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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7일 07시 50분 등록

[북리뷰 49]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 and the Remaining of World Order

 

1. 저자에 대하여

Samuel P. Huntington

군사정치학과 비교정치학 분야에서 학문적 성과를 올리고 이론정치와 현실정치를 두루 체험한 정치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베트남전쟁 당시 '전략촌' 정책을 수립했으며, 1974년부터 1976년까지 국방 및 군비감축 민주당자문회의 의장을 지내고, 카터(Jimmy Carter) 행정부 때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안보기획조정관을 지내는 등 현실정치에 적극 참여했다. 1970년에는 계간 시사전문지 「Foreign Policy」을 창간해 공동 편집인으로 활약했으며, 미국 정치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2008년 12월 24일 향년 81세로 생을 마감했다.

 

역자 : 이희재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독문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20여 년 동안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였으며 영국 런던대 SOAS(아시아아프리카대학) 방문학자를 지냈다. 현재 영국 옥스퍼드대학 동양학부에서 동아시아 영어사전의 역사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주요 번역서로는 『마음의 진보』『번역사 오디세이』『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미완의 시대』『새벽에서 황혼까지』『문명의 충돌』『마음의 진화』『시간 여행』『리오리엔트』『그린 마일』『몰입의 즐거움』『지오그래피』『소유의 종말』『브루넬레스키의 돔』『반 자본 발전 사전』 등이 있고, 저서로는 20여 년간의 번역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독창적 번역론 『번역의 탄생』이 있다.

 

2. 가슴을 무찔러드는 글귀

 

추천사

정작 더 중요한 문제는 지금까지 부각되지 않고 있던 경제 외적 가치가 경제적 가치 대신 세계를 움직여 가는 화두가 될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이 문제를 탐구한 것이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다. 이데올로기 대립에 억눌려 역사 흐름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던 문명간의 갈등이 이제부터 수면 위로 터져 나올 것이라고 헌팅턴을 전망한다.

 

헌팅턴이 바라보는 장래 세계에서 경쟁과 대항의 주체는 ‘문명’이다. ‘야만’과 대비되는 보편적 의미의 ‘문명’이 아니라 언어, 종교 등 여러 가지 문화적 특질의 집합체로서 세계의 여러 지역에 자리 잡아 온 ‘문명권’들을 말하는 것이다. 문명권을 구분하는 1차 기준은 종교다. 이에 따라 크리스트교권, 정교권, 이슬람권, 유교권, 불교권, 힌두권 등이 설정되지만, 종교가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권, 아프리카권(非이슬람), 일본권 등도 설정되는 것이다.

 

서문

“문명과 문명의 충돌은 세계 평화에 가장 큰 위협이 되며, 문명에 바탕을 둔 국제 질서만이 세계 대전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어 수단이다.” ... 냉전 이후의 세계 정세의 변화를 해석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 책은 학자들이 의미있게 받아들이고 정책 입안가들이 쓸모 있게 활용할 수 있는, 세계정세를 바라보는 해석틀이라고 할 수 있는 패러다임(paradigm)을 제공하겠다는 야심을 담았다.

 

1. 새로운 세계 정세

 

국기와 문화 정체성

냉전이 끝나고 몇 년에 걸쳐 민족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의 상징에 극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거꾸로 걸린 깃발은 과도기의 징후였지만 국기는 점점 높고 바르게 걸리고, 러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국민들이 이런 국기 혹은 고유한 문화 정체성의 새로운 상징물을 앞세워 행진을 벌이며 또 그것에 동원되고 있다. p17

 

탈냉전 시대에 들어오면서 깃발을 비롯하여 십자가, 초승달 같은 문화 정체성의 상징물이 중요해졌다. 문화가 중요해졌고, 문화 정체성이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p18

 

딥딘(Michael Dibdin)의 소설 ‘죽은 목(Dead Lagoon)'에 등장하는 베네치아의 민족주의적 선동가는 이 새로운 시대의 음울한 세계관을 잘 표현하였다. “진정한 적수가 없으면 진정한 동지도 있을 수 없다. 우리 아닌 것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 것을 사랑할 수 없다. 이것은 백년이 넘도록 지속되어 온 감상적이고 위선적인 표어가 물러간 자리에서 우리가 고통스럽게 다시 발견하고 있는 뿌리 깊은 진리다.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족, 정신적 유산, 문화, 타고난 권리, 스스로를 부정하는 셈이다. 이것은 사소하게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니다.” 이 해묵은 명제에 담겨 있는 불행한 진실을 정치인과 학자는 묵과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민족성을 재창조하려는 민족에게 적수가 반드시 필요하며, 잠재적으로 가장 위험한 적대감은 세계 주요 문명들 사이의 단층선에서 불거진다. p18

 

1부: 사상 최초로 세계 정치가 다극화, 다문명화되었다. 경제와 사회의 현대화는 의미를 지닌 보편 문명을 낳지 못하고 비서구 사회를 서구화하는 데도 실패했다.

2부: 서구의 상대적 영향력이 줄어들고, 아시아 문명의 경제력, 군사력, 정치력이 확대되고 이슬람권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이슬람 국가들과 그 인접 국가들의 세력 균형이 위협받게 되면서, 비서구 문명들은 전반적으로 자기 고유 문화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3부: 문명에 기반을 둔 세계 질서가 태동하고 있다. 문화적 친화력을 갖는 사회들은 서로 협조한다. 한 사회를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이전시키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국가들은 자기 문명권의 주도국 혹은 핵심국을 중심으로 뭉친다.

4부: 보편성을 자처하는 서구의 자세는 다른 문명, 특히 이슬람,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다. 국지적 차원에서는 주로 이슬람권과 비이슬람권 사이의 단층선 분쟁에서 ‘형제국들의 규합’을 통해 확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상존한다. 분쟁을 저지하려는 핵심국의 노력도 두드러진다.

