거래를 함으로써, 당사자들은 혹시 직접 이야기하면 이름에 대한 기리 때문에 화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요구나 비난을 모르고 지나간다. p192

 

또한 시골에서는 가족이 모두 잠들고 처녀가 치망에 든 뒤인 깊은 밤에 동네 총각이 처녀를 방문하는 풍습이 있다. 처녀는 총각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하는데, 그때 총각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설사 거절을 당해도 다음날 수치를 느끼지 않도록 한다. 이 변장은 처녀에게 누구인지 발각되지 않기 위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처박는 속임수처럼 뒤에 치욕을 당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인정하는 궁지에 빠지지 않으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p193

 

그는 선교사가 돈 한푼 없는 시골 소년이 화가가 되기 위해서 미국에 간다는 일에 대해 취한 불신의 태도에 의해서, ‘살해되었다’고 느꼈다. 그의 이름에는 그가 그 목적을 수행하지 않고는 도저히 지워질 수 없는 오점이 찍혔다. 선교사에게 ‘조소’를 받은 이상 그 땅을 떠나서 훌륭히 미국에 갈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 이외에 그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p197

 

복수는 누구에게서 모욕이나 패배를 당했을 경우에는 ‘바람직한 대응’으로, 일본의 전통 속에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서구의 독자를 상대로 책을 쓰는 일본인은 때로는 생생한 비유를 써서 일본인의 복수에 대한 태도를 묘사하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박애심이 많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니토베 이나조는 1900년에 저술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복수에는 무엇인가 우리의 정의감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있다. 우리의 복수 관념은 우리의 수학적 능력처럼 엄밀한 것으로서, 방정식의 두 변이 만족되지 않는 한 우리는 무언가 못다한 것이 남은 듯한 느낌을 지워 버릴 수 없다.” p198

 

일본인은 실패나 비방, 배척 때문에 상처받기 쉽다. 따라서 타인을 괴롭히기보다는 너무도 쉽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많다. p202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만일 적절한 방법으로 행해지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구실을 한다. 미국에서는 자실을 죄악시하여 절망에의 자포자기적인 굴복으로 치부하지만, 자살을 존경하는 일본인에게는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행해지는 훌륭한 행위가 된다. p205

 

무사에게 하라키리가 허락되는 것은 역시 죄를 추궁당하여 명예를 실추한 프로이센의 장교에게 때때로 비밀리에 권총 자살이 허락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프로이센 장교의 경우에는 당국자는 그가 이제는 그 방법 외에는 명예를 지킬 희망이 사라졌다고 확신하면, 그의 거실 테이블 위에 한 병의 위스키와 권총을 얹어 놓는다. 일본의 사무라이도 마찬가지여서 그런 사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단지 수단의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은 면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p206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일본인은 매우 호의적으로 패전에 대한 일체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국인을 따뜻한 인사와 웃음으로 맞아들였고 손을 흔들어 환영하였다. 이들은 침울하거나 분노하고 있지 않았다. 항복을 고한 천황의 조서 속의 표현을 빌린다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감당하고,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을 참는” 것이었다. p209

 

제9장 인정의 세계

 

그런데 일본에서는 쾌락을 의무와 마찬가지로 배운다. 많은 문화에서는 쾌락 그 자체를 가르치는 일은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쉽게 자기 희생을 필요로 하는 의무에 헌신할 수 있다. 남녀간의 육체적 접촉조차 때로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어서 가정 생활의 원할한 진행에 거의 아무런 위협을 주지 않을 정도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 나라들의 가정 생활은 남녀간의 애정과는 다른 기초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일부러 함양한 후에, 엄숙한 생활 양식에서는 쾌락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을 제정해 인생을 곤란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마치 예술처럼 연마하고 나서 쾌락의 맛을 충분히 알게 되었을 때, 의무를 위해 그것을 희생한다. p218

 

교양이 있는 일본인은 일본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항이 서구인의 눈에는 부도덕, 오설로 보인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의 습관적인 태도와, ‘인정’은 인생의 중대한 사항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들 신조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그렇게 뚜렷하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점이야말로 연애나 성적 향락에 관한 일본인의 태도를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커다란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아내에 속하는 영역과 성적 향락에 속하는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그 둘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이 두 영역은 모두 다 공공연히 인정된다. 양자의 구별은 미국인의 생활에 서처럼 한쪽은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공공연히 자인하는 것이고, 다른 쪽은 남의 눈을 피하여 몰래 발을 들여놓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한쪽이 인간의 주요한 의무의 세계에 속하는 데 반하여, 다른 한 쪽은 사소한 기분 전환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구별된다. 이처럼 저마다의 영역의 ‘알맞은 위치’를 정해 두는 습관은 가정의 이상적인 아버지도 혹은 한량도 마찬가지여서 이 두 영역을 다른 세계로 보게 한다. p226

