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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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 Joseph Campbell & Bill Moyers (조셉캡벨과 빌 모이어스 대담) /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2011년 2월 21일 낮 12시까지 제출)-Book Review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1 페이지)
조셉캠벨은 흔히들 비교신화학자 혹은 신화종교학자라고 부릅니다. 신화를 연구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아마도 조셉캠벨이 이렇게 신화하면 바로 연상되는 위치에 이르게된 것은 그가 지금으로 말하자면 훌륭한 Story Teller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20세기 세계 최고의 신화 해설자라고 불리는 조셉 캡벨은 일단은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고, 다양성에 열려있는 사람이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의 종교에 갇혀있거나 혹은 자신 안에 신념이 너무나도 강했다면 아마도 이런 멋지고 상상력 넘치는 학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테니까요. 전통적인 카톨릭 집안에서 자라난 사람같지 않게 매우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 였던 것 같습니다. 사람은 유유상종이라고 하는데 그 주변의 친구들이나 와이프를 볼 때에도 그러한 점들은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침 그의 일생에 대한 기록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 원명 Joseph Campbell/ 1904년 3월 26일 뉴욕 출생 양자리/ 1925년 콜럼비아 대학교 졸업/ 1927년 콜럼비아 대학교 영문학 석사과정 수료/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교수로 재직/ 1949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발표/ 1959~1967년 <신의 가면> 1~4 권 집필/ 1987년 10월 31일 호놀룰루에서 사망 (출처: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3&dirId=307&docId=215236&qb=7KGw7IWJIOy6oOuyq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Tcbodoi5TGssb8iY30sss--100090&sid=TWHGfp2dYU0AAEb8yJ4)) 늘 한 사람의 일생을 요약 정리해 놓은 것을 볼 때면 생각 하는 거지만, 이렇게 누군가에 대한 기록 및 일생의 정리가 몇 줄 안되는구나 그리고 이런 것으로 그 사람에 대해서 다 말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면 오히려 그 사람이 남긴 말이나 글을 통해서 더 가까이 알 수 있지 않은가 늘 생각해오곤 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책 이외에 아래 참조 링크를 참조해 주시고, 기타 이 분의 책들에 대해서도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이 신화의 힘을 통해서 만났던 조셈 캡벨은 학자이다가보니 책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많은 말들을 남긴 것 같습니다. 그가 남겼던 이야기 중에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는 말이 유독 가슴에 남습니다. 이 말에서는 마치 붓다와 노장 사상이 녹아 있는 듯 싶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Follow your bliss’라고 얘기한 것을 통해서는 마치 삶의 코치이자 학자보다는 수도사에 가까운 기분도 들었습니다. 살아 계셨다면 빌 모이어스에 이어서 한 번 대담을 해보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평소 제가 생각하던 바와 매우 흡사한 생각을 하시던 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신화를 매개체로 삶에 대해서 접근하고 사람들의 내적인 길에 대해 얘기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열려 있던 분이 아닌가 총체적으로 평가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 많은 지역의 신화들을 하나로 묶으면서 한 인간의 인생 속에서의 신화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20세기에 있어서 가장 큰 획을 그어진 학자가 아니었나 감히 평가해 봅니다.
[그 외 참고했던 내용]
