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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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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6일 15시 35분 등록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두 번째 읽으면서 추가된 혹은 보완된 부분의 색깔 - 갈색)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나가 종교 아닌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가지요.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문화적인 것 안으로 과감히 침투해 들어갑니다. 신은 사회제도와 전통 안으로, 생활규범과 관습 속으로, 학문 안으로, 문학 속으로, 미술과 건축 안으로, 음악과 공연 속으로 부단히 파고 들어가 문화와 문명의 심층을 이룹니다.(8)

 

이 책의 주된 목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바르고 정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배관도, 급수펌프도, 정수장도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더불어 세계화의 거센 물결을 타고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보편화되고 있는 서양문명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떠맡긴 심각한 문제들 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문명의 충돌 등 에 대한 해법도 찾기를 기대하지요.(9)

심층적 이해는 충분히 받아들여 내 삶에 무엇인가 적용해 보고 변화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리라. 그저 외우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1. 신이란 무엇인가

뭔가를 건네주려는 능동적 손가락과 그것을 받는 수동적 손의 모습을 통해 동적인 신과 정적인 아담의 대조적 자세가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조가 전적으로 신의 능동적 행위로 이루어졌음을 상징하는데 안성맞춤인 장면이지요.(26)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신은 그렇지요. 구약성서에 나오는 천지창조는 히브리인들의 이야기고 그들에게 신은 영()입니다.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또는 숨결과 어원이 같아요. …그러니 당연히 신은 남성이나 여성이 아니고 늙은이나 젊은이도 아닙니다. 도무지 어떤 감각적 형상도 갖고 있지 않지요. (27)

 

신을 보았다는 구약성서의 기록들은 신의 본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과 위엄의 상징을 보았다는 의미일 뿐입니다.(28)

 

사람이란 항상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법입니다.(31)

 

르네상스(Renaissance)재탄생또는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의 재탄생이고 부활이란 말일까요? 그것은 신 중심의 중세문화를 깨트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35)

 

미켈란젤로는 성 시스티아 성당의 천장에 천지창조라는 히브리인들의 이야기를 그리스·로마인들의 정신과 기법으로 재현한 것입니다.(36)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인간의 몸을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여기고 그것에 열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신에게 인간의 육체를 부여한 것은 신들을 폄하했다기보다 인간의 육체를 그만큼 신성시했다고 보아야 하지요.(37)

 

고대나 중세 기독교에서 인간의 육체는 언제나 욕정과 죄의 온상이기 때문에 숨기고 가려야 하는 것었습니다.(39)

 

이데아의 미란 가시적 자연이 아니라 가지적 인간정신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빙켈만의 뛰어난 표현을 빌리자면 오성에 새겨진 정신적 자연에서 나오는 미를 말합니다.(41)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에서는 감각의 미를, 정신에서는 이데아의 미를 찾아내 조화시키려 애썼습니다. 감각의 미는 그들 작품에 자연스러움을 심어 주었고, 이데아의 미는 숭고함을 보탰지요.(41)

사부님이 설명해주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조화를 설명한 부분이 이런 것이구나.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미켈란젤로가 추구한 미에 대한 감각이기도 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1492~1519) <회화론>에서…”회화는 정신의 노동이다.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손재주와 눈가늠에 기대어 그리는 화가는, 앞에 놓인 모든 물체를 고스란히 재현하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울과 같다.”(43)

글을 쓰는 것도 더 나아가 삶을 바라보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

 

플라톤은 아름다움이란 여인의 얼굴이나 신체와 같은 감각적 대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들은 단지 매개체일 뿐이지요. 아름다움은 오직 우리가 감각적 대상을 통해 상기 하게 되는 지고한 신적 형상의 아름다움, 이데아의 미에서 나옵니다.(44)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의 영혼 속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이데아가 이미 존재한다. 즉 그 모든 이데아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망각(Lethe)의 강을 건너며 그 강물을 마심으로써 이데아에 대한 기억들을 잊었다. 그렇지만 그 기억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면 그 사물 안에 깃든 이데아를 상기, 다시 기억해 냄으로써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44주석)

 

영혼의 상승을 이끄는 에로스(Eros)의 날개 입니다. …..라틴어로 큐피드 또는 아모르라고 불리는 에로스지요. 이 소년에게 달린 날개가 우리의 영혼이 단순히 감각적 대상에 머물지 않고 이데아의 미를 거쳐 궁극적으로 신에게로 상승하게 됩니다. 즉 에로스는 우리의 영혼을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향하게 하는 혼의 전향을 가져오고, 감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에서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을 향한 등정을 하게 하지요.(44)

 

“…[아모르]가 바람을 가르는 날개를 달고 있음은, 아무 이유 없이 그러는 게 아니라 / 인간의 마음이 신에게 날아가도록 만들기 위함이라. – 프로페르티우스의 <애가>중에서 (45)

 

이렇듯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흔히 감각적이거나 육체적인 사랑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에로스는 우리 영혼을 본향인 이데아 세계로 귀환시키기 위한 혼의 날갯짓이고 상승적 창조자입니다. 또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천상의 이데아 세계로 연결시키는 열정이자 신에게 인도하는 안내자예요. 이로써 에로스 자신도 신적 존재가 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흔히 플라토닉 러브라고 부르는 사랑의 본질입니다.(47)

 

신과 인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신인동형설이라고 합니다. 또 신과 인간이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신인동감설이라고 하지요. 보통의 경우 신인동형이어야 신인동감이기 때문에 이 둘은 자연스레 붙어 다닙니다.(48)

 

그리스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와서야 신인동형설과 신인동감설에서 벗어났습니다. (48)

자연신학에서 벗어나 이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철학적 진일보를 이루는 대목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추측으로 짜인 거미줄을 뛰어넘는 사유를 함으로써 그리스의 신들을 올림포스 신과 인간의 형상으로부터 해방시켰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신을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라고 규정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을 축약해서 보통 부동의 운동자 또는 원동자라고 하지요.(50)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의 궁극적 바탕으로서 자신은 탄생하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탄생과 변화의 원인이 되는 무형의 원리를 가정해 부동의 운동자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신이라고 했지요.(51)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제우스나 아폴론 같은 유형의 그리스적 신 개념이 처음으로 부동의 운동자라는 무형의 자연 원리로 바뀐 겁니다. ….무형의 신 개념을 그리스 철학 안에 최초로 확정한 계기였지요.(51)

 

구약성서는 처음부터 신에게서 인간의 형상을 철저하게 지웠어요.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모든 종교에서 신은 무형의 존재입니다. … 이런 측면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적 예술가들을 통해 무형의 기독교 신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형의 신으로 다시 탈바꿈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하나의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52)

 

구약성서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세기 1:26)라는 구절여기서 사용된 형상과 모양이라는 두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형상을 뜻하는 이브리어 첼렘(Selem)’은 원래 그림자라는 뜻이지요. 또한 모양을 의미하는 떼무트는 보통 어떤 것과 닮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둘 모두 신의 외적 형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내적 본성을 뜻한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공통된 해석이지요.(53)

그렇다. 현대적 어의로서 혹은 번역된 어의로서 과거의 교리를 이해하고 재단하는 것은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 개념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 만을 계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둘을 종합한 것이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건 신앙과 이성이라는 그 이상 간데없이 뻗은 양극을 휘어 하나로 결합하는 것 같은 극적 종합이었습니다.(55)

 

성서의 종교에는 존재론적 사상이 없다. 그러나 성서의 그 어떤 상징도 그 어떤 신학 개념도 존재론적 함축성을 갖지 않은 것이 없다.”(56)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은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신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56)

 

그에 의해서 창조되고, 그 안에 존재하며, 그에 의해 인도되는 피조물로서의 모든 인간은 당연히 그의 말과 의지를 따라야 한다는 교리가 자연스레 파생된 것이지요. 그래야만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선하게 이루어져 그것을 복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역하면 반드시 파멸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자기파멸을 인간은 벌()이라는 형태로 경험하게 되지요.(57)

 

신은 곧 존재라는 가르침에서 신을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상실, 곧 사망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일 뿐이지요. 신은 영이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은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킨 겁니다. 이처럼 성서는 낙원추방의 서사에서부터 존재론적 함축성을 이미 내포한 것이지요.(59)

 

 

2. 신은 존재다.

 

도미니크 수도회를 중심으로 젊은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언어로 성서를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에 근거한 교부신학을 고수하던 로마교황청은 물론이고, 베네딕토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그리고 대부분의 대학들에서는 이 새로운 철학을 경계했지요. 중세 기독교 사상사에서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의 대립'이라고 불리는 신구 두 신학적 입장 사이의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움베르트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이 갈등이 정점에 이르렀던 14세기를 배경으로 하지요. (70)

!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여기에 있었구나. 일전에 선생님을 만났을 때 이런 철학적 배경을 이야기 듣고 싶었는데 두 번째 읽기에서 책의 몇몇 구절을 통하여 궁금한 것을 다소 해결할 수 있었다. <장미의 이름> 영화 혹은 책을 한번 꼭 읽어보고 싶다.

 

트라이니,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승리> 1341

중세 철학을 가장 잘 표현한 그림이 아닌가 생각한다. 토마스아퀴나스를 중심으로 아리스토텔레서, 플라톤, 4대복음의 저자들이 그를 향해 공부하는 학생처럼, 경배하는 종교인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다. 철학이 신학의 시녀임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인 명칭은 있는 자. 이 명칭,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75)

 

이름이란 일반적으로 개념을 대표하고, 그 사물과 다른 사물을 구별하는 칭호로서 어떤 것이 무엇인지를 지시해 주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어떤 것이 무엇인지알아내기 위해 먼저 그것의 이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80)

 

신이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람을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준 것이 대표적이지요. 신은 이름을 바꿈으로써 그가 한탄 소수 유목민의 족장에서 장차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계시한 겁니다.(80)

 

신이 자기 이름을 감춘 것은 사실 신에게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지요(83)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그저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있지요. 예컨대 사과는 사과로 있고 책상은 책상으로 있습니다. 이때 사과를 사과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이 존재론에서 말하는 그것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있음이 곧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본질존재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세상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입니다.(84)

선생님께서 만나서 설명해주신 존재물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설명. 존재로만 보지말고 그것의 본질을 보라는 가르침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신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자신의 속성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그 무엇으로도 한정할 수 없는 무한정자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될 수 없지요.(84)

 

그럼에도 신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를 이름 지어 부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열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어렵게 알아낸 신의 이름이 야훼(YHWH)’지요.(87)

 

신을 가리키는 그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인 명칭은 있는 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모든 피조물은 본질과 존재가 구분되지만 신의 본질은 그의 존재와 다른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 까닭입니다.  (86)

첫 번째 읽었을 때 본질과 존재를 구분하지 못하여 이런 메모를 적어두었다. '존재와 본질이 구분된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선생님을 두 번 만나고, 이번에 두 번째 읽기를 하니 그것에 대한 이해가 와 닿는다. 내가 조금 배웠다는 느낌이 든다. 성취감과 감사함

 

* 본질과 존재가 구분되는…93페이지 주석 : 그리스 철학에서는 존재가 곧 실체다. 예컨대 플라톤의 존재인 이데아(idea)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인 형상(eidos)은 개개의 사물들에게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을 부여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실체다. 그래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리스 철학에서 존재라는 개념에는 항상 본질이 붙어 다니며, 그 결과 본질과 존재가 함께 있는 존재물과 혼동될 여지가 생겼다. 그러나 신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존재물과 같지만,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와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을 단순히 존재라고 하지 않고 존재자체라고 구분해서 부른 것은 그런 이유다.