 

결혼 후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육체적으로 끌린다는 것은 그의 아내를 모욕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연히 아내의 소유로 돌아가야 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화목한 가정 생활 속에서조차 아이들은 부모가 성애를 표현하는 행동을 볼 수 없다. 어떤 잡지에서 현대의 한 일본인은 말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결혼의 참다운 목적은, 아이를 낳고 이에 의하여 집안의 생명을 존속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외의 목적은 어느 것이나 결혼의 참다운 의미를 왜곡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결코 일본의 남자가 그와 같은 생활 속에서만 갇혀 품행이 방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여유가 있다면 남자는 정부를 갖는다. 단 중국과 크게 다른 것은 정부를 가정의 일원으로 맞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p226

 

중국에서 전통적 관습으로 굳어진 일부다처제는 따라서 전혀 일본적인 것이 아니다. 일본인은 가족적 의무와 ‘인정’을 공간적으로도 구별한다. p227

 

육체와 정신이라는 두 개의 힘이 각자의 생활에서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서구의 철학을 근본적으로 뒤엎는다. 일본인의 철학에서 육체는 악이 아니다. 가능한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정신과 육체는 우주의 대립하는 2대 세력이 아니다. p231

 

그들은 인간에게 두 가지의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것은 서로 싸우는 선의 충동과 악의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온화한’ 영혼과 ‘거친’ 영혼으로 그들은 모든 인간의 생애에는 ‘온화’해야 할 경우와 ‘거칠어’야 할 경우가 있다고 믿는다. 한쪽의 영혼이 지옥으로, 다른 한쪽이 천국으로 간다고 정해져 있지 않다. 이 두 개의 영혼은 모두 저마다 다른 경우에 필요하며 선이 된다. p232

 

불교철학은 일본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철저하여,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도덕률은 경전 속에서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청정무구한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하는 것에 있다고 설명한다. p234

 

일본인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무의 수행을 인생 최고의 임무로 정해 놓고 있다. 그들은 온을 갚는 일이 개인적 욕망이나 쾌락을 희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행복의 추구를 인생의 중대한 목표로 하는 사상은, 그들에게는 놀랄만한 그리고 부도덕한 가르침이다. p234

 

제10장 덕의 딜레마

 

그리고 사람은 다른 사람을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로 판단하지 않고, ‘고를 모른다’든지, ‘기리를 모른다’든지 하는 말로 판단한다. 그들은 미국인처럼 어떤 사람을 부정하다고 비난하는 대신에, 그 사람이 해야 할 의무를 완전히 수행하지 않은 행동의 세계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어떤 사람이 이기적이라든지 불친절하다든지 하고 비난하는 대신에, 일본인은 그 사람이 위반한 법도의 특정 영역을 명시한다. p240

 

미개와 문명을 가릴 것 없이 대다수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저마다 특정한 종류의 인간으로서 행동하고 있다면, 타인이 자기의 의사에 복종하는 정도를 기준으로 하여, 실패와 성공을 측정한다.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인간적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는 희망을 채울 수 없다. p242

 

주인공은 그들의 어깨에 걸려 있는 하나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그리고 이때 다른 의무를 경시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마지막에 가서는 전에 경시한 ‘세계’와 결산을 한다. p244

 

‘일시적인 기리’밖에 갖지 않은 인간과 ‘진정한 기리’를 가진 인간을 구별하는 방법으로서, 그는 주군의 재산을 어떻게 분배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를 내놓아 보았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이것은 그들의 가족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므로, 그들이 이미 자결에 동의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시험법이었다. p247-248

 

그들의 첫 번째 과제라는 기라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 흩어져서 명예라는 것은 일체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가장하였다. 오이시는 가장 저속한 창녀집에 틀어박혀 추악한 싸움질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이와 같은 방종한 생활을 핑계삼아 아내와 헤어졌다. 이것은 법률에 위반하는 행위를 하려는 일본인 누구나가 통상 사용하는, 또한 완전히 정단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단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처자는 그와 더불어 궁극적 행위의 책임을 추궁당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시의 처는 울며 그와 헤어졌지만 그의 아들은 로닌의 무리에 가담하였다. p248

 