1. Joseph Campbell -To find your own way is to follow your bless.
http://www.youtube.com/watch?v=1xplGaNWSoU
2. Joseph Campbell from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Campbell
3. Joseph
Campbell Book & Interview
http://en.wikipedia.org/wiki/The_Hero's_Journey_(book)
4. Joseph Campbell Image (http://www.searcs-web.com/camp.html)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책을 읽다 마음에 들어 온 ‘인용문’을 인용 페이지와 함께 발췌하여 적을 것 (A4 10페이지 이상)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p.25)’ 이 문구를 보는데 첫 페이지부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전 삶의 의미를 찾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였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 이 책의 제목만 보고는 그리스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어렵게 학술적으로 풀어놓은걸까? 그렇다면 그런 책을 왜 첫번째 과제의 책으로 선정했을까 궁금했었습니다. 그런데 첫 페이지부터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건네고 있으니, 저의 관심도는 급속도로 빠져 들었답니다. 매우 서양적일 수 있고 카톨릭 골수적일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난 학자가 이토록 동양적이고 또 불교적이기도 한 많은 면모를 보게되었던 첫 번째 한 구절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실제로 이 문구를 보고나서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본 이후 늘 Carpe Diem을 가슴에 담고 살았던 것처럼 실제로 삶의 정수를 경험하고자 가슴에 늘 담아두고 꺼내어 보곤 했습니다.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모이어스: 제대로 된 상대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것입니까?)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p.31)’ 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습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에 아마도 이 말이 너무나 믿고 싶고 또 강하게 가슴에 스쳐지나간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아.. 이거다, 하고 오는게 있다는 그 말을 한 때 포기할까도 싶었는데, 인류의 뿌리로부터도 그러한 이야기가 원형화되어 있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하니 다시금 솔메이트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p34)’ 그리고 이어서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된다면 지금도 이 세계를 위협하고 있지 않느냐고 질문을 던집니다. 최근의 경우 이집트 사태만을 보아도 아주 극명한 예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무바라크를 볼 때에 영적 수련이 아주 많이 필요해 보입니다. 뭐 사실은 그 먼 이집트까지 가지 않더라도 영적 수련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지만 말입니다. 대부분의 국가는 사실 여전히 사람이 사회를 섬기는 구조가 아닌가 생각해보게되고 그래서 구조의 해체 즉 삶의 공동체로서의 전향을 통해 사람을 섬기는 사회를 재건하는데 일조하려는 움직임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신화를 통해서 얘기 안되는 것이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p.35)’ 의식과 의례의 부재가 가져오는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인간의 성장이 또 다른 단계의 성장으로 제대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잘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의식과 의례들이 변질되거나 생략되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사회를 비신화화한 세계라고 이야기할 법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신화를 다시금 재조명하고 그 안에서 삶의 정수를 뽑아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들었으나 여전히 철부지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많은 경우도 보게되는데 이 경우도 사실 이러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의식과 의례를 거치지 못한 퇴행이 가져온 사회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신화를 통해 우리 삶의 얼개를 배울 수 있다고하며 문학과 예술뿐만 아니라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등도 상당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이 기억이 남습니다.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p.41)’ 철부지 어른들이나 성장해가는 아이들에게 이제 신화를 건네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Mythodology Teller라는 직업이 생겨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습니다만, 신문을 한번 보세요. 엉망진창입니다. 신화는, 바로 지금 이 시각에 우리가 사는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줍니다. 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시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p.45)’ 얼마전 제가 매일 쓰고 있는 모닝페이지에서 바로 이 부분을 다룬 적이 있는데 그 때 본보기가 되는 삶이 주제였다면 캠벨은 여기서 시대성까지 담아내고 있습니다. 신화는 고리타분하고 먼 옛날 얘기 심지어 허구적인 이야기로서 치부되기 쉬운데, 이 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 맞는 본을 제공해 준다니,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요. 사실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웅이 사라지고 있는 건 아닌지요. 내면의 여행보다 자본주의의 폐해인 듯 돈에만 이끌리는 삶은 아닌지요...너무나 외부의 헛된 것에만 이끌리는 삶의 많은 모습들을 보면서 (물론 그리 살지 않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신화 읽기 모임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본보기가 되는 삶으로서의 삶을 살아내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명상이라는 게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p.47)’ 명상이라는 것 또한 요즘 저의 화두라서 그랬을까요 이 문장 또한 가슴에 와서 박힙니다. 