5부: 서구의 생존은 미국이 자신의 서구적 정체성을 재인식하고 자기 문명을 보편이 아닌 특수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비서구 사회로부터 오는 위협에 맞서 힘을 합쳐 자신의 문명을 혁신하고 수호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문명간의 대규모 전쟁을 피하려면 전 세계 지도자들이 세계정치의 다문명적 본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협조해야 한다. p19

 

세계 정치는 문화와 문명의 괘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전파력이 크며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갈등은 사회적 계급, 빈부, 경제적으로 정의되는 집단 사이에 나타나지 않고 상이한 문화적 배경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날 것이다. p21

 

문명마다 철학적 전제, 밑바탕에 깔린 가치관, 사회관계, 관습, 삶을 바라보는 총체적 전망을 크게 다르다. 세계 전역에서 불고 있는 종교의 부흥 바람은 이런 문화적 차이를 더욱 조장하고 있다. 문화는 달라질 수 있고 문화가 정치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의 성격도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문명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정치 경제적 바전의 중요한 차이는 상이한 문화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으며, 동아시아 사회가 안정된 민주 정치 체제를 이룩하는 데서 직면하는 어려움 역시 그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슬람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민주주의 좌절 현상은 대체로 이슬람 문화의 울타리 안에서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 p28

 

쿤(Thomas Kuhn)이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지적한 것처럼 지적, 과학적 진보는 새로운 사실이나 새롭게 발견된 사실을 설명하는 데 그 힘을 점차 잃어 가고 있는 어떤 패러다임으로부터 좀더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p30

 

1차 대전은 ‘전쟁을 종식시키는 전쟁’이었고 세계의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전쟁이었다. 2차 대전은 루스벨트의 표현으로는 ‘일방적 행동 체제, 배타적 동맹, 군사적 긴장, 그 밖의 몇 세기 동안 시도하였으나 번번히 실패를 거듭해 온 편법들을 종식시키는’ 전쟁이었다. 평화를 애호하는 국가들로 이루어진 세계 기구와 평화의 영구 불변한 구조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은 공산주의, 파시즘을 낳았고 민주주의를 향한 한 세기 동안의 흐름을 되돌려 놓았다. 2차 대전은 세계적 규모의 진짜 냉전을 낳았다. 민족 분쟁과 ‘민족 청소(ethnic cleansing)'의 급증, 법과 질서의 붕괴, 국가간에 새롭게 나타난 동맹과 분쟁의 양상, 네오코뮤니즘과 네오파시즘 운동의 부활, 원리주의 종파의 대두,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를 특징지웠던 미소 외교와 순응 정책의 종식, 국지적 유혈 분쟁을 막지 못하는 유엔과 미국의 무능력, 점점 부상하는 중국의 자기주장으로 냉전의 종식과 얼마 안 가서 산산조각 났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나서 5년 동안 ‘대량 학살’이라는 단어가 함께 찾아온 환상은 과거 냉전 시대의 그 어떤 5년 동안보다도 훨씬 자주 들렀다. 조화로운 단일 세계의 패러다임은 탈냉전 세계의 쓸모 있는 길잡이가 되기에는 현실로부터 너무 벗어나 있다. p33

 

국가는 세계 문제를 주도하는 실체이며 앞으로도 그런 역할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국가는 군대를 유지하고 외교를 벌이며 조약을 협상하고 전쟁을 하며 국제 기구를 통제하고 생산과 교역에 영향을 미치고 그 내용을 상당 부분 규정한다. 국가를 이끄는 정부는 자기 나라의 대외 안보를 굳건히 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전반적으로 이 국가 단위의 패러다임은 한 세계나 두 세계의 패러다임보다는 세계 정치를 더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대한 한계가 있다. 이 패러다임은 모든 국가가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 관계를 깨닫고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p36

 

국가는 세계 문제에서 일차적 주역으로 여전히 남아 있지만 국가의 주권, 기능, 힘은 약화되는 추세에 있다. 국제 기구는 국가가 자국 영토에서 벌이는 행위를 결정하고 제지할 수 있는 권리를 고집하고 있다. 유럽에서 특히 현저하게 타나나는 현상이지만 국제 기구는 이제까지 국가가 수행한 중요한 기능을 떠맡고 나섰으며 개별 시민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국제 관료 조직이 탄생하였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중앙 정부는 하위 수준의 지역, 지방 자치 단체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추세에 있다. 중앙 정부는 자기 나라 안팎에서 유입되고 유출되는 자금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기능을 상당 부분 잃었으며 사상, 기술, 상품, 노동력의 흐름을 통제하는 데도 차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한마디로 국경선은 점차 허술해지고 있다. p37

 

세계를 일곱 개나 여덟 개의 문명으로 이해하면 이런 난점의 상당수를 피할 수 있다. 이것은 단일 세계나 양분 세계의 패러다임처럼 경제성을 위해 현실성을 희생시키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국가 패러다임이나 혼돈 패러다임처럼 현실성을 위해 경제성을 희생시키는 방식도 아니다. 문명 패러다임은 중첩된 갈등들 중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려내어 미래의 사태 발전을 예측하고 정책 입안가들에게 필요한 지침을 제공함으로써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쉽고 지혜로운 분석틀을 내놓는다. 이것은 다른 패러다임들의 요소를 받아들이는 데도 인색하지 않다. 다른 패러다임들과의 양립 가능성도 남달리 뛰어나다. p39

 

-이 세계에는 통합력이 현실로 존재하고 있으며 바로 그것이 문화적 자기 주장과 문명적 자기 의식의 저항력을 낳고 있다.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양분되어 있지만, 그 중요한 구분선은 지금까지 주도권을 행사해 온 서구와, 자기들끼리의 공통성을 거의 갖지 않은 나머지가 세계를 가로지르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세계는 하나의 서구와 다수의 비서구로 나뉘어져 있다.