일본인은 자주, 자기나 타인의 행위를 설명하고 또 정당화하기 위해 칙유의 다른 대목-“기란 자기 의무를 다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만 진실하다면 무슨 일이나 이룰 수 있다”-을 인용한다. 그렇지만 자주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정의 신의를 지키는 것을 금하는 경고를 입에 담는 일은 드문 것 같다. 기리는 오늘날에도 매우 큰 권위를 가진 덕으로 “기리를 모르는 놈”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가장 심한 비난의 하나이다. p260

 

마코토라는 말이... 그것은 항상 일반적으로 ‘일본정신’이라고 인정되는 어떤 측면의 칭찬, 덕의 지도 위에 세워져 있는 공인된 이정표의 칭찬이라고 해석하면 틀림이 없다. ‘성실’이 미국인이 생각하고 잇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 말은 모든 일본어 문헌에서 주의해야 할, 극히 유용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말로 표현되고 있는 사항은 언제나 일본인이 실제로 중점을 두고 있는 적극적인 덕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마코토는 사리를 추구하지 않는 인간을 칭찬하는 말로서 끊임없이 사용된다. 이 사실은 일본인의 윤리가 이윤의 추구를 매우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p267

 

이처럼 신중과 자중을 동일시한다는 것 속에는 타인의 행동 속에서 알 수 있는 모든 암시에 방심하지 말고 마음을 쓸 것, 그리고 타인이 자기의 행동을 비판한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p272

 

그런데 명예가 자신이 마음속에 그린 이상적인 자아에 걸맞도록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은 자기의 비행을 아무도 모른다 해도 죄의식에 고민한다. 그리고 그의 죄책감은 지를 고백함으로써 경감된다. 미국에 이주한 초기의 청교도들은 일체의 도덕을 죄책감의 기초 위에 두려고 노력하였다. p274

 

일본인은 치욕감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다. 분명히 정해진 선행의 도표에 따를 수 없는 것, 여러 가지 의무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일어날 수 있는 우연을 예견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치욕(하지)이다. 그들은 수치는 덕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수치를 느끼기 쉬운 인간이야말로 선행의 모든 율법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수치를 아는 사람’이라는 말은, 어느 때는 ‘virtuous man(유덕한 사람)’, 어느 때는 ‘man of honor(명예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로 번역된다. 수치는 일본의 윤리에서 ‘양심의 결백’,‘신에게 의로 여겨지는 것’, 죄를 피하는 것이 서구의 윤리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권위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사람은 사후 세계에서 벌을 받을 일이 없다. p274

 

일본인의 생활에서 수치가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를 심각하게 느끼는 부족 또는 국민이 모두 그러하듯이, 각자가 자기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마음을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으 다만 타인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 하는 것을 추측하고, 그 판단을 기준으로 하여 자기의 행동 방침을 정한다. 모두가 같은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하여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있을 때에는 일본인은 쾌활하고 편하게 행동할 수가 있다. 그들은 그것이 일본의 ‘사명’을 수행하는 길이라고 느끼는 경우에는 게임에 열중할 수가 있다. 그들이 가장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은 그들의 덕을 일본 특유의 선행 도표가 그대로 통용되지 않는 외국에 적용하려고 시도한 때였다. 그들은 선의에 의거한 ‘대동아’의 사명에 실패했는데, 중국인이나 필리핀인이 그들에게 취한 태도에 대하여 많은 일본인이 느낀 분노는 거짓없는 감정이었다. p275

 

국가주의적 동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학이나 업무상의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개개의 일본인 또한 도덕이 그다지 딱딱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세계에서 생활할 때, 그들이 지금까지 받아 온 주도면밀한 교육의 ‘파탄’을 통감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덕이 대외적으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p275

 

외국인이 이런 예절을 일체 무시하는 것을 보고 일본인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들은 어떻게든 서구인이 일본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생활이 기준으로 삼고 있는 면밀한 예절을 발견해 내려 한다. 그리고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일본인은 화가 났다고 말하고, 어떤 일본인은 깜짝 놀랐다고 말하고 있다. p276

 

미시마의 자서전 <나의 좁은 섬나라>

교수도 학우도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녀는 더욱 괴로움을 느꼈다. “일본인 누구나가 그러하듯, 나도 나의 행동이 전혀 흠잡힐 데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자랑스러움은 무참히도 상처받았다. 나는 이 나라에서는 대체 어떻게 행동하면 되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하여, 또 내가 이때까지 받아 온 예절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진 환경에 대하여 분노를 느꼈다. 이 막연한, 그러나 뿌리 깊은 분노의 감정 외에는 이미 아무런 감정도 나에게 남지 않게 되었다. .. ”나는 나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감각과 감정을 가진, 어느 다른 유성에서 떨어져 온 생물체처럼 느껴졌다. 모든 동작을 얌전하게 하고, 모든 말투를 예의에 맞도록 하기를 요구하는 나의 일본식 예절이, 이 나라의 환경 속에서 나를 극도의 신경 과민과 자의식에 빠지게 하였다“고 쓰고 있다. p277