삶이 곧 명상이라고 명쾌하게 말해주는 캠벨은 거의 득도한 노승의 경지같습니다. 영적인 의식이 부재한 많은 경우 관심사에는 한계가 있고 또 그 영적 의식 나눔에 한계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 또한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무나 이기적이 되어가고 사람에 대한 가치 평가가 외부적인 것으로 치중되어가는 요즘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조용히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깊은 곳에서부터 오는 울림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계속 실천할 수 있는 확신을 심어주는 한 마디였던 것 같습니다.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p.48)’ 대개의 경우 이렇게 대담의 구절 구절마다 주옥 같은 문구를 보기는 어려운데 이 분의 책은 책 한권을 다 외워버려서 그것이 삶에 녹아들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합니다. 개인적인 꿈과 신화는 어떻게 다른가를 이야기하면서 한 인간도 신화화될 수 있음을 영화 배우들을 예시로 이야기해줍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삶의 본이 된다. 영웅이 된다. 롤모델이 된다. 전설이 된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신화의 역할을 개인이 이루어내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겠지요. 저 또한 그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은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스타워즈>에서 보는 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 똑 같은 질문입니다. 기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우리에게 어떤 수단이든지 다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생의 과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말끔하게 정의해줄 듯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p.55)’ 이 책이 1988년의 PBS 대담을 엮어서 만든 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 때 보다 더 기계화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이 구절에 더 많은 의미를 담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싶습니다. 스마트폰 없이는 이제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들,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지금 열심히 글을 쓰는 지금도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이제 컴퓨터가 없는 사회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사회에서 컴퓨터를 넘어 인간성을 이야기하기에는 많은 것들이 역부족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ㄷ을 해봅니다. 예전에 터미네이터라는 영화를 볼 때에 그래도 영화겠지..라고 생각을 했었다면 지금 와서 돌아보는 인간성의 중요성은 정말 그런 세상이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겠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러한 상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근데 신화에서는 결국 구원이란 기계가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이라는 것을 파우스트를 통해 시사하고 있습니다. 불가에서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있다는 말과 겹쳐지는 순간입니다.
‘소년은 새에게 먹이를 주자고 아버지를 조르지요. 아버지는 새 따위에게는 먹이를 줄 수 없다면서 새를 죽여버리고요. 이 전설은 그 사내는 새를 죽이고, 새를 죽임으로써 새의 노래를 죽이고, 노래를 죽임으로써 제 자신을 죽인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로써 그 사내는 죽는 것이지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죽는 것이지요.(p.59)’ 우리는 환경의 일부인데 그것을 지배하려고 들었고, 그래서 슬픈 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자연만이 아니고 자기 본성도 함께 파괴를 하고 자신의 노래를 죽이니 이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지요.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p.59)’ 라며 새의 노래로 설법을 대신하는 선사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렇게 신화를 사전적 의미를 뛰어 넘어서 삶에 적용할 수 있고 또 의미를 가져올 수 있도록 쉽고도 명쾌하게 전달해 주는 한 마디 한 마디에서 그의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저는 특히나 많은 구절에서 불교를 느끼게 되는데 그도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p.61)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하면, 만유신론이라고 매도합니다. 하지만 이 만유 ‘신론’이라는 말은 사람을 오도하는 말입니다. 만유신론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로지 인신만 이 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이라는 관념은 그게 아닙니다. 이 관념의 진정한 의미는 초’신화적’입니다. 이것은 정의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신학,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p.76)’ 저는 이러한 생각을 늘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자연과의 조화나 환경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신비체험이나 신비학에 관심이 많았기에 받아들이는데 문제가 없었으나, 기독교 신자들은 이 책을 어떻게 있었을지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대목들이 많았습니다. 인류의 원형이 신화에 담겨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아마도 캠벨이 비교 종교학에도 관심을 두었구나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다른 종교도 알아야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아울러 이야기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달에서 지구를 보면 국경 같은 게 안 보이잖아요? 이것은 미래 신화를 위한 대단히 중요한 상징 같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나라가 이러한 나라이고, 우리가 한 계레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인 것이지요.