 

이것을 형이상학으로 끌어올려 존재라고 이름 붙인 사람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였습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존재는 비물질적 무한자이자 유일자였지요. …이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을 이후 자신의 존재론 체계 안에서 모든 이데아의 근거인 일자(一者) 또는 선자체(善自體)로 정립한 사람이 플라톤이었고요, 그 체계를 종교화한 사람이 플로티노스였습니다.(88)

 

* 기원전 1700년경 가나안 땅의 흉년,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과 그의 족속이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이동, 야곱의 야들 요셉이 그들을 초청. 요셉은 이집트의 총독, 야곱이 죽고, 요셉이 죽고 그러면서 <창세기>가 끝남. 이때가 대략 기원전 1650년경. 이어지는 <출애굽기>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 모두 죽고 약 400년이 지난 뒤에 시작, 파라오들은 늘어나는 이스라엘 족속의 번창을 두려워하고 경계함. 박해함. 이때 모세가 태어남, 이스라엘 족속의 번성을 염려한 파아오(람세스2)는 히브리 여인이 남자아이를 낳으면 강물에 던지라는 명을 내림, 모세는 태어나서 버려졌으나, 파라오의 딸이 아이를 건져 모세라함. 모세는 히브리어로 물에서 이끌어낸 이라는 뜻. 마흔살의 해에 종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죽이고 이집트를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 그곳에서 제사장의 딸과 결혼 이후 40년을 양치기로 삼. 그러던 중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난 신을 만나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라는 명을 받음. 그것을 빌미로 신의 이름을 물음. 뜻밖에 신이 자기 이름을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고 말함. (92)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그리스어로 된 최초의 구약성서 <70인역>에서 나는 있는 자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탁월한 번역이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때 존재와 존재물이 혼동될 수 있는 , 존재가 곧 실체라는 그리스 철학적 요소가 본의 아니게 스며들어 히브리어 표현의 근본적 의미를 변질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있음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에흐예있는 자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모든 시원이 그렇듯, 출발에서 벌어진 미세한 틈새가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간격이 되는 법입니다.

 

요컨대 신은 이 말을 통해 자신이 존재물이 아니라 존재임을 알린 것이지요. (94)

 

야훼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해석은 그는 있다’, 그는 존재한다. 또는 그는 현존한다 입니다.(95)

 

나는 있는 자다라는 <70인 역>을 따라 신의 존재와 자기현현(스스로 나타냄)의 성격은 살리되, ‘있는 자라는 용어 안에 잠재된 그리스 철학적 요소, 곧 존재물로 오인될 위험은 제거하자는 의도가 들어 있다. 한마디로 신은 그 어던 무엇으로 있지 않고 그저도는 그저 그로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히브리어 원어에도 합당할 뿐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도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신은 그 어떤 본질에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무규정성, 무제약성이 드러나며, 또한 신이 가진 절대적 독립성, 궁극적 포괄성, 유일성 등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95주석)

 

신은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그의 이름을 계시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존재현현을 계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어떤 본질로 나타내지 않고 자신을 직접 보이신것이라 주장합니다. 이름이란 본디 존재가 아니라 존재물에게 속한 것인데, 신은 그 어떤 존재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어쨌든 신이 자신의 존재를 이름으로 계시했으므로 신은 이름을 갖게 되었고 하나의 존재물처럼 인식되는 일 또한 불가피하게 일어난 것입니다.(96)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라는 질송의 말처럼, 보이지 않고 사고할 수도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부단히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는 근본적 이유이며, ‘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향하게 되는 원초적 까닭인 것입니다.(97)

 

거기에는 신은 거룩한 '존재'이고, 인간을 포함한 그 밖의 만물은 거룩하지 않은 '존재물'로 신과 갈라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99)

 

신은 '무엇'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저' 존재합니다. (101)

 

존재란 도대체 무엇인지를 좀 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편의상 그리스적인(또는 철학적인) 존재 개념과 히브리적인(또는 종교적인) 존재 개념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02)

신을 보는 혹은 해석하는 가장 큰 두 가지 관념,

 

기원전 5세기쯤 그리스인들은 세상 모든 존재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물음으로 철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궁극적 근거를 아르케(arche)라고 불렀지요. 칼레스는 물,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아르케라고 생각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수와 질서를, 헤라크레이토스는 로고스를 내세웠어요.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인 엘레아 출신 파르메니데스는 만물의 궁극적 요소가 존재라고 주장했지요.(104)

 

만물의 근거를 탐구하던 아르케에 대한 물음이 자연철학에서 존재론으로 도약했지요. (104)

 

기독교인에게도 진실하고 참된 세상은 우리의 관점에서 현존하는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어떤 다른 세상이지요. 곧 플라톤에게 이데아의 세계였던 것이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天國)’입니다. 그것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 불변하게 존재하며 그렇기에 참되다는 것이지요. 반면 우리가 사는 이곳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렇기에 헛되다는 것입니다.(109)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렇게 이데아를 향해 올라가는 길을 층계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층계는 위로 올라갈수록 질적으로 더욱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지요. 하지만 양적으로는 그만큼 더 적어져서 맨 나중에는 단일한 것이 됩니다.(116)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外延)인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123)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예시한 존재론적 계층구조라는 모호한 개념은 그의 영특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자연의 사다리라는 좀더 이해하기 쉬운 생물학적 위계질서와 결합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로 유입되어 가장 미소한 존재물로부터, 모든 가능한 단계를 거쳐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에 이르는, 무한한 수의 고리로 연결된 존재의 대 연쇄라는 신학적 개념으로 굳어졌지요.(124)

 

근대적 직업관의 근간이 된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1509~1564)소명의식역시 이 같은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소명의식이란 모든 인간은 신의 계획을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각각 특정한 부름을 받았으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이 무엇이든 거기에 충실한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라는 인식이지요.(128)

직업에 대한 소명이라는 개념이 칼빈에서 유래한 것이었구나.

 

존재가 영원불변하는 실재이자 진리의 근거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거쳐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파르메니데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에서 존재는 그것을 플라톤처럼 이데아로 부르든, 플로티노스처럼 정신(nous)’으로 부르든,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말씀(logos)으로 부르든 간에- 불변성을 본성으로 갖고 있고, 우리가 따라야 할 모든 진리의 근거입니다.(131)

 

바로 이것이 존재에 대한 그리스적 개념과 히브리적 개념이 상충하는 지점이에요. 히브리인들의 존재 개념은 만물을 생성, 소멸시키는 역동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진리 개념 역시 불변성을 근거로 하지 않고 오히려 생성, 소멸하는 작용, 곧 변화시키는 본성을 근거로 하지요. 천지를 창조한 신의 말이 바로 그렇습니다. 신의 말은 만물을 생성, 소멸시키고 의롭게 만드는 작용을 하므로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라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생각입니다.(131)

 

플로티노스의 세계구조에서 물질세계를 유출시킨 일자, 정신, 영혼은 영원불변하는 신적 존재입니다. 창조와 관련해서 본다면 일자는 창조의 바탕이고, 정신은 창조의 틀이며, 영혼은 창조의 원리지요. (141)

 

초이성적 계시를 교리로 이론화해야 했던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플라톤주의 철학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의 존재개념과 그리스의 존재 개념을 종합해 기독교적 신 개념을 형성한 결정적 계기지요.(143)

 

히브리인들에게 존재는 영원불변한 것인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실재입니다.(146)

 

무언가가 영원불변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지요? 언제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뜻이에요. 그 자신이 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변화하도록 만들 수도 없지요. 다른 무언가를 변화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존재의 자기동일성이 깨지고 말지요.(147)

 

플라톤의 이데아나 플로티노스의 정신(nous)은 물질의 생성에 관여할 때도 자기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고 단지 창조의 틀(paradeigma)로만 작용하잖아요. 불변을 속성으로 하는 존재와 변화를 속성으로 하는 생성 또는 작용은 이처럼 개념적으로 서로 대립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존재하는 것은 변화(생성, 작용)하지 않고 변화(생성, 작용)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파르메니데스로부터 내려온 존재론 전통의 한결 같은 생각이지요.(147)

지금의 상식으로 이해되는 '존재'라는 어의와 동일하게 해석해서는 책을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철학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존재와 생성의 종합이 가진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가시적 또는 사물 중심적 사유냐, 아니면 심리적 사유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에 있습니다.(150)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불변하는 존재란 변화하는 존재의 시간 밖에서의 모습또는 탈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변화하는 존재란 불변하는 존재의 시간안에서의 모습또는 시간화된 모습일 뿐입니다.(151)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시간을 매개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이 하나로 종합된 겁니다.(153)

 

신은 영원히 안식하느냐 아니면 부단히 활동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인 신은 영원히 안식하면서 부단히 활동하신다”(153)

 

우주와 신이 하나인 범신론(165)

 

신에 대한 모든 상상, 모든 형상화, 모든 규정과 언급은 사실상 부질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십계명 가운데 두 번째 계명에서 신이 우리에게 우상과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금한 근원적인 이유고, 중세에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 가운데 하나인 성화상파괴운동의 신학적 동기지요. 그렇지만 문제는 우리가 신을 형상화하는 것에 대한 강렬하고도 부단한 욕망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166)

 

"우리는 바다라는 비유를 통해서, 우선 신이 암암리에 사람처럼 생겼으리라는 끈질긴 망상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바다가 우주마저 포괄하고 초월할 만큼 무한하다는 점에서 신은 없는 것이 없다.(無所不在)’라는 오랜 주장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요. 이와 동시에 신이 유일하다는 교리를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 선포가 아니라, 존재의 바다가 무한히 광대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포괄하며 그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 바다가 그 자신은 무형이지만 모든 유형적 존재물이 생성하고 소명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형체가 없는 신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교설을 이해할 수도 있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물방울 비유를 통해 우리는 우주만물이 신에 의해 생겨나서 그 안에 존재하다가 그 안에서 사라지는 피조물이라는 교설이나, 신이 우리의 시작과 끝 그리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늘 헤아린다는 교훈 역시 자연스레 수긍할 수 있게 됩니다. 물방울이 어찌 바다를 벗어나거나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사정이 그러하니, 신은 그 무엇도 거스를 수 없을 만큼 강할 뿐 아니라 동시에 한없이 지혜롭고 거룩해서 만물을 오직 자신의 뜻과 의지로 이끌어 간다는 섭리의 교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지요". (171)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 전자는 지식의 논리적 타당성(validity)을 따져 보자는 것이고, 후자는 지식의 건전성(soundness)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177)

 