 

“중국의 여성들은 대개의 일본 여성들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차분함과 사교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상류의 중국 여성들은 한결같이 여왕과 같은 우아함을 가지고 세계의 참다운 지배자인 것 같은 취향이 있어서, 나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사람들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 위대한 기계와 스피드 문명 속에서 있으면서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 그녀들의 겁내지 않는 태도와 당당한 침착성은 우리 일본 여성의 끊임없이 겁에 질린, 과도하게 신경질적인 태도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적 배경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을 터이다.” p277

 

분재로 꾸며진 소나무 뿌리가 화분 속에 갇혀 있는 동안은 아름다운 정원에 미관을 더해주는 예술품이 된다. 그런데 한 번 직접 대지에 옮겨 심어진 분재 소나무는 절대로 다시 원상으로 되돌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은 이미 도저히 저 일본 정원의 장식이 될 수는 없다고 느낀다. 그들은 두 번 다시 옛날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첨예한 형태로 일본인의 덕의 딜레마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p278

 

제11장 자기 수양

 

일본인은 단지 기독교와 비행기를 연결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침착하고 일을 할 때에 당황하지 않는 마음’을 기르는 훈련을, 교육학 시험을 치를 때에도, 연설을 할 때에도, 정치가로서 활약할 때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일로 생각하고 있다. 집중하는 태도를 기르는 훈련은 거의 어떤 사업을 할 경우에도 틀림없이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p289

 

많은 문명이 이런 종류의 훈련법을 발달시키고 있는데, 일본의 목표와 방법은 완전히 독자적이고 현저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수행법이 대개 인도의 요가라고 불리는 수행에서 유래되는 것인 만큼 더욱 흥미 있는 일이다. 일본의 자기 최면이나 정신 집중이나 오관 제어 방법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의 관행과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 신체를 부동으로 유지하는 것, 동일한 문구를 몇 만 번이나 되풀이 하는 것, 어느 일정한 상징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에 역점을 둔다. p290

 

일본은 불교국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윤회와 열반 사상이 국민의 불교적 신앙의 일부분이 된 일이 없다. p290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육체와 정신이 대립된다는 교의이다. 요가 수행은 욕망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욕망은 육체 속에 머문다. 그런데 일본인은 이런 가르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정’은 악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관능의 즐거움을 맛보는 것은 생활의 지혜의 일부분이 되어 있다. 유일한 조건은 관능은 인생의 중대한 의무 앞에서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p292

 

“놀랍습니다. 저는 선승은 경전이나 이론이나 논리적 설명의 체계 따위는 경멸하고 계시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요”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선승은, “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고, ‘아는 것(깨달음)’은 모든 경전, 모든 문헌의 밖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너는 아는 것(깨달음)을 원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경전의 설명을 듣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대답하였다. p297

 

제자에게 전력을 다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 가장 애용되는 방법은 ‘고안’잉T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문제’라는 뜻으로... 선의 고안은 12세기 혹은 13세기 이전의 중국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선종과 함께 이 수단들을 채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안은 중국 대륙에서는 없어졌지만 일본에서는 ‘숙달’ 수행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되었다. 선의 입문서에서는 고안을 매우 중요시하여 다루고 있다. “고안은 인생의 딜레마를 포장하고 있다.” 고안을 생각하는 사람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진퇴양난의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마치 ‘뜨거운 쇳덩어리를 삼키려 하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p300

 

선의 계시에는 전반에 통하는 일정한 틀이 있다. 그것은 다음 몇 줄의 문답을 통해 알 수 있다.

승 : 어떻게 하면 생사의 윤회를 면할 수 있을까요?