(p.78)’ 이 얼마나 많은 것을 내포하는 한 마디인지요. 이제 더 이상 한 민족에 갇혀서도 한 가족안에 갇혀서도 안되는 시대가 왔습니다. 사실 예전부터 그리 살았어야 하지만 이 시대에는 세상이 더욱 글로벌화 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국경없는 사회에 대한 조명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싸움도 네것 내것을 나누기 위해 있는 것 아닐런지요, 요즘 WWF에서 진행하는 지구촌 불끄기 캠페인에도 적극 동참하고 황사 방지를 위한 나무심기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도 지구인으로 사는 사람으로서의 자세를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한국인으로서 갇혀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 지구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칫 이러한 점을 놓칠때에 우리는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공멸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달에서 지구를 볼 때에는 국경이라는 것이 없는 아름다운 초록별이라고 하는 이 말이 눈물나게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애틀 추장의 이야기는 공간이 협소해서 이곳에 쓰지는 않았습니다만 늘 가슴에 담고 살고 싶은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어떤 신화에든 여기에 관련된 똑 같은 문제가 등장합니다(p.85)’ ‘참으로 놀라운일이지요? 이게 왜 놀라운 것이냐 하면, 우리와,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사상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 방면의 학문에서는 ‘미스터리움 트레멘둠 에 파스키난스(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라고합니다.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적인 신비, 내적인 삶, 영원한 삶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경우, 그 생각을 확장시켜줄 이미지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관념 체계에서 제시된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p.85)’ 제가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려고 했던 것도 어쩌면 이렇게 다양한 인간의 고뇌가 다양한 장르에서 나타나고 그것이 세계 어느 나라의 문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캠벨이 신화에 주목하고 다른 여러 나라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아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라 이를 만한 공통된 신비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로 연결될 수 있고 내적인 삶에 보다 더 가까워져야 하는 이유가 이것인 것이지요. 오래전 삶이 답답할 때에 지리산 자락까지 노스님을 찾아갔었는데 ‘답은 네 자신안에 있다’라고 한 말씀 해주신 것이 못내 원통했는데 어쩌면 이 내면으로 영적인 삶으로 들어가보면 그 답이 제가 갈구하고 있는 그 답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캠벨은 신화를 통해서 했던 것 같습니다. 시대마다 다르고 나라마다 다르고 종교마다 다르지만 결국 같은 그 하나. 바로 거기에 신비적 존재가 있는 것이겠지요.
‘의식의 수준에는 자신을, 대극을 초월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도 있으니까요.’‘이름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그것은 모든 이름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p.101)’ 특히 불교의 선문답이나 노장 사상의 도덕경을 보면 나오는 이야기로 저는 보다 친숙합니다만, 결국 신비로운 것은 말해질 수 없고 말해질 수 없는 가운데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려면 현실의 대극 관계를 넘어서 의식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필요하고 계속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제가 좋아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궁극적인 떠남, 최고의 떠남은 하느님을 위한 하느님으로부터의 떠남, 모든 관념을 초월하는 경험을 위해 하느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고하는 인용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실 현실의 이원화된 의식 차원을 끌어 올리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한 대극을 통해서 더 쉽게 표상을 이해하게 되고 그래야 말이 되는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비언어적인 언어로 더 많은 것들이 소통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면 어쩌면 한 차원 더 높이 의식의 수준이 높아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이 세상에 흘러들어온 영원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자기’가 , “내가 있다”고 진술한 직후에 공포를 느낀다는 신화가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으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일단 ‘나’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 ‘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 ‘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요, 한 쌍의 대극이 비롯됨입니다.(p.106)’ 수도사의 경우 음양이 자신 안에서 하나된다고 하는데 바로 대극을 사라지게하고 일원화시키는 작업이 아닐런지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라고 하는 선가의 ‘자타불이’ 말씀이 여기서 생각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내가 있기에 네가 있고 하지만 결국은 이 ‘나’라고 하는 것도 사라지는 바로 그 지점에 대해서 끊임없이 불교에서는 이야기하는데 신화에서도 그러한 인류의 원형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p.106)’ 또 유사성에 대해서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p.107)’ 금제에 불복하여 결국 삶이라는 것을 얻게 되었는데 이 또한 인간이라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 경험이라고 풀이합니다. 같은 내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니 당연히 인간은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마땅한 결론인 것 같습니다. 