-국민 국가는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세계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을 맡겠지만, 국민 국가의 이해 관계, 결속, 갈등은 점차 문화적, 문명적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

-세계는 실제로 부족 갈등과 민족 갈등으로 점철된 무정부 상태에 있지만, 안정을 저해하는 가장 큰 위협을 낳는 갈등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국가나 집단간의 분쟁이다. p40

 

마이샤이머는 장구하 뿌리를 갖는 이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통합된 단일 실체로서의 ‘현실주의’ 국가 패러다임을 따르다 보니 전적으로 무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p41

 

여기서 브로델(Fernand Braudel)의 지혜로운 경고에 귀 기울여 보자. “오늘의 세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특히 그 안에서 행위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세계 지도를 펴놓고 오늘날 어떤 문명들이 존재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고 그리하여 그 문명들의 경계선, 중심부와 주변부, 세력권과 그 안의 분위기, 그 문명들 안에 존재하며 긴밀하게 연결된 일반적이거나 특수한 형태를 정의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오판이 생길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p44

 

2. 과거와 현재의 문명

 

한 개인이 속해 있는 문명은 그가 강렬한 귀속감을 느끼는 가장 광범위한 수준의 공동체다. 문명은 우리가 저 밖에 잇는 ‘그들’과는 구별되게 그 안에 있으면 문화적으로 친숙감을 느끼는 가장 큰 ‘우리’다. p49

 

멜코가 관련 문헌을 검토한 뒤 결론짓듯이 최소한 열두 개의 주요 문명에 대해서는 무리 없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그중 일곱 개(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크레타, 그리스-로마, 비잔틴, 중미, 안데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다섯 개(중국, 일본, 인도, 이슬람, 서구)는 지금도 존재한다. ... 러시아 정교 문명을 덧붙이기도 한다. .. 라틴아메리카, 나아가서는 아프리카 문명을 추가하는 것이 유익할 듯하다. p52

 

서구는 유럽, 북미, 호주와 뉴질랜드처럼 유럽인이 정착한 나라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서구를 구성하는 두 중심 지역 사이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건국 이후로 미국인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자기들의 사회가 유럽과 대립 관계에 있다고 이해하였다. 미국은 자유, 평등, 기회, 미래의 땅인 반면, 유럽은 억압, 계급 갈등, 신분제, 후진성을 상징하였다. p55

 

‘서구’라는 말은 이제 예전의 서구 크리스트교 국가권을 일컫는 말로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볼 때 서구는 특정한 민족이나 종교, 지역의 이름이 아니라 나침반의 방위로만 확인되는 유일한 문명이다. .. 역사적으로 서구 문명은 유럽문명이다. p55

 

문제는 무엇이 동이고 서인가다. 그 답은 우리의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동양’과 ‘서양’은 원래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일원과 서쪽 일원을 가리켰던 표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극동 지역은 실은 극서지역이다. 중국 역사에서는 서양이 인도로 받아들여지던 시기가 압도적으로 길었으며, 일본에서 ‘서양’하면 대개 중국을 뜻하였다. p55

 

베버가 말한 5대 세계 종교 중에서 넷은-크리스트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거대 문명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슬람교, 크리스트교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일찌감치 2개의 가지로 갈라졌으며, 크리스트교처럼 자신이 발생한 땅에서는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 거대 종교이기는 하지만 거대 문명의 바탕이 되지는 못했다. p56

 

유대문명의 경우는 어떠한가? .. 신도의 수를 따지자면 유대교는 주요 종교가 아니다. 토인비는 유대교를 고대 시리아 문명에서 유래하여 발전이 중지된 문명으로 풀이한다. ... 이스라엘이 들어서면서 유대문명은 종교, 언어, 관습, 문학, 제도, 영토적 정치적 거점 같은 문명으로서의 객관적 자격 요건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p57

 

사상과 기술은 문명에서 문명으로 전파되었지만 그러기에는 몇 세기가 족히 걸렸다. 정복의 결과가 아닌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적 전파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북부 인도에서 출현한 지 약 600년 만에 이루어진 불교의 중국 전래라 할 수 있다. .... 문명과 문명의 가장 극적이면서 의미심장한 접촉은 한 문명권의 사람들이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을 정복하여 제거하거나 자기들 밑으로 복속시켰을 때 일어났다. p59

 

인쇄술은 기원후 8세기에 중국에서 발명되었고 활자는 11세기에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 기술이 유럽에 전달된 것은 14세기였다. 종이는 기원 후 2세기에 중국에서 만들어져 7세기에 일본에 전달되었지만 서쪽으로는 8세기경 중앙아시아에, 10세기경 북아프리카에, 12세기경 스페인에, 13세기경 북유럽에 전해졌다. 역시 중국이 9세기에 발명한 화약은 몇백 년 뒤 아랍에 보급되었으며 유럽에는 14세기에 들어가서야 소개되었다. p59

 

1500년에 이르러 유럽의 르네상스 문화는 이미 안정기로 접어들었으며 사회적 다원주의, 무역의 팽창, 기술 발전은 세계 정치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문명과 문명 사이의 제한적, 간헐적 접촉은 다른 모든 문명들에 대한 서구의 지속적, 일방적, 압도적 영향력 행사로 성격이 바뀌었다. 15세기 말이 되자 무어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침내 축출당하고 포르투갈의 아시아 정복과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250년 동안 서반구 전역과 아시아 주요 지역은 유럽의 지배를 받거나 그 주도권 아래 들어간다. p60

 

1800년에 영국은 150만 평방마일의 영토와 2천만 명의 인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태양이지지 않는다던 1900년 빅토리아 시대의 대영 제국은 1100만 평방마일의 영토와 3억 9천만 명의 인구를 거느리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세력 팽창과정에서 안데스 및 메소아메리카 문명과 함께 서구에 복속되었다. 중국도 서구의 침략을 받고 서구에 종속당하는 운명에 놓였다. 고도로 중앙 집권화된 통치 집단이 지배하던 러시아, 일본, 에티오피아만이 서구의 침탈에 저항하여 의미 있는 독자적 위치를 고수하였다. 대체로 400년 동안 문명과 문명의 관계는 서구 문명에 대한 다른 문명들의 종속으로 나타났다. p61

 

파커는 “서구의 부상은 대체로 무력 행사의 산물이었다. 유럽과 그 경쟁 세력의 군사적 균형이 유럽 쪽으로 서서히 기울었다는 사실이 유럽을 부상시킨 것이다.... 서구인이 1500년에서 1750년 사이에 최초의 진정한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 것은, ‘군사적 혁명’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전쟁 수행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는데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서구의 팽창은 또한 군대 조직과 군사 훈련의 우위, 산업 혁명을 선도하면서 얻은 무기, 수송 수단, 병참술, 의료서비스면에서의 우위 때문에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서구는 사상, 가치관, 종교의 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이것들은 다른 문명의 개종을 별로 낳지 못했다.) 조직화된 폭력의 우위로 세계를 정복하였다. 서구인은 종종 이런 사실을 잊지만, 비서구인은 결코 이 점을 망각하지 않는다. p61