사 : 너를 속박하고 있는 자(즉, 이 윤회에 너를 얽매어 놓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들이 배우는 것은 중국의 유명한 표현을 빌려 말하면, 그때까지 그들은 ‘소에 탄 채 소를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p301

 

만일 심안이 열리기만 하면 목전에 있는 손쉬운 수단으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어떤 일이라도 가능하다. 그것도 자기 이외의 누구의 도움도 빌리지 않고 말이다. p302

 

전혀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조차 일종의 ‘무가’ 체험을 하는 일이 있다. 노나 가부키를 구경하는 사람이 무대에 빨려 들어가 완전히 자신을 잃어버릴 때에도 역시, ‘보는 나’를 잃는다고 말한다. ... 목표에 근접하는 폭격기이 탑승원도 드디어 폭탄을 투하하기 직전에, ‘무가의 땀’을 흘린다. 그는 ‘자기가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의 의식에서는 방관자로서의 자아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 ‘보는 나’를 잃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태에 놓여져 있는 사람은 이상의 어느 경우에도 최상의 컨디션에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일본인이 자기 감시와 자기 감독에 얼마나 중압감을 느끼고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p304

 

미국인은 ‘보는 나’를 자기 안에 있는 이성적 원리로 간주하고 위기에 임해서도 빈틈없이 이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행동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데 반하여, 일본인은 영혼의 삼매경에 몰입하여 자기 감시가 부과하는 제약을 잊을 때 지금까지 목둘레에 매여 있던 무거운 맷돌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문화는 그들의 영혼에,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귀가 따갑게 들려 준다. 그런데 일본인은 이런 무거운 짐을 내팽개쳐 버리는 데에 한층 유효한 일을 할 수 있는 인간 의식의 평명이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이에 대항해 왔던 것이다. p305

 

그런데 일본인은 ‘죽은 셈치고 산다’는 표현을 말없이 열심히 살아간다는 의미로 쓴다. 그것은 보편적인 일상적 사항에 관하여 누군가를 격려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p305

 

종전 후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된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 가가와 도요히코는 그의 자전 소설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치 악마에 이끌린 사람처럼 그는 매일 자기 방에서 울면서 지냈다. 그의 발작적으로 흐느끼는 울음 소리는 히스테리에 가까웠다. 고뇌는 1개월 반이나 계속되었으나 마침내 마지막에 생명이 승리를 얻는다. (중략) 나는 죽음의 힘을 몸에 지니고 살아 가리라. (중략) 나는 죽음 셈치고 싸움 속으로 뛰어들어가자. (중략) 나는 크리스턴이 될 결심을 하였다.” p306

 

그는 죽은 자, 즉 이미 올바른 행동방침이라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를 초월한 사람이 된다. 죽은 자는 이제는 온恩을 갚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는 자유롭다. 따라서 ‘나는 죽은 셈치고 산다’는 표현은 모순 상극으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을 의미한다. p306

 

그는 ‘숙달’의 수행을 쌓아 ‘하지’의 자기 감시를 배제하려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육관’은 장애가 제거된다. 그것은 자의식과 모순 상극으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이다. p308

 

제12장 어린아이는 배운다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바로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자의대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최저선에 달한다. 이 최저선은 장년기를 통하여 몇십 년 계속되는데, 그 후 곡선은 다시 점차로 상승하여 60세가 지나면 유아와 거의 마찬가지로 수치나 외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미국에서는 이 곡선이 정반대이다. p310

 

이처럼 아이들에게 대해 정말 관대한 국민은 아이를 원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일본이 바로 그렇다. 그들이 아이를 원하는 첫 번째 이유는 미국의 부모들이 그런 것처럼 아이를 사랑하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 일본인이 아이를 원하는 것은 단지 정서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혈통을 잇는 데 있다. p311

 

이러한 뿌리 깊은 연속성의 의식 때문에 완전히 성인이 된 자식이 아버지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 미국에 비해 훨씬 오래 계속되어도, 서구 여러 나라에서와 같이 부끄러운 일, 면목없는 일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는다. 여자들도 아이를 원하지만, 그것은 정서적 만족을 얻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여자는 어머니가 됨으로써 비로소 지위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p312

 

옛날 사무라이가 방 밑으로 기어 들어와서 다리미를 이은 틈으로 칼을 넣어서 방 안에 있는 사람을 찔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다다미의 두껍고 부드러운 부분은 안전하고, 다다미의 이음새 틈은 위험한 것이다. p318

 

어른이 된 뒤 타인에게 조롱을 당하게 될 경우에도 이 유아기의 공포가 어디엔가 남아 있게 된다. p321

 

징집병이 군대 교육을 받고 나오면 완전히 인간이 변하여 ‘진짜 저돌적인 국가주의자’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변화는 그들이 전체주의적 국가 이론을 배웠거나 천황에 대한 주가 주입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가장 중대한 원인은 굴욕적인 기합을 당했던 경험일 것이다. 일본식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 ‘자존심’에 집착하는 청년은 그러한 사태에 직면하면 완전히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변하기 쉽다. 그들은 조롱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들이 배척이라고 해석하는 이러한 일은 그들의 차례가 되면 그들을 신랄한 고문자로 만들기도 한다. p338