다른 모습,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을지라도 공통된 무의식을 나누고 있다는 것 이것은 매우 놀라운 경험이자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이게 중국의<<도덕경>>에도 나옵니다. 이렇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p.114)’ 전 도덕경을 참 좋아해서 여러 번 보았는데 결국 남는 것은 위의 내용이였습니다. 이것은 숭산스님을 비롯한 많은 선사들이 선문답으로 알려주셨던 내용과도 많이 흡사합니다. ‘오직 모를뿐’이라고 말씀하셨던 숭산큰스님께서는 그 깨달음의 깊이가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그 신비를 언어의 틀에 그물에 한정 짓는 다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우매한 이들을 위해 가르침을 전하고자 언어의 힘을 빌리겠지만 결국 깨닫는 순간은 글씨나 말을 통해서가 아닌 삶의 체험 그리고 신비 체험을 통해서 저절로 ‘오직 모를 뿐’이라는 경지로 들어가는 것 아닐까 합니다. 바닷물의 짠 맛에 대한 설명은 마치 그 바닷물을 먹어보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진정성이 전해지게 말해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마셔봐야.. 살아봐야.. 바다의 맛이 어떤지 삶의 정수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것이겠지요.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 일을 낙관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p.133)’ 실제로 캠벨을 마주했다고해도 아마 이렇게 담담하게 삶에 대해 이야기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석가의 말씀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드네요. 그 아래 석가의 말씀을 인용하기도 했지만요.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인생은 어찌보면 시련의 연속이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희망과 행복을 찾아나가는 것이 또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거창하게 무언가 큰 변혁을 꿈꾼다고 태어나고 죽는 것이 달라지지 않겠지만 결국은 이대로 굉장하다는 것 삶의 신비를 매 순간 느끼면서 사는 것이 멋진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캠벨도 삶의 의미를 찾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는데 석가도 독화살의 이야기에 비유하면서 이것이 어떤 화살이고 어떻게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느라 제대로 삶의 정수를 느끼지도 못한채 죽음을 맞이하지 말고 직접 삶을 만끽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넘어서는 영원을 이야기합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 직관에서 끊임없이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명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에는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p.139)’
‘죽음은 최종적인 해방입니다(p.142)’ 사실 많은 이들이 삶의 영원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라 일상에서는 죽음을 잊고 살고 어쩌면 자각은 하나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살아야 제대로 된 죽음을 맞이하듯이 이 죽음에 대한 고찰이 깊어져야 제대로된 해방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겠죠. ‘나이를 먹어갈 때 생기는 심리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죽음의 문을 한사코 거부해요. 그러나 육체는 의식의 수레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의식의 수레인 육신이 낡은 자동차처럼 부서져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범퍼가 내려앉고, 다음에는 타이어... 그런 식으로 하나 하나씩 내려앉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예측이 가능해요. 이렇게 하나씩 무너져가다 보면 이윽고 의식이 의식과 다시 만나는 대목이 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더 이상은 살아 있는 상황이 아니지요. (p.143)’ 죽음에 대해서 신화를 통해 보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육체는 일종의 매개체일 뿐 우리가 궁극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지점은 의식 너머에 있다는 것을 신화속에서도 알 수 있다니 내가 얼마나 신화에 대해서 무지했었던가를 느끼게 해주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사실 죽음을 말하기 싫어하지만 삶의 요체를 알기 위해서 죽음은 필수 불가결한 주제인 것 같습니다. 티벳트 사자의 서를 읽으면서 죽음에 대해서 성찰해 보고 또 죽음 경험해보기란 템플 스테이 행사를 통해 관 속에 들어가보는 체험을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죽음의 그 깊이와 두려움을 느껴보았는데 그것마저도 넘어서야 한다니, 신화 속에서 나타났던 많은 죽음들에 대해서 다시금 깊이 있게 보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망아의 잠재 능력이 있어요.(p.171)’ 불가의 제법무아라는 말이 문득 연상이 되는 문장입니다. 샤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춤을 이야기하면서 망아의 잠재 능력을 언급했는데, 사실 자신안에 갇히면 신과의 소통이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나를 넘어선 그 곳에서 신비함이 오는 것인데 그것은 기독교의 중세 몽상가 정도의 재생체험과는 다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어서 블랙 엘크의 이야기를 말하며 ‘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내가 본 환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성스럽게 바라본 세계의 모습이다(p.173)’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이 함께 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 말로 신화 체험인 것입니다.’ 모든 선이 만나는 곳에는 빛나는 한 점이 있다고 한 인디언 소년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립니다. 저도 늘 예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이였는데 역사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은 빛이 아니라 전쟁과 투쟁에 대한 것이였기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었던 기억이 납니다. 일시적 체험 속에서 영원을 본다는 것은 마치 블레이크의 시가 연상이 됩니다. 한 송이 꽃이였던가 한 줌의 모래였던가요 그 안에서 영원을 본다고 했던 그의 말이 마치 깨달은 선사의 선문답처럼 뇌리에 스칩니다.