 

20세기 들어와 문명간의 관계는 한 문명이 나머지 문명들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던 단계에서 벗어나 모든 문명들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던 단계에서 벗어나 모든 문명들 사이에서 다각적인 교섭이 강하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전 시대의 문명 관계에서 뚜렷이 드러나던 두 가지 특징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첫째, 역사가들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서구의 팽창’은 끝나고 ‘서구에 대한 반항’이 시작되었다. p64

 

과거 문명의 보편 국가는 제국이었다. 그러나 서구 문명의 정치형태는 민주주의이므로 지금 태동하는 서구 문명의 보편 국가는 제국이 아니라 연방, 연맹, 국제 제도 및 국제 기구의 혼합체다. ... 중요한 정치 이념은 한결같이 서구에서 나왔다. 반면에 서구는 주요한 종교를 낳지 못하였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은 모두 비서구 문명의 산물이며 대부분의 경우 서구 문명보다 앞서 탄생하였다. 서구가 주도하던 단계를 세계가 벗어나면서 후기 서구 문명의 쇠락과 운명을 같이한 이념들의 자리를 종교 또는 문화에 바탕을 둔 정체성과 헌신의 형식이 차지하게 되었다. p65

 

토인비는 ‘세계는 자신의 둘레를 공전하고 동양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이기에 서양의 전진은 필연적’이라는 자기중심적 망상에서 드러나는 서구의 편협성과 자기도취를 매섭게 꼬집었다. 그도 슈펭글러처럼 통일된 역사라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문명의 강줄기는 오직 우리 것뿐이며 다른 강줄기들은 모두 지류이거나 아니면 사막의 모래 속으로 사라진다는 전제 또한 배격하였다. ... 그러나 이 학자들이 경고한 환상과 편견은 여전히 살아남았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서구의 유럽 문명이 전 세계의 보편 문명이 되었다는 만연한 편협된 자부심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렸다. p67

 

3. 보편 문명? 근대화와 서구화

 

전체 인류에게 공통된 보편 문명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인간이라는 종의 차원에는 못 미치는 주요 문화적 집단을 어떤 용어로 지칭해야 할 것인가. 인류는 종족, 민족, 일반적으로 문명이라고 불리는 더 광범위한 문화적 실체 같은 하위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문명이라는 용어를 들어 올려 인류 전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인류의 보편적 차원에는 못 미치는 사람들의 대규모 문화 집단을 가리키는 새로운 용어를 창안하든가 아니면 인류의 범위에는 못 이르는 이들 대규모 집단이 증발하는 것을 수수 방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70

 

보편 문명이라는 용어는 지금 서구 문명의 대다수 사람들과 여타 문명의 일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전제, 가치관, 원칙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을 다보스 문화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p71

 

다보스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사실상의 모든 국제 기구와 세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화를 공유하고 있을까? 서구를 제외하면 이 문화를 공유하는 이들은 세계 인구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5천만 명도 채 못 된다. 어쩌면 5백만 명도 되지 않을지 모른다. ... 다보스 문화가 외교적 수준에서나마 공통의 지적 문화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공통의 윤리 문화나 가치관을 포함하는지는 적이 의심스럽다고 지적하였다. p71

 

맥버거를 먹는다고 서구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중동에서도 젊은이들이 청바지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랩 음악을 듣는 모습은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지만 바로 그들이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고 의기투합하여 미국 항공기를 폭파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 서구의 상품을 구입하는 비서구인이 서구화되리라는 가정은 오만하고 안이하게 사고하는 서구인 특유의 생각이다. p72

 

비서구 사회에서는 현재 두 가지의 상반된 흐름이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대학 수준에서는 자본과 고객을 확보하려는 국제 경쟁에서 유능한 일꾼이 될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영어 교육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는 자국어의 사용을 더욱 밀어붙이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p79

 

사태 전개는 1948년 인도 교육 위원회가 이미 예견한 바 있다. 당시 인도 교육 위원회는 “영어의 사용은... 같은 민족을 두 개의 국민으로, 즉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로 갈라 놓으며, 이들은 상대방의 언어를 모르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다보았다. p80

 

보편 종교가 출현할 가능성도 별로 없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세계 전역에서 종교가 부활하였다. 종교적 자각의 확산과 원리주의 운동의 부상이 이런 현상을 낳았다. .. 금세기 동안 전 세계 종교의 상대적 교세에는 두드러진 변화가 없었다. .... 가장 눈길을 끄는 변화라면 무종교와 무신론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비율이 1900년대에는 0.2퍼센트에서 1980년에는 20.9퍼센트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 사실 종교의 부활 현상이 본격화 된 것은 1980년대 들어와서부터이다. 그러나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20.7퍼센트라는 증가폭과 중국에서 토착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비율이 1900년의 23.5퍼센트에서 1980년의 4.5퍼센트로 줄어든 것, 즉 19.0퍼센트라는 감소폭은 너무나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p81

 

지난 몇십 년 동안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는 아프리카에서 교세를 크게 늘렸다. 특히 한국에서는 크리스트교의 신도 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근대화를 빠른 속도로 치러 낸 사회에서는 전통 종교가 근대화의 요청에 제대로 적응할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해 크리스트교나 이슬람교가 침투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p82

 

결국은 마호메트가 성공한다. 크리스트교는 주로 개종에 의존하여 교세를 넓히지만 이슬람교는 개종과 출산으로 교세를 확장한다. ...대단히 빠른 인구 증가율 덕분에 전 세계의 이슬람교도 비율은 비약적으로 늘어나서 금세기 말에는 20퍼센트에 도달하고 다시 몇 년 뒤에는 크리스트교 신자 수를 추월한 다음 2025년까지는 세계 인구의 30퍼센트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p82

 

