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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2일 08시 52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내가 이야기 해보는 러셀(2)

 

버트란트 아서 윌리엄 러셀_그의 철학의 자취를 따라서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5. 18 ~ 1970. 2. 2

러셀과 비트겐슈타인.jpg
   [러셀과 비트겐슈타인]
 

균형 잡힌 철학적 사유

서양 철학자들은 보통 ‘서양’이라는 단어 대신에 ‘세계 철학사’ 혹은 ‘철학사’라고 명시함으로써 서양 중심의 사고방식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러셀이 남긴 <서양 철학사>라는 책의 제목은 동양의 거대한 정신 세계를 인식하고 인정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의 철학 정신의 균형과 같은 것이 보여지기도 하는 일면인 것 같은데요. 이런 균형에 대한 느낌은 시와 소설,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서양 철학사에서 영국의 시인 바이런에 독립된 장을 할애하여 칸트나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들과 동등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에서 다시 한번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일생이 담긴 책을 짧은 기간에 살펴보아 심오함을 느끼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책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사상은 개략적으로 두 개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절대 확실한 지식의 탐구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삶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이런 탐구적 열정과 삶에 대한 깊이는 <서양철학사>가 출간 된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생활을 짚어보고 조망해 볼 수 있는 힘이 되고 있다고 짐작하여 봅니다. 이런 러셀의 열정적 뿌리는 현대 학문에서 기호논리학과 분석철학이라는 큰 나무가 되어 우리의 지혜를 이끌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열린 마음의 소유자

그의 철학적 족적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러셀은 분석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부분에서는 현대철학의 대가인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선구자적 업적을 이뤘다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20세기 초에는 헤겔에 영향 받은 이상주의에 반대했고, 30년 뒤에 이는 비엔나에서 논리실증주의자들에 의해 형이상학 반대를 반복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일화에서 그가 얼마나 수학을 사랑했는지는 살펴본바 있습니다. 그의 이런 수학에 대한 사랑은 수학을 뿌리로 하여 근대 수리논리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콰인은 이런 부분에서 러셀이 자신의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러셀의 첫 수학에 관한 책은 <기하학 기초론에 관한 에세이 (1897)>인데요. 이 작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학의 원리>가 나오기 6년 전에 출간된 책입니다. 수학에 대한 그의 초기 이론들이 정립된 기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칸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후일 자신의 논리가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스키마'를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칸트의 수학과 기하학을 완전히 거부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는 학자로서의 진리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한 그의 일면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보여집니다.

 

러셀의 역설

그의 철학을 이야기할 때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러셀의 역설은 1901년 발견한 논리적 역설로 프레게의 논리체계와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naïve set theory)이 모순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 이론이라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1919년 러셀이 예를 하나 들었는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마을에는 이발사가 한 명 있다. 이 이발사는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를 면도해 준다고 말한다. 이 이발사는 자기 스스로 면도하는가?

이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만일 이발사 스스로 면도를 한다면 자신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가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주장에 따라서 자신을 면도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모순이다. 즉 이발사는 면도를 하는 곳에도 면도를 하지 않는 곳에도 속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런 집합에 대한 역설인데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 나오는 '퀴클롭스의 미궁'이 언뜻 생각나기도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더욱 복잡한 것이겠지만요. 이런 러셀의 역설을 접한 프레게는 "과학자가 논문을 완성하자마자 기초가 무너지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라는 글과 함께 12년 동안의 자신의 연구 결과를 포기하여야만 하였다고 합니다.

 

러셀의 분석 철학

수학적 증명과 논리적 추론 등 분석철학의 창시자인 러셀은 시종일관 논리의 힘을 믿었고, 분석을 통해서 언어의 진짜 의미에 다가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개념과 논리에 대한 확신을 끝까지 놓지 않은 것이지요.

이런 논리의 측면에서 분석철학을 창시한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내용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축구와 바둑을 예로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축구와 바둑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축구가 좀 더 “규칙에 의존적인” 경기라는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축구를 즐기기 위해서는 어떤 크기의 골대에서, 어떤 크기의 운동장에서, 몇 명의 인원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물론 이 규칙은 조금 느슨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가령 컴퓨터 게임으로 축구를 즐겼다고 해서, “축구를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면 바둑의 경우에는 몇 가지 단순한 규칙만 지키면 상대적으로 규칙에 의해서 자유롭다. 컴퓨터로 바둑을 두는 경우에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바둑을 두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초기의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은 언어를 축구처럼 이해했다. 언어 속에는 많은 논리와 규칙이 정해져 있고, 상대적으로 언어가 가지는 ‘자율성’(?)이나 독창성에는 인색한 평가를 내렸다. 반면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장기나 바둑처럼 이해했다. 우리가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지키기만 하면, 사회와 문맥 속에서 언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은 그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장기 말을 우리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언어의 의미도 유동적이라고 주장이었다.

출처 : http://kin.naver.com/knowhow

 

이렇게 그의 철학에 대한 중요한 부분들을 살펴보았는데요. 그가 알고자 했던 삶의 오의, 그것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증명하고 싶어 했던 그의 철학적 자취를 <서양철학사>, <서양의 지혜>라는 책을 통해서 희미하게나마 본듯합니다.

 

[찾아본 글들]

1. 네어버 캐스트

  (1) 논리적으로 행동하였던 철학자.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210

  (2) 버트란트 러셀.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69

2. 위키백과사전의 '버트란트 러셀' http://ko.wikipedia.org/wiki/

3.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박경숙 연구원 북리뷰 http://www.bhgoo.com/zbxe/486232

4.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  http://choi1.com/zbxe/

 

[참고] 비트겐 슈타인에 대해서

러셀은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정신적 체험으로 비트겐슈타인과의 만남을 꼽고 있습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을 ‘천재의 완벽한 전형’이라고 칭하였는데요. 러셀과 함께 분석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그의 삶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명입니다. 그는 20세기를 바꾼 철학자라고도 하는데요. 알아본 그의 인생도 아주 드라마틱합니다. 그는 일반 철학자들과는 달리 교수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시간은 몇 년 되지 않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교수로 몇 년 일했는데요. 그나마도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사직했습니다. 그전에 그는 초등학교 교사를 했었고 1차 대전에 자원 입대하였으며, 보조정원사, 약국 배달사원 등으로 일하는 등 철학이라는 것에 대해서 직업적으로 연연하지 않았지만 그는 일생 동안 철학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을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구 한나 없는 방에서 성직자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러셀이 그의 천재적 일면에서 충격을 받았듯이 히틀러 또한 그에게서 충격을 받았는데요. 히틀러는 소년 시절 하교 동창이었던 비트겐슈타인을 보며 외며 재력 두뇌 등 다방면에 걸친 컴플렉스에 시달리며 반유대주의의 싹을 키워나갔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문제라는 것은 모두 다 헛소리였다." 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말한 대부분의 철학적 논리들은 무의미한 헛소리였다고 정의합니다. 복잡한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소한 것이라고 스스로 평하기도 하였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에 답변 하게 됩니다. 정의란 이런 것이다. 혹은 저런 것이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계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표현하는 두 가지 명제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세계를 그리는(말하는) 명제가 있고, 하나는 세계에 대해 말하지 않는 명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명제가 유의미하고 말하지 않는 명제는 무의미 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유의미한 것은 과학적인 진술 즉 언어, 논리, 세계에 관한 것들이고, 무의미한 명제는 철학의 본성, 윤리학, 종교, 예술, 미학 등을 정의했습니다.

'철학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명제들의 집합이다. 따라서 더 이상 다룰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철학은 이제 종말을 고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이런 작업을 마무리하고 철학을 떠났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참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추상적인 문제에 대해서 내가 얻은 교훈을 굳이 정리해보자면 아래와 같이 적어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일에 있어서 즉각적으로 참 거짓을 따지려고 합니다. , 거짓을 따지기 전에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의 많은 문제와 명제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서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하는 참과 거짓을 따졌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좀더 본질적인 것을 물었던 듯합니다. 그는 그것이 과연 의미가 있느냐 그렇지 않고 의미 없는 헛소리냐. 그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고,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침묵 해야 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더욱 명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삶을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 하나를 얻은 것 같습니다.

 

[참고문헌]

1. 네이버 케스트에서 비트겐슈타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373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474

2. 기타 블로그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38820&logId=1747719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30929&logId=5384763

 

 

2.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옮긴이 서문 / 지은이 서문

 

각 세대의 역사적 배경과 그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와 철학적 주제를 선택하는 능력의 탁월함과 더불어 자신감 넘치는 명료한 서술이 돋보인다. (5)

 

철학과 사회, 정치 환경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는지 보여준다. (5)

 

그리스 문명은... 근대 철학의 사상적 원류이다. ... 그리스인들의 기여는 수학과 연역 기술을 발명했다는 점에 국한한다. (6)

 

철학이란 진리 추구의 열정을 품고 기존의 모든 지식을 비판하는 활동이었으며 분석적 방법을 통해 명료하고 확실한 지식을 얻고자 노력하는 여정이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명료하게 만드는 방법은, 부지불식간에 사용된 전제들을 세밀히 조사하고 기초 원리를 끈질기게 검토해 보는 것이다. 옳다는 근거가 없다면 어떤 전제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러셀이 말하는 분석적 방법의 핵심이다. (6)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아테네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과 스파르타에 대한 동경, 오르페우스교의 요소를 염두에 두어야 제대로 이해가 된다. 로마 시대에 독창적인 철학이 생겨나지 않고 일종의 처세 철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로마 행정의 지배력이 강하고 일상의 삶이 투쟁으로 점철되었던 탓이다. 일정한 시기에 사회 통합에 기여한 철학도 사회, 정치 환경이 바뀌면 영향력이 약해져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다른 철학이 형성되면서 기존 철학을 대체한다. 이러한 과정은 반복된다. (7)

 

가톨릭교 내부에서 일어난 정통신앙과 이단사상의 충돌은 가톨릭 제도 개혁의 계기인 동시에 개신교 성장의 계기가 된 종교 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7)

 

러셀이 제시한 해독제는 합리적 회의주의자의 태도로 사태를 직시하고,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사회를 다듬고 재편해 나가자는 것이다. (8)

 

