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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5일 17시 34분 등록
 

그녀는 흡사 내 먼 기억 속의 좀머 씨와 닮아 있었다. 
산등성이를 걷는 쓸쓸한 그녀의 옆모습에서, 오래된 청소도구와 잡동사니를 넣은 그녀의 남루한 장바구니에서,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가 어색한 그녀의 팍팍한 삶에서, 순간순간 나는 좀머 씨를 떠올렸다.

항상 눈만 뜨면 낡은 배낭을 메고 동네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좀머 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한결같이 좀머 씨는 걷고 또 걸었다.  현실감 없이 비쩍 마른 엉거주춤한 체형에 언제나 들고 다니던 지팡이 하나가 좀머 씨를 정의내리는 거의 모든 것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홀딱 젖은 채, 역시나 어디론가 바삐 걷고 있는 좀머 씨를 만나곤 했다.  또 학교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를 뒤따라 걸으며 그의 이상한 행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쫓아갔다. 

같은 반 여자친구의 목덜미에 하아, 하고 숨을 불어 넣던 일은 아직도 소름이 오소소 돋을 만큼 야릇하고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좀머 씨가 마을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좀머 씨를 생각했다.  한 번도 그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거나 지나치며 눈인사를 한 적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좀머 씨가 왜 사라졌는지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냥 알 것만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중얼거림과 기이한 행동들, 그리고 좀머 씨를 둘러싼 미스터리한 소문들이 희미해져 갈 즈음 나는 세라핀을 만났다.  놀랍게도 그녀는, 수년 전 좀머 씨가 걸었던 그 산등성이를, 그가 그랬던 것처럼 홀로 바람을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아무렇게나 슥슥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이 여자의 하루는 느리고 단조롭다.  밥 때에 맞춰 음식을 준비하고 더러워진 시트를 빤다.  바닥에 털퍼덕 무릎을 꿇고 왁스질을 한다.  그러다 약속된 청소시간이 끝나면 지체없이 일을 중단하고 일당을 받아 집을 나선다.  황홀할 것도 찬란할 것도 없는 일상이다.  아니, 그녀의 삶에 황홀하거나 찬란한 그 무엇이 있을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감흥없는 일상이라 해두자. 

그런 그녀가 바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일하러 간 정육점, 고기 내장에서 빠져나온 빨간 핏물을 몰래 병에 담아낸다.  성모상 앞에 놓여 진 성물의 기름을 누가 볼세라 재빨리 바구니에 담는다. 

이제 끝인가 싶더니, 어느새 세라핀은 들로 나갔다.  들풀따위 내 알바 아니라는 듯 온 팔을 휘저어 꽃을 꺾고 잎을 딴다.  발밑에 걸리는 검붉은 진흙을 작은 통에 퍼 넣는다.

무겁던 그녀의 몸이 거칠 것 없이 가볍게 움직이고, 초점없던 눈동자는 영롱한 생기마저 내뿜는다.  웃음이라곤 없던 그녀의 얼굴이 가벼운 흥분으로 묘하게 일그러진다.


나는 세라핀의 그 표정을 보았다.  입술 사이로 흥얼흥얼 흘러나오는 성가곡도 들었다.  바람을 타듯 겅중거리던 그 춤사위도 보았다.  그녀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진정 그녀의 영혼이 지어보이는 웃음이었다.


“수호천사가 어느 날 내게 그림을 그리라 했어요.”

세라핀은 수호천사의 명령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하늘이 부여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고 사명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운명과 사명 때문에 자신의 일상을 던져 버리지 않았다.  여전히 생계를 위해 빨래를 하고, 빵을 굽고, 목욕물을 데웠다.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치고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심심한 반응이었다. 

그렇게 받은 동전 몇 개로 물감과 캔버스를 산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  다시 아침이면 일어나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그림을 그린다.

세라핀은 주인집 냄비를 닦으며 중얼거린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냄비 속에서도 예수님을 만난다.” 라고. 

남루하고 버거운 일상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는, 결국 냄비 속에 있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분명 그녀는 좀머 씨와 닮아 있었다.  그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변함없이 길을 걸었던 것처럼, 그녀 역시 하늘의 계시를 받았건 아니었건 상관없이 그녀의 일상을 살아냈다.

누구에게나 냄비 속의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 
그것은 좀머 씨와 세라핀에게만 국한된 축복이 아니다. 
홀로 외로운 산등성이를 걸어라.  홀로 거센 바람을 느껴라. 

그것이 냄비 속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의무였다.  

홀로 걸어가다 갑작스레 하늘의 계시를 받게 되거든, 그래도 가던 길을 계속 가라.

익숙함 속에 숨어 있어 보지 못했던 것들, 흔들리는 들풀이라거나 고목의 거친 나무결과 같은 것들이, 저마다의 찬란한 색으로, 세월을 머금은 은은한 향기로 우리의 길을 안내할 것이다. 

  

  


IP *.47.11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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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h
2009.06.18 20:13:51 *.112.94.119
저두 세라핀을 보고나서, 너무 좋은 나머지 포스팅을 했는데요...

그녀가 걷는 모습을 보며, 좀머씨까 연상되었었답니다...
같은 생각을 하신 분을 만나 반갑네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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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9 11:41:50 *.106.151.100
네^^ 아직도 그 날의 감동이...
포스터의 사진도 정말이지 좀머씨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그리고 잊고 있던 좀머씨 책을 다시 한번 스르륵 넘겨 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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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9 15:50:33 *.71.76.251

   나도 두 번이나 봤어. 한 번은 화가가 되고 싶은 딸아이와  한 번은 이제 막 작가가 된 후배와 
  그런데 가장 역동을 받은 사람은 나, 나도 생각난 김에 포스팅 해야겠다.   
  이영화에 감동 받은 나리, 여러모로 기죽이는 청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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