미디어의 세계적 확산을 서구가 지구의 부드러운 통합이라고 선전할 때 비서구인은 거기서 사악한 서구 제국주의를 본다. 설령 비서구인이 세계를 하나로 바라본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위기감이 스며 있다. p83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변별 이론은 특정한 상황 안에서 사람들은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의한다고 본다. “사람은 자기를 다른 인간들, 특히 자신이 일상적으로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과 구분짓는 특성을 통해서 스스로를 파악한다.... 다른 직종에서 일하는 십여 명의 여자들과 함께 있는 여성 심리학자는 자신을 심리학자로 여기지만 십여 명의 남성 심리학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자신을 여자로 본다. p85

 

보편 문명을 18세기 이후 전개되고 있는 광범위한 근대화 과정의 결과로 이해한다. 근대화는 곧 산업화요, 도시화다. 문자 해독율, 교육, 부, 사회적 유동성의 수준이 높아지고 직업 구조 또한 복잡 다양해진다. 근대화는 18세기에 들어와 과학 기술 지식의 폭발적인 증가와 함께 시작되었다. 덕분에 인간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로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고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p86

 

요컨대 농경 사회에서는 사회 구조가 지리적 풍토에 의하여 결정된다. 산업은 농업에 비해 자연 환경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낮다. 산업 구조의 차이는 지리적 풍토의 차이보다는 문화와 사회 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산업 구조의 차이는 수렴될 수 있어도 문화와 사회 구조의 차이는 그렇지 못하다. p87

 

근대화가 시작되기 이전의 수백 년 동안 서구 사회가 지녔던 남다른 특성들은 무엇이었을까?.. 서구 문명의 알갱이로 파악하는 젣, 관습, 믿음의 내용은 대체로 일치한다.

그리스-로마의 유산/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유럽어/종교적 권능과 세속적 권능의 분리/법치/사회적 다원주의/대의제/개인주의

 

서구 문명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하나만 꼽으라면 처음에는 카톨릭이었다가 나중에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뉜 서방 크리스트교가 먼저 떠오른다.... 서구가 16세기에 세계 정복의 길에 나선 것은 돈도 돈이었지만 신의 뜻이라는 소명감도 작용하였다.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을 거치면서 서방 크리스트교가 북쪽의 프로테스탄트와 남쪽의 카톨릭으로 분열된 것 또한 서구의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이다. p88

 

교회와 국가, 종교적 권능과 세속적 권응은 서구 문화를 관통하는 이원론이었다. 서구만큼 종교와 정치가 명확히 분리된 예는 힌두 문명말고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 서구 문명에서 나타나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와 거듭되는 양자의 충돌은 다른 문명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권능의 분리는 서구에서 자유가 신장하는데 엄청난 기여를 하였다. p89

 

서구의 남다른 특징은 혈연이나 혼인 관계에 토대를 두지 않은 다양한 자율적 집단의 부상과 존속이었다. ... 조직의 다원성은 계급의 다원성으로 발전하였다. 대부분의 유럽 사회에는 상대적으로 강하며 자율적인 귀족, 부농, 소수지만 실력을 가진 상인, 무역업자가 나름의 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중세 귀족의 힘은 절대주의가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확고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제한을 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궁핍한 시민 사회, 취약한 귀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중앙 집권화된 관료주의를 특징으로 하던 그 당시의 러시아, 중국,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비서구 사회와 유럽의 다원주의는 날카롭게 대비된다. p90

 

위에서 말한 서구 문명의 특성들은 개명된 사회 특유의 개인주의 정신과 개인권 및 자유의 전통을 낳는 데 기여하였다. 개인주의는 14세기와 15세기부터 발전하였으며 17세기에 이르면 개인의 선택권-도이치가 말하는 ‘로미오와 줄리엣 혁명’-은 서구에서 폭넓게 수용되었다. 심지어는 모든 개인의 ‘동등한’ 권리를 내세운 주장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은 분명히 선언되었다. 개인주의는 20세기의 문명들 속에서 서구의 가장 두드러진 면으로 남아 있다. p91

 

일본처럼 중국의 고립주의도 서양의 군사력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1839년에서 1842년까지 영국은 중국을 상대로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19세기 서구 열강의 막강한 힘 앞에서 비서구 사회가 순수 고립주의 전략을 고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p92

 

아주 극단적인 원리주의자들만이 근대화와 서구화를 모두 거부한다. 그들은 TV 수상기를 강물에 던지고 손목시계의 착용을 금지하며 내연 기관을 거부한다. 이런 원칙을 앞세우는 집단은 비현실성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다. p93

 

근대화와 서구화는 서로를 강화시키는 동반자 관계에 있다. 이러한 발상은 근대화를 위해서는 자신들의 역사적 언어를 버리고 영어를 국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19세기 말 일본과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의 주장에 단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이런 생각은 비서구 사회의 엘리트보다는 서구인 사이에서 더욱 인기를 얻었다. 그 골자는 이렇다. “성공하려면 너희도 우리처럼 되어야 한다. 우리의 길이 유일한 길이다.” p93

 

쇄국주의, 케말주의, 개량주의는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두고 상이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쇄국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근대화와 서구화는 모두 바람직하지 않고 둘 다 거부해야 마땅하다. 케말주의는 근대화와 서구화가 모두 바람직하고 서구화는 근대화의 전제 조건이며 둘 다 실현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개량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은 서구화를 대v폭 수용하지 않고도 바람직한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쇄국주의와 케말주의는 근대화가 바람직한가를 놓고서 대립하고 케말주의와 개량주의는 서구화 없이 근대화가 가능한가를 놓고서 대립한다. p96

 

이슬람 사회는 근대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파이프스는 이자, 단식, 상속법, 여성의 취업 문제처럼 이슬람과 근대화가 상충되는 경제적 갈등을 지적하면서 서구화가 근대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자신의 지론을 강조한다. ... 이슬람과 근대화는 충돌하지 않는다. 독실한 이슬람 교도가 과학을 연구하고 공장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첨단 무기를 활용할 수 있다. 근대화는 단일한 정치 이념이나 제도의 틀을 요구하지 않는다. 선거와 시민 결사 같은 서구 사회의 특징이 경제 성장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p100

2. 변화하는 문명의 균형

4. 서구의 쇠퇴: 세력, 문화, 토착화

 

냉전에서 거둔 승리는 서구를 탈진시켰다. 서구는 완만한 경제 성장, 실업, 막대한 재정 적자, 근로 의식의 저하, 낮은 저축률 같은 내부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대다수 서방 국가들은 사회적 와해, 마약, 범죄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경제력의 무게추는 빠른 속도로 동아시아로 옮겨가고 있으며 이 지역의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도 아울러 커지고 있다. 인도의 경제력은 바야흐로 비약의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이슬람 세계는 점점 서구를 적대시하고 있다. p104

 

서구의 몰락은 다음 세 특성을 갖는다.