‘천복을 쫓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쫓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p.177)’ 아마도 Follow your bliss를 우리말로 천복을 따르라고 해석한 것 같습니다. 많은 코칭 서적이나 기타 가르침에서 수도 없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삶을 살아라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정작 현실은 너무도 보잘 것 없고 자신이 하고픈대로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많은 이들에게 이러한 말은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신화는 조금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라는 것 전생도 아니고 후생도 기약할 수 없고 지금 이 순간만이 온전히 천복이라는 것이 신화를 통해서도 이야기되어질 수 있나 봅니다. 자신의 삶을 한탄만하고 지금이 아닌 다른 것을 갈망하는 사이에 삶은 너무나도 빠르게 사라지고 어느 덧 천복이라는 것도 맛보지 못한채 생을 끝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캠벨은 삶의 의미를 찾느라 허비하지 말고 자신안에서 나오는 그 천복을 쫓으라고 이야기 한 것은 아닐런지요.
‘샤르트르 대성당에 가면 성당의 영적인 원리가 사회의 삶을 버티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p.185)’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잡아줍니다.(p.187)’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샤르트르 대성당에 가 보았는데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경건한 무언가 신비로운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가기 전에 캠벨을 만났었더라면 보다 더 샤르트를 이해하는데 내가 보지 못하고 돌아온 것들을 놓치고 온 것을 다 느끼고 보고 오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도 느끼게 했던 구절입니다. 지금은 일상에서 이러한 종교적인 의례나 날마다 접하는 의례에서는 조금 멀어졌지만 (물론 여전히 그러한 경건함 속에서 삶을 사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가능하면 매일 아침의 명상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이러한 삶의 구조를 대신해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집을 샤르트르 대성당 삼아서 눈을 감고 다시 내면으로 향해 봅니다.
‘가치, 즉 평가의 결과는 삶을 지배하는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령, 사냥꾼의 의식은 늘 외계의 동물에게로 쏠립니다. 그의 삶은 동물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래서 사냥꾼의 신화는 외계 지향적입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씨가 죽고, 여기에서 새 식물이 움트는, 말하자면 식물의 경작과 깊은 관계가 있는 농경 신화는 내계 지향적입니다. 사냥꾼에게는 동물이 신화를 촉발합니다. 권능과 지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숲으로 들어가 금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동물이 나타나 권능과 지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농경 문화에서는 식물의 세계 자체가 스승 노릇을 합니다. 식물의 세계는 생멸의 반복이라는 의미에서 사람의 삶과 동일시됩니다. 그래서 내계 지향적 관계가 이루어지지요.(p.194~195)’ 이 전에서는 들소 이야기를 하면 인간과의 공생 관계를 이야기했다면 여기서는 동물 사냥에서 식물 경작으로의 이동에서 보이는 신화적 상상력 변화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생명체로서의 식물을 이야기하면서 죽음이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월든을 쓴 쏘로우의 삶이 연상되면서 가끔은 그래서 숲이 나를 부른 것이였던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한 죽음을 맛보기 위해서 말이지요.