 

그녀들의 생애는 사내아이의 생애에 비하여 훨씬 변화가 적다. 철이 든 시기부터 그녀들은 어떤 일에서도 사내아이가 우선적이며, 사내아이에게는 여자아이에게 부여되지 않는 보살핌과 선물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훈련되어져 있다. p340

 

스키모토 부인은 다른 대목에서 할머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데, 그 중에 일본의 가장 특징 있는 부모의 태도 하나가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할머니는 조용히 차분하게, 모든 사람이 할머니의 생각대로 행동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나무라거나 반박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할머니의 솜털같이 부드러우면서도 아주 강인한 기대가 항상 그녀의 가족을 그녀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이 ‘솜털같이 부드러우면서도 아주 강인한 기대’가 그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가정교육이 그 어떠한 기술이나 방법보다도 철저하기 때문이다. 가정교육은 ‘습관’이지 규칙은 아니다. p342

 

사내아이는 서투른 솜씨에 대한 두려움을 오랫동안 갖는다. 성행위는 그들의 생활 속에서 뭔가 새로운 종류의 행동을 배울 때, 신뢰할 수 있는 연장자가 몸소 손을 잡고 지도해 주지 않는 극소수의 영역 중의 하나이다. 격식이 있는 집안에서는 젊은 부부가 결혼할 때 ‘마쿠라조시’와 갖가지 체위를 상세하게 그린 두루마리를 준다. p345

 

남자는 결혼 후 그야말로 공공연히 밖에서 성적 쾌락에 빠지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조금도 아내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결혼 생활의 안정을 위협하지 않는다. 아내는 이와 동등한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의 의무는 남편에게 정숙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남편 이외의 남자와 정을 통하고자 한다면 남몰래 눈에 띄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설령 유혹을 받았다 해도 남몰래 정사를 할 수 있을 만한 생활을 하고 있는 부인은 일본에서는 비교적 소수밖에 없다. .. “가장 빈번히 볼 수 있는 부인의 장애는 그 사회 생활이 아니라 성생활과 관련이 있다. 많은 정신 이상 또는 대다수의 히스테리(신경과민, 침착성의 상실)는 분명히 속궁합이 잘 맞지 않는데 기인한 것이다. 여자는 남편이 주는 성적 만족만을 감수해야 한다.” p346

 

남자 친구와 함께 특히 게이샤를 옆에 앉히고 술을 마시는 것이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즐거움이다. p347

 

‘부끄러움을 몰랐던’ 대의 편한 생활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미래에 천국을 그릴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과거에 천국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인간은 본디 선하고 신들은 자애로우며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비할 바 없이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유년시대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유아기의 경험은 모든 인간 속엔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든가 인간은 누구든 죽음과 동시에 가미가 된다고 하는 극단적인 윤리 해석의 바탕이 된다. p348

 

자기 희생이라는 개념은 일본인이 때때로 공격해 온 기독교적인 개념의 하나로서, 그들 자신은 자기를 희생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극단적인 경우에도, 일본인은 주나 고, 또는 기리의 부채를 갚기 위하여 ‘자진해서’ 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자기 희생의 범주에 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p352

 

그러나 일본인은 스스로에게 많은 요구를 한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여 비방을 받는 큰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모처럼 맛을 알게 된 개인적인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 그들은 인생의 중대사에서는 그러한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 이와 같은 패턴을 위반하는 소수의 인간들은 스스로에 대한 존경을 상실하는 위험에 빠진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인간은 '선이냐 악이냐가 아니라,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이 되느냐 ‘기대에 어긋나는 인간’이 되느냐는 것을 목표로 삼아 진로를 정하며, 세상 사람 일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포기한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부끄러움’(하지)을 알고 한없이 신중하고도 훌륭한 인간이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가정에, 자기 마을에, 또한 자기 나라에 명예를 가져오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하여 빚어지는 긴장은 대단히 커서, 일본을 동양의 지도자이자 세계의 일대 강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고상한 대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긴장은 개인에게는 무거운 부담이다. p357

 

때로는 참고 참았던 울분을 폭발시켜 극도로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이 그러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미국인처럼 자신의 주의주장이나 자유가 도전을 받았을 때가 아니라, 모욕당했거나 비방당했다고 느꼈을 때이다. 그때 그들의 위험한 자아는 만일 가능하다면 그 비방자에게,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향해 폭발한다. p357

 

무엇을 심어도 좋은 이 정원은 나에게 개인의 권리라고 하는, 아직까지 경험한 일이 없는 전혀 새로운 감정을 맛보게 하였다. (중략) 그러한 행복이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놀라움이었다. (중략) 지금까지 한 번도 법도를 어긴 일도 없고,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일도 없고, 부모나 선생님이나 마을 사람들의 빈축을 산 일도 없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어떠한 피해도 끼친 적이 없는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꽃을 심었다. 그런데 그녀가 심고자 했던 것은 감자였다.