첫째, 그것은 완만한 과정이다. ... 둘째, 하강은 직선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서구의 쇠퇴 징후가 나타난 이후에도 하강선은 멈추었다가 다시 위로 솟는 서구의 힘이 일시적으로 증대하는 등 대단히 불규칙한 양상을 보인다. ... 셋째, 힘이란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 중요한 자원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자원에서 서구의 비중은 20세기 초반 정점에 도달하였다가 그 후로는 다른 문명들에 비하여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p107

 

문화의 판세는 힘의 판세를 반영한다. 정복은 교역을 동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힘은 거의 예외 없이 문화를 동반한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한 문명의 힘이 팽창하면 동시에 문화가 융성하였고 그 문명은 막강한 힘으로 자신의 가치관, 관습, 제도를 다른 사회에 확산시켰다. 보편의 문명은 보편의 힘을 요구한다. 로마의 힘은 고전 세계의 한정된 범위 아에서 준보편 문명을 낳았다. 서구의 힘은 19세기에는 유럽의 식민주의로, 20세기에는 미국의 헤게모니 장악으로 표출되었고, 이 힘은 서구 문화를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켰다. 유럽의 식민주의는 막을 내렸고 미국의 헤게모니 또한 퇴조하고 있다. 고유 역사에 뿌리를 둔 습속, 언어, 믿음, 제도가 도처에서 자신감을 되찾으면서 서구 문화는 움츠러들고 있다. p117

 

부드러운 힘은 딱딱한 힘의 토대 위에서만 힘을 갖는다. p117

 

민주화는 서구화와 갈등을 빚는다. 민주주의는 사해 동포주의가 아니라 국수주의로 치달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서구적 가치를 신봉하는가를 내세우는 비서구 사회의 정치인은 선거에서 패배한다. 후보자는 승리를 위해 일반인에게 가장 호소력이 큰 정견을 내놓으며 그것은 대체로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p121

 

신의 설욕

20세기 전반의 지식인들은 경제와 사회의 근대화가 인간 생활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핵심적인 비중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가정에 대체로 동의하였다. ... 근대화를 추구하는 세속주의자들은 과학, 합리주의, 실용주의가 기존 종교의 뼈대를 이루던 미신, 신화, 비합리성, 구습을 몰아내는 현상을 반겨 마지 않았다. 관용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이고 진보적이고 인간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새로운 사회가 나타나리라고 그들은 내다보았다. 반면에 근심에 찬 보수주의자들은 신앙과 종교 단체가 사라지고 개인과 집단의 행동 규범을 이끌어 온 교리가 사라진 뒤의 황폐한 결과를 우려하였다. 그들은 무질서, 타락, 시민 생활의 붕괴가 뒤따를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 20세기 후반은 이런 희망과 공포가 전혀 근거 없었음을 입증하였다. 경제적, 사회적 근대화는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었지만 동시에 전 세계에서 종교의 부활 현상이 일어났다. p122

 

그러나 이것은 20세기 말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새로운 틀을 부여하는 밑바닥의 훨씬 광범위하고 훨씬 근본적인 조류 그 표면에서 넘실거리는 파도에 지나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종교의 소생은 원리주의 종파의 활동 차원을 넘어서 있다. 종교의 부활은 사람들의 일상 생활과 노동에서, 정부의 관심사와 정부가 세우는 계획에서 두루 감지된다. 세속적 유교 문화에서 아시아적 가치를 긍정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문화적 부활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종교적 가치를 긍정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p123

 

우리는 한두 세대 만에 산업화에 도달한 농경 사회다. 서구에서 200년 이상에 걸쳐 일어난 일이 여기서는 50년도 안 되는 기간에 걸쳐 벌어졌다. 모든 것이 아주 빠듯한 시간틀 속에 우겨 넣어지고 있어 혼란과 기능 장애는 불가피하다. 한국, 태국, 홍콩, 싱가포르처럼 고속 성장을 해 온 나라들을 보면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나타난다. 그것은 종교의 부상이다.... 과거의 관습과 종교-조상 숭배, 샤머니즘-는 이제 사람들의 성에 차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는 왜 여기 있으며,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차원 높은 설명을 갈구한다. 이것은 사회에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는 시기와 무관하지 않다. p125

 

전통 종교가 뿌리 뽑힌 사람들의 정서적,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다른 종교 집단이 그 역할을 대신하면서 그 과정에서 교세를 크게 확장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불교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크리스트교 신자는 1950년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서 3퍼센트 수준이었다. 한국이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어 도시화와 직업의 분화가 대규모로 진행되었을 대 불교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도시로 유입된 수백만의 한국인과 변화한 농촌에 남아 있던 수많은 한국인에게 농경 시대의 침묵하는 한국 불교는 호소력을 잃었다. 개인의 구원과 운명을 설파한 크리스트교는 혼돈과 변화의 시대에 확실한 위안을 주었다. p127

 

한 브라질 신부는 개신교 교회가 카톨릭과 달리 ‘인간적 따뜻함, 치유, 깊은 성령의 체험 같은 개인의 근본 욕구’에 부응하였다고 보았다. p127

 

20세기에 도입된 사회주의와 마르크시즘은 그 지역의 상황과 조건에 맞게 변형되고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러시아, 중국, 베트남에서 서구에 맞서기 위한 수단으로 개발되고 수정되고 활용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중국의 공산주의가 심하게 변질되고, 사회주의 경제가 견실한 성장을 유지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면서 이념적 진공이 생겼다. p129

 

5. 경제와 인구, 도전하는 문명

 

아시아와 이슬람은 지난 2,30년 동안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한 문명이다. 이슬람의 도전은 이슬람교의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부상과 그와 맞물린 서구 가치와 제도에 대한 거부로 표현되고 있다. p133