실존(existence)은 어의만으로 보면 실제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신학자가 이런 뜻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그러나 키르케고르 이후 하이데거, 아스퍼스,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써 의미 있게 산다라는 특별한 의미로 간략해서 사용했습니다. 예컨데 하이데거는 기획투사(entwurf)’함으로써, 사르트르는 앙가주망(engagement)’함으로써 인간은 실존한다고 했지요. 기획투사는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향해 그 자신을 던진다는 의미이고, 앙가주망은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제 스스로를 잡아매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써만 인간은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까닭에 실존주의 이후부터 실존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되었고, 당연히 이 둘을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혼란이 야기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실존이라는 용어는 실존주의자들의 용어를 따라 사용하고, 기존의 의미대로 실제로 존재함을 표현할 경우에는 현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지요. 요컨대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을 신은 실존하는가?’ 라고 묻지 않고 신은 현존하는가?”라고 묻겠다는 말입니다.(179)

 

안셀무스는 신을 그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때 그가 말한 큰 것이란 물체가 차지하는 어떤 공간적 크기를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가치적 크기를 뜻하는 것이지요. 신은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어떤 존재물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180)

 

칸트. 최고의 존재자의 현존을 개념으로부터 증명하려는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증명을 위한 모든 노고와 작업은 헛된 것이다. 인간이 순전한 이념들로부터 통찰을 더 늘리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상인이 그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자기의 현금 잔고에 동그라미를 몇 개 더 그려 넣어도 재산이 불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187)

칸트의 철학을 요약, 정리할 필요가 있다.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은 종래의 신적 형이상학(神的形而上學)이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칸트는 뉴턴의 수학적 자연과학에 의한 인식구조에의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종래의 신()중심적인 색채가 남아 있는 형이상학의 모든 개념을 모두 인간 중심적인, 인간학적인 의미로 바뀌어야 되는 이유를 제시하였다.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이론적으로 확실하게 인식가능한 것은 감각적 여건을 기초로 한 현상’으로서의 자연, 다시 말해 감성적 세계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현상의 세계를 초월한 물자체(物自體)의 세계와 예지계에 관련되는 이념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은 이론적 학문이 될 수 없고 현상세계의 인식에 궁극적 통일을 부여할 방향을 제시하는 통제적 원리로만 인정된다고 결론지으며 일반적 •세계관적 귀결을 내렸다. 이로써 순수이성의 근원과 그 한계를 비판적으로 탐구하여 '인식작용' '사고작용'의 구별함으로써 실재에 대한 이성 능력의 경계 설정한 것이다. , 감성과 지성이 결합할 때만이 인식이 성립하고,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l  순수이성 : 모든 경험에 앞서서(선험적으로), 인식하는 이성.

l  감성 : 외부의 것에 대해 감각을 가질 수 있는 수용성의 능력. 이러한 감성의 형식이 순수직관.

l  지성(오성) : 사유능력. 직관에 의해 수용된 다양한 것들을 결합하여 종합, 통일시키며 판단.

 

모든 무한 소급은 논리적으로만 가능하지 존재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칸트가 제시한 원칙이지요. (191)

 

유비추론은 전제들이 참인 경우에도 결론이 '확률적 참(probably true)' 또는 '가능적 참(possible true)'일 뿐 '필연적 참(necessary true)'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지요. 유비추론이란 사물이나 사건의 유사성(analogy)을 근거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증입니다. (199)

'확률적 참(probably true)'

'가능적 참(possible true)'

'필연적 참(necessary true)'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진화론은 기독교를 향해 자연을 위한 신의 개입은 처음부터 아예 필요가 없었다는 결정적 메시지를 던졌습니다.(203)

 

당시 자연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섬기는 이신교, 인류를 숭배하는 인류교와 같이 기독교를 인간중심적이고 과학적인 종교로 개조하려는 이단자들이 온상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기독교는 언제나 외부에 있는 다른 종교들뿐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는 이단들과 싸워 왔는데 모든 일에서 그렇듯 안에 있는 적이 더 위험한 법입니다.(205)

 

기독교는 여전히 자연신학에 대해 이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개혁신앙의 구호를 따르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 및 진리의 근거를 초이성적 계시에서 구하지 않고,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에서 구하려는 자연신학을 강력하게 거부하지요(205)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처럼, 자연의 복잡성과 합목적성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연신학적 주장들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예나 지금이나 적극 반대한다는 것입니다.(206)

 

토마스 아퀴나스, 안셀무스..두사람은 모두 필연적 현존과 우연적 현존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신의 현존을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안셀무스는 개념에서 출발해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논증을 전개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감각적 경험에서 시작해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논증을 펼쳤다.(208)

 

안셀무스가 플라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진 존재론의 영향하래 있었던 반면, 코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적극 수용했기 때문이에요. 근대로 들어서면 디들 두 사람의 방법론을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각각 계승하게 되는데요, 이 차이는 본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적 차이에서 나온 것입니다.(208)

 

플라톤은 세상의 모든 사물 안에는 이데아가 들어 있어서 그것이 그것으로 존재하도록, 또한 그렇게 이름 불리도록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개별적 사물 안에 그러한 형상이 들어 있어서 사물들이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라는 스승의 주장에는 반대하지 않았어요. 단지 그 형상이 이데아처럼 사물들에서 독립해서 세상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따로 존재한다는 말에 반대했습니다. 형상은 우리가 볼 수도 있고 만져볼 수도 있는 감각적이고 개별적인 사물안에 들어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정신 안에도 개념으로 들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 차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는 플라톤에 있어 형상을 뜻하는 이데아(idea)’라는 말 대신 에이도스(eidos)’라는 용어를 별도로 사용했습니다.(209)

 

따라서 플라톤에게 진리는 우리가 정신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에이도스에 대한 지식입니다(209)

정신으로 파악하는 이데아의 지식, 감각으로 파악하는 에이도스의 지식이 대륙의 합리론에 영국의 경험론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고리를 철학을 읽고 보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는 과학자였던 것입니다.(210)

 

그런데 이런 식으로 2000년은 족히 이어지던 해묵은 논쟁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이가 18세기 독일에 혜성처럼 나타났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한 이마누엘 칸트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212)

처음에는 칸트의 업적을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철학과 함께 두 번 읽기를 하고 나니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사상이 서양철학사에 이어 내려오는 사조와 그것의 영향으로 합리론과 경험론의 차이를 이해하게 되니 칸트가 철학사에서 얼마나 귀중한 사유를 해주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화하는 일(즉 개념에 대해 그 대상을 직관에 부여하는 것)은 직관을 오성화 하는 일(즉 직관을 개념 아래 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212)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지만 감성이라는 섬 안에 있어야만 안전합니다. 한마디로 감성의 한계가 곧 이성의 한계지요! 감성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사고는 가상이고 오류의 원천입니다.(213)

 

칸트.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이성을 신학에 단지 사변적으로만 사용하려는 모든 시도는 전혀 무익하며 내적 성질에 비추어 보아도 아주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이성의 자연적 사용의 원칙들은 신학에는 전혀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만약 사람들이 도덕법칙을 기초에 두지 않거나 또는 실마리로 잡지 않는다면 이성의 신학은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215)

 

19세기 신학자들은 칸트가 이성의 한계를 분명히 밝히고 인간은 그 유한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무엇보다도 큰 방어 무기가 된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지요. 파울 틸리히가 언급한 대로, 인간이 "무한성에 이를 수 없음을 가장 명확하고 예리하게 보았던 철학자"가 바로 칸트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신론자들을 향해 "무릇 이성만의 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칸트의 말을 거세게 외쳤을 겁니다.(216)

 

신학은 20세기에 칼 바르트가 갔던 길, 다시 말해 신의 현존에 대한 합리적 증명이나 이해보다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신앙을 우선하는 길로 나아가는 이론적 발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결코 칸트 자신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른바 '진리의 땅'에서 신에 관한 명제와 논증을 '폭풍이 이는 험한 바다로' 내쫓아 버림으로써 근대신학이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은 철학의 망령에서 벗어나 종교적 성격을 회복하기 시작했던 겁니다.(217)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말을 통해 칸트는 이성을 감성의 테두리에 가두었습니다. 그 이후 근대 학문에서는 중세에 비해 경험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강조되어 진리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었지요.(217)

 

느낌이 종교의 심층적 요소다. 철학적, 신학적 공식은 하나의 교재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처럼 이차적 산물이다. / 종교적 경험은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 현상이 생겨나게 하고 종교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살아 있는 샘물'인 것이다. / 실제로 우리가 종교를 갖는 궁극적인 이유는 종교적 경험을 갖기 위해서지 종교적 이론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221)

 

어서 줄이나 던져라....그렇지요! 바로 이것이 삶이라는 늪에서 매 순간 운명과 죽음, 허무성과 무의미성, 죄책과 정죄에 대한 불안을 경험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종교에 대해 진정 바라는 것이지요.(222)

 

패러다임이 다르면 경험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오리로도, 토끼로도 보이는 이 그림은 우리가 '무엇을 보는(또는 경험하는)'이 아니라 '무엇을 무엇으로 본다.(또는 경험한다)는 것'을 말해 주지요. 결국 우리의 인식은 일종의 해석인 것입니다. (228)

내가 종교, 신이라는 패러다임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내가 신을 경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결국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내가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논리적 추론을 통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외치는 신학자들의 주장이나, 그 반대로 과학적 관찰을 근로로 우주에는 신이 없다고 외치는 과학자들의 선언이 모두 부질없고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서 '신의 현존'은 오직 실존의 문제일 뿐 논증이나 관찰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애써 실행한 그 논증은 대체 뭘까? 그것은 신의 현존을 확인하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신의 현존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신도들의 이성을 '설득'하려는 의도로 행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신의 현존을 논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저자의 생각인가?)

 

메타노이아(metonoia) - 어의적으로는 나중에 생각을 바꿈, 달리 생각함, 정신적 가치 지향을 변화시킴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지만 기독교 용어로는 이전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의미에서 회개나 회심이라고 번역하지요.

 

신이 도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도록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그를 찾는 사람들까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그는 그를 찾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길 원하는 반면,

전심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는 표시를 주었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파스칼의 팡세 중에서 (235)

 

3. 신은 창조주다.

아우구스티누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의 저작인 <호르텐시우스>를 읽게 됩니다. 이 철학서에 크게 감동한 그는 문장탐구보다는 지혜 탐구라는 '새로운 계획과 꿈'을 갖게 되지요. 중요한 것은 이때 그의 관심이 감성적 문학에서 지성적 철학으로 돌아섰다는 점입니다.(247)

내가 진정 걸어야 하는 배움의 길에서 세울 이정표이다.

 

이원론. 마니교의 중심사상은 영혼과 물질, 선과 악, 빛의 왕국과 어둠의 왕국이 대등한 원리이자 존재론적 실체로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는 철저한 이원론입니다. 이러한 구조에서 인간이란, 당연히 영혼이라는 빛이 육체라는 어둠에 갇힌 이중적 존재일 수밖에 없지요. /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가 권하는 기독교는 '모든 것이 선한 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선만이 존재할 뿐 악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원론을 바탕으로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어요.(249)

 

초이성적 계시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운 것이 고대 신플라톤주의가 초기 기독교에 공헌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중세의 스콜라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는 직책으로 가톨릭교회에 봉사한 일이기도 했지요.(252)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랫동안 찾던 지혜가 기독교에 있음을 확신한 후 신앙과 이성을 결합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257)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하데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앙을 위해 이성을, 신학을 위해 철학을 부단히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260)

 

고백론. 인간의 삶이란, 자신의 삶이 그랬듯이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기 위해서였지요.(265) /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삶의 신적 근거를 깨달았을 때 '자율'적이던 자신의 모든 과거가 적어도 그에게는 '신율'적으로 드러났던 겁니다.(285)

과거에 대한 해석은 지금 얼마나 지혜로운가에 달려있는 듯하다. 지금 내가 보는 나의 과거를 해석하여 지금을 보는 내용이 향후 또 얼마나 바뀔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가져본다.