철학의 독창성은 기존의 사고방식과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통찰하는 데서 나온다. (8)

 

철학자들은 어떤 일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그들은 각자 처한 사회 상황과 각 시대의 정치와 제도의 결과물이자, 후대 정치와 제도의 근간이 되는 신념 체계의 형성에 기여하는 원인 제공자이다. ... 나는 철학자를 자신이 몸담았던 사회, 문화적 환경의 산물로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공유되지만 모호하거나 산만하게 흩어진 사상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애쓰며 집중하는 한 인간으로 조명했다. (10)

 

철학은 애초부터 학파들, 곧 소수 지식인들 사이에 일어난 논쟁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철학은 공동체의 삶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으며, 나는 바로 이 부분을 고찰하려 애썼다. (10)

 

 

서론

내가 말하려는 철학은 신학과 과학의 중간에 위치한다. 철학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지식으로 규정하거나 확정하기 힘든 문제와 씨름하는 사변적인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철학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전통을 따르든 계시를 따르든 권위보다는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 명확한 지식은 무엇이든 과학에 속하는 반면, 명확한 지식을 초월한 교리는 모두 신학에 속한다. ... 이 무인지대가 바로 철학의 세계이다. (17)

 

사람들은 왜 해결 불가능한 문제에 매달려 시간을 낭비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행위는 셀 수 없이 많은 중요한 점에서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이론, 선과 악에 대한 이론에 좌우되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철학을 거의 결정하며, 거꾸로 사람들이 형성한 철학이 환경을 거의 결정한다. ...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말해주지만, 우리는 아주 조금만 알 따름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모르는지 망각한다면, 엄청나게 중요한 많은 일에 무감각해지고 만다. 신학은 사실상 무지의 영역까지도 안다는 독단적인 믿음을 이끌어냄으로써, 우주를 향한 일종의 주제넘고 오만한 태도를 양산한다. (19)

<서양의 지혜>를 읽으면서 <서양철학사>를 읽으면서 과학이 이토록 발달해서 존재에 대한 탐구를 낱낱이 들어나게 한 이 시점에서 왜 우리는 2000년이 지난 시절의 존재론에 대해서 들어야 하는가. 우리의 유전자와 뇌의 구조와 프로세스들이 명약관화하게 드러난 오늘 왜 우리는 지난 시절 인식론에 대해서 들어야 하는가. 등에 대한 마음 속 질문에 대한 이해를 돕는 구절

 

신학과 구별되는 철학은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19)

 

종교와 과학이 그렇듯이 사회 결속과 개인의 자유는 전 시기에 걸쳐 갈등을 빚거나 불안정한 타협 상태를 유지한다. (19)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유덕한 삶을 시민과 도시국가의 관계가 아니라 영혼과 신의 관계로 생각했다. (20)

 

주된 이유는 지배자와 민중이 다 같이 교회가 바로 천국의 문을 여는 힘을 가졌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23)

 

중세는 사상의 측면에서는 율법준수의 열정과 명확한 정치권력 이론이 지배한 시대였다. 모든 권력이 궁극적으로 신에게서 유래한다고 믿었다. (24)

 

사람을 지도할 원칙이 없어지면 정치는 적나라한 권력 투쟁으로 변모한다. (24)

 

가톨릭교회는 세 가지 근원에서 유래한다. 성스러운 역사는 유대교에서, 신학은 그리스 사상에서, 지배 방식과 교회법은 최소한 간접적으로라도 로마 법제에서 유래한다. 종교개혁은 로마적인 요소를 거부하고 그리스적 요소를 완화했으며 유대교적 요소를 강화했다. (25)

 

진리는 더는 권위자에게 물어서 확인하지 않고, 내적 성찰을 통해 확인했다. (26)

 

철학 분야의 주관주의와 정치학 분야의 무정부주의는 손을 맞잡고 나아간다. (26)

 

현대적인 형태의 무정부주의는 반종교적인 성향을 띠기는 하지만 여전히 초기 개신교 정신에서 많은 부분을 이어받는다. 도덕 측면에서 개신교가 강조한 개인의 양심은 본질적으로 무정부주의와 일맥상통한다. (27)

 

예술, 문학, 정치에 나타난 낭만주의 운동은 인간을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심미적 기쁨을 주는 응시의 대상으로 판단하는 주관적인 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27)

 

사회 결속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인류는 합리적 논증만으로는 결코 결속을 강화하지 못했다. 공동체를 이룬 사회라면 대립하는 두 가지 위험 요소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한쪽에는 너무 강력한 규율과 전통에 대한 지나친 존경 때문에 경직될 우려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개인주의 성향과 개인의 독립심 때문에 협동과 협력의 토대를 상실하고 결국 분열되거나 외부 세력에게 정복당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28)

 

자유주의의 핵심은 비합리적인 교의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서 사회질서를 보장하는 동시에, 사회 보존에 필요한 이상으로 개인을 구속하지 않고서 사회 안정을 확보하려는 시도이다. (29)

 

1장 그리스 문명의 발흥

철학과 과학은 원래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기원전 6세기 초에 동시에 탄생했다. (35)

 

종교가 제국의 통치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정치적 동기는 종교의 원시적 특징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신들은 통치권과 결합되면서 도덕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37)

 

바빌로니아의 종교는 이집트와 달리 내세의 행복보다 현세의 번영에 관심이 더 많았다. (37)

 

원시종교는 어느 곳에서나 개인보다 종족이나 부족을 위해 생겨났다. (43)

 

숙명은 그리스 사상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이 자연법칙에 대한 믿음을 도출하게 된 원천 가운데 하나였다. 호메로스의 신들은 정복을 일삼는 귀족 계급의 신들로서 실제로 땅을 일구는 농부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풍작의 신이 아니었다. (44)

 

디오니소스 숭배가 그리스에서 성행한 현상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문명이 급속히 발전한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인들, 적어도 특정 부류 그리스인은 원시성을 갈망하고, 당대의 도덕이 허용하는 수준 이상으로 본능에 충실한 더욱 정열적인 삶의 방식을 동경했다. (48)

 

문명인은 장래의 쾌락을 위해, 설령 장래의 쾌락이 꽤 먼 미래에 주어질지라도 현재의 고통을 기꺼이 참아낸다. 이러한 인내 습관은 농업의 발생과 더불어 중요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 사회의 공동 목적이 개인에게 강요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인생을 전체 사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습관을 몸에 익힌 개인이 점점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자기 현재를 희생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49)

 

육체적, 정신적 도취 상태에 들어가 사려 탓으로 훼손된 강렬한 감점을 회복한다. 그가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세계를 알아보자마자, 상상력은 일상적인 걱정이나 근심이라는 감옥에서 갑자기 해방되면서 자유로워진다. (49)

행복이라는 것은 드러남에 있지 않다. 삶의 의미도 그렇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 내 생각 속에 있다. 그런 것을 인식하려면 내 마음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

 

그리스인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정열적이고 불행했으며, 지성이 인도한 길과 열정이 인도한 길에 내몰려 자신과 싸우고, 천국을 생각하는 상상력과 지옥을 만들어내는 고집 센 자기주장으로 분열과 갈등을 겪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경우에 한해, 그들은 바로 지성과 열정을 결합함으로써 위대해졌다. (57)

후일 위대한 삶으로 칭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그들 스스로 불행한 삶을 살다간 이들을 많이 보게 된다. 나에게는 채찍이 되고, 지침이 되지만 그들에게는 인생에서 행복이라는 것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했을 것이다. 삶은 균형이다. 지성과 열정을 결합하는 것처럼. 나는 나의 삶에서 무엇을 균형 잡히도록 해야 하는가.

 

2장 밀레토스 학파

학생들을 위해 쓴 철학사마다 첫 부분에서 철학은 만물이 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 탈레스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언급한다. (61)

 

3장 피타고라스

증명하는 연역 논증이란 뜻의 수학은 피타고라스와 더불어 시작되며, 색다른 형태의 신비주의 사상 역시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68)

 

피타고라스 사상은 오르페우스교의 개혁 운동이고, 오르페우스교는 디오니소스 숭배에 대한 개혁운동이다. 역사를 관통하여 면면히 흘러온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의 대립은 처음 그리스인들 사이에 나타났는데, 올림포스 신들과 미개한 지역에서 숭배한 신들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인다. (72)

 

파타고라스에게 ‘정열과 공감에 휩싸인 관조’는 지성적 관조이며 결국 수학적 인식에 해당한다. (73)

 

관조적 삶의 이상은 순수 수학의 창조를 이끌었기 때문에 유익한 활동의 근원으로 작용했다. (74)

 

과학은 대부분 초기에 일종의 그릇된 신념과 연계되어, 허구적 가치를 부여하기 일쑤였다.

수학에 근거하여 사유가 감각보다 우월하고 직관이 관찰보다 우월하다고 가정했다. (75)

 

종말론적인 예언 종교와 대비되는 합리주의 성향의 종교는 피타고라스 이래, 특히 플라톤 이후부터 철저하게 수학과 수학적 방법의 지배를 받았다. 피타고라스에서 시작된 수학과 신학의 결합은 그리스와 중세를 거쳐 칸트에 이르는 근대 시기까지 종교 철학의 특징을 형성했다. (78)

 

4장 헤라클레이토스

우주를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쁨이며 독단에 빠지지 않게 하는 해독제이다. (79)

 

역사적 상상력과 심리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활동은 동시에 우리의 사고 폭을 넓혀주며, 우리의 마음속에 도사린 여러 편견이 다른 정신적 기질의 지배를 받는 시대에는 얼마나 어리석어 보일지 깨닫게 한다. (81)

 

인류를 경멸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오로지 강제력을 동원해야만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을 위해 행동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83)

 

“사람들은 다양하게 변화는 존재가 어떻게 자신과 일치하여 조화를 이루는지 알지 못한다. 조화는 활과 리라처럼 대립하는 힘의 긴장을 조율하는 것이다.

투쟁이 중요하다는 그의 신념은 대립물의 조화 이론과 연결되는 까닭은 대립물이 투쟁 속에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 운동하는 가운데 결합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통일되지만, 통일은 바로 이질성에서 비롯된다.