 

서구를 부국으로, 비서구를 저개발국으로 단정짓는 시각은 21세기에는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이 변화의 속도는 가히 충격적이다. 마부바니의 분석에 따르면 1인당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는 데 영국과 미국이 각각 58년과 47년 걸린 데 비해, 일본은 35년, 인도네시아는 17년, 한국은 11년, 중국은 10년 걸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현재 세계 2위와 3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가 아시아에 있다. p134

 

TV 연속극과 천안문 광장에 세워진 모조 자유의 여신상에서 문화적으로 대중적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구 지향주의는 베이징에서 중국을 통치하는 수백 명의 당 간부와 농촌에 거주하는 8억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완전한 서구화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말에도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중국 지도부는 그 대신 새로운 ‘중체서용’의 원칙을 내걸었다.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세계 경제에 참여하되 정치적 권위주의와 중국의 전통 문화는 고수한다는 원칙이었다. p137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의 문화적 민족주의는 1994년 한 홍콩 지도자가 던진 말에 압축되어 있다. “우리 중국인인 전에 없이 민족주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중국인이며 그 점을 자랑스러워한다.” 1990년대 초반 중국에서는 실제로 ‘가부장적이고 자연적이며 권위적인 진정한 중국상으로 돌아가자는 대중의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이런 복고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민주주의는 과거 레닌주의가 수입된 외래 사조로 평가 절하되었던 것처럼 인정을 못받고 있다 p138

 

이슬람의 부활은 정치적 영역에서는 성전(聖典)을 가졌고, 완전한 사회에 대한 이상이 있고 근본적 변화를 지향하고 기존의 권력과 국민 국가를 거부하고 근대적 개량주의자에서 폭력적 혁명주의자에 이르는 다양한 분파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시즘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다. 그러나 더 좋은 비교의 대상은 종교 개혁이다. 이슬람 부상과 서구의 종교 개혁은 기존 제도의 침체와 부패에 대한 대응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그래서 모두 자기 종교의 더 순수하고 엄격한 형태로 복귀할 것을 요구하고 근면, 질서, 규율을 강조하면서 활력 있는 새로운 중산층에게 점차 호소력을 얻는다. p145

 

정치적 영역에서 이슬람의 부활은 사회적, 문화적 영역에 비해 덜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마지막 사반 세기 동안 이슬람 사회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정치적 흐름으로 나타났다. 이슬람 운동에 대한 정치적 지지의 정도와 양상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중심적 기류는 존재한다. ... 대부분의 혁명 운동이 그러하듯 이슬람 부활의 핵심성원은 학생과 지식인이다. p147

 

몇몇 예외가 있었지만 자유 민주주의는 이슬람 사회에서 안정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였고 심지어는 이슬람 자유주의도 기반을 다지는 데 실패하였다. ... 자유민주주의가 이슬람 사회에서 대체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은 1800년대 말부터 한 세기 동안 줄곧 반복되어 온 현상이었다. 이러한 실패는 서구 자유주의 개념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슬람 사회와 문화의 분위기에서 부분적으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p150

 

이슬람 부활은 근대화의 산물이자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노력이다. 이슬람 부활의 저변에는 도시화, 사회 활동 인구의 증가, 문맹율의 축소와 교육의 확대, 통신과 매체의 발전, 서구를 비롯한 다른 문명들과의 접촉 강화 같은 비서구 사회의 토착화 조류를 낳은 원인들이 폭넓게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전통 마을, 가족 관계를 파괴하고 소외감과 정체성의 위기를 낳는다. 이슬람 상징물, 헌신, 신앙은 이러한 심리적 요구에 부응하며, 이슬람 복지 시설은 근대화의 홍역을 치르는 이슬람 대중들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요구를 만족시킨다. 이슬람 부활은 또한 서구의 충격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서구식 해법에서 좌절을 경험한 이슬람 사회는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서 이슬람 사상, 관습, 제도에서 지향점과 근대화의 동력을 얻어낼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처럼 서구에서 등을 돌리는 현상은 서구와의 접촉 강화가 빚어 낸 현상이기도 했다. 두 문명이 부딪치면서 가치관과 제도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그만큼 컸던 탓이다. 이슬람의 부활은 서구화에 대한 반작용이지 근대화에 대한 반작용은 아니다. p152

 

유가 급등을 등에 업은 아랍 산유국의 기세는 1980년대에 들어와 한풀 꺾였지만 이슬람의 인구증가는 지속적인 힘을 불어넣고 있다. 동아시아의 부상이 경이적인 경제성장에서 추진력을 얻었다면 이슬람의 부활은 인구의 폭발적 증가에서 추진력을 얻고 있다. ... 전 세계에서 이슬람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1980년의 18퍼센트에서 2000년에는 23퍼센트로, 2025년에는 31퍼센트로 늘어날 전망이다. p153

 

변화하는 환경

두 자리 수의 경제 성장을 무한정 지속시킬 수 있는 나라는 없으므로 아시아의 경제성장도 21세기 초반 어느 시점에 가서는 진정세로 돌아설 것이다. 일본의 고속 성장은 1970년대 중반을 고비로 뚝 떨어져 그 뒤로는 미국이나 유럽 각국의 경제 성장률과 대동소이하였다. 아시아의 ‘경제 기적’을 낳은 나라들도 하나둘 성장률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복잡한 경제 구조를 가진 나라들의 ‘정상’수준에 접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 운동이나 문화 운동을 무한정 지속시킬 수 있는 나라도 없으므로 어느 시점에서 가서는 이슬람 부활 현상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점은 그러한 운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인구 증가세가 한풀 꺾이는 21세기의 20년대와 30년대다. 그 시기가 오면 호전적 이슬람주의자와 이민의 수가 모두 감소하고 이슬람 내부의 갈등, 이슬람과 비이슬람의 갈등 수준도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이슬람과 서구가 밀착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분쟁의 소지는 그만큼 줄어들며 국지적 분쟁 대신 냉전이나 심지어는 냉화(cold peace)가 자리 잡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앞으로 몇십 년 동안은 아시아의 경제 성장과 이슬람의 인구 증가가 서구가 주도해 온 국제 질서에 커다란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특히 세계 문제에 대한 발언권과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력은 빠른 경제 성장을 경험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몫으로 더 많이 돌아갈 것이다. 다음 10년 동안에도 지금의 추세가 지속된다면 중국의 발전은 문명 사이의 관계에서 엄청난 세력 변동을 낳을 것이다. 게다가 그때쯤 가면 인도가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하면서 세계 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슬람의 인구 증가도 문명의 세력 판도에 중요한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 그 결과 앞으로 몇십 년동안은 비서구 문명의 힘이 지속적으로 증대하면서 비서구 문명과 서구 문명의 충돌, 비서구 문명과 비서구 문명의 충돌이 나타날 것이다. p159