 

죄 많았던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하려 한 게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이라는 기독교적 진리를 '증언'하려고 <고백론>, 아니 <증언>을 저술했다는 겁니다.(268)

 

우리가 삶에서 경험했지만 놓쳐 버린 숱한 의미를 새롭게 회복시킬 수 있지요. (270)

우리가 책을 읽고 배움을 택하는 것도 나의 존재를 해석하여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함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시간과 더불어 이루어진 창조라는 말은 신이 세계를 '시간 밖에서' 창조했다는 의미지요(275)

 

"하나님은 천지를 짓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런 것을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을 위해 지옥을 짓고 계셨다"

<고백론> 11장에서 천지를 짓기 전에 신은 안식하셨다는 겁니다. 창조와 함께 시간이 시작되었으므로 창조 이전에 신은 시간 밖에 있었지요. 그런데 시간 밖에는 어떤 변화나 행동도 없습니다. 이 같은 논리로 그는 "하나님이 천지를 짓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라고 담대하게 답했지요. 요컨대 신은 시간 밖에서는 안식하고 시간 안에서는 활동한다는 말입니다.(276)

 

137억년 전으로 계산되는 아주 먼 옛날 밀도와 온도가 최대이고 크기가 최소인 특이점이 있었습니다. 이 특이점의 존재는 로저 펜로즈와 스트븐 호킹의 특이점 정리로 증명되었지만 아직은 그 누구도 상세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아요....(282)

세상의 시작이 그때쯤이구나.

 

기독교 신학에서 신이 세계 이전, 곧 시간과 공간의 '밖에서' 창조했다는 말은 일단 신이 시간이나 공간 그 어느 것의 제약도 받지 않고 절대적 독립성을 가진 '세계초월적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신의 '세계초월성'을 신의 '전지전능성'과 연결 지어 이해한다는 것입니다.(299)

 

어떤 두 사람이 "물이다"라고 외쳐도 홍수로 물난리를 만난 사람이 이 말을 외칠 때와 사막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소리 칠 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것. 하나는 '이제 죽었다.', 하나는 '이제 살았다.'라는 의미.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가 발화된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 역시 그 언어가 속한 존재세계로 인해 가려지게 마련이지요.(301)

나의 언어를 만드는 것이 어떤 세상인지 생각해보자. 내가 있는 삶의 상태가 나의 언어를 만들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 / 언어와 삶의 양식 사이의 이런 관계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에서는 한 명제의 '옳음' '그름'도 당연히 '삶의 양식과의 일치 여부'로 가려집니다. 다시 말해 앞서 '미인'의 예에서 보았듯이 같은 삶의 양식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303)

 

앞으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이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과학과 종교 사이에 바람직한 소통이 비로소 가능해지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이해의 진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305)

과학과 종교 중 하나의 울타리에 갇히는 것은 사고의 감옥에 갇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AND'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과학과 신앙을 제멋대로 섞는 행위를 막으려면 신중하고 자의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을성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 둘 사이에는 어떤 일치나 합의가 가능하냐 아니냐 하는 것은 -순서로 보나 중요성으로 보나 - 그 다음 문제입니다. (308)

진정한 소통, 화합은 제멋대로 섞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누가 신이 세계 안에 내재할 뿐 초월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면 그는 범심론, 반대로 어떤 사람이 신은 세계를 초월할 뿐 내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면 그는 자연신론에서의 신을 말하는 겁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세계로부터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절대적 독립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초월성과 세계에 부단히 참여하며 자신의 뜻대로 인도해 가는 인격적 속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 내재성을 동시에 지닌 유신론적 신입니다. (314)

신의 참여와 인도의 의미를 초월성, 내재성으로 연관하여 설명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라는 말이 137억 년쯤 전인 아득히 먼 예전의 어느 시간에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의미로 물리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같이 '태초' '시간 안'이 아니라 '시간 밖'을 뜻합니다.(317)

 

빅뱅이라는 물리적 인식을 통해서...공간과 시간 자체가 가변적이라면, 우리가 표상할 수 없는 다른 질서, 고아간과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지요.(318)

 

새로운 개념과 용어가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지요.(319)

새로운 사유를 하려면, 사유에서 토마스 쿤이 말한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려면, 개념의 새로운 발상, 정의가 필요하다. 스스로 정의하는 개념을 이해하는 정의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진정한 메타노이아는 어려울 것이다. 정의 혹은 개념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회의를 품어야 하리라. 그렇게 하려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순차적으로 떠오른다.

 

부정적인 선입견을 버리고 '시간 밖의 시간'이라는 용어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시간 밖의 시간'이라는 말은 우리가 시간이라고 규정한, 시간이 가진 성질이 아닌 어떤 다른 성질을 가진 시간을 의미합니다. 즉 무한하게 분산되며 미래에서 다가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부단히 흘러가는 성질이 아닌, 그와는 다른 성질을 가진 어떤 시간을 뜻하지요.(319)

 

영원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간 밖의 시간'이자 모든 시간의 근원인 '신의 시간'이 가진 성질이지요.(319)

영원은 미래로 끊임없이 흐르는 타임라인이 아니다.

 

신은 영원하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 말을 신이 시간 안에서 무한히 존재한다거나, 신이 시간 없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은 단지 신은 시간 밖의 존재, 곧 세계 초월적 존재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입니다.(320)

 

플라톤에 의하면 시간은 '영원의 모상'입니다. 모상(模像)이란 '본 떠서 만든 모형'이라는 뜻인데요. 개개의 사물(:사과)이 이데아(:사과의 이데아)의 모상이라는 것과 같은 논리지요. 마찬가지로 불변하는 영원이 변하는 시간 안에 부분적으로 내재해 있다는 말입니다.(분여) 이데아와 영원은 모두 원형이고 개개의 사물들과 시간들은 각각의 모상이지요.

 

원형(paradigm)과 이를 본뜬 모상(eikon)의 관계를 아는 것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의 다양한 조장을 이해하는 지름길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말을 기억해 둔다면 서양철학은 물론이고 서양문명 자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325)

 

플라톤, <티마이오스>. 본성상 영원한 신은 자신의 영원성을 피조물에게 부여할 수 없어서 영원의 변화하는 모상을 만들어 그것을 세계에 자신의 내적 질서와 동시에 부여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단일성을 견지하는 영원을 '수에 따라 진행되는' 영원의 모상으로 창조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325)

 

생성하고 소멸하는 모든 존재물이 이데아의 분여에 의해 비록 한정된 것으로나마 존재하며 인식도 되고 이름도 갖게 되듯이, 영원의 분여에 의해 시간이 '비록 한정된 것으로나마' 지속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인식되며, 이름-수에 따라 진행되는 시간, 주야, 연월-도 갖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의 모상" 또는 "영원의 변화하는 모상"이라고 규정했어요.(326)

 

플라티노스는 이런 시간을 파악하는 주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없다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다는 것이지요. 시간은 마음 밖에서 파악할 수 없고 오직 마음 안에서 드러나며, 마음과 하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삶이 변하면 시간도 변하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프롤티노스는 시간이란 "마음의 삶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326)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가 보통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는 걸? 따라서 바꿔 말하자면, 시간은 영혼이 잽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신의 영원성이 들어 있기에,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 수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영혼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시간도 변하므로, 시간은 곧 영혼의 삶입니다.(327)

 

플로티노스에게 영원은 신의 마음이 사는 삶이고,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사는 삶입니다. 하나는 한결같이 머무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둘 다 '마음의 삶'이라는 점에서 같지요.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부단히 신을 닮으려 하고, 시간 역시 꾸준한 집념으로 영원을 닮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도록 하는데요,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의 마음이 신에게 이르면 그때는 시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끝에는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있는 것이지요.(330)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해지는 가능성이자 과정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하기에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시간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 가는 문()이자 통로지요.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찾아낸 시간의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눈물과 땀에 젖은 우리의 삶, 곧 우리의 고달픈 시간의 끝에 허무가, 악마가, 전락(轉落)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위안이 어디 있겠습니까?(330)

 

 

서양사람들은 시간을 '크로노스(cronos)'라고 부르는데요,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는 자기 자식을 낳는 대로 잡아먹는 끔찍한 신이지요. 크로노스 안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삶은 단지 흘러가고 마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333)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다가오지 않는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여 마치 '바로 눈앞에 보이듯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가진 이런 능력을 '상기의 힘(vis memoriae)'이라고 불렀지요.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이 능력을 통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무한히 분산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가 됩니다. (334)

우리의 마음이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직관하며 미래를 기대하고....

 

세상의 모든 존재물이 그렇듯 좋든 싫든 물리적 시간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지요.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다릅니다. 물리적 시간을 살 수도 있고 심리적 시간을 살 수도 있어요. 존재물의 시간과 세속적 시간을 살 수도 있고, 존재의 사간과 신적 시간을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영혼)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삶은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고 세속적이 되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영혼)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 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337)

 

원하는 것을 얻은들 소득이 무엇이랴

그것은 꿈이요, 한순간의 입김이다.

덧없는 쾌락의 거품일 뿐,

누가 일주일의 고통을 주고 한순간의 환락을 사랴.

장남감 하나를 얻고자 영원을 팔아?

달콤한 포도 한 알을 얻기 위하여

덩쿨을 모두 망칠 자가 누구랴.

어떤 어리석은 거지가

당장 왕홀에 맞아 죽을 텐데 왕관을 만지겠는가? -세익스피어 <루크리스의 겁탈>

 

무의지적 기억. 이것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것은 마치 아루구스티누스의 상기(memoriae)처럼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단된 여러 가지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일을 합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지요. 또한 미래를 기대하게도 만듭니다.(342)

 

역사란 물리적 시간에 의한 단순한 자연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의식이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연쇄적  또는 인과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지요(344)

 

성경의 하늘. 아우구스티누스. 하늘이 가시적인 세상의 더 높은 어느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받을 상()은 소용돌이치는 사물들 가운데 자리 잡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라는 말은 영구적 정의가 살고 있는 영적 궁창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에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요. 바로 신의 절대적 독립성과 전지전능성입니다.(360)

 

무로부터의 창조에서 파생된 중요한 기독교 교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물질과 그것으로 구성된 세계가 모두 선하다는 것이지요.(365)

 

플라톤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일자를 태양에 비유하여 선의 이데아로 규정한 다음 그로부터 나온 물질 역시 선하고 아름답다고 인정했습니다. 플로티노스는 일자는 선하고 아름답지만 그로부터 유출된 존재들의 계층구조에서 맨 밑에 해당하는 물질들은 그 어떤 선한 잔류물로 갖고 있지 않아서 악하고 추하다고 보았지요. (366)

플라톤과 플라티노스의 차이점일 잘 설명해주고 있는 부분이다.