이 바보 같은 행위로 내가 얻을 수 있었던 무모한 자유의 감정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중략) 자유의 정신은 나의 문을 노크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였다. p358

 

이 고리를 뗄 기회를 얻은 스기모토 부인의 흥분은 행복하고도 순수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작은 화분 속에서 정성껏 재배되어 꽃잎 하나하나 가지런히 가꿔진 국화가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는 데 대한 순수한 즐거움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며 ‘하지(부끄러움)’의 강제력에 의혹을 품는 자유는 그들의 생활 양식의 미묘한 균형을 깨뜨릴 우려가 있다. 그들은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강제력을 습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값비싼 것이다.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도덕을 수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p359

 

이러한 일본적인 의미에서 칼이란 공격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적이며 훌륭히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비유이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시대에서 이 덕은 가장 훌륭한 평형의 역할을 한다. 더구나 이 덕은 일본 아이들의 훈육과 행위의 철학을 통해 일본 정신의 일부로서 일본인의 마음에 심어 온 덕이다. 오늘날 일본은 서구적 의미에서 ‘칼을 버리고 항복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런데 일본적인 의미에서 일본인은 여전히 자칫하면 녹이 슬기 쉬운 마음속의 칼을 녹슬지 않게 하는 일에 마음을 쓰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도덕적인 어법에 의하면, 칼은 더욱 자유롭고 더욱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상징인 것이다. p360-361

 

제13장 패전 후의 일본인

 

그 결정은 맥아더 장군 사령부의 전면적 지지를 얻었다. 그 내용은 일본 국민이 자국의 행정 및 재건의 책임을 진다는 것이었다. “최고 사령관은 미 합중국의 목적을 만족시키는 한 일본국 정부의 기구와 천황을 포함한 여러 기관을 통해서 그 권력을 행사한다. ...” p364

 

독일인은 일본인처럼 자기를 세상과 조상의 채무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인은 무한한 부채를 갚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희생자가 되기를 싫어한다. 아버지는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인간이 그러한 것처럼 강압적이어서, 독일인의 표현과 같이 ‘존경을 강제한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면 그는 불안해한다. 독일인의 생활에서 아들의 세대는 각기 청년기엔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반발한다. p366

 

독일인의 일생을 통해 생활이 가장 활기를 띠는 것은 청년기적 반항기인 질풍노도기(Sturm und Drang)의 몇 년간이다. p367

 

일본인은 그들이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사리나 부정에 대해 반항하기는 하나 결코 혁명가는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세계의 조직을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찍이 메이지 시대에 행한 것같이 제도 그 자체에는 조금도 비난을 퍼붓지 않고도 가장 철저한 변혁을 실현할 수가 있었다. p368

 

일본이 평화 국가로 출발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참된 장점은, 어떤 행동 방침에 대해 “실패로 끝났다”고 인정한 뒤부터는 다른 방향을 향해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p371

 

일본인은 자신이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때는 복수하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다. 서구의 윤리가 이러한 신조를 아무리 맹렬히 비난하더라도 미국의 일본 점령이 효과를 거두느냐 거두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미국이 이 점을 신중히 처리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일본인은 그들이 모욕당하는 것과 항복 조건에 따라 일체의 군비를 빼앗기고 더욱 가혹한 배상 의무를 담당한다는 내요을 포함한 ‘당연한 결과’를 확실히 구별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일찍이 강대국을 이긴 바 있다. 일본이 전승국이 되었을 때 적이 마침내 항복하고 그 적국이 일본을 조소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세심한 마음을 써서 패배한 적에게 모욕을 주지 않으려 애쓴 증거가 있다. p374

 

미국이 할 수 없는 것-어느 나라에서도 할 수 없는 것-은 명령으로 자유로운 민주적 일본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러한 방법은 어떠한 피지배국에서도 지금까지 성공을 거둔 일이 없다. 어느 외국인도 자기와 같은 습관이나 가정을 가지지 않은 국민에게 자기와 같은 생각이나 생활 방식을 따르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p382

 

나는 결코 일본이 본래 평화 국가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다.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구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무장된 진영으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이다. p384

 