“쌍을 이루는 사물은 온전하면서 온전하지 않고, 함께 모이면서 떨어지며, 조화로우면서 조화되지 않는다.  (86)

온전함에서 조화가 생기는 것이구나. 내가 온전하지 못하면 나는 세상과 조화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먼저 나로서 존재하고, 이것을 세상과 섞이도록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나의 책이고, 나의 직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삶을 온전케 하는 것을 찾아야 함.

 

“당신이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까닭은 늘 새로운 강물이 당신에게 흘러 들기 때문이다./ “태양은 날마다 새로워진다.(88)

 

인간을 철학으로 이끄는 깊은 본능 가운데 하나가 영원한 존재를 추구하려는 본능이다. 이러한 본능은 당연히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나 위험을 피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는 불운이 겹치는 격변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영원한 존재를 추구하는 본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종교는 두 가지 형태, 즉 신과 영혼 불멸을 통해 영원성을 추구한다. (89)

 

철학자들은 시간의 제국에 종속되지 않는 영원한 존재를 찾으려는, 위대하고도 끈덕진 탐구를 감행했다. (91)

 

5장 파르메니데스

그리스인들은 이론에서든 실천에서든 온건한 입장이나 중용을 취하지 않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이 변한다고 주장했고, 파르메니데스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맞받아쳤다. (92)

 

감각이란 우리를 속이고, 많은 감각 가능한 존재는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93)

 

철학이 꽤 현대에 이른 시기까지도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수용한 사상은 역설의 극단을 보여준 모든 변화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실체의 불멸성이었다. (97)

 

6장 엠페도클레스

엠페도클레스가 과학 분야 밖에서 보여준 독창성은 4원소설을 내놓고 사랑과 다툼이라는 두 가지 원리를 이용하여 변화를 설명한 데서 찾을 수 있다. (105)

 

자연의 변화 과정은 목적이 아니라 우연과 필연의 지배를 받는다 (105)

 

7장 아테네의 문화

극소수에게 국한되기는 하지만, 그 시대에는 지성과 행복을 겸비하고 지성을 통해 행복해지는 일이 가능했다. (107)

 

이러한 황금시대를 출현시킨 힘의 균형은 위태로워서 안팎으로 위협을 받았는데, 안에서는 민주정치가 그리고 밖에서는 스파르타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108)

 

정치 체제가 붕괴했는데도 아테네의 특권은 유지되어, 거의 천 년간 아테네는 철학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했다. (109)

 

8장 아낙사고라스

아테네인들에게 처음 철학을 소개한 인물이자 물리적 변화의 제일 원인이 정신이라고 제안한 첫 인물이기도 하다. (110)

 

정신이 생물의 일부로 들어가 죽은 물질과 구별시켜주는 실체라 생각했다. (111)

 

9장 원자론자들

기계론적 설명이 과학적 지식의 진보를 주도한 반면에 목적론적 설명은 그렇지 못했다. 원자론자들은 기계론적 질문을 했고, 또 기계론적 설명을 시도했다. (118)

 

과학적 태도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넘치고 원기왕성했으며 지적 모험에서 얻는 기쁨으로 충만했다철학은 르네상스기에 이를 때까지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특징이던 활력과 독립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125)

 

10장 프로타고라스

기원전 5세기 후반 회의주의 운동 - 소피스트, 우두머리 프로타고라스 (126)

 

사람이 제각기 만물의 척도이며, 사람들의 의견이 다를 때 한 사람이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게 되는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프로타고라스의 학설은 본질상 회의적이고, 감각의 ‘속기 쉬운 성질’에 근거한다. (130)

 

객관적 진리를 불신하게 되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는 다수가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는 법과 관습과 전통 도덕을 옹호한다. (131)

 

플라톤 이후 모든 철학자들이 지니게 된 결함 가운데 하나는 윤리적 탐구를 하는 경우에 이미 도달해야 할 결론을 안다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132)

 

11장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상상력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문학적 재능이 탁월한 매력 넘치는 작가이다. 플라톤은 바로 허구를 창작하는 작가로서 보여준 탁월한 능력 때문에 역사가로서 지닌 재능을 의심받게 된다. (140)

플라톤에 대한 러셀이 의심하는 데는 어떤 근거가 있을텐데 그것이 궁금하다.

 

나는 만약 여러분이 나를 죽이게 되면 나를 해치는 것보다 여러분 자신을 더 많이 해치게 된다는 점을 아셨으면 합니다. 아무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입니다. / 악한 사람은 자신보다 더 선한 사람을 해칠 수 없는 법이니까요. (145)

 

그는 자기 확신에 찬 고매한 품성을 갖추었고, 세속적인 성공에는 무관심하며, 신의 음성에 인도받는다고 믿고, 명료한 사고야말로 올바른 삶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설득하는 사람이다. (147)

 

소크라테스가 과학 문제보다 윤리 문제에 더 몰두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현명할 뿐이지만,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150)

 

변증법은 어떤 문제를 다룰 경우에는 적합하지만, 어떤 문제를 다를 경우에는 적합하지 않는 면도 있다. (151)

 

변증법, 자유로운 토론 습관은 논리적 일관성을 증진하기 때문에 유용하다. 그러나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 목적이라면 소용없는 방법이다. (152)

 

12장 스파르타의 영향

 

스파르타의 신화는 플라톤의 정치 이론과 후대에 등장한 수많은 저술가의 정치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 스파르타의 신화가 추구한 이상은 후대에 루소와 니체의 학설을 비롯해 국가사회주의의 형성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153)

 

오랜 기간 스파르타인들이 자신들의 주요 목표인 무적의 전사 종족 육성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곤란하다. (158)

 

전쟁은 별문제로 하고, 스파르타의 현실은 이론과 동떨어져 있었다. (159)

 

그리스 세계가 동맹을 맺으려 할 때마다 스파르타의 지역주의가 걸림돌이 되어 실패하였다. (159)

 

그러나 낯선 민족들이 자기들이 정복한 나라의 문화를 퍼뜨릴 만큼 감명을 준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의 천재들이었다. (161)

 

르네상스 시대 이후 사람들이 정치적 자유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플루타르코스에게 관심을 돌렸다. (165)

 

13장 플라톤 사상의 근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나 중세, 근대에 속한 모든 철학자에게 영향을 가장 크게 끼쳤다. (166)

 

플라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는 다섯 가지이다.

이상향, 이상 이론, 영혼 불멸, 우주론, 지각이 아닌 상기로 간주되는 지식 개념 (166)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플라톤의 견해는 현실과 동떨어져 보인다. 우리는 당연히 다양한 이해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정치가는 유효한 최선의 타협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169)

 

‘현명한’ 사람들의 무리를 찾아 통치를 맡기는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한 과제이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궁극적 이유이다. (169)

 

14장 플라톤의 이상향

이상 국가론에서 도출된 한 가지 결론은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170)

 

아테네와 19세기 영국에는 제각기 부와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귀족 계급이 존재했지만 정치권력이 독점되지는 않았다. 또 귀족 계급은 힘이 닿는 만큼 감동을 주는 행동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상향에서 귀족 계급은 아무 견제도 받지 않으면서 통치한다. (171)

 

이상 국가의 목적은 전체 국가의 선이지 한 계급의 행복이 아니다. (174)

 

플라톤은 두 세대가 지나면 신화에 대한 신앙이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옳았다. (176)

 

플라톤은 이러한 신화를 강제로 수용하도록 교육하는 일이 철학과 양립할 수 없으며 지성의 성장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듯하다. (176)

 

우리는 민주주의 이론의 영향으로 정의와 평등을 결합하지만, 플라톤의 정의 개념은 그러한 결합을 함의하지 않는다. (177)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 무엇을 성취하려 하는가 하고 물으면... 전쟁 기술과 충분한 식량이 성취하게 될 전부이다. 플라톤은 아테네가 기근과 패전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시기에 살았기 때문에,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악을 피하는 일이야말로 정치적 수완을 다해 성취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79)

 

사실의 문제는 과학과 과학적인 관찰 방법에 호소하여 해결하지만, 윤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유사한 방식으로 해결하기 어려울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윤리 논쟁은 선전 선동을 포함한 권력투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180)

 

플라톤은 선 자체가 존재하며 선의 본성을 식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사람들이 선에 관해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적어도 한 사람은 지적인 오류를 범한 셈이며, 마치 사실의 문제에 관해서 일어나는 과학적 불일치인 양 취급한다. (181)

 

15장 이상 이론

그저 아름다운 사물만 사랑하는 사람은 꿈에 빠져 있는 데 반하여 절대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사람은 완전히 깨어 있다. 앞사람은 의견을 지닐 뿐이지만 뒷사람은 지식을 얻는다. (185)

 

감각에 나타난 세계에 대해서는 의견을 갖게 될 뿐이지만, 초감각적인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는 지식을 얻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의견은 아름다운 개별 사물과 관계하지만, 지식은 아름다움 자체와 관계한다. (186)

 

플라톤에게 철학은 일종의 통찰, 곧 ‘진리 통찰’이다. 철학은 지혜일 뿐만 아니라 지혜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며, 이러한 사유와 감정의 친밀한 합일은 스피노자가 말한 ‘신에 대한 지적 사랑’과 거의 같다. 어떤 종류이든 창작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정도가 크든 작든 오래 애쓴 끝에 진리나 아름다운 형체가 한 순간 눈부시게 훤히 나타나거나 나타나는 듯이 보이는 체험을 한다. (188)

김용규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그런 경험, 체험,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시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과 같은 것.