 

물론 인간과 세계가 선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그것이 신의 선함이나 아름다움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신은 온전하게 선하게 아름답지만 인간과 세계는 불온전하게 선하고 아름다우며, 바로 그 때문에 언제나 타락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요.(369)

 

창조가 오직 신의 의지에 따라 어떤 신비롭고 거룩한 '순서'대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여섯 날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6일과는 '결코'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거이지요.(377)

 

기독교는 성육신과 함께 시작했고 성육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점에서 기독교는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또 다른 종교인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완연히 갈라서지요. 그만큼 성육신은 기독교의 본질이자 핵심입니다.(384) /신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왔다는 성육신(incarnation)의 계시

 

구약성서에서 신의 ''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다바르'가 신약성에서는 그리스어 '로고스', '말씀'으로 번역되지요. / 그리스적 언어와 사유가 정지적인 반면 히브리적 언어와 사유는 역동적입니다 여기서도 로고스가 정적, 지적, 이성적 성격을 가졌다면 다바르는 동적, 인격적, 행위적 성격을 갖지요.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히브리어 다바르를 그리스어 로고스로 번역한 것은 썩 잘한 일은 아니었습니다.(385)

 

스토아 철학의 우주론은 근본적으로 유물론이기 대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다바르의 성격은 원칙적으로 세계초월적이지만 로고스는 세계내재적 성격을 띱니다. / 스토아 철학의 우주론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으로 세계내재적 범심론이나 만유재신론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세네가와 같은 후기 스토아 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아서 세계초월적 자연신론의 경향을 띄기도 한다.(386)

 

창조가 태초에 일어난 일회적 역사가 아니고 섭리에 의한 지속적인 보존과 인도라는 의미입니다.(395)

 

자연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생산하기(자연의 다산성) 때문에, 자손들 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생존경쟁)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결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변종(종의 변이)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변종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변종은 자연히 제거되는 선택(자연선택, 적자생존)이 일어난다. (415)

다윈의 진화론의 요약

 

다윈은 (자연선택에 대해서) 자연과학 이론인 자신의 진화론을 떠받치는 '생존경쟁' '적자생존'이라는 두 가지 용어를 각각 맬서드와 스펜서의 사회학적 개념들로부터 빌려 온 셈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사소한 학문적 행위가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회진화론과 연결되어 엄청난 사회적 불행을 초래하는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416)

 

자연이 그러하다면 인간사회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사회진화론이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중심으로 서구 각국에 들불 번지듯 퍼져 나갔기 때문이지요.(417)

 

스펜서(1820~1903). 사회다윈주의. 이 이론과 함께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아래 지상 천국을 꿈꾸던 프랑스 대혁명(1789) 이후 채 100년도 되기 전에 인간사회 역시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이 지배하는 원시적인 공간으로 재빨리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상상력이 달라지면 관념이 변하고, 관념이 변하면 세계가 달라지는 법이지요.(418)

 

자연 안에서 신적 진리가 존재하므로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서양에서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연법 이라는 이름으로 스토아 철학을 거쳐 기독교에 들어와 영원법이라는 이름으로 중세 1000년 동안 서구사회를 지배했지요.(420)

 

사회다윈주의의 득세와 함게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에서는 평등개념이 이상사회 이념에서 매몰차게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의 메커니즘을 사회진보와 역사발전의 원리로 삼는 사회다윈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평등이란 실현될 수도 없고 또한 실현되어서도 안 되는 불순한 개념이었지요.(422)

 

19세기 말로 접어들며 점점 더 과감해지고 노골화된 사회다윈주의자들이 새롭게 지지한 이념이 있었지요. 대내적으로는 인종, 계급, 남녀차별주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였습니다.(423)

 

독일 출신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은 이렇게 언제 어디에나 웅크린 채 숨어 있습니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의 본실이 무사유(thoughtless)라고 설파했지요. 무사유는 일반적으로 '사려 깊지 못함'을 뜻하지만, 그녀는 이 단어를 보다 실천적 의미로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반성의 불능 또는 거부'를 지칭하는데 사용했습니다. /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괴물들과 악마들이 수백만 명의 학살을 설계한 것이 아니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조건만 갖춰진다면- 얼마든지 그런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428)

나중에 밀그램의 실험내용과 함께 정리해서 칼럼을 써보는 것도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을 듯하다. 나는 왜 밀그램의 실험내용을 접하는 부분에서 탄식했던가. 아마도 인간의 한계를 보고 나도 어쩔 수 없이 그 한 부류임을 확인하는 대목이었을까.

 

다윈의 진화론을 자신의 사상 근저에 받아들여 "다윈의 아들"이라고도 불리는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였지요. 니체에 의하면 진화한 그 새로운 인간이 바로 '초인'이지요. (431)

 

단테의 신곡. <인간의 유래>. 인간의 영혼만은 최고선()께서 / 직접 불어넣어 주셔서, 그대들이 /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게 하셨답니다. ... 이 시구들은 우선 신이 인간의 코에 직접 영혼을 불어 넣어 창조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도 구원받아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함께 말해 주지요. 그렇습니다. 신의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오랜 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기독교인이 신이 자기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 그건 결코 특정한 자연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신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433)

 

오늘날 우리가 그렇듯이, 19세기의 유럽인들도 나날이 발전하는 산업과 과학을 통해 현세에서는 물질적 삶을 충분히 즐기고,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종교생활을 통해 내세에서는 영원한 삶을 얻으면 그만이라는 세속적 낙관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다윈과 동시대에 살았던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평생 온몸으로 저항하며 싸웠던 것이 바로 그러한 세속주의였지요. 그는 "대중과의 싸움, 평등이라는 폭정과의 싸움, 피상성, 난센스, 저열성, 야수성이라는 악동과의 싸움에 비하면 왕이나 교황과의 싸움은 오히려 쉽다"라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436)

 

19세기 후반. 3세계 선교 - 영국과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이 영국과 미국의 정치제도와 사상 그리고 종교가 지구상에서 가장 우월하므로 인류의 '명백한 운명'은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전 세계의 정치적, 사상적, 종교적 지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른바 "앵글로색슨 테제(Anglo Saxon These)"를 내세워 제3세계의 식민지 정복과 지배를 정당화하던 때였습니다.(440)

결국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을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은 직접적인 이유는 제국주의자들의 도움을 받고자하는 세속적인 이익에 대한 이해가 배경으로 깔려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선교에 대한 이해가 혼란스러워 지기도 한다. 선교활동을 어떻게 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는 세계가 처음 시작할 때에는 가시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고, "비가시적으로, 잠재적으로, 인과적으로(invisibiliter, potnetialiter, causaliter), 곧 장차 인류가 만들어질 방식으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정해진 자신의 시간에" 실제 형태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450)

 

진화론과 창조론. "만물은 우연에 의해 자발적으로 진화하지요"라고 말한다고 해도, 하나는 '피조물에게 자유를 허락한 신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진화의 맹목적성'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예요.(455)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 다른 것에서 기인하는 이유를 이해함

 

창조의 합목적성과 진화의 맹목적성(또는 우연성)을 조화시킬 만한 이론을 기독교는 확보하고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바꿔 말하자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에베소서 1:11) 신의 필연적 계획 안에서 진화의 우연성을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는 전통적 신학 이론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무엇인가?462)

 

신은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전제가 아니던가요.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예지 사이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양립주의가 아무 어려움 없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일반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예지(또는 예정)는 같은 범주,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지도 않는다는 것이지요.(470)

 

이미 주어진 저차원의 질서에서 이전에는 없던 고차원의 새로운 질서가 어느 순간 제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을, 복잡성과학에서는 '창발(emergence)'이라고 부르지요.(472)

 

뱁새의 비행이나 개미의 노동이 그 당사자에게는 맹목적(또는 본능적) 행위일 뿐이지만 관찰자인 우리에게는 떼 이동이나 둥지 건축을 위한 합목적적 행위입니다. 또한 떼 이동이나 둥지 건축이 뱁새나 개미들에게는 단지 맹목적적(또는 본능적) 행위가 낳은 우연적 결과겠지만, 우리에게는 합목적적 행위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차이가 일어나는 이유는 간단하지요. 우리는 뱁새나 개미와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무엇보다 지능적으로- 전혀 다른 범주와 차원에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473)

 

파스칼.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여전히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10년 연장된다 해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게 아닌가.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피조물)은 동등하다.(474)

 

신의 섭리에 의한 합목적적 예정이 자연의 맹목적적 진화를 '반드시'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477)

 

신의 필연성이 자연의 우연성을 창조하고 지배하며 이끌어 간다는 의미일 뿐이지요.(479)

 

창조가 없었으면 구원 사역도 불필요했다는 게 바르트의 논리로 그에게도 창조는 구원의 시작이요 구원은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482)

 

완전한 신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계구원입니다. 존제자체, 진리자체, 선자체 또는 아름다움자체인 신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아야기지요.(484)

 

 

4. 신은 창조주다.

서양문명에서 로고스는 신의 섭리로서 '영원법'이자 인간이 따라야 할 모든 법과 도덕의 근거인 '자연법'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근원적으로 자연법은 '정당하기 때문에 법'이고, 실정법은 '명령되었기 때문에 법'이라고 생각해 왔지요.(502)

 

스토아 철학자들이 운명에 복종할 것을 권할 때, 그들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운명을 제 스스로 따름으로써 우주의 섭리인 로고스와 합일하면 '존재론적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결국에는 신들보다 더 위대해진다는 것입니다. (504)

 

세네카와 바울의 가르침은 매우 닮았어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유사성은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 이론이 초기 기독교 교의학과 윤리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기독에 그리스 철학을 끌어들인 원흉이자 시조로 규정하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512)

 

바울이 자기 사상으로 예수의 복음을 윤색해서 기독교를 일구었다는 게 바울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진 비평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지요. 논란의 여지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바울의 가르침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용어와 수사학적 표현 형식에서 그랬을 뿐이며 내용에서는 구약성서와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에 닿아 있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초석이 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는 예수가 전한 복음에서 시작하여 그것에서 끝나는 종교지만 예수의 복음만으로 만들어진 종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514)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세네카의 섭리와 바울의 섭리 사이에 존재하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격은 각각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이 인격적이냐 아니냐 하는 차이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세네카의 신은 비인격적이고 바울의 신은 인격적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뒤에서 세네카의 신과 바울의 신을 각각 '아테네의 신' '예루살렘의 신'으로 이름 지어 자세히 알아볼 것입니다.(517)

 

거듭 말하지만 스토아 철학적 섭리는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도덕법칙으로 작용할 뿐, 우리를 돕고 응징하여 인도하고 심판하며 감화시키고 다스려서 구원하는 일은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신은 자신이 부과한 자연법칙들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면서 역사한다는 칼빈의 일반섭리에 대한 주장은 세네카의 영향이 분명이 느껴질 만큼 스토아 철학적입니다. 세네카가 운명이라고도 부른 스토아 철학적 섭리는 그야말로 우주적 보편성을 갖고 있어서 어떤 것이든 그 직접적 인과관계에서 벗어 날 수 없는 질서이기 때문이지요.(523)

 

그들이 '운명'이라 했든 '예정'이라 했든 아니면 '섭리'라고 했든,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러한 신의 속성을 신의 '세계 내재성' 또는 '인격성'이라고 부릅니다. 신의 인격성은 종교로서 기독교를 이루는 근간이자 원천입니다.