3. 내가 저자라면

 

일본은 세계 곳곳에 있었다. 이미 백년 쯤 전에 영국과 수교를 시작했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아낸 그들의 사절단이 영국을 방문했던 오래된 흑백사진이 그 증거였다. 네덜란드에 갔을 때에도, 고흐의 작품 속에서도 일본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 부터였다. 한참 독도와 동해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간의 신경전이 있었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오래 된 대부분 세계 지도에 ‘Japan Sea'라고 기록된 자료들을 더 흔히 볼 수 있었고, 한국보다도 훨씬 앞서서 세계의 흐름에 뛰어든 그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싶었다. 만약 우리가 일본보다 먼저 세계 속에 우리를 알리는 일에 나섰다면, 우리 또한 ‘동해’라고 쓰여지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의 문턱에 서 있다고 하지만, 아직껏 그들에게 한국은 올림픽을 치룬 나라, 2002년에 월드컵을 치뤘고,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서 적당히 중간적인 문화를 가진 유일한 분단국가쯤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더러 어떤 친구들은 ‘삼성’이 일본 회사가 아니냐는 질문을 되묻곤 했다. 그것이 세계인들 속에 비친 우리의 현실이었다.

 

내가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들의 문화에 대해 가장 가까이 접하게 된 것은 영국생활시절이었다. 일본이 아니었다. 약 7개월 정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많은 일본인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그중 몇은 지금껏 연락을 하고 지내는 소위 말하는 ‘베프’로 지내고 있다. 가끔씩 일본 출장길에 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기도 하고, 전주를 직접 찾아온 이들도 있었다. 비록 그들과 내가 약 십년 정도의 나이차가 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한국인 친구인 ‘나’는 그냥 ‘Jin’으로 불렸다.

 

서양인들의 눈에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을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코지’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괴테가 자주 들렀다는 카페에서 영어로 ‘괴테’를 이야기 하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왜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굳이 영어를 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내가 봐도 닮았다. 외모도 닮았고, 사고와 문화도 비슷한 점이 많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양인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한국인과는 다른 일본인들만의 조그만 차이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딱히 ‘무엇이다’라고 꼬집어 낼 수 없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문화인류학의 재미에 흠뻑 빠져 버렸다. 관찰자는 자신의 문화, 자신의 과거, 자신의 틀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과는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반응을 보이고, 다르게 생각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단순한 식당에서의 에티켓 하나에서부터 뿌리 깊게 자리한 자연에 대한 신앙과 천황에 대한 태도, 웃음 뒤에 감춰진 사무라이의 칼, 카미가제 조종사들도 바로 일본인들이다.

 

이번 달 책들의 목록을 다시 보았다. 결국 ‘코리아니티’였다. 선생님이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나로 들여다보는 것이고, 우리를 거울에 비춰보자는 것이었다. 쉬운 책이었지만, 쉽게 읽지는 못하였다.

 

해외여행이 자유화 된지가 약 30년 정도 되어간다. 한 세대를 의미하는 시간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우리를 정점으로 하는 바로 윗세대와는 달리 ‘글로벌 리더’로서 한국인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다. 그들의 꿈은 한국 사회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으로 좁혀져 있지 않는다. UN의 산하기관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친구들도 있고, 국제 NGO에 대한 관심들도 높아져 가고 있다. 아프리카의 굶주린 어린 아이들의 사진을 책상 앞에 붙여 두고 일하는 후배들도 있고, 굳이 공정무역 커피만을 고집하는 친구들도 늘어가고 있다.

 

이 변화의 시대, 세계를 상대로 그 흐름을 읽어가고, 발맞추어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이 좁은 땅덩어리 안에 녹아져 있다. 중국에는 남아 있지 않은 유교적 전통에, 아직도 섬나라 쪽바리라고 주저없이 말하는 반일감정과 사대주의(일본은 우리보다 한 끝발 아랫 것들이라는...), 영국에 의한 일본보다는 더 미국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 불교적 전통과 최근에 유행하는 명상과 요가와 같은 힌두교적 영향에다가 짧지 않은 기독교 문화 그리고 New-Age로 불리우는 또 다른 흐름들. 그리고 아직도 떠돌고 있는 맑스주의의 유령과 생태주의의 도전. 얽히고 설킨 복잡한 실타래를 두고.. 무엇이 나를 만들었고, 무엇이 우리를 움직여가고 있는 지를 당췌 걷잡을 수 없는 시간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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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4 북리뷰 63 : 죽음 그리고 성장 - 퀴블러 로스 [2] 범해 좌경숙 2010.12.15 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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