 

플라톤은 학문과 진리는 선과 유사하지만, 선이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 플라톤 철학의 구석구석에서 피타고라스 사상과 마찬가지로 지성주의와 신비주의가 융합되지만, 앞서 말한 최고 정점에 이르면 신비주의가 우위를 차지한다. (192)

 

윤리와 심미적인 측면에서 플라톤이 드러낸 편견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편견은 더욱더 그리스 과학의 기세를 꺾는데 큰 몫을 했다. (199)

 

16장 플라톤의 영혼 불멸설

소크라테스가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침착함은 영혼 불멸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파이돈>은 순교자 한 사람의 죽음뿐만 아니라 나중에 그리스도교에 스며든 많은 학설을 설명하기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200)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의 이원론, 말하자면 실재와 현상, 이상과 감각 대상, 이성과 감각 지각,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는 철학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202)

 

정신과 신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견해를 수용하게 되면 최선의 쾌락뿐만 아니라 최악의 쾌락, 예컨대 선망이나 여러 형태의 잔혹한 행위와 권력욕도 정신에 속할 것이다. (204)

 

플라톤이 권장하는 방법에 따라 수행 가능한 두 가지 정신 활동은 수학 활동과 신비적 통찰이다. (205)

 

이것은 진리를 배반하는 태도이며, 철학자가 저지르는 가장 큰 죄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한 인간으로서 성인들의 성찬에 참석하도록 허락 받았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로서 학자들이 가는 연옥에 오래 머물러야 마땅하다. (212)

 

17장 플라톤의 우주론

비겁하게 살거나 바르게 살지 못한 남자는 다음 생에 여자로 태어나게 된다. (219)

 

세계 속에 필연과 목적이 혼합되어 있다는 믿음은 철학이 생겨나기 오래 전부터 그리스인들이 모두 실제로 공유한 일반화된 믿음이다. (219)

 

18장 플라톤의 지식과 지각

근대인들은 대부분 경험적 지식이 지각에 의존하거나 지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플라톤이나 다른 특정 학파에 속한 철학자들 사이에는 ‘지식’이라 부를 만한 지식은 감각에서 유래하지 않으며, 유일하게 진정한 지식은 개념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전혀 다른 학설이 존재한다. (221)

 

어떤 판단이 다른 판단보다 더 참될 리는 없지만 더 나은 결과를 낸다는 의미에서 더 나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점이 바로 실용주의를 암시한다. (223)

 

플라톤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을 받아 다른 지식을 지나칠 정도로 수학과 비슷하게 만들어버렸다. (232)

 

19장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사상을 꽃피운 가장 창조적인 시기에 성장했고, 그가 죽은 다음에는 필적할 만한 철학자가 세상에 나타나기까지 2000년이 걸렸다. (233)

 

전반적으로 보아 두 위대한 인물의 접촉은 마치 두 사람이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양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듯하다. (235)

두 철학의 이론적 만남과 연구는 후대에서 파악된 것이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아랍 세세계로부터 연구되어 다시 서양 유럽으로 전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플라톤에게 스며들었던 오르페우스교의 요소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희석되어 상식이라는 강력한 요소와 혼합되었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범한 오류는 습관이 형성한 편견에서 자유로울 리 없는 시대적 한계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그는 상세한 서술이나 비판의 측면에서는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만, 기초의 명확성이나 티탄의 광휘가 부족하기 때문에 거대한 체계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다. (236)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상식으로 희석된 플라톤 사상이라고 묘사해도 괜찮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플라톤 사상과 상식이 쉽게 섞이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237)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 이론은 플라톤의 이상 이론에서 한 단계 진보한 이론이라 확신하며, 철학의 진정한 문제를 다룬 매우 중요한 이론이라는 점도 확실하다. (239)

 

실체에는 세 가지 종류, 곧 감각되고 소멸하는 실체, 감각되지만 소멸하지 않는 실체, 감각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실체가 존재한다 (242)

 

우리는 인간은 인간적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죽을 운명인 존재는 죽는 일에 대해 생각하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을 따라서는 안 되지만, 될 수 있는 한 우리 자신을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야 하기에 우리 안의 최고 부분에 따라 살기 위해 전력을 쏟아야 한다. 왜냐하면 비록 최고 부분이 영혼의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해도 능력과 가치 면에서 어느 부분보다 훨씬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247)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이 가르치고 나중에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친 개인의 영혼 불멸을 믿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인간이 이성을 지니는 한, 불멸하는 신성에 참여한다고 믿었을 따름이다. 자신의 본성 속에 깃들인 신성한 요소를 늘리는 일은 인간에게 열려 있으면, 신성한 요소의 증대가 바로 최고 덕이다. (247)

 

20장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선은 행복이며 행복은 영혼의 활동이라고 한다. (249)

 

지적인 덕은 가르쳐서 얻고, 도덕적인 덕은 습관을 키워서 얻는다. 강제로라도 좋은 습관을 들이면 때에 맞추어 좋은 행동을 할 경우 기쁨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한다. (249)

 

미덕이 없다면 있는 척이라도 하셔야죠. 습관이란 괴물은 온갖 감각을 먹어 치우는지라, 악마 같은 습관들도 이 점에서는 천사죠. 정당하고 착한 행동을 버릇 삼아 행하면, 똑같이 성직자복 또는 제복을 주어 어울리도록 입혀주니 말입니다. (249)

 

용기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 후함은 방탕과 인색함의 중용, 적당한 긍지는 허영과 비굴의 중용, 재빠른 기지는 저속한 익살과 상스러움의 중용, 겸손은 수줍음과 파렴치함의 중용 (250)

그는 이런 중용이 산술적 평균과 같은 중용은 아니라고 한다. 용기를 가만히 이런 관저에서 보면 비겁보다는 만용에 더 가까운 것을 느끼게 된다. 만용이 용기가 되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용기가 가지고 있는 참된 가치인 것이다.

 

정의란 평등이 아니라 가끔씩만 평등을 수반하는 정확한 비례를 뜻한다 (250)

 

우리는 본질적인 구조 탓으로 최선의 것들은 소수에게만 제한적으로 부여하고, 다수에게는 차선의 것들에 만족하도록 요구하는 사회에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니체도 이에 동조한다. 스토아 철학자와 그리스도교도와 민주주의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253)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인 덕은 목적이지만 실천적인 덕은 수단일 뿐이라고 말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스도교 윤리학자는 유덕한 행동의 결과는 대개 선하지만 유덕한 행동 자체만큼 선하지 않으며, 유덕한 행동은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256)

 

윤리학과 정치학의 관계는 상당히 중요한 윤리 문제를 하나 더 제기한다. 올바른 행위가 목표로 삼은 선이 사회 전체 또는 궁극적으로 인류 전체에 선한 것이라면, 이러한 사회적 선은 개인들이 누리는 선의 총합인가, 아니면 본질적으로 부분이 아닌 전체에 속한 무엇인가? (256)

 

행복은 유덕한 행동에 달려있고, 완벽한 행복은 최선의 활동인 관조에 달려 있다. 관조가 전쟁이나 정치나 다른 어떤 실천 경력보다 더 나은 까닭은 삶에 여유를 주기 때문이며, 여유는 행복의 본질적 요소다. 실천적 덕은 이차적인 행복을 제공할 뿐이다. 이성은 발휘해야 최고 행복에 이르게 되는 까닭은 이성이 다른 무엇보다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기 때문이다. (258)

 

그의 주장은 열정이 없이 안락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나 유익한 견해이다. 이 때문에, 내 판단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고유하면서도 중요한 가치를 결여하고 있다. (262)

러셀의 대단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근거에 의한 객관적인 평가. 누군가의 의견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부분은 참으로 어렵다. 그 사람의 감정을 집어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내 속에서 깊이가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21장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국가는 최고 단계에 이른 공동체로서 최고선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다. (264)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은 옳고, 패한 자는 그르게 된다. (266)

 

가장 큰 죄악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268)

 

정의 “비례에 따른 평등을 실현해 각자 자신의 몫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270)

 

국가의 목적은 교양을 갖춘 신사, 말하자면 귀족다운 심성과 아울러 지식과 예술에 대한 사랑도 지닌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다. (274)

 

22장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고대 말기,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았으며 중세 내내 그 지위를 유지했다. 13세기 이르러서야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은 형이상학 분야에서도 최고 권위를 부여했다. (276)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에서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은 삼단논법 학설이다. 삼단논법은 대전제, 소전제, 결론 세 부분으로 구성된 논증이다. (281)

 

귀납법은 연역법보다 설득력이 약하며, 확실성이 아니라 개연성만 제공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귀납법은 연역법이 주지 못하는 새로운 지식을 제공해준다. 논리학과 순수 수학의 범위를 넘어선 중요한 추론들은 모두 연역 추론이 아니라 귀납 추론이다. (282)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들이... 삼단논법 형식이론을 제외하면 전부 거짓이라고 결론짓는다. (285)

 

근대 전반에 걸쳐 과학, 논리학, 철학 분야는 모두 아리스토텔레스 제자들의 반대에 맞서는 과정을 거쳐서 진보했다. (285)

 

24장 초기 그리스 수학과 천문학

 

수학적 증명 방법의 기원은 거의 다 그리스인에게서 시작된다. (292)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기하학 원론)은 지금까지 저술된 위대한 저술 가운데 하나로서 그리스인의 지성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296)

 

바빌로니아인들과 이집트인들은 수세기에 걸친 관측을 통해 천문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296)

 

25장 헬레니즘 세계

철학 분야에서 이런 세계주의 관점은 스토아학파와 더불어 시작되지만, 실제로는 일찍이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시작되었다. (306)

 

전문화는 학문의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걸쳐 당대를 다른 시대와 구분하는 특징이었다. 기원전 5세기부터 4세기에 그리스 자치도시들의 경우 유능한 사람이란 모든 면에서 능력을 갖춘 인재였다. (310)

 

과거 자유 시대를 풍미한 무질서는 시민 개개인이 자유 시대에 참여했기 때문에 견딜 만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무질서는 무능한 통치자들이 시민들에게 강요한 것이기에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으며, 후대의 로마 복종 시대보다 견디어내기가 훨씬 힘들었다. (312)

 

최고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여럿이 점성술 신앙에 빠져들었다. 대부분 필연과 운명을 둘 다 믿으면서도 두 신앙 사이에 내재한 모순을 결코 알아채지 못했다. (315)

 

총체적 혼란은 지성의 쇠약보다 더욱 심각한 도덕적 부패를 초래하기 마련이었다. (315)

 

당신이 저축해둔 돈이 내일 전부 없어질지도 모른다면 검약이란 소용이 없어진다. 당신이 정직하게 대한 사람이 당신을 속인 게 확실하다면 정직이란 어떤 이득도 주지 않는다. 대의가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안정된 상황에서 승리할 기회를 잡지 못한다면, 단호하게 대의를 고집하는 일도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다. (315)