 

이성적 신학. 자연신론. 세계는 오직 신이 마든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에 의해 자동으로 운행. 신의 직접적 관여는 없음. 17~18세기의 자연신학자들과 프랑스, 독일의 계몽주의자들이 주장한 이신론이 대표적인 예. 자연신론은 중세 1000년간 기독교에 억눌려 지하에서 잠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대가 시작되면서 인간이성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했지요.(532)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 "신은 실체들을 창조하고 필요한 법칙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법칙을 그들 자체에 맡기고 그들 자체에 대한 작용 가운데서 유지되게 하는 일 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533)_530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동일.

 

세네카가 인간은 신의 섭리를 다라야 한다고 주장할 때 거기에는 신의 보살핌을 믿거나 그에게 의지한다는 뜻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아요. 인간은 오직 자기 정신 안에 들어와 있는 로고스인 이성을 믿고 도덕법칙에 의지해야 하지요. 그에게는 그것이 신에게로 다가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토아학파의 섭리와 기독교의 섭리가 -둘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여지없이 갈라서지요.(535)

 

기독교 교리서 인간이 자기 이성에 의지해서 신에게 다가갈 길은 '원칙적으로' 없습니다. / 인간의 이성과 신의 섭리 사이에는 '원칙적으로' 칼 바르트가 표현한 '눈 얼음 계곡', '황폐지대'가 놓여 있습니다.(536)

 

존재유비. 신과 그의 피조물이 분여에 의해 양적으로만 다를 뿐 질적으로는 같다는 전제에서 나온 매우 흥미로운 생각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존재유비를 따르면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은총에 '전적으로' 맡겨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이성에 달린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538)

 

"신에게 가까이 갈수록 더욱 정화되고, 영화(靈化)되고, 순화되어 마침내는 각 종류마다 그에 알맞은 한계 안에서 육체가 영으로 승화한다."라는 말은 분명 신플라톤주의적이거나 자연신론적인 발상이지요. 이러한 구원의 메커니즘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끼어들 틈이 아주 좁거나 아예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중세 이후 가톨릭 신학의 근간이 된 '존재유비'라는 교리에는 이 같은 신학적 위험이 크든 작든 언제나 도사리고 있지요.(538)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마디로 선언했듯이 "신앙을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지요. 왜내고요? 일찍이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포한 것처럼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라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의 인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다는 이야기지요.(544)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란 단순히 신이 피조물들에게 '참여와 인도'라는 원리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556)

 

"모든 것을 통해 모든 것 안에 존재"하면서 "유지하며 초월하고 포괄하며 관통하는" 존재론적 원리를, 구약성서에서 야훼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하리라"(출애굽기 3:12)라는 단 한마디 약속으로 계시했습니다. '함께하리라'가 바로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나타내는 탁월한 성서적, 존재론적 표현이지요.(556)

 

칼빈은 기도를 신과 인간의 대담으로 규정했습니다.(559)

 

자신의 소원을 비는 간구기도와 다른 사람을 위해 비는 중보기도는 감사기도나 경배기도와는 성격이 다릅니다.(560)

 

신은 자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에만 응답하고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답이지요.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구속 받지 않는 신의 절대적 독립성이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기도를 통해 신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 되므로 신의 절대성과 독립성이 손상되지요.(560)

기도에 대한 이해로 충분하다.

 

신의 섭리를 따르려는 가장 극적인 자기희생과 헌신을 우리는 예수에게서 찾을 수 있지요. 예수의 마지막 날 밤, 빌라도의 군대에 잡혀가던 바로 그날 방,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면서 세 번 기도합니다. 이때 그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566)

기도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가르침을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지요.(567)

 

기도가 우리를 자신의 뜻과 의지를 따르려는 자율적 인간이 아니라 신의 뜻과 의지를 따르려는 신율적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지요. 또한 그래야만 기도가 신을 우리처럼 속되게 만드는 계기가 아닌, 우리를 신처럼 거룩하게 믿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래야만 우리가 파멸에 이르지 않고 구원을 얻데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아니라, "신의 나라와 그의 의"라는 것을 뜻합니다. (570)

 

스토아 찰학자들이 이성적 체험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을지 몰라도 기독교인들이 얻는 구원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자,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 (틸리히) 기독교가 아무리 스토아 사상을 많이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주적 체념을 감수하는 스토아주의와 우주적 구원을 믿는 기독교의 신앙 사이에 걸친 간격을 없이할 수는 없다.(579)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성숙 단계를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실존의 3단계설' 이라고 부르지요. (580)

 

"순간에서 순간으로" 또한 "향락에서 향락으로" ....이러한 삶의 방식을 키르케고르는 '윤작'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마치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위해 작물의 종류를 번갈아 경작하듯이, 심미적 단계의 사람들은 권태를 쫓고 쾌락을 얻으려고 대상을 자꾸 바꾼다는 뜻이지요. (중략) 이들은 향락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마저도 부단히 바꿉니다.

 

"천장이 과히 높지 않은 지하 방에서 고즈넉이 살고 싶어 하는 일종의 비겁이고 인간답지 못한 짓"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전능한 황제 네로를 "욕망의 지옥을 예감한 사람"으로 보고,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의 본질은 불안과 두려움" 이었다고 진단했습니다. (582)

쾌락의 본질이 불안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게 한다.

 

'뉘우침'이 심미적 단계의 인간을 다음 단계로 상승시켜 '윤리적 단계'에 이르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비로소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범주 아래 처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지요. 한 마디로 뉘우침이 인간을 '천장이 과히 높지 않은 지하 방'으로부터 해방시켜 윤리라는 햇볕 아래 서게 한다는 말입니다. (583)

 

힘과 건강과 부와 사랑 등 욕망 속에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비록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만으로는 필경 절망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혹시 당신은 알고 있나요? 절망의 끝자락에서야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법임을! "그러니 이제 그대여 절망하라"고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오히려 권하지요. (585)

 

그가 심미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생활은 더욱더 많은 것을 필요하게 되고, 그런 것들 중 가장 하찮은 것이라도 채워지지 않을 경우에 그는 죽는다.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타개책을 갖고 있다. 일체가 그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짓누르는 폭풍우가 어둡게 그를 감싸고 있어서 그의 이웃들마저 그를 볼 수 없을 때라도 그는 파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꽉 붙들 수 있는 한 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은 그의 '자기'인 것이다. (586)

 

일찍이 괴테가 적절히 언급했듯이 빛이 밝은 곳에서는 그림자도 짙게 마련이지요. (591)

 

뉘우침이란 본디 최고의 윤리적 표현이지만 동시에 최고의 자기부정입니다. 이 최고의 자기부정을 그는 "무한한 자기체념"이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을 '종교적 단계'로 이끈다는 겁니다. 마치 밤이 깊어야 이윽고 새벽이 오듯이 키르케고르에게 "무한한 체념은 믿음에 앞서 있는 마지막 단계"이지요. 인간은 오직 뉘우침과 죄의식이라는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게 되며, 그제야 비로소 신을 발견하게 되고,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헌신하는 '종교적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593)

뉘우침과 자기체념이 결국은 종교적 단계로 들어가는 열쇠인 것이다.

 

부조리란 말 그대로 '조리에 맞지 않음' 또는 '이성에 의해 파악되지 않음', '비합리적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물론이고 그 후계자인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부조리는 '세계와 그 안에서의 삶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을 뜻하지요. 그런데 바로 이 '이해할 수 없음'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불안'이 들어 있습니다.(596)

 

아브라함의 길. 이 노인의 여정이 세계와 삶의 부조리 때문에 날마다 불안에 떠는 우리 삶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597) /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신에게 바치려던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아들 이삭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전부였지요.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 전부였지요. 또 그날 그 산에서 정작 아브라함이 불 태워 신에게 바친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한 마리 숫양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불안과 불신이었지요. 아니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불안과 불신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구해 낸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백 살 넘어 얻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제 손으로 자식을 죽여야 하는 어떤 미치광이 노인을 구한 것도 아니지요. 그것은 삶에 스며드는 부조리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전율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이었습니다.(604)

 

키르케고르에게 종교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 아브라함에게서 보듯이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바로 이것! 자신마저도 용납될 수 없는 인간을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609)

 

 

4. 신은 창조주다.

기독교인이 신은 유일하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뜻을 단순히 독선적 종교의 오만한 선포나 배타적 종교관에서 나온 말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에는 플라톤의 '선자체'나 플로티노스의 '일자'가 가진 심오한 의미가 분명히 담겨 있지요. (622)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해악이 유일신 신앙에서 나온 배타성이며, 바로 그 때문에 전 세계에서 참혹한 분쟁과 테러가 그치질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여전히 많으니까요.(623)

 

테르툴리아누스는 '위격(persona)''본질(substantia)'이라는 법학 전문용어를 끌어들여 '삼위일체'라는 용어와 이론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 / '위격'이란 라틴어로 '페르소나(persona)'인데, 당시의 법률적 용어로 '어떤 것이 법률상 밖으로 드러난 지위'를 말합니다. 예컨대 한 남자가 가정에서는 호주이자, 사회에서는 상인이며, 시의회에서는 대의원인 것처럼, '페르소나'는 한 개인의 법률상 작격이나 지위를 말하지요. 따라서 페르툴리아누스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페르소나는 바깥으로 나타나는 신의 지위, 곧 성부, 성자, 성렬을 의미합니다. '페르소나에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영어 단어 'persona'이 나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 위격을 세 개체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 본질이란 원래 그리어로 '우시아(ousia)'라는 철학용어인데 일상용어로 풀면 '어떤 것이 그것이게끔 하는 그 어떤 것'을 말합니다.(658)

 

에로스란 대상이 가진 무엇(예컨대 참됨, 선함, 아름다움, 부귀, 권력 등)때문에 그 대상과 합일하여 '동일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구지요. 따라서 보통 '....때문에 하는 사랑' 또는 '인간적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동일한 하나'가 되기 위한 강제가 크든 적든 들어 있게 마련인데, 몰트만이 말하는 '동종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지요. 하지만 아가페는 서로 이질적인데도 불구하고 '통일적 하나-'을 이루려는 욕구입니다. 따라서 흔히 '...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 또는 '신적 사랑'이라고 하지요.(726)

 

신의 유일성은 단일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성이 단일성으로 단일성이 삼위성으로 축소되는 일 없이 결합한 통일성입니다. 이 통일성 안에는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자유와 평등과 사랑으로 이룩되는 인간 공동체의 원형이 담겼지요. 그것은 성격상 무규정성과 무제한성에서 오는 일자의 획일적 포괄성과 통일성을 훌쩍 뛰어넘는 것으로, 삼위일체 신의 이종사랑에서 나오는 '공동체적' 포괄성과 통일성이지요. 전자가 수동적, 소득적 성격을 가졌다면 후자는 능동적, 적극적 성격을 지녔습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라는 말인데요. (732)

 

신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 말이 신의 이름으로 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732)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기독교 신학에 끌어들여 구약과 신약, '악의 신' '선의 신'이라는 두 영역으로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적게 생각하는 자는 쉽게 말한다." 라는 중세 격언의 교훈처럼 매우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옳은 길은 아니었습니다. (738)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이고요,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지요.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하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발생하여,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신앙적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741)

 