‘자기네가 사람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삽니다. 그런데 이들 중 하나가 금제를 어깁니다. 그러자 큰물이 밀어닥칩니다.그러자 이들은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게 되지요. 이들은 밧줄을 타고 올라, 이들 세계의 천정에 뚫려 있는 구멍을 빠져나갑니다. 빠져나가고 보니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리더라지요.(p.199)’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도 이와 같은 구조인데 죄악시되는 여자가 아닌 삶의 모태로서의 여성으로 그려지는 다른 신화들이 많음에 놀랍고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을 마치 입증해주는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너는 가슴으로 사는 사람, 인간성을 섬기는 사람이겠느냐,
아니면 '음험한 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이겠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물론 가슴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하지요. 생명이 있는 곳은 가슴이니까요. 벤
케노비가, "포스가 너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말할 때 그가 말하는 '포스'는 프로그램된 정치적 힘이 아니라, 우리 생명의 힘, 생명의 에너지인 겁니다.(p.266)' 사실 책 장이 하나하나 넘겨질 수록 저는 이 신화는 결국 인간을 알기 위해서 다시 내 안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확신과 캠벨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역사의 힘과 인간의 원형을 신화로부터 이끌어내어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내면의 힘과 영적인 힘 진정으로 사람되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늘
예전부터 생각해오고 고민해오던 이야기들이라서 저는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고 아마도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스타워즈는 얘기만 많이 들었었지 이렇게 심오한 철학이 숨겨져 있는지는 이 책을 통해 알게되었습니다. 책을 덮고나서는 책 속에서 인용되었던 영화나 책들을 다시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짜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p.271~272)'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p.272)' 자신안의 괴물이 하루에도 수십번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데 이럴때에는 자신의 천복을 따르라고 이야기해줍니다.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p.273)' 아.. 얼마나 가슴을 파고드는 말인지요. 눈물이 다 날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사람들은 이야기하지만 저는 분명히 있을거라고 그리고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갇혀 있는 느낌을 받았던 나로서는 이러한 말에서 정말 큰 힘을 얻게 됩니다. 사실 자유롭고 싶다고 늘 얘기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속박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 허탈함 그리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밧줄로 묶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그것을 풀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알고보면 힘들어하는 인간들을 위해서 여러곳에 암시적으로 표시를 해두었는데 스스로에 갇혀서 보지 못하고 있는 무지 몽매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내 안을 잘 살피어서 그러한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쫓으면 되는' 겁니다.(p.286~287)'
쉽고도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사실 많으 성인들이나 책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현실을
무시한 것은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거꾸로 해봤느냐라고 자신에게
묻고 싶어졌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세상을 향해 도전해 보았는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철저하게 노력해
보았는가라고 말입니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서 나오는데 세상이 생각하는 그러한 눈으로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오산이라고 말이지요. 주어지는 것이 아니면 이미 주어진 자신의
천복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던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사실 신화에서도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장애물에 대해 언급할 뿐이지요. 너무나 불교적인 해석인 것 같습니다.
팔정도.. 바른 길로 가는 8가지 말이지요.
'우리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 몸, 우리 육체의 형상과 이
만물을 짓는 에너지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아내어야 한다는 겁니다. 에너지가 없는 몸은 살아
있을 수가 없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
몸에서 나오는 삶이고, 무엇이 에너지와 의식에서 나오는 삶인가를 느끼고 있지 않아요?(p.311)' 맞습니다. 본래면목이라는 불교 용어가 또 오버랩됩니다. 그 근원 방랑의 끝에서 다시 돌아오게될 바로 그곳 말입니다. 너무나도
오래 방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순간 멈춰 깨달으면 바로 그 곳에서 생명의 에너지는 넘실거리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가끔은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천장을 보면,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지고 그 많은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왔나 싶을때가 있습니다. 그 근원을
못 본척하고 사실은 허상을 쫓아서 헤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가하고 말이지요. 누군가 저에게 대지의 어머니
같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땅이 만물을 재생시키고 우리 말에도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듯이 품어주는
어머니 같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신화상에서는 무척이나 좋은 의미더군요. 앞으로도 그러한 모습은 더욱 가꾸어 나가고 싶습니다. 마치 그것이
저의 근원은 아닐까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하구요.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p.339)'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p.373)' 아직 미혼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유독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들은 더 마음에 쏙쏙 와닿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인생이 슬프기에 사랑도 종국에 슬프다는 그 말이 가슴에 맺혀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사랑의 힘은 대단한 것이겠죠.