 

인생의 목적은 적극적인 선의 성취가 아니라 오히려 불행의 회피였다. (316)

 

26장 키니코스 학파와 회의주의 학파

 

뛰어난 지성인과 사회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아주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317)

 

그리스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불평불만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대체로 우주 전체를 절망적으로 바라보거나 정치적으로 무력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정치권력이 마케도니아인들의 손으로 넘어가자, 그리스 철학자들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개인의 덕이나 구원 문제에 더욱 몰두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318)

 

그리스도교가 개인 구원의 복음을 발전시켜 선교에 열의를 불어넣고 교회를 세울 때까지 주관주의와 개인주의로 점점 더 기울었다. (319)

 

키니코스학파의 최고 수준에 속한 학설이 스토아 철학 속으로 흘러 들어갔는데, 스토아 철학은 훨씬 더 완전하고 원숙한 철학으로 발전했다. (322)

 

회의주의는 자연스럽게 철학 정신과 거리가 먼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다. (323)

올바른 이해와는 무관하게 편의주의적인 이해의 결과이다. 내가 학문을 해석하는데 이런 부분은 없는 것일까? 무수히 많은 것들을 자기계발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지금의 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27장 에피쿠로스학파

인간이 크나큰 고통 속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최초로 한 사람 (334)

 

다른 철학자들을 관용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또 다른 중대한 과오, 오만하고 전제적인 독단주의에 빠지게 되는 과오를 저지르고 만다. (335)

 

현자의 목표는 쾌락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없애는 일 (336)

 

“모든 일에서 최고선은 사려이며, 사려는 심지어 철학보다 더욱 값진 것이다.” 철학은 그가 이해한 대로 행복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계획된 실천 체계였다. (337)

 

정신의 쾌락은 육체의 쾌락을 관조하는 활동 (336)

 

에피쿠로스학파는 후대에 이교도들이 마법, 점성술, 점술에 점차 빠져드는 경향에 맞서 저항함으로써 유용한 목적에 기여했다. (340)

 

그리스도교는 지옥에 관한 이전의 민간 신앙을 체계화했을 뿐이다. (343)

 

에피쿠로스의 복음은 언제나 교양을 갖춘 소수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사후 6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344)

 

28장 스토아 철학

스토아 철학은 초기 순수한 그리스 철학들과 달리 정서적인 면에서 편협하고 어떤 점에서 광신적인 특징을 나타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은 당시 세계에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리스인들이 제공하기 힘들어 보였던 종교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스토아 철학은 통치자들의 호감을 샀다.  (347)

 

스토아학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는 주요 학설을 우주에 대한 결정론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것이다. (348)

 

개인의 삶 속에서 유일한 선은 덕이다. (349)

 

인간은 저마다 세속적인 욕망에서 해방되면 완벽하게 자유로워진다. (350)

 

이들과 닮은 점이 많은 칸트는,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 법칙이 친절해지라고 명하기 때문에 당신의 형제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칸트가 사생활에서도 이 계율에 따라 살았을지는 의심스럽다. (35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로서 스토아학파의 덕을 실천하는데 헌신했다. 그에게 불굴의 의지력이 더욱 필요했던 까닭은 치세 동안 지진, 역병, 길고 힘들게 지속된 전쟁, 군사 반란 같은 참화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357)

 

사회상황이 한 시대의 철학에는 영향을 미치지만, 개인이 처한 상황이 개인의 철학에 생각보다 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 철학자들은 보통 사생활 속에서 빚어지는 우연한 사건들을 대체로 도외시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조차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문제가 되는 훨씬 큰 선이나 훨씬 큰 악에 무심할 수 없는 법이다. (357)

 

인간의 형제애를 인정하고 노예들의 평등을 가르친 점 (361)

 

“그대가 바로 이 순간에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으니, 매 순간 행동과 사고를 바르게 하라.” 삶은 우주와 조화를 이루게 될 때 선하며, 우주와 조화를 이룬 삶은 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삶과 같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조차도 사랑하는 것은 인간에게 고유한 특징이다. 또 만약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들이 친척이라는 것, 그들이 무지하거나 무심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 잘못을 저지른 자와 피해를 입은 자가 둘 다 곧 죽으리라는 것, 무엇보다 잘못을 저지른 자가 그대의 통제력을 이전보다 약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대를 해치지 못한다는 것을 그대가 떠올린다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사랑하게 된다.(363)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지만, 선해질 수는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선한 사람이라면 불행이란 문제가 되지 않는 척해보자는 말이다.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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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장 로마 제국의 문화

로마 세계는 행복했지만 모험보다 안전을 선호했기 때문에 삶의 맛이나 재미는 사라졌다. (372)..

그래 그랬다. 나의 삶이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의 부재. 모두가 타인의 삶이었다. 너무나 그런 것에 길들여 져있었다. 늦은 나이에 떠나는 모험이지만 나는 즐겨야 하고, 그것에서 의미와 실체를 찾아서 돌아와야 한다.

 

로마 세계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고, 틀에 박힌 사회로 변하는 과정은 후대 황제들의 치하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373)

 

동로마 제국을 지배한 문명은 라틴 문명이 아니라 그리스 문명이었기 때문에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그리스 문학과 라틴 문명에 대립하는 그리스 문명의 요소는 바로 아랍인들이 보전했다. (375)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 종교는 지상의 세계에 관심이 많고 지상의 행복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했다. 절망의 경험에 더 오래 시달렸던 아시아는 저 세상의 희망을 담은 종교 속에서 훨씬 결과가 좋은 해독제를 서서히 만들어냈다. 이러한 종교들 가운데 그리스도교가 위안을 이끌어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종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가 될 때까지 그리스에서 많은 요소를 흡수했고, 이런 요소를 유대교의 요소와 함께 후대의 서유럽에 전달해주었다. (381)

 

로마의 오랜 통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단일 정치 아래 단일 문화라는 생각에 익숙해지게 했다. (382)

 

30장 플로티노스

신플라톤 철학의 창시자로서 최후의 위대한 고대 철학자였다. 그의 일생은 로마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재난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385)

 

그는 현실 속의 황폐하고 비참한 광경을 외면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영원한 세계를 관조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385)

정신은 시대적 상황의 산물인가? 아무리 뛰어난 철학자라 하더라도 세대를 뛰어넘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인가. 하지만 2000년이 지나 내려오는 것들은.

 

중세기와 가톨릭 신학의 그리스도교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인물이다. (386)

 

플로티노스는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불행했지만, 이론의 영역에서 더 높은 행복을 찾기로 단호하게 결심했던 사람들 가운데 단연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다. (388)

 

플로티노스의 철학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외면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조장하는 결함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안을 들여다볼 때 신성한 정신을 보게 되고, 자신의 바깥을 바라볼 때 감각계의 불완전한 면을 보게 된다. (400)

여기에서도 나는 균형이 힘을 보게 된다. 우리가 일생에서 이루어야 하는 균형에 대해서 책을 써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플라톤이 생각한 덕은 당시에 정신이 이룰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성취에 다 적용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후대 수세기를 거치면서 덕이란 점점 유덕한 의지만을 뜻하는 용어로 변형되어, 물리계를 이해하려는 탐구심이나 인간 세상의 제도를 개선하려는 욕망을 덕이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401)

 

 

2권 가톨릭 철학 _서론

 

가톨릭 철학이란 말은 아우구스티누스부터 르네상스까지 유럽 사상을 지배한 철학을 의미한다. (404)

 

교회와 자주 갈등을 빚던 세속 통치자들은 자신들을 비롯한 대다수 사람들이 가톨릭 신앙의 진실성을 깊이 확신했기 때문에 교회의 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405)

 

철학의 관심사는 신앙을 옹호하는 것 (407)

 

비참한 상황이 사회 전반에 퍼져나감에 따라 종교 감정은 더욱 강렬해졌다. (409)

 

후대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누리는 이렇듯 단순한 행복을 알지 못한 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을 희망할 뿐이었다. (409)

 

1장 유대교의 발전

후기 로마가 야만인들에게 넘겨준 그리스도교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첫째 요소는 철학에서 유래한 몇 가지 믿음으로 주로 플라톤과 신플라톤 학파 철학자들에게서 비롯되지만 일부는 스토아 학파에서도 유래했다. 둘째 요소는 유대인들에게서 유래한 도덕 개념과 역사 개념이다. 셋째 요소는 대체로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특징이라 할 만한 몇 가지 이론, 특히 구원이론으로, 일부는 오르페우스교와 근동 지역의 유사한 이교 종파에서 유래한다. (412)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첫째 계명은 바빌론 유수 직전에 일어난 혁신에 대해 말해준다. (414)

 

유대인들은 바빌론 유수 시대를 살면서 독립된 나라에서 사는 동안 보편화되었던 정통 신앙보다 훨씬 엄격하고, 민족주의 관점에서 훨씬 더 배타적인 정통 신앙을 발전시켰다. (416)

 

원래 덕은 여기 지상의 삶 속에서 보답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덕망 있고 고결한 자들이 박해를 당하자, 이런 생각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그러므로 신이 의로우심을 보증하려면, 보상과 처벌이 내세에 이루어진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421)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 역시 일신교의 기원을 유대교에서 찾으므로, 마카베오 가문 덕분에 오늘날 전 세계에 걸쳐 동방과 서방 양쪽에 일신교가 존재하게 되었다 (422)

 

유대인들은 고유한 종교 의식을 통해 한 민족으로 단결하였으나, 율법을 강조함으로써 점차 독창성을 잃고 지나치게 보수적인 관습에 함몰되었다. (423)

 

 

그리스도교는 반유대주의를 자극한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당시 이슬람교도는 유대인들을 인간답게 대접한 유일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호의로 유대인들은 철학을 추구하고 사색을 펼치며 가르칠 수 있었다. (429)

 

중세 시대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민족이 아닌 개인으로서 문명 발전에 널리 기여했다. (429)

 

2장 초기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유대교의 개혁을 목표로 유대인이 유대인에게 설교한 가르침이었다. (430)

 

유대교의 확신은 신앙이 무너져가는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지만, 할례는 사람들이 개종을 망설이는 장애 요소였다. (430)

 