독일 베텔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 프랑크 크뤼제만은 '자유의 보존'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즉 신이 유일자인 교설에서 신을 다신론적으로 이야기 할 때는 신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신'이라는 하나의 특정 맥락에서 이야기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요. 다시 말해 유일신에 대한 다신론적 표현은 신이 실제로 여럿이어서가 아니라 고대 히브리 인들이 신을 여럿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745)

 

왜 고대인들은 다신론을 받아들이게 되었을까요? 크뤼제만은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세속적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에 대한 인식은 각각 하나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세계, 내적인 경험의 맥락 속에서 얻어진다. 고대인들에게 이것은 무엇보다 우주와의 조우였다. 한 인간 혹은 한 집단이 이렇나 하나의 맥락 속에서 초월적 경험을 얻게 될 때, 이러한 개개의 현실 배후에 끝없는 심연과 내세적 은총이 존재한다는 것이 명료해지고, 이러한 종교적 경험이 하나의 신적 형상에 대한 구체적 원인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의도된 것은 경험된 내세였다. 이것에 이름 붙이고 이것을 숭배하기 위하여 이것을 신적인 형상 안에 압축시켰다. 이러한 경험들이 수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형상들 또한 존재한다." (746)

 

히브리 인들도 이 시기에 와서 비로소 신을 인류의 보편적 신으로 파악하기 시작했지요. 성서학자 도드는 "정의가 보편적이어야 하듯이 정의로운 신이라는 개념 속에서 일신교가 탄생했다"라고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중략) 그렇다면 신에 대한 이해와 표현의 변천은 단지 '인간에 의해 경험된 신의 역사'일 뿐입니다. (중략) 신이 변해서가 아니라 히브리 인들이 신을 그런 식으로 경험했다는 말일 뿐이지요. (748)

 

릴케는 우주가 곧 신이라는 범신론을 접하고 감명을 받아, 신의 성숙과 생명 성장이라는 사변에 심취했다고 한다. (749)

 

인간이 성숙해 감에 따라 신의 나라도 성숙하고, 그래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신의 법칙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이야기와 연관해서 해석한다면, 릴케가 말하는 신의 나라와 법칙의 성숙이 역사 안에서 인간에 의해 이해되는 신의 성숙일 뿐입니다. (750)

 

'다른 신'을 질투하는 것으로 계시된 야훼는 야훼 그 자신이 아니고 단지 당시 히브리 인들에게 이해된 야훼이며, 마찬가지로 야훼의 질투 대상 역시 야훼의 입장에서 본 '다른 신'이 아니고 단지 히브리 인들에 의해 경험된 '다른 신'일 뿐이라는 이야기지요. (751)

 

존재이자 창조주인 신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신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야훼의 배타성, 폭력성, 질투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75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유스티누스는 바로 이 구절을 근거로 로고스가 만물을 창조한 '산출적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예수로 성육신 하기 이전의 그리스도인 '선재적 그리스도'라고 주장했지요. (761)

 

"진리의 씨앗" "온전한 로고스"인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분여 되었다는 이야기였지요. (762)

 

유스티누스가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겁니다. 즉 아브라함이나 소크라테스처럼 예수 이전에 살아서 역사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몰랐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재적 그리스도'인 로고스를 알았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그는 예컨대 소크라테스를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곧 소크라테스처럼 역사적 예수와 기독교라는 종료를 몰랐던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허락된다는 뜻이지요. (762)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등장하는 ''는 당연히 '선재적 그리스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유스티누의 생각이었습니다. 즉 그는 아브라함이나 소크라테스처럼 설사 '성육신한 로고스'인 역사적 예수와 그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선재적 그리스도'인 진리를 알았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765)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어던 존재인지, 그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한 삶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 나간다면 신이 그들의 삶에 간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한마디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는 것이지요. 라너는 이런 사람들을 "익명의 기독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769)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할지라도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선포했지요. (769)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에서,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하나님에 관한 유신론적 관념을 초월" 하려는 시도를 감행했습니다. 이 안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으로 인한 배타성 초월을 강력히 주장하는 내용이 있지요. (771)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신론적 신은 "하나의 세계를 소유하고 있는 자아, 너와 관계 맺고 있는 나, 결과와 분리되어 있는 원인, 특정 공간과 끝없는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자" 입니다. (771)

 

탈리히는 객체로서의 이 신이 "무신론의 가장 깊은 뿌리"이자 신학적 유신론에 대한 반동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무신론의 근거이고, "실존주의적 절망과 널리 퍼져 있는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의 가장 깊은 뿌리" 라고 지적했지요. 따라서 "유신론적 하나님을 초월해야만 존재에의 용기가 회의와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을 포섭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772)

 

카잔차키스의 수도사의 우화는 우리에게 우리가 신과 주체-객체 관계에 있는 한, 소외되고 절망하게 되며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말해 줍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유신론적 신을 초월해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가져야 하는 이유지요. (774)

 

오늘날 우리는 사실상 불안, 공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예리하게 갈파한 대로, 이제 공포는 어두운 거리에도 있고 빛나는 텔레비전 화면 안에도 있으며, 침실에도 있고 부엌에도 있지요. 우리의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공포가 기다리고, 그곳을 오가기 위한 지하철과 항공기에도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소화하는 것들과 우리가 접촉하는 것들에도 공포가 숨어있지요 바우만은 이처럼 낮에도 밤에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선진국에서도 후진국에서도 피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공포를 "유동하는 공포(Liquid Fear)"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불안과 공포마저 세계화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780)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이끌고,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낳으며,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세계 평화를 이른다는 말이지요. 이는 '신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며,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다'라는, 내가 이 책에서 기본 강령으로 삼은 것과 깊숙이 연관된 문제의식입니다. (781)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많은 사람이 지적한 대로 세계 주요 종교들은 - 서구 크리스트교, 정교,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 도교, 유대교 - 비록 인류를 분열시킨 측면도 있지만 핵심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 면서 이어 간 다음 주장과도 맥을 같이 하지요. (781)

 

"인간은 어떤 문명이 살고 있건 간에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그 방안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런 노력들이 쌓이게 되면 문명의 충돌 가능성이 줄어는 것은 물론 단일 문명의 실현 가능성도 높아진다. 단일 문명은 수준 높은 윤리, 종교, 학문, 예술, 철학, 기술, 물질생활이 복합적으로 섞인 상태를 의미한다." (781)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도 이제 세계 평화와 인류공존을 위해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그 방안을 실천하는 데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782)

 

기독교 입장에서 종교적 다원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가능한 한 덜' 포기하면서 타 종교의 신앙을 '되도록 더' 인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782)

 

기독교가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본디 차별적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의 바탕이니까요. 따라서 단순히 논리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종교적 다원주의에 관한 건전한 연구와 논의는 '신의 유일성을 어떻게든 보존하면서'가 아니고, 어떻게 '신의 유일성을 근거로 하여' 다른 종교와의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 낼 것인가에 모아져야 합니다. (782)

 

신의 유일성은 기독교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고 또 포기해서도 안 되는 신의 속성입니다. 오히려 그 안에 내재한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인류 모두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상호내주적ㆍ상호침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하지요. (783)

 

과제는 주어졌습니다. ,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신의 유일성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이해와 교회의 전향적 선포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합당한 실질적이고 제도적인 행동과 조치가 뒤따라야 하지요. (783)

 

나는, 신의 삼위일체적 특성에서 '인간 공동체 원형'을 발견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몰트만의 방식이 무엇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이론이 신의 유일성에 대한 선포가 배타성과 폭력성 그리고 획일성에 대한 교훈이 아닌, 오직 포괄성과 통일성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명백히 설명해 주기 때문이지요. (784)

 

미켈란젤로가 4년 넘게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거대한 천장화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메시지는 당연히 이렇게 정리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뜻을 거역하는 독선적이고 탐욕적이며 배타적인 성직자와 교인들아! 너희는 에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신의 가혹한 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에게 밝혔듯이 신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아끼기 때문이다." (790)

 

자기성찰은 문명의 자기파괴적 잠재력이 상존하는 '위험사회'에서, 피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유동하는 공포'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우리가 이 같은 자기성찰을 얼마나 철저하게 또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을 겁니다. (799)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함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파스칼 (802)

 

니체가 선지자적 목소리로 신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이른바 "최고의 가치의 탈 가치화"가 공공연하고 철저하게 진행되었지요.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최고의 가치를 대체하고 마냥 승승장구하리라고 믿었던 세속적 가치(이성, 개인의 행복, 사회진보, 민중해방, 인본주의)들도 함께 위기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최고의 가치의 탈 가치화는 동시에 세속적 가치들의 탈 가치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불 보듯 뻔하게 드러내 보였지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따져보면 논리적 귀결이고 돌아보면 역사적 사실입니다. (804)

 

근대 이후 개발된 각종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적 지식들, 예컨대 계몽주의, 과학주의, 사회다윈주의, 자본주의, 헤겔의 변증법, 역사주의, 마르크스 주의, 정신분석학 같은 한갓 '작은 이야기'들이 진리로 정당화됨으로써 제 스스로 '큰 이야기'가 되었지요. 그리고 곧바로 보편성이라는 미명 아래 각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 문화, 예술, 정치, 경제 등 각종 다른 영역에 침범하여 주인으로 행세하며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20세기 후반부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신랄하게 고발한 이른바 근대성의 실체인데, 그것이 연출한 가장 비극적 장면을 우리는, 샤워실 안으로 가스를 주입한 아우슈비츠, 굴뚝으로 독극물을 투입한 구소련의 굴락, 여인들과 노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머리 위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확인하고 전율했지요.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개인의 심리, 성적취향, 소수자의 권익, 문화의 다양성,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일상의 중요성 등에 몰두하고 있지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라캉과 푸코가 충분히 입증했고 리오타르가 적절히 언급한 대로,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들도 부지런히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큰 이야기'가 가진 폭력성을 차단할 수 있지요. 문제는 우리가 '큰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805)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것이라며 입을 닫고 있지요. 그리고 오직 탈 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805)

 

세계는 이제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적, 사회적 재난들이 삽시에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위험사회'로 진입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지요. 그곳에서 이제 당신과 나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로서 모든 당혹스러운 일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자고로 모든 위험한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지요. 하나는 ①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② 신념입니다. 전자는 전근대적인 개념이고 후자는 근대적 개념이지요. 탈근대적 이야기 안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혹은 의사 없는 환자처럼 허둥대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공포가 유령처럼 떠돌아다닙니다. 그래요. 바우만이 이름 붙인 유동하는 공포지요. (806)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신을 불러와야 할까요? 아니면 다시 이성에 매달려야 할까요? 공인된 처방은 아직 없지만 나름의 약방문은 분분합니다. 바우만도 <모두스 비벤디>에서 대책을 마련했지요. 그는 전근대, 근대, 탈근대라는 역사적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특성을 각각 '사냥터지기', '정원사', '사냥꾼'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807)

 

내 생각에 이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요컨대 작은 이야기들도 하되, 큰 이야기도 함께 하자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큰 이야기가 동반하는 폭력성도 차단되고, 작은 이야기가 가진 맹목성도 제거되지요. 칸트의 유명한 경구를 흉내 내어 표현하자면,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809)

 

내가 이 책에서 전개한 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함께 함으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온전한 담론'이 되게 하자는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 뒤에 따르는 문제들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곧바로 예상되는 난제는 서로 상반, 대립하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한데 아우를 수 있는가, 충돌하는 가치들을 어떻게 종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 말을 바우만의 표현을 빌려 바꾸어 보면 그 난해성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세계화와 함께 시작된 지옥에서 살아남기에도 급급한 우리가 어떻게 사냥도 하면서, 정원도 가꾸고, 사냥터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810)

 

우리가 이 책에서 집요하게 천착해온 기독교의 신 개념은 애당초 상반, 대립하는 히브리 종교와 그리스 철학의 불가능한 종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이루어 낸 최초이자 최고의 종합이었지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주축으로 한 서양문명이 종합을 통해 비로소 출발을 알렸기 때문입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야겠지요. 여기서부터 희망입니다. 역사는 불행히도 가치의 파편화를 낳았고 파편화된 가치들은 인간과 세계를 위기로 몰고 있지만, 어둠이 내리면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오르지요. 고대가 저물어 갈 무렵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이 이뤄졌고, 중세가 황혼에 물들 때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도 새 길을 찾아야 할 때 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의 인문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건 새로운 종합이 될 것이며 새로운 르네상스가 될 것입니다. 알렉산더 포프의 <인간론> 가운데 다음 구절을 소개하며 마칩니다.