 

3. 문명의 새로운 질서

6. 세계 정치의 문화적 재편

 

세계 정치는 근대화의 자극을 받으면서 문화의 경계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비슷한 문화를 가진 민족과 국가끼리 뭉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념과 강대국을 중심으로 정의되던 제휴 관계가 문화와 문명으로 정의되는 제휴관계로 바뀌고 있다. 정치적 경계선이 문화적 경계선 곧 민족적, 종교적, 문명적 경계선과 일치해 가는 추세에 있다. ... 새로운 세계에서는 문화적 동질성이 한 나라의 우방과 적국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인이다. 냉전 구조에 편입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국가가 문화 정체성 없이 존재할 수는 없게 되었다. “너는 어느 편인가?”라는 물음은 “너는 누구인가?”라는 훨씬 근원적인 물음으로 바뀌었다. 모든 나라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답변, 곧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세계 정치에서 그 나라가 차지하는 위치, 그 나라의 친구와 적수를 규정한다. p163

 

문화적 동질성이 사람들의 결속과 응집을 낳고 문화적 이질성이 반목과 갈등을 낳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모든 사람은 친척, 직업, 문화, 제도, 영토, 교육, 당파, 이념 등의 다양한 차원에서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협력하는 복수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 대표적인 예로, 1914년 독일 노동자들은 국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계급 정체성과 독일 민족과 독일 제국에 대한 민족 정체성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현대 세계에서 문화적 정체성은 다른 차원의 정체성들에 비해 그 중요성이 비약적으로 커지고 있다. p167

 

점차로 문화 정체성이 부각되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혼란과 소외의 한복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정체성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비서구 사회의 실력과 힘이 증대함에 따라 토착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는, 사회적, 경제적 근대화의 결과이다. 세계의 주요한 종교에서 ‘원리주의’ 운동이 동시 다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사태 전개의 뚜렷한 조짐이다. p168

 

문화 집단 사이의 갈등은 문화적 사안을 담고 있다. 가령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세속 이념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해소되지는 않더라도 논의는 할 수 있다. 물질적 이익을 둘러싼 의견 대립은 절충이 가능하며 원만히 타협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문화적 사안은 그렇지 않다. 아요드햐에 신전을 지어야 하느냐 모스크를 지어야 하느냐를 놓고 힌두 교도와 이슬람 교도가 벌이는 갈등은 그곳에 두 건물을 다 짓는다고 해서, 혹은 아예 어떤 건물도 짓지 않는다고 해서, 또는 모스크와 신전을 절충한 형태의 건물을 짓는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p170

 

분쟁의 보편성이다. 증오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행동 욕구를 느끼기 위해서는 적이 필요하다. ... 하나의 분쟁이 해소되고 하나의 적수가 사라지면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압력이 작용하여 새로운 적수를 만들어 낸다. 마즈루이는 ‘우리’와 ‘그들’이라는 대립 구도는 정치 영역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양상이다. 고 지적하였다. 현대 세계에서 ‘그들’은 다른 문명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점점 사용되고 있다. 냉전의 종식은 분쟁을 종식시킨 것이 아니라, 문화에 뿌리를 둔 새로운 정체성, 가장 광범위한 수준에서는 문명을 형성하게 될 상이한 문화에서 유래한 집단들 사이의 새로운 갈등 양상을 낳았다. 아울러 공통의 문화는 그 문화를 공유하는 국가나 집단 사이의 협조를 낳는다. 이것은 특히 경제 부문에서 국가들 사이의 지역 연합이 출현하는 현상에서 확인된다. p170

 

‘지역주의’라는 용어는 현실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다. 지역은 지리적 실체이지 정치적 또는 문화적 실체가 아니다. 발칸과 중동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지역은 문명 내적, 문명 외적 갈등으로 갈갈이 찢길 수 있다.... 문화적 이질성이 크면 지리적 접근성은 동질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갈등을 증폭시킨다. p171

 

대부분의 문명은 그 문명의 소속국들이 자기 문화의 근원 또는 뿌리로 간주하는 한 군데 이상의 성지를 가지고 있다. 이 장소는 일반적으로 핵심국, 다시 말해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문화적 중심 국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p177

 

문명 단층선의 분열 효과가 두드러지는 지역은 냉전시대에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내건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정권에 의하여 강제로 통합된 단절국이다.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결속과 배척을 낳는 원동력은 이념이 아니라 문화가 되었다. p181

 

분열국이 자신의 문명적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요건이 갖춰져야 한다. 첫째,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엘리트가 이러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서야 한다. 둘째, 일반 대중은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셋째, 그 나라가 지향하는 문명(대개는 서구문명)의 주요 구성원들이 개종자를 수용할 의사를 갖고 있어야 한다. p183

 

러시아는 궁극적으로 세계 전체를 휩쓸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주도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러시아는 낙후된 아시아적 과거가 아니라 선진적 소련의 미래를 구현하고 있었다. 혁명을 통하여 러시아는 서구를 껑충 뛰어넘었고 이제 러시아와 서구의 차이점은 슬라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너희는 다르고 우리는 너희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가 아니라 ‘우리는 다르고 결국 너희는 우리처럼 될 것’이라는 논리로 설명되었다. 그것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메시지였다 p187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은 이념 분쟁이었으며, 판이한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근대적이고 세속적이며 자유, 평등, 물질적 복리라는 궁극적 목표에 대하여 분명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서구의 민주주의자는 소련의 공산주의자와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의 민주주의자가 러시아 정교를 신봉하는 민족주의자와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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