그리스도교는 성 바울로 덕분에 이방인들이 동화되기 너무 힘든 특징을 과감히 버리면서도 유대교 교리의 매력적인 요소를 보유하게 되었다. (431)

 

유대인이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은 여전히 그리스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불쾌한 요소였다. 그노시스파는 선민사상을 철저히 거부했다. (431)

 

유대교 신학은 언제나 단순했다. 야훼는 부족 신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한 전능한 유일신으로 발전했다. 하느님의 정의는 지상에서 덕을 갖춘 사람들에게 번영을 보장해주지 못하자 천국으로 양도되었고, 이것은 영혼 불멸 신앙을 수반했다. (433)

 

3장 교회의 세 박사

서방 교회의 박사로 불리는 네 사람은 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이다. (443)

 

성 암브로시우스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한정하는, 교회 입장의 사상 체계를 확립했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서방 교회에 수도원제도의 정착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요소를 대부분 제공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 신학을 비롯해, 종교개혁 이후 루터와 칼뱅이 내세운 교리의 태반을 확립했다. (444)

 

최고 수준을 자랑하며 활약한 당대 지성인들이 세속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로마 제국의 파멸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455)

 

그리스도교의 사고방식은 사람들에게 불굴의 용기를 심어주고, 지상의 삶이 헛된 것처럼 보일 때 종교적 소망을 간직하도록 이끄는 데 적합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455)

 

4장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과 신학

 

시간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활동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시대 이후 고대 세계에서 점차 증가했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주관주의이다. (468)

 

<신국>은 중세 시대를 관통하여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으로, 교회가 세속 군주들과 투쟁하는 경우에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469)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에 대해 공감을 표현하고 호의적으로 설명하면서 여느 철학자들보다 우위에 놓는다. (472)

 

후세에 영향을 미친 사상은,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고 국가란 신국에 속한 일부에 불과하므로 종교와 관련된 문제라면 모두 교회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분명한 가르침이다. (478)

 

아무도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는 죄를 피하지 못한다. (481)

 

5 5세기와 6세기

5세기는 야만족이 침입하고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시기였다. (483)

 

이 혼란기 동안 교회는 육화를 둘러싼 복잡한 논쟁으로 소란스러웠다. (484)

 

6세기에 문화사에 이름을 남긴 중요한 인물 네 사람은 보이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 베네딕투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이었다. (487)

 

6장 성 베네딕투스와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6세기 이후 수세기에 걸친 끝없는 전쟁으로 문명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던 시기, 무엇보다도 교회는 살아남은 고대 로마 문화를 보존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가장 위대한 성직자들조차 광신과 미신에 물들어 세속 학문을 사악한 것으로 치부했던 탓에, 교회는 로마 문화를 불완전하게 보존했다. 그렇지만 교회 제도는 후대의 학문과 세련된 예술의 부흥을 가능하게 만든, 튼튼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495)

 

우리가 관심을 갖고 다루는 시기에 나타난 교회의 세 가지 활동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수도원 운동 / 둘째, 교황 체제의 영향 / 셋째는 선교를 통한 이교도 야만족들의 개종이다. (495)

 

수도원 생활은 처음에는 교회 조직과 거의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496)

 

덕을 완전히 소극적으로 해석하여 죄의 회피, 특히 육신의 죄를 피하는 데서 찾았다. (497)

 

서방 지역 수도원 생활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성 베네딕투스로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창시자이다. (497)

 

수도자들은 청빈, 순명, 정결의 서원을 한다. (498)

 

유스티나아누스는 ... 법전 제정으로, 베네딕투스는 수도회 설립으로, 그레고리우스는 교황 권력을 증대시킴으로써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502)

 

6세기 사람들은 비록 선대의 사람들보다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했으나 후대 4세기 동안 살았던 사람들보다는 문명을 훨씬 더 발전시켜, 제도 형성에 성공했으며 궁극적으로 야만족을 길들이는 데도 성공했다. (509)

 

그레고리우스는 탁월한 현실감을 지닌 최후의 로마인이다. (509)

 

7장 암흑기의 교황 체제

황제와 교황 각각의 권력을 둘러싸고 형성되었던 중세의 정교한 권력이론은 15세기에 효력을 잃고 말았다. 중세의 권력 이론에서 주장한 그리스도교의 통일은 세속 영역에서 프랑스, 스페인, 잉글랜드의 각 군주가 권력을 쟁취하고, 종교 영역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남으로써 무너졌다. (518)

 

10세기 무렵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가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520)

 

‘암흑기’라는 말로 600년부터 1000년에 이른 시기를 가리키는 관행은 서유럽에 집중하는 부당한 처사에서 비롯된다. (525)

 

사물의 본성상 이러한 우월한 지위가 언제까지나 지속되어야 할 이유는 아무데도 없다. (525)

 

8장 요한네스 스코투스의 사상

아일랜드 인이며, 신플라톤학파에 속한 학자이자 그리스어에 조예가 깊은 학자이고, 펠라기우스주의자이자 범신론자였다. (527)

 

9 11세기 교회 개혁

11세기에 이룩한 개선과 진보는 오래 지속되었으며 다채로웠다. 이러한 진보는 수도원 개혁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그 다음 교황 체제와 교회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536)

 

배후의 동기는 성직자와 속인을 완전히 분리함으로써 성직자 계급의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회 개혁의 승리가 곧바로 황제와 교황의 격렬한 권력 투쟁으로 이어진 사태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537)

 

교회 규율체계와 통일된 성직자 조직체계는 성직자 계급의 권력을 형성하는 데 필수 요소였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11세기에 성직자 계급에서 일어난 도덕적인 개혁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538)

 

최고의 악습은 성직매매와 축첩 두 가지였다. (538)

 

성직자의 독신생활은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유지하는 데 불가결한 핵심 요소였다. (540)

 

10장 이슬람교 문화와 철학

동로마 제국을 공격한 주요 세력은 이슬람교도로서 정복 이후에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고 가치 있는 고유한 문명을 발전시켰다. (551)

 

이슬람교도는 세금을 낼 경우 답례로 어떤 그리스도교 종파든 관대하게 다루었다. (552)

 

주민들의 태반이 세금을 내지 않으려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553)

 

그리스도교도를 비롯하여 유대교도나 조로아스터교도, 즉 쿠란에서 경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라 부른 ‘성서의 백성’을 박해하지 않았다. (552)

 

아랍인은 새로운 종교의 이름으로 세계의 대부분 지역을 정복했지만 종교심이 깊은 종족은 아니었다. 아랍인이 정복을 시작한 동기는 종교가 아니라 약탈과 재물이었다. 소수 이슬람교 전사가 큰 어려움 없이 고도의 문명과 낯선 종교를 겸비한 다수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광신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인은 아주 일찍부터 종교심이 깊고 사색의 수준이 높았다. 페르시아인은 개종한 다음 이슬람교로부터 예언자 무하마드와 그의 동족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더욱 종교적이며 더욱 철학적인 종교를 만들어냈다. 661년 무하마드의 사위 알리가 죽은 뒤 이슬람교도는 두 종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었다. (553)

역사적 관점에서 좀더 학습해볼 필요성이 있다. 특히 종교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서는...

 

이슬람교 세계의 독특한 문화는 시리아에서 시작되었으나 곧 동방과 서방의 맨 끝, 페르시아와 스페인에서 가장 번창했다. (555)

 

당시 철저한 정통 신학자들로 구성된 종파에서는 모든 철학이 신앙에 해롭다고 선언하며 반대했다. (559)

 

11 12세기

12세기의 네 가지 양상은 다음과 같다. (562)

1. 황제권과 교황 체제의 계속되는 갈등

2. 롬바르디아 도시들의 발흥

3. 십자군

4. 스콜라철학의 성장

 

교황의 권력은 여전히 성장해가는 중이었으나 대체로 중세 세계에 황제의 맞수로서 교황이 필요했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황제의 위협이 사라지자 교황의 권력도 쇠퇴했다. (567)

 

십자군 전쟁의 선동으로 자극 받아 종교적 열의가 커짐에 따라 교황들의 권력은 증대되었다. (569)

 

십자군 운동 이전 유대인들은 유럽 전역에서 동방 물품의 무역을 거의 독점했다. 십자군 운동 이후 유대인 박해의 결과로 동방 물품의 무역은 대부분 그리스도교도가 장악했다. (569)

 

스콜라철학 방법의 결점들이란 사실과 과학에 대한 무관심, 관찰을 해야만 결정할 수 있는 문제에서도 추론을 따라 믿는 것, 언어상의 특징이나 세세한 구분에 대한 지나친 강조이다. (570)

 

12 13세기

13세기의 위해한 인물들은 정말로 위대했다. 인노켄티우스 3, 성 프란체스코, 프리드리히 2, 토마스 아퀴나스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 유형에서 최고 권위를 갖는 대표자들이다. (578)

 

이단 사상이 널리 확산된 것은 십자군 원정의 실패에 따른 실망감 탓도 있었지만, 주로 성직자 계급의 재산 축적과 사악함에 대한 도덕적 환멸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 교회는 부유했기 때문에 대체로 세속적 성향을 나타냈다. (584)

 

성 프란시스코는 그리스도교의 성인 대부분과 달리 자기 자신의 구원보다 타인의 행복에 관심이 더 많았다. (589)

 

성 프란체스코의 삶이 초래한 최종 결과는 부유하고 부패한 수도회를 하나 더 설립하여 성직자 계급제도를 강화하고 도덕적 정직함이나 사상의 자유에서 뛰어난 모든 사람에 대한 박해를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589)

 

13장 성 토마스 아퀴나스

지혜 자제는 우주의 목적과 관계가 있다. 이제 우주의 목적은 지성의 선, 즉 진리이다. (593)

 

인간은 육체적 쾌락, 명예, 부귀영화, 세속적 권세, 다시 말해 육체에 좋은 것들을 얻음으로써 행복에 이르지 못하며, 더욱이 행복은 감각 속에 자리 잡지 않는다. 인간은 도덕적인 덕을 실천함으로써 궁극의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도덕적인 덕의 실천이 수단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명상함으로써 궁극의 행복에 도달한다. (599)

 