 

 

[철학에 대해 정리한 글귀들]

 

신플라톤주의란 플라톤 철학을 주축으로 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 철학 등을 융합해 만든 플라톤 철학의 종교적 형태라고 할 수 잇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신플라톤주의자라고 부르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들을 플라톤주의자(Platonici)라고 불렀다.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는 암모니오스 사카스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제자인 플로티노스(205~270)에 의해 확립되고 알려졌다. 신플라톤주의를 대표하는 저작은 모두 아홉 벌로 구성된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인데 플로티노스가 평생 오직 구술로만 제자들을 가르쳐 그의 제자 포르퓌리오스가 받아 적어 편찬한 것이다.(43페이지 주석)

 

[파르메니데스]

파르메니데느는 모든 형이상학적 사변의 근본적인 두 주제인 본질존재중 하나인 존재를 간파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형이상학으로 단번에 뛰어든 것입니다. 그 결과 만물의 근거를 탐구하던 아르케에 대한 물음이 자연철학에서 존재론으로 도약했지요.

 

존재비존재그리고 진리거짓을 이분법적으로 날카롭게 구분한 일, 이것이 파르메니데스가 서양철학사에 남긴 공적입니다. / 파르메니데스의 이분법적 사고는 존재론만이 아니라 인식론과 논리학의 터전을 닦은 시원적 사유였습니다.(106)

 

[플라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하고 흥미롭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계승한 플라톤은 불변하는 실체인 존재를 이데아라고 불렀고,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확장했지요. 플라톤의 주장에 의하면 개개의 사물 안에는 이데아가 들어 있습니다. 들어있음을 통해 개개의 사물들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은 물론, 있음이라는 존재를 부여 받게 되지요.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까지 얻게 됩니다. 한마디로 플라톤의 이데아는 사물에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부여하는 실체지요.(111)

 

아름다운 모든 것은 그 안에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부분적으로 들어 잇기 때문이며, 이 같은 원리가 세상의 만물에 적용된다는 뜻이지요. …플라톤에 의하며, 이데아는 사물들에 완전히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부분적으로만 들어있지요. 그래서 개개의 사물은 이데아 처럼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불변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데아론을 분여(分與)이론 이라고 부릅니다.

빨갛고 덜 빨갛고같은 사물의 사물들 사이에도 이데아가 많이 또는 적게들어 있기 때문에사물의 질적 차이가 단계적으로 생깁니다.(112)

 

그리스 철학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이 가진 이분법적 경직성과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플라톤의 분여이론이 가진 탁월함 덕분이었습니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를 계승하면서도 질적으로 다양한 현실세계와 가치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이론을 고대사회에 제공했던 것입니다.

 

플라톤의 분여이론이 서양문명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난 2500년 동안 서양문명 전반에 이것보다 더 크고 뚜렷한 족적을 남긴 철학이론은 없습니다. 이 이론은 현실세계와 가치세계를 다양한 질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자연의 사다리존재의 사다리라는 개념으로 발전해서 고대와 중세의 교회제도와 사회제도를 확립하는 데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플라톤의 분여이론이 뜻하는 것처럼, 신은 만물을 창조할 대 완전성의 정도가 높은 것부터 낮은 것까지 계층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여했지요. 그 결과 존재의 세계에는 신과 유사한 높은 존재들부터 덜 유사한 낮은 존재들까지 계층적으로 구성된 피라미드형 존재의 사다리가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통해 피조물들에 각인된 이사다리를 인식함으로써 아치 '야곱의 사다리'를 올라가듯이 존재의 사다리를 올라가 궁극적으로는 신에게 도달할 수 있었지요.

 

플라톤에 의하면 예술가들은 참된 실체로부터 최소한 두 단계 떨어진 허상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한 화가가 침대를 그렸다고 가정하면, 침대는 침대 이데아의 모사품에 불과하여 침대의 실재성이 부분적으로만 들어 있는데 이 침대를 다시 모사한 침대그림은 침대 이데아가 더욱 적게 들어 있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619 주석)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분히 신화적 요소를 갖고 있던 그 당시 유무형의 신을 떠나, 신을 부동의 운동자로 규정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부동의 운종자는 언제나 있었고 또 언제나 있을, 영원히 세계에 작용하는 '원리'로서 자기 자신과 세계을 구별할 줄도 모르며, 또한 세계 안에 있는 존재물들을 돌보지도 않지요. 이런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세계를 돌보는 일이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으로 주어졌지요. 그래서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위대한 스승 플라톤이 한 권도 쓰지 않은 윤리학 책을 세 권이나 썼습니다. '인간이성에 의한 인간구원'의 길을 닦기 시작한 것이지요. 질송은 이 정황을 적절하고도 날카롭게 평가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그리스인들은 다툴 여지도 없이 이성적 신학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상실해 버렸다. (531~532) 질송이 말한 '이성적 신학'을 학자들은 보통 자연신론이라고 합니다.

 

[플로티노스]

플로티노스가 플라톤을 따라 존재의 체계를 가치의 체계로 가르쳤기 때문이지요. 그는 일자()는 참됨, 선함, 아름다움, 생명, 예지, 능력 등 모든 가치에서 최정상이지만 거기서 유출되어 나온 존재들은 계층구조의 밑으로 갈수록 아치 빛에서 멀어질수록 어두워지듯이 점차 결핍된다고 교훈했습니다.(122)

 

플로티노스는 존재와 존재물 간의 차이와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을 계승하고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다분히 종교적 성격을 띠는 일자 형이상학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대강 이렇게 요약됩니다. 일자란 모든 존재물의 궁극적 근거이자 그 모두를 포괄하는 자이지요. 그 어떤 것에도 한정되거나 규정되지 않는 무한자로서 모든 한정되고 규정된 것들의 궁극적 근거가 되지만, 그 자신은 어떤 것에도 포괄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초월자입니다.(132)

 

플로티노스의 세계는 전체적으로 보면 일자, 정신, 영혼, 물질세계로 내려가면서 질적으로는 점점 낮아지고 불완전해지지만 양적으로는 차츰 그 양이 많아지고 종류도 다양해져서 결국 피라미드식 계층구조를 이룹니다.(140)

 

플로티노스의 세계주고에서 물질세계를 유출시킨 일자, 정신, 영혼은 영원불변하는 신적인 존재입니다. 창조와 관련해서 본다면 일자는 창조의 바탕이고, 정신은 창조의 틀이며, 영혼은 창조의 원리이지요. 그리고 그들로부터 유출된 물질은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됩니다.

 

플로티노스는 시냇가 조약돌을 줍는 소년처럼 명상 속에서 을러간 시간들을 하나씩 마음에 모았습니다. 그는 항상 마음이 '시간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시간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태양의 회전 운동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시간을 만들어 내지요. 마음이 없으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은 마음 안에 있고 마음과 하나지요. 그러므로 항상 흘러가는 것 같지만 전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시간입니다. 언제나 아직은 오지 않은 것 같지만 이미 와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지요.(618)

 

[스토아철학]

세네카(BC 4~65). 피소의 음모사건. 사건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가 적어도 공화정 말기에 일어난 카이사르 암살 사건 대 키케로가 그랬던 것처럼 음모자들의 정신적 횃불이었던 것은 분명하지요.(503)

 

스토아 철학자들이 운명에 복종할 것을 권할 때, 그들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운명을 제 스스로 따름으로써 우주의 섭리인 로고스와 합일하면 '존재론적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결국에는 신들보다 더 위대해진다는 것입니다. (504)

 

1773년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세네카의 죽음>. 죽음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을 해방시켜 신이 되게 해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지요. (506)

 

세네카는 이렇듯 섭리를 필연적인 것, 즉 운명으로 생각했는데요. 이는 스토아 철학의 전통이기도 했습니다. 섭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분개하고 불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하는 신의 뜻이지요. / "네가 동의하면 운명은 너를 인도하고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운명은 너를 강제한다."(503)

 

스토아 철학자들이 운명에 복종할 것을 권할 때, 그들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운명을 제 스스로 따름으로써 우주의 섭리인 로고스와 합일하면 '존재론적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결국에는 신들보다 더 위대해진다는 것입니다. (504)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러한 사유와 용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오직 스토아 철학적 정신만이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 정신과 오랫동안 당당하게 대립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 (파울 틸리히) 로마 제국도 기독교의 적수는 아니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기독교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한 것은 네로처럼 멋대로인 폭군도, 줄리안 같은 광신적 반동ㅈ의자도 아닌, 도리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점젆은 스토아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 이 말은 '인간의 이성(또는 도덕)에 의해 인간구원' '신의 은총에 의한 인간구원' -다시 말해 스토아 철학이 기독교를- 적어도 19세기까지 부단히 위협했다는 뜻입니다.(507)

 

세네카 섭리 사상의 근원은 플라톤 철학이지요. 플라톤이 중기의 대화편 <국가>에서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 '이데아 중의 이데아' '선의 이데아'로 규정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선한 섭리가 현세와 내세의 모든 과정을 지배한다는 낙관적 신념을 서구사회에 심어 놓았지요. 이 대문에 플라톤은 자연신학의 창시자로도 여겨지는데, 이 사상을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부동의 운동자라는 개념으로 계승해 다시 세네카에게 전해진 겁니다. 따라서 세네카가 말하는 섭리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마치 자연법칙처럼 우리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법칙일 뿐 우리의 희망과 절망 그리고 소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516)

 

세네카가 인간은 신의 섭리를 다라야 한다고 주장할 때 거기에는 신의 보살핌을 믿거나 그에게 의지한다는 뜻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아요. 인간은 오직 자기 정신 안에 들어와 있는 로고스인 이성을 믿고 도덕법칙에 의지해야 하지요. 그에게는 그것이 신에게로 다가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토아학파의 섭리와 기독교의 섭리가 -둘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여지없이 갈라서지요.(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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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7.26 15:37:39 *.163.164.177
'저자에 대해서'와 '내가 저자라면'을 업데이트하지 못했습니다.
세번째 읽기 책의 대상으로 이책을 꼽았습니다.
세번째 읽기에서 다시 정리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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