제가 고른 마지막 구절은 '아름다움은, '살아 있음'의 환희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순간 순간의 삶이 그런 체험의 연속이어야 합니다.(p.410)'으로 하고 싶습니다. 결국 태어나면 살아야하고 이왕 살려면 자신의 천복을 따라서 환희 속에 살아야 하지 않겠나..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신화속에서 읽어내 지혜롭게 이 고된 삶을 환희로 승화시켜야 하는 것은 결국 각자의 몫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책장을 덮을 때 즈음 왜 구본형 선생님이 책을 첫 번째 과제의 책으로 선정했는지 그 선정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3. ‘내가 저자라면’ – 자신이 이 책의 저자가 되어 이 책의 전체적 뼈대를 논하고,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그리고 보완점을 평설할 것 (1페이지)
전체적으로 이 책은 대담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책보다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처럼 책이 잘 읽혔던 것 같습니다. 요즘 이철수씨와 시골의사 박경철씨의 강연 콘서트처럼 말이지요. 혼자서 독백을 하는 것보다 어떤 때에는 더 생동감이 있고 또 나의 질문을 대신해서 던져주는 대담자가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래서 요즘에 저도 이러한 대담 형식의 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빌 모이어스처럼 캠벨과의 대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멋진 대화를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상당히 많은 책들이 이렇게 대담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토록 재미있게 바로 옆에서 보듯이 진행되는 책들은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조화와 균형이 맞았던 것은 빌 모이어스가 그 만큼 캠벨의 해설을 지속해서 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큰 강점이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대담의 형식을 빌어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정리는 조금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인상적으로 보았던 장절은 신화와 현대세계 첫 챕터인데, 사실 이 챕터를 들어가기 전에 빌 모이어스의 서문도 너무나 잘 읽었기 때문에 그 문을 부드럽게 열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전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신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먼나라 이야기 게다가 허구적인 이야기로 시간 남을 때 봐야지하는 책으로 어렵게만 여겨졌던 분야거든요. 그런데 첫 챕터에서 바로 제가 갈망하고 갈구하던 질문들에 명쾌하게 신화를 통해서 답변을 해나가는 것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책의 경우 첫 시작에서 흥미를 끌지 못하면 그 뒤로 잘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도 있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는 향후에도 첫 챕터는 특히나 심도있게 고민해서 집필할 생각입니다.
다만, 전체적으로 많은 주제에 대해서 다양한 신화를 끌어오게 되니까 신화끼리의 관계 즉 비교 신화학 적인 측면이 조금은 미약하게 느껴지는 점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약간 복잡하게 느껴지는 점도 없지 않아 있구요. 책의 마지막 정도에 인용된 신화에 대한 정리라던가 인용에 대한 처리를 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 것 같습니다. 신화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안내가 대담 위주로 가다보니 조금 줄어들었던 것이라서 크게 단점이라고 할 것은 못되지만 말이죠.
구성은 잘 되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앞 쪽에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될 때에 오히려 함께 사랑과 결혼 이야기를 더 이끌어 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책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않지만 같은 테마가 혼재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조금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향후 책을 구성할 시에 이런 점을 바탕으로 고민을 해 본다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책의 재구성에 대해서는 보다 심도 있는 고민이 수반되어야 할 것 같아서 이 정도로 갈무리합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조금씩 더 나아지는 모습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기 연구원인 홍승완이라고 해요.
인용문 정리하실 때, 인용문 그 자체로 10p 이상을 정리하시는 게 기본 룰이에요.
인용문 10p은 기본 분량이고,
인용문 중에서 10곳 정도에 본인 생각을 잘 정리하시면 가산점이 부여될 거에요.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혹시나 해서 말씀 드려요.
참고로 사부님의 공지사항에서 해당 부분을 아래에 옮겨 둡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책을 읽다 마음에 들어 온 ‘인용문’을 인용 페이지와 함께 발췌하여 적을 것
( a4 10 페이지 이상)
- 단순 발췌와 정리보다는 인용한 귀절에 대한 개인의 소감과 해석을 10군데 이상 멋지게 달아 두는 경우,
높은 득점을 얻게 될 것임