결론이 미리 주어진 논증의 발견은 철학이 아니라 특별한 변론에 지나지 않는다. (604)

 

14장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스콜라 철학자들

교황 반대 운동은 단지 황제를 지지하는 단계에서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는데, 특히 교회 정치의 문제에서 민주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특징은 교황 반대 운동에 새로운 힘을 실어주어, 결국 종교개혁에 이르게 되었다. (612)

 

오컴 “존재들은 필요 없이 늘어나서는 안 된다” “더 작은 수로 할 수 있는 일을 더 큰 수로 하는 짓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615)

 

15장 교황 체제의 쇠락

 

13세기로 접어들면서 철학, 신학, 정치, 사회 모든 측면을 아우른 위대한 종합에 이르렀는데, 여러 요소들이 결합하는 과정을 거쳐 천천히 이루어졌다. (620)

그리스도교는 여러 종교에서 힘의 원천이 되는 요소들을 찾아 결합했다. 유대인들에게서 성서와 한 종교 이외에 모든 종교는 거짓이며 악하다는 교리를 받아들였다. (622)

구약성서, 신비 종교, 그리스 철학과 로마의 행정 체계가 모두 교회 안에서 혼합됨으로써 교회는 이전의 사회 조직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위력을 겸비하게 되었다. (622)

 

가톨릭교의 종합은 14세기에 붕괴되기 시작했는데, 철학보다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더 관련이 깊었다. (623) (아비뇽 유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과 세속적인 부유한 성직자들에 대한 혐오감이 강했기 때문에 이단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보인다. (630)

 

3권 근현대 철학 / 1장 일반적 특징

근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고 과학의 권위가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638)

 

과학의 권위는 고유한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효력을 나타내며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권위이다. (639)

 

과학의 이론 측면에서 응용 측면을 분리하려는 시도와 더불어 과학이 점점 더 기술로 변해간 끝에 세계의 본성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측면은 점점 무시되었다. (640)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닐까.

철학은 의미를, 과학은 증명을.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되면서 개인주의가 출현하고, 심지어 무정부주의까지 생겨났다. (640)

 

기술로서 수용된 과학은 실용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에 이론 철학자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시야를 심어놓았다. / 과학 기술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을 수행하게 하지만 수행해야 하는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641)

 

2장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

근대적 사고방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과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643)

 

이탈리아의 국가들은 서로 반목하는 가운데 술책을 쓰면서 내부 갈등에 프랑스와 스페인을 끌어들이는 짓을 일삼았고 국가 통일에 개의치 않았다. 결국 온 나라는 황폐해지고 말았다. (649)

 

사람들은 교회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지자,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는커녕 고대에 속한 온갖 종류의 무의미한 미신을 받아들이려 마음을 활짝 열었다. 도덕적인 면에서도 교회에서 해방됨으로써 나타난 최초의 결과는 똑같이 참담한 모습이었다. (652)

 

안정된 사회 체계는 필요하지만. 여태까지 고안된 모든 안정된 체계는 비범한 예술가와 지성인의 장점을 살리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곤 했다. (653)

 

3장 마키아벨리

그의 정치철학은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학설로 사태를 지시하며 스스로 경험한 것에서 나온 결과물인데, 목적의 선악 여부와 상관없이 정해진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내는데 관심을 두었다. (654)

 

종교가 국가 안에서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까닭은 종교가 독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 결속과 유대감 형성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657)

 

이탈리아 해방과 통일이라는 과업이 사리사욕이 없는 이타적 동기에 의해 완수되리라 기대하지 않지만, 권력에 대한 갈망과 명성에 대한 더 큰 갈망이 동기가 된다면 성취될 것이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659)

 

마키아벨리는 대중의 인기를 얻는 정부를 선호하는데, 이는 ‘권리’의 개념에서 비롯되지 않고 대중의 인기를 얻은 정부가 전제 정부보다 잔인성, 비도덕성, 변덕의 정도가 덜하다는 현실적인 관찰에서 나온 결론이다. (661)

 

세계는 더욱 마키아벨리의 세계와 닮아간다. 마키아벨리의 철학을 거부하겠다는 희망을 품은 현대인은 19세기보다 더욱 천착해서 사고해야 한다. (663)

 

4장 에라스무스와 토머스 모어

다양성과 변화는 행복한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인데, 유토피아에서는 다양성과 변화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676)

 

5장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반종교개혁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자유에 맞선 반항일 따름이다. / 종교개혁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반종교개혁은 스페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677)

 

종교 간의 반목에 지치고 염증을 느끼게 되자 점차 종교적 관용을 믿는 세력이 성장하였다. (679)

 

교리의 통일을 바라는 중세적 소망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기본 교리를 생각하는 자유를 키우는 결과로 이어졌다. (680)

 

6장 과학의 발흥

근대와 근대 이전 시대의 차이는 17세기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서 비롯된다. (681)

 

과학자를 과학자답게 구분해주는 특징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왜 그것을 믿느냐에 달려있다. 과학자들의 신념이 잠정적인 믿음으로 독단적인 믿음이 아닌 까닭은 증거에 근거할 뿐 권위나 직관에 기대지 않기 때문이다. (684)

 

뉴턴의 승리는 너무나 완벽해서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결국 과학의 진보를 저해하는, 넘어서기 힘든 장애가 될 위험도 안고 있었다. (692)

 

과학의 발전이 초래한 다른 결과는 인간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사고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일이다. (695)

 

17세기 사람들이 자신들을 주일마다 악행을 고백해야 하는 비참한 죄인이 아니라 멋지고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말은 놀랍지도 않다. (696)

 

7장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은 그 격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철학 전체를 꿰뚫는 기본 정신은 실제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 과학적 발견과 발명을 수단으로 인류에게 자연을 지배할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700)

 

우상은 사람들이 오류에 빠지도록 만드는 원인인 정신의 나쁜 습관을 의미한다. (702)

육체적인 습관은 변화시키는 방법을 알지만 정신의 나쁜 습관은 바꾸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짐. 이것에 대해서 좋은 책을 한번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할 듯.

 

8장 홉스의 리바이어던

데카르트에서 칸트에 이르는 대륙철학은 인간이 획득한 지식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어느 정도 수학적 방법에 의존하는데, 수학적 지식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획득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대륙 철학은 플라톤주의와 마찬가지로 순수 사유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한편 영국 경험론은 수학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으므로 과학의 방법을 잘못 파악하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705)

 

우리 마음속 사유 작용은 임의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때로는 연상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때로는 생각의 결과인 목적에 의존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708)

 

어떤 공동체이든 두 가지 위협, 즉 무정부 상태와 전제정치의 위험에 직면한다. (716)

 

9장 데카르트

물질보다 정신을, 타인의 정신보다 나의 정신을 더 확실한 존재로 만들었다.(727)

 

주관주의 경향과 물질은 오직 정신에 알려진 대상들에서 추론을 통해 알려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727)

 

종교적인 이유로 그리스도교 철학에서 발전한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완성했거나 거의 완성했다.  (731)

 

10장 스피노자

윤리적인 면에서는 아무도 따르지 못할 최고 수준에 이른 철학자이다. (733)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외부 원인에 의해 규정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구속되며, 스스로 규정한 정도에 비례하여 자유롭다. (738)

 

“자유로운 인간은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739)

 

“증오심은 보복하면 더 커지지만, 사랑의 힘으로 없어지기도 한다. 사랑의 힘으로 극복된 증오심은 사랑의 감정으로 옮아가는데, 이런 사랑은 증오심을 먼저 경험하지 않은 경우의 사랑보다 더욱 위대하다.(745)

 

당신의 운명이 인류의 범상한 운명보다 더 비참한 역경을 참고 견디어낼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우주 전체를 생각하거나 아니면 당신의 슬픔보다 더 큰 문제를 생각하라는 스피노자의 원리는 유익한 교훈이다. (746)

 

11장 라이프니츠

최고 수준의 지성 능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되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칭찬할 만하지 않다. (747)

러셀다운 문장. 수학자에게 너그러운 러셀의 마음을 감안할때 라이프니츠는....

 

12장 철학적 자유주의

초기 자유주의가 재산권에 의해 조율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을 암시한다. (766)

 

지성적이고 윤리적인 개인주의와 질서정연한 사회 생활을 화해시킬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 (768)

 

자유주의에 반대되는 입장을 점차 발전시켜 나간 새로운 운동은 루소와 함께 시작되어 낭만주의 운동과 민족국가 원리의 유행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769)

 

13장 로크의 인식론

역사상 일어난 혁명 가운데 가장 온건했으며 전무후무한 성공을 거둔 1688년 명예혁명의 주창자이다. (774)

 

철학자나 온건한 개혁가들은 로크를 추종하고, 극단적인 혁명가들은 루소를 추종했다. (775)

 

로크는 신뢰성을 자기 철학의 목표로 삼았으며, 목표에 이르려 일관성을 포기했다. (784)

 

사익과 공익이 단기적으로 보면 반드시 일치하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일치한다 (786)

 

14장 로크의 정치철학

우리는 지금도 개인이 자기 재산을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정치 권력에 관해서는 상속 원리를 거부하지만 경제 권력에 관해서는 상속 원리를 수용한다. (794)

 

미래의 어느 시기에 이르면 이런 신념들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공상적으로 보이는 팔머의 견해만큼이나 허황된 소리로 들리게 될 것이다. (795)

 

사회계약론에서 정부는 계약에 참여한 당사자로서, 만약 계약 내용의 일부를 이행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 (804)

 

노동가치설은 이익에 눈이 먼 약탈자로 비친 계급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지지를 얻어왔다. (811)

 

우리 시대는 조직이 지배하며, 이 시대의 갈등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분리된 개인들이 아니라 조직들 간의 갈등이다. 로크가 말한 대로 자연 상태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여전히 존재한다. (815)

 

15장 로크의 영향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 사람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행복을 소중해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더욱 ‘숭고한’ 것과 비교하면서 행복을 경멸하거나 멸시하며 천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821)

 

로크의 사상에서 비롯되어 계몽된 자기이익의 추구를 가르친 학파는 영웅주의와 자기희생의 이름으로 인간의 행복을 경시했던 학파들보다 인간의 행복을 더 증진시키고 비참한 고통을 경감시켰다. (823)

 

16장 버클리

마음과 관념들만 존재하므로 물리적인 외부 세계는 철폐된다. (891)

 

17장 흄

버클리가 물리학에서 실체의 개념을 추방했듯, 흄은 심리학에서 실체란 개념을 몰아냈다. (841)

 

경험론이 논리적 결론에 이르게 되면 아무도 스스로 과학 전체 영역에서 합리적인 믿음과 경솔한 믿음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며, 양자 간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892)

 

18장 낭만주의 운동

넓은 의미의 낭만주의 운동의 특징인 감정이나 격정에서 영향을 받았다. (858)

 

초기 낭만주의 운동은 철학과 아무 관련도 없었으나, 오래지 않아 철학과 연결되었다. 낭만주의 운동은 또한 루소에 의해 처음부터 정치학과 이어져 있었다. (858)

 

낭만주의자들은 평화와 고요가 아닌, 활기차고 정열적인 개인적 삶을 간절히 원했다.(861)

 

19세기 전반기 국가주의는 가장 활기찬 혁명의 원칙으로 자리 잡았는데, 대부분의 낭만주의자들은 국가주의를 열렬히 지지했다. (861)

 

낭만주의 운동의 본질은 인간의 개성을 사회적 규약과 도덕성의 족쇄에서 자유롭게 하려는 목표에 있다. (869)

 

현대에 와서 히틀러는 루소의 후예로, 루스벨트와 처칠은 로크의 후예로 평가한다. (870)

 

과학과 문학, 그리고 예술은 도덕의 가장 큰 적이며 탐욕을 조장하는 노예근성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873)

 

현대의 개신교도들은 대부분 예전의 ‘신 존재 증명’을 무시하고 신앙의 기초를 인간 본성의 어떤 국면, 즉 경외감이나 신비감, 옭고 그름의 느낌, 염원의 느낌들에 둔다. 이렇게 종교적 믿음을 옹호하는 방식은 바로 루소가 고안하였다. (878)

 

헤겔은 이 책에 기술된 철학의 대부분을 프로이센의 절대 정치를 지지하는데 이용했다. 루소의 철학이 실제 정치 현장에서 거둔 첫 결실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였다. 러시아와 독일의 독재 정치는 부분적으로 루소의 가르침의 성과로 볼 수 있다. (889)

 

20장 칸트

“한 인간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의지에 복종해야만 하는 경우보다 더 끔찍하고 두려운 일은 없다” (894)

 

“네 행위의 격률이 네 의지를 통해 마치 일반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행동하라” (901)

 

21 19세기 사상의 흐름

자연과 투쟁 관계에 놓여있는 인간의 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고, 다음에 인간의 믿음과 포부와 염원을 과학적 선전, 특히 교육에 의해 조종하려는 지배 권력에 대한 신뢰가 자라난다. (921)

 

인간관계를 다루면서도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현대에 어울리는 윤리 체계를 세우려면,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사람들 상호간의 권력 행사에 바람직한 한계를 긋는 일도 필요 불가결하다. (922)

 

22장 헤겔

“세계사는 억제되지 않은 자연의 의지가 보편적인 원리에 복종하도록 함으로써 의지에 주체적인 자유를 부여하는 훈련장이다.(931)

 

23장 바이런

러셀이 문학가인 바이런을 서양 철학사의 한 장으로 기록하고 있는데서 매우 놀람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바리언의 시를 흔히 조잡하고 하찮게 여길 뿐만 아니라, 예술적 감수성조차 천하게 취급하곤 한다. (943)

 

24장 쇼펜하우어

 

신화들 가운데 최고의 신화는 열반의 신화인데, 쇼펜하우어는 욕망으로 생긴 집착을 끊어버린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956)

 

금욕과 체념의 덕을 깊이 확신했던 사람이 스스로 확신한 덕을 실천에 옮기려고 전혀 애쓰지 않았다 (959)

 

의지가 우월하다는 학설은 염세주의보다 더욱 중요하다... 의지의 규모가 커지는 정도에 비례하여 지식의 지위는 더 낮아졌다. (960)

 

25장 니체

니체의 영향력이 전문 철학자들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크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미래를 내다본 니체의 예언이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969)

 

니체는 보편적 사랑을 경멸하지만, 나는 보편적 사랑이야말로 세계에 대해 바라는 모든 일을 추진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976)

보편적 사랑이는 동일한 어휘에 서로 다른 어의와 의미를 해석한다. 그의 분석철학적 경향이 보임

 

27장 카를 마르크스

유물론을 새롭게 해석해서 인간의 역사와 새로운 방식으로 관련시킨다. (987)

 

“인간이 사고를 통해 객관적 진리를 파악하느냐 파악하지 못하느냐는 이론의 문제가 아닌 실천의 문제이다.(988)

 

“사유의 진리, 다시 말하면 사유의 현실성과 힘은 실천을 통해서 증명되어야 한다. 사유의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둘러싼, 실천과 유리된 논쟁은 단순히 현학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자들은 단지 여러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과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일이다.(989)

 

추진력은 실제로 인간이 물질과 맺는 관계이며, 그러한 관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생산 양식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실질상 경제학이 된다. (990)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 역사의 어느 시기이든, 정치, 종교, 철학, 예술은 속한 시대의 생산 방법과, 비중은 조금 낮지만 분배 방법의 산물이다. (990)

 

28장 베르그송

철학은 행복에 대한 사랑에서 영감을 받은 감정철학, 지식에 대한 사랑에서 영감을 받은 이론철학, 행동에 대한 사랑에서 영감을 받은 실천철학으로 분류된다. (998)

 

29장 윌리엄 제임스

회의주의자는 속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지나쳐서 중요한 진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1013)

 

철학의 기능은 이런저런 세계 설명 공식이 참이라면 당신이나 나에게 어떤 차이가 생기는지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이론은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아니라 도구가 된다. (1015)

 

30장 존 듀이

대체로 인간의 조종을 받지 않는 사실들에 의존하는 ‘진리’ 개념은 여태까지 철학에 필요한 요소인 겸손을 가르쳤던 방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자긍심에 대한 견제가 사라지면, 다음 단계는 일종의 광기에 도취되는 길로 접어들고 만다. 이러한 광기는 피히테와 더불어 철학 속으로 침투한 후로 철학자이든 아니든 현대인들이 쉽게 빠져드는 힘의 도취이다. 나는 이러한 도취가 우리 시대에 가장 커다란 위험 요소이며, 의도하지 않더라도 힘의 도취에 일조하는 철학은 모두 끔찍한 사회 재앙의 위험을 증가시킨다고 확신한다. (1029)

 

31장 논리 분석철학

철학자들이 보기에 상대성 이론에서 중요한 부분은 시간과 공간을 시.공간으로 대체한 점이다. (1034)

 

과학적 방법으로 적절하게 다루기 힘든 중대한 분야가 남는다. 이 분야는 궁극적인 가치의 문제를 포함한다. (1036)

 

사실상 진리 추구에 제한을 둔 철학자는 이미 자신의 탐구 활동에 검열 장치를 마련해둔 셈이었다. (1037)

 

과학적 진실성은 우리의 믿음을 가능한 한 지역적 편견이나 기질적 편견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관찰과 추론에 바탕을 두게 하는 습관을 의미한다. 이러한 덕을 철학에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과 철학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의 고안은 내가 속한 분석철학 학파의 주요한 장점이다. 객관적인 철학 방법을 실천에 옮기면서 획득한, 주의 깊게 진실을 말하는 습관은 인간 활동의 전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으며, 객관적인 방법을 적용하는 어느 곳에서나 광신 행위는 감소하고 공감 능력과 서로 이해하는 능력은 증가하게 될 것이다. (1038)

 

 

3. 내가 저자라면

 

내가 이야기해보는 <서양 철학사>

저자 러셀은 책 서문에서 "역사의 변화 과정에 통일성이 있으며, 먼저 일어난 일과 나중에 일어난 일의 밀접한 연관성을 밝혀내려면 앞선 시기와 나중에 시기를 한 사람의 정신 속에서 종합해야 한다."라고 밝히듯이 그는 <서양 철학사>를 그의 정신 속에서 개괄하여 정리하고, 개괄된 사항에 대하여 그의 의견을 촘촘하게 밝혀 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앞서 이야기 한 것이 <서양 철학사>를 저술하게 된 하나의 큰 목적이었을 것이고, 더불어 그는 "철학사 서적이 많이 출간되었으나, 앞에서 내가 설정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은 내가 아는 한 없었다."라고 이야기 하는 부분은 이 책이 나오게 된 필요성이자 시대의 요구이었을 것이다.

 

이런 목적과 필요를 배경으로 하여 서양철학의 흐름이 역사, 문학, 예술과 버무러지며 장구한 2500년을 흐르고 있다. 그리고 명확한 목적과 필요는 저자의 깊은 사상을 만나 처음과 끝에 흐트러짐이 없고, 연구의 대상이 아무리 큰 대철학자라고 하더라도 분석학자다운 의미와 무의미, 가치와 무가치, 존경과 한계에 대한 그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학문적 자긍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짐작된다. 어떤 학자는 이 책을 철학에 대한 러셀의 주관적인 논평에 불과하다라고 치부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같은 이 책의 목적과 필요 그리고 러셀의 삶을 도외시한 스스로의 열등감을 표현이라고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이렇듯 내가 본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그의 주관을 담고 있는 책이다. 기존의 이론을 분석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재단하려고 한다. 자신의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것을 실랄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최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관점을 분명히 하는 반면 약간의 불안한 측면을 어느 한편에서는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통쾌하다.

<서양철학사> 전체 과정을 통해서 러셀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과거의 사유와 현재의 지혜들을 분석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의 의미가 밝혀질 수 있다라고 하는 분석적 자세를 우리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성에 대한 철두철미한 믿음,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러셀의 철학이 이 책의 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쉬운 점

내가 이 책을 보기에 아쉬운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나 스스로 너무 철학적, 역사적 지식이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책에서 이런 것을 도와 줄 수 있는 부분이 적다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적합한 철학책을 두어권 읽어보고 다시 이 책을 본다면 그때는 훨씬 받아들이는 깊이